*7장 나들이
미유는 나른하게 쇼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자마자 그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연희가 두 팔을 허리에 얹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혹시 무슨일이 있나…?
라는 생각에 눈길을 돌려 달력으로 향했다.
이제는 달력 보는 법도 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일요일이라면 인간계의 휴일.
고로, 자신의 계약자인 연희가 학교를 안가는 일주일 중 유일한 날이다.
“뭐야.”
아직은 잠에서 풀리지 않은 묵묵한 목소리로 미유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나 못 참겠어요!”
“뭘? 못 참겠으면 화장실 가.”
“그게 아니라!! 아저씨가 우리집에서 활개 중인 꼴을 도무지 못 보겠다고요.
아저씨가 백수에요? 배울 거 다 배웠어요? 아저씨도 엄연히 학생이에요!
근데 하루종일 집안 여기 쇼파에 콕 박혀 가지고는 콜라나 데워먹고,
꼴랑 콜라 데워먹는데 주방을 폭격 맞은 듯이 쓰고. 티비나 보고!!
웬 종일 누워서 뒹굴뒹굴. 아저씨가 무슨 곰이에요?”
다혈질인 연희가 다다다다 말을 쏘아낸다.
하지만 미유는 그에 반해 너무 반응이 적었다.
심드렁하고 느긋하게 연희를 바라보다가 저 쪽 편에 있는 리모컨을 긴 다리를 뻗어 발가락으로 눌렀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티비가 켜졌다.
참지 못한 연희가 티비를 직접 끈다.
거기에 미유는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너 바보야? 내가 인간계 공부 다 마친 게 언젠데.
내가 그럼 할 일이 있어? 네가 날 나가게 해줬냐고.
나도 몇 주일동안 이 집안에만 박혀있는 게 얼마나 심심하고 지루한 줄 알어?
티비 보는 거? 그것도 인간계 공부야!”
연희는 할말이 없었다.
솔직히 모두 사실인 말이었다.
미유는 그 사이 다시 발가락으로 티비를 켰다.
긴 다리는 때로는 유용하다.
이미지를 상당히 깨는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조차 귀여워 보인다면 정말 연희는 진정으로 미친 것일까.
다음으로 이어지는 미유의 행동은 연희를 기절 시키고도 충분했다.
분명 리모컨은 저 쪽 편에 있다.
미유의 발가락이 겨우 닿는 거리다.
하지만 미유의 쭉 뻗은 매끈한 손가락이 리모컨을 향해 뻗고 그렇게 몇 초간 있었을까.
리모컨이 미유의 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저게 그 초능력자들만의 특권이라는 능력의 염력이라는 건가?
“아, 아저씨!! 그, 그거!!
혹시… 염력이에요? 아저씨 초능력자에요?”
티비를 보면서 웃고 있었던 미유의 표정이 싹 굳는다.
그 표정 그대로 고개를 돌려 연희를 바라본다.
연희는 순간 서늘해졌다.
“내가 마족이란 걸 잊은 건가, 계약자?
네 눈에는 내가 초능력자라는 인간으로 밖에 안 보이는 모양이군.”
“…아.”
“이건 염력이 아니라 마력이다.”
다시 티비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티비를 시청하고 있는 미유였다.
그리고 연희는 티비 내용이 궁금해져 티비쪽으로 자신도 시선을 돌렸는데…
요즘 자기 또래는 물론, 남녀노소 모두 재밌게 본다는 바로 그 화제의 드라마의 재방송이었다.
‘마, 마족도 저런 걸 보는구나….’
그렇지만 이 상태론 안 되겠어,
라고 깨달은 연희가 미유에게 긴급제안을 한다.
“저기, 아저씨!! 우리… 밖에 나갈래요?
아저씨를 우리 부모님께 소개 시키려면 그에 걸맞은 옷도 사야 되고,
아저씨가 좋아하는 콜라도 듬뿍 사고. 백화점가요, 우리. 네?”
드라마에만 한없이 빠져있는 줄만 알았던 미유의 고개가 금방 연희에게 향한다.
“나가자고? 좋아.”
“그, 근데 드라마는요?”
“어제 봤던 거야. 재밌어서 재방송도 보고 있었던 거고.”
“그럼 나가요!”
* * *
“와아… 크다.”
미유는 백화점을 보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주위의 건물들 보다 훨씬 큰 백화점.
게다가 자신이 살아왔던 작기 그지없는(미유에게만) 연희의 집보다 훨씬 컸다.
물론 예전에 살던 마왕성에 비하면 발 끝도 따라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제껏 봐왔던 인간계의 조만조만한 집들에 비해서는 큰 편이었다.
“크죠? 이 백화점, 우리 그룹 소유에요.”
자신이 해낸 일도 아닌데 매우 자랑스럽게 내뱉는 연희를 무시하고 미유는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한없이 높은 천장과 밝은 조명.
게다가 북적거리고 시끄럽기 그지없는 소리들과 어마어마한 인파.
생전 이렇게 많은 인간은 처음 본 미유였다.
이 많은 인간들이 이 공간에 있다니…
너무 크기만해서 많은 이들이 살고 있음에도 텅텅 빈 듯한 느낌이 나는 마왕성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옷부터 사죠.”
연희가 미유의 옷깃을 잡고 이끌었다.
아직까진 차마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에스컬레이터 앞에선 연희는 그대로 미유의 옷깃을 잡은 채 에스컬레이터를 타려고 했다.
하지만 얼굴이 있는 대로 하얗게 질려서는 에스컬레이터에 발도 들이지 못하는 미유 때문에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아저씨, 뭐해요.”
“…이, 이거.”
인간계의 기계 물품은 별로 접해보지 못한 미유였다.
말로만 들어왔지 에스컬레이터도 처음 봤음은 물론, 백화점도 생전 처음 봤다.
“인간보다 뛰어나다면서 이것도 못 타요?”
누가 들었으면 의아해 할 질문이었으나 사람들이 많은 관계로 그것은 미유에게 밖에 전달되지 않았다.
“…그거랑 이거랑 같냐.
나 그냥 마력으로 날아가면 안 되겠니?”
“미쳤어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들키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증거 소멸로 여기에 있는 사람을 다 죽이면 되겠지.”
“미쳤어!! 차라리 엘리베이터로 가요!”
다시 미유의 옷깃을 잡고 이끄는 연희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히 흥미로웠다.
굉장히 잘생긴 남자가 훨씬 작은 여자에게 옷깃을 잡혀 질질 끌려가는 모습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물론 미유의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라는 이유도 존재했다.
“얼른 안 와요?”
눈길을 느낀 그녀의 손길은 거칠기 짝이 없다.
*8장 지르기
여기는 엘리베이터 안.
미유의 표정이 뚱하다.
아까의 엘리베이터 사건 때문이었을까.
엘리베이터는 에스컬레이터처럼 실제로 움직이는 게 아니어서 그런지 미유는 다행이도 쉽게 탑승했다.
연희는 엘리베이터 안의 옆에 위치한 안내판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곧장 6층을 눌렀다.
남성 의류 매장이었다.
그만큼 연희는 이 곳에 자주 드나들었고,
이 곳이 ‘강호그룹’ 의 소유임은 확실해졌다.
“띵동- 6층입니다.”
낭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에 울려 퍼지고,
연희와 엘리베이터 안의 모든 시선을 담고 있었던 미유도 내렸다.
엘리베이터에 미유와 함께 탑승하고 있었던 몇몇 남녀노소들이 미유를 따라 나선다.
그 사실을 아직까지 연희와 미유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미유를 따라가는 분류는 두 분류로 나뉘었다.
한 분류는 어디 신인 연예인인가,
하고 싸인이라도 받아볼까 해서 따라 나선 것이었고
다른 분류는 미유에게 한 눈에 반하여,
다음 기회에도 또 우연적인 운명을 만들어 내기 위해 뭔가 알아낼 거리를 찾기 위해 따라 나선 것이었다.
그 분류에는 물론 남자도 끼어 있었다는 사실을 당사자는 모르고 있었다.
“아저씨. 여기서부터는 사람들 눈이 있으니까, 연기 잘 해줘요.”
연희가 미유의 귓가에 속삭인다.
미유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연희가 슬그머니 미유의 호주머니 속으로 무언가를 집어 넣는다.
미유는 그것을 꺼내 보았다.
푸른 빛깔의 반 투명한, 언뜻 보면 명함 같은 카드였다.
“이건 뭐냐.”
“카드요. 우리 ‘강호그룹’ 의 특별 회원 분들의 최고급 카드에요.
우리 그룹 소유지인 여기서는 아주 잘 통하죠.
심하면 웬만한 건 그냥 공짜로도 줘요.
뭐 여긴 어차피 우리 그룹에 빌붙어 사는 거니까,
나한테는 뭐든지 공짜로 주지만…
내가 아저씨 물건을 마구 사서 주면 아저씨가 돈 때문에 나한테 붙었다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이 카드도 다른 사람이 발급한 걸로 해 놓았으니까요.”
“너… 인간주제에 철저하구나.”
“뭐, 이 정도는 비즈니스 사업의 기본이죠.
바지 뒷 주머니에 보면 약간의 현금도 들어있어요.”
미유는 이런 연희의 모습에 마족들의 치밀함과 계획적인 모습을 확인했고,
연희를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계약자로서 뿌듯함을 느꼈다.
내 계약자는 인간이긴 하나 이렇다, 라고.
미유는 서둘러 뒷 주머니를 살폈다.
보통 돈과는 다른 것. 하얀 색깔의 종이가 미유를 반겼다.
수표였다. 거기다 0이 어마어마하게 붙어있는.
미유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간다.
그 모습을 본 연희는 갑자기 자신감이 붙어졌다.
미유의 손을 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주위 사람들은 다 들을 수 있게.
“그럼, 마음에 드는 건 뭐든지 사고, 이따가 집으로 와. 자기!!”
자기, 라는 말에 미유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미유를 슬그머니 따르던 사람들도 뇌물의 현장인가,
라며 카메라로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기라니 놀랐다.
연인 사이였던 것이었나.
미유를 마음에 두고서 따르던 사람들은 절망했고,
나머지 한 부류만 다시 미유를 쫓았다.
연희는 그 말을 끝내고 미유에게 손을 여러 번 흔든 뒤 여성 의류 매장이 있는 4층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미유는 사라진 연희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읊조렸다.
“하여튼 자기 멋대로라니까.”
어쨌든, 최고의 유희를 선사해 준다는 연희의 말은 반이 해결되었다.
최고의 유희가 꼭 돈으로만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바보가 아니면 누구나 알았지만 연희는 이제껏 모든지 돈으로 해결 했었다.
미유는 손에 들린 푸른빛의 반 투명한 카드를 이모저모 살펴보다가 바로 옆 매장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 헉.”
언제나 손님을 반갑게 반기던 여성 직원이 놀란다.
어쩜 저렇게도 잘생겼을까.
키는 적어도 185cm정도는 되는 거 같다.
몸은 약간 말랐지만 운동을 해서 살을 뺀 건지 적당하게 근육이 붙어있다.
크기만 한 눈이 아니라 약간 차분하고 냉랭한 기운을 풍기는 눈에 날카로운 눈매.
코도 날카롭기 그지없다. 입술은 약간 도톰하고 붉다.
이질적인 분위기는 이곳 사람이 아닌 듯 보인다.
남자를 꼼꼼히 살펴보던 직원은 얼굴이 저절로 새빨갛게 변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남자가 입을 연다.
“저기….”
목소리 또한 환상이다.
허스키한 중간 음이 매력이 되어 도톰한 입술에서 흘러 나온다.
직원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뒤로 감추며 말했다.
“무, 무, 무슨 이, 일로… 오, 오셔, 셨어요?”
떨리는 손은 감출 수 있어도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직원을 보며 남자는 피식- 하고 약간의 비웃음 적인 웃음을 내보인다.
그 모습 또한 환상이다.
오늘 복 터졌구나! 직원은 속으로 환호했다.
“옷 좀 사려고 하는데요.”
“어, 어떤 옷을 원하십니까, 손님?”
“편한 옷이었으면 좋겠어요. 이 옷처럼요.”
남자가 자기가 입고있는 옷을 가르킨다.
세상에… 저건 츄리닝이 아닌가!
완전 얼이 빠진 직원은 사명을 다하여 안내한다.
“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손님.”
미유는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겉으로야 이렇게 무뚝뚝하지만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새빨개진 채 더듬더듬 말을 잇는 직원의 모습은 그야말로 과관이었다.
직원이 안내한 곳은 겉엔 양복으로 치장했던 매장 안 깊숙이 숨겨져 있었던 캐주얼 옷들이 있는 곳이었다.
“한번 골라 보세요, 손님.
마음에 드시는 옷이 있으시면 입어 보시고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그럴게요.”
검정 개통의 색상에서부터 하얀 색상에 가까워지는 색들까지 옷들이 널려있었다.
미유는 옷을 쭉 훑어보고는 몇몇의 옷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기겁하는 직원따윈 없었다.
모두 미유의 외모에 홀려서 하는 짓은 모든지 옳아 보였으니까.
그렇게 얼마정도 지났을까,
한 50벌 가량의 옷들이 바닥에 쌓인 거 같다.
한 직원이 다가가서 더듬더듬 묻는다.
“이, 이렇게나 많이 사시려구요?”
바닥에 널려있는 옷들을 가르키며 직원이 물었다.
미유는 씩 웃고는 말했다.
“아니요. 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 빼고 다 사게요.”
“네…?!”
직원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씨익 웃는 미유의 모습이 소름 끼치게도 아름다웠지만 지금 이 상황은 대면하기가 힘들었다.
동료들에게 SOS신호를 보내보지만 동료들의 시선은 냉랭하기 짝이 없다.
오는 사람 붙잡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
그것이 그날 그 매장의 신조가 되었다.
*9장 새로운 운명
그 많은 옷들을 10개가 넘는 커다란 쇼핑 백에 최대한 부피를 줄여서 넣어 주는데도 몇 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 많은 옷을 계산 하는데도 물론 시간이 오래 걸렸음은 당연했다.
게다가 이 ‘강호 백화점’ 은 명품중의 명품만 취급하는 곳이 아니던가.
분명히 가격이 백 만 대를 넘어갈 것은 물론이요 천 만대를 넘어갈 것도 불 보듯 뻔했다.
“처, 천 팔백만원 되겠습니다. 손님.”
미유는 뒷 호주머니에서 0이 몇 개나 붙어있는 수표와 함께 반 투명한 카드를 내밀었다.
그 카드를 보는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이것은 그 전설의 ‘강호그룹’ 의 보호 아래 있다는 증거 중 하나인 특별회원의 카드가 아니던가.
‘강호그룹’ 이 이 나라의 경제를 이만큼이나 올려준 것에 제 1공신이라고 해도 누가 뭐라 할 자가 없을 정도 였으니까.
이 백화점 또한 보호 아래 있으려면 이 특별회원께 잘 보여야 했다.
“오, 오백만원 되겠습니다. 손님.”
가격은 절반 이상이 사라져 있었다.
그만큼 이 카드의 위력은 대단했다.
물론 소유지인 곳에 한해서지만 오늘 이 매장은 엄청난 큰 손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은 슬퍼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 이 잃은 돈 만큼 ‘강호그룹’ 에서 보호는 물론,
이 매장의 앞으로 더 창창한 앞길을 내달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도 좋았다.
미유도 이 카드의 위력을 잘 몰랐기에 흠칫하고 놀랐다.
이렇게나 위험하고 대단한 카드였구나, 라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미유는 수표 한 장을 남겨두고 그 많은 쇼핑 백을 가볍게 들고 살짝 고개를 까딱인 채 연희와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어떻게 저 많은 쇼핑 백을 저렇게나 가볍게 들 수 있을까.
저 사람의 손길은 나비도 따라가지 못할 거야….’
직원이 얼굴이 황홀감에 젖는다.
하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떠나가는 미유에게 소리친다.
“소, 손님!! 거스름 돈…!
액수가 너무 많아서 그런데 다음에 한번 더 들려주시겠습니까?
이만큼 큰 돈은 아직 저희 매장에 없거든요. 손님!!
사신 옷 배달도 가능합니다!”
계산하기 전에는 배달이니 뭐니 그런 말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방금 그 카드로 인해 직원의 행동이 눈에 띄게 바뀌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습니다. 물론 배달도 마찬가지구요.
앞으로 처신 똑바로 하시지요.”
앞으로 처신 똑바로 하시지요,
라는 말에 화사했던 얼굴이 바로 바뀌었다.
이젠 틀렸다…! 라는 생각에 잿빛의 약간 흙빛으로 변한 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특별회원은 그런 대단함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이 백화점 안에 있는 모든 매장을 관찰했다.
예절이 좋지 않음은 물론 불친절, 바가지 등등…
을 잡아내는 것이 특별회원의 또 다른 활동이었다.
언제 체크 당할지 몰라 조심조심 하기를 하루이틀 한 게 아니건만.
일찌감치 배달 해준다고 했어야 했나,
아니면 너무 그를 빤히 바라본 것이 잘못인가.
미유의 뒤쪽 너머의 직원의 얼굴은 하얗기만 하다.
쇼핑 백을 든 미유는 짜증으로 가득 찼다.
별로 무겁지는 않았지만 쇼핑 백끼리 서로 얽히고 설켜서 자신의 팔에 휭휭-
하고 감기는 느낌은 정말 짜증나기 그지 없었다.
결국 미유는 백화점 안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칸막이 안에 들어간 미유가 변기 뚜껑을 내리고 변기 위에 그 많은 쇼핑 백을 애써 다 쌓아 놓았다.
미유가 손을 든다.
인간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미유의 눈에는 뚜렷하게 보였다.
아직도 숙달이 덜 되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보라빛 섬광들.
지그재그 모양으로 한번 비튼 그 보라빛 섬광은 승천하는 용과 닮았다.
섬광은 쇼핑 백 주위를 감돌더니 쇼핑 백 전체를 감싸 안았다.
쇼핑 백 주위로 원이 형성 되었다.
그 원은 서서히 줄어들더니 쇼핑 백과 함께 사라진다.
변기 뚜껑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휴….”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칸막이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 미유에게 갑자기 떠오른 인간예절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화장실을 들어갔다 나올 때는 손을 꼭 씻기였다.
세면대로 다가가 비누로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씻고는
차가운 물에 손을 헹구고는 물기를 말리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아마 연희가 기다릴 거다.
그런데 그런 미유의 어깨를 누군가가 거칠게 잡아 챘다.
순간적으로 놀라 생명의 위협을 느낀 미유의 몸에서 엄청난 보라빛의 마력 층이 형성 되었다.
아마 인간이면 이정도면 죽었을 터인데 어깨의 손은 여전하다.
아니, 더 꽉 잡혀져 버린 듯 하다.
굳어버린 얼굴로 고개를 서서히 돌려 뒤를 바라본 미유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한다.
기뻐하는 얼굴도, 그렇다고 슬퍼하는 얼굴도,
절망하는 얼굴은 더더욱 아니었다.
“당신은…?”
당신, 이라고 불린 사람은 미유보다 훨씬 작은 꼬마였다.
인간의 나이로 치자면 중학생 정도로 되었을까.
마냥 여린 선에 화사하기만 한 소년의 얼굴이 싱긋 웃는다.
여자라면 얼굴을 붉히며 귀여운 녀석이구나,
라는 말을 선사하기 마련이겠지만 정체를 알고있던 미유의 얼굴엔 딱딱함이 고조된다.
“안녕, 미유님. 오랜만.”
‘님’ 자는 꼬박 붙이면서 반말을 쓰는 이 소년은 마계의 자신보다 한수 위인,
마왕의 오른팔. 하신이라고 불리는 마족이었다.
외모만으로 나이를 측정하면 안되지만 하신은 확실히 어렸다.
미유보다 천 살 정도나 어렸으나 오른팔이었다.
아마 전대 마왕의 ‘서자’ 라고 들었다.
즉 전대 마왕의 ‘첩의 자식’ 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 ‘첩’ 이 마력은 고사하고 굉장히 연약한(?) 몸이라
마력도 굉장히 옅었고 정통 마왕은 마력이 가장 강한 여 마족이
어머니여야 했기에 마왕의 후계자는 커녕 마왕엔 오르지 못했다.
물론 그때 당시 너무 어렸던 이유도 있었기는 하지만.
현재 마왕과 엄청난 나이 차이를 자랑하는 만큼 하신은 전대 마왕의 늦둥이었다.
“하신님. 오랜만이군요.
이 지저분한 곳까지는 어인 일로…?”
“미유님을 걱정했어.”
문제는 늦둥이인 만큼 오만함이 하늘을 찌를 뿐만 아니라 마왕을 제외하면
자신보다 나이가 많던 말던 행동은 아주 아랫것을 대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왕 뺨치게. 마왕도 아니면서,
라고는 하지만 전대 마왕의 후손이라 그 어마어마한 핏줄이 숨어 있을지도 몰라 따로 터치는 하지 않고 있었다.
“감사하네요. 그럼 이만.”
또다시 거칠게 어깨를 붙들렸다.
손톱을 기른 건지 어깨가 따갑기만 하다.
“가지마.”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떠도는 소문으론…! 미유님의 첫 계약자가 인간이라고 하던데 사실이야?”
“사실입니다.”
“미쳤어!!”
“…그럼 이만.”
“마계로 돌아와. 어서!”
“마왕님이 시키신 일입니다.
제 일이지 하신님의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흥. 그 늙은이 꼰대 따위…
형으로도 느껴지지 않는 늙은이의 말을 듣는단 말이야?
앞으로 그 늙은이는 더욱 쇠약해져서 곧 반란이 일어나거나
반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꼴까닥- 하고 세상 하직 하겠지.
미유님은 지금 고 늙은이가 죽을 때까지 여기 있겠다는 거야?”
“어쨌거나 명령은, 명령이니까요.”
“그런 악독 명령도 들어야 하나?
그럼 그 마왕이 죽으라면 죽을 거야?”
“인간계에는 이런 속담도 있지요.”
“뭐…?”
“악법도 법이다. 인간계에서 유명한 학자였던…
소크라테스가 한 말입니다.”
하신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어깨를 잡은 손의 힘이 더욱 거세진다.
어린아이라고는 하나 마력은 둘째 가라면 서러운 처지인 자다.
“아주 인간이 다 되었군, 인간이 다 되었어.
마왕 그 꼰대가 참으로 좋아하겠군.
난 미유님의 망가진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당장 돌아와!
이건 나의 명령이야!”
정말인지, 제 멋대로이기만 한 하신의 모습을 보면서
한번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던 미유의 모습에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한편으론 하신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속으로는 마왕이나 하신이나 다 지겹다는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미유였다.
*10장 끈질김
“뭘 모르시는군요. 당신은 마왕도 아닙니다.
어디서 마왕의 위를 넘보려 드는 것인지요.”
“…마왕은 늙었어. 반란 한 번 제대로만 치루게 된다면 당장 끝이겠지.”
“당신은 똑똑합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지요.”
쉽게 흥분을 하지 않는 차분한 미유의 목소리가 하신을 달랜다.
하지만 하신은 막무가내다.
“알고는 있어. 하지만 내겐 힘이 있지. 힘이면 되. 뭐든지.”
“그래 봤자, 늙으면 당신도 같은 꼴이 됩니다.
혈통 계승도 여기선 힘 못지않게 꽤나 중요하게 친다는 걸요.
당신이 소멸하면 모두들 당신을 욕 할 것입니다.”
“혈통이라… 내가 전대 마왕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는 사실은 모르는 게로군.
게다가 전대 마왕들의 흔적을 쫓으면 심지어 반마족도 있어.
그럼 그들은 혈통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건가?
하지만 반마족인 마왕도 욕은커녕 칭송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더군.
내 눈이 잘못이라도 된 거야?”
“반마족 마왕님의 경우는 예외 입니다.
그 분은 훌륭하셨다는 것을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계의 기초를 세우신 분인데, 안 그렇습니까?”
“아주 마신과 동등하게 신처럼 대우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지!
그 분의 이름은 함부로 입에 담을 수도 없다는 거 말이지?
나도 그렇게 잘 할 수 있단 말이야!!
내게 권력만 있었다면 금방 반란을 주도 하였을 터인데!
그 분은 운이 좋았어. 따르는 자가 많았거든. 하지만 난 뭐지?
따르는 자는커녕, 아무것도 없어!”
“자업자득이지요. 그럼 이만.”
“가지마!! 난 네가 필요해!”
“뭐에 말입니까. 반란에요?”
“그래!! 너라면… 적어도 권력은 아니더라도 따르는 자가 모일 테니까.”
“여성 분들을 끌어 들이시는 겁니까, 지금?”
그랬다. 하신은 미유를 미끼로 삼아 여 마족들의 세력을 끌어 드리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버린 미유의 얼굴은 미세하게 구겨졌다.
엔간하면 이런 꼬맹이 앞에서는 자신의 속내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 꼬맹이는 매우 당돌하지만 그래도 어린 아이니까.
“…그렇지만. 넌 내 동경의 대상이야.
네가 있으면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
“마왕님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저 따위 뭐라도 됩니까.”
“미유님은 여자한테도 미움 받지 않아.
그 까다로운 마왕도 미유를 싫어하지는 않잖아? 게다가…
넌 누구보다도 멋지다구… 마족들의 반 이상이 너를 동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어.
넌 실제로 관심이 없지만 말이야!”
처음 들어보는 말에 미유는 머리속이 복잡했다.
미유만 보면 욕을 하던 마족들이 생각났다.
늘 여자와 어쩔 수 없게(본인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늘 붙어있게 된
미유를 틈만 나면 씹어대던 마족들이 떠올랐다.
늘 자신이 가는 길엔 엄청난 째림의 눈길에 시달렸고
자신에게 말도 제대로 거는 이는 마왕을 빼고 거의 모두였다,
라고 단번에 확신할 수 있던 미유였다.
물론 여성들은 제외하자.
용기있는 여성들은 말이다.
“거짓말.”
혼란스러운 눈길로 하신을 바라본다.
소심하기 그지없던 미유는 늘 그 눈길에 악몽을 꾸어왔다.
일부러 여성들을 피해보기도 했지만 그건 오히려 여성들에게 까지
씹히는 꼴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미유는 그냥 현실을 직면하기로 했었다.
인간계에 이렇게 오게 된 거도 다 자신을 씹던 마족들이 험담을
늘어 놓아서 마왕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이렇게 보내게 된 거라 생각하며
애써 자신을 달래 왔었다.
그런데 뭐가 어쩌고 저째.
미유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다! 질투였어. 미유님이 워낙 잘났잖아?
미유님 주위엔 항상 여성들이 넘쳐나고,
그렇다고 해서 미유님이 딱히 정해놓은 반려도 없고.
다들 미유님이 부럽다고 했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단 말이야.
겉으로는 씹어도 속에서는 다들 부러워 죽겠다고 생각 했었다구.”
“…말도 안돼. 그럼 내가 그 하루에 몇 백 통씩 받던 협박 편지들은 도대체 뭐냐고!!”
협박 편지들. 미유는 항상 그 편지들에 시달려 왔다.
마력으로 봉해져 있어서 만지면 엄청난 충격이 오는 것이 오던가 하면
편지지 자체가 마력이라서 자신을 암살(?) 까지 하려던 편지까지 있었다.
모든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었다.
누구누구에게서 떨어져라.
누구누구는 내 여자다, 뭐 대충 이런.
“다 시샘에, 솔직히 남자들이 누굴 동경해서 러브레터라도 쓰리?
남자가 존심이 있지! 괜히 그랬던 거야.”
“말도 안돼! 그건 완전 생명 위험에 협박이었다구!”
“솔직히 그럼 물어보자. 그 편지에 아무리 많은 협박이 적혀 있어도,
그 협박이 실제로 실현된 적이 있었어?”
그건 없었다. 맨 처음에는 그냥 편지에만 그렇게 써도 역시
마왕의 왼팔에게 도전하는 건 무모한 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겠지,
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상당히 둔했던 그는 그런 것에 무감각 해져서 협박도 심드렁하게 받아드렸던 것이다.
“어, 없었습니다.”
말도 안돼, 속으로 절규하는 미유는 더듬더듬 말했다.
“거 봐, 미유님이 그렇게 모든 일에 심드렁하니까 다들 미유님에게
그런 심한 말이나 협박이라도 해서 미유님에게 각인을 받아보자,
라는 생각으로 쓴 것들이란 말이야. 일종의 러브레터였어.
뭐, 제일 처음 시작한 건 나였고 말이야.
확실히 처음에는 반응이 좋았는데, 그렇지?”
미유는 첫 러브레터(?)를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디서 구했는지 마계 숲속 깊숙이 산다는 뱀 종류의 괴물의 꼬리가 편지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력이 주입되어 살아 있었고.
꼬리는 파닥파닥 거리면서 자신에게 들러 붙었었다.
그것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고…
무려 한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것을 몸에 붙이고 살았었다.
그것은 그때까지도 죽지않아 꼬물거리며 몸 속을 배회 했었던 것이었다.
결국 잠도 한달 동안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미유의 표정이 있는 대로 다 드러난다.
다행이 다른 마족들은 그렇게까지 심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 중 다행이었다.
“그, 그게… 하신님이 보내셨던 것이었습니까?”
“응. 어때, 귀여웠지? 내 애완 동물이었는데… 좀 아깝긴 했어.
꼬리가 잘린 후엔 늘 시무룩 했거든.
그래도 결국에 떨어진 꼬리를 마력으로 붙여줬더니 평소처럼 활발해 지더라.
보고싶어? 여기로 소환할 수 있는데.”
“아, 아뇨!! 절대… 괜찮습니다.”
“그래? 아쉽다. 하여튼… 마왕이 내린 이번 결정에 많은 이들이 반발했어.
자신들이 동경했던 이가 인간계로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으니까.
그건 유희가 아니라 유배 수준이었다구. 미유님도 그건 알았잖아.
억울하지 않았어? 모두들 속으로 이를 갈고 있기는 하지만 상대가 마왕이라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어. 나만 이러고 있는 거고…
반란에 실패한 자들은 다 죽는다는 걸 다들 아니까…
미유님만 나서 준다면 모두 움직여 줄 거야.”
“싫습니다.”
“…하. 배신 당한 느낌이네.
모두들 내가 가면 미유님이 되돌아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를 배신할 작정이야?”
“언제 ‘우리’ 가 된 거죠?
저는 당신들과 손을 잡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 계약 중입니다. 계약이 끝나게 되면… 돌아 가겠습니다.”
“역시 무관심 한 건 여전하구나. 뭐, 그런 점이 미유님의 매력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놈의 계약이 언제 끝나는데?”
“적어도 100년 안에….”
“100년? 지금 장난해? 우리는 하루 빨리 미유님을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야.
게다가 100년이면 마왕이 돌아와도 좋다고 한 날이잖아?
우리는 겨우 100년이라도 미유님을 이 구질구질한 인간계에 두고싶지 않아서 내가 온 거라고.
오른팔인 내가 그렇게 할일 없어 보여? 어리다고 지금 무시하는 거야?”
어깨가 쓰리고 있다.
흘깃 눈길을 돌려 본 어깨에는 이미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신이 흥분한 나머지 마력층이 형성된 모양이었다.
말단 신경이라고는 해도 마력은 인간에 치면 모세 혈관과 같이
온 몸에 퍼져 형성되어 있는 힘이니까.
하신의 손톱 끝에서 마력이 흘러 나온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50년… 50년만 기다리세요.”
“50년? 아니. 우린 10년도 못 내줘.
우리 모두 빨리 마왕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야.
솔직히 현대 마왕이 한 짓이 뭐가 있어?
불필요한 마왕은 시간소비야. 빨리 없애버리고 유능한 자가 올라야 해.”
“마왕의 자손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 녀석은 아직 어려. 그 녀석이 자라기 전까지야.
그러니까 시간이 촉박한 거라고!”
“그래도 싫습니다.”
미유는 하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의 눈에는 야망이 서려있군요. 거짓따윈… 그럼 이만.”
미유의 몸에서 엄청난 마력이 퍼져 나온다.
순간적인 거라서 놀라서 하신은 손을 떼었다.
그 틈에 미유는 사라졌다.
하신은 그 작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당신의 눈에는 야망이 서려있군요. 거짓따윈….’
어떻게 알았을까, 도대체. 내 얼굴엔 표정따윈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진실을 간파하는 눈이다.
게다가 거짓이라고? 이게 거짓으로 보여?
‘내가 널 동경하는 건… 사실이란 말이다.’
*11장 상처
미유는 단숨에 마력을 사용해서 집으로 도착했다.
사정없이 벨을 누르고 평소엔 화려하고 아름답던 벨이
여러 번 누름으로 인하여 음이 끊기고 엉키며 괴상스러운 소음을 만들어 냈다.
집 안으로 들어갈 걸 그랬나, 라곤 했지만 온 몸에 힘이 없다.
너무 급박한 상황이라서 갑작스럽게 마력을 끌어내어서 그랬던 걸까.
몸에 이상이 온 듯 하다.
게다가 하신의 마력이 계속 주입되고 있었으니…
마력이 섞이고 섞여서 이미 자신의 마력은 거의 고갈되고 있었을 것이었다.
상대편 마족의 마력이 아까처럼 서서히 주입되는 것은 마계에서 마족에게만 쓰인다는 고문방법의 일종이다.
상대방 마족의 마력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마력과 맞부딫쳐 자신의 마력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상대방 마족의 마력이 아주 조금이라고 해도 스며드는 만큼 자신의 마력이 고갈나는 것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하신에게 붙들려 있었으니.
대문이 열리고 대문에 기대고 있었던 미유가 힘없이 쓰러진다.
게다가 여긴 인간계다.
제대로 적응도 되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힘이 빠지는 건 당연하다.
연희가 집 안에서 달려 나온다.
“아저씨!! 왜 이래요. 네?”
연희가 미유를 흔든다.
그러다 어깨쪽에 흥건한 출혈을 보고는 놀란다.
이 피들은 다 뭘까.
게다가 이 축- 하고 늘어진 몸은.
인간은 도저히 이렇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만든 상대는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연희의 머리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 작은 몸으로 미유를 부축하려니 너무 힘이든다.
평소에 궂은 일 하나도 안하고 산 부잣집 공주님에게는 이건 완전히 고문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자이기에 연희는 힘을 내서 미유를 부축할 수 밖에 없었다.
말로는 부축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론 미유가 키가 훨씬 커서 다리가 질질 끌리는 상황이었다.
애써 대문을 닫고 집 안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왜 이렇게 마당이 넓은거야!’
괜히 화를 내어 본다. 이미 땀은 흥건하다.
미유의 어깨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던 피들은 끝없이 쏟아져 옷을 적시고 심지어 연희의 등판까지 적시고 있었다.
마족의 상처는 마력으로 회복된다.
그런데 그런 마력이 거의 고갈 날 지경이었고 현재 미유의 상처는
계속 하신의 마력을 주입 받고 있었던 곳이니까 자신의 마력이 어깨로 모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과 다른 몸 구조 덕분에 지혈은 거의 불가능 했다.
마력이 회복되지 않는 이상.
마족도 피를 많이 흘리면 죽는다.
이런 식으로 고문을 당해왔던 마족들도 다들 과다출혈로 죽었었다.
미유는 오싹해졌다.
과연 하신이 자신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기는 하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아닐거야. 동경은 무슨.’
맞다면 자신을 이렇게 죽이려고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괜히 혼란스러운 말을 늘어놓아 미유가 혼란스럽게 한 후에 이런 식으로 죽이려 했을 것이다.
믿는 게 아니었어, 라며 후회가 밀려오지만 이제는 소용이 없다.
그 사이 연희는 겨우 집 안으로 당도했다.
방 안으로 들어갈 힘도 남아있지 않아 쇼파에 애써 내려놓는다.
연희가 옮긴 길은 미유의 핏방울이 길게 떨어져 있었다.
“아… 어떻하면 좋아.”
연희가 당황한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명품인 옷을 생각해 이 옷이 얼마짜린 줄 아냐면서 잔뜩 화를 냈었을 것이다.
연희는 구급상자를 꺼내 왔다.
하지만 약을 바르기 전에 먼저 문제가 있었다.
“아저씨.”
“왜에….”
힘이 없는 미유의 말을 듣자 부끄럼을 탈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물씬 깨달으며 연희는 당당하게 말했다.
“벗어요.”
몽롱한 정신 속에서 번쩍, 하고 정신을 들게 해준 말이었다.
“버, 벗으라고?”
“네. 벗어요. 당장.”
“내, 내가… 무슨… 벗으라면… 벗겠어요… 라면서 벗어 줄 거 같냐…?”
“이상한 상상하지 마요! 상처 말이에요!!”
연희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아픈 와중에서도 미유는 연희를 놀린다.
“네가 더 상상하는 거 같다. 인간계 약이 내 몸에 들으려나…?”
“사, 상상 안해요! 지금 그게 문제에요? 어떻해…
계속 피가 흘러. 빨리 안 벗어요?”
“벗으라면… 벗겠사와요. 아잉. 그렇게 지긋이 보면… 윽.”
퍽- 미유가 한대 맞고 만다.
평소면 인간주제에, 라며 배로 때려주고도 남았겠지만 지금은 이 약한 자극에도 머리가 울린다.
연희의 얼굴이 발갛다. 정말 평소와 다르다.
방금 그 애교스러운 말투라니…
가끔은 다쳐와도 상관이 없겠다,
라며 속으로 실실 웃는 연희였다.
미유의 반나체가 드러나고, 연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 미유가 그걸 보고 하는 말이 있었으니….
“변태.”
퍽퍽- 강렬한 타작음이 집안에서 울린다.
미유는 기절을 하고 말았다. 이런 개 쪽이!!
그래도 아까까지는 걱정해 주는 연희가 기특해서 정말 고마웠는데…
이렇게 처참하게 맞다니.
무슨 연약하다고(?) 자칭한 여자아이의 손이 이렇게 매워?
마족의 존심 문제다.
속으로 욕을 열심히 씨부리지만 아득해져만 오는 정신은 자신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고 결국엔 기절을 했다.
마족이 인간의 손에 맞아 기절을 하다니…
아무리 다친 몸이라지만…
미유의 조상들이 그것을 들으면 아주 통곡을 하고 지하에서 벌떡 일어나
기절한 미유를 밟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헉… 어, 어떻해. 아저씨! 아저씨이? 일어나 봐요!!”
기절한 자는 말이 없다.
“약하게 때린 건데….”
그나저나, 눈 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때리는 사이 피가 더 샜나 보다.
연고를 꼼꼼히 발랐다.
상처에 연고를 바르던 연희가 놀란다.
상처는 매우 작다. 검지의 굵기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깊이는 엄청나다.
상처 속까지 연고를 바르려고 살짝 검지를 집어넣었는데 검지가 끝까지 들어가는 것이었다.
징그럽기 짝이 없다.
너무 놀라 순식간에 뺀 연희의 검지는 피로 붉어져 있었다.
그 빼는 도중에 기절한 미유가 ‘윽.’ 하고 소리를 한번 더 냈지만 거기에 움찔할 연희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속까지 연고를 바르기는 했다.
계속 새 나오는 깊은 상처 속에 그냥 연고를 채워 넣었다.
아주 엽기스러운 행각이었으나 그것을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
마무리로 붕대도 꼼꼼히 감아주었다.
그리고 연희는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로 간 연희는 또 기겁을 한다.
변기뚜껑 위에 웬 쇼핑 백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아까 미유가 마력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연희는 모르는 것이었다.
쇼핑 백을 뒤져보던 연희는 미유의 옷이라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새 옷을 하나 꺼내 입혀 주었다.
벌써 붕대에는 피가 번진다.
“에… 출혈이 너무 심하잖아. 너무 깊숙하게 파였어.
흉터 남겠다. 119를 불러야 하나? 병원?”
하지만 그런 걸 고민 할 때가 아니었다.
미유는 마족이라는 명제가 이미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인간계의 약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 때였다.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어린 꼬마다.
어린 꼬마는 연희를 보자마자 손을 들었다.
순간 연희의 눈 앞에 별이 보였다.
꼬마가 뺨을 때린 것이다.
연희는 어이가 없어서 꼬마를 바라보았다.
☆
꼬마는... 두구두구...+ ㅇ+
뭐 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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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소설
[판타지]
계약유희 ♧ 6~11장
반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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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1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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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길다ㅠ_ㅠ 난 어떠케쓰든지간에 다 짧은데;ㅠ_ㅠ 부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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