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사다 (유대인의 최후 항전지) : 사해 바다에서 약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의 직사각형으로 된 천연 요새이다. 지중해를 기준으로 40m 이며, 해발로는 무려 434m, 둘레가 1300m 이다. 지금은 관광객이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게 되어 있다. AD 70년 예루살렘은 로마 장군 베스페시안의 후계자인 그의 아들 타이터스 장군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야르 장군의 아들 엘르에제르 벤 야일은 960명을 데리고 이곳 맛사다로 들어와 끝까지 항전하였다. 이 마사다 저항군을 시카리(Sicari)라고 부르고 있으며, 로마군에게 대항하는 열심당원이라는 말이다. 로마의 실바 장군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마사다 점령을 시도하였지만 특수한 지형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을 포위하고 모든 보급로를 차단하였는데 그 때 포위하였던 담이 지금도 남아 있다.
* 960여명의 유대인들이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자결한 맛사다[케이블카탑승]
* 마사다
AD 73년 로마와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마사다에서 최후 항전. 로마군에게 점령당함. 1900년 마사다를 발견하여 성지로 보존.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유태인 역사 속에서 가장 극적인 에피소드 중 하나를 상징하는 곳
사해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고원에 위치하고 있는 마사다는 기원전 37년 유대의 헤롯 대왕이 지은 요새화된 궁전이다. 헤롯이 죽은 이후 로마 주둔군이 마사다를 차지했으나, 이곳은 로마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66년에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온 유태인 열심당원('시카리')의 피난처가 되었다. 73년, 유태인 반란 최후의 보루인 마사다를 점령하기 위해 로마 제10군단이 파견되었으며, 그 결과 900명 이상의 열심당원들이 죽었다. 이들은 항복을 앞두고 집단 자살을 택했던 것이다. 사해의 서쪽 해안에 위치한 마사다는 고원의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고원의 길이는 304m, 가장 넓은 곳의 너비가 608m로, 해발 고도 396m의 높이로 솟아 있다. 절벽 위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이 궁전은 사해와 유대 사막이 보이는 훌륭한 경치를 지니고 있다. 헤롯 대왕이 산꼭대기 서쪽 면에 자신의 궁전을 짓기 시작했을 때, 이곳에는 이미 기원전 100년에 지어진 건물이 있었다. 마사다는 호화로운 저택으로, 암반 북쪽 끝에는 높이가 낮아지는 세 개의 테라스가 있었고, 로마 양식의 목욕탕, 창고, 주택, 방어탑이 있는 성벽, 그리고 시나고그(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가 있었다. 헤롯의 가장 뛰어난 건축 계획은 요새에서 필요한 물을 댈 수 있도록 지은 진보적인 물 공급 체계였다. 각각의 용적이 4,000㎡인 열두 개의 저수지가 바위 속에 파여 있다. 오늘날 마사다는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다.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에서 1960년대 초에 이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행했다. 마사다 궁전은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성소이며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포되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최후의 항전지
메마른 황야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바위 산 위에서 사해(死海)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사다 유적지는 장엄하고 아름답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인데 꼭대기는 평평한 메사(mesa) 지형 위에 자리잡아 ‘천혜(天惠)의 요새’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하지만 난공불락일 것 같은 천연 요새도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 군대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곳은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유대 저항군들이 마지막까지 로마군에 항전했던 곳이다. 풍부한 물과 곡식을 갖춘 이들은 2년이 넘게 로마군의 포위공격을 견뎌냈으나, 공격용 경사로를 타고 진격해오는 로마군에 의해 요새가 함락되기 직전 집단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유대전쟁사>에 따르면 당시 자결한 유대인의 수는 967명이다. 이는 다윗이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한 뒤로 1000년 동안 이어진 이스라엘 왕국이 사라지고, 이후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세계를 떠돌게 되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을 비감하게 장식한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의 자존심이자 긍지가 되다
이런 이유로 구체적인 장소가 밝혀지지 않았던 오래 전부터 마사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이자 긍지요, 저항정신의 상징이 되었고, 20세기 중반 현장이 발굴된 뒤에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해발고도 434m인 마사다 유적지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배(船) 모양을 하고 있으며, 평균 너비 120m, 길이 620m, 둘레 1,300m이다. 기원전 2세기경 하스몬가(家)의 지배자가 이곳에 최초로 요새를 만들었고,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 기원전 35년에 개축하였다.
20세 중반에야 발굴된 마사다 유적지(아랍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곳을 ‘저주받은 땅’이라고 불렀다)에는 주로 헤롯 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로마 초기 양식으로 호화롭게 지어진 왕궁(2채)은 물론 행정청사, 목욕탕, 곡물창고, 성곽과 망루 등이 놀라울 정도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75만ℓ나 되는 물을 저장하는 물 탱크에 연결된 수로(水路)와 귀중한 파피루스 문서의 단편(斷片)도 발굴되었다.
더구나 로마군이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을 동원해 만든 공격용 경사로가 그대로 남아 있어 기록에서만 보던 로마 포위 공격의 전형적인 형태를 짐작하게 해준다.
네거브 사막
네거브사막 마사다 국립공원 콜룸바리움타워(비둘기장)
헤로데스의 야망과 최후, 마사다 요새
쿰란에서 남쪽으로 32킬로미터를 내려가면 다윗이 사울을 살려 주었다는 엔게디 국립공원(ein Gedi)을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다시 18킬로미터를 더 가면 유명한 관광지 마사다에 이르게 된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흥미롭고 또 많은 사람들이 찾는 마사다에서는 인내와 힘, 신앙과 굴복 그리고 야망과 비극적 종말의 순간을 생생히 그려 볼 수 있다. 이곳은 이스라엘 군인과 학생들의 필수 방문 코스로 선조들의 용기와 신념을 담아가곤 한다.
높은 산 위에 자리 잡은 마사다
마사다(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는 기원전 40년부터 기원전 30년 사이에 뛰어난 건축가이기도 했던 헤로데스(헤롯왕)에 의해 별장 혹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피난처로 지어졌다고 한다. 사해에서 멀지 않은 곳의 고도 410미터 산은 평지에서 솟아올라 상당한 높이이며, 정면은 깎아지른 직벽이고 정상에는 길이 600미터, 너비 320미터의 평탄한 지대가 천여 명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으니 가히 천혜의 요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은 이곳에서 몇 년이고 살 수 있도록 빗물을 받아 저장할 수 있는 물 저장탱크와 곡물창고, 병기고를 만들었으며 호화스러운 궁전을 지었지만 일생 사용할 기회는 없었다 한다.
B.C. 68년 로마에 대항한 대반란이 시작되었을 때 마사다는 열심당파가 차지했고, 결국 그들은 이 요새에서 최후를 맞는다. 72년에 로마의 장군 플라비우스 실바가 마사다를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난공불락의 요새를 어찌해 볼 도리 없이 속수무책 당하기만 했다. 로마군은 궁리 끝에 마침내 요새의 뒤쪽, 서쪽 능선의 경사로를 흙과 돌 그리고 나무로 쌓아 올려 마침내 요새와 같은 높이에 이르렀다. A.D 73년, 마사다의 꼭대기에서 저항하던 960명의 열심당은 포로가 되어 굴욕을 당하느니 자결을 선택하기로 하고 동이 트기 전에 차례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를 택한 이들의 영웅담과 최정예 로마군을 맞아 두려움 없이 맞서 싸운 무용담은 우연히 살아남은 노파와 두 여자아이의 입으로 후세에 전해졌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마사다의 전면
유적지는 기후와 지역 특성상 잘 보존되어 있으며 정교한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다. 유적지 중 으뜸은 아래 협곡을 내다볼 수 있는 세 개의 바위 테라스 위에 지어진 헤로데스의 북쪽 궁전이다. 궁전 가까운 곳에는 화려한 모자이크 바닥과 벽화로 장식된 벽들이 있는 거대한 로마 스타일의 욕실이 있으며, 이외에도 유대교 세례욕실, 저장실, 전망탑, 그리고 마사다 역사와 관련된 예배당 같은 많은 건축물과 저장실, 채색된 도자기, 동전들과 같은 공예품들을 둘러볼 수 있다. 이곳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상에서 로마군이 진을 쳤다는 곳과 흙과 돌, 나무로 돋우었다는 서쪽 경사로를 바라보면, 2천 년 전 전투의 함성, 절망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서로를 독려하는 결기 가득한 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슬픈 역사 현장, 이스라엘 비밀 요새 ‘마사다’
2000년이 지난 후 발견된 요새
마사다(MASADA)는 이스라엘의 사해를 방문했다면 꼭 한번 둘러봐야 한다는 유명 관광지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선포된 곳이지만, 동시에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비밀요새
사해 근방에 위치한 마사다는 높이 410m, 길이 600m, 너비만 320m에 이르는 산봉우리다.
기원전 37년 헤롯 대왕이 지은 요새인데 주변인들이 쉽사리 침입하지 못하도록 5.4m의 높은 성벽과 38개의 탑을 만들었다.
설계하던 당시부터 헤롯 대왕이 은신처로 여기고 만든 곳이기 때문에 몇 년간 이곳에서 살아도 지장이 없도록 물 저장 탱크와 음식저장창고, 목욕탕은 물론이고 전쟁을 대비한 병기고까지 만들어 두었다.
세월이 흘러 헤롯 대왕이 죽은 후 로마 주둔군이 이곳 마사다를 차지했으나, 로마 통치를 반대한 이스라엘 사람들 960여 명은 ‘엘리에젤 벤 야일(Eleazar Ben Yail)’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예루살람에서 도망쳐 이곳 마사다로 피난을 오게 된다.
실바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알게 된 마사다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게 모멸을 당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대 전투를 하면서 항복하느니 스스로 자해를 선택하면서 결국 전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사다에 살고 있던 960여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비참하고도 슬픈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2000년이 지난 후 발견된 요새
이렇게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이스라엘 최고의 성지이자 인기 관광지로 그 이름을 다시 날리고 있다.
1960년대 즈음 히브리 대학교에서 이 지역의 발굴 작업을 진행하다가 우연히 발견된 마사다는 궁전이라 불릴 만큼 훌륭하고도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
또한 깊은 역사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서 지난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구불구불한 황무지와 같은 곳에 우뚝 솟은 마사다는 걸어 오를 수도 있지만, 뜨거운 햇볕을 감당하기 힘들어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케이블카로 오르는데 주변의 장관을 볼 수 있어 꽤 흥미롭다.
마사다를 한 바퀴 둘러보면 과거 헤롯 대왕의 거실, 회당 자리 등을 볼 수 있어 당시의 역사와 분위기 또한 유추해볼 수 있는데, 높은 곳에 위치한 덕분에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사해와 그 주변의 풍경 또한 무척이나 아름답다.
아름답고도 이국적인 헤롯 대왕의 요새 마사다는 슬픈 역사의 현장이지만 지금은 이렇게 사해를 빛내는 관광지로 변모했다.
로마에 맞서 960명 자결, 마사다 요새 “노예로 살 수 없다” 자유와 저항의 상징
푸른 사해가 내려다보이는 마사다 요새(사진).
숨이 턱턱 막히는 섭씨 41도의 더위(9월). 살갗이 지글거리는 뙤약볕 아래에서도 편리한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대신 2000여 년 전의 구불구불한 ‘뱀길(Snake Path)’을 따라 450m 높이의 거친 돌산을 오르는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TV 프로덕션 PD인 루트 나들린은 “마사다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다녀가는 성지”라며 “아이들을 데리고 매년 찾는 이도 많다”고 말했다. 마사다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선서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에 걸맞게 마사다는 사막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500mL 물병 1800만 개 분량을 보관할 수 있었다는 물 저장고, 모자이크 바닥이 아직 선명히 남아있는 궁전 터에 대규모 목욕탕까지. 고대 유대왕국 헤롯 왕 시절부터 두려움과 경탄의 상징이었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마사다가 이스라엘인에게 특별한 이유는 옛 영광보다는 피비린내 흥건한 비극 때문이다.
마사다는 로마 제국에 대한 유대왕국의 마지막 항쟁지였다. 7년 항쟁 최후의 생존자 960명은 로마군 8000명에 포위당하자 “또다시 노예로 살 순 없다”며 집단 자결을 결심한다. 마침 이날은 유대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날이기도 했다. 유대 율법은 자살을 금지하고 있다. 추첨으로 10명을 뽑았다. 동포가 자살하지 않아도 되도록 살인을 맡아줄 이들이다. 피바다 속에 남은 최후의 10인이 다시 나머지 아홉 명을 죽여줄 한 명을 뽑았다. 자살이란 죄를 범해야만 하는 단 한 명의 희생자를.
에이탄 캠프벨 마사다 국립공원장은 “마사다의 비극을 ‘전설’이라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 이곳에서 ‘뚱뚱이’나 ‘대머리’ 등의 별명이 새겨진 당시 토기 조각들이 발견됐다”며 “그리스 도편(陶片) 투표제처럼 추첨 도구로 토기 조각을 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마사다는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삶의 장소 ”라고 했다. 마사다는 해마다 세계 곳곳에서 20만 명이 찾는 음악축제가 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막 한가운데서 넓게 펼쳐진 사해를 내려다보며 2000년 전 성터를 배경으로 오페라 공연이 펼쳐진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공연 때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
[유적지] 이스라엘 마사다, 하늘과 맞닿은 천혜의 요새
<사진제공=이스라엘관광청>
소금기를 가득 품은 사해의 바람은 해발 450m에 우뚝 솟아 오른 마사다(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를 감싼다.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이스라엘의 헤롯왕이 건설한 궁전이 있는 마사다는 유대인이 로마 실바 장군에 대항하여 성전을 치른 유명한 장소다.
2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마사다는 200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대 유적지다. 이탈리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당한 후 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의 엘리에젤 벤 야일 장군이 960여 명의 열혈 유대인을 이끌고 마지막까지 이스라엘의 자유를 위해 저항한 성스러운 곳이다.
페루의 공중 도시 마추픽추를 연상케 하는 마사다는 산 정상 위에 길이 650m, 너비 300m의 테이블 모양의 성채를 가진 철옹성이다. 마추픽추가 산비탈을 이용해 도시가 형성되었다면 이곳은 평편한 운동장처럼 드넓은 지형이 인상적인 곳이다. 무엇보다 마사다는 세계에서 유일한 죽음의 바다 사해(死海)를 동쪽으로 끼고 있고, 북서쪽은 모두 미국의 그랜드캐니언 같은 협곡이 굽이치는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서남북 어딜 가든 수직 절벽으로 이어져 있어 적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다. 그래서 1만5000이 넘는 로마 10군단이 이곳을 점령하는 데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페루의 공중 도시 마추픽추를 연상케 하는 "마사다"
자연을 주재한 신도 몰랐던 사해의 마사다에 처음 요새화를 시작한 사람은 BC 2세기 중엽 알렉산더 안네우스 황제였고, 그 뒤 BC 40년, 헤롯왕이 주변 국가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마사다를 자신의 은신처로 삼았다. 그는 5m가 넘는 성벽과 38개 탑, 교회, 궁전, 물 저장고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만들었다. 전쟁 시 자급자족하면서 적과 싸울 수 있는 모든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헤롯왕은 단 한번도 이곳에 오지 않았고 사용한 적도 없었지만 훗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무참하게 살육당 할 때 거기서 빠져 나온 유대인과 갈릴리 지방에서 온 다수의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영화 `마사다`로 세계에 알려진 이곳은 너무나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유대인들이 73년까지 저항했던 마사다는 로마군을 농락했던 철옹성이었다. 로마군이 이곳을 점령하려고 온갖 힘을 쏟아부었으나 쉽게 정복하지 못했다. 가파른 절벽을 오르면 돌과 기름 그리고 뜨거운 물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로마군은 하는 수 없이 서쪽에 흙과 나무를 이용해 경사로를 만들어 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이때 마사다에 있는 유대인들을 압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잡혀온 유대인들이 경사로를 만들게 했다.
결국 마사다 유대인들은 동족을 향해 돌팔매질을 할 수 없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엘리에젤 벤 야일 장군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로마군에게 점령돼 노예로 팔려가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함으로서 유대인의 장렬하고 용감한 저항의식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유대인 율법상 자살은 허락되지 않았다. 여러 방법을 고민한 결과 이들은 960명 중에서 10명을 뽑은 뒤 선출된 10명의 청장년 남자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죽이고, 남은 10명 중에 한 명이 9명을 죽인 뒤 마지막 한 명만이 자살을 택했다. 다음 날 아침 경사로를 통해 쳐들어 온 로마군은 저항 없는 이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식량은 3년치나 남았고, 물에는 독도 타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로마군을 무서워해서도 아니고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경사로를 쌓고 있는 동족을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꼭 마사다에 와서 옛 선현들이 남긴 교훈을 마음에 아로새긴다고 한다. 정상에 오르면 제일 먼저 북쪽에 위치한 헤롯왕의 궁전을 가게 된다. 정상에서 좁은 난간을 통해 수십 미터 내려가면 사해와 협곡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궁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탁 트인 시야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왼쪽으로는 실바 장군이 주둔하던 로마 주둔지와 협곡이 굽이쳐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눈이 부시게 푸른 사해가 자리하고 있다. 이스라엘 왕궁으로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산 정상에 마련된 헤롯왕의 궁전은 지정학적으로 완벽한 위치에 있다.
궁전을 둘러보고 나면 마사다를 본격적으로 보게 되는데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곳은 군데군데 있는 커다란 25개의 물 저장고다. 마사다에는 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는데 어떻게 이들이 수년 동안 살았는지를 알 수 있는, 유대인의 지혜를 잘 보여준다. 세월에 의해 다듬어진 돌덩이 하나하나에 유대인 지혜가 빛나고, 지나가는 바람에 이들의 영원한 자유가 느껴진다. 비록 유적지가 앙상한 폐허로 변했지만 조각에 새겨진 960명의 이름은 사해가 마르지 않는 한 영원히 마사다 하늘을 빛낼 것이다.
△가는 길=우리나라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까지는 대한항공이 주 3회(화ㆍ금ㆍ토요일) 운항한다.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까지는 40분 소요. 마사다까지는 예루살렘에서 렌터카나 현지 여행사에서 데일리 투어를 이용하면 된다.
마사다의 중요성
마사다이스라엘 민족의 최후저항지로써 산높이 해발 348미터 (서울 남산 높이와 비슷함)
AD77년 엘루살렘의 폭동 진압을 위하여 로마군단(시리아주둔한 로마제 11군단)이 폭동을 진압하자 최후항거자 들이 이 마사다 산에서 최후까지 항쟁하였음
이 산을 로마가 공략하기힘들자 이 산앞에 같은 높이의 토성(산)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공략하였다 산에 올라가니 최후까지 저항하던 사람들은 전원자살로 그 마사다 전투가 종지부찍고 이 전투이후 유대땅에 이스라엘 민족은 뿔뿔리 흐터졌다
1947년 이스라엘 재건국때 까지 세계각지에 흐트저살았다
이 산 전투는 이스라엘 민족사에 중요한 최초의 로마제국에 항거한 기록으로서
그 역사적 민족사적 의의가 높은 지명이다.
이스라엘 비극의 요새, 마사다
사해 근처의 마사다 요새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지워지지 않는 자유와 존엄의 상징입니다. 마사다의 높이는 해발 40미터밖에 안 되지만, 그 아래 펼쳐진 사해가 해수면보다 400미터 낮기 때문에 현장에서 보이는 요새의 높이는 440미터 정도. 아주 가파르고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요새라더군요. 그리고 헤롯왕이 마사다는 여름별장으로 개축하기도 해서 로마풍의 화려한 궁전이 지어져 있답니다. 마사다에서 벌어진 미극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함락된 뒤 유대인들은 마사다에 집결하여 최후의 항전을 벌였습니다. 마사다를 포위한 것은 로마의 10군단, 그들은 성벽 주변에 8개의 진지를 구축하고 노예를 동원하여 인공능선을 만들어 치밀하게 공성전을 폈습니다.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채 식량도 물도 다 떨어져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3년을 용케 버텼지만 더이상 버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최후의 날 하루 전날, 도와줄 이도 없고 탈출할 방법도 없게 된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마지막 연설을 합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입니다. 새벽이 오면 우리는 저들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로우므로 부끄럽지 않게 죽을 기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치욕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지 않도록 아내와 자식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우리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입니다. 자!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라는 이름의 수의(壽衣)를 입읍시다!" 몇몇 마음 약한 사람들은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벤 야이르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부끄럽지도 않소? 우리가 여기 모여 로마군에 맞선 뒤로 그들은 죄없는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소. 다마스쿠스에서는 18,000명이 처자식과 함께 목이 잘렸고,이집트에서는 6만 명이 살해되었소. 우리는 험준한 요새와 넉넉한 식량을 가지고도 이 싸움에 졌습니다. 지금 로마군은 우리를 살려주겠다고 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성경을 찢으며 승리를 노래하고 싶어합니다. 성을 불질러 로마군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마시오. 그러나 식량창고 한두 군데는 남깁시다. 우리가 먹을 것이 떨어져 죽었다고 보여서는 안 됩니다. 자, 다들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을 적의 손으로부터 구하시오." 이렇게 결의한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차례로 가족들을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모여 열 사람씩 조를 짜서는 제비뽑기를 통해 한 사람이 아홉 명을 죽이는 방식으로 죽음의 의식을 반복해서 치렀습니다. 최후의 한 사람은 전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성에다 불을 지른 후 자결하였습니다. 다음날, 성에 진격한 로마군은 타다 남은 재 속에 놓여 있는 960여 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하도에 숨어 있던 두 명의 여인, 그러니까 일곱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함으로써 마사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독일의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에 의해 마사다가 발굴되었을 당시 요새 내부에는 그때까지도 목이 잘린 시체와 여자의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각군 사관학교 생도들은 임관 전에 반드시 마사다를 찾아와서 그들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킨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사해(死海) 해안에 있는 배 모양의 구릉(丘陵)을 이용한 천연성새(天然城塞). ‘사해문서(死海文書)’가 발견된 쿰란 남쪽 51km 지점에 있다. 하스몬가(家)의 지배자에 의하여 축조되고 BC 35년에 유다의 헤로데 대왕이 개축하였다. 후에 로마군 주둔지로 사용되었으나, 66∼73년 제1차 유다전쟁의 최종기에 E.벤 야이르가 거느린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960명의 열심당원이 이 요새를 거점으로 로마군에 저항하면서 민족적 항쟁을 계속하였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도 저항을 계속하다가 로마군에게 항복하지 않고 전원 집단자살하였다.
1963년 이래 Y.야딘의 지도로 헤브루대학 ·예루살렘 발굴협회 등이 협력하여 산마루에 있는 헤로데왕의 부성(浮城) ·행정청사(行政廳舍) ·욕장 ·저수지 등과 더불어 귀중한 파피루스 문서의 단편(斷片)도 발굴하였다.
사해(死海) 남동해안 부근에 있는 거대한 메사(mesa:꼭대기는 평평하고 주위는 벼랑인 지형) 맨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다. 배처럼 생긴 이 산은 높이가 사해 해면으로부터 434m이고, 정상의 면적은 7만㎡ 가량 된다. 어떤 학자들에 따르면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제1성전(솔로몬 성전, BC 900경) 때부터라고 하지만, 이곳이 유명하게 된 이유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대 헤로데 대왕(BC 37~4 재위)의 궁전과 요새들 그리고 AD 72~73년에 유대인들이 로마군의 공격에 맞서 저항한 사건 때문이다.
맨 처음 이곳을 요새로 만든 사람은 하스모니아 왕조의 알렉산더 얀나이우스(BC 103~76 재위)이지만, 그후 마사다를 건설한 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헤로데였다. 그가 남긴 건축물들 가운데는 화려한 궁전 2채(1채는 3층건물), 두터운 성곽, 약 75만ℓ나 되는 물을 저장하는 물 탱크들에 연결된 수로(水路)들이 있다. 이곳은 BC 4년 헤로데가 죽은 뒤 로마군이 차지했으나, AD 66년 로마의 지배를 완강히 반대하던 유대교 분파 '열심당'(Zealots:혁명당이라고도 함)이 기습공격으로 점거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도 무너진(AD 70) 뒤, 팔레스타인에 마지막으로 남은 유대인 자치집단인 마사다 수비대는 항복을 거부하여 로마군 제10군단(일명 Fretensis)에게 포위당했다.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1,000명도 채 못되는 수비대는 1만 5,000명이 넘는 로마군을 맞아 거의 2년을 버텼으나, 로마군은 요새로 올라가는 경사로를 만들어 마침내 수비대의 나무방벽들을 불태우고 요새를 함락했다. '열심당원'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요새에 들어간 로마 군인들은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수비대원들이 이미 자살해버린 사실을 발견하고(AD 73. 4. 15), 수로에 숨어 살아남은 부녀자와 어린이 7명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뿐이다. 마사다는 2세기에 유대인들이 잠시 탈환한 일이 있고 5~6세기에는 비잔틴 교회당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그뒤 십자군들이 잠시 차지한 시기를 제외하면 20세기까지 방치되어 아랍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앗사바'(저주받은 곳)라고 했다.
1955~56년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이 유적지 전체를 조사했고, 1963~65년에는 이가엘 야딘이 세계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정상 전지역에 대한 발굴작업을 벌였다. 이 작업으로 말미암아 그때까지 마사다 역사에 관한 유일한 세부자료였던 로마-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들이 아주 정확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왕궁, 창고, 방어 시설물, 로마군 막사, 공격 시설물 등 그가 묘사해놓은 내용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곳에서 발굴한 회당과 의식용(儀式用) 목욕통은 팔레스타인에서 이제까지 발견된 가장 초기의 건조물이다. 많은 관심을 끈 발굴물들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 사람 이름이 새겨진 질그릇 조각들로, 마지막 남은 수비대원들이 먼저 죽을 사람을 정하기 위해서 마련한 제비뽑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20세기에 마사다는 유대민족의 용기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스라엘 청년단체들은 이 가파른 산을 오르는 연례행사를 갖는다. 오늘날에는 이스라엘에서 손꼽히는 관광지가 되어 이스라엘 국내 항공사 아르키아가 마사다에서 가까운 사해평원의 작은 공항까지 정기운항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