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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갈라 5,18-25
복 음 : 루카 11,42-46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은총이자 숙제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완전한 선인도 완전한 악인도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은총의 삶을 성령 따라, 삶의 이정표인 그리스도를 따라 숙제에 충실할 때
본래의 내가, 성인이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게 우리의 진정한 희망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 잘 설명해 줍니다.
육의 행실도 인간에 속한 것이고, 성령의 열매도 인간에 속한 것입니다.
전자가 인간의 어둔 측면이라면 후자는 인간의 밝은 측면입니다.
이처럼 빛과 어둠의 양면으로 이뤄져 있는 인간입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들입니다.
삶의 이정표 따라, 성령 따라 살지 않을 때 자초한 불행이요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결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반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말만 들어도 마음이 밝아집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바리사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삶의 이정표 따라, 성령 따라 살지 않으면 저절로 육의 행실이 뒤따르고,
삶의 이정표 따라, 성령 따라 살면 저절로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과연 나의 삶은 육의 행실과 성령의 열매 어느 쪽에 기울고 있는지요.
십일조는 잘 바치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소홀히 하는, 분별의 지혜가 부족한 바리사이들,
또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자기중심적인 바리사이들은 육에 속한 자들임이 분명합니다.
바로 주님은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삶의 이정표인 그리스도를 따라, 성령 따라 살 때 성령의 열매요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주님의 매일 삶의 이정표인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의 열매들입니다.
"주님, 당신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이다."(요한8,12참조).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언젠가 바닷가에 깔린 자갈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유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그 자갈들의 모양이 다 제각각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다보면 똑같은 것도 있을 법한데, 많이 비슷해도 어느 하나 완전히 똑같은 것이 없더군요.
그런데 같은 장소와 같은 날씨 등 똑같은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각기 구르고 부딪히면서 어느 것 하나 겹치지 않는 개성을 가지게 된 것인데,
이 다른 개성을 잘못이라고 말하고 단죄하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행동일 뿐입니다.
다름은 당연한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과 장소에서 생활한다고 해도 다름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자갈도 이런데 하물며 복잡하게 창조하신 인간의 다름은 어떨까요?
더욱 더 당연한 것이며, 이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이 다름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예외도 두지 않고 똑같이 율법을 지켜야 했으며, 자신들의 생각에서 벗어나면 커다란 죄인으로 단죄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종교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기 보다는
철저히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판단하고 단죄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좋아하실 리가 없지요.
철저히 율법에 맞춰 생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겉으로 보이기에만 급급한 위선자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은 ‘드러나지 않는 무덤’을 발견하십니다.
무덤 밖으로는 아름답게 꾸며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시체가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듯이,
위선자들이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다고 꾸짖으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십일조를 철저하게 실천했고, 회당 앞자리에 앉아 자신이 열심함을 드러내려고만 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무게 잡고 다니면서 인사 받는 것에 익숙했지요.
그런데 정작 반드시 실천해야 할 하느님 사랑은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짐짓 의로운 척 하기 때문에, 드러내어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요.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사람들의 윗자리에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정작 자신이 받는 판단과 단죄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자신에게는 관대했고, 남들에게는 엄격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도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안은 곪을 대로 곪아서 그리스도의 좋은 향기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악취를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겉과 속이 다른 종교지도자들이 결국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정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선언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 이 삶만이 내 안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하늘 아래 모두 인류가족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칭찬에 고래도 춤춘다는 말처럼 예나 지금이나 칭찬을 좋아합니다.
우는 아이도 칭찬하면 그친다는 데 어른들은 무엇에 대해 칭찬해야 합니까.
윗자리 계신 분, 회장님, 박사님, 사장님 암튼 인사받기 좋아들 하잖아요.
그러나 그 인사에 기분 좋아 으스대기에 빠져들면 볼품없는 사람들이 됩니다.
인사받기 좋아하면 아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볼 장 다 본 사람 되지요.
하늘 아래 모두 인류가족이고 아빠 하느님을 모시는 걸 도외시하니 망할걸요?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루카 11,43)
맨발의 데레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인간이란 존재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재미있는 존재입니다.
때로 성인군자가 따로 없습니다.
한때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별명까지 붙습니다.
그러나 ‘인생 한방’이라고 넘어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친구 한번 잘못 만나 패가망신하는 사람 많지 않습니까?
한 순간의 유혹 못 이겨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우리들의 눈길을 확 끄는 감언이설, 휘황 찬란, 달콤 살콤한 것들을 쫓아가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육의 행실’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갈라티아서 5장 19~20절)
육의 행실이란 것 마치 한없이 깊은 ‘늪’과도 같아서 한번 빠지면 여간해서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부단한 쇄신과 자정을 위한 노력입니다.
이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 때 누리는 열매와 더불어 살아가는 노력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티아서 5장22~23절)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살았던 16세기 가톨릭교회는 큰 어려움 앞에 직면해있었으니
바로 수도생활의 질적인 저하였습니다.
많은 수도자들의 삶이 세속화의 길을 걸으며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수도회 입회가 신분 상승의 관문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출세를 위해, 어떤 사람은 세상의 고통을 피해 수도회 문을 두드렸습니다.
자연스럽게 수도생활은 기율이 흐트러졌습니다. 수도자들의 생활 역시 나태해지고 문란해졌습니다.
수도자들 간에도 경제적 차별이 현저했으며, 수도회가 지나치게 개방적이다 보니
영적생활은 점점 약화되어갔습니다.
수도자들이라 할지라도 육에 따라 살다보면 그 끝은 비참함이라는 것을
데레사는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데레사는 육의 행실에 사로잡힌 수도자들을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수도자로 회개시키기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봉헌한 것입니다.
데레사는 20세 되던 때에 고향 아빌라의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게 됩니다.
이 수녀회가 완전 형편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 가르멜 수도자들은
1432년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인가한 꽤나 완화된 규칙을 따랐기에
수도공동체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느슨했습니다.
가르멜회의 고유의 엄격성을 이미 상실한 후였습니다.
수도생활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쇄신과 자정만이 살길임을 파악한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더욱 영적이며, 더욱 엄격한 수녀회, 더욱 봉쇄적이며, 더 청빈한 수녀원으로 개혁하고자 결심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초심으로,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세속화의 달콤함을 맛본 수도자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반대파의 극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녀는 1562년 4명의 수녀들과 함께 가르멜회의 초기 회칙대로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고자 ‘맨발의 가르멜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20년간 17개의 수녀원을 설립하였고 남자 가르멜 수도원 개혁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수도원을 새로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초기 가르멜회의 규칙인 엄격한 청빈과 고행,
기도의 삶을 강조한 데레사의 당시 좌우명은 ‘활동하고 고통당하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개혁에 반감을 가진 수도자들을 일컬어 ‘완화 가르멜회’ 좀 웃기는데 ‘신발의 가르멜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들과 충돌의 여파로 데레사는 한때 톨레도로 추방되는 사태를 맞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맨발 가르멜회는 완화 가르멜회로부터 분리돼
독립 수도회로 교황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데레사 성녀의 도시 아빌라를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빌라 성벽을 따라 가다보면 알카자르란 성문을 만나게 되는데,
거기에는 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니니가 제작한 데레사 성녀의 조각상이 세워져있습니다.
돌에 기대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 데레사 성녀의 발은 맨발 차림입니다.
완덕의 길
반영억 라파엘 신부
축일을 맞이하신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데레사 성녀가 걸었던 완덕의 삶을 본받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시기를 기도합니다.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난 데레사는 21살에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원을 개혁하고 철저한 고행과 관상으로 참된 수도자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동료와 주위 사람들로부터 끊임없는 반대와 박해를 받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정과 불굴의 투지로 관상 수도회를 지켜나갔습니다.
1582년 알바에서 세상을 떠나셨고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하여 1622년 시성 되셨습니다.
데레사 성녀의 상본을 보면 성인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강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눈은 항상 주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데레사는 환시를 보게 되었는데 수녀원 2층을 올라가는 층계에서 소년을 만나게 됩니다.
소년이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 때 데레사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데레사야!”.
‘데레사’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대답한 것을 통해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데레사가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그랬더니 그가 대답했습니다.
“데레사의 예수야!”데레사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습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아무개’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했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아무개의 예수야!’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녀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기에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녀는 말합니다.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겠나이다.”하면서 수덕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주님, 저는 성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거듭 말하면서 6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살라망카 외곽의 ‘알바 데 또르메스’수도원의 성녀 대 데레사 성당에는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성녀의 심장과 팔이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 되어 있습니다.
10월15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데레사 성녀께서 수녀들에게 타이르던 말씀을 함께 묵상함으로써 은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기름진 땅이라도 아니 가꾸면 가시와 엉겅퀴가 날 따름이니 사람의 정신도 이와 같으니라.
영성적인 일들을 항상 좋게 말할지니 이를 테면, 수도자 사제, 은수자니라.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매양 말을 적게 하라. 하는 일, 대하는 일마다 조심성을 가져라.
언제나, 특히 하찮은 일에 마구 우기지 마라. 누구에게나 알맞은 기쁨으로써 말하라.
어떤 일에든지 조롱을 하지 말라.
신중과 겸손과 스스로 부끄럼 없이 남을 나무라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하느니라.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어서 기꺼워하는 이와 기꺼워하고 슬퍼하는 이와 슬퍼할지니
결국 모든 이를 얻기 위하여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라.
중대한 일이 아니거든 변명을 하지 마라.”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아무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게 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오로지 하느님으로 충분합니다.
성녀 데레사는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많은 진보를 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이 내게 가르쳐 주신대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다른 것들도 말해 보렵니다.
그저 바라옵기는 주께서 내가 하려는 일 전체에 당신 손을 펴 주시어
거룩하신 그 뜻에 맞게 해주십사 할 따름입니다.
비록 일이야 나 자신처럼 하찮은 것이지마는
언제나 주님의 뜻을 좇고 싶은 것이 제 마음인 것입니다.”
성인은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예수께서 매질을 당하시는 장면을 그린 상본을 쳐다보고
자기도 모르게 감동되어 자기의 냉담한 처지를 깊이 부끄럽게 여겨 새 생활을 시작하였고,
열심히 읽고 있던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에 비추어 자기 영혼의 한심스러운 처지를 발견하고
갑절의 열심을 분발시켜야 되겠다고 통감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영적(靈的)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고해 사제의 명령에 의해 기록된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내 생활은 내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의 내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을 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보다 주님을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 꾸짖음 받아 행복합니다.
다행이란 목마른 이가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이고,
불행이란 너무 좋아 덤벙대다 그 우물에 빠져 죽는 것이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꾸중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다행입니다.
아니 그 꾸중은 행복입니다.
“아버지가 아끼는 아들을 꾸짖듯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꾸짖으신다”(잠언3,12).
“내 아들아, 너는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히브12,5).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루가11,42),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루가11,46)는 주님의 꾸중은 그들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높은 자리를 찾고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남에게는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면서도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불행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더 가슴 아픈 일입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했거늘 그들은 자기를 내세우는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2,6).
그런데 정작 저 자신이 율법학자요, 바리사이인 것을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도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수 있었으니 그의 사랑 안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거부 하는 것은 주님도 어찌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육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무슨 견책이든지 그 당장에는 즐겁기 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책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마침내 평화의 열매를 맺어 올바르게 살아가게 됩니다)(히브12,11).
누군가 나를 꾸짖거든 행복한 줄 아십시오.
“미련한 자는 제 길이 바르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이는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잠언12,15).
꾸중을 듣는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꾸중을 두려워 마십시오. 감사하고 기뻐하십시오.
내적인 의미에 최대의 중요성을 두어야 하겠지만 외적인 것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규정과 외적인 관례를 모두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있으면 그에 걸 맞는 처신을 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 대한 존경과 사랑을 가지고 그분의 충고를 알아듣고 받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행복과 불행을 가늠하는 기준..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불행하여라!”(루카11,42)
행복과 불행 사이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쪽만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삶도 아닙니다.
비록 같은 조건이 채워진다 해도 마음들의 반응은 각기 다릅니다.
또한 행복과 불행만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사이의 공간은 결코 좁지 않습니다.
행복의 감정은 분명 만족이 주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만족의 그릇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만족도라는 놈은 머무를 줄 모르고, 높은 곳을 향해서 끝없이 움직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결 같이 변함없는 행복한 마음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일까요?
덧없는 것을 채우려는 마음은 덧없이 끝날 뿐입니다.
욕망을 채우는 것이 행복이라 여긴다면,
그 행복은 철저히 허무함만을 남기고 죄를 생산해내고 맙니다.
불행하게 이르게 하는 것들을 행복의 조건이라 여기는 어리석음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행복과 불행을 가늠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그 답을 복음적 가르침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을 가늠하는 기준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