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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 말도(末島)
천연기념물이 있는 고군산군도의 끝
말도는 면적 0.36km2, 섬둘레 3km, 산높이 111m이다. 군산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섬으로 군산에서 뱃길로 2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고군산군도의 끝에 위치해 말도 즉 '끝섬'이라고도 불린다. 인구는 13가구이다. 남동쪽 해안절벽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관광명소로는 말도등대와 습곡지형이 있다.
가구수는 13가구(2021년 기준)이다.
목차
말도 개요
말도 선착장 입구의 천연 기념물 습곡지형
배들의 피항지 말도항
말도 유인등대
말도 둘러보기
말도 낚시터
말도의 당산, 영신당
말도 코앞의 직도 사격장
말도를 떠나면서
말도 관광명소
말도등대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말도 개요
말도는 면적 0.36km2, 섬둘레 3km, 산높이 111m이다. 군산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섬으로 군산에서 뱃길로 2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고군산군도의 끝에 위치해 말도 즉 '끝섬'이라고도 불린다. 막내, 혹은 끝이라는 의미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전부터 자녀 이름을 지을 때도 '말'자를 사용했다. 이러한 습관이 섬 이름을 짓는데도 반영된 듯, 고군산군도 끝에 위치한 섬이라고 하여 말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말도라는 이름은 가진 곳이 하나 더 있다. 강화도 최북단, 이북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이다. 이곳 말도는 작은 섬이지만 주변 해역이 황금어장터이고, 서해상을 따라 올라가는 뱃길의 중요성 때문에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된 등대가 들어서 있다. 고려시대 고군산군도가 지도에 처음으로 표시됐을 무렵, 무인도였던 말도는 조선 중엽 한양에서 심 판서라는 사람이 귀양을 오면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해온다.
주말 여행지로 말도를 추천한다. 하루에 2번 여객선이 다니기 때문에 오전에 왔다가 오후에 나가도 된다는 장점도 있다. 군산의 말도는 서해의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는 섬으로,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말도로 가는 동안 뱃전에 선 채로 선유도와 대장도, 장자도, 관리도, 방축도, 명도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말도 선착장 입구의 천연 기념물 습곡지형
말도의 선착장은 두 군데이다. 마을 바로 아래는 여객선 선착장이다. 또 하나는 마을과는 상당히 떨어진 반대의 등대 쪽에 있다. 이곳에 닻을 내리고 선착장에 내리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기암이 있는 해안절벽이다.
1993년도에 가을에 왔다가 심한 풍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 해안 근무 중이던 초소장이 풍랑주의보는 아니지만 파도 때문에 근심어린 눈초리로 바라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에 객선을 타고 한 번, 다시 2013년 가을에 탐사선 등대호를 타고 일행들과 함께 이 섬에 왔다. 여객선이 닿은 선착장에 내리면 해안 절벽이 장관이다. 2009년에 말도 남동쪽 해안절벽 1만6190m2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에 왔을 때 습곡구조를 눈여겨 보았지만 그곳이 기념물적인 중요 지형인지는 모르고 지나쳤다. 바위는 인상을 쓰고 있는 형상이다. 또 바위가 웨이브를 하듯 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말도에는 여기 말고도 여기저기 습곡지형이 많았다. 이 지층은 '군산 말도 습곡구조'라 하여 약 5억9000만 년 전인 고생대 선캄브리아기의 지질구조라 한다. 중생대의 쥐라기 시대가 2억 년 전인 것을 보면 그 보존가치가 매우 높은 것이다.
'군산 말도리 선캄브리아기 지층과 습곡구조'는 대규모 지각운동에 의해 지층이 큰 물결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는 형태로, 말도의 남동해안을 따라 파도에 침식된 절벽에 잘 노출되어 있으며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말도의 습곡구조는 고생대 이전의 오랜 지질시대를 통해 압축변형된 지질구조로 최소 3회에 걸친 대규모 습곡작용의 흔적을 잘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다른 장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어 보존가치가 아주 높은 곳이다.
습곡 이외에도 연흔(물결모양 흔적), 사층리(비스듬한 층리) 같은 퇴적구조와 국내에서는 희귀한 지질구조로 평가되는 지층으로 휘어진 단층 등은 주변의 수려한 바다 경관과 어우러져 학술적 · 교육적 가치와 함께 향후 군산시의 고군산군도 해양 관광자원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배들의 피항지 말도항
여객선은 마을 입구 선착장에 닿지만 어선들이 정박하는 포구는 마을과 상당히 떨어져 있다. 마을의 서쪽 고개 너머에 말도등대가 있고 그 아래 포구가 있다. 방파제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면 해안도로(말도길)가 양쪽으로 이어진다. 오른쪽은 바로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고 왼쪽은 포구와 등대 가는 길이다. '말도길'로 명명된 이 해안도로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데 왼쪽은 바다 그리고 오른쪽은 절벽이자 기암이다. 형태가 참으로 아름답다.
모서리를 돌아가면 바다에 한 쌍의 등대가 보인다. 방파제에 있는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그것이다. 이곳은 파도가 센 곳이라 방파제도 튼튼하고 포구도 섬에 비해서는 제법 넓은 편이다. 방파제 주위에 테트라포드가 많이 심어져 있다.
하얀 등대가 있는 방파제의 시작점은 별도의 바위로 된 민둥섬인데 콘크리트로 연결이 되었다. 무인도인 '큰 모가지'와 '작은 모가지'인 두 섬 사이에 아주 작은 바위 같은 섬이 연결된 것인데 나무 한 그루가 톡 튀어나와 인상적이다. 이 나무가 바위 속에 뿌리를 내린 신비의 '말도천년송'이다. 수천 년의 긴 세월동안 험한 풍파를 다 이겨 내고 바위 꼭대기에 늠름하게 우뚝 서 있다. 배를 타고 말도를 한 바퀴 돌면서 천년송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었다. 이 지역이 바다갈매기의 서식처로 5월 말경이 되면 수만 마리의 갈매기가 모여들어 장관을 이룬다.
포구는 호수처럼 아늑하고 아름답다. 포구에는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들과 3척의 배가 출어를 대기하고 있다. 물이 빠진 갯벌에서 마을 아낙네들이 바지락을 파고, 남자들은 그것을 가지고 나와서 싣고 간다. 이곳은 청정 해역으로 바지락에 살이 많고 맛도 일품이라는데 정작 먹어볼 기회는 없었다.
말도 유인등대
고군산군도의 섬들은 오밀조밀하게 들어서 있다. 그래서 고군산군도를 '호수에 뜬 섬'이라고도 부른다.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사신단 배가 서해로 들어오면 고군산군도의 고려 군사들이 영접을 나왔다고 한다. 고군산군도는 과거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뱃길의 중요한 길목이었고, 서남해안에서 세곡을 싣고 개경이나 한양으로 올라가는 중간 허리였다. 그래서 항상 고군산군도에는 조운선과 병선, 상선들이 들락거렸다. 이순신 장군도 잠시 이곳에 머물렀다고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기록하고 있다. 사람과 배 뿐만 아니라 물고기들도 이곳을 거쳐 가는 필수코스였다.
말도 바로 아래의 칠산어장과 위도 조기 파시, 위쪽의 연평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고군산군도의 말도는 위치의 중요성 때문에 1908년에 등대를 설치하여 100년 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이 시기에 일본은 대륙 진출이라는 야망을 가지고 정략적인 목적으로 말도에 등대를 설치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는 데 있어 등대 건설이 급선무였다. 군함을 통하여 모든 자원과 인력이 오가는데 우리나라 바다 지리에 어두웠던 일본이었기에 등대 설치는 필수적이었다. 한일합방 직전 먼 섬 말도에 거금을 들여서 등대가 건설된 것은 이 같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거문도 등대를 지나 진도의 죽도 등대와 서해안을 따라 올라온 배들은 말도 등대의 안내를 받는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서 어청도 등대와 태안반도에 있는 옹도 등대를 지나서 경기만으로 진입해 팔미도 등대의 안내를 받아 인천으로 들어간다.
서해안은 섬들이 너무 많고 수심이 얕아 암초가 숨어 있기 때문에 육지 근접을 피하여 수심이 깊은 먼 바다로 항해할 수밖에 없다. 요즈음은 전자 장비의 발달로 등대의 역할이 미미하기에 유인등대들이 무인등대로 바뀌고 있는 실정이다. 말도 등대도 무인화 직전까지 갔다가 아직까지 등대지기들이 거주하고 있다.
말도는 등대뿐만 아니라 북상하는 회유 어종인 조기와, 남하하는 홍어 같은 냉수대 물고기의 통로가 되는 섬이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군산수협도 육지가 아니라 어청도와 장자도로부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말도 둘러보기
배들이 안전하게 피항할 수 있는 시설이 있는 선착장에 펜션 시설이 있고, 그 옆 산쪽으로 난 시멘트길이 바로 등대 가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유인등대인 말도 등대가 보인다. 전라북도의 유인등대는 현재 말도와 어청도 단 두 곳뿐이다. 어청도 등대는 1912년 3월, 고군산군도의 막내섬 말도에서 점등되어 서해안과 군산을 드나드는 선박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말도 등대의 정식명칭은 '말도항로표지관리소'다.
등대 관리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등대 맨 위로 올라가서 본 잔잔한 바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등대의 역할은 캄캄한 밤바다에서 사나운 풍랑을 헤치고 달려가는 배들이 길을 잃지 않고 안전하게 항해하도록 불을 밝히는 일이다. 등대 아래에는 배들의 피항지가 마련되어 바람이 거세게 불면 지친 배들의 피난처가 된다.
그런데 최근에 말도 등대가 해수부의 무인화 결정에 따라 지역주민과 관계자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해수부에 따르면, 현재 등대의 무인화 추세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며, 항로표시기능의 유지에 큰 문제점이 없고, 육지와 인접해 있어 문제발생시 신속한 복귀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아직도 유인등대로 남아있게 되었다고 한다.
1903년 처음으로 불을 밝힌 팔미도 등대가 국내 1호 등대이고, 이어서 인천의 부도(1904), 여수 거문도(1905), 제주 우도(1906), 경남 호미곶(1908), 군산 말도(1908), 여수 연도(1910), 이어서 군산 어청도(1912), 제주 마라도(1915)에 차례로 등대가 들어섰다. 따라서 말도 등대는 호미곶 등대와 함께 107년이 된 역사가 깊은 등대다. 등대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절벽은 아찔할 정도로 높고 험하다. 절벽을 벗 삼아 날갯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갈매기 떼는 색다른 풍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말도를 방문하면 꼭 봐야 하는 명물이다.
등대에서 내려와 마을로 들어갔다. 산길을 넘어서 마을로 들어간다. 산길을 타고 10분 정도 숲길을 헤쳐 가며 걷는다. 언덕에 올라서니 저 아래로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원색의 지붕을 한 전형적인 조그마한 어촌마을이다. 아니 바다만 없다면 영락없는 산촌이다.
밭길을 통해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골목도 참 좁다. 집과 집 사이에 밭이 있고 공터도 있다. 공터마다 시설물로 인해 복잡하다. 이곳에서는 경로당과 마을회관만 현대화된 건물일 뿐 대부분은 노후화된 집들이다.
선착장에서 올라오는 마을 입구에 파출소가 한 채 덩그러니 서 있다. 그리고 길 건너 맞은편에 공터가 있는데 옛날의 학교터다. 건물은 다 철거되고 터만 남았다. 교문과 주변의 공덕비 몇 기가 전부다. 아주 조그마한 운동장도 있고 동상도 서 있다. 이 분교를 군산대학교에서 매입하여 대학생들을 위해 연구목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분교 뒤에는 푸른 제복처럼 한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예전에 해군이 근무하던 시설이다. 이 조그만 공간에 마을과 학교와 부대가 한자리에 들어서 물과 전기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궁금하다. 마을 아래는 조그마한 포구가 있지만 배는 한 척도 없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면 입구에 붉은 지붕을 한 여객선대기소가 있다.
말도 낚시터
말도는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먼 바다에 위치한 섬이기에 낚시가 잘 된다. 서편 등대 밑과 북쪽 해안에 발달한 갯바위는 감성돔이 나오는 포인트다. 동네 앞 선착장에서부터 새로 건설된 서편의 새 선착장까지의 약 15m 구간에서도 감성돔과 농어, 우럭이 속출한다. 시멘트로 포장된 동네 앞길이나 새 방파제에서 안전하게 찌낚시나 간편하게 던지기를 즐기는데 우럭, 놀래미, 농어, 감성돔 등이 올라온다. 동네 뒤편의 오솔길을 따라 말도 등대까지 산책을 하면서 낚시까지 한다면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말도의 당산, 영신당
말도는 조선시대의 유배지로 알려졌다. 맨 처음 입도한 사람은 조선 중엽 무렵의 서울 사는 심 판서인데 귀양을 온 것이다. 말도에는 심 판서를 모시는 영신당(靈神堂)이 있는데 이곳에서 지내는 당산제에 얽힌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에 머나먼 낙도인 말도에 귀향 온 선비가 조정에서 혐의가 풀려 다시 돌아오라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나가려고 하면 풍랑이 일어 되돌아오기를 10여 차례 했다고 한다. 어느 날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단검을 모시고 사당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사당을 지어 단검을 모시고 제를 올리니 풍랑이 일지 않고 무사히 육지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말도에는 마을에서 가장 청렴한 사람을 뽑아 영신당을 관리하고 제사용 돼지를 새끼 때부터 손수 기르게 했다고 한다. 일 년에 두 번, 동짓날과 봄에 200근이 나가는 돼지를 잡아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 주민에게 물어서 당산제를 지냈던 영신당을 찾아갔다. 올라가는 산길에는 숲으로 우거져 있다.
좌우로는 시누대 숲이 빽빽하다. 마치 동굴을 통과하는 기분이다. 시누대 숲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아쉽게도 영신당은 무너져 있고 흔적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영신당에 있던 단검은 전북대학교 어느 교수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말도 코앞의 직도 사격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섬에 사는 말도 주민들은 바로 위쪽에 있는 직도의 사격장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직도와 가장 가까운 말도는 직선거리로 13km에 불과해 공군의 공중폭격에 따른 각종 피해가 가장 큰 편이다. 말도 바로 옆은 '명도'인데 이곳 주민들도 어장 황폐화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그 다음은 방축도로 직도로부터 약 20km 떨어져 있지만, 공군 비행기의 훈련 시에 '굉음'공해로 일상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고 있다.
직도가 1971년부터 공군사격장이 되면서 인근의 명도 말도 방축도 주민들은 비행기와 헬기 등의 소음과 폭발사고에도 노출돼 있어 주택균열과 스트레스 등의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2000년 2월, 직도 동남쪽 2km 지점에서 저인망으로 고기를 잡던 형성호의 그물에 올라온 불발탄이 폭발하여 선원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또 1997년 11월, 직도 서쪽 4km 지점에서 조업 중이던 성일호 선원 1명도 불발탄 때문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고영곤 말도 이장은 "지금도 비행기 폭격 연습을 할 때 소음과 오발사고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며 살고 있는데, 이제 미군도 같이 사격장으로 이용한다니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주한 미 공군은 그동안 화성시 매향리 사격장을 이용해 왔으나 그곳이 폐쇄되자 대체 사격장으로 직도가 결정된 것이다.
1971년 이후 직도 반경 18km 이내의 해역에서 모든 조업이 금지됐다.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은 40년이 넘게 머리에 폭탄을 이고 살았다. 전투기의 소음과 폭격의 진동으로 고통당했으며 항상 오폭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주민들은 대략 3가지 사항 때문에 사격장 폐쇄를 주장하고 있었다.
첫째는 폭음과 진동 피해였다. 폭격이 시작되면 온 바다와 땅, 하늘이 진동을 하며 건물 곳곳에 금이 가기까지 했다.
둘째는 앞에서 잠깐 이야기했듯 불발탄으로 인한 안전상의 문제였다. 상기한 두 가지 이유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빼앗긴 황금어장 문제였다. 그것은 주민들의 생존권을 빼앗긴 것과도 같은 문제이므로 하루 속히 해결되어야 한다. 게다가 새만금 간척사업이 마무리되자 어족 자원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주민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군산시는 정부 지원금 약 3000억 원을 직도 근해에 살고 있는 섬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기도 했다.
직도에는 자동채점장치(WISS)가 설치돼 있어 연습탄이 투하되지만 바로 옆의 소직도에는 여전히 살상용 폭탄이 투하된다. 직도 사격장은 명목상으로는 한국 공군들의 사격장 시설이지만, 실상은 4개월마다 순환하면서 배치되는 미국의 공군 사격장이기도 하다. 아파치 헬기도 여기서 폭격 연습을 하고 돌아간다. 비행기들이 와서 사격 연습을 하면 언제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말도를 떠나면서
말도는 고군산군도에서도 가장 먼 지점에 위치하여 아직은 문명의 이기와는 거리가 있다. 잘 만들어진 항만이 있지만 겨울철에는(12~4월) 군산에 나가서 지내고 봄이면 다시 되돌아온다. 배들도 그 무렵 조업에 나선다. 겨우 13가구가 형제처럼 기대어 사는 곳이다. 특별히 내세울 것은 없지만 천연송, 천연 기념물 습곡지형, 말도 등대를 감상하면서 낚시 체험과 바지락, 고둥, 홍합을 잡으며 지낼 수 있다.
직도 사격장 때문에 국방부에서 지원하고 있는 자금을 이곳 말도 주민들의 소득과 연결되는 사업을 해야 한다고 섬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당초 국방부 지원금 7억 원 중 현재 4억6천만 원을 들여 '종묘배양장'과 '어업용 창고'를 만들어 놓은 상태다. 나머지 2억4천만 원으로 어떤 곳에 투자해야 할 것인가를 구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도 주민들은 농사는 전무하다. 어업도 겨울에는 꼼짝없이 파도 때문에 쉬어야 한다. 낚시 수입도 말도와는 무관한 것이 현실이다. 육지가 된 야미도에서 새벽에 낚싯배들이 낚시꾼들을 싣고 왔다가 갯바위에 내려놓고 간 후, 오후에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민박 또한 극히 드물다. 아무래도 말도는 지형상 주목받지 못하지만, 선유도가 신시도와 다리로 연결되면 그때는 접근성이 좋아지게 된다. 그러면 때 묻지 않는 자연을 감상하려고 관광객들이 몰려올 것이다.
말도 관광명소
말도등대
일제강점기인 1908년, 일본의 정략적인 목적에 의해 세워진 등대로 백색의 8각형 콘크리트 구조에 내부는 주물로 만들어진 2단 나선형 사다리가 설치된 형태였다. 20세기 초반에 선보인 콘크리트 건축물, 게다가 높다랗게 지은 콘크리트 건축물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건축양식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해풍에 부식되어 그 역할을 다하자 1989년 10월, 백색의 원형 콘크리트 구조물로 새롭게 태어났다. 등대불빛을 발하는 등명기는 국내에서 개발한 프리즘렌즈 회전식 대형등명기로 37km 거리에서도 불빛을 볼 수 있다.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고군산군도는 선유도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전국에 알려진 여름철 명소다. 그러나 해수욕장이 있는 선유도뿐만 아니라 각 섬들마다 기묘한 형상을 담고 있는 해안 절벽과, 서해에서는 보기 드문 청정한 바닷물이 이 군도의 진가를 더욱 높이고 있다. 그중 신시도가 가장 크며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등 일부 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고군산군도는 고군산열도로도 불린다. 이 군도는 동에서 서로 장막을 치듯 7개 섬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또한 다른 섬들도 동에서 서로 일정한 방향성을 띠고 발달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섬들은 주변의 물이 얕고 모래가 깨끗해 해수욕이 가능하다. 어자원이 풍부해 바다낚시나 스킨스쿠버 등 레저 ·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선유도의 망주봉과 명사십리, 장자도의 사자바위와 할매바위, 방축도의 독립문바위, 명도와 횡경도의 기암괴석, 말도의 갈매기 등 볼거리들이 많다. 신시도와 무녀도에는 염전이 있으며, 대장도에는 1만여 점의 수석과 분재를 모아놓은 개인 소유의 수석전시관이 있고, 말도에는 명품 등대가 있다.
군산시 [말도&보농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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