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강제이주 이전까지 연해주 고려인 거주지에는 380여 개의 모국어 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연해주에 설립된 고려인 학교들은 그 수준으로 보나 그 숫자로 보나 한반도 전체에 존재했던 교육기관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 학교들은 거의 대부분 한일합병 이듬해인 1911년 이후 설립되었다. 권업회를 중심으로 한 여러 애국지사들이 후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그들을 올바른 지식으로 교양하기 위해 학교 건립에 매진한 결과였다.
또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가 일반의무교육 시행을 선포함으로써 학교는 더욱 늘었다. 그동안 교육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가정의 부녀자들도 저녁에 문맹퇴치학교를 다녔다.
1928-1933년 사이에 존재했던 고려인 학교 숫자를 살펴보면 1) 일급학교는 351개교에 학생 수 28,846명, 2)공장제조소 7년제 학교는 4개교 976명, 3) 9년제 학교는 4개교에 학생 수가 700명, 4) 집단농장 청년학교는 21개교에 3,073명으로 총학교는 380교에 학생은 33,595명이었다.
그런데 이 통계는 원동교육부에 공식 등록된 학교와 학생 수만 합산한 것이다. 당시에 등록이 안 된 학교, 비밀리에 운영된 학교도 적지 않았으므로 실제 수치는 이보나 훨씬 높았을 것이다.
1924년에는 고려인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인 우수리스크에 3년제 고려사범전문학교(고려인교육전문학교)가 설립되어 교원을 양성하기 시작했고, 1930년에는 뽀시에트에도 똑같은 사범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1931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780명 정원에 역사학부, 문학부, 이학부, 생물학부 등 4개 학부로 구성된 고려사범대학교가 개교되었다. 이 사범대학교는 당대 명실상부한 고려인 최고의 학문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유일의 우리 민족 사범대학교이기도 했다.
이 학교 문학부 출신 다수는 졸업 후에 일반학교 교원으로 근무하거나 모국어 신문사 기자로 일하면서 막 형성되기 시작한 고려인한글문단에 열성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들의 노고로 인해 수준 높은 모국어로 이룩한 고려인 한글문학은 소비에트 문화의 강력한 비바람 속에서도 오랫동안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삼일여학교 같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들과 천도교, 대종교 계통의 학교들이 무수히 설립되어 활동했다. 이 학교들은 1920년대 연해주 일대 고려인 마을에 널리 번창했으나 무신론적인 사회주의 이념이 공고화되고 토호청산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지던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에 탄압을 받아 모두 중령 만주로 넘어가거나 폐쇄되었다.
이 후 1991년 구 소련해체 후 중앙아 고려인들의 이주가 시작되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국내 귀환하는 동포들이 많아짐에 따라 광주에 정착한 고려인동포를 중심으로 교육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마침내 2007년 동포 자녀를 위한 광주새날학교가 설립되어 연해주 모국어 학교의 정신을 가진 학교로써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출처: 고려인은 누구인가(2019) 김병학 저>
고려방송: 안엘레나(고려인마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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