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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다
마 12:1-8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마 12:1-8 / [안식일의 주인;막2:23-28,눅6:1-5] 그 무렵 예수께서 제자들과 같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날은 마침 안식일이었지만 배가 몹시 고팠던 제자들은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 2)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따졌다. `당신 제자들이 율법을 어기고 있소.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다니 될 말이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다윗왕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한 일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4) 그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들만 먹게 되어 있는 제단의 떡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모세의 율법에 보면 비록 안식일이라도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이 당번 일 하는 것은 허용되어 있다. 6) 진정으로 말한다. 성전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여기 있다. 7) ㄷ) `내가 바라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라는 성경 구절의 뜻을 너희가 제대로 알았더라면 죄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지는 않았을 것이다. (ㄷ. 호6:6) 8) 인자가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논쟁은 바리새인들의 인본주의적인 해석과 율법의 재정자 되시는 예수님 사이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충돌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1-2) 가난한 자의 규례에 따라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종종 필요한 것을 다른 사람의 밭에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신 23:24-25). 율법이 금하는 것은 낫을 사용하여 대량으로 베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소량의 이삭을 손으로 따서 먹었습니다. 이 사건이 안식일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규칙에 따르면 이 행동은 노동(추수)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말했습니다.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3-6) 예수님께서는 형식주의를 따르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 사울을 피해 성막이 있던 놉 지역으로 피신하여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 후에 제사장이 먹도록 구별되어진 진설병을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구하여 먹었던 것을 언급하셨습니다(레 24:8-9; 삼상 21:1-6). 구약 율법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안식일에 다른 사람들의 예배를 돕기 위해 일하도록 지시하셨으며, 그런 일을 하는 제사장의 경우 죄를 범했다고 선언하지 않으셨습니다(민 28:9-10).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성전보다 크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예배를 위하여 안식일 규례를 어길 수 있다면 그들 앞에 서신 예수님은 곧 성전의 건축자요 자신을 위해 성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신 것입니다.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7-8) 예수님께서는 형식주의적인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 규례의 진정한 정신인 자비와 긍휼을 말씀하십니다(호 6:6). 그리고 자신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안식을 빼앗고 과중한 율법적 의무를 지움으로써 안식일을 형편없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적용: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관한 규례 가운데 자비와 긍휼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더라면, 예수님께 율법을 어겼다고 공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식일 정신을 깊이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안식일은 영혼을 위한 날이기도 하지만 육체를 위한 날이기도 합니다. 기적은 안식일과 함께 옵니다. 영혼이 되살아나고 여분의 영혼이 태어나며 안식일의 성스러운 광체가 집안 구석구석을 가득 채웁니다. 노여움은 걷히고 긴장이 사라지며 얼굴에는 환한 빛이 자리 합니다. 안식일을 창조하는 것은 갈망에서 시작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안식일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의 영이 우리를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단지 토요일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주의 나머지 엿새는 안식일로 나아가는 순례 여행입니다.
< 설 교 >
주일성수의 예배와 십일조와 몸 드림의 복음 신앙
마 12:8, 23:23 / 김명혁목사
제가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 지난 10년 3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며 설교하고 있는데 오늘 함께 걷는 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김기춘 목사님과 맹승주 목사님에게 감사를 드리고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김기춘 목사님과 맹승주 목사님이 오늘 주일성수와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오늘 “주일성수의 예배와 십일조와 몸 드림의 복음 신앙” 이라는 좀 긴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요사이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주일성수는 구약의 안식일 제도에서 비롯한 율법주의의 소산이므로 철저하게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합니다. 구약의 율법제도들은 모두 폐기되었기 때문에 주일 하루를 구약의 안식일처럼 철저하게 지킬 필요도 없고 십일조도 구약 시대처럼 꼬박꼬박 바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손 목사님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은 주일성수와 십일조 봉헌을 철저하게 했는데 그런 신앙은 모두 율법주의라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주일성수를 범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돌로 쳐죽여야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설교를 했는데 오늘 한국교회 안에는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이 강조했던 복음 신앙적인 삶을 무시하고 부인하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아침 “주일성수의 예배와 십일조와 몸 드림의 복음 신앙” 이라는 좀 긴 제목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한국교회가 가장 존경하는 신앙의 스승님인 손양원 목사님의 주일성수와 십일조 봉헌에 대한 이야기를 서론적으로 간단하게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02년 즉 한경직 목사님과 유관순 열사가 태어난 해인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에서 손종일씨와 김은수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손양원은 믿음의 유산을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가장 귀중한 유산은 재물의 유산이 아니라 신앙의 유산입니다. 손종일씨는 1908년경 이웃에 사는 형뻘 되는 사람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 믿고, 상투도 자르고, 술과 담배도 끊고, 밤새워 성경을 읽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가족들을 전도하여 예수 믿게 한 후에는 매일 아침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드렸고, 집에서는 가정예배를 드렸고,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손종일씨는 장로로 김은순씨는 집사로 칠원교회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한번은 칠원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했는데 은혜를 받은 손종일 장로님이 집에 돌아와 기뻐하면서 아내에게 논 다섯 마지기 중 세 마지기를 바쳤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내는 비 새는 교회당을 짓는다는데 두 마지기만 남겨두어서 무엇 하겠느냐면서 남은 두 마지기를 다 바치자고 해서 결국 다섯 마지기를 다 바쳤습니다. 손 장로님 부부는 자녀들에게 논밭이나 재물보다는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후에 세 아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고 한 아들과 두 명의 손자들은 순교자들이 되었는데 두 명의 손자들은 모두 목사들이었습니다.
큰 아들이었던 손양원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새벽기도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손양원은 11살 때 칠원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일본인 교장은 매일 일본 왕을 향하여 절하는 동방 요배를 하고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방 요배를 거절했습니다. 어느 날 손양원은 동방 요배 거부로 교장으로부터 뺨을 맞고 코피를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은 이렇게 기도하며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주님, 이 부족한 것의 미천한 아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더 큰 일에 사용하시기 위해 제 아들을 더 큰 망치로, 더 강한 힘으로 두드려 주십시오.” 손양원은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라면 그까짓 학교 안 다녀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손양원은 동방 요배 거부는 물론 주일성수를 위해 주일날 학교에 가는 것을 거부하므로 학교에서 벌을 받곤 했습니다. 손양원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7살 때 서울에 가서 중동중학교에 입학하여 고학을 하면서도 주일성수를 엄격하게 했습니다. 주일날 일 안 한다고 만두가계로부터 쫓겨나면서도 그는 주일을 지켰습니다. “굶어도, 못 배워도 주일에는 일을 하지 않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는 만두가계에서 쫓겨나서 이리저리 일자리를 찾아 다니면서 그간 모아두었던 돈도 다 써버리고 삼 일을 굶어야 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선 손양원은 호주머니에 남아있는 돈 70전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은 십일조였습니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십일조 도둑은 안돼" 하며 그 돈을 당시 그가 다니던 안국동교회에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최권능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귀중한 믿음의 스승님들을 보물로 주셨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은 초대교회와 청교도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철저한 회개와 철저한 주일성수와 철저한 십일조 봉헌과 철저한 헌신과 희생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는 감옥에 계실 때 가족들과 교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주일성수와 새벽기도를 철저하게 할 것을 당부하시곤 했습니다. 저들의 신앙과 삶에 율법주의적인 요소와 금욕적인 요소가 조금씩 섞여 있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하나님 섬김은 정말 철저하고 정말 대단했습니다. 저도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이 물려주신 가르침에 따라서 철저한 회개와 철저한 새벽기도와 철저한 주일성수와 철저한 십일조 봉헌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주일성수와 예배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저는 11살 때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 38선을 혼자서 넘어서 남쪽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주의의 소산이므로 철저하게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날이 하나님의 날이므로 아무 날에 예배 드려도 된다고 말하는 이상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일예배 대신 토요일이나 금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주일엔 딴짓을 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일조라는 틀에 매이지 말고 자발적으로 자기 형편에 따라서 자의적으로 조금씩 헌금하면 된다고 말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손종일 장로님이 논 다섯 마지기를 다 바친 것은 광신적인 신앙의 행위라고 비판할 것입니다. 주일성수에 대한 김익두 목사님의 설교도 광신적인 설교라고 비판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너무 세속화되고 너무 인간화되고 너무 세상의 유행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주일성수에 대한 예수님과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부정적인 판단을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은 물론 준비적인 그리고 예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구약의 가르침은 영속적이고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분명하고 강하게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사실 구약의 거의 모든 제도들은 신약에 와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할례 제도는 신약의 세례 제도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양 제사 제도는 신약의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의 피 제사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 제도는 신약의 교회 제도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신약의 주일 제도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신약의 몸과 모두 드림의 제도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인식일 제도가 폐기된 것이 아니라 완성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8). 안식일의 완성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즉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날 이른 새벽에 사랑하는 제자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서 위로와 기쁨과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거의 같은 시간인 주일날 이른 새벽에 다른 여인들에게도 나타나 보여주셨습니다. 주일날 오후에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서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주일날 저녁에는 부활의 주님께서 사랑하는 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위로와 기쁨과 사명과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일 주일이 지난 둘째 주일날 저녁에는 도마와 다른 열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 날도 주일날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신 날도 주일날이었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계1:10,11). 예수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주일 날에만 나타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구약의 안식일 제도와 안식일 예배를 주일제도와 주일 예배로 완성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주일 날 나타나 보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님께서도 주일의 중요성은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일날 예루살렘에 급하고 강한 바람같이 불의 혀와 같이 강림하셨습니다.
결국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주일날에 모두 함께 모여서 주일 예배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식 후 첫날인 주일날 함께 모인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며 밤 늦게까지 말씀을 전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20:7). 사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구약 시대에 잠깐 동안 주어진 임시적인 제도가 아니라 “대대로” “영원히” 지킬 영원한 표징이며 제도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31:13).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출31:16,17). 결국 신약 시대와 교회사 시대의 신자들은 구약 시대의 인식일 못지 않게 신약 시대의 주일을 철저하게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청교도들의 신앙의 첫째 조항은 주일 성수였습니다. 장로교회의 헌법과 예배 모범은 주일 성수의 중요성과 주일 성수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습니다.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의무이니 미리 육신의 모든 사업을 정돈하고 속히 준비하여 성경에 가르친 대로 그 날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없게 하라. 이 날은 주일인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회집으로나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종일토록 거룩히 안식하고 위급한 일밖에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지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여기 “종일토록” 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했는데 요사이는 주일 저녁 예배를 폐지하고 오후 예배로 대치하는 교회들이 많은데 이것은 “종일토록” 안식일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위배하는 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주일 성수가 해이해지는 것을 아쉬워하시면서 저에게 조용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에는 주일 아침 예배나 저녁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거의 같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은 문제야요. 그리고 주일 아침에 예배 보고 교인들이 헌금 낸 돈으로 점심 먹고 오후 예배 보고 집으로 가니 참 문제야요. 우리 영등포교회도 오후 예배로 바꾸자는 말이 나오는데 방 목사 죽은 다음에 바꾸자고 해요, 나 참!” 총신의 박용규 교수님은 한국교회의 영적 침체는 주일 저녁 예배를 폐지 한데서 왔다고 올바로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주일성수의 전통을 무시하고 있고 주일을 인간 중심적으로 사회적 기류에 따라가면서 가볍게 지키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사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즉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을 무시하고 현대적 유행에 영합하며 주일 성수를 무시하는 목사들은 무서운 죄를 범하는 죄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주일성수”의 신앙이 매우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평양 서문밖교회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로부터 “주일성수”의 신앙과 “새벽기도”의 신앙과 “순교” 신앙을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말씀을 그대로 듣고 마음에 받아드리고 몸으로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다니던 평양 제5인민학교에서 일요일에도 학교에 오라고 명령했지만 저는 2년 동안 일요일에 한 번도 학교에 가지 않고 교회에 나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았고 때로는 정학을 당했지만 저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결국 저는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 신앙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기 위해서 사랑하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평양에 두고 38선을 혼자 뛰어넘어서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계시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을 찾아가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제가 11살 때인 1948년 8월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 뛰어넘게 되었습니다. 국경을 경비하던 군인들이 우리들을 발견하고 모두 서서 손을 들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같이 오던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지 않고 캄캄한 밤에 혼자서 남쪽을 향해서 40분 이상 뛰었습니다. 언덕을 넘고 파 밭을 달리고 목에 차는 강을 건너서 남한으로 왔습니다. 저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고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 드리면서 살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후 한 평생 주일 성수의 신앙을 몸이 지니고 살았고 목회 사역도 했습니다.
셋째로, 십일조에 대한 구약 성경과 예수님과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에 십일조 봉헌의 예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14:2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레27:30,32).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신26:12).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레위인들 특히 제사장들을 위한 헌물이었고 동시에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기 위한 구제 헌물이었습니다. 십일조 제도의 의미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이기적인 인간들로 하여금 일곱 날 중 하루를 구별하며 예배의 날로 거룩하게 지키는 것처럼 모든 재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집과 그리고 불우한 사람들에게 드리므로 복을 받게 하려고 하신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십일조 제도를 부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위선을 책망하시면서 즉 저들이 십일조를 형식적으로 드리면서 더 중요한 공의와 자비와 사랑을 버린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눅11:42). 사람들에 대한 공의와 자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지니지 않고 종교 의식에만 사로 집힌 것은 잘못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식을 버리지는 말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의와 자비와 사랑을 원하시면서도 예배 의식과 봉헌 의식을 부정하신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에 머물지 않고 모든 것을 드리는 모두 드림과 헌신과 봉헌을 아주 귀하게 여기시고 칭찬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 21:1-4). 예수님께서 생활비 전부를 모두 드린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한 어린 소년이 모두 드린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쁘게 받으시고 하늘을 향해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천여 명을 배부르게 먹이셨고 예수님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오신 산 떡이란 귀한 말씀까지 전하셨습니다. 어린 소년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전부 모두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도록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예수님께서 십일조 제도를 버리지 말라고 눅11장에서 가르치신 다음 눅 12장에서 모든 재물을 땅에 쌓아준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6-21). 눅16장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땅에 쌓아둔 부자가 지옥에 가고 말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사실 복음서와 사도 행전에 나타난 귀중한 성도들은 십일조에 그치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믿는 무리가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 2:33, 4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2-37). 도르가는 겉 옷과 옥 옷을 만들어 모두 가난한 과부들과 함께 나누었고, 루디아는 돈과 집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다 사도 바울의 일행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루디아를 본받아서 가난과 핍박 중에서도 연보를 넘치도록 했다고 사도 바울이 칭찬했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8:2).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에게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어놓으려고 했고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과 사도 바울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도 내어놓으려고 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롬 16:3, 4).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 2:25, 30). 사도 바울은 주님과 성도들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재물을 허비하고 자기의 목숨까지 허비하는 것을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 12:15). 사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축복을 받은 신자들에게 제일 먼저 권면한 말씀이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는 권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사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자기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렸습니다.
십일조를 신약시대와 교회사 시대에 와서 드려야 하느냐 안 드려도 되느냐 라는 쓸데 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쓸데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윤구 박사님은 십일조가 아닌 십의 오조를 드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오셨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이나 장기려 박사님이나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들은 십의 십조를 모두 하나님께 드리고 그리고 불우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섬김과 드림의 삶을 살았고 자신들은 주님처럼 극히 가난한 청빈의 삶을 사신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좀 부담스러운 말씀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소유와 생명을 모두 다 드리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최소한 열의 하나를 드리도록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동냥을 받으면 동냥중에서 십일조를 드리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작은 것을 정성껏 드리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자가 천국 가기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기 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시면서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자기는 가난이란 여인과 결혼했다고 말하면서 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 가난하게 사시면서 적은 것을 정성껏 드리시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주일성수의 예배와 십일조와 몸 드림의 복음 신앙”보다 더 귀중한고 축복받은 신앙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예배의 중요성을 거듭해서 지적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8:1). 여기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라는 말씀은 “그들이 나를 예배할 것이니라” 라는 말씀이었는데 이와 같은 말씀을 10여번 반복해서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성수하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신약시대에는 주일을 거룩하게 성수하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소한 열의 하나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해서 하나님께 드리고 그리고 몸과 재물과 생명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니다. 사실 “주일성수의 예배와 십일조와 몸 드림의 복음 신앙”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을 받는 비결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기춘 목사님과 맹승주 목사님과 함께 걷는 교회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항상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일성수의 예배와 십일조와 몸 드림의 복음 신앙”을 몸과 마음과 영혼에 지니고 살다가 죽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소서” 찬송을 함께 부른 다음 제가 기도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중심이다
마 12:1-8 / 홍인식 목사(현대교회)
인간희생 제사
작년(2010년) 4월 인도의 한 힌두 사원에서 사람을 제물(祭物)로 바치기 위해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보도에 의하면 피살자는 20대 남성이었는데 인도 West Bengal 주(州) 비르붐 지구의 힌두교 사원에 있는 재단에서 토막 난 채 발견되었습니다. 시체는 새 옷이 입혀진 채 제단에 올려져 있었고 결박이나 저항의 흔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아직도 세계 여러 곳에서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인간을 제물 삼아 희생 시키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인류의 종교 역사에서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형태의 제사가 존재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을 직접 제물 삼아 직접 희생시키는 일도 여러 종교에서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인간 제물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13세기 멕시코 아스텍 문명에서 보여 집니다. Azteca 사람들은 태양신을 숭배했습니다. 이들은 모든 걸 멸망시키는 암흑을 막으면 태양신이 기뻐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신을 기쁘게 하는 방법으로 제삿날을 정해 의식을 행했습니다.
그 의식에서 가장 중요했던 게 인간을 산 채로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1년에 약 2만 명이 포로로 잡혀 제물로 제단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Azteca 사람들은 포로들의 배를 갈라 심장을 손으로 꺼내서 바쳤고 제물은 재단 아래의 구멍으로 떨어뜨립니다. 전쟁에서 죽은 적들의 목은 잘라서 신전을 짓는 데 함께 매장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최고의 경배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마야 문명은 여자를 주로 제물로 바쳤습니다. 마야의 사제들은 물속에 사는 신들이 노하는 것을 막으려 처녀를 ‘성스러운 우물’에 버렸습니다.
'인간제물'은 고대 역사에서부터 종종 등장합니다.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입니다. 이들은 산 노예나 평민의 가슴을 돌칼로 갈라 심장을 꺼내는 의식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멜 깁슨이 감독한 2007년 영화 ‘아포칼립토’에도 나옵니다. 구약에서도 이 같은 전통이 잠간 엿보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기록이 그것이지요. 자신의 아들인 이삭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직접 막으심으로서 중단 됩니다. 그 이후 구약 전통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을 절대적으로 금하게 됩니다. 물론 입다가 자신의 딸을 바친 사건 기록을 통하여 그런 시도가 계속된 것이 보여지기는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제물로 삼는 것은 유대교에서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신을 위한 인간의 존재
이러한 여러 가지 사항들은 종교가 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신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갖가지 방법이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집트 등을 여행하다보면 거대한 신전들을 보게 됩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에 놀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화려함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신을 섬기기 위해 치러야했던 수많은 백성들의 눈물과 희생을 보게 됩니다. 오직 신과 왕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쉴 틈 없이 생명까지도 버려야 했던 사람들의 아픔을 보게 됩니다. 과연 믿음이란 이처럼 오직 신만을 위해 우리 목숨까지도 하찮게 여기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과 함께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도 이러한 신을 위한 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인간 희행 제물이 아니라 율법 준수라고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당시 백성들의 삶이 희생되고 억압되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특히 안식일 제도를 중심으로 해서 일반 백성들은 무거운 종교적 짐을 지고 허덕이며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교로 말미암아 인간적인 삶을 포기한 채 오직 평생을 통하여 신만을 위해서 아니 종교 자체를 위하여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당시의 백성들은 오직 신만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그래서 사람으로서의 삶은 포기하고 살아가야 하는 피곤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었던 안식일 제도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섰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러한 안식일 제도에 대한 공격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의 마음: 사람 중심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사이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비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변호합니다.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면 모순적인 것이 발견됩니다. 안식일에 밀을 잘라 먹는 것은 ‘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의 지적은 ‘일하지 말고 쉬어라’는 올바른 지적이고 예수님의 변호는 ‘안식일에도 일을 할 수 있다’라는 안식일을 범하는 올바르지 못한 가르침으로 들려지고 있습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쉼’을 옹호하고 있고 예수님은 ‘일’을 옹호하고 있는 것으로 들려지고 있습니다. 마치 바리새파 사람들이 제대로 된 종교인이고 예수님은 뭔가 삐딱하게 보이는 이단적인 가르침을 펼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깊게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생명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법’자체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날 제자들이 배고파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도록 놔두고 있습니다. 배고픔이 있는데 어찌 진정한 안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줌으로서 그들에게 진정한 ‘쉼, 안식’을 허락해 주고 계십니다. 밀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가 바리새인들에게는 일로 비쳤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쉼’이었고 진정한 안식일의 정신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 조차도 주인이다.”
이처럼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그분의 삶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도 사람을 중심으로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믿음도 결국 사람을 중심으로 사람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여러 종교의 신들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섬기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봉사를 받고 인간들은 죽도록 신들을 위하여 일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신과의 관계에서 오직 복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신의 존재는 인간들에게 억압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늘 신들에게 눌림을 받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거대하고 화려한 종교적 건축물들이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사람 되기를 포기하고 오직 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피곤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여러 가지 말씀들은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당시의 신들과는 분명 다른 분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당시 이집트에 존재하고 있었던 수많은 다른 신들과는 다르게 백성들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각종 억압에서 구해 내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신약에 이르러서는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손수 사람의 몸을 입어 사람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이 땅위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신이 사람이 되다니! 어찌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사람이 된 하나님, 사람이 얼마나 좋으셨으면 사람으로까지 오셨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예수님 성육신, 사람으로 탄생 하신 것의 의미입니다.
업적 vs 사람
예수님은 일 혹은 큰 업적을 중심으로 사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 분의 마음에는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분은 철저히 사람을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동일한 것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업적을 이루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자 할 때 그가 이룬 업적이 무엇인가를 열거하곤 합니다. 세계 최대의 무엇인가를 이루었다든지 혹은 최연소로 무엇을 하였고 이러저러한 업적들을 남긴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등의 칭찬을 듣기 원합니다. 그리고 열거된 업적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었음을 인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실패한 사람으로 기록되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불경스러운 상상을 해봅니다. 만일 예수님의 무덤이 있고 그 앞에 비석을 세운다면 그리고 그 비석에 그 분의 업적을 기록한다고 하면 아마 기록할 것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굳이 기록을 남긴다면 저는 이렇게 남길 것 같습니다.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사람을 너무 사랑하여서 하나님 자리를 떠나서 자기를 비우고 사람이 되신 분. 사람이 좋아서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신 분.”
오늘 우리의 삶에 담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자신의 삶에 담은 사람들은 결코 업적을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일 중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결코 사람 중심의 사회가 아님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업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도구가 될 뿐입니다. 사람은 높은 경제소득과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한 소모품 정도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든지 폐기처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경비를 줄이기 위하여 그리고 효율적인 결과를 성취하기 위하여 언제든지 바꾸어 칠 수 있는 장치중의 하나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의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살아가는 것이 예전보다 더 행복해 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잘 나가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폐기처분될지 알 수 없기에 모두가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이 도구와 수단으로 변질되어진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겪어야 할 필연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오늘 예수님의 마음 “업적”이 아닌 “사람 중심”을 우리의 삶에 담는 것은 우리 모두를 살리는 것입니다. 조금 경제발전이 늦어진다고 해도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사람”을 도구로 삼아 “사람”을 희생하면서 우리가 이룩할 시급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잃어가면서 이룩한 업적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을 위하여 그 자리를 기꺼이 버리신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삶에 품읍시다. 우리 모두를 살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참된 신과 거짓 신을 구별하는 요소는 교리가 아닙니다. 종교제도나 조기체계가 아닙니다. 참 된 신은 인간을 종교적 교리나 법률 혹은 일정한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고 책임적인 존재로 만들어 가는 분이셔야 합니다. 신을 섬기기 위하여 큰 성전을 건축하고 목숨까지도 희생 제물로 바치도록 강요하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여호와 하나님이야 말로 우리가 섬겨야 할 참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 사회에서 억압이 없어지고 사람이 사람을 사람답게 서로 대접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앞장서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행동을 통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실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 지금 여기의 생명 중심
종교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종교는 과연 어떤 모습의 종교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생명을 구원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처럼 생명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인류와 온 세계의 구원입니다. 신의 대가없는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말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은혜로 주어지는 생명을 그 본질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위에서 계시면서 하신 여러 가지 사역들을 살펴봅시다.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귀신 들린 자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기도 했습니다. 풍랑 때문에 죽게 된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 주시기 위하여 풍랑을 잠재우시기도 했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물 위를 걸어오시기도 했습니다. 시각 장애자들의 눈을 고쳐 주시고 청각장애자들의 귀를 열어 주시고 말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을 열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모든 사역들은 모두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이처럼 생명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 생명 살리기 그리고 기독교가 추구하는 구원은 단지 먼 미래의 영적 생명의 구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내세를 염원하고 갈구하는 신앙이지만 지금 여기에서의 세계의 생명을 외면하고 소홀히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기독교 신앙이 오로지 영적 구원만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기독신앙은 인류와 이 세계를 향하여 대단히 메마른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생명 사랑에 관심이 없는 종교는 이 땅을 오아시스 없는 사막으로 만들고 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지금 여기에서의 생명 사랑”을 우리의 삶에 품고 있다면 오늘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온 자연세계의 생명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오로지 경제발전과 경제적 이익에 눈이 어두워 사람과 자연 세계의 생명을 함부로 대하던 일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자신의 삶에 담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져서 나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의 생명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살기 좋은 우리 사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일은 오직 “사람 중심”과 “생명 중심”의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 삶에 담아 낼 때 가능할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 조차도 주인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내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을 귀중히 여기셨습니다
마 12:1-13 / 최응희 목사(안디옥교회)
성경에서 인간에 대한 말씀의 첫 번째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말씀의 기초는 다 이 말씀속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그것입니다. 사람을 짐승으로 여기거나,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거나, 사람을 단순히 물질적 존재로 여기거나, 사람을 도구로 여기는 것들은 다 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말씀에 위배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라는데에 기초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을 그렇게 보셨기 때문에 그가 어떤 상황에 있던지, 비록 그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도 그를 귀중히 여기셨습니다. 그가 죄없다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속에 숨겨져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시면서 그를 대하시고, 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세워주셨습니다. 비록 그가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자주 충돌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를 용서하셨고, 죄인이라고 수근대는 삭개오의 집에 들어 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과 거침없이 대화하셨습니다. 그들이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법규 규칙으로 사람을 재단할 때에 예수님은 사람 그 자체를 귀중히 여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밀 이삭 사건(1-8)
어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거칠게 항의하였습니다. 안식일에 타작하는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항의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윗이 굶주린 부하들의 생명을 위해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떡을 먹인 것을 예로 드셨습니다. 이어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씀도 인용하셨습니다. 법보다 사람이요, 규칙보다 사랑이 우선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법의 근본은 사람을 살리는 데 있는 것이지 죽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정신이었습니다.
②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9-13)
두 번째 사건은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에 중풍으로 한편 손이 마비가 된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그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안식일에도 예수님이 병을 고쳐 주시는가 엿보는 것을 아시고 오히려 이 사람을 공개적으로 세우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마가복음3:4)고 물으셨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이 사람을 그 고통에서 풀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씀하시며 그 사람의 마른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행동은 동일하시고 거침이 없으십니다. 그것은 사람 사랑으로 행동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법규에 매여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악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사실 아주 열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글자 하나도 틀리지 않고 지키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지키려다 보니까 글자만 지키지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는 눈 어두운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만 문자만 읽고 그 뒤에 있는 말씀의 정신을 잊어버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것을 소위 문자주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글자만 지키는 것이지요. 대개의 경우 문자주의 신앙은 얼른 보면 아주 좋은 신앙처럼 보여집니다. 글자 그대로 지킨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글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지 못하고 글자만 읽으면 본래의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립니다. 거기 그런 글자가 있으니 그 글자를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은 잃어버리고 글자자체만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선적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독선적인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철저한 문자주의 신앙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정신은 잃어버리고, 문자만 머리속에 남기 때문에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마태23:24)’ 우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만큼 또한 그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이같은 행동들이 바리새인들과 항상 충돌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특히 안식일 때문에 바리새인과 많이 충돌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정신은 분명합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요, 선언입니다. 정말 놀라우신 말씀이요, 놀라운 사상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은 얼른 보면 하나님께 무엇을 해드리기 위한 계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을 위한 계명입니다. 사람을 평안하게 하고, 사람을 복되게 하기 위한 사람을 위한 법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 속에서 인간은 7일에 한번씩은 쉬어야 하고 특별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 영적인 풍성함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뿐 아니라 집에서 부리고 있는 짐승이나 종들에게도 다 해당되는 법칙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의 평안과 복된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법칙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모든 금지 규정의 덩어리로 만들어서 조그만 행동까지도 규제하는 쪽으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마치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처럼 여러 세세한 규칙을 붙이고 벌칙을 붙이고 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사람을 꼼짝 못하게 얽어매는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행동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더 철저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을까를 골몰하면서 나온 방법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철저함과 인간적인 규칙들은 사람사랑의 본래 하나님의 뜻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잘못된 믿음을 바로 잡기 원하셨습니다. 안식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전부가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힘을 얻고, 삶의 기쁨을 깨닫고, 사랑으로 살게 하는 것이 신앙이요, 믿음이지, 죽게 만들고, 정죄에 빠지고, 고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이 그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법과 사람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죽도록 얻어맞고 가진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나무 하나 없는 광야길입니다. 그곳에는 거의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강도를 만났으니 이제는 꼬박없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 때 그곳에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 시간에 급히 성전에 가고자 하여 그 길을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장은 갈등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주려고 하면 피투성이 그 몸을 만져야 하고, 그러면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피를 만진 사람은 성전에 들어 올 수 없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장은 법을 지키고자 그 죽어 가는 사람을 버려두고 총총 성전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두 번째로 레위인이 지나갑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제사 드리는 일을 돕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자신도 강도 만날까 두렵기도 하였거니와 지금 이 사람을 구해주다가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되니 그냥 못 본 척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람--이 사람은 당시에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자 곧 나귀에서 내려서 치료해주고 자기의 나귀에 이 사람을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그 밤을 같이 보내고 이튿날 길을 떠나며 주막주인에게 돈을 주며 이 사람을 부탁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예수님의 결론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법이 아니라 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글자가 아니라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최고의 법은 사랑의 법이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정신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활은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 외에 모든 신앙의 행위는 모두 사람을 향하여 하는 행위들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만 위하여 살겠다’고 결심했다면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교회만 봉사하면서 살겠다는 뜻입니까? 기도만 하면서 살겠다는 뜻입니까? 성경만 보면서 살겠다는 뜻입니까? 이 말의 참뜻은 ‘나는 사람을 위하여 살겠다’는 뜻이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결심은 텅 빈 헛된 결심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겠다’고 결심했다면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많이 바치는 것입니까? 매일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이 진실한 것이 되려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인간은 죄에 물든 존재이지만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법이 아니라 사람이요, 규칙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셨습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사람에게서 존귀한 하나님의 빛을 보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사람을 보고, 세상을 사는 방법입니다.
♬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됐을 때, 제일 먼저 변화해야 하는 것이 사람을 보는 눈입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귀히 여기고, 겸손히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존경하게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법을 잘 아는 사람을 존경합니까? 교회법에 능통한 사람입니까? 오래 믿은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이 풍성한 사람, 감사의 사람, 섬김의 사람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할까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잘 알고, 아무리 직분이 대단하고, 아무리 오래 믿었고, 아무리 뜨거운 믿음처럼 보여도,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연륜이 쌓이고, 우리의 믿음의 깊이를 더할수록 우리에게서 풍성해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함께 사람사랑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를 존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이웃을 존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을 갖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날 때에 이 세상은 점점 밝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모습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마 12:1-21 / 배영진 목사
오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이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제사보다 자비를! 이 말은 제사는 필요없고 자비만 필요하다, 이게 아닙니다. 내용이 없는 형식만 갖추고, 변화는 없이 제사만 드리는 것, 그걸 주님이 원치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7절에 보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너희가 이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무슨 말인가 하면, 너희가 신앙생활하는데 하나님의 자비를 모르고, 하나님의 자비가 너의 신앙에 없다면, 너희의 제사나 예배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게 호세아 6장에 나온 말씀이거든요. 하나님이 보실 때 이스라엘은 그때도 제사는 열심히 드리는데 자비가 없어요. 자비는 영어로 mercy 긍휼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자비가 없다, 그러면, 그것을 없을 무, 무자비라고 합니다. 바리새인의 신앙은 자비가 없어요. 자비는 내게 잘못한 사람, 내게 죄지은 사람에게 죄대로 벌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비는 그 상황과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가짐입니다. 그 사람의 처지를 공감하면서 아 딱하네 혹시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 이걸 자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성품이 풍성하십니다. 내가 죄에 빠져 멸망이 확실한데 그러한 나를 불쌍히 여겨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내 죄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르게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대속, 하나님의 자비예요. 그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가 예수믿고 오늘 여기 이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뭐냐? 하나님의 자비가 내게 쏟아진 것을 깨닫고 그 자비가 나로부터 흘러가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베풀고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들은 이상하게 이게 없어요.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보고 너희는 낡은 가죽부대다, 새 포도주를 너희 신앙에 못담는다 그러셨죠.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쏟아부어주신 자비가 내 삶에서 흘러넘치지 않는가? 나는 너에게 자비를 원한다 하시는데 왜 자비가 안보이는가? 그 이유가 두가지입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낡은 가죽부대라고 하셨을 때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첫째, 너희가 성경을 몰라서 그렇다 그래요. 둘째, 너희는 정죄를 일삼고 살아서 그렇다 그래요. 첫째 성경을 모르면 자비가 없습니다. 둘째, 정죄가 일상화되면 자비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원하시는 자비가 내 삶에 쌓이지 않습니다.
첫째, 성경을 모르면 자비가 없습니다.
다같이 7절을 읽어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안식일논쟁을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너희에게 자비가 없구나. 신앙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 6장 6절을 풀어주십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이 말씀을 너희가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 신앙에 자비가 있었을거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자비가 없다고 하실 때! 너희는 무자비하다는 겁니다. 왜 무자비하다구요? 너희가 성경을 몰라서! 그러면 성경이 뭐길래 성경을 모르면 자비가 없는 삶, 게다가 예수믿고 신앙생활 나름 한다고 하는데 자비가 없는가?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구약성경 전문가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경을 어떻게 연구했길래, 예수님께 너희가 성경을 모른다, 호세아 말씀의 뜻을 모른다, 이런 굴욕적인 얘기를 들었을까요? 예수님 말씀은 호세아 시절에도, 하나님이 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에 자비가 없었고 제사만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때도 그러더니 지금도 너희가 그렇구나! 주님이 개탄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왜? 무슨 자비가 바리새인들에게 없었다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안식일논쟁이 나옵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안식일을 어겼는가 지켰는가? 이것이 논란이 됩니다. 1절부터 14절까지 두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공교롭게 둘다 안식일에 벌어집니다. 하나는 1절, 예수님 제자들이 안식일날에 배가 고파서 길가 밀밭에서 밀이삭을 잘라서 먹습니다. 이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당신들은 안식일을 위반했다! 이걸 따지고 든 것입니다. 또 하나는 10절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안에 들어가 병자를 고치신 겁니다. 한쪽 손이 오그라든 환자를 보고 예수님이 고쳐주십니다. 이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또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볼 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어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다니! 이건 율법 위반입니다! 실제로 NIV 성경은 불법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Unlawful 죄인들이 맞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안식일을 어겼다고 따지고 드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거예요. 너희가 성경을 몰라서, 성경을 읽고 깨닫는 실력이 결핍되어서 그렇다 이것입니다. 3절입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너희가 이 성경말씀을 읽어보지 않았느냐? 이게 사무엘상 21장 얘기거든요. 또 하신 말씀이 오늘 7절입니다. 너희가 이 말씀을 알았더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호세아 6장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심각한 것이 뭐죠?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성경을 몰랐다는 겁니다. 다같이 한번 따라서 합시다. 성경을 모르면 자비도 모른다! 성경을 모르면 자비가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비가 없는 이유를 주님이 뭐라고 정리했는가? 성경을 몰라 그렇다, 사무엘상 21장 호세아 6장 몰랐어요.
그렇다면 성경을 읽고 성경을 깨달았을 때 성경이 뭘 가르쳐준다는 뜻일까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주십니다. 그 핵심이 자비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1장 얘기는 다윗이 사울에게 쫒기고 배고팠을 때 제사장 아히멜렉이 성전 제단에 올린 빵 진설병을 줘서 배고픈 다윗을 먹입니다. 율법으로 따지면 성전안에 진설병을 제사장 외에 먹으면 위법 맞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과 일행에게 진설병을 먹이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아히멜렉은 성경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요 그래서 자비가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배고파서 굶주리면, 가장 중요한 게 뭐죠? 자비를 베풀어야죠. 그 배에 허기를 채워주는 일이죠. 그런데 저 사람이 지금 배가 고픈가? 그 처지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것이 자비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보고 모른 척 하면 무자비입니다.
7절, 예수님이 또 가르치시기를, 너희가 호세아서 말씀의 뜻을 몰라서 이렇구나! 너희가 말씀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무자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성경을 몰라서 그렇다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몰랐고 하나님의 뜻을 몰랐어요. 그 말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몰랐습니다. 호세아시대 이사야시대, 예수님 오시기 8백년전, 이스라엘들의 신앙이 오늘 바리새인들과 똑같았어요. 그들은 제사 드리는 일과 형식과 의식은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쌍한 사람, 연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을 내고 모든 걸 하는데 연약한 이웃의 처지를 보는 눈이 없어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에게 치명적으로 없는 것이 자비였으니 그들이 성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성품,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인자하심이 나와요. 교회를 많이 다녀도, 하나님의 자비가 그 삶에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도, 그 삶에 자비가 없으면 성경을 모르는 것이며 아무 열매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깨달아서 그 목표는 뭐예요? 주님의 자비를 배우는 것입니다. 내 삶에 자비가 없는 것을 보고 놀라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배우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 자비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나의 처지를 헤아려주시고 불쌍히 여기사 자비를 베풀어주신 바로 그 얘기입니다. 이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뜻입니다. 그 자비가 십자가에흘러 나에게 쏟아져서 내가 예수믿은 것입니다. 그 자비로 내가 죄용서함 받았고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둘째, 정죄를 일삼으면 자비가 없다.
9절부터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이 한쪽 손 오그라든 사람을 찾아 고쳐주십니다. 왜요? 그 사람 고쳐주려고. 왜 고쳐줘야 하죠? 손이 상해서 기능이 고장났어요. 손이 오그라들어 마비되면, 삶이 얼마나 부자유스럽습니까? 인생살이는 고장나는 것 천지예요. 손도 고장나고 발도 고장나고, 허리도 고장나고, 등도 고장나고, 살다보면 마음도 고장나고, 관계도 고장나고, 고장이 나지 않는 삶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을 보실 때 그 사람의 고장난 처지를 먼저 살펴보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자비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아닙니다. 이 자비가 전혀 없어요. 10절에 손이 오그라든 환자가 있는데, 그 상황에 완전히 다른 두 안목을 보세요.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쳐주려고 하십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다가가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아닙니다. 손 오그라든 환자의 상황, 그 아픔에 관심이 없습니다. 10절, 바리새인의 관심은 저 예수를 고발해야겠다, 저것은 합법인가 불법인가? 그래서 고발하려고 애를 씁니다. 아니 안식일에 병을 고쳐도 괜찮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고발전문입니다. 고발이란, 저 사람이 죄가 있어요!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둘중 하나입니다. 정죄를 연습하고 사는가? 자비를 연습하고 사는가? 신앙생활에서 자비가 빠지면 당연히 고발입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찐빵은 청평검문소 앞에 있습니다. 남이섬에 가는 길목에 있는 집 신바람찐빵집이 최고입니다. 왜 그러냐? 찐빵속에 단팥이 빵 끄트머리까지 가득히 들었습니다. 찐빵의 핵심은 뭐예요? 전문용어로 안꼬! 안꼬가 없으면 찐빵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안꼬는 뭐냐?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내 삶에서 실시간으로 흘러나오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십시오. 자비 아니면 고발입니다. 고발은 정죄입니다. 주님은 자비의 눈을 갖고계십니다. 흠있고 고장난 삶을 고쳐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아요. 정죄의 눈을 갖고 삽니다. 누군가 걸리면 지적하고 고발하고 정죄해요.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도 선지자들을 보내서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말씀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이스라엘 하나님 백성들에게 자비가 없었어요. 그런데 8백년전 호세아시절 이스라엘이나 오늘 바리새인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왜 우리도 이 고발과 정죄의 증상이 이렇게도 많을까요? 이것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우리의 본성, 육체의 소욕 옛습관은 내버려두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보시는 자비의 안목을 날마다 내 속에 전폭적으로 집어넣는 일이 바로 성경을 매일 읽고 성경을 깨닫는 일입니다. 안그러면 우리는 자비가 없습니다.
생각을 해봅시다. 주님은 24시간 자비가 흘러나오지만 우리는 사실 24시간 정죄가 흘러나옵니다. 여러분 누가 연약하고 미숙한 모습을 보일 때, 아하 힘들겠네 가서 안아주자! 이것이 먼저 생각나요? 아 짜증나네 왜 저러지? 이게 생각나요? 짜증이 먼저 납니다.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에 골인하면, 결혼식 끝난 후 1년만 지나면 상대방의 삶의 모습에 맘에 안드는 것 미숙한 것을 반드시 보게 됩니다. 아 왜 저렇게 하지? 이것만 고치면 참 좋겠는데, 맘에 안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게 안되나? 그게 뭡니까? 오늘 10절에 나온,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입니다. 우리 목장에서 내가 별로 맘에 안든 그 사람,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입니다. 내가 일처리하면 이렇게 하겠는데, 어머나 저 사람은 왜 일처리를 저렇게 하지? 여러분 도저히 양에 안차는 직원이 있습니까?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입니다.
부부생활하면서 누군가가 율법주의 신앙을 갖고 있으면 두사람 회복이 어려워요. 제가 깨달아야 할 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낱낱이 알려주고 관계회복이 되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35년째입니다. 깨달은 것이 많습니다. 왜 그렇게 하냐? 이걸로 해결이 안됩니다. 지적할 것보다 덮어줘야 회복이 됩니다. 실수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완벽합니까? 주님 앞에서 우리는 다 모순덩어리이예요. 저 사람은 저 약점이 있구나, 내가 그걸 덮어줘야지, 이것이 주님의 자비입니다. 마음을 품어줘야 그가 회복되고 좋아집니다. 유명한 영화 레미제라블에 보세요. 장발장이 어떻게 그가 회복됩니까? 신부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귀한 은촛대 훔쳐 달아나다가 형사에게 잡힙니다. 형사가 체포해와서, 이놈이 신부님의 은촛대를 훔친 게 맞죠? 신부님이 말합니다. 아니요. 그것은 제가 형제에게 준 선물입니다. 여기서 회복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이게 자비입니다. 자비가 흐르면 회복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주님의 자비의 특성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은 어떤 경우도, 아무리 상처가 나고, 상태가 심각하고 절망적으로 보여도, 그 고장난 상태를 회복시키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같이 20절 읽어볼까요? 이것이 주님의 성품인 자비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 이미 심하게 꺾여, 일어서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다시 일으켜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주님의 자비로 오늘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말씀받고 과제는 이제 명확합니다. 성경을 읽고 배워 주님의 성품, 자비가 어떻게 내게 흘러왔는지 날마다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실제 삶에서 고발과 정죄를 그치고 자비의 성품이 플러가도록 순종의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신앙생활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마 12:1-13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 두 가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논쟁이라 했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걸어온 시비를 일축하시고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던 그들의 시도를 무산시키신 일입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 먹은 일을 두고 벌어졌으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주신 일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논쟁의 초점은 성전이나 제사나 안식일에 관한 법의 참 정신이 무엇이냐 하는 데에 모아지며, 그 논쟁을 통해 주신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와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 먹은 일을 두고 벌어진 시비를 살펴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을 바르게 지내는 것은 극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고통이라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에게는 어느 안식일에 목격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은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따르면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것입니다. "잘라 먹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잘랐다"는 것은 이삭들을 "손으로 잡아 훑어서 뜯어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추수하는 행위로 간주한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눅6:1에 따르면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다"고 합니다. 이삭을 껍데기 채로 그냥 먹을 수 없으니 껍질을 벗기기 위해서 이삭들을 두 손으로 비볐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도리깨질에 해당하는 행위로 여긴 것입니다. 이삭을 손으로 비빈 다음에는 알곡과 겨가 뒤섞인 채로 그냥 입에 넣었겠습니까? "후" 불어서 겨를 날려버리고 밀알만 먹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키질 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 모든 행위를 바리새인들은 음식준비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먹을 음식준비는 그 전날 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서 보는 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3-5절에서 보는 대로 두 가지 사례를 들어서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반박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3절과 5절에 보면 이 두 가지 사례를 드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러이러한 일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반복하여 반문하셨습니다. 즉 귀에서 귀로 말로만 전해져온 규정들을 근거로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실제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로 반박하신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이란 무슨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그것은 삼상21:1-6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사사요 선지자였던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시고 버리셨음을 알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다윗을 찾아가 그에게 기름을 부은 바 있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쳐죽임으로써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어 있었으며, 온 백성들로부터 "사울이 죽인 사람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사람은 만만이라"는 칭송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울로부터 시기와 핍박을 받게 되고 그의 살해위협을 피해 도망 다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에게 쫓겨다니느라 굶주린 가운데 다윗 일행은 놉이라는 곳에서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을 맞게 된 제사장 아히멜렉은 비록 하나님께 바쳐졌던 거룩한 떡이고 제사장밖에는 먹을 수 없는 떡이긴 하지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국민적 영웅에게 양식을 제공하기를 거절할 수가 없어 다윗에게 진설병을 내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위에 대한 비난은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실 속에서 우리는 제사에 관한 규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규례를 정하신 하나님께서 택하여 그의 백성의 왕으로 세우시고자 기름 부으신 다윗과 그를 좇는 굶주린 무리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더 귀한 일이며,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돕는 일은 더 크고 중요하다는 사고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6-7절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 사고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처한 상황에 적용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성전과 제사에 관한 규례를 어기고도 정죄되지 않았다면 하물며 온 세상을 구원하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자신과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관한 사람들의 규정에 거스르는 행위 때문에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음을 예수님께서 밝히셨음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한 두 번째 사례는 무엇입니까?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일을 맡아 하는 제사장들의 예입니다. 만일 안식일에 아무 일도 안 해야 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법이라면 하나님께 제사는 누가 드리냐는 것입니다. 안식일준수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안식일보다 더 크고 존귀하신 분이시므로 안식일에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해도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안식일 자체가 무조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두 사례를 통한 대답 속에서 우리는 "다윗과 그의 무리들이나 제사장들도 그렇게 했다면 하물며 그들보다 더 큰 나와 나의 제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는 예수님의 반문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6절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하신 말씀은 그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한 것을 "성전보다 더 큰 것이 여기 있느니라"로 옮겨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많지만 궁극적 의미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 의미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하시는 일은 성전에서의 제사법을 정하시면서 하신 일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그 무리들의 허기를 채우시는 일이나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으시는 일은 그 중요성에 있어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일과 비교할 바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준수가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관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그저 아무 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는 날이라는 데에,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날이라는 데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정신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줌으로써 사람을 진정 안식하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복잡한 규정을 지키느라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랑으로 굶주림을 해결함으로써 안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키느라고 쫄쫄 굶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프거나 몸이 불편해 고통받는 사람이 하루 한 시라도 빨리 낫고 평안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원하시지, 안식일 때문에 사람의 고통이 한 순간이라도 연장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피해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여기서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백성들을 구별되게 하는 것은 외형적 규정들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라기보다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의 준수를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단지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통한 하나님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복잡한 규정들을 만들어낸 후 그 규정들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 안식일준수인 줄 알았던 데 반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참 뜻인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그 가르침을 막2:27에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덧붙여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당신에게 안식일에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을 행할지를 정하고 명하고 행동할 자유와 권리가 없겠느냐고 반문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관한 그의 자유와 권리를 선언한 것이 본문 8절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주인이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말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지를 그의 뜻대로 정할 자유와 권리가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정하신 안식일준수의 최고의 법은 사랑과 자비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신 예수님께서 그 자유와 권리를 다시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신 사건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일입니다. 눅6:6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의 그 손이 오른손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사실은 그를 불편하게 하고 남 보기에 민망스럽게도 할뿐 아니라 생계를 어렵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의하면 그 사람은 예수님에게 자기의 마른 손을 고쳐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대뜸 그를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손 마른 사람도 가만히 있고 예수님도 아직 가만히 계시는데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먼저 예수님에게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이것은 거의 그들이 예수님의 등을 떠밀어 병 고치게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고침을 받기를 그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는 증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눅6:7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오른 손 마른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며, 또 그렇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공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는 무조건 아무 것도 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미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랑의 실천이라면 안식일에도 할 수 있고 또 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의 행위를 비난하고 예수님 자신을 정죄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했고 율법준수에 관한 형식적 규정들에만 매어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참 뜻인 사랑과 자비를 알지도 못했고 그것을 베풀 의지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분명하게 성전과 제사와 안식일에 관한 참된 가르침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지는 14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을 품지 않으면 사람들을 정죄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밖에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대강절 가운데 있습니다. 성전보다 더 크신 이는 알지 못하고 성전을 우상화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며, 자비는 베풀 줄 모르고 제사에만 열중하는 죄를 범해서도 안되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알지 못하고 안식일만을 절대화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안 계신 성탄절을 준비하고 기다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교회가 되지 말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뿜어나지 않고 이 세상을 향해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탄절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모시고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길은 사랑이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마 12:1-21 / 박지온 목사
아마 우리 살아있는 동안에 어느 날보다도 중요한 것이 주일날입니다. 이것을 옛날에는 안식일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안식일에 대한 시비가 성경에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놓칠 수 없어서 좀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것을 좀 분석을 해가면서 좀 봐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우리 눈들이 복음이 안 되면 헛된 것을 보도록 되어있는 게, 그게 상식인 것 같아요. 그 헛된 것들로 빠지게 되는 배경이 이제 종교 생활로 빠지고, 복음이 안되면 우상으로 빠지고, '복음 됐다, 됐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안 되면, 우상으로 빠진다! 그러면 다른 것은, 다른 것을 더 위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빠지게 되고, 그렇게 빠지게 되면 배경으로 안식을 지킨다는, 말하자면 주일을 거룩이 지킨다는 사실은, 자동적으로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사실이 된다는 사실은 복음이 되어야 되고, 복음이 되면 그 다음에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풀려져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일을 말씀을 통해서 말씀 듣고, 또 설교시간 통해서 말씀이 붙잡혀 지고, 또 말씀에 은혜를 받고, 이것이 그저 보통 일이 아니고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말씀이 여기서 풀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문제를 가지고, 근본적으로 유대인들이 이 사실이 안되었기 때문에, 다른 것에 열심을 내고, 다른 것에 열심을 내다보니까 실컷 만들어 놓고는 헛일하게 되는,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안식일에 대한, 말하자면 주일에 대한 개념이 바로 안 열리고, 쉽게 말해서 예배라는 사실이 바로 안되면, 말씀을 받고, 말씀을 받는 이 순간이 제대로 안 되면, 어떤 면에서 산다는 것도 늘 헛된 삶을 살고, 또 어떤 것이 중요하다, 나쁘다! 그 이전에 방향이 전혀 다른 것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하게 되는 이런 모습을 우리가 발견해야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그 선생님들이 하나님이 주신 그 계명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해석하는 것보다도, 그 유대인들의 선생이라면 다른 게 아니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축이 된 게 아닙니까! 그 모든 하나님의 주신 계명을 그들의 뜻을 따라서, 그 계명들을 해석을 한 것이 바로 타락이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지적하신 것이 이제 우리 주로 산상수훈에 주님께서 많은 문제들을, 이제 중요한 부분들을 지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말씀대로, 사실은 제가 오늘 본문에 중점적으로 좀 말할 것이 1절부터 8절까지 읽은 부분이 되겠습니다. 이 부분에서 보면, 그 사계명인 안식일에 중요한 의미를 바로 해석하도록 말씀하신 것이 오늘 주 내용이 되겠습니다. 먼저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이 바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을 때에, 제일 먼저 오는 것이 예배의식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천주교의 예배의식! 굉장히 예배의식이 아주 장엄하죠. 중요하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 뭐 의식으로 봐서는, 차라리 예배를 드릴 때에 천주교에 가면 예배를 드리는 기분이 난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 하잖아요. 뭐 우리는 예배시간에 와 가지고, 뭐 이야기도 하고, 이웃사람들 보기도 하고, 말도 걸기도 하고, 주보도 뒤적거리고 있는데, 거기가면 그런 게 아니잖아요. 무릎 딱 꿇고, 뭔가 경건하게 그렇게 자세를 갖고, 그렇게 폼을 잡고, 예배를 드리는데, 미사를 드리고 합니다. 그 다음에 뭔가 의식을 아주 구체적으로 이렇게 진행을 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가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라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요, 그리고 예배라는 것이 하나님을 만난다 그럴 때에, 하나님 만난다는 것이 그냥 뭐 교회 왔다 갔다는 것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내 가슴에 닮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배 자에게 지금 중요한 것이 목사로 통해서 말씀이 임하게 될 때에, 그 말씀이 뭐 어떻게 준비되어 왔던지 간에,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질 수 있는 은혜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축복이죠.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 말씀을 들으러 온 모든 성도들이 목회자를 통해서, 말하자면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하여 질 때에,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은혜! 이게 예배 성공의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되어져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예배 의식을 복음이 바로 안 되어 졌을 때에, 차라리 어떤 면에서 그 말씀은, 그리고 실제로 어떤 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사실보다도 나변의 것에 눈이 돌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그 의식을 더 중요시 해버리고, 어떤 폼을 더 중요시 해버리고, 모양을 더 중요시하고, 때에 따라서는 어떤 열심이라든가, 때에 따라서는 어떤 그 우상숭배 나오는, 구제라든가 이런 어떤 다른 것에 관심을 쏟아 부어 버리는, 이런 문제들이 나오게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뭔가 타락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배라는 것에 대해서, 그 예배에 중점 되는 중심, 곧 복음에 대한 것이 눈이 안 열리니까! 뭐냐하면, 그 예배드리기 위한 나변의 문제, 뭘 하지 마라! 뭘 하지 마라! 심지어는 이제 안식일에는 어느 수준의 거리는 가지 마라!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뭐 어떤 수준의 거리를 가면 어떻습니까! 그런 문제까지, 뭐 안식일에는 뭘 하지 마라! 여러 가지 많은 말이 있었죠.
그래서 이런 어떤 개념들이 우리가 복음을 딱 붙잡기 전에는, 옛날에는 거의 이 유대 식 배경에서 어떤 안식이라 하지 마라! 율법적인 그러니 율법이라 붙였는데, 율법도 아니에요, 이건 개 법이라! 완전히 이상한 것을 거기 붙여 가지고, 거기에 따라서 뭔가 하고 있는 것이 안식을 지키고, 그것이 예배라는 것으로 통했거든요. 그러니 예를 들어서 이걸 너무 악평한다고 듣지 마시고,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복음이 안 되어 버리면, 그럴 수 있어요. 그 자체를 붙잡고 살수 있으니까! 말하자면, 주일날 일 안 한다! 그래서 일 안 한다고 해서 예배를 잘 드렸다! 그것은 아니거든요. 성경에 일 안하고 빈둥빈둥 실컷 누워 자도 그것은 예배다! 그런 개념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주일날 뭔가 돈 안 쓴다, 돈 안 쓴다고 그런 개념이 아니거든요. 주일날 또 필요하면 돈을 써야 되죠. 그리고 참 하나님이 돈 쓰기를 원하시면 돈을 써야 되는 문제, 그런 어떤 개념으로 살았다는 말이죠. 그리고 주일날 뭔가 이 어느 거리를 가지 않는다! 이래서 옛날에는 그런 거리를 가지도 않았죠. 사실상 그 주일 개념에 있어서 부산에 그 메시지 듣고, 그렇게 가기 위해서 자동차 타고 어느 시간 간 것, 옛날에 개념은 말하자면, 옛날 주일성수의 개념에서는 상상을 못해요. 왜 버스 타고 가는 것조차도 꺼렸으니까!
그러니 차를 타고 뭐 부산까지 같다가온다! 그것은 죽었다가 깨어도 생각이 안 되는 겁니다. 가다가 졸음이 와서 커피한잔 뽑아 먹었다! 그건 더군다나 생각이 안 될 정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막 졸음을 참고, 커피를 안 빼어먹고 하루를 지냈다! 그것을 가지고 안식일을 지켰다! 이런 개념은 이 말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우리도 모르게 참 복음이 안되면, 그렇게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참 복음이 안되면 그것가지고 시비를 걸도록 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이것을 범했으니까, 안식일을 범했다! 이것이 지금 유대인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걸고 들어오는 이 안식일에 대한, 예배에 대한 이 개념에 이 반항입니다. 이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설명을 잘 해주시고있는 것이죠.
여러분 그 잘 알다시피 부모 공경을 잘 못했던 사람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부모님이 돌아가신 자리에서 제일 많이 웁니다. 그냥 통곡을 하고, 땅을 치고 울더라 구요. 그런데 제가 그 임종을 많이 겪어봐서, 제일 많이 통곡하고 우는 자녀들 보면, 틀림없이 살아 계실 때에 잘 공경을 못했던 분들입니다. 살아 계실 때에 최선을 다해서 공경했던 분들은 그렇게 울지를 않아요. 그리고 복음 붙잡고 따라 가게 되면 오히려 마음에, '참 잘하셨다! 참 잘 가셨다!' 이래가지고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이렇지, '왜 벌써 죽었느냐!'고 고함을 지르고, 더 살면 자기 때문에 더 고생인데도, 그런 식으로 나오는 일들이 참 많더라 구요.
그러면서 그런 사람들이 뭐냐하면, 돌아가신 후에 제사를 또 많이 주장합니다. 막 내가 살았을 때에 효도 못했기 때문에, 제사를 잘 드리면 효도를 하는 줄 알고, 그게 귀신 불러 망하는 줄은 모르고, 그런 식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들이 많습니다. 무슨 문제를 가르치느냐 하면, 핵심을 놓쳐 버리면 전혀 다른 것으로 엉뚱한 일에 열심을 투자하고, 노력을 투자하고, 결국은 뭐냐하면, 핵심을 놓쳐 버리면 망할 방법에 빠져 버립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중요한 교회에 예배에 대한 핵심을 놓쳐 버리면, 중요한 이 축복에 방향을 놓쳐 버리면, 우리 생활 전체가 다른 데로 빠져 버립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여기에 중요한 부분으로 지적을 하시고 말씀을 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본성이다 그렇게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제가 어떤 그 노인 분이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돈을 대학에 투자를 했습니다. 다! 수억을 대학에다가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어넣고 한 이야기가 있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자기가 이북에서 넘어올 때에 자기 아들과 같이 내려오지 못해서, 그러니까 지금쯤은 그 대학에 아이들이, 그 연령의 자기 아들인데, 그러니까 그 아들에 어떤 그런 생각이, 지금까지 자기가 벌어온 모든 돈을 그 대학에 넣을 수 있는, 그런 어떤 계기가 되었다! 라는 그런 이야기를 제가 종종 듣고 신문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의 어떤 그 인간 심리가 되고, 또 당연한 이야기죠.
그리고 또 잘못한 일이 많은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그 자기도 모르게 좀 선행을 하는 것을 뭔가 이 본성으로 그렇게... 그래서 전에 선행하는 사람들 뒤를 조사해 보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 그 뒤를 조사해 보면, 다른 게 아닙니다. 뭔가 꾸린 사람들이 많이 돈을, 사기 치기도 하고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면을 보면서,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돈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돈들이, 이것이 참 복음 적인 배경이 되어야 그 헌금과 헌신이 복이 되는 겁니다. 지속적으로 복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자기 위안으로 끝날 뿐이지, 뭐 그것도 필요할 수 있기는 있어요. 자기 위안이 되는 것은 잠시간, 하나님의 진실한 축복과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뭐 헌금한다고 그럴 때에, 헌금 강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왜? 가장 하나님의 계획과 축복에 복음이라는 사실을 붙잡고 보면, 여러분 헌금이다 내 집짓기 전에는, 내 교회 짓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어떤 면에서 후대 키우는 일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 후대 키워서, 신학생들 바로 안 잡아 놓으면, 바로 안 길러 놓으면 복음화 된다는 이 사실은 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마침 참 장로님들과 함께 의논해서 3억이라는 돈을 헌금할 수 있는, 건축헌금에서 빼어서 지금 헌금하고 있거든요. 먼저 할 수 있다는 것은, 이건 참 감사 할 일이고, 우리가 어떤 면에서 중요하고 축복된 결단이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먼저 그 대전에 올라가서 여러 사람 만나면서 뭔가 이런 이야기가, 우리는 현금으로 건축위원회에서 총신 헌금을 동참을 했다! 그러니까 모두 놀라요. 상당히 자극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서울 임마누엘 교회가 10억 해서, 은행대출 해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우리 3억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교회들이 내가 사실은 임마누엘 10억 했다 그러니까, 눌려 가지고 3억밖에 못 했다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또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 송현 교회 3억 했다니까, 우리 또 눌려 가지고 얼마 해야 될지 모르겠다면서, 이렇게 웃고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만은, 이게 눌린다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중요한 것이 우리 후손 키운다는 것은, 우리 장래가 여기 다 있습니다. 잘되고, 못된다!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참 하나님의 계획이다! 축복이다! 그래서 헌금하는 것이 축복 받는다! 안 받는다! 이런 개념 자체가 아닙니다. 그 여러분들이 헌금하면, 얼마나 축복 받는다! 안 받는다! 이런 개념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영원하신 축복, 그 대열에, 그 흐름에, 그 방향에 나와 여러분이 섰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 핵심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이 땅에, 세계 복음 화에, 놀라운 역사 속에 우리가 섰다는 그런 부분! 그래서 여기 헌금에 대해서 막 축복 받아라! 뭐 받아라! 이렇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사실 저는 없어요.
그런데 감사한 것은, 모든 그 뭔가 복음을 붙잡은 사람들 가슴속에, 이 총신에 대한 헌금은 참 마음에 뜨겁게 담고 있더라 구요. 아마도 오늘 여기에 말씀 보니까, 주보에다가 우리 대구은행 계좌로 해놓았습니다 만은, 대구은행 계좌로 들어와도 아마 전부다 명단이 다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신문에 다 나오지 싶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 이제 1억 이상 내는 사람들은, 우리교회에 1억을 내어도 역시 그 1억 이상 헌금 낸 사람들은 평생 회원으로 자손만대에 총신가면 장학생이 되고, 장학금을 받고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아마, 그 다음에 다른 어떤 혜택들도 물론 여러 가지 나옵니다 만은, 제일 큰 것은 그렇게 기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냐 하면, 정말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역사 속에 우리가 섰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내가 얼마 뭘 했다! 얼마 뭘 안 했다! 이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러니 이건 축복이다! 아니다! 붙일 명분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섰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과 그 역사에 흐름 속에 같이 이어져 간다는 사실자체가 복이요. 이것이 모든 문제 해결 자이신 주님의 역사 속에, 우리를 세우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성취시키는 역사이지, 뭔가 내가 이것 했다, 저것 했다! 거기에 개여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특별히 오늘 말씀을 기억을 하셔야 되겠습니다.
골로새서 2장 2절 보면,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골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시간이 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전도해라! 뭐해라! 다 중요한 말이요. 또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될 말이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 개인,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뿌리를 확 내려서,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개인이 응답 받고, 내 개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실적인 증거를 가질 때에,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보화라 이겁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 풀려나가는, 이것이 안되면서, 자꾸만 다른 것을 살피고, 다른 것을 요구할 때에 이것을 가지고 뭐라 그러느냐? 기복신앙이다!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참 복음이라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안식이라고 하는 것이, 다시 말해서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를 회복한다! 다 아닙니까! 예배를 회복한다는 것은, 은혜로 되는 것이지, 이것은 인간의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악한 흑암의 세력은 개인에게 교회에서 예배회복하지 못하도록, 절대적인 방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명심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 이 예배 회복한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여기서 다 해결되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그 자폐아 캠프를 할 때에, 4회 째입니다. 네 번째라는 말이죠. 6개월마다 한번씩 하죠. 여름에 한번하고 여름 방학 때, 겨울 방학 때 한번 하는데, 이번에 아마 우리 자폐 아이들이 50, 60명, 그 다음에 부모들이 50, 60명, 그 다음에 천사 도움이가 한 50, 60명, 그 다음에 건강한 사람들과 또 다른 아이들이 또 많이 참석해서 합쳐서 200명이 넘게 참여를 했습니다. 참여했는데, 아마 첫 번에도 한 200명 가까이 참여를 했습니다. 역시 한 50명 자폐아! 첫 번에 예배를 드릴 때에 네 번째가 되니까, 한 1년 반전입니까? 그런 어떤 시간밖에 안 흘렀죠.
그때에 제가 기억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면, 제가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떠드는지, 뭐 그러니 이 아이들이 모여 놓으니까, 2/3가 괴성을 지르고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막 책상 밑으로 뒹굴고, 내가 앉아 있는 책상이 내 앞에 있었는데, 내가 앉은 책상에 왔다, 갔다 거리는 겁니다. 서 가지고 막 건너뛰면서, 그러니까 이제 윤성주 목사 이야기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내 생애에 예배를 마쳐야 될 것인가? 이 말씀을 해야 될 것인가, 말 것인가?' 메시지를 하면서도 고민하고, 이렇게 어려운 메시지를 전해 보기는 처음이라고 그러더라 구요. 그럴 겁니다.
여러분 아마 그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가 좀 안될 겁니다 만은, 그러니 여러분 2/3가 고함을 지르고, 괴성을 지르는데, 괴성을 질러도 보통 '아∼'가 아니고, 이건 여러분 듣기가 민망할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그리고 막 땅으로 기고, 위로 뛰고, 사람 타 넘고 그러는데, 힘은 있어 가지고 보통 일이 아닙니다. 바로 그것이 1년 반전입니다. 우리가 네 번째이니까, 그 정도입니다. 이번에 내가 놀란 것이 한 둘 정도, 괴성을 지르는 아이들이 한둘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학생들은, 그 다음에 아이들은 정상 아이들이 드리는 예배처럼, 보다더 조용하게, 한시간인데 그것도 메시지를 한시간 딱 하는데, 한시간 동안 앉아있어요. 앉아 가지고 메시지를 딱 듣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 그것은 기적이라고 붙이기보다도, 그것은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그 그러니까 이제 일단 첫 시간을 그렇게 예배드리고, 나누어서 그 다음부터는 부모들에게 메시지 전하고, 그 다음에 유년주일 담당, 그 전담 교사들 와 가지고 주일학교 자폐아 아이들을 맡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드리는데 와서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 이제 찬양 인도하던 전도사님이 이번에 와서 놀란 것은, 이 아이들에게 정상인보다 훨씬 더 조용하게, 확실하게 예배가 회복되었더라! 이 말씀을 하더라 구요.
그리고 예배가 회복되는데, 그런데 그 예배가 회복되는 말속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칫 오해할 수 있어요. 찬송을 부를 때는 보면 어떤 경우가 있느냐 하면, 이 아이들이 예배가 너무 좋으니까, 찬송이, 이 노래하는 것이 너무 좋으니까, 아이들이 찬송 부를 때는, 정상인들은 가만히 앉아 가지고 찬송 안 부릅니까! 이 아이들은 벌떡 일어나서 펄펄 뛰어요. 막 뛰면서 찬송을 부릅니다. 그 다음에 말씀들을 때는 조용히 앉아서 말씀 듣고, 그 다음에 이 아이들이 뭐라고 그러느냐? '다음에 꼭 오겠다!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이 캠프가 너무 좋다!' 그래서 처음에 그 2/3정도 뭐 떠들었다고 하는 것은, 귀를 보통 반 이상이 귀 막고 안 들어요.
나는 그 사단의 역사가 무섭다는 것을 메시지 들어가는 것을 그렇게 싫어합니다. 반 이상이 귀를 막고 안 듣던 아이들이 이번에는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몇이 귀를 막고 있다가 떼었다는 것을 봤다 그러는데, 윤 목사님이 한 두 사람 정도가 귀 막고 있다가 떼었다고 그러는데, 다 끝까지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떼고, 그러더랍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역사는, 사단의 역사가 예배를 못 드리게 하는 것이 엄청난 주목적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들어가면 깨어지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예배가 회복이 안 됩니다. 여러분 예배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차제가 뭐냐? 이미 벌써 축복이 임했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미 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임했다는, 그런 역사를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 참 감격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도저히 이것은 세상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하나님께서 이 구체적인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예수님께 대하여 2절 말씀에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그렇게 지금 이의를 걸죠.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 뭐냐하면, 밀밭사이로 가는데, 제자들이 뭐 배가 되게 고팠던 모양이죠. 밀밭사이를 지나가면서 아마 밀을 이삭을 뽑아 가지고, 비벼 가지고, 아마 식사대용으로 상당히 배가 많이 고팠는 것 같습니다. 먹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지금 예수님께 말씀을 하죠.
그때 2절에 물으니까, 3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 12: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사무엘상 21장 6절에 보면,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그랬습니다. 다윗이 이제 쫓겨가면서 너무 배가 고파서 이제 제사장을 찾아갔더랬는데, 평소에 이제 자기를 돕던 제사장을 찾아갔더랬는데, 마침 먹을 것이 없어서 제사장은 제사에 물려낸 진설병을 다윗과 그에게 주었더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건 예외적인 그런 사건입니다 만은, 그러면서 그 사실을 하나님이 죄로 정치 않았다! 그런 배경을 설명을 하죠. 그런데 반대로 여기 보면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 출애굽기 29장 33절에 보면, "속죄물 곧 그들을 위임하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데 쓰는 것은 그들은 먹되 타인은 먹지 못할지니 이는 성물이 됨이며" 원래는 그것을 타인이 못 먹도록, 제사장 외에는 못 먹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은, 그것을 먹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우시아라는 왕이 좀 교만해져 가지고 역대하 26장 16절 보면, "(대하 26:16)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이때에 웃시야가 문둥병이 들었더라 그랬습니다.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을 범할 때에 즉시 하나님께서 그 거룩 범한 자에게 벌을 내리신 것이 구약에 증거다! 그런데 다윗은, 그리고 그 배고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런 순간에 제사장이 거룩한 떡을 빌려 줬을 때에, 그것이 범죄로 여겨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즉시 어떻게 합니까? 즉시 그에게 벌하십니다. 그런데도 다윗과 그 일행들을, 그런 벌을 내리지 아니했다! 그게 오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되죠.
그러면 더 문제는 뭐냐하면, 그 밑에 구체적으로 더 나올 수 있습니다 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비상 수단이, 오늘 여기에서 조금 뭔가 의미를 가지고 이해를 해야 될 부분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것은, 아마 제자들이 주일 성수를 위해서, 말하자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뭐 바쁜 일에 있었던지 뭐 준비하다가 못했던지 간에, 아침을 먹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을 못 먹고, 아니면 금식하는 절기였을는지 모르지 만은, 주로 금요일에 금식하는 절기가 되니까, 어쨌든 밥을 못 먹고 출발했습니다.
그런 중에서 이들이 너무 시장한데, 이 시장한 것을 뭔가 해결해야 될텐데, 해결할 길이 없고 시간이 없습니다. 왜? 안식일 시간이, 예배 시간이 지금 바쁜데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마침 밀밭사이로 지나가게 하셨더라! 어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필요를 이루시기 위해서, 그 하나님의 필요를 이루시는 일에, 하나님의 의무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그 사람들의 가는 길에, 필요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마침 밀밭사이로 지나가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렇게 어떤 주경 학자들이 이해를 하고 써 놓은 것을 제가 봤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계획을 가지고, 그 뜻을 붙잡고, 그 다음에 그 방향을 맞추어 나가게 될 때에,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최소한의 모든 필요는 주님이 채워 주신다는 배경입니다. 여러분 지금현재 세계 복음화 할 때에 인간적으로 봐서는 전혀 공급받을 수 없는 그런 위치와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 그리고 하나님께서 뜻을 이루는 일에 여러분과 저를 세워서 그 뜻을 의무로 감당하기를 원하는 마음만 가지고 출발해도, 그 출발하는 모든 길에 하나님이 필요를 공급하시는 섬리와 역사를 배경으로 약속하여 주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복음 위해서 살아간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지, 사람이 책임져 주는 것 아닙니다. 저는 지난 과거를 조금 돌이켜 보면서, 그 다음에 조금 뭔가 이 극단적인 그런 어떤 순간 순간들이 좀 닥쳐왔고, 심지어는 뭐 굶을 수밖에 없는 그런 문제들이 닥쳐왔다 싶어도, '주여, 이 일을 위해서는 내가 굶겠습니다!' 작정만 했는데도, 굶어 가지고 고통받을 수 있는 환경이 올 수 있는데도, 그런 것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이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을 나는 너무 많이 겪었거든요. 여러분들이 정말 복음 붙잡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향했을 때에, 기업이나 직장이나 거기에 삶이나 사업이나 모든 것이 거기서 풀려 나가는 것입니다. 개인의 동기나 이상한 것을 가지고 듣는 게 아니죠.
그래서 산업선교! 그래도 요즘 말씀을 자꾸 하고, 우리 교역자 산업 선교회에서 전체 적으로 안 이룹니까! 문제는 뭐냐하면, '돈을 벌겠다!' 그 문제보다도 이런 믿음과 방향을 먼저 바로 잡자는 그것이 바로 산업선교의 중요한 핵입니다. 그걸 찾고 나면 축복은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실 겁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 교회가 참 복음의 역사 위해서 하나님의 계획하신 그 계획 속에 세워졌다 누가 책임집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인간이 책임지고, 내가 책임지고 그런 게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에 내가 책임지겠다! 어쩔 겁니까? 사람이! 하나님이 책임지겠다! 하나님은 미쁘시니, 하나님은 믿을 만 하니까, 그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 여기서 모든 것이 보장이 되고, 모든 것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이 일이 오늘 중요한 이런 말씀 속에... 그래서 최소한 말하자면 제자들이 밀밭사이로 가서 밀로 통해서 배를 채우는 것, 제자들로 봐서는 최소한의 어떤 그 양식 공급이죠. 양식공급이나 그들에게는 또 그것을 만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로 통해서 계획하셨다는 사실까지 학자들에 의해서, 좀 오늘 해석을 한 것을 제가 소개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또 여기에 나오는 말씀이 뭐냐하면, 그 다음에 나온 말씀입니다. 12장 5절이죠.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안식을 범한다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려질 수 있는데, 그게 옛날에는 제사장들이 제자를 드릴 때에, 그 옛날에 드리는 제사는 바로 오늘 예배 아닙니까! 예배는 뭐냐하면 양을 잡고, 소를 잡고, 그 다음에 피를 흘리고, 그 다음에 끊어 가지고 내장은 갖다가 버리기도 하고, 태우기도 하고, 이런 것이거든요. 원래 주일날 그때 당시에 말한 데로 안식일 날에 뭐 짐승을 잡는다거나, 가죽을 벗긴다거나, 그 다음에 뭘 막 치우고 일을 한다거나, 이런 것들은 금하게 되어 있습니다. 못하게되어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그것을 못해요.
그런데 성전에서 제사 드리기 위해서 이제 백성들이 양을 끌고 오잖아요. 그러면 그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누가 그 일을 해야 됩니까? 제사장들이 양을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그 다음에 각을 뜨고, 그것을 태우고, 태우고 난 후에는 제를 같다가 다른데 버리고, 이걸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통 사람들이 이것을 안식일에 했다 그러면, 신성 모독 죄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죄 중에 큰 죄입니다.
그런데도 이 일을 안식일에 제사장이 했을 때는 뭐라 그랬어요? 죄가 안 된다! 이걸 잘못해석하면 안식일 날 내가 예배드리고 전도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된다! 이런 이상한, 엉뚱한 그런 발상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만은, 여러분 바로 붙들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생명 살릴 일에 여러분과 저를 세웠습니다. 그 생명 살리는 일을 위해서 때에 따라서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라는 개념과는 다른 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부분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를 하셔야 되요.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안식일에 어떤 일을 했을 때에, 또 아니면 내가 어떤 그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누를 끼치고, 이런 것과 연결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죠. 참 생명을 살리고 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런 귀중한 일을 감당하는 일에는, 여기에는 보통 평범한 상식으로서는 죄라고 정할 수 있는 문제조차도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이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고 한 이것을 오늘 여기서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안식을 범한다는 것만큼, 큰 무서워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을 죽일 때도 안식일을 모독했다! 그래서 신성모독입니다. 돌로 때려 죽였던 그런 이야기를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왜 그러면 그렇게 될 수 있었느냐? 중요한 핵이 이제 복음으로 돌아와야 되죠. 12장 6절 말씀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뭐라 그랬습니까? "여기 있느니라" 하물며 성전 안에서 그렇게 너희들이 명한 데로 성전을 모독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죄라고 해당하는 그것도 성전 안에서 했기 때문에 이것은 상관없다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지 아니하셨는데, 하물며 성전보다 더 큰이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라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그 뜻을 행할 때에 그 그리스도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성전보다 더 큰 그리스도 그 분이 나인데,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는 제자들을 너희가 어떻게 나무라느냐?'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 제가 이 말씀을 읽고 뭘 느끼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전 자체이신 누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누구에게? 우리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임하셨다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임하실 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부요 하심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임하십니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 해결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나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자꾸 불 신앙에 빠지는 것이 문제거든요.
제가 자폐 치유 캠프에서 느낀 것이 뭐냐하면, 제가 이 병원을 통해서 와지는 느낌이 제일 어려운 문제가 뭐냐하면, 분명히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의 그 풍성함으로 내게 오셨는데, 자꾸 뭐가 있느냐 하면, 조금 아프다! 조금 힘들다! 그러면 당장 어디로 빠지느냐 하면, 불 신앙입니다. 아이고 또 안되겠구나! 불 신앙으로 빠지게 되면 누구의 통로가 됩니까? 금방 흑암의 세력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서 실패가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폐아 치유에서 느낀 것이 아이들이 잘 변화가 되어 가는 것 같다가도, 또 엉뚱한 짓 하거든요. 그러니까 변함 없이 늘 뭐냐하면, 끊임없이 좌절하게 되고, 끊임없이 실망하게 되고, 끊임없이 고통받는 것이 그게 어머니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문제 해결 받았다! 문제는 부모들만 불 신앙 안 하면 됩니다. 아이들이 이렇든 저렇든, 주를 바라봐야 되는 것이지, 아이를 바라보고, 사건과 일에 절망하고 실망하죠. 이게 보통 우리가 빠지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오늘 분명히 붙잡아야 됩니다. 복음을 붙잡고, 복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사건이거든요. 어떤 문제나, 어떤 사건이나 지금 절망과 실망에 완전히 빠져들 수 있는 사건과 문제조차도 우리는 사건 보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봅니까? 바로 사건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바로 그 사건의 모든 문제 해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불 신앙이 올 이유가 없고, 불 신앙이 올 필요가 없죠. 거기에서 모든 문제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뿌리를 내린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냥 복음에 뿌리다! 복음이라! 그러면 무슨 고구마처럼 뿌리가 내리는 것인가, 그게 아니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영접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세계 복음 화라는 축복과 은혜 속에 완전히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믿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완전히 바탕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여러분 자녀들을, 하나님이 그 세계복음화의 축복 속에 기어코 성취시켜 나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가 건축된다고 할 때에 이런 저런 말도 있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있고, 이런 저런 염려도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일을 이루시는 것이죠. 인간이 이룬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이루시는 그 대열에서 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 대열에서 빠져나간다! 이건 불행 중에 불행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대열에 서서, 정말 어떤 문제 이전에 하나님 바라보고 사람보지 말라! 이겁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여러분 뭔가 건축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한다! 그럴 때에 뭔가 '이렇게 해 주십시오, 저렇게 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말하면, 사실 건축 위해서 기도하라고 모였을 때에, 메시지 듣고 다른 말 할 것 없어요.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제일 끝입니다. '주여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이 있사오니 뜻대로 하옵소서. 다만 우리가 눈이 어두워 그 뜻을 볼 수 없는 것 불쌍히 여기시고 뜻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옵소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뜻을 볼 수 있는 축복과 은혜를 주옵소서!' 왜? 하나님의 뜻을 세계 복음화에 엄청난 축복과 은혜의 교회를 하나님이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가 불 신앙되면 못 보는 겁니다. 불 신앙되면 큰일났구나! 안되겠구나! 이리 빠지니까!
그래서 오늘 이점을 조금만 붙잡게 되면, 주께서 오늘 말씀하신 예배에 중요한 방향과 배경, 그리고 이 예배를 구체적으로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정하신 주일날, 안식일 날, 예배시간! 여러분 이 시간 믿음으로 조금만 붙들어도 우리 한 주간에 생애가 승리하게 될 것이고, 예배시간이 회복되는 자체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인간으로는 회복이 안 되니까! 오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받아지게 되는 순간, 성령께서 여러분 한 주간도 계속해서 능력으로 역사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일은 이렇게 지키십시오
마 12:1-21 / 최영기 목사
교회를 얼마 동안 다녀본 분들은 성수주일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지내는 것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인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토론을 벌이십니다. 본문을 통하여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 주일은 구별하여 지낸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다가 밀을 손으로 훑어서 먹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1-2절). 남의 밭에서 밀을 훑어먹은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없는 자에 대해 특별한 자비를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줄 때에 이것을 허락하셨습니다(신 23:25). 안식일을 어겼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은 문자 그대로 쉬는 날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일을 하면 큰일 나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을 손으로 훑었으니 추수를 한 셈이 됩니다. 손바닥으로 비볐으니 타작한 것이 됩니다. 껍질을 입으로 불어버렸을 테니 키질을 한 것이 됩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드십니다. 삼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 왕의 질투를 받아 몇 명의 동료들과 도망하다가 배가 고파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진설병을 가져다 동료들과 같이 먹었습니다. 이 진설병은 일반 사람은 먹지 못하고 제사장만 먹게 되었는데 말입니다(3-4절).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의식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음에 예수님은 일반적인 의식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안식일을 찍어서 말씀하십니다(5절).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안식일에는 양 두 마리를 바치라고 하였습니다(민 28:10). 양을 잡고 각을 뜨고 태워서 제사를 드리려면 보통 날보다 제사장은 안식일에 더 많은 일을 하여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6절) 말씀하시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심으로 간접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암시하시면서(8절) 안식일에 관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고 계십니다.
1. 주일은 예배와 휴식으로 지낸다
유대인들의 안식일과 주일과는 다릅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 떨어지면서부터 시작하여서 토요일 해 떨어질 때까지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면 서부터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대한 교훈은 주일에도 해당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1) 자신을 위하여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필요하다
안식일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다윗과 제사장의 두 가지 예를 들었는데 다윗의 예에서는 안식일은 쉬임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필요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예에서는 안식일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 보내라는 의미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은 쉬임을 얻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1주일에 하루를 쉬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1주일에 하루, 즉 주일을 구별하여 일상 생활을 쉬고 하루를 보내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1주일에 하루도 쉬지 않고 1주일 내내 일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것은 창조주 질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건강이건 부부 관계이건 자녀와의 관계이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좇아서 1주일 하루 주일은 쉬는 날고 정하시기 바랍니다.
(2)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표시이다 출 16:31, 29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1주일에 하루를 쉬라고 하실 때에는 6일 동안 일하고 먹을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여서 광야를 헤맬 때에 하나님께서 만나라는 것을 내려서 식량 문제를 해결하여주셨습니다. 매일 아침에 나가서 들에 덮인 것을 갖다가 굽기도 하고 삶기도 해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전날에는 두 배가 내려서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지 않아도 되도록 하셨습니다(출 16:29, 31). 어떤 사람이 불안해서 이틀 치를 거두었을 때에는 만나가 다 상해서 먹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에 7일 먹을 것을 책임져 주시고 안식일에는 쉬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도 일하는 것은 하나님이 충분히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더 먹자고 욕심을 내는 것이든지 아니면 하루라도 쉬면 먹고 살 수 없으리라 불신 때문입니다. 둘 다 건강한 태도가 아닙니다.
2. 주일은 좋은 일을 하는 날이다
그러나 참된 성수주일은 일에서 쉬고 예배드리는 것 외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한다고 호세아서를 인용하신 말을 들은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회당에서 도전을 하였습니다(9-10절).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인 손이 오므라든 사람이 치유를 청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이 사람을 지적하여 물었던 것을 보아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도전을 받아들이시고 교훈을 주셨습니다(11-13절). 그것은 안식일에는 좋은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일에는 쉴 뿐만이 아니라 좋은 일 하는 데 쓰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1주일에 6일은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1주일에 하루 정도는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쓰시기 바랍니다. 주일에는 일도 멈추시고 공부도 멈추시고 주를 위하여 교회 봉사도 하고 이웃을 섬기기도 하는 날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사역 박람회가 친교실에서 있습니다. 전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사역이 많습니다. 성도님들은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사역 한 가지씩 맡아서 주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어린이를 위한 사역자가 많이 필요합니다. 영어가 좀 익숙한 사람들은 유아부, 유년부, 중고등부에 자원하여 섬기시기 바랍니다. 신앙 경력이 짧든지 영어가 짧으면 영아부 유아부 사역을 자원하여서 아기를 안아주고 돌보아주어 젊은 어머니들이 예배 참석하도록 도우시기 바랍니다.
주일은 예배드리고 섬기는 날입니다. 주일에 편찮으신 분 심방도 가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과 시간을 보내든지 섬기면서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쉬임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안 한다고 쉬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와 다른 일을 하면서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톱으로 자르고 대패로 밀며 노동을 하여서 책장을 짜는 것이 쉬는 것이 되기도 하고 노동하는 사람은 책을 읽고 영어 등을 공부하는 것이 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FLEE MARKET을 한다던가 주일에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당분간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성수 주일을 할 수 있는 생업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주일에 일을 하더라고 가능하면 주일 예배는 참석토록 하고 안되면 수요 예배라도 참석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주중에 하루를 정하여 쉬기도 하고 주님의 일도 하며 이웃을 돕기도 하며 보내시기 바랍니다. 1주일에 하루는 구별하여 지키는 습관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II. 교회는 그리스도의 일을 계승한다
주님께서 손 마른 자를 고쳤을 때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잡아죽이려는 모의였습니다(14절). 경직화된 외적인 경건의 위험의 좋은 예입니다.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들이 생각하는 경건의 모습만이 관심사이고 이에 어긋나면 살인도 불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의를 아신 주님은 자리를 피하셨습니다(15-16절). 그리고 더 이상 반대자로 인하여 사역에 지장이 올 것을 우려하여서 당신에 관하여 떠버리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마태 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17-21절에서 메시아에 관한 이사야서 42장을 인용하여서 예수님의 사역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이 구절을 통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은 온 유대인만의 구세주가 아니고 온 인류의 메시아라는 것입니다(18, 21절).
이 예언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여 수행하기 위하여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의미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인용된 이사야서를 통하여 교회 사역의 모습이 어떠해야할지를 배우게 됩니다.
1. 의로움을 선포한다
교회는 의를 선포하여야합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18절, 20절 상).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의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시고 의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로운 삶에 관심을 가져야하겠습니다. 주님은 의를 선포하기 위하여 오셨는데 크리스천들이 의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번에 파산 신청을 한 Enron이나 World.Com의 회장들이 다 크리스천인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의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생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미국이 도덕적인 국가도 인정받았을 적이 있는데 이제는 도덕심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미명하에서 학교에서 기독교 영향을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학교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Chuck Colson이라는 미 기독교 지도자가 Harvard 대학의 경영학과에 가서 강연을 한 후에 학생들과 대화를 나눈 후에 한탄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Harvard 대학 경영학과에서 MBA를 하면 미국 최고의 경영자들이 모였다고 볼 수가 있는데 이들에게서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는 도덕심을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2월에 연세대 경영학과 '경제 전문가 윤리 수준 향상을 위한 연구팀'의 연구 결과 발표에 의하면 다국적 기업협회 회원과 국내 경영인들을 비교하였을 때에 국내 경영인들의 윤리 의식이 상당히 낙후된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국내 경영인들은 기본적 규범조차 무시해가면서 부패를 양산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만 30세 미만과 30-50대, 50세 이상 경영인을 비교해 볼 때에 소위 '젊은 피'들이 중견 기업가들보다 '비양심적인 경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치관의 결핍이나 혼동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향하여 의를 선포할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이 이 목적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삶을 부담과 의무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서는 의로운 사회, 의로운 나라의 아름다운 모습을 머리에 그릴 수 있어야합니다. 아르헨티나가 현재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자연 자원을 보면 아르헨티나는 가난할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한 나라가 파산지경에 이른 것은 부정 부패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 가보면 완전 무법 천지인 것을 발견합니다. 부정이 정상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경찰이 돈을 요구해서 고소하면 재판장이 오히려 벌금보다 더 중형을 내린답니다. 불쌍한 경찰을 돕지 않고 고소하는 것이 괘씸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찰에게 잡히면 다 돈을 주고 해결합니다.
소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련은 마피아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나라에 가면 그런 대로 법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미국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크리스천이 그리스도의 의를 선포하려면 적어도 법은 지켜야합니다. 법치국가에서 사는 축복을 누리는 길이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2. 조용하게 일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우리는 조용하게 일해야합니다(19절). 예수님은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했습니다(마 13:13). 작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을 해서 넣어두면 밤새 빵을 부풀리는 누룩과 같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부패와 부조리를 한탄하는 글을 신문에서 읽을 때마다 저는 그런 글을 쓰신 분에게 묻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부정 부패를 제거하기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정의는 캠페인에 의하여 조직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의로운 삶을 살기를 결심하고 의로운 삶을 살 때에 닥치는 곤란과 희생을 영광으로 알며 조용히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에 사회는 정화됩니다.
초대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로마를 뒤집어엎었습니까? 그들의 대부분은 사회 저변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치력도 없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에 굶주려있었고 성령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선동하는 지도자도 없었고 강력한 조직도 없었고 캠페인을 벌인 적도 없지만 로마를 뒤집어엎은 것입니다.
조용히 일하는 것은 하나님이 선호하시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정 교회 전파도 주님의 방법을 쓰려하고 있습니다. 신문 광고를 통하여 바람을 일으키려 거나 수백 수천 명이 모이는 집회를 통하지 않고 가정 교회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소수를 통하여 교회를 개혁해보려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소문도 소리도 없이 가정 교회가 확산되어 도시마다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좋은 소문난 교회를 꼽을 때에 가정 교회를 시도하는 교회가 꼽히는 것을 목표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조용히 일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있습니다. 숨어서 섬기고 남이 모르게 이웃을 돕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사용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방법을 고수하여서 의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십시다.
3. 부족한 자에게 인내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려면 인내가 있어야합니다(20절). 20절에서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인내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갈대는 펜으로도 쓰이고 피리로도 쓰입니다. 그러나 갈대가 유용하기 위하여서는 온전해야합니다. 더구나 갈대는 무궁무진합니다. 상한 갈대를 버리고 새로운 온전한 갈대를 취하여 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상한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 기름 등에 담겨진 심지에 붙은 등불은 꺼져갈 때에 연기만 내고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차가리 불어 꺼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부족한 자를 향한 메시아의 인내를 말합니다.
우리는 일을 할 때에 불도저 식으로 밀고 나가기가 쉽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하는 일이 의롭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는 의를 이루기 위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은 제거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은 떨쳐버립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정의가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일하시지만 부족한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돌보시며 의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일을 성실하게 하여야하지만 효율과 능률이 너무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인가 말했지만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무능한 사람, 결점이 있는 사람이 기를 펼 수 있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하는 동안에는 용납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 못하고 분가 못하는 목자를 나무라 본 적이 없습니다. 설교 도중에 마이크에서 삐이 소리가 나든지 영상만 나오고 소리가 나오지 않아도 야단쳐 본 적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3일 걸릴 것이 교회에서 3주가 걸리고 회에서 3주가 걸릴 것이 교회에서 3달이 걸려도 upset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인내하는 분이시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되자면 인내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역을 하다가 실수해도 실수하지 않을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면서 인내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고 얼른 변화하지 않아도 인내하면 변화될 날을 기다려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사역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복된 날이 되게 하라!
마 12:1-21 / 전순기 목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두고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안식일 준수의 문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의도와 목적을 오해하고, 잘못된 태도로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많은 규칙을 만들었고, 그 규칙을 더 잘 지키려고, 규칙 아래 세칙들을 두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39가지 로 규정했고, 각 조항마다 여섯 가지의 세부 규정을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계명에만 총 234개의 세부 규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려면 200여개가 넘는 규칙들을 기억해야 했고, 그 규칙들을 모두 지켜야 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칙에 따르면 지금 제자들은 금지된 규정을 몇 개씩이나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꺾는 것은 추수를 금지한 행위를 어긴 것이고, 밀 이삭을 손바닥에 놓고 비비는 것은 타작행위를 금지한 규정에 걸리고, 비벼서 그냥 먹을 수가 없어 입으로 후 불어서 먹었으니까 키질이나 풍로질을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각으로 보면 참 어이없는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의 근본정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들이 자신들이 안식일을 옳게 잘 지키고 있다고 확신했고, 정작 안식일의 정신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계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오히려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안식일 준수 곧 주일 성수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주일 성수에 대한 바른 이해가 되어 있지 않으면, 주일이 복된 날이 되지 못하고 마음속에 갈등을 느끼는 날이 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날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인데, 다른 어떤 계명보다 길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길게 서술된다는 것만 보아도 이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 계명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일 성수는 신앙생활의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주일 성수가 확립되지 않고서는 신앙의 발전과 성숙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일 성수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바로 깨닫고, 주일 성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영육간의 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려야 하겠습니다.
주일로 변경된 안식일
먼저 저는 이 시간에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개념이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안식일이 왜 주일로 변경되었는지를 간략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십계명의 말씀을 비롯해서 구약 성경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자주 반복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시작해서 토요일 저녁 해질 때에 끝이 납니다.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 계명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과 초대 교회가 주일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 후 첫째 날 곧 주일에 부활하셨고, 또 주님께서 여러 번 주일에 제자들과 함께 모이셨음을 보여줍니다(요20:19,26). 또 사도행전 20장 7절에 보면 사도들과 초대 교회가 안식 후 첫날 곧 주일에 모여서 성찬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이미 주간의 첫째 날 곧 주일에 모이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는 것을 인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 교회의 본을 따라서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날짜는 토요일에서 주일로 변경되었을지라도, 주일을 지키는 의미와 방법은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와 준수하는 방법과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안식일 계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는지, 그 목적과 의미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또 주일 성수가 참으로 놓칠 수 없는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일은 어떤 날이며 왜 주일을 주셨습니까? 세 가지 중요한 의미와 목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천국 백성의 정체성 확인
주일을 성수해야 하는 첫 번째 중요한 의미와 목적은, 주일을 성수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천국 백성들임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성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겁니다. 세상 백성들에게는 주일이라든가, 안식일의 개념이 없습니다. 세상 어느 종교에도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는, 저들에게도 안식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강제노동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잠시라도 쉬었다가는 가차 없이 날아오는 감독관의 채찍을 맞아야 하는 그런 비참한 노예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날마다 죽도록 일만 하다 죽어야 하는 노예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어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유롭게 일도 할 수 있고, 쉴 수도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 계명을 주심으로 이제 너희들이 자유인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해 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날마다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그들에게 있어서, 일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고 쉬며. 하나님께 경배하며 은혜 받는 안식일이야말로 얼마나 축복된 날이 되었겠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구나!”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을 겁니다.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계명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결정해 주는 중요한 계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준수의 중요성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수 천 년 동안 나라를 잃어버리고 방랑을 했지만, 어디에서 살든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켰고, 안식일은 유대인들을 지켰다.”는 유명한 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확실한 보장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일을 성수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확실한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주일을 성수 하지 않고도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킴으로서, 우리가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세상에 속한 백성이 아니라 천국 백성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또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킴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주일 성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영육간의 축복을 풍성히 받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천국 백성의 삶의 방식 배우기
우리가 주일 성수를 해야 하는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주일 성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사는 천국 백성의 삶의 방식을 우리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아도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좋은 실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십 년에 걸친 광야 생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광야생활 사십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살았는데, 만나는 매일 아침에 이슬이 내릴 때에 함께 내렸습니다. 백성들은 일찍 일어나서 천막 주변에 내린 만나를 주어다가 먹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게 하셨고, 그 전날에 안식일 분량까지 이틀 분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신기하게도 평일에 거두어 남겨둔 만나는 썩고 벌레가 생겼지만, 안식일을 위해서 거둔 만나는 썩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매일 만나를 받아먹고 사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사십년의 광야생활 중에 만나를 먹고 살게 한 것은,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인, 먹고 사는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고 의지하는 법을 훈련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 성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일은 일을 쉬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만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됩니다. 주일을 성수해 보십시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과연 나의 생활을 책임져 주시는 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영육 간에 복을 받는 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일을 주신 세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영육간에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다 연약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육일 동안 일하고 하루는 쉬도록 만드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법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으신 주님께서 일주일에 하루는 쉬는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믿고 하루를 쉬면서, 주님을 예배하며 은혜를 받을 때에 우리는 육체도, 정신도, 영혼도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주일 예배를 드릴 때에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영혼은 천국의 만나를 받아먹고 기운을 차리게 됩니다. 하늘의 생수를 마시고 영혼의 갈증을 풀게 됩니다. 선포되는 복음을 듣고 죄사함과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게 됩니다. 또 주일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바닥이 나 버린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배터리를 주님의 사랑으로 재충전합니다. 또 우리는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임을 확인하고, 조만 간에 돌아갈 천국 소식을 들으면서 위로를 받고 천국 소망을 다시 회복하며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주일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주일 성수를 통해서 받는 또 다른 축복은 주일 성수를 통해서 세상 쪽으로 기울었던 우리의 삶의 방향을 천국 쪽으로 바꾸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이면서 동시에 이 땅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이중 국적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한 주간 동안 세상에 살면서 세상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다 보면, 우리가 천국 백성이라는 신분의식이 약해지고, 사명을 잊어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천국 백성이며, 이 땅에서는 천국을 확장하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명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이것이 주일 성수를 통해서 받는 축복입니다.
또 우리는 주일 성수를 통해서 느슨하게 풀어졌던 영혼의 긴장을 회복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우리 영혼이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도록 조율되어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마음은 항상 긴장하고 살지 못합니다. 이건 마치 모든 악기들이 조율을 해 두어도 시간이 지나면 줄이 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악기들은 주기적으로 조율을 해 주어야 항상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일성수를 통해서 늘어진 우리 영혼의 줄을 다시 조여서 아름다운 소리로 주님을 찬양하는 악기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를 통해서 안양 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와 같은 영육간의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법
주일을 영육 간에 복 받는 날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주일을 성수하려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꼭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00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면에 강조점이 있는 게 아니고, ‘00해야 한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에 강조점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에는 일하지 말라고 했는데, 일하지 말라는 것은 육신적인 일, 사적인 일, 세상적인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 집중하여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나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일하지 말라고 하신 그 정신과 이유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전통적인 교회 생활을 하신 분들 중에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이 주일 성수의 문제를 ‘00 하지 말 것’에 초점을 두는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려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에 온 신경을 다 썼습니다. 주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하는데, 무엇이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인지를 고민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규정하려고 했고,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예화) 신학교 다닐 때에 이 문제에 대해서 가르치시던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던 것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율법주의적으로 주일을 지키는 분들은 토요일 12시부터 주일 12시까지를 주일이라고 봅니다. 어떤 목사님이 토요일 밤 늦게 수염을 깎았는데, 반쯤 깎는 중에 12시가 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수염을 반만 깎고 멈춰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주일 강단에 서셨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주일 성수를 하시는 목사님들은 성도들에게도 이것저것 엄격하게 하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주일에는 오락은 물론 책을 읽거나 공부도 하면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잘 아는 한 사람은 학창시절에 주일에는 공부를 하면 안된다고 배웠기 때문에, 시험을 앞에 둔 주일에는, 토요일 밤 열두시까지 죽어라고 공부를 하고, 주일은 주일 예배만 참석하고 돌아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고, 주일 밤 열두 시부터 일어나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 때는 주일이 너무도 부담스러운 날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주일이 즐겁게 안식하는 날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주일에는 절대로 돈을 쓰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계시고 그렇게 배운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러면, 한번 질문을 해 보십시다. 도대체 주일에 돈을 쓰지 말아야 한다면, 어디까지 쓰지 말아야 합니까? 현대 문명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주일에 아예 돈을 안 쓰고 살 수 있습니까? 현대 사회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상당히 많은 돈을 쓰고 있습니다. 또 자동차를 타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으니, 돈을 쓰고 교회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 건 괜찮습니까? 그럼 안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럼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는 규정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만든 것인데, 그 사람이 만든 기준과 저 사람이 만든 기준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주일 성수에 대한 다른 기준을 강조하게 됩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주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의 정신을 놓치고, 문자적인 의미에 매이게 되면 주일이 사람을 쉬게 해 주는 복된 날이 되는 게 아니고, 본문의 바리새인들처럼 사람을 규칙으로 얽어매어 불편하게 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날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안식일 계명 주신 것은 자비와 긍휼과 사랑의 정신에서 나온 것임).
주일 성수의 강조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고, 신령한 일을 한다는 적극적인 면에 있습니다. 신령한 일을 하기 위해서 육체적인 일을 금하라는 겁니다. 이 원칙을 가지고 각자의 신앙 양심에 따라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누가 대신 결정해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들을 미리 정해 놓을 수도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윗과 그 동료들이 아비아달 제사장 때에 며칠 동안 먹지 못하고 굶주린 상황에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가지고, 안식일에 이삭 잘라 먹은 것이 안식일을 범한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변호하십니다. 만약에 먹을 것이 충분할 때에 제사장이 먹는 떡을 먹었다면 분명히 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먹는 떡을 일반인도 ‘먹을 수 있다. 없다.’라고 결정해 둘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행동을 주일에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미리 결정해 둘 수 없고, 그 때에 자기 양심이 성령님과 함께 상의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주일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주일 성수의 성공여부는 주일 예배를 성공하느냐의 여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배에 성공한다는 말은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음이 오고,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은혜를 받는 것이며, 상한 마음이 위로가 되고, 낙심되었던 마음에 소망이 다시 생기고, 근심걱정으로 무겁던 마음에 평안이 온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가 은혜 받는 예배가 되게 하려면, 우리는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게 하다(레-카도쉬)”라는 단어는 “여인을 성별시키다”또는“여인을 약혼시키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합니다. 유대 랍비들은 이 단어의 의미에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거룩한 신부와 같고,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안식일이라는 신부와 결혼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순결한 신부로서 엿새 동안 준비시키셔서, 이레 되는 날에 당신의 백성과 혼인시키셨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위대한 랍비들은 금요일 저녁만 되면, 상기된 얼굴과 들뜬 표정으로, 대문 앞에 서서 어슬렁거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안식일이라는 신부가 자신과 혼인하기 위해 찾아온다고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주일을 맞이할 때에, “어라, 벌써 주일이네’라는 무심한 태도로 맞이해서는 안 되고, 첫날 밤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과 같이 설레는 마음으로 주일을 맞이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태도로만 주일을 맞이한다면, 은혜 받지 못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주일은 예배드리는 일을 할 뿐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안식일에 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에는 받은 은사와 은혜를 따라서 많은 성도들이 성가대로나 교사로서 또는 다양한 직분으로 섬기게 됩니다. 또는 전도하는 일로, 연약한 자들이나 병든 자들을 심방하는 일로, 또는 성도간에 교제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날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날보다 좀 더 찬양하고 기도하는 일로 주일을 보내려고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주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한 주간 동안 피곤했던 육체와 정신을 쉬게 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쉰다는 개념도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주간 내내 정신노동을 한 사람들이라면, 가벼운 운동이나 등산과 같은 육체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쉼이 됩니다. 반면에 한 주간 내내 육체노동을 하신 분들이라면,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밀린 잠을 잔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 하는 것이 쉼이 될 것입니다.
둘째,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려면 육일 동안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십계명에 보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에는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는 조건이 달려 있습니다.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만족스럽게 주일을 쉴 수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쉼이란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면 주님께서 일주일 분의 양식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려고 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놀라운 복을 주십니다.
예화)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백만장자이며 자유사상가였던 스티븐 지라드라는 사람에게 이런 일화가 전해져 옵니다. 어느 토요일 저녁 그는 자기 직원들에게 내일 출근해서 부두에 들어온 배의 짐을 내리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직원이 자기는 내일이 주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지라드는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 회사에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며, 그 직원을 해고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은행장이 지라드에게 자기 은행에 현금 출납원이 필요한 데 적합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때에 지라드는 자기가 해고한 청년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은행장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그 청년은 당신이 해고한 청년이 아니요?”“맞습니다.”“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당신이 해고한 청년을 내게 소개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지라드는 “그 청년이 주일이라고,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해고했지만, 원리 원칙 때문에 직업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돈을 맡길 만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 청년은 더 좋은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결단을 귀하게 받으십니다. 손해 볼 각오를 하고 주일을 성수할 때에 주님께서는 이처럼 생각지도 못한 복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신앙은 이런 예상치 못한 축복을 기대하고 주일을 성수하는 게 아니라, 설령 그런 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받은 은혜가 크기에 “나는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자를 결코 주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고 구하는 대로 되게 하십니다. 주일을 성수하기고 결단하고 인내하며 기도하고 찾을 때에 결국에는 주일성수를 할 수 있는 더 좋은 직장을 찾은 분들이 우리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혹시 아직 주일 성수 문제로 마음이 편치 않은 성도들이 계시다면, 이 문제를 두고 전심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방이 무너지면, 강물이 제대로 흘러가지 못합니다. 주일 성수는 신앙의 강물이 제대로 흘러가도록 지켜주는 제방과도 같습니다. 주일성수의 제방이 지켜져야 신앙생활이라는 강물이 제대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일을 성수함으로 영육간에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육일 동안은 생업에 힘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주일은 구별하여 놓고 기억하여 지키십시오. “구별하여”란 말은 다른 날과는 달리 취급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기억하여” 지키라는 말은 사모하며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주일 성수의 계명을 실천할 때에 우리는 영육간에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주일을 복된 날이 되게 할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일을 복된 날이 되게 하라!
마 12:1-21 / 전순기 목사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두고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안식일 준수의 문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의도와 목적을 오해하고, 잘못된 태도로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많은 규칙을 만들었고, 그 규칙을 더 잘 지키려고, 규칙 아래 세칙들을 두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39가지 로 규정했고, 각 조항마다 여섯 가지의 세부 규정을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계명에만 총 234개의 세부 규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려면 200여개가 넘는 규칙들을 기억해야 했고, 그 규칙들을 모두 지켜야 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칙에 따르면 지금 제자들은 금지된 규정을 몇 개씩이나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꺾는 것은 추수를 금지한 행위를 어긴 것이고, 밀 이삭을 손바닥에 놓고 비비는 것은 타작행위를 금지한 규정에 걸리고, 비벼서 그냥 먹을 수가 없어 입으로 후 불어서 먹었으니까 키질이나 풍로질을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각으로 보면 참 어이없는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의 근본정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들이 자신들이 안식일을 옳게 잘 지키고 있다고 확신했고, 정작 안식일의 정신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계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오히려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안식일 준수 곧 주일 성수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주일 성수에 대한 바른 이해가 되어 있지 않으면, 주일이 복된 날이 되지 못하고 마음속에 갈등을 느끼는 날이 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날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인데, 다른 어떤 계명보다 길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길게 서술된다는 것만 보아도 이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 계명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일 성수는 신앙생활의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주일 성수가 확립되지 않고서는 신앙의 발전과 성숙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일 성수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바로 깨닫고, 주일 성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영육간의 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려야 하겠습니다.
주일로 변경된 안식일
먼저 저는 이 시간에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개념이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안식일이 왜 주일로 변경되었는지를 간략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십계명의 말씀을 비롯해서 구약 성경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자주 반복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시작해서 토요일 저녁 해질 때에 끝이 납니다.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 계명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과 초대 교회가 주일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 후 첫째 날 곧 주일에 부활하셨고, 또 주님께서 여러 번 주일에 제자들과 함께 모이셨음을 보여줍니다(요20:19,26). 또 사도행전 20장 7절에 보면 사도들과 초대 교회가 안식 후 첫날 곧 주일에 모여서 성찬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이미 주간의 첫째 날 곧 주일에 모이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는 것을 인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 교회의 본을 따라서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날짜는 토요일에서 주일로 변경되었을지라도, 주일을 지키는 의미와 방법은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와 준수하는 방법과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안식일 계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는지, 그 목적과 의미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또 주일 성수가 참으로 놓칠 수 없는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일은 어떤 날이며 왜 주일을 주셨습니까? 세 가지 중요한 의미와 목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천국 백성의 정체성 확인
주일을 성수해야 하는 첫 번째 중요한 의미와 목적은, 주일을 성수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천국 백성들임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성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겁니다. 세상 백성들에게는 주일이라든가, 안식일의 개념이 없습니다. 세상 어느 종교에도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었을 때는, 저들에게도 안식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강제노동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잠시라도 쉬었다가는 가차 없이 날아오는 감독관의 채찍을 맞아야 하는 그런 비참한 노예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날마다 죽도록 일만 하다 죽어야 하는 노예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어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유롭게 일도 할 수 있고, 쉴 수도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 계명을 주심으로 이제 너희들이 자유인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해 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날마다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그들에게 있어서, 일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고 쉬며. 하나님께 경배하며 은혜 받는 안식일이야말로 얼마나 축복된 날이 되었겠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구나!”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을 겁니다.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계명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결정해 주는 중요한 계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준수의 중요성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수 천 년 동안 나라를 잃어버리고 방랑을 했지만, 어디에서 살든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켰고, 안식일은 유대인들을 지켰다.”는 유명한 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확실한 보장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일을 성수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확실한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주일을 성수 하지 않고도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킴으로서, 우리가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세상에 속한 백성이 아니라 천국 백성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또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킴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주일 성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한 영육간의 축복을 풍성히 받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천국 백성의 삶의 방식 배우기
우리가 주일 성수를 해야 하는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주일 성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사는 천국 백성의 삶의 방식을 우리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아도 먹을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좋은 실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십 년에 걸친 광야 생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광야생활 사십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살았는데, 만나는 매일 아침에 이슬이 내릴 때에 함께 내렸습니다. 백성들은 일찍 일어나서 천막 주변에 내린 만나를 주어다가 먹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게 하셨고, 그 전날에 안식일 분량까지 이틀 분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신기하게도 평일에 거두어 남겨둔 만나는 썩고 벌레가 생겼지만, 안식일을 위해서 거둔 만나는 썩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매일 만나를 받아먹고 사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사십년의 광야생활 중에 만나를 먹고 살게 한 것은,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인, 먹고 사는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고 의지하는 법을 훈련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 성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일은 일을 쉬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만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됩니다. 주일을 성수해 보십시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과연 나의 생활을 책임져 주시는 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영육 간에 복을 받는 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일을 주신 세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영육간에 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다 연약한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육일 동안 일하고 하루는 쉬도록 만드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법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으신 주님께서 일주일에 하루는 쉬는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믿고 하루를 쉬면서, 주님을 예배하며 은혜를 받을 때에 우리는 육체도, 정신도, 영혼도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주일 예배를 드릴 때에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영혼은 천국의 만나를 받아먹고 기운을 차리게 됩니다. 하늘의 생수를 마시고 영혼의 갈증을 풀게 됩니다. 선포되는 복음을 듣고 죄사함과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게 됩니다. 또 주일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바닥이 나 버린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배터리를 주님의 사랑으로 재충전합니다. 또 우리는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임을 확인하고, 조만 간에 돌아갈 천국 소식을 들으면서 위로를 받고 천국 소망을 다시 회복하며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주일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주일 성수를 통해서 받는 또 다른 축복은 주일 성수를 통해서 세상 쪽으로 기울었던 우리의 삶의 방향을 천국 쪽으로 바꾸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이면서 동시에 이 땅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이중 국적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한 주간 동안 세상에 살면서 세상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다 보면, 우리가 천국 백성이라는 신분의식이 약해지고, 사명을 잊어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일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천국 백성이며, 이 땅에서는 천국을 확장하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명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이것이 주일 성수를 통해서 받는 축복입니다.
또 우리는 주일 성수를 통해서 느슨하게 풀어졌던 영혼의 긴장을 회복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우리 영혼이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도록 조율되어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마음은 항상 긴장하고 살지 못합니다. 이건 마치 모든 악기들이 조율을 해 두어도 시간이 지나면 줄이 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악기들은 주기적으로 조율을 해 주어야 항상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일성수를 통해서 늘어진 우리 영혼의 줄을 다시 조여서 아름다운 소리로 주님을 찬양하는 악기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를 통해서 안양 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와 같은 영육간의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법
주일을 영육 간에 복 받는 날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주일을 성수하려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꼭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00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면에 강조점이 있는 게 아니고, ‘00해야 한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에 강조점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에는 일하지 말라고 했는데, 일하지 말라는 것은 육신적인 일, 사적인 일, 세상적인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 집중하여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하나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일하지 말라고 하신 그 정신과 이유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전통적인 교회 생활을 하신 분들 중에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이 주일 성수의 문제를 ‘00 하지 말 것’에 초점을 두는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려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지에 온 신경을 다 썼습니다. 주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하는데, 무엇이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인지를 고민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규정하려고 했고,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예화) 신학교 다닐 때에 이 문제에 대해서 가르치시던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던 것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율법주의적으로 주일을 지키는 분들은 토요일 12시부터 주일 12시까지를 주일이라고 봅니다. 어떤 목사님이 토요일 밤 늦게 수염을 깎았는데, 반쯤 깎는 중에 12시가 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수염을 반만 깎고 멈춰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주일 강단에 서셨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주일 성수를 하시는 목사님들은 성도들에게도 이것저것 엄격하게 하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주일에는 오락은 물론 책을 읽거나 공부도 하면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잘 아는 한 사람은 학창시절에 주일에는 공부를 하면 안된다고 배웠기 때문에, 시험을 앞에 둔 주일에는, 토요일 밤 열두시까지 죽어라고 공부를 하고, 주일은 주일 예배만 참석하고 돌아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고, 주일 밤 열두 시부터 일어나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 때는 주일이 너무도 부담스러운 날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주일이 즐겁게 안식하는 날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주일에는 절대로 돈을 쓰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계시고 그렇게 배운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러면, 한번 질문을 해 보십시다. 도대체 주일에 돈을 쓰지 말아야 한다면, 어디까지 쓰지 말아야 합니까? 현대 문명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주일에 아예 돈을 안 쓰고 살 수 있습니까? 현대 사회는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상당히 많은 돈을 쓰고 있습니다. 또 자동차를 타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으니, 돈을 쓰고 교회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 건 괜찮습니까? 그럼 안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럼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는 규정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만든 것인데, 그 사람이 만든 기준과 저 사람이 만든 기준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주일 성수에 대한 다른 기준을 강조하게 됩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주일에는 일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의 정신을 놓치고, 문자적인 의미에 매이게 되면 주일이 사람을 쉬게 해 주는 복된 날이 되는 게 아니고, 본문의 바리새인들처럼 사람을 규칙으로 얽어매어 불편하게 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날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안식일 계명 주신 것은 자비와 긍휼과 사랑의 정신에서 나온 것임).
주일 성수의 강조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고, 신령한 일을 한다는 적극적인 면에 있습니다. 신령한 일을 하기 위해서 육체적인 일을 금하라는 겁니다. 이 원칙을 가지고 각자의 신앙 양심에 따라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누가 대신 결정해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들을 미리 정해 놓을 수도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윗과 그 동료들이 아비아달 제사장 때에 며칠 동안 먹지 못하고 굶주린 상황에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가지고, 안식일에 이삭 잘라 먹은 것이 안식일을 범한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변호하십니다. 만약에 먹을 것이 충분할 때에 제사장이 먹는 떡을 먹었다면 분명히 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먹는 떡을 일반인도 ‘먹을 수 있다. 없다.’라고 결정해 둘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행동을 주일에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미리 결정해 둘 수 없고, 그 때에 자기 양심이 성령님과 함께 상의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주일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주일 성수의 성공여부는 주일 예배를 성공하느냐의 여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배에 성공한다는 말은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음이 오고,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은혜를 받는 것이며, 상한 마음이 위로가 되고, 낙심되었던 마음에 소망이 다시 생기고, 근심걱정으로 무겁던 마음에 평안이 온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가 은혜 받는 예배가 되게 하려면, 우리는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게 하다(레-카도쉬)”라는 단어는 “여인을 성별시키다”또는“여인을 약혼시키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합니다. 유대 랍비들은 이 단어의 의미에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거룩한 신부와 같고,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안식일이라는 신부와 결혼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순결한 신부로서 엿새 동안 준비시키셔서, 이레 되는 날에 당신의 백성과 혼인시키셨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위대한 랍비들은 금요일 저녁만 되면, 상기된 얼굴과 들뜬 표정으로, 대문 앞에 서서 어슬렁거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안식일이라는 신부가 자신과 혼인하기 위해 찾아온다고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주일을 맞이할 때에, “어라, 벌써 주일이네’라는 무심한 태도로 맞이해서는 안 되고, 첫날 밤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과 같이 설레는 마음으로 주일을 맞이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태도로만 주일을 맞이한다면, 은혜 받지 못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주일은 예배드리는 일을 할 뿐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안식일에 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에는 받은 은사와 은혜를 따라서 많은 성도들이 성가대로나 교사로서 또는 다양한 직분으로 섬기게 됩니다. 또는 전도하는 일로, 연약한 자들이나 병든 자들을 심방하는 일로, 또는 성도간에 교제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날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날보다 좀 더 찬양하고 기도하는 일로 주일을 보내려고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주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한 주간 동안 피곤했던 육체와 정신을 쉬게 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쉰다는 개념도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주간 내내 정신노동을 한 사람들이라면, 가벼운 운동이나 등산과 같은 육체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쉼이 됩니다. 반면에 한 주간 내내 육체노동을 하신 분들이라면,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밀린 잠을 잔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 하는 것이 쉼이 될 것입니다.
둘째, 주일을 주일답게 지키려면 육일 동안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십계명에 보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에는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는 조건이 달려 있습니다.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만족스럽게 주일을 쉴 수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쉼이란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면 주님께서 일주일 분의 양식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려고 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놀라운 복을 주십니다.
예화)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백만장자이며 자유사상가였던 스티븐 지라드라는 사람에게 이런 일화가 전해져 옵니다. 어느 토요일 저녁 그는 자기 직원들에게 내일 출근해서 부두에 들어온 배의 짐을 내리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직원이 자기는 내일이 주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지라드는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 회사에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며, 그 직원을 해고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은행장이 지라드에게 자기 은행에 현금 출납원이 필요한 데 적합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때에 지라드는 자기가 해고한 청년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은행장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그 청년은 당신이 해고한 청년이 아니요?”“맞습니다.”“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당신이 해고한 청년을 내게 소개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지라드는 “그 청년이 주일이라고,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해고했지만, 원리 원칙 때문에 직업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돈을 맡길 만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그 청년은 더 좋은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결단을 귀하게 받으십니다. 손해 볼 각오를 하고 주일을 성수할 때에 주님께서는 이처럼 생각지도 못한 복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신앙은 이런 예상치 못한 축복을 기대하고 주일을 성수하는 게 아니라, 설령 그런 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받은 은혜가 크기에 “나는 주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자를 결코 주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고 구하는 대로 되게 하십니다. 주일을 성수하기고 결단하고 인내하며 기도하고 찾을 때에 결국에는 주일성수를 할 수 있는 더 좋은 직장을 찾은 분들이 우리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혹시 아직 주일 성수 문제로 마음이 편치 않은 성도들이 계시다면, 이 문제를 두고 전심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방이 무너지면, 강물이 제대로 흘러가지 못합니다. 주일 성수는 신앙의 강물이 제대로 흘러가도록 지켜주는 제방과도 같습니다. 주일성수의 제방이 지켜져야 신앙생활이라는 강물이 제대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일을 성수함으로 영육간에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육일 동안은 생업에 힘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주일은 구별하여 놓고 기억하여 지키십시오. “구별하여”란 말은 다른 날과는 달리 취급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기억하여” 지키라는 말은 사모하며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주일 성수의 계명을 실천할 때에 우리는 영육간에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주일을 복된 날이 되게 할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 12:1-8 / 박세갑 목사
12장에는 세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모두 예수님과 유대인의 지도자들 사이에 일어난 마찰입니다. 그 첫째는 안식일에 관한 충돌이고(1~21), 둘째는 예수님의 능력의 본질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관한 것이고(22~37), 마지막에는 지도자들이 주님께 표적을 구했는데 주님께서 거절하신 사건입니다.(38~50) 안식일에 관한 사건도 (1~8)절 까지는 밀밭에서 생긴 논쟁이고 나머지는 회당에서 생긴 논쟁입니다. 오늘은 먼저 밀밭에서 일어난 논쟁을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예수님의 초기 사역에, 유대 지도자들은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초기에는 매력을 느끼고 호감을 가져 칭찬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좋은 예가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공회원이고 랍비였는데 주님께 나왔고 자기가 가진 문제를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9장에 나오는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나 금식 논쟁에서 주님이 자신의 영적 도덕적 권위를 주장하실 때 유대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단절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죄인의 친구로 말씀하시고 자신이 죄인을 용서할 권리가 있음을 선포 하셨을 때, 그들은 의와 순결에 대한 자기들의 개념이 혼란을 격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의와 순결이 죄와 분리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죄인의 친구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주님은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십니다. 그것은 8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신 사건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원인은 하나는 안식일을 범함으로 율법을 어겼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외람되게 하나님을 참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유대 지도자들이 주님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계기가 될 만큼 유대인들에게는 귀중한 문제 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유대교의 참된 속성을 나타낼 만큼 귀하고 신성한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에만 독특하게 전통이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여러 가지 제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사제도, 할례의식,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의 여러 규례들 등입니다. 이런 제도들은 이방 세계에서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발견 됩니다. 즉 번제는 모든 셈족들에게서 볼 수 있고, 할례의식은 유대인 외에도 다른 여러 민족들에게서 성행했었습니다. 또 신이 거주하는 신전을 짓는 것도 이방 세계의 흔한 풍습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유대인만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풍습입니다.
유대인들은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떼어 놓고, 그날은 하나님과의 영적이고 기본적인 관계를 의식하며 오직 자신들의 내면의 영성을 함양하는 일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그날이 하나님께 구별된 날이고, 안식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을 주관하신다는 특별한 개념까지 계시되기도 하고,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은 안식일이 인간을 축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가르치시고 이 안식일은 결국 인류의 역사와 함께 존재해온 것입니다. 안식일은 인간이 자신을 위하여 6일을 할당하고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당시의 유대인 비판자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4복음서 모두에서 주님과 유대 지도자들이 안식일에 대한 다양한 논쟁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주님의 주장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 중의 어떤 것도 안식일에 대한 것만큼 주장하신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의 주장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사건을 단순히 있는 그대로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걷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사역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병자를 고치시고, 사람들을 축복하시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런 일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여행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의 여행은 몹시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피곤하고 제대로 먹지 못하여 배가 고파습니다. 이 굶주린 사람들이 밀밭을 지날 때, 그들은 밀을 잘라서 허기를 채웠습니다. 주님께서 앞에 가시고 그 뒤를 여러 사람이 따라갔지만 그것이 책망 받을 일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대한 주님의 견해를 알았고 유대의 전통에 배고픈 사람이 도구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밭의 곡식을 조금 취하는 것은 허용되는 것이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밀을 잘라 먹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히브리인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에게 비난 받을 일임을 알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기에 바리새인들이 있어도 별로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즉시 비난합니다. 그리고 그 비난은 곧장 주님을 향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책잡고 비난하려고 주님의 뒤를 따르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이들은 제자들의 행동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주님께로 돌리고 주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과 행동이 제자들을 전통적인 일부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비난에 대하시는 주님의 생각을 헤아려 봅시다. 먼저 주님은 제자들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 있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제자들의 행동을 자신의 행동으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옛날 다윗의 행동을 예로 설명하십니다.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다윗은 자신의 많은 허물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한 일은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도 불법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다윗이 한 일이 결코 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주님은 제사장들의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일하는 것도 안식일에 쉬어야하는 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누구도 안식일에 제사장에게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범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명확한 논리를 근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무지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며 스승들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지금 내 제자들이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지만, 그 비난은 너희가 율법을 잘 알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모르고 무지하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권위를 무시해 버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하시며 (호6;6)을 인용하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원하시며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제사를 드릴 때, 마음에 자비가 없으면 그 제사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뜻은 ‘만일 너희가 성경을 바로 알고 있다면 배고픈 사람은 안식일이나 평일에도 언제나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였을 것이고 그러므로 죄 없는 자를 결코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8절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자 유대 지도자들은 주님을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을 받고 축복을 얻을 수 있는 은혜의 수단일 뿐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제한하고 얽매어서 짐을 지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통하여 자신의 무한하신 사랑을 무력하여 힘을 잃고 의기소침해진 사람들에게 부으셔서, 그들의 마음에 새 힘을 부으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 즉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고 율법을 어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안식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지킵니다. 안식일의 전통은 주일에 지켜집니다.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경건을 위하여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애쓰신 전통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필요하고 또 권면할 일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모양을 내는 것으로 세속화 시킬 수도 있었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개인의 유흥이나 오락을 위하여 주일을 욕되게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다만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과의 교제와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정당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일에 대하여 정당한 생각을 가지고 경건과 거룩을 실현하는 주일을 지키는 신자가 됩시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마 12:1-8 / 김영규 목사
안식일의 의미
오늘날 전 세계인이 다 같이 지키는 유일한 절기가 있습니다. 바로 안식일, 주일입니다. “일요일” “주일” “안식일” 명칭은 여러 가지지만 같은 날입니다. 한 주간은 7일 단위로 되어 있습니다. 그 7일 중의 하루는 쉬는 날입니다. 이것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이런 규칙은 창세 때에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루를 구별하여 안식일로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인간이 만든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안식일을 제정하셨을까요? 성경에는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업적을 기념하고 찬미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무엇을 기념하는 절기일까요? 하나님은 인류에게 두 가지를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첫째는 우주 창조에 대한 기념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마지막 날에 쉬셨습니다. 이 안식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리는 안식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에 대한 기념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5:15)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포악한 바로의 손에서 구출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 아래로 인도하신 후에 이 계명을 주셨습니다.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자유와 해방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창조에 대한 기념, 구원에 대한 기념! 우리는 안식일에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업적을 높이고 찬양해야 합니다. 과거의 역사만을 기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현재에도 부단히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십니다. 날마다 양식을 주시고 건강을 주십니다. 가족을 주시고, 직장과 사업을 주십니다. 다양한 삶의 즐거움과 보람을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피조물을 대표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첫 번째 의무입니다.
둘째로, 인간을 위한 목적입니다. 먼저 휴식을 위한 목적입니다. 안식일이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안식의 날이기도 합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신5:13-14) 첫째는 인간 위한 휴식입니다.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모두 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 덕분에 일주일에 하루를 쉽니다. 만일 이 안식일 제도가 없었다면, 전 세계의 노동자들은 과로 때문에 벌써 쓰러졌을 겁니다. 둘째는 모든 동물과 식물을 위한 휴식입니다. 안식일에는 가축에게도 일을 시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땅을 위한 휴식입니다. 인간이 쉬는 동안 땅도 쉬도록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 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레25:1-5) 사실 땅이 쉬어야 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극히 최근에 깨달은 사실입니다. 땅도 쉬어야 생산성이 회복됩니다.
휴식하는 목적 외에도 인간을 위한 중요한 목적이 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일입니다. 그냥 휴식하는 것만이 안식일의 목적은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복을 받는 날입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사58:13-14) 안식일은 축복의 날입니다. 영혼의 안식을 얻습니다. 기쁨을 얻습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병 고침을 받고 건강을 회복합니다. 미움과 증오심을 버리고 사랑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만나와 양식을 얻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인생의 모든 축복을 받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야 될 계명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될 계명입니다.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 규례는 십계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은 성경 계명의 요약입니다. 인간으로서 영원히 지켜야 될 삶의 규칙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안식일 계명은 십계명보다 훨씬 이전에 제정되었습니다. 십계명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지만 안식일 계명은 창조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2:2-3) 그러므로 안식일은 창조 때부터의 규칙입니다. 천국에서는 매일매일이 다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일주일에 하루를 안식일로 제정하신 만큼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엄한 처벌을 내린 경우가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붙잡혀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만큼 안식일은 강제로라도 지켜야 되는 규례입니다. 그러나 안식일 계명은 원칙적으로 부정적 명령이 아니라, 긍정적 명령입니다. 즉, 하지 말라는 식의 계명이 아니라, 하라는 계명입니다. 금지법이 아닌 권장법입니다. 최소한의 법이 아니라, 최대한 지키라는 의미의 법입니다. 금지법이란 위반하면 안 되는 최소한의 법입니다. 그래서 위반하면 처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권장법은 한계가 없습니다. 지킬 수 있는 한 최대한 지키는 대로 복을 받습니다. 금지법은 생산성이 없는 법입니다. 지킨다고 무엇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한 법을 지켰다고 무슨 생산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권장법은 다릅니다. 지킬수록 많은 유익과 혜택이 나타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안식일 법은 벌을 주시려고 만든 법이 아니라, 축복을 주시려고 만드신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벌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안식일을 지킬 것이 아닙니다. 축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안식일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주일을 대수롭지 않게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일 성수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일 성수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사울왕 시대부터 약 400 년 간 이어져 왔던 이스라엘 왕국은 BC 586년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멸망당하고 끝이 났습니다. 그 때에 엄청난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왕족, 귀족, 제사장, 각종 기술자들을 포함하여 약 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끌려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포로로 끌려간 유다인들은 고유한 풍속과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았습니다. 거기서 제사장을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은 머리를 싸매고 생각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멸망당했을까? 왜 유다인들이 포로가 되었는가?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데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증표로써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들을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을 범한 것,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은 것, 율법을 읽지 않고 가르치지 않은 것, 우상 숭배에 빠진 것 등등.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안식일 계명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안식일을 더 잘 지키기 위한 39 가지의 중요한 규례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런 규례들이 담긴 유대인의 전통을 탈무드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말한 안식일 규례는 바로 이때에 만들어진 탈무드 식의 규례들입니다.
꼭 값 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만 안식일을 지킵니까? 미리 깨닫고 지키면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오늘 우리는 안식일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안식일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법이 아닙니다.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법입니다. 안 지키면 결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집니다. 우리 신앙을 지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토대가 바로 안식일입니다. 평생토록 주일 성수 한 가지만 잘 한다 해도 결단코 신앙에서 실족하지는 않을 겁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그러면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구약 시대 사람들처럼 지켜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첫째입니다. 하나님 경배를 위해서 안식일이 존재합니다. 예배는 이 날의 최우선 순위입니다. 예배를 뺄 수 있는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죽는 일이나 병원에 입원하는 일, 혹은 천재지변이나 불가항력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주일 예배를 빼먹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주일 예배는 일생을 통해서 나의 생존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미팅, 즉 하나님과의 만남 이라고 생각하세요. 내 인생의 생명력을 주는 만남, 내 인생을 가장 영광되게 만드는 만남, 내 인생을 치료하는 만남,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만남, 내 인생에 힘과 활력을 불어는 만남이 바로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단언하거니와 평생 주일 예배를 성실히 드리는 자는 결단코 불행한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예배 중심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직업적인 일을 중단하고 쉬어야 합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9-10)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노동의 명령입니다. 엿새 동안 빈둥빈둥 하는 사람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안식일에는 쉬어야 합니다. 주일날 억만금이 들어온다 해도 쉬세요. 그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주일날 더 잘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주일에 쉬는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구약시대 광야에서 안식일 날 만나를 구하러 나간 사람들은 다 허탕을 쳤습니다. 주일은 쉬되, 주로 가족과 함께 쉬세요. 그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주일날 쉬는 날이라고 온갖 사람들을 다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창회, 산악회, 종친회, 동문회, 향우회, 낚시회... 가족 외에는 그 어떤 사람들과도 만나지 마세요. 주일은 하나님 다음으로 가족을 위한 날입니다. 그러니까 가족을 위해 보낼 준비를 철저히 하세요. 음식 준비를 하고, 대화 준비를 하세요. 주일 전날에 먹거리 준비를 잘 하세요. 그래서 주일날이 되면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즐겁게 식사를 하게 만드세요. 주일날만 되면 가족이 쫄쫄 굶는 집이 있습니다. 앞날이 뻔한 집입니다. 주일이 축제가 되도록 준비하세요. 대화의 준비도 그래요. 밀렸던 대화를 나누기 위해 話題를 준비하세요. 무슨 얘기를 할까? 아이들의 얘기도 들어주고, 교훈도 하고, 부부끼리, 혹은 부모님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세요. 그냥 쉬는 날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즐겁고 보람 있는 날이 되게 하세요.
셋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하는 데 보내야 합니다. 바로 이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갑니다. 이때는 추수기가 가까운 시기로 유월절이 지난 첫 번째 안식일로 추측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밀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비벼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로 다니시든지 도시락을 들고 다니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배고픈 것은 당연합니다. 밀 이삭이라도 잘라 먹고 허기를 채우려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배고픈 자가 남의 밭에서 곡식이나 과일을 따먹는 것은 허용된 일입니다.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신23:24-25)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정죄하고 책망했습니다. 남의 밀을 잘라 먹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밀 이삭을 자른 것은 秋收 죄요, 밀을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은 搗精 죄입니다. 秋收든 搗精이든 다 노동에 해당한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오직 한 가지 원리를 적용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긍휼의 일을 한다면 안식일에도 충분히 용납될 수 있습니다. 환자를 고쳐주고 간호하는 일, 불쌍한 사람을 돕는 일, 구덩이에 빠진 소를 건져주는 일, 화재를 진압하는 일, 시험에 든 사람을 심방하고 격려하는 일, 또는 오늘날 공공의 목적으로 하는 모든 일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주일날에도 발전소는 돌아갑니다. 전화국이 움직이고 대중교통이 움직입니다. 휴전선에서 병사들이 총을 들고 보초를 섭니다. 소방관들이 경계 근무를 하고, 경찰들이 순찰을 돕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안식일에도 허용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안식일에 경배를 제쳐놓고 자선 활동을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부득이한 상황으로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
주일날 어떤 일은 하고 어떤 일은 하지 말아야 될까? 하나하나 일일이 따질 수는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안식일을 지키는 대 원칙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8절) 바로 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중심으로 안식일을 지키면 됩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란 것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 위에 계시는 것이지, 안식일이 예수님 위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히브리 말로는 메시야입니다. 다 같은 뜻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 기름을 부은 직책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왕이요, 둘째는 제사장이요, 셋째는 선지자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이 세 가지 직책은 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직책들입니다. 구약은 모형이고 그림자입니다. 그 실체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왕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선지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세 가지 직책은 다 같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위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말씀합니다.
첫째로, 왕의 신분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구약 시대에 다윗은 적을 피하여 도망하다가 제사장 아히멜렉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다윗과 동행자들은 제사장에게 먹을 것을 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때에 제사장 아히멜렉은 성전에 차려 놓았던 진설병 떡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그 떡을 달라고 해서 일행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자비의 법이 안식일 법보다 위에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의 신분이 상징하는 직책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왕입니다. 다윗이 진설병을 먹었다면 다윗은 안식일 위에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요? 다윗 왕이 모형이라면 예수님은 실체이신 하늘의 왕입니다. 그 예수님이 안식일 계명보다 위에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둘째로, 제사장의 신분입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에도 성전의 일을 합니다. 소를 잡고, 양을 잡습니다.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불을 피우고 제물을 운반합니다. 그렇다고 성전에서 제사지내는 일을 노동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5절)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6절) 구약의 제사장이나 성전은 다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번제단, 그 위에 드려지는 제물, 진설병, 순금 등대, 분향단, 법궤, 속죄소, 성소의 휘장, 그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가리켜서 참된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요2:21) 예수님은 참 성전이시며, 참 제물이시며, 참 제사장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제물이 되시고,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런 예수님이 안식일 법 안에 갇히실 수는 없습니다.
셋째로, 선지자의 신분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7절) 이 말씀은 호세아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올바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씀을 전한다면 참된 선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하신 의도는 자비입니다. 인간을 정죄하고 처벌하는 것이 일차 목표가 아닙니다. 우선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지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 받든지 말든지 멸망을 선포하고 끝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하나님의 자비를 알리고 구원받도록 인도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선지자 중의 선지자 이십니다. 나는 선지자보다 큰 자니라!(마12:41)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장 정확히 알고 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안식일 계명 아래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에 나타난 안식일이란 말 대신에 “주일”, 즉 “주님의 날”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사도들은 구약의 안식일 대신에 주님의 날을 지켰습니다. 날짜도 구약의 안식일이 아닌, 주님이 부활하신 한 주간의 첫째 날을 지켰습니다.(계1:10,행20:7,고전16:2) 한 주간은 주일로 시작됩니다. 달력에 보세요. 한 주일은 주일부터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법은 예수님 아래에 있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 또한 안식일 법의 노예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오늘날 교회는 안식일과 관련하여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안식일을 지키거나 말거나 제멋대로 하는 반율법주의입니다. 둘째는 안식일에 숨도 크게 쉬지 않는 안식일 지상주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안식일에는 차도 타지 않고 기름도 넣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지켜야 됩니까?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 중심으로 안식일을 지키세요. 우리는 가끔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하면서 마음이 찜찜합니다. 때로는 모임에도 참석합니다. 행사를 치루기도 합니다. 물건도 사고팝니다. 먼 거리 여행도 합니다. 운동도 합니다. 소풍도 갑니다. 이런 저런 일들을 할 때마다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해 보세요. “주님, 주님이시라면 이 일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아마 마음에서 주님의 소리가 들려 올 겁니다. 주님이 행하신다면 나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행치 않으신 일이라면 우리는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매이지 말고 예수님께 매이시기 바랍니다. 마지못해 안식일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날에 주님과 만나는 것을 기대하고 지키시기 바랍니다. 나아가서 주님이 예비하신 모든 복을 받기 위해 기쁨으로 주일 예배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에 선한 일을 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날을 사랑하고, 주일의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
마 12:1-8 / 정필도 목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셔서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뜻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입니다(욘 4:2).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에 따른 증거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마귀의 성품을 가졌던 사람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신분이 달라지고 성품의 변화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에 수십 년 다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증거가 없는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확실한 변화가 반드시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을 보면, 빛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열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사람 안에 착함과 악독함 두 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도로 악한 모습만 지닌 사람도 없고, 한없이 착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인 강도짓을 하여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착한 면이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평소에 매우 착한 사람으로 소문난 사람도 한번 화가 나면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거친 모습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의롭기 만한 사람도 없고, 불의하기 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의로운 사람들 속에 불의함이 존재하고 불의한 사람들 속에 의로움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3:10). 더구나 다윗처럼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참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하는 일들이 가장 바르고 가장 의롭다고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로 항상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들보다 세리와 창기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매우 심한 말씀같아 보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알고 보면 이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세리나 창기들보다 더 마귀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두 가지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하고 거짓된 것입니다. 마귀는 더러운 영이고 악한 영이며, 음란한 영이고 거짓된 영입니다.
요한복음 8:44을 보면 좬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 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좭고 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심판주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런데 감히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누가 가장 잘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지 아십니까? 사실은 죄가 가장 많아서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지옥불에 들어가 영원히 멸망할 마귀들입니다. 마귀는 본래 악하고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은 영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루터가 서재에 앉아있을 때 마귀가 나타나 그에게 종이 한 장을 들이밀었습니다. 그 종이를 한 참 들여다 본 루터는 그만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습니다. 그 종이에는 자신이 아주 오래 전에 지은 기억도 나지 않는 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앞이 깜깜했습니다. 맥이 탁 풀렸습니다. 마귀는 또 뒷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곳에는 최근에 지은 죄가 다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루터에게 마귀는 비웃는 얼굴로, 이 기록이 모두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루터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마귀는 루터를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소리쳤습니다. “이렇게 더러운 녀석이 무슨 종교개혁을 한다고, 너나 바르게 살아라. 너 이 죄값을 어떻게 할래?” 루터는 할말을 잃었습니다. 머리를 푹 숙이고 낙심하여 힘없이 앉아있는 루터의 등뒤에서 분명히 들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있었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를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이 음성을 듣는 순간 루터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루터는 새 힘을 얻고 큰 소리로 외치며 잉크병을 들어 벽을 향해 힘껏 던지며, 외쳤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 그때 마귀는 슬그머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마귀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는 가장 먼저 지옥에 갈 존재이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하고 그 죄를 들추어내는 일에 앞장서는 마귀가 그 사람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만이 의인이며, 자신들이 하는 일은 모두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를 좋아하여 조금이라도 잘못이 드러나면 가차없이 그것을 문제삼아 비판하고 정죄하므로서 이를 통해 자신들이 가장 의롭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아주 악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언제나 겉과 속이 매우 다른 이중인격자들로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한척하고 뒤로는 나쁜 짓을 도맡아 하는 아주 부도덕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악하고 거짓된 성품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독사의 자식들아(마 12:24,34), 소경들아(마 15:12-14), 외식하는 자들아(마 23:13-19), 뱀들아(마 23:33), 마귀의 자식들아(요 8:13, 44)라는 온갖 책망을 다 들어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바리새인들은 마귀를 닮은 죄인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에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든지 밀 이삭을 잘라 비벼 먹었습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어떻게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고 비난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에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명하셨는데,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따먹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었느냐고 따지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지키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 목적을 똑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0:13을 보면 좬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좭라고 말씀하셨고, 신명기 6:24에서는 좬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좭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복을 받고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우리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시고 지키라 명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 따먹는 일을 했다고 무조건 제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다윗 일행이 사울에게 쫓겨 몹시 배가 고플 때 제사장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에 제사장은 자신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그들에게 내어주어 허기를 면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들은 법을 어겨 죽어 마땅하나 죽지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더구나 제사장들은 안식일이라고 해서 보통사람들처럼 일하지 않고 쉬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제사지내는 일로 누구보다도 가장 바쁘고 피곤하게 일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안식일에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실 목회자들처럼 주일에 바쁜 사람들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가 은혜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예배안내와 차량 봉사, 그리고 기계실과 방송실, 성가대, 헌금위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 당시에도 제사를 지내려면 제물로 쓰이는 양을 잡고 털을 뽑고 부산물을 치우고 하느라고 제사장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항의에 성경의 예를 드시면서 안식일에 일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안식일을 만드신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정확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만들어주신 것은 우리를 위해 주신 제도이므로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일 하루만이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은혜를 받고 영혼이 새로워지면, 그 믿음 가지고 엿새동안 세상에 나아가 살 때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므로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세상일을 하지 않고 쉬므로 해서 육신이 건강해지고 일의 능률도 올릴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여러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지나간 수천 년 역사 가운데 서양과 동양을 비교해보면 서양 사람들은 기독교의 문명을 따라 한 주일에 하루씩 쉬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동양 사람들은 다른 종교를 따라 쉼 없이 일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하루 더 일한 동양이 서양보다 1/7을 앞서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과는 서양사람보다 동양사람이 잘 살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처음부터 일주일 중 하루를 쉬어야만 건강하게 살수 있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 손이 마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트집잡기 위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런 예를 드셨습니다. 마침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졌는데 그것을 보고도 안식일을 핑계로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반문하시면서,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하시며,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일에 선한 일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여주고, 병든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 위로해주며,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십시오.
우리 인간은 모두 다 죄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아니면 구원받을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어 마땅한 죄인이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처럼 자비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잘 드리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면 더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50억이라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하나님으로부터 탕감받았다고 하면, 우리에게 500만원, 50만원, 5만원 빚진 사람에게 그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도리어 우리 자신은 나에게 진 빚을 갚으라고 다른 사람을 재촉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악의 빚을 진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빚을 모두 다 탕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손해를 보이고 섭섭하게 하는 사람이 있을 지 라도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신 마음으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 할 자격이 없는 이유?
1. 우리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죄가 더 클지도 모릅니다.
2. 올바른 판단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이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3. 우리는 모두 심판주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죄인인고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권한이 없습니다.
4.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기 좋아하는 것은 마귀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5. 우리 모두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 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할 일은 오직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비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를 받은 성도일수록 그 성품이 자비하게 될 것입니다.
라과디아는 뉴욕 역대 시장 중에 가장 유명한 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재판부의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빵 가게에서 빵을 훔친 죄로 잡혀 들어온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에게 왜 빵을 훔쳤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너무 배가 고파서 그만 빵에 손을 댔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라과디아 판사는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라고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낸 후 “그 10불을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동안 저는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10불을 냅니다.” 그리고 라과디아 판사는 자신의 넓은 중절모자를 벗어 재판부 서기에게 내어주며 “이 재판정에 계신 분들도 나처럼 너무 잘 먹은데 대한 벌금을 내고 싶으시다면 이 모자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노인에게 그 돈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노인은 그 자리에서 모아진 47불을 손에 쥐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이와같이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