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경북중고제39회동기회 원문보기 글쓴이: 鶴軒 이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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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다 쇼인의 사설 학교인 쇼카손주쿠. |
이토는 문관으로서 메이지 헌법과 관료제의 기초를 세웠다. 야마가타는 징병제를 비롯해 근대적 군대를 육성했다. 이토가 문관을 대표한다면, 야마가타는 무관을 대표한다.
둘 다 유럽에 유학했고, 그 경험을 일본 근대화에 활용했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정권을 다투는 경쟁관계이기도 했지만 대외 팽창적 국익 앞에선 콤비를 이뤘다. 이토는
45세이던 1885년 초대 총리에 오르며 내각책임제를 확립한다. 이토에 이어 1890년 총리에 취임한 야마가타는 외교정략론을 발표하면서 “이익선(국가 이익)의 초점은 조선”임을 분명히 했다. 그 후 일본의 이익선은 한국에서 만주로, 만주에서 시베리아로, 시베리아에서 중국 대륙으로, 그리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확대됐다.
1894∼95년은 한·중·일 3국의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야마가타의 논리에 의하면, 일본이 이익선을 노골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내부적으로 다져온 힘을 외부로 돌린 첫 시도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을 주도한 인물은 이토였다. 야마가타가 전쟁을 일으키고 이토가 수습하며 일본의 국익을 챙기는 호흡이 절묘하다. 청나라의 리훙장을 야마구치현으로 불러들여 조약을 체결했다. 이토는 조선을 중국에서 분리시키는 데 중점을 뒀다.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표현을 썼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정세가 복잡하게 얽혔던 시절, 조선의 독립은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다. 1873년 정한론 대두로부터 시작된 조선 침략 프로젝트의 1단계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이토와 야마가타는 1885~95년 총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조선 침탈의 밑그림을 완성해갔다.
그러나 그 10년간 조선은 일본과 정반대로 개화와 개혁의 동력을 상실했다. 당시 조선의 리더들도 전통적
유학 지식에 새로 습득한 서양 지식을 접목해 변화를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몇몇 주도자가 사라진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변화를 주도할 힘을 전반적으로 상실했던 것이다.
부국강병과 총화단결, 그리고 대외침략. 메이지 유신과 한국 병합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위세는 지난 100년간 우리에게 이중적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 증오와 저항의 대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선망의 모델이기도 했다.
ㅡ 위 글은 일본 야마구치(山口)여행을 앞두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일부 짜깁기한 글입니다.(鶴軒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