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금요일 저녁.
업무를 마치고 아내와 함께 부리나케 군산으로 향했다.
절친한 친구의 모친께서 이승을 떠나셨기 때문이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부부동반 모임을 했던 친구라 같이 갔다.
조문하고 빈소를 나서니 어느새 밤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새벽 4시부터 그 시간까지 정말로 숨가쁘게 달렸던 하루였다.
긴장이 풀리자 피곤이 엄습했다.
'은파 유원지' 부근 호텔에서 하룻밤을 쉬고 상큼한 아침을 맞았다.
콩나물 해장국으로 조반을 먹고 '방장산'으로 향했다.
방장산은 전북 '고창군'과 전남 '장성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자 수려한 산이다.
'갈재 통일공원' 주차장에 차를 두고 하이킹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100대 명산 탐방' 중 62번째였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시원했으며 햇볕은 따스했다.
완벽한 가을의 향연이었다.
사실 '방장산'은 능선 하이킹보다 임도 트레킹이 훨씬 인기가 많은 곳이라 나도 임도에서 몇 번 경험을 했던 터였다.
그러나 '100대 명산 탐방'은 '정상도전'이 명시적인 과제여서 능선길 산행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찾는 산객들이 많지 않아 트레일은 이미 조릿대 군락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대로 몇 년만 더 흐른다면 아마도 트레일이 묻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 정도였다.
정상에 서보니 북으로는 고창과 정읍 일대가, 남으로는 장성 일대의 가을풍경이 일망무제로 시원하게 펼쳐졌다.
"와우"
연방 탄성이 흘렀다.
조금씩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산마루의 색채감과 저 아래 황금색 물결로 넘실대는 드넓은 들판의 조화가 마치 아름다운 동화책 속의 소담스런 풍경 같았다.
동서남북 사방팔방, 눈길이 닿는 데마다 끝없는 비경의 파노라마가 투명한 가을햇살과 어깨동무를 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완벽한 가을의 축제였다.
바쁘고 분주했던 일상에 비로소 숨결이 트였다.
나의 폐부와 영혼이 단박에 맑아진 느낌이었다.
오전에 '방장산' 산행을 마치고 다시 차를 몰아 '백양사'로 향했다.
'백양사' 앞에 있는 거대한 '장성호'는 가을이라 그런지, 아니면 어떤 공사 때문에 그런지 호숫물을 모조리 뺀 상태라 대부분의 호수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농번기인 봄,여름에 갔더라면 엄청나게 깊고 넓은 '장성호'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백양사' 바로 앞엔 우리가 몇 번 방문했던 단골집이 있다.
그 지역의 특산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자연의 맛이 진하게 묻어나는 '산채정식'을 먹었다.
막걸리로 건배하면서 우리의 기도문 같은 건배사를 나즈막하게 외쳤다.
"오직 이 순간, 이 풍경, 이 자연에 집중하자"
식사는 과연 일미였다.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고 63번째 탐방지인 '백암산'에 올랐다.
크게 보면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산자수려한 또 하나의 산이고, 작게 얘기하면 남도의 명승지 중 하나인 고색창연한 '백양사'를 그 너른 품에 안고 있는 장성군의 자랑 '백암산'이었다.
어차피 수도권에서 멀리까지 온 만큼 멋진 두 산을 우리네 심신에 새겨넣자 했다.
그렇게 힘차게 경이로운 대자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아득한 그 시간들이 빚어낸 비경들을 영혼의 추억록에 차곡차곡 담아가면서.
사위는 여전히 푸르름으로 빛났다.
하지만 그런 푸르름 속에서도 조금씩 알록달록한 단풍의 판타지가 온 산하를 곱게 물들여 가고 있었다.
인공적으로 꾸미지는 않았지만, 너무나도 예쁘고 앙증맞은 자연 그대로의 감동과 열락이 우리네 마음의 주름까지도 반듯하게 펴주는 듯했다.
못내 고맙고 감사했다.
여유와 자유를 만끽하며 한 발 한 발 가다보니 정상인 '상왕봉'에 당도했다.
백암산 '상왕봉'에서 내려다 본 '입암산' 쪽 깊은 계곡과 '내장산' 쪽 첩첩고봉들은 여행자의 가슴을 울리는 거대하고 황홀한 절경이었다.
"오오, 원더풀"
태초의 신비가 고동치는 거칠고 순수한 대자연의 감흥이 그칠 줄 몰랐다.
나는 '상왕봉'에 서서 '내장산' 정상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옛날 캠퍼스 시절에 혼자서 '백양사'를 출발해 백학봉-구암사-봉덕리-내장산-연자봉-내장사-금선교-내장동 버스 터미널까지 종주한 적이 있었다.
불연듯 그때 그 시절의 고행과 추억이 떠올랐다.
자연과 시간이 빚어낸 가을의 걸작, 그건 누가 뭐래도 단연코 '가을의 내장산'이 아닌가 한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얼마를 더 가야만 하늘과 맞닿은 저 비경을 만날 수 있을까?"
생각 같아선 단숨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산행시간과 아내의 체력안배도 고려해야만 했다.
아직 '백학봉'과 '약사암' 코스가 남아 있었다.
'백암산'의 백미는 가파르고 험난한 바로 그 트레일이었으니까.
가보면 안다.
아찔함과 생동감이 사정 없이 마음을 흔들어 대는 코스다.
용암이 조각한 '불의 땅'이 이런 모습일까?
아니면 융기와 침강이 깎아 만든 태고적 암벽이 이런 형상일까?
그렇게 경이로운 대자연의 영겁의 시간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그런 수직 단애 밑에 '약사암'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일지 모르겠지만 기돗발이 제대로 살아숨쉴 것 같은 그 청정도량 앞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옷깃을 여민 채 합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험하고 신비로운 기운이 온몸을 부드럽게 위무하며 감싸주는 곳이었다.
'방장'과 '백암'의 감동을 가슴에 안은 채 차를 몰아 상경길에 올랐다.
대지는 이미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지구의 어느 한 모퉁이, 그 헤일 수 없는 '대지의 나이테' 위를 감사함과 설렘으로 한 번 더 걸어보았다.
과거의 까마득한 세월과 그 안에서의 수많은 스토리텔링을 대자연이 우리에게 전해주는듯,
어둠속에 잠긴 대지는 깊은 호흡을 길게 내뱉고 있었다.
소슬한 가을밤이 그렇게 깊어만 갔다.
범사에 감사하고픈 하루였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