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 기념, 보재 이상설!
장 병 학 (전 충북도의회 교육의원)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 때 보재 이상설 선생을 정사로 보내 대한제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지원을 호소하며 구국활동을 펴셨다. 생거진천이 낳은 이상설(1870-1917) 선생의 100주년 기념행사(4월 21일-22일)가 이상설 생가(충청북도 기념물 제77호)와 진천 일원에서 다채롭게 열린다.
이상설 선생을 기리는 행사는 진천 화랑관에서 다채로운 전야제 행사에 이어 추모제와 부대행사로 전국 시낭송대회, 추모 강연, 이상설 선생 자료 전시회 등 보재 이상설 선생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또한 국민의 성금으로 세워질 2019년 4월 건립될 이상설 선생 기념관 건립 퍼포먼스 행사도 갖게 된다. 필자 역시 생거진천인으로서 이상설 선생 기념관 건립을 위해 작은 정성의 성금은 물론 자랑스런 보재 선생의 치적을 전국에 보다 많은 홍보를 할 작정이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에서 태어나셨다.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헐버트와 친교를 맺으면서 신학문에 열정을 쏟으셨다. 1904년 보재 선생은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을사조약(1905년)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나 올렸으나, 12월 체직되어 관복을 벗고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
민영환의 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한 후,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보재 선생은 연명으로 박승봉과 함께 일제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해 선생은 8월 보안회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1905년 법부협판·의정부참찬을 지냈다.
보재 선생은 1906년 이동녕, 정순만과 함께 조국을 떠나 상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추로 가서 이범윤과 국권회복운동의 방략을 협의했다. 이상설 선생은 용정으로 가서 여준, 왕창동, 박무림과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민족교육에 열정을 쏟았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문을 닫는 서글픔을 한몸에 받고 울분을 참지 못했다.
2017년 3월, 보재 이상설 선생이 설립했던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이었던 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생거진천에 있는 충북혁신도시에 서전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후세들에게 열정을 쏟아가고 있다.
1907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보재 이상설을 정사로 하고,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파견했다
그 해 5월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달려가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으나 한일협약은 각국 정부가 승인했으므로 외교권이 없는 대한제국 대표의 참석과 발언은 허용할 수 없다고 거절당함에, 결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상설은 이에 굴하지 않고 6월 대한제국의 정당한 주장을 밝힌 공고사를 만국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냈고, 이위종이 국제협회에서 세계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호소'를 연설하여 국제여론에 한국문제를 부각시켰다. 회의 참석이 끝내 거부되자 1907년 7월 14일 이준이 헤이그에서 순국하여 아이큰다우의 공원묘지에 안장하였다. 그 후, 이상설은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영세중립화를 역설했다.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들어 특사를 위칭했다며 재판에 회부, 궐석 판결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으며,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 약소민족의 슬픔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보재 이상설은 동지들과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면서 광복운동에 앞장서셨던 충북 생거진천이 낳은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애국자이시다. 요즈음 보재처럼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애국충정하는 지도자와 국민들이 가득 넘쳐나기를 학수고대한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외국에서 대한제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지원을 호소하다가 1917년 3월 2일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질병으로 사망하셨다. 선생은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는 모두 화장했고 자신의 많은 문고도 모두 불태운 아픔이 아쉽기만 하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71년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숭모비를 건립하였으며, 1975년 숭렬사(崇烈祠)를 건립했다. 이상설 생가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7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필자 역시 생거진천인으로 자랑스런 보재 이상설 선생의 드높은 애국충정의 정신을 본받으면서 남은 삶을 올곧게 살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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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한국 수필(1986), 한국아동문학연구회 동시(2002) 등단
늘 처음처럼(수필집), 꿈을 주는 동시(동시집), 함께가는 융합미래사회(칼럼집) 펴냄
진천삼수초교장, 백곡초교장, 청주풍광초등학교 교장, 충북도의회 교육의원
한국아동문학연구회 부회장, 청주문인협회장, 충북수필문학회장, 중부문학회장,
한국아동문학연구회 부회장, 한국아동문학회 이사, 국제PEN문학한국본부 충북위원회 회장 역임
황조근정훈장, 한국교육자대상, 충북문학상, 충북수필문학상, 문예한국 작가상, 진천문학상 수상
jbh88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