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숙희 어미가 자주 숙희를 때려 크게 울리는 것에 화가 나서 옳지 않다고 말하고, 또 여종 옥춘이 숙희가 맞는 것을 키득거리며 좋아한다고 언짢아했다. 나도 화가 나서 대나무가지로 옥춘의 등을 10여 대 때렸고 또 아이 때린 며느리를 질책했다. 며느리는 이것이 섭섭했는지 여종들을 나무랐고 아내는 또 그런 며느리를 꾸짖었다. (『묵재일기』 1551년 5월 8일)
460여 년 전 성주 옥산리의 한 오두막에서 일어난 일이다. 옥춘만 없다면 21세기 우리들 가족의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섯 살 손녀 숙희가 그 엄마로부터 매를 맞는 것에 마음이 상한 할아버지는 키득거린 여종에게 화풀이를 하고 만다.
15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묵재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은 승정원 승지를 지내던 중 을사사화에 연좌되어 성주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유배지 성주에 도착한 날이 1545년 9월 28일이고, 세상을 뜬 날이 1567년 2월 16일이다. 그는 매일 일기를 썼는데 죽는 날에도 일기를 썼다. 2월 16일의 마지막 일기는 “아내를 묻고 돌아와 신주를 죽청에 모셔다 놓고 초우제(初虞祭)를 지내다”로 끝이 난다. 중간에 결락된 부분이 있지만, 그의 일기는 성주에 오기 10년 전부터 써온 것이다. 성주에서의 22년만 보더라도 일기 속에는 많은 사람이 떠났고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 무엇보다 아내와 아들만 있던 그에게 며느리도 생기고 손녀 손자도 태어났으며, 매 맞던 다섯 살 숙희는 아이 엄마가 되었다.
유배지에서 다시 만난 가족
유배 온 지 1년, 서울에서 친정 괴산으로 옮겨와 살던 아내는 아들 내외와 성주로 내려와 함께 살게 된다. “아내의 행차는 28일 날 괴산을 출발했는데 아들과 새 며느리가 따라온다고 한다. 안방과 바깥방에 도배를 하고, 바깥방의 남쪽과 북쪽 벽을 뚫어 해가 들어오도록 창을 만들었다.”(1546.10.1) “저녁 무렵에 일행이 들어왔는데, 며느리를 보니 사랑스럽다. 아들의 어리석고 과묵한 것은 나와 같으니 우습다.”(1546.10.3.)
이날 처음으로 며느리를 만나게 되는데, 괴산에서 거행된 아들의 혼인식에 유배 중인 아버지가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며느리를 고르고 혼인식을 치르는 등의 모든 일은 아내가 주관했고 괴산의 처가 가족들이 도왔다. 그때 아내는 편지로 “신부의 자태는 곱지 않으나 마음은 어리석지 않다”고 했다. 서울에 살 때 아들 이온(李熅, 1518-1557)은 공부가 되지 않아 아버지에게 나무판자로, 대나무 회초리로 많이도 맞았다. 한 자라도 가르치려는 아버지와 아버지 없는 곳을 찾아 도망 다니던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이 유배지로 신부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며느리를 정성으로 보살피다
자신의 기대와는 애초에 어긋난 데다 건강도 좋지 않고 자주 화를 내며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불안한 아들. 이 문건은 그런 아들을 지켜보기만 할 뿐 예전처럼 ‘지도편달’ 하는 일은 없다. 아들을 닦달하던 열정이 아들의 아내, 며느리를 보호하고 챙기는 따뜻함으로 바뀐 것이다. 그의 일기는 매년 6월 6일의 며느리 생일을 꼭 챙겼다. “며느리의 생일이다. 국수와 만두를 만들어 나누어 먹었다.“(1548.6.6.) ”온(熅)의 처 생일이나 술자리를 차리지 못했다.“(1551.6.6.) “며느리의 생일이라 떡을 만들어 나누어 먹고 술자리를 벌였다. 아내는 가는 베[細布]를 선물로 주었다.”(1554.6.6.) ”며느리의 생일에 주고 싶어 판관에게 베 몇 단을 부탁해서 얻었다.”(1556.6.6.)
아들의 아내 사랑이 못 미더웠는지 이문건은 며느리의 건강을 세심하게 살핀다. “며느리가 몸이 편치 않은 듯하더니 어제부터 아프기 시작했다고 한다.”(1546.10.11.) “며느리가 찬바람을 쐬어서 몸이 편치 않고 밥도 먹지 못했다. 뜨거운 물을 마시고 땀을 내게 했다.”(1546.10.12.) 한 달 넘게 유종(乳腫)을 앓던 며느리를 매일 관찰하고 약을 연구하고 조제하여 먹인다. “며느리가 밤새 고통스러워했다. 새벽에 상처가 터져서 피고름이 흘렀다기에 창포 뿌리를 붙여 농을 빼내니 비로소 일어나 앉았다.”(1551.8.26.) 또 며느리가 임신인 것 같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출산할 때까지 아내를 통해 돌보고 보살폈다.
며느리 업신여기는 자들을 응징하다
이문건의 며느리 김종금(金鐘今, 1526~?)은 무슨 이유인지 여종들의 야유와 업신여김을 자주 받았다. 여종들이 며느리를 놀린다는 말을 듣게 된 이문건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직접 나서서 여종들을 응징했다. “여종 온금이 며느리에게 욕하고 공손하게 굴지 않는다고 하기에, 바로 혼을 냈다.”(1548.6.29.) “삼월이 매양 며느리를 업신여긴다고 하기에 불러서 등을 때렸다.(1553.7.13.) “아내가 말하기를 주지(注之)와 돌금(乭今)이 며느리를 업신여겨 그 말을 거역하고 혹은 하지 않은 말을 거짓으로 꾸민다고 한다. 매우 화가 나 그들을 차례대로 징계했다.”(1553.9.18.)
며느리 김종금은 그녀의 조력자인 여종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게다가 시어머니가 조금 훈계하면 죽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숙희 어미가 어제 저녁 시어머니가 훈계하자 울고불고하며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1557.1.24)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순순히 따르지 않아 훈계를 당하자 눈물을 흘리며 죽고 싶다고 했다 한다.”(1563.12.10)
미움은 잠시, 사랑은 계속되다
어느 날 노부부 이문건과 김돈이는 마주 앉아 며느리를 미워하느라 혼줄을 놓을 지경이다.
아내는 며느리가 어리석으면서 독할뿐더러 상하와 동서를 분간하지 못하여 오로지 상인(常人)의 시어미 욕하는 습관을 배워 듣는 족족 어기고 모든 말이 욕이며 화가 나면 죽을 듯이 울부짖는다고 한다. 어질지 못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필시 우리가 자식 복이 없어 이 같은 악인을 만난 것이다. 한스럽다.(1563.12.15.)
이로부터 닷새 후, 며느리 김종금은 왼손 가운데 손가락이 곪아 통증으로 힘들어한다. 이문건 부부는 며느리를 조용한 방에 눕히고 침을 놓아 고름을 빼내는 등 정성을 다해 치료한다. 행여 찬바람에 덧날까 노심초사한 노부부는 며느리에게 누워서 조리하라고 이른다. (1563.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