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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가족
마 12:38-50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 12:38-50 / [이적을 요구하는 세대;막8:11-12,눅11:29-32] 하루는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께 와서 이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일수록 더욱더 증거를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에게 일어났던 이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40) ㄴ)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밤낮 사흘을 지냈듯이 인자도 땅속에서 밤낮 사흘을 지낼 것이다. (ㄴ. 욘1:17) 41) 심판날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너희를 정죄할 것이다. 그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자기들의 모든 악한 길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너희는 요나보다 더 위대한 이가 지금 여기 있는데 그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42) 심판날에는 남쪽 나라에 살던 스바 여왕도 일어나 너희를 정죄할 것이다.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먼 땅에서부터 왔기 때문이다. 너희는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여기 있는데도 그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43) [되돌아온 더러운 귀신;눅11:24-26] 이 악한 세대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과 같다. 간혹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을 떠나 잠시 동안 물 없는 광야를 돌아다니며 쉴 곳을 찾는다. 그러다가 찾지 못하면 44) 더러운 귀신은 `내가 나왔던 그 사람에게로 되돌아 가자'고 말한다. 그리고 돌아와 보니 그 사람의 마음이 청소되어 있으나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45) 그 더러운 귀신은 자기보다 더 악한 다른 귀신 일곱과 함께 찾아와서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산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전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 46)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냐;막3:31-35,눅8:19-21] 예수께서 아직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47)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계십니다' 하고 전하자 48) 예수께서 물으셨다.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냐?' 49)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보라, 이들이 내 어머니요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누구나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이 계속되고, 복음이 명확하게 전달됨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믿음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38-45) 바리새인들의 표적에 대한 집착은 광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도 요나와 같이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표적과 나란히 비교되는 부활의 기적을 의미합니다(욘 2:10). 예수님은 계속해서 현재 상황을 요나의 경우와 비교하시는 가운데 요나가 미워했던 도시 니느웨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한 반면, 이 세대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크신 메시야를 거절했음을 지적하셨습니다(욘 3). 심판 때에는 니느웨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정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예를 하나 들며, 이 시대 사람들을 남방 여왕에 비유하셨습니다(스바 여왕, 왕상 10:1-13:2). 그 여인은 이방인으로서 솔로몬 왕으로 인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따라서 스바 여왕이 심판 때에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정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가 후에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비유는 이스라엘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주어진 은혜를 자기의 것으로 취하지 않으면 전보다 더 깊은 불신앙의 상태에 빠지게 되어 결국 큰 심판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46-50)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예수님께서 귀신에 사로잡혔다는 소문이 나돌자,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에게 참된 가족을 설명할 좋은 기회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족들을 사랑하고 존경하셨습니다(요 19:25-27). 새로운 가족은 핏줄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이런 영적인 가족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순종을 보여주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적용: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의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대적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뒷받침해 주는 많은 증거가 있음에도 거절하였습니다. 당신의 주변 상황은 어떠신지요?
영국의 전도자, 로드니 집시 스미스(Rodney 'Gipsy' Smith)라는 분이 계십니다. 배우지 못한 집시 부모의 아들로 자라서 별명이 ‘집시’였습니다. 그분은 백악관 초청으로 두 명의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대서양을 마흔다섯 번이나 건너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순회 사역자로 살았습니다. 그는 “복음서는 다섯 권이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사복음서의 다음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성경을 봅니다. 성경적 삶이 가장 진실한 성경해석입니다.
< 설 교 >
요나의 표적
마 12:38-45 / 이동휘 목사
1.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 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안식일 율법을 범했다는 이유를 들어 어떻게 해서든 죽일려고 작정했습니다. 바로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예수께서 이번에는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 사람이 귀신이 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되었다는 것은 그 병의 원인이 귀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셨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추방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추방하시는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들이 다 놀라며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할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낼 그러한 능력을 가졌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내 바리새인들이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며,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말을 일축해버립니다. 예수의 메시야됨을 부정하고, 예수를 ‘파워’가 약한 귀신들을 억누를 수 있는 소위 ‘파워’가 센 무당정도로 비아냥거린 것이었습니다. 그간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해서든 죽이려고 계획하던 바리새인들이 만약 사람들의 말대로 그가 다윗의 자손, 메시야라고 인정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것이 어려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이 품고 있는 악한 생각을 꿰뚫어 아시는 예수께서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마12:25-27) 고 말씀하십니다. ‘바알세불’은 ‘바알세붑’으로도 불리우기도 하는데(왕하 1:6) ‘귀신의 왕’, ‘귀신들의 두목’인 사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귀신들의 두목인 사탄이 그의 부하들인 귀신들을 쫓아낸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의 두목이 자기 졸개들을 쫓아내고 어떻게 사탄이 자기 뜻을 이루어 나가겠느냐? 귀신들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고 사탄은 귀신들을 앞세워 사람들을 미혹하기도 하고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역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귀신의 힘을 빌어 귀신이 쫓겨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병을 고치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2. 이렇게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된 사람을 고쳐주신 일로 바리새인들이 논쟁에서 밀리자, 이들 중 몇 사람이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며 당신이 다윗의 자손, 메시야로 세상에 오셨다면 그 표적(a miraculous sign)을 보여달라고 한 것입니다. ‘표적’은 ‘기적’(miracle), ‘기사’(wonder), ‘표징’(sign) 등과 다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표적은 예언이나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확실하게 증명해주기 위해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삶 속에 들어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B.C. 1150년경,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디안의 침략으로 식량과 가축들을 몽땅 약탈당해 궁핍이 극심하여 살기 힘들게 되자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 “(삿6:12-14)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삿6:15)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면서 사양합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만약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신다면, 저와 말씀하시는 분이 주 되시는 표징을 보여주소서(give me a sign.)”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요구대로 표적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염소 새끼 한 마리와 무교병, 그리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 나무 아래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지팡이로 고기와 무교병에 대자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모두 살라버렸습니다.(삿6:12-40) 이렇게 표적은 하나님께서 바위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사로 기드온을 부르신 것을 확증해주며, 그 기드온과 함께 하여 미디안 군대와 싸워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중 몇몇이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 표적은, 당신이 다윗의 자손 메시야라면 그 증표를 나타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께 요구하는 표적은 눈으로 확실하게 볼 수 있도록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시 이스라엘을 식민지 통치하는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다윗의 통일 왕국을 재건하며, 천군천사의 대군을 몰고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서 정치, 종교적 지도자가 되는 것을 나타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된 자를 성령의 힘으로 고쳐주심으로 자신이 인간을 구원하려 세상에 오신 메시야됨을 나타내 보였지만, 전혀 다른 메시야됨을 나타내라는 것은 아주 뻔뻔스럽고도 무례한 것으로서 자신들의 악의에 찬 불신앙,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는 음모를 여실히 내보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시 세대를 두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도덕적으로 음란하고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배역하여 우상숭배하는 영적 행음하는 것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모두 형식적이고 거짓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렘3:6-13) (6) 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7) 그가 이 모든 일들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아직도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8)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9) 그가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10)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반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12)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참조, 호 1:2-2:15)
또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두고 영적으로 “간음한 여인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약4:4)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희생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전혀 믿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그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멸하거나 멸시하며 대적하는 것을 두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부른 것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파고 들어가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없는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나타난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은 구약성경 요나서 내용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800년 전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앗수르 제국은 국력이 일시적으로 약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연거푸 두 차레에 걸쳐(B.C.765과 B.C.763년) 발생한 전국적인 전염병으로 인해 멸망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져 마음이 약해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니느웨 백성들의 마음이 가난해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에 가서 구원의 복음, 곧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40일이 지나 무너지리라.”는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 백성을 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가난해졌을 때 복음을 전하여 구원코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니느웨는 한 마디로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인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앗수르는 아주 포학하고 잔혹한 민족이었습니다. 남의 나라를 정복한 다음, 강제로 입을 벌려 혀를 뽑는다든가, 산 채로 사지를 토막내어 장대에 꽂아 높이 매달게 하여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한다든가, 성의 높은 곳에서 산 사람을 내던져 처참하게 죽도록 한다든가, 코나 귀를 잘라내어 천천히 타는 불위에 태우기도 하고, 산채로 껍질을 벗기기도 하며, 머리를 잘라 내어 누가 더 높이 쌓을 수 있는가 피라미드 경기를 시키기도 했었습니다. 요나는 이러한 앗수르의 잔혹한 행위에 대해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의 가슴속에는 앗수르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차서 자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의 생각에 앗수르는 반드시 멸망당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니느웨에 대한 원망과 증오에 불타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너는 저 큰 니느웨성으로 가서 그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쳐라. 그 곳 주민들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사무쳤느니라.”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탄 배를 삼킬만한 큰 폭풍을 불게 하여 배 밑창에 숨어있던 요나를 바다에 던져지게 하시고, 미리 준비하신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삼켰다가 삼일 만에 니느웨 해변에 토해 내게 하셨습니다.(욘2:10) 그리고 다시 요나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저 큰 니느웨 성으로 가서 내가 전에 너에게 말한 대로 니느웨 성의 멸망을 선포하라.” 결국 요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니느웨 성으로 들어가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40일 후에는 그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욘3:1-3)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이 그 복음을 듣고 모두 회개하여 구원받았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전, 밤낮 사흘을 물고기 배속에 있다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니느웨에 복음을 선포하자, 니느웨 백성들이 모두 회개하고 구원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요나의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요나의 표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통해 온 인류가 구원받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를 더욱 간단히 표현하면, “요나의 표적”은 ‘십자가의 표적’입니다. 표적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나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표적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을 구하나니 내가 곧 하나님의 표적이니라.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였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를 보고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알았고, 시바 여왕은 솔로몬을 보고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느니라. 너희들에게는 나를 통하여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가 나타났고, 요나가 전파했던 소식보다 더 큰 소식이 나타났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눈이 가리워서 진리를 보지 못하였고, 귀가 먹어서 그 경고하심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고서 그것을 하나님으로 알아 본 옛 사람들이, 이보다 더 큰 기회를 가지고도 그를 영접하기를 거절할 너희들을 정죄하는 증인으로 설날이 오리라.”(마12:39-45) 여기에 바로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가 곧 하나님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듯이, 그리고 솔로문의 지혜를 보고 시바 여왕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듯이,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 예수를 보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여 영접하지 아니하며, 다른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심판 때에 정죄를 선언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표적’은 가시면류관에 찔려 피흘린 자국, 못박혀 찢겨진 손과 발, 창에 찔려 터진 옆구리, 후려진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등허리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고난의 흔적, 고난받으신 사랑의 흔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으니.....그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4-5) 과연 나를 위하여 대신 욕을 받고 대신 아파하고 대신 죽을 사람이 있을까?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작곡가 멘델스존 가문에 전해 내려온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곱사등이었습니다. 한 여자를 짝사랑하였으나 워낙 미녀여서 자기 같은 곱사등의 사랑을 수락할 이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부유한 실업가의 딸이었으므로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이 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 등을 곱사등으로 만든 것은 특별한 것들을 지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허락만 한다면 지금부터 평생동안 당신의 한숨과 눈물과, 당신의 걱정과 고독과, 당신의 아픔과 가시를 다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대신 짊어지겠다, 책임지겠다는 이 말에 처녀는 몹시 감동되어 몇 달 후에는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흘리신 피야말로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표적입니다. 이 하나님의 표적인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표적이 있다면 십자가의 표적밖에는 없습니다. 이를 구하는 생활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고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로 부요케 하시는 은혜를 감사드리나이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 되게 하시기 위해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셨고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와 슬픔을 당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리나이다.
가시에 찔리시고 채찍과 매를 맞아 상하며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고,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하시며,
나음을 입게 하시는 은혜를 감사드리나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신 주님의 삶을 배우게 하옵소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던 예수님처럼
주님을 닮은 <사람의 모양>으로 살게 도와주옵소서. 아멘
여러분의 손과 발에 사랑과 섬김, 그리고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 흔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십자가 표적이 묻어나고 있습니까? 톨스토이 동화에 <황제와 청소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은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냈습니다. 이 날 참석자들 중 한 명을 뽑아 왕과 왕후 사이에 앉게 하고 푸짐한 상품을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손님들이 궁전에 도착하자 왕의 신하들이 손님들의 손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 왕의 옆자리에 앉도록 당선된 사람은 궁전의 청소부 할머니였습니다. 평생 힘든 노동에 종사한 청소부 노파의 손은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도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 손과 발을 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을 알아보게 하려면 ‘내 얼굴을 보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표적, 손과 발을 보이시며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체험하고 예수를 증거하며 살았던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부적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야 할 삶의 시작이요, 삶의 내용이며, 삶의 목표입니다.
(고전1:22-25)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십자가에 나타난 표적의 흔적은 사랑과 섬김, 고난과 희생의 흔적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러한 십자가의 표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표적을 구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이러한 말씀을 더하셨습니다.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앞서 표적을 구하기 전, 앞서 예수께서는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된 사람을 고쳐주신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그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그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된 사람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여기 그 사람에게서 쫓겨나간 귀신이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서 쫓겨난 더럽고 악한 귀신은 광야를 이리저리 떠돌며 자기가 들어갈 만한 영혼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찾지 못하면, ‘내가 전에 있던 그 소굴로 돌아가자’ 하고 돌아가 보니 그 집이 텅 비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악한 귀신은 냉큼 달려가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이나 데리고 들어와 그 사람에게 들어가 난장판을 벌입니다. 결국 그 사람의 상태는 처음 귀신들렸을 때보다, 예수님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지 않았던 처음보다 훨씬 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 귀신이 추방되어 사람이 치유되었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그래서 변화된 모습으로 살지 아니하면 나갔던 귀신들이 다시 찾아와 이전보다 더 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호시탐탐 삼킬 자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니고 있습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시 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엡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B.C. 1040년경, 사울이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왕으로 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그의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삼상10:1) (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이렇게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 성령이 크게 임하여 예언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삼상10:6) (6)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때, 어느 정도 권력의 맛을 경험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당장 가서 아말렉을 공격하여 젖 먹는 아이까지, 그리고 모든 가축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진멸해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삼상15: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아말렉을 철저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오랜 노예 생활로 전투 능력이 전무하고 광야 행군으로 피곤하고 지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약점을 이용하여 공격했던 족속이 바로 아말렉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행군 대열 중 뒤에 쳐진 어린아이와 노약자들을 공격했던 아말렉의 교활함과 비겁함에 대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응징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신25:17-19)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뿐만 아니라 모세로 하여금 이를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는 그 기록한 사실을 귀가 닳도록 암송시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사무엘 상 15:2의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라는 말씀에서 “추억하노니” 란 말씀은 하나님께서 420년 전의 아말렉의 교활하고 비겁한 공경행위를 다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반드시 그 행위에 대해 응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신25:19), 사울을 왕으로 세워 사면의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사방에 안식을 주신 때, 바로 지금 당장 가서 아말렉을 도말하라, 그래서 아말렉에 대해 일말의 동정도 하지 말고, 조금도 아껴보지 말고 거룩한 하나님의 의롭고 공의로운 심판을 철저히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민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그러므로 아말렉 도말 명령은 철저히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시행하기 위해 사울 왕이 소집한 병사의 수가 21만명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아말렉을 공격하여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 지역에 이르기까지”(삼상15:7) 다시 말해 아말렉 족속이 흩어져 살고 있는 전 지역에 걸쳐 칼로 도륙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고,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만을 진멸했습니다.”(삼상15:8,9)
아말렉의 악행을 “책에 기록하여” 결코 잊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420년 동안 기억하셨다가 때가 되어 “아말렉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말씀에 정면으로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 왕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즉각 말씀하셨습니다. “(삼상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에 사무엘은 밤새도록 근심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사울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은 사울 왕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하고자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삼상15:12) 길갈으로 내려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것은 420년 전 그들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응징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다만 그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권력 10년 만에 교만해진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갔을 때 사울은 뻔뻔하게도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고 거짓말합니다.(삼상15:13) 모든 사실을 다 알고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무엘이 이러한 사울에게 묻습니다.
(삼상15:14)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이에 사울이 구차하게도 백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이렇게 변명합니다.
(삼상15:15)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사무엘은 비겁하게 변명을 늘어놓는 사울에게 “왕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삼상15:17-19)고 되묻습니다. 이쯤 되면 그만하고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계속해서 말도 안되는 핑계를 늘어놓습니다.
(삼상15:20-21)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사울은 변명 중에 자신의 불순종을 드러냈고 좋은 가축을 취한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라며 예배를 구실 삼아 자신의 불순종의 죄악을 피해가려고 애쓰는 측은하기까지 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사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에 결정적인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거만하며 신성 모독하는 죄악이며 우상숭배와 같은 죄악이라며 사울 왕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 명암이 엇갈리는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 후 사울이 하나님 말씀에 거듭 불순종하자 그에게 성령이 떠나고 악신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삼상16: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이러한 가운데 블레셋의 공격이 임박하자 사울이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전혀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울 왕은 “신접한 여인”, 무당을 찾아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귀신에 홀려 블레셋 전쟁에 나가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삼상28:6-7)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7)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의 히브리어 ‘마아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행위는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악입니다. 사람이 때로 믿음이 약해서,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받거나 깨닫게 되면 바로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아무리 큰 죄악을 범했을지라도 회개하는 사람을 결코 멸시하시지 않으십니다. 사울 왕에 이어 다윗이 왕에 올랐습니다. 왕에 오른 다윗 역시 사울 왕 못지않게 많은 죄악을 범했습니다. 한번은 다윗이 왕궁 옥상에서, 건너편 밧세바의 아름다움에 그만 유혹되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여인만을 범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고자 그의 남편인 충신 우리아를 전쟁 최일선에 보내 함정에 빠뜨려 죽였습니다. 왕권을 남용하여 강간죄에 살인 교사죄를 범한 것입니다.(삼하11:6-17) 이를 하나님께서 방관하실 수 없었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보내 호되게 다윗 왕을 책망합니다.(삼하12:1-6) 자신의 죄악을 여지없이 지적하자 다윗 왕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회개합니다. 나라의 충신을 죽인 죄, 권력을 남용한 강간죄 등 사람과 하나님 앞에 지은 죄악들을 철저히 회개하며 참회했습니다. 자신이 비록 왕일지라도 여전히 죄의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고백하며 자신의 이러한 심령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하나님께 밤새도록 눈물로 침상을 적셔가며 참회한 것입니다. 그 참회의 시가 바로 시편 51편입니다. 그 다윗의 간절한 참회의 고백가운데 눈 여겨 볼 내용은 시편 51:11-12입니다.
(시51:10-12)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이러한 간구는 일찍이 다윗이 사울 왕을 통해 뼈저리게 경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의 버림받은 사울 왕에게서 성령이 떠나고 악신이 들어가자 그가 몹시도 괴로워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그를 위해 다윗이 불려와 수금을 타자 악신이 떠나고 상쾌하게 나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치 아니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히 참회했던 것입니다.(시51:17)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으로 통회하는 다윗의 죄를 도말하시고 1)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2)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3)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7:9-13)고 약속하신대로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할 때 다윗과 같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항상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생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 때로 세상 유혹에 빠져 죄를 범했을지라도 곧 바로 회개하는 생활,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생활로 구하는 대로 다 성취되는 하나님의 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적의 시작 ‘틀을 깨라’
마 12:38-45
거절된 요구
오늘 말씀은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거절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거절 정도가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기적 구함을 들으시고 질책하십니다. 본문 38~39절을 보세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기적’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몇 년 전 미국에서 있었던 어떤 교회와 목회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교회는 집회 때마다 뱀을 가지고 와서 만집니다. 믿음으로 뱀을 만지고, 믿음으로 독사의 독에도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러다가 그 목사가 뱀에 물려 죽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또 어떤 목사님은 기도원에서 내려오며 확신에 차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하죠.
“하나님 믿음으로 기도하면 이 산을 들어 저리로 옮기라 하면 옮기어지리라 말씀하셨사오니, 저 삼각산을 한강으로 옮겨 주시옵소서.”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산이 옮겨지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답니다.
“하나님! 왜 산이 안 움직이는 겁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물으셨답니다.
“그 산을 옮겨서 뭐하려고?”
이들에게 있어서 ‘기적’은 믿음이 아니라, 단순히 ‘표적’일 뿐입니다.
차이가 무엇인지 아나요?
사실 성경에서 쓰인 단어와 번역으로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힘이 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 단어들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느냐는 것이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요구하는 기적과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내용이 다른 것입니다.
기적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이지 그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겠다는 ‘시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기적과 잘못된 기적, 참된 표적과 잘못된 표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적이 목적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과 대비해서 나타나는 ‘표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죠.
그래서 표적을 구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표적을 구합니다. 다른 표적을 구하고, 더 기묘한 표적을 구합니다. 표적을 구하는 자들은 표적이 일어날 때마다 따라다닙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표적’이 자의적이라는 말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표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수용할 수 없는 것은 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메시지 성경에서 39절을 이렇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증거를 찾고 있으나 엉뚱한 증거를 찾고 있다. 너희는 너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고, 기적에 대한 너희의 욕망을 채워줄 무언가를 바란다. 그러나 너희가 얻게 될 유일한 증거는, 증거처럼 여겨지지 않는 요나의 증거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구분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적’과 ‘표적’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오늘부터 말씀을 나누는 기적의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기적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단지 7개의 기적만을 기록하는데, 이것을 단순히 기적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표적’이라고 합니다.
‘기적, 아니 이적, 혹은 하나님의 크신 일’이라고 표현하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의 7개 표적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기적’은 영어로 ‘miracle’이라 하고 ‘표적’은 ‘sign’이라고 합니다. 기적이 단순히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의 이성과 경험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일이라면, ‘표적’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에 대한 ‘의미’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기적 이후에 아주 중요한 설교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다시 반복해 말한다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의미와 목적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기적을 바라고, 무슨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는 기적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 38절에서도 유대인들이 구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라고 말하지요?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조금 번역상의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요구하는 ‘표적’이란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의미가 아니라, ‘기적’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NIV 성경에서는 ‘miraculous sign’이라고 말하고,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해서 풀이하고 있습니다.
“Teacher, we want to see your credentials, Give us some hard evidence that God is in this. How about a miracle?”
다시 말하면, 놀라운 일을 행하므로 당신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께 이런 표적을 구하는 의도입니다.
우리가 읽는 본문 말씀이 마태복음 12장의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수 있는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hard evidence’입니다. 더 강한 것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만족시켜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는 ‘표적’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난 후에 꼭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무엇보다 기적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게 될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는 ‘생명의 떡’을 말씀하시고,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통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복음서의 기적들 역시 꼭 요한복음처럼 의미를 설명하지 않지만, 그 기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적을 구하였을 때, 예수님의 반응에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39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만난 많은 군중을 불쌍히 여기셔서 기적을 베푸셨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독설을 퍼부으실 수 있을까? 의문이 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에서 ‘온유한’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기억하지만,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들에 대하여는 무섭게 질책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게 채찍을 휘두르시던 예수님의 모습,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질책하셨던 것처럼 무섭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바로 그들이 악하고 음란하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구하는 것이 ‘표적’ 즉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적에 대한 거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거절하셨다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려는 사람들의 불신앙에 대한 거부입니다. 예수님의 질책이 나오는 39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증거를 찾고 있으나 엉뚱한 증거를 찾고 있다. 너희는 너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고, 기적에 대한 너희의 욕망을 채워줄 무언가를 바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기적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채워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적’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면서 가장 본질에서 보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한 기적인지, 아니면 우리의 욕심을 구하고 있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를 다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나요?”
‘표적’만을 구하는 세대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패역한 것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죠. 우리의 욕심과 자아가 살아서 기도하면,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이 부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죠. 야고보서 4장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내가 왕바리새인입니다]라는 책에 나오는 글을 소개합니다.
자아가 펄펄 살아서 기도하면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듣지 않으십니다. 은혜의 시간에는 응석을 받아 주시지만,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면 절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면, 우리가 얼마나 교만해지겠습니까? 응답해 주신 열매를 다 먹고 나면 곧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세상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청구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주님이 주시는 사은품에 불과합니다. 한낱 부스러기 같은 사은품을 탐낼 게 아니라 주님이 내게 오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을 완벽하게 만나는 자리가 바로 기도의 자리인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기적의 ‘한계성’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가는 것은 분명 기적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나간 그 귀신이 잠시 나가 헤매다 다시 찾아옵니다.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죠. 본문 43~45절의 말씀을 보세요.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제 자신만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옵니다. 상황이 더 악화된 것입니다. 기적이 놀라운 일이기는 한데, 그 기적으로 끝나면 더 상황이 악화됩니다. 귀신이 나간 심령 가운데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다시 귀신이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세대에 대하여 주님이 탄식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표적을 구한 사람은 결국 다른 표적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표적은 더욱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인 것은 분명하지만, ‘진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하는 BTD 영성훈련을 통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일이 있습니다.
수년 동안 하나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의 정체를 드러나게 하셨고, 또 기도하며 믿음으로 귀신들이 나가는 것을 목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하고 나간 귀신이 다시 그 사람을 사로잡는 것을 보게 된 것이죠.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기적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나간 귀신이 다시 들어와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영성훈련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바꾸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적인 자아가 변화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에 악한 영이 물러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통해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한계’입니다.
오늘 주님은 요나의 기적과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왔던 남방의 여왕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본문 41절과 42절의 말씀입니다.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우리 주님은 요나보다 더 큰 이, 그리고 솔로몬보다 더 큰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가 구해야 할 것은 ‘표적’ 아니라, 그 표적을 행하시는 분을 보아야 합니다.
표적보다 큰 이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표적‘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적을 구할 때 일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대개 우리가 표적을 구하는 것은 우리 삶의 ‘가시’로 여기는 것을 제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 가시가 너무 아프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가시가 우리의 삶에 은혜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그 가시로 인해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 가시로 인해 ‘겸손’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가시가 제하여졌다면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을 내 교만이 숙여집니다. 오히려 그 가시로 인해 주님을 내 삶에서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이 참다운 ‘기적’이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우리가 지금부터 배우게 되는 12개의 기적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그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 기적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 기적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보여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서 ‘진리’로 다가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참 놀라운 고백이 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를 지냈던 사도 요한이 보았던 주님의 모습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 주님의 속성이 무엇인가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은혜만 있으면 결국 진리를 벗어나 잘못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진리만을 구한다면, 은혜를 입지 못한 구제 불능의 인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진리’로 이끌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이단’이라는 곳에서 행해지는 기적을 보세요. 얼마나 비인격적인 일이 많이 있습니까? 기적이 일어나는데 하나님이 나타나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돈’이 오가곤 합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체에 돈을 가져오라고 요구합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행한 사람과의 비인격적인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진정한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속에 족함을 인정하는 순간 진리가 찾아옵니다. 또 다른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임재가 나를 붙들어주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를 구하는 마음이 나의 ‘약함’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그 약함이 자랑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그 약함을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또 쓰러질 연약한 육체가 아니라, 또 없어질 세상의 부귀와 영화가 아니라, 생명 되시는 주님을 붙잡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가장 큰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2장 9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인간의 본성을 깨닫게 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죄’는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퍅한 인간의 본성은 날마다 살아납니다. 매일매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데, 내 속의 약함을 자랑하지 않으면 십자가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적은 바로 그런 내가 되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을 보여주시는 주님의 목적이고 사인입니다.
이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우리의 욕심의 틀을 깨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원리를 깨닫지 못하는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적으로 인간의 욕망은 충족되지 않습니다. 단지 또 다른 기적에 목마르게 될 것입니다. 아니, 더 자극적인 기적만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난 자리에 더 큰 문제가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43~45절을 보세요.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기적은 우리의 틀 속에서 나와 하나님의 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2014년 weekly biz(2014년 7월 26일자)에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아홉 개의 점을 연필을 떼지 않고 네 개의 선을 그어 모두 연결하기 위해선 하나 이상이 선이 격자무늬 밖으로 나가야 한다. ‘파격’이란 이렇듯 정해진 틀(상자)을 벗어나는 것이다.
‘상자 밖에서 생각하라’는 말은 아홉 개의 점 퍼즐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격자 모양으로 배열된 아홉 개의 점을 연필을 떼지 않고 네 개의 선을 그어 모두 연결해야 하는 퍼즐이다. 유일한 해법은 네 개의 선 중 적어도 하나를 격자 모양 밖으로 나가게 해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여기서 ‘선이 네모난 격자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의미로 ‘상자 밖으로 나가야 한다(outside the box)’는 말이 나왔다.
상자 밖으로 나가기 힘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두려움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는 지옥에서 같은 방을 쓰는 세 남녀가 등장한다. 이들은 창문도, 탈출구도 없는 비좁은 방 안에 갇혀 탈출하기만 바란다. 막상 연극이 끝날 무렵, 세 사람은 탈출할 기회를 얻지만, 그토록 벗어나길 바랐던 방 안에 그대로 남기로 결정한다. 미지(未知)의 세계로 향하는 두려움 대신 고통스러운 익숙함을 택한 것이다.
상자 밖으로 나가는 첫 번째 단계는 따라서 자신이 상자에 갇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감옥에 갇혀 있다고 느끼고, 감옥의 구체적인 형태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인지의 오류들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 된다.
예) 사람들에게 거꾸로 찍힌 남자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누굴까’ 질문할 경우, 많은 이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진을 뒤집어봐야 비로소 부시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사진에 대한 첫인상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미소를 짓는 부시 대통령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는 14세기 영국 논리학자 오컴의 이름을 딴 ‘오컴의 면도날 법칙’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원칙에 따르면,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 보통 가장 타당한 해결책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1950년대에 세계 최초로 일회용 볼펜을 개발한 빅(BIC)의 경영진은 1970년대 초까지 ‘저가의 일회용 플라스틱 필기도구’라는 틀 속에서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볼펜별로 색깔을 다양하게 하고, 볼펜에 금속 장식을 넣는가 하면, 갖가지 로고를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성장의 한계에 부딪혔다.
회사에선 브레인스토밍이 벌어졌다. 그때 빅의 한 임원이 '만약 우리가 일회용 볼펜 대신 일회용 라이터를 만들어 본다면?'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 결과, 빅은 1973년 세계 최초로 일회용 라이터를 선보였고, 1975년엔 일회용 면도기를 출시해 일회용 면도기 시장에서 세계 2위 업체로 도약했다. 이 회사는 2008년엔 저렴한 선(先) 충전 휴대전화를 내놓는 등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회사의 핵심어를 ‘필기’에서 ‘일회용’으로 바꾸는 관점의 전환이 가져온 큰 변화였다.
아주 재미있는 실험이죠?
우리의 틀을 깨지 못하면 문제의 해결이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가운데 늘 상 기적을 구하면 결국은 탈진하게 될 것입니다. 기적을 보았으면 이제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적’을 행하면 상황이 더 나빠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과 진실한 고백,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는 기적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기적으로 귀신을 내쫓아도 귀신은 언제든지 다시 들어올 수 있고, 기적으로 병을 낫게 해도 더 큰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기적으로 경제적인 이득을 봐도, 또 다른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적을 통해 ‘존재’가 바뀌지 않고, 삶의 중심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또 다른 유혹과 상황이 우리를 덮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자기만족과 이기적인 표적을 위해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들에게 그 어떤 기적도 ‘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단지 또 하나의 기적을 갈구하는 요구로 이어질 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은혜 중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 체험하는 것이 참 좋은 일이기는 한데, 그 은혜만을 구하며 살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단지 또 다른 은혜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받은 자로, 기적을 체험한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기적을 ‘표적’으로 행하는 세대들에게는 ‘기적’이 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양이 있습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진정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 기적을 행하신 주님으로 인해 감격한 마음, 그래서 그 주님과 그 어떤 것도 바꾸지 않겠다는 믿음의 고백.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바뀐 기도의 제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의 기도는 마음의 욕망을 버리고 순종하겠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참 많이 듣는 기도의 요청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참 귀한 일이지요. 하지만 다른 이 땅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기도가 아름답지 않을까요?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며 뜨겁게 통성으로 기도할 때, 이 땅 위에 필요를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먼저 생각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문제들을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욕망의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더 큰 욕망의 문제가 우리를 찾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의 ‘욕망’은 더러운 귀신처럼 끈질기게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표적들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타락하게 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기적을 구하는 ‘틀’을 완전히 바꾸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한 기도로 나아가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기적을 구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런 물음을 물어야 할 때입니다.
“주님 제가 이것을 구하는 것이 맞나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진리 가운데 들어가면, 기도를 내 마음대로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탄식하시는 성령님의 마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 그분이 보일 수 있도록, 무엇보다 우리 삶에 주님이 보이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보여주실 표적
마 12:38-42 / 안효관 목사
사람 치고 호기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름대로의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 관심 갖는 분야는 다르다 할지라도 호기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과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많기도 합니다. 학생들 중에도 어떤 학생은 공부하는 데에 관심이 많고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배우고 싶어서 호기심을 갖기도 합니다.
신앙생활하는 분들은 신앙의 신비를 경험해보고 싶은 욕구가 다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분들은 그런 욕구가 굉장히 강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 병고침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면 그 교회로 교회를 옮기기도 하고, '어떤 기도원에 능력이 있다더라' 그러면 그 기도원을 줄기차게 쫓아다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신유 은사가 있다' 그러면 그분에게 안수기도라도 받고 싶어서 물어 물어 찾아가기도 합니다.
물론 목회자들이나 어떤 신앙인들 가운데서는 그런 기적들을 별로 좋지 않게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에도 기적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 변함 없이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방언이나 병고침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가 성경 속에만 기록된 과거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고 뭔가 표적이 보여야만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인가?.
▷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하는 목사만이 참 목사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 목사요 삯군 목사인가?
▷ 병고침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요,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교회인가?
왜 안 목사라고 해서 그런 욕심이 없겠습니까? 요즘 같이 환자들이 많은 때에는 정말 저에게도 신유의 은사가 있어서, 감기 환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감기가 뚝- 떨어지고, 오랜 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분들에게 안수하면 그들의 병이 떠나가고 금새 다리에 힘을 얻어서 예배당에 나올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업이 잘 안되는 가정에 가서 사업이 잘 되라고 기도를 해주면 금새 사업이 번창해서 십일조를 수 백만 원씩 내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고, 오랫 동안 교회 나오지 않는 낙심자를 심방해서 기도 한번 해주면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녹아져서 교회당에 나올 뿐만 아니라, 일평생 죽도록 충성하는 그런 일꾼이 되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런 은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신유의 은사도 없고 방언도 하지 못하는 안 목사는 가짜 목사입니까? 목사가 와서 기도를 해 주었는데도 병이 낫지도 않을 뿐 아니라, 호전되지도 않는다고 해서 안 목사는 가짜 목사입니까?
오늘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많이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쩌면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적을 보고 싶어하고,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는 신앙인들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요구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표적을 보여 달라"는 말은 '당신이 메시야라는 증거를 보여 주시오'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 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까? 이미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이적을 행하셨고, 천국 복음을 증거하시면서 당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22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기적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이미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친 사건을 보면서 백성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메시야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이미 그 사건을 통해서 메시야의 표적을 본 것입니다.
그 때 거기에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그렇게 놀라고 있는데, 거기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 귀신의 졸개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던 바리새인들이 이제 와서 또 다시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분히 악의적인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태도를 아시고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음란하고 악한 세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표적을 보여 달라는 그들의 요구가 불손하기 때문에 보여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그들을 향하여 "음란하고 악한 세대"라고 꾸짖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적은 결코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적은 단지 신앙에로 인도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기적은 '유치원 학생들의 그림 교재와 같은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유치원 학생들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 교재는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한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교재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자라가면서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대학생이 유치원생이나 보는 그림책을 본다면 그건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바르게 신앙생활을 힘쓰는 사람에게는 기적이나 표적과 같은 눈에 보이는 어떤 징표가 결코 중요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앙인들이 유치원 수준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기적이 보여지면 거기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기적이 없는 곳에서 오히려 더 큰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잊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이 목사님께서 하신 설교가 제 마음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 설교의 제목은 "기적이 필요하지 않는 신앙"이었습니다. 기적은 불신앙이 있는 곳이나 믿음이 약한 곳에서 나타났지, 성숙한 신앙에는 기적이 필요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이 나타나지 않아도 굳건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적을 필요로 하거나 기적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고, 그런 기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소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표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하신 일을 통해서 표적을 보지 못했다면 다른 어떤 표적을 주신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한 근본 의도는 다른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표적을 보여주면 당신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당신을 믿겠습니다" 그런 의도로 표적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늘 '어떻게 하면 예수를 책잡을까, 고소할 거리가 없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표적을 보여달라"는 그들의 요구 역시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의도를 아셨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거짓되거나 잘못된 요구는 거절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한 것은 다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는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기도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응답 받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앞에 붙여진 조건절입니다. 요한복음 15: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기에 분명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 때 기도하는 것은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거짓되거나 잘못된 내용으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내 욕심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에 기도한 것은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여러분, '기도한 것은 무조건 다 응답 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올바른 기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눈에 보이는 표적 대신에 전혀 다른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다가 3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나와 같이 밤낮 사흘을 땅 속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와 예수님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거역한 자신의 죄 때문에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 동안 무덤에 묻혀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너희들처럼 악하고 음란한 세대, 강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내가 죽은 길밖에 없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3일 후에는 다시 살아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표적을 요구합니다. 지식을 자랑하는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자랑거리요, 그분만을 전할 뿐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지혜로 보면 어리석음과 나약함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십자가는 더 이상 죽음이나 패배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능력이요 구원이요 승리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큰 하늘의 권능을 보여주기를 고대했던 유대인들에게 권능의 표적이 아니라 죽음의 표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시 어느 누구도 죽음과 십자가가 하나님의 표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미련한 방법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셨고,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와 신앙인을 향하여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에, 그리고 신앙인들에게 하늘의 표적 -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는 놀라운 권능의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만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만 구원의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기적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통해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이 더 큰 능력입니까?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은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죽어야 할 생명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 이것 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41-42절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받은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지막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정죄할 것이고, 남방의 시바 여왕이 그들을 정죄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외친 말씀을 듣고 자기들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요나는 기쁨으로 말씀을 외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매를 맞고 어쩔 수없어 건성으로 외쳤습니다. '차라리 니느웨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나의 외침을 듣고 니느웨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백성이 회개하고,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가축들까지도 금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보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데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선택받은 백성들이라고 어깨를 우쭐거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억지로 외친 선지자의 말씀에도 회개했는데,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오셔서 말씀을 외쳐도 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싶어서 직접 솔로몬을 찾아와서 그에게 지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솔로몬보다 지혜로우신 분이요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말씀을 전하는 데에도 그들은 그 말씀 듣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한 여왕은 지혜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바쁜 국정의 일을 뒤로 하고 솔로몬을 찾아와 지혜를 들었는데, 솔로몬보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지혜와 천국 비밀을 선포하는 데도 그들은 그 말씀에 귀를 닫아버렸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주어질 심판은 아주 엄중합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이방인들이 오히려 유대인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오늘날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불려지지 않겠습니까? 아니 오늘날의 세대를 통틀어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만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들의 모습도 혹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귀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설교 테이프, 간증 테이프를 비롯해서, 요즘은 텔레비전을 틀기만 하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가 매시간 들려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기만 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를 내 마음대로 골라서 들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예전에 목사님이 없어서 설교 말씀을 듣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 눈을 돌리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말씀들이 쏟아지고 있는 지 모릅니다. 말씀을 듣지 못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은 이제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말씀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설교를 듣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던 그 시대의 순수한 신앙과 열정을 우리 시대는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예전에는 부흥회를 한다고 하면 말씀을 듣기 위해서 수 십리 산길을 넘어 왔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새벽이고 가리지 않고 말씀이 있는 곳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그 때 우리 선배들의 신앙은 참으로 뜨거웠고 순수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뜨겁습니까? 얼마나 순수합니까? 얼마나 성숙해져 있습니까?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 선배들의 신앙은 생명을 건 신앙이었습니다. 목숨을 내 놓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안이하게, 너무나도 나태하게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영적 수준이 예전만도 못하여 자꾸만 뒷걸음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예전만 못한 것이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 시대에 기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들만 묵상해도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기적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의 삶 자체가 기적이요 하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린아이의 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좀 성숙해 집시다. 영적으로 좀 깊어진 신앙을 갖도록 노력합시다. 대학생이 되었으면서도 유치원생들이나 보는 그림책을 보고 싶어하는, 그런 유치한 신앙에서 벗어납시다.
여러분, 십자가만 생각해도 뜨거움이 솟아나고,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구원의 감격이 복받쳐 오르는 깊은 영적인 삶을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것보다 더 큰 다른 기적을 요구하지 말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 속에서 모든 하늘의 축복과 권능을 보며,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든 교우님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실 표적
마 12:38-42 / 안효관 목사
사람 치고 호기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름대로의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 관심 갖는 분야는 다르다 할지라도 호기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과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많기도 합니다. 학생들 중에도 어떤 학생은 공부하는 데에 관심이 많고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배우고 싶어서 호기심을 갖기도 합니다.
신앙생활하는 분들은 신앙의 신비를 경험해보고 싶은 욕구가 다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분들은 그런 욕구가 굉장히 강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 병고침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면 그 교회로 교회를 옮기기도 하고, '어떤 기도원에 능력이 있다더라' 그러면 그 기도원을 줄기차게 쫓아다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신유 은사가 있다' 그러면 그분에게 안수기도라도 받고 싶어서 물어 물어 찾아가기도 합니다.
물론 목회자들이나 어떤 신앙인들 가운데서는 그런 기적들을 별로 좋지 않게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에도 기적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 변함 없이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방언이나 병고침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가 성경 속에만 기록된 과거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고 뭔가 표적이 보여야만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인가?.
▷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하는 목사만이 참 목사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 목사요 삯군 목사인가?
▷ 병고침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요,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교회인가?
왜 안 목사라고 해서 그런 욕심이 없겠습니까? 요즘 같이 환자들이 많은 때에는 정말 저에게도 신유의 은사가 있어서, 감기 환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감기가 뚝- 떨어지고, 오랜 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분들에게 안수하면 그들의 병이 떠나가고 금새 다리에 힘을 얻어서 예배당에 나올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업이 잘 안되는 가정에 가서 사업이 잘 되라고 기도를 해주면 금새 사업이 번창해서 십일조를 수 백만 원씩 내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고, 오랫 동안 교회 나오지 않는 낙심자를 심방해서 기도 한번 해주면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녹아져서 교회당에 나올 뿐만 아니라, 일평생 죽도록 충성하는 그런 일꾼이 되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런 은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럼, 신유의 은사도 없고 방언도 하지 못하는 안 목사는 가짜 목사입니까? 목사가 와서 기도를 해 주었는데도 병이 낫지도 않을 뿐 아니라, 호전되지도 않는다고 해서 안 목사는 가짜 목사입니까?
오늘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많이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어쩌면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적을 보고 싶어하고,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는 신앙인들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요구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표적을 보여 달라"는 말은 '당신이 메시야라는 증거를 보여 주시오'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 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까? 이미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이적을 행하셨고, 천국 복음을 증거하시면서 당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22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기적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이미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친 사건을 보면서 백성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메시야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이미 그 사건을 통해서 메시야의 표적을 본 것입니다.
그 때 거기에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그렇게 놀라고 있는데, 거기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 귀신의 졸개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던 바리새인들이 이제 와서 또 다시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거기에는 다분히 악의적인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태도를 아시고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음란하고 악한 세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표적을 보여 달라는 그들의 요구가 불손하기 때문에 보여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그들을 향하여 "음란하고 악한 세대"라고 꾸짖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적은 결코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적은 단지 신앙에로 인도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기적은 '유치원 학생들의 그림 교재와 같은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유치원 학생들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 교재는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한 방법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교재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자라가면서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대학생이 유치원생이나 보는 그림책을 본다면 그건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바르게 신앙생활을 힘쓰는 사람에게는 기적이나 표적과 같은 눈에 보이는 어떤 징표가 결코 중요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앙인들이 유치원 수준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기적이 보여지면 거기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기적이 없는 곳에서 오히려 더 큰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잊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이 목사님께서 하신 설교가 제 마음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 설교의 제목은 "기적이 필요하지 않는 신앙"이었습니다. 기적은 불신앙이 있는 곳이나 믿음이 약한 곳에서 나타났지, 성숙한 신앙에는 기적이 필요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이 나타나지 않아도 굳건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적을 필요로 하거나 기적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고, 그런 기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소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표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하신 일을 통해서 표적을 보지 못했다면 다른 어떤 표적을 주신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한 근본 의도는 다른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표적을 보여주면 당신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당신을 믿겠습니다" 그런 의도로 표적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늘 '어떻게 하면 예수를 책잡을까, 고소할 거리가 없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표적을 보여달라"는 그들의 요구 역시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의도를 아셨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거짓되거나 잘못된 요구는 거절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한 것은 다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는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기도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응답 받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앞에 붙여진 조건절입니다. 요한복음 15: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기에 분명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 때 기도하는 것은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거짓되거나 잘못된 내용으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내 욕심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에 기도한 것은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여러분, '기도한 것은 무조건 다 응답 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올바른 기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눈에 보이는 표적 대신에 전혀 다른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다가 3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나와 같이 밤낮 사흘을 땅 속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와 예수님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거역한 자신의 죄 때문에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 동안 무덤에 묻혀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너희들처럼 악하고 음란한 세대, 강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내가 죽은 길밖에 없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3일 후에는 다시 살아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표적을 요구합니다. 지식을 자랑하는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자랑거리요, 그분만을 전할 뿐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지혜로 보면 어리석음과 나약함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십자가는 더 이상 죽음이나 패배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능력이요 구원이요 승리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큰 하늘의 권능을 보여주기를 고대했던 유대인들에게 권능의 표적이 아니라 죽음의 표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시 어느 누구도 죽음과 십자가가 하나님의 표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나약한 모습으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미련한 방법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셨고,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와 신앙인을 향하여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에, 그리고 신앙인들에게 하늘의 표적 - 병을 고치고 능력을 행하는 놀라운 권능의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만이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만 구원의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기적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통해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이 더 큰 능력입니까?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은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죽어야 할 생명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 이것 보다 더 큰 기적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41-42절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받은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지막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정죄할 것이고, 남방의 시바 여왕이 그들을 정죄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외친 말씀을 듣고 자기들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요나는 기쁨으로 말씀을 외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매를 맞고 어쩔 수없어 건성으로 외쳤습니다. '차라리 니느웨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나의 외침을 듣고 니느웨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백성이 회개하고,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가축들까지도 금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보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데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선택받은 백성들이라고 어깨를 우쭐거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은 억지로 외친 선지자의 말씀에도 회개했는데,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오셔서 말씀을 외쳐도 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싶어서 직접 솔로몬을 찾아와서 그에게 지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솔로몬보다 지혜로우신 분이요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말씀을 전하는 데에도 그들은 그 말씀 듣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한 여왕은 지혜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바쁜 국정의 일을 뒤로 하고 솔로몬을 찾아와 지혜를 들었는데, 솔로몬보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지혜와 천국 비밀을 선포하는 데도 그들은 그 말씀에 귀를 닫아버렸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주어질 심판은 아주 엄중합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이방인들이 오히려 유대인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오늘날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불려지지 않겠습니까? 아니 오늘날의 세대를 통틀어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만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들의 모습도 혹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귀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설교 테이프, 간증 테이프를 비롯해서, 요즘은 텔레비전을 틀기만 하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가 매시간 들려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기만 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를 내 마음대로 골라서 들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예전에 목사님이 없어서 설교 말씀을 듣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 눈을 돌리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말씀들이 쏟아지고 있는 지 모릅니다. 말씀을 듣지 못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은 이제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말씀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설교를 듣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던 그 시대의 순수한 신앙과 열정을 우리 시대는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예전에는 부흥회를 한다고 하면 말씀을 듣기 위해서 수 십리 산길을 넘어 왔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새벽이고 가리지 않고 말씀이 있는 곳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그 때 우리 선배들의 신앙은 참으로 뜨거웠고 순수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뜨겁습니까? 얼마나 순수합니까? 얼마나 성숙해져 있습니까?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 선배들의 신앙은 생명을 건 신앙이었습니다. 목숨을 내 놓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안이하게, 너무나도 나태하게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영적 수준이 예전만도 못하여 자꾸만 뒷걸음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예전만 못한 것이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 시대에 기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들만 묵상해도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기적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의 삶 자체가 기적이요 하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린아이의 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좀 성숙해 집시다. 영적으로 좀 깊어진 신앙을 갖도록 노력합시다. 대학생이 되었으면서도 유치원생들이나 보는 그림책을 보고 싶어하는, 그런 유치한 신앙에서 벗어납시다.
여러분, 십자가만 생각해도 뜨거움이 솟아나고,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구원의 감격이 복받쳐 오르는 깊은 영적인 삶을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것보다 더 큰 다른 기적을 요구하지 말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 속에서 모든 하늘의 축복과 권능을 보며,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든 교우님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빈집의 위험
마 12:38-45 / 이필재 목사
마태복음 12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논쟁적 분위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8절까지는 안식일 논쟁이 나타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몇 개 잘라 먹은 것이 발단이 되어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왜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느냐?”라고 따지며 덤벼들어서 예수님이 이에 대한 설명을 하셨습니다. 또 9절에서 21절까지는 안식일에 병 고치는 문제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논쟁이 벌어져서 이에 대해서도 예수님이 자세하게 답변을 하셨습니다. 그 다음 21절에서 37절까지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보고 귀신 왕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저런 일을 한다고 비난하는 것이 논쟁거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말씀 38절에서 45절까지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들의 요청 때문에 예수님이 이에 대한 비유적 설명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트집 잡기 일변도였습니다. 아무리 성자 같은 사람이라도 이렇게 되면 감정이 생깁니다. 바리새인들의 말도 되지 않는 끊임없는 질문 공세 때문에 예수님도 좀 화가 나신 듯 한 분위기가 오늘 말씀 가운데 반영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책망 발언이 계속 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데 “악하고 음락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보여줄 표적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앞으로 심판 때가 되면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라. 이유는 니느웨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던 요나가 가서 설교를 했을 때 그 전도하는 말을 듣고 임금님까지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는데 지금 너희들은 메시야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있다.” 이렇게 책망을 하시고, “앞으로 너희 집에는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전보다 더 형편없는 재앙적 일이 너희들에게 있을 것이다.” 저주 선언을 하시는 것으로 말씀이 끝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뜻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먼저 오늘 말씀 가운데 등장하는 존재가 하나 있습니다. 귀신입니다. 귀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마귀, 사탄, 악령 등을 귀신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하는 일을 생각해 봅시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대로 정의하는 악령의 정체는 더러운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 43절에 “더러운 귀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4절에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귀신 왕 이름이 나타납니다. ‘바알세불’이라고 했습니다. 때로는 ‘바알세북’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경쟁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를 번역하면 ‘우물’, ‘똥 무더기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말로 ‘세불’은 ‘파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합성어로 붙여버리면 ‘똥파리 귀신’이라고 해석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더러운 귀신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귀신이 하는 일은 똥 같은 더러운 일을 하고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장본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도 이 존재는 나왔다 들어왔다 하는 출입의 자유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 “와 보니”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에 가서” 다시 나갑니다. 그 다음에 “무엇을 잔뜩 데리고 들어왔다.” 이런 내용을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귀신 활동 상황을 종합하면 연구할 줄도 알고 생각할 줄 알고 나가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고 힘이 모자랄 때는 동료들을 잔뜩 불러다가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도 하는 매우 능력 있고, 융통성 있는 존재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을 망가뜨리는 재주가 있어서 오늘 말씀 가운데 “그 사람의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됐느니라.”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며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활동을 마음대로 하는 존재가 귀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성경에서 사탄의 내용을 볼 수가 있는데, 욥기 1장에 보면 사탄과 하나님의 대화가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대답합니다. “땅에 두루 다니며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이 악령은 땅에 두루 다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또 물으셨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이 사탄은 욥에 대해서 아주 세밀하게 알고 있음을 하나님께 보고합니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 악령은 우리 개인의 재산 명세까지 상세히 알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에게 이름을 대라고 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귀신이 대답합니다. “군대다.” 집단행동이 가능한 존재로 나타납니다. 또한 마귀는 구체적인 일을 하는 것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사울 왕이 미쳐서 국가를 위기에서 구원한 일등공신 다윗을 3,000명의 정예부대에게 죽이라고 명령하고 자기도 쫓아다닙니다. 다윗을 도와주었다고 제사장 85명을 끌어다가 사형시켜 버리는 일을 합니다. 그가 왜 그렇게 악한 왕이 되었는가? 성경 말씀에 나옵니다. “그에게 악신이 들린지라.” 신약에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돈 받고 인신매매 하는데 내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니, 돈 좀 받고 가룟 유다가 어떻게 선생님을 죽음의 자리로 인도했는가? 그것도 성경에 이유가 나타납니다.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가니” 그때부터 사탄의 말만 들었습니다. 이 존재는 개인을 찾아다니며 구체적인 일을 꾸미고 그럴 수 있을만한 능력과 기술을 소유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책망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러면 우리가 분명히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같은 수제자도 사탄의 노예가 되어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때로 천사는 아니지만 천사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이고, 마귀는 아니지만 마귀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를 찾아가서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일에 사용하려는 것을 볼 수 있고,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귀신은 누구에게, 어디에 들어가기를 좋아하느냐? 오늘 성경말씀에 빈집을 좋아합니다. 44절에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여기서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것은 “사탄이 살기 좋은 터전이 되어 있으므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 세상에서도 사람이 살지 않고 집이 비어있을 때는 도깨비 집 같다고 혹은 흉가라고 말합니다. 집에는 언제나 살림도구가 가득히 제자리에 있어야 되고 항상 사람이 존재할 때 집의 가치와 기쁨이 나타납니다. 어떤 때는 내가 살 던 집도 비워두었다가 들어가라면 왠지 무섭고 서먹서먹하고 느낌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제가 먼저 있던 교회에서 아주 큰 건물을, 우리 갈보리 교회 교육관을 합친 것 만한 좋은 건물이 비어있었습니다. 건축업자가 빌딩으로 잘 건축을 했는데 경기가 나빠지는 바람에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 오랫동안 비어두었습니다. 그 큰 건물을 텅텅 비어두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건물이 어떻게 되었느냐? 마귀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불량배들이 들어가서 자기들의 거처로 만들어서 침대 가져다가 거기서 잠을 자고 거기의 웬만한 시설들은 다 깨부수고 온통 도깨비 집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건물을 교육관으로 사용하려고 샀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 사람과 함께 그곳을 들어가 봤더니 마귀의 집단을 만들어놨단 말입니다.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너희들 누구냐?” “그러는 너희들은 누구냐?” “우리는 여기서 사는 사람들이다.” “잔소리 말아라. 나는 이 옆에 있는 교회 목사다. 이 건물을 우리가 교육관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구입했다. 당장 나가라. 이제 우리 건물이다.” “뭐라고?” “당장 나가란 말이다.” 그랬더니 권총을 들이대면서 “너희들 빨리 나가라. 이곳은 우리 집이다.” “말 안 들으면 지금 당장 경찰 부르면 너희가 권총을 빼들었으니까 오자마자 사살될 수 있어. 빨리 가던가 죽든가 둘 중에 하나다.” 옆에 있는 부목사들에게 “빨리 가서 경찰 부르세요.” 했습니다. 권총을 빼들었을 때 경찰을 부르면 그대로 죽입니다. 자기들도 그걸 모두 압니다. 그러니까 권총을 집어넣고 나가면서 하는 말이 “우리 다시 돌아온다.” “잔소리 마라. 마귀 같은 놈들아!” 그렇게 하는데 상당히 위험스러웠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무모하게 해서는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제가 성령 충만했는지 그렇게 했습니다. 세상집도 빈집은 도깨비 집이 되고 마귀도 빈집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빈집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심령을 말합니다. 우리 심령이 영적으로 비어있을 때 귀신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귀신 장난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 존재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나의 심령이, 그리고 교회라고 하는 장소의 주인이 주님이 되시느냐, 귀신이 되느냐의 문제가 영적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우리 심령을 어떻게 해야 빈집이 안 될 것인가? 우리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영 가운데 성령님의 역사가 있을 때, 즉 성령이 충만하게 있을 때! 이 ‘충만’이라는 말은 가득차서 다른 것이 들어올 틈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 방법은 오늘 말씀이 있어지게 된 동기를 살피면 쉽게 해석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책망조 말씀의 원인은 38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보여 달라는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 표적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인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이 자리에서 크게 기적을 베풀어 우리에게 보여 달라.” 그런 요청을 예수님께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화가 나신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죽어있는 것 같았으나 3일 만에 다시 살아난 것과 똑같이 내가 죽어 땅에 묻혔다가 사흘 만에 요나같이 부활할 것이다. 이것이 메시야적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는 구제불능의 더 악한 세대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가? 오늘 읽은 말씀 바로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든 표적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12장 22절 “그 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의 뜻은 “메시야가 아니냐?” 이런 뜻입니다. 자신들도 놀라서 자기들의 입으로 메시야라고 말을 하면서도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저가 하는 일은 귀신 놀음이야! 이 악한 세대는 니느웨 사람들만도 못하다.” 이렇게 책망하신 겁니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표적이 없을 만큼 보여주고 보여주어도 또 표적을 보이라 하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여! 그 정도의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도움이 되는 일에 참여하면서 살아야지, 그만큼 보았으면 됐지 뭘 또 보여 달라는 말이냐? 너는 말마다 기적 보는 것만 좋아하느냐?” 이런 뜻입니다.
성도의 성령 충만은 언제 옵니까? 무엇인가 주님의 역사에 마음을 쓰고 사역을 할 때 그 역사의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이 은사적으로 내려주시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성령 충만을 요구하는 자에게는 절대 오지 않습니다. 충만 자체를 요구할 때는 충만이 오지 않으나 어떤 선한 역사가 있어서 그것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칠 때 은사적으로 충만이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할 때 항상 그런 믿음의 방향을 가지고 합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수련도 모자라고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설 수 있을만하지 않다.’ 이런 평가를 합니다. 누구도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주어지는 일을 겸손하게 순종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지면 그 수행 과정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역에 대해서 요청을 하면 매우 겸손한 듯 한 말을 합니다. “아!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십시오. 제가 언젠가는 하나님의 큰일을 할 겁니다.” 그런 분은 언제 준비가 완료되느냐? 평생 안 됩니다. 제가 결혼 주례를 하고 나서 신랑, 신부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기 빨리 낳으세요. 많이 낳으세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일부러 안 낳는 부부들이 30~40퍼센트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왜 결혼했는데 아기를 안 낳으세요? 안 생기나요?” 물어보면 “아닙니다. 일부러 안 낳는 겁니다.” “왜 일부러 안 낳으세요?”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무슨 준비가 필요한가요? 재벌이 된 다음에 아기를 낳으려고 하세요? 하나님의 순례적인 역사는 순종하면서 살면 그때그때마다 은혜를 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아기 낳아서 잘 키울 수 있을만한 교육비 이런 것들을 다 준비해 놓고 아기 낳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당신도 세상에 못나왔을 겁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리 잡고 안정된 다음에? 그런 다음은 평생 하나님의 일을 못합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겁니다. 준비 안 되었다고 미루는 사람은 평생 못합니다. 마태복음 10장 19~20절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염려하지 말고 하라! 성령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그래서 이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어떤 과정에서 내게 나타난 은사적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시각장애인이 현장에서 보게 되었고 언어장애인이 현장에서 말하는 표적을 보고 나서 하나님의 아들만이 행할 수 있는 기적이라고 말하면서도 또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깜짝 놀라시는 겁니다. “무엇을 또 보기를 원하느냐? 그 정도 은혜 받고 그 정도 말씀 들었으면 이제는 성숙한 신앙인답게 살아야지 날마다 기적만 요구하느냐? 이 악한 세대여!” 아니, 당신은 모태신앙이라는 사람이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누구보다도 예수 잘 믿는다는 믿음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는 일의 열매는 그것 밖에 못합니까? 성령 충만해야 전도하느냐? 전도하면 충만해 집니다. 성령 충만해야 봉사하느냐? 봉사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충만해 집니다.
귀신이 옛집을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마귀는 과거 종노릇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사람을 또 찾아갑니다. 그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래도 거기가 나았어!”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그 자리에 다시 돌아가서, 옛날 사람에게 다시 돌아가서 “너 나하고 계속 함께 일하자!” 가보니까 과거보다도 더 일하기 좋은 터전을 마련해 놓으니 이번에는 “넌 영원히 나의 노예다.” 친구 일곱 영을 데리고 와서 일곱 영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빈 집이라 마귀들이 살기 대단히 좋아졌다고 그랬습니다. 이 도둑들이 교도소에 가있으면 교도를 받아서 새사람이 되어 나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교도소에 들어가서 더 큰 마귀 역사를 배워가지고 나왔습니다. 자기보다 7배나 능력 있는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수법을 배워서 사회에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경범죄였었는데 나중에는 험악하고 험악해서 전과 9범, 10범 그득합니다. 왜? 우리 교회에서 안양 교도소, 청주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왜 똑같은 일을 점점 더 나쁘게 할까? 마귀의 역사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썼던 사람을 더 나쁘게, 더 나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방해자가 되게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도움이 되는 사람은 평생 어디를 가도 똑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사람은 어쩌면 그토록 변함이 없이 교회 안에서도 거치는 돌의 역할만 하는지 정말 이상합니다. 빈집은 위험합니다. 오늘이 주일날인데 우리 모두가 교회 안 나오고 다른 데 있다고 합시다. 이 빈집에 마귀는 친구 일곱을 데리고 와서 “이야! 이 교회는 예배 안 드린단다. 이 집은 이제 우리 집이다.” 좋아하게 되고 얼마 안가서 교회는 예수님 말씀대로 강도의 굴혈이 됩니다. 저는 설교자입니다. “어휴! 설교하기 귀찮다!” 안 해버리면 마귀는 그때부터 “와! 설교 안한다. 이제부터 내가 설교한다.” 자기가 차지합니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아침 기도 하지 마라!” 법으로 투쟁했습니다. “우리 아이들 예수 안 믿는데 왜 아침에 기도부터 하고 공부를 시작하느냐? 하지 마라!” 이겼습니다. 그래서 못합니다. 그랬더니 마귀가 어떻게 합니까? 자기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야! 아침의 기도 한마디가 두렵고 무서웠었는데 없어졌다.” 학교가 강도의 굴혈이 되어 마귀 세상으로 변해서 웬만한 학교들은 비행기 탈 때 수색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학교에도 못 들어갑니다. 왜? 총들을 가지고 들어와서 영웅 심리로 선생님을 싸죽이고 친구들도 그냥 막 쏴 죽이는 일이 수없이 벌어지니까 마귀의 소굴로 변했습니다. 마귀가 역사하기 너무 좋은 터전을 법적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세계 선교사를 보냈던 영국 런던의 그 좋던 교회당들이 전부 술집이 되었습니다. “이야! 예배 안 드린단다. 이제 교회 안 온단다. 이거 다 우리 거다!” 온 세상을 마귀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세계 강대국들이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기들 안에서 예수를 내쫓아 모두다 영적으로 빈집을 만들어놓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귀들이 들끓어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다 망했습니다. 굶어죽는단 말입니다. 제가 모스크바에 처음 갔을 때는 러시아 사람이 뭐라고 나한테 말하는지 아십니까? 제가 말을 좀 나쁘게 하면 옐친 대통령 보고 “저 새끼도 마피아입니다.” 마피아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사회에서 아무도 살 수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왜? 영적으로 빈집을 만들어 예배당이 텅텅 비었습니다. 누구 하나 예배드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빈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 심령 가운데 말씀을 채워 비어있지 않게 하라. 은혜 받은 대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바쳐서 주님의 영이 내 속에서 기뻐하시도록 해라! 이 영적인 흐름이 끊어질 때 그 빈집은 위험해 집니다.”
저는 개척교회를 많이 했기 때문에 후임자가 많습니다. 그동안 목사들이 바뀌고 바뀌어서 수십 명입니다. 이제는 모르는 목사도 있어서 “어휴! 목사님! 제가 아무개 교회에 있습니다. 목사님이 초대 목사님이십니다.” “이야! 반갑습니다.” 그런데 저는 평생 단 한번 갈보리교회만 후임자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후임자는 한번 해보고 제 후임자는 수십 명 이렇게 되었는데 제 후임자들이 저만 만나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우린 목사님 때문에 피해자입니다.” “제가 뭘 어쨌기래요?” “아, 교인들이 전부 이필재 목사님만 그리워하지 저를 좋아해야 말이죠.” 그러면 저보고 어떡하란 말입니까? 모두 불평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저는 할 말이 있습니다. 당신도 나도 장로교 목사이니까 아마 생각이 같을 겁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최고 존경받는 목사님 한사람만 고르라면 누굽니까?” “한경직 목사님이죠?”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그분입니다. 우리 장로교 목사님은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그 어른이 가장 신임한 목사가 누구지요?” “박조준 목사님이라서 그분을 후임자로 정하신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나는 그 두 분의 영향력 밑에 있던 교인들과 지금 목회를 합니다. 그러면 나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나는 평생 개척교회만 하다가 마지막에 바늘방석에 앉아있습니다. 쩔쩔 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무리 큰 일이 내게 주어져도 순종하고 아버지가 내게 맡겨주실 때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 영적 흐름을 믿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그때마다 성령 충만의 역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나 때문에 안 된다니 그런 말 다시 하지 마세요.” 그랬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우리 갈보리교회는 한경직 목사님, 박조준 목사님과 40년 이상 함께 있던 교인들 그득합니다. 그러면 저는 어떡하란 말입니까?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을 믿고 최선을 다하면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성령 충만의 역사를 주셔서 은혜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 우리 인간이 ‘이만하면 됐다!’ 할 때가 언제냐? 평생 안 된다.” 분명한 통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생활, 사회생활 하다보면 여건이라는 것을 무시 못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 좀 하려고 하는데 여건이 맞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금년에 교회에서 300명 선교사 파송한다는데 나도 선교 헌금을 많이 하고 싶은데 가난합니다. 여건이 안 맞는 겁니다. 나도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싶은데 자녀들이 아직 어려서 매여 있다든지, 새벽기도 열심히 하고 싶은데 직장이 너무 바빠서 밤에 늦게 자야 되니까 나오지도 못하고 여건이 맞지 않는 겁니다.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러나 통계는 어떤지 아십니까? 좋은 여건에 있는 교인들이 절대로 신앙생활이 우수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좋지 못한 여건의 사람들이 더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가난한 사람이 헌금도 잘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십일조 떼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면 액수가 많아서 못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간 많고 안정 되어서 놀아도 괜찮은 사람이 교회 봉사 많이 하는 거 보셨습니까? 여건 따지지 마세요. 저는 새벽기도를 강조하는 목회자입니다. 고통 받는 형제들이 제일 많이 나옵니다. 여건 좋은 사람은 새벽기도 안 나옵니다. 그렇게 좋은 여건에 있어도 독야청청, 일 년 365일 하루도 안 나옵니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우리 심령을 주님이 기뻐하는 것으로 가득 채우지 아니하면 빈집이 되어 기회 있을 때마다 마귀가 자기의 종으로 사용하려고 우는 사자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설교하면서 이렇게 내려다보니까 우리 교회의 교인 절반 이상이 절반 이상의 삶을 산 것 같습니다. 벌써 4분의 3은 꺾여서 이제 인생이 4분의 1쯤 남은 그런 분들도 여기 많이 계십니다. 남은 때를 주님의 사역으로 채우십시오. 새벽기도 열심히 나오시고 내가 좀 할 수 있을 때, 내 손에 무엇이 들려져 있을 때 하나님의 역사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뭐 다 된 다음에….” 언제 됩니까? 될 때가 언제입니까?
마지막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방법! 찬송가에 있습니다. 384장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할렐루야! 마귀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 경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귀의 종들은 망했던 옛집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또한 마귀를 겁내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옛날 우리나라 말에도 있습니다. “병신자식은 귀신이 눈만 흘겨도 벌떡 넘어간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물러갈지어다. 나를 귀신의 집으로 만들려는 사탄의 역사, 교회를 도깨비굴로 만들려고 하는 마귀는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고, 심령마다 교회마다 가정마다 우리 국가도 성령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전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씀의 뜻을 깨닫고 우리 심령이 빈집이 되지 아니하도록, 우리 교회가 빈집이 되지 아니하도록 우리 가정이나 우리나라가 빈집이 되지 아니하는 성령님이 충만한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2:38-45 / 박세갑 목사
우리는 지금 안식일 논쟁으로부터 시작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이루어진 유대 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교리적 논쟁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12장에 들어와 주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의 비난과 음모는 점점 교묘해지고 치열해져 갑니다.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을 비호하시어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언하시고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시며 비난하는 자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음을 주장하시자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주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어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시는 모습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공격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34) 하셨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본문은 “그 때에”(토테; then, at that time)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주님을 귀신을 힘입는 자로 정죄하려는 자들에게 주님은 심한 꾸중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험한 분위기 속에서 논쟁이 이어지는 그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요구합니다.
우리는 지난 사건들 속에서 그들이 주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그 합리적인 이유를 만들려고 하는 의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도에서 음모를 꾸미고 그 결과로 주님의 심한 책망과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주님께 하늘에서 오신 표적을 구하는 것은 결코 정직한 마음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표적을 구하는 것이라면 그들의 마음이 올바른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악의가 숨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파멸을 원하고 그것을 위한 흉계의 연속에서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비웃음과 부정, 불신의 마음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표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미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일이나 병자를 고치신 일로 주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런 일을 행하셨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찬양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하나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충분한 표적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다시 새로운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요구는 주님을 모욕하려는 저의를 가진 것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하시며 크게 책망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선생님이여” 하고 부른 것 자체도 역시 무례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 까지 주님께서 보여주신 표적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새로운 증거로써 표적을 구하는 것 자체가 주님께서 선생님 되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주님의 가르치심을 부정했고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주님을 선생님으로 부르며 새로운 표적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주님을 향한 고의적인 악과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표적을 결코 보여 줄 수 없었고, 보여주지 아니하셨습니다. 설령 보여주신다고 해도, 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 표적을 주님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그 표적 앞에 굴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전에도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셨던 주님의 자비와 능력으로 행하신 표적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시며 이들과의 문제를 미래에 대한 전반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무시하고 해치려고 모의하는 자들에게 남은 기회와 판결과 형벌을 포함하는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표적을 보여주기를 거절하시며 주님은 한 가지 표적을 보이실 것으로 약속하고 계십니다. 자신을 적대시 하고 죽이려는 악에 가득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세상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언의 표적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간을 구속하고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이 주님께 요구한 표적은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은 그들에게 유일한 표적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 표적은 그들이 주님 앞에 굴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시기와 적개심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는 표적입니다. 이 표적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구원의 기회가 되고 그 기회는 최후의 기회입니다.
이 말씀은 엄숙하고 두렵기 까지 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해치려고 적개심을 품고 있는 그들과 그 세대를 향하여 "악하고(evil) 음란한(adulterous;) 세대"라고 평가하십니다. "악하다"라는 말은 그들의 마음에 있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남을 해치는 상황’을 의미하며, 음란하다는 말은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를 묘사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큰 죄로 인정하시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영적인 간음을 표현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대표하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할 때 주님은 이들에게 보여줄 마지막 표적을 “요나의 표적”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라는 계시를 받고,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지만 폭풍을 만나 바다에 던저저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사흘을 지낸 후에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여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하게 한 선지자입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바로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낸 것에 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일을 대조하시어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보이실 마지막 표적은 그들이 주님을 미워하는 그 마음으로 인하여 죽으신 후,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증거하실 가르침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이심으로 주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증명 되었습니다. 오늘이 부활절로 우리가 지키는 이것도 그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선민으로 자처하며 주님을 핍박하는 유대인들보다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이 오히려 정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나의 표적을 받아들였고 가르침을 받아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예언하신 대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표적을 받지도 않고, 가르침을 듣지도 않았고, 회개함으로 주님께 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의 부활 후, 오순절 사건을 비롯한 많은 표적이 있었지만 그 결과는 우리도 아는 바와 같이 역사 속에서 주님을 떠나는 것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체의 상황을 마지막 43~45절에서 요약하시며 결론 지어 판결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말씀은 우리의 적용을 가르치시는 이제까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고 자랑할지라도 우리 자신이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의 책임이 분명히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임재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세상의 악의 세력은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들었고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도 이런 일들을 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고 율법을 지키고 성전에 나가 제사 드렸습니다.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이 비어있으면 쫓겨난 귀신이 더 악한 것들을 데리고 다시 들어옵니다.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려면 그 모든 악의 세력보다 순결하고 능력이 있으신 분이 그 집에 들어와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절함으로 바로 그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며 순종한다고 했습니다. 그 집이 수리되고 청소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음으로 전보다 더 많고 악한 영들에게 점령당하고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주님과 어떤 관계를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주신 표적 위에 신앙을 세우고 있습니다. 더구나 현 세대는 모두 최후의 표적이 비추는 빛 속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입니다. 오늘이 바로 부활절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늘 날에도 우리와 또 수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도덕적이고 영적인 변화로 입증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내 안에 모셔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시고 지켜주시지 아니하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쁘게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표적을 보여주소서
마 12:38-45 / 박지온 목사
우리 12장 38절에 보면,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신 요구죠. 그때에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뭐라고 말했느냐하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씀입니까? 십자가의 구속의 표적 이외에는 이 세대를 건질 표적이 없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 악한 세대를 건질 표적이 없다! 여러분과 제가 속하여 있는 현실을 두고 말하는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세대를 건질, 아무리 어렵다, 힘들다, 뭐 어떻다! 상관없어요. 오직 이 세대를 건질 표적은 복음뿐이다! 그런 메시지가 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표적을 앞에 두고 있지만 이 사실을 못 깨달으니까,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표적은 예수를 안 믿는 불 신앙의 표적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이 표적은 뭔가 드러나는 어떤 그 신비한 인간적인 어떤 요구를 말합니다. 뭐 기적이 일어난다든가, 쉽게 말해서 '돈이여 하늘에서 떨어져 주소서!' 이런 표적들, 그 뭐 이상한 표적들, 쉽게 좀 건강치 못한 사람들은 '오늘 하나님이 막 깨끗하게 모든 병이 낫게 해 주옵소서!' 그것도 일종의 표적입니다.
지금현재 여러분들이 병이 들고, 고통을 당하고, 또 고난이 지금 내게 있다! 가정에 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확 해결해 버리고, 화닥닥 문제 해결해 버리고 이건 불 신앙의 표적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만약에 내 안에 참 생명의 신앙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 나를 인도해 가는 과정으로 보여지게 되면,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여지게 되면, 자연적으로 내게서 뭡니까?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런 표적인 나올 이유가 없죠. 나올 필요가 없죠. 그러니까 지금 여기 바리새인들의 표적은 불 신앙의 표적이요. 그들의 인간적인 어떤 그런 표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똑같이 뭘 느끼느냐하면, 참 복음을 떠나고, 참 복음을 떠난 자의 표적은 똑같이 뭐냐하면, 미신이요, 우상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종교 속에서 구하는 표적은 전부 이런 표적이거든요. 뭐 예를 들어서 이런 표적에서 미혹되는 것이 불 신앙자들이요. 이런 표적에서 사단에 속는 것이 불 신앙의 표적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흔히 천주교에서 '마리아 상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래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세계적으로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안 그랬습니까! 전부 그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 교회에서, 여러분이 다 보는 앞에서 박 목사님 머리에서, 막 머리 위에 십자가가 확 나타나고, 막 이렇게 나왔다! 그러면 깜박 넘어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막 오늘 은혜 받았다고 굉장할 겁니다. 그렇게 가지고 있는 마음 자체가 불 신앙의 표적입니다. 그 표적이 나타나면 뭐합니까? 아무런 상관없어요.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 우리의 약함에서 우리의 영원한 멸망에서 건질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데 속고 있습니다. 그건 사단의 표적입니다. 사단이 그런 표적에 잘 넘어 가니까! 뭐냐? 우상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그에 의해서 이상한 기적들 만들어 놓고, 이상한 그런 사건들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안되면, 모든 종교가 표적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이 안 되면 기도하면서도 허연 영감이 나타나서 기다리는 것이 그게 신비주의 배경이에요. 여러분들이 왜 신비주의에 빠져서 신비주의가 안 된다! 신비주의는 불 신앙이다! 그렇게 왜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뭔가 신비주의는 기도하면서도 뭔가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등이 뜨끈해지기를 원하기도 하고, 이런 표적을 자꾸 구하는 것이 신비주의 배경이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점점 더 들어가 버리면 왜 위험하냐? 바로 사단의 통로가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복음이 바로 안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특별히 기독교인들이 이 바리새인 적인 표적을 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표적을 가지고 사단은 여러분들을 자꾸만 어디로 빠지게 하느냐? 종교로, 또 더 나아가서 신비적으로, 율법으로 빠지도록 함정을 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뭐냐하면 사단의 속임수다!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들이 교회 다니면서 이런 사단의 속임수에 빠져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이 바로 되면, 이런 것들이 오늘부터 완전히 사라집니다. 여러분 눈앞에 아무것도 안 나타나도 됩니다. 다만 한가지 이 세대를, 그리고 여러분 처해있는 곤경과 문제와 그 다음에 가정과 사건과 자녀를 건질 수 있는 참 된 표적이, 선지나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이 세대의 표적이, 그게 지금 본문에 말씀하신 겁니다. 그 요나의 표적이 바로 뭡니까? 밤낮 사흘을 땅속에 죽음, 그 다음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표적이 바로 이 요나의 표적으로, 요나의 죽음으로, 상징한 표적에 약속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요나의 표적에서 뭘 우리가 보느냐 하면, 먼저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보여주는 약속입니다. 또 죽으실 것을 보여주는 이 약속이 가장 큰 축복과 은혜의 표적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처하여지고 이 땅이 처해있는 이 불행과 고통에서 구원받고, 건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먼저 뭐가 이루어 져야 되느냐? 사단의 요구가 이루어 져야 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범죄 한 아담에게 첫 번째로 말씀하신 그 말씀이 성취되어야 됩니다.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선악과를 따먹는 즉시 네가 정령 살리라? 죽으리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선악과를 따먹는 즉시, 하나님의 권위를 도전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또 하나님을 떠나는 그런 순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반드시 뭡니까? 죽었다! 그랬습니다. 영원한 죽음이다! 그래서 죽음을 오해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하나님을 떠났다! 그럴 때에 이것을 가지고 죽음이라! 그럽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님께서 분리되는 것을 죽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었다! 하는 것은, 육신에 있던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 이것을 가지고 죽었다. 그랬는데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죽었다! 하는 것은 이 성경에 원래 개념은 하나님을 떠났다! 그런 개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죽은 개념이에요. 성경은 죽었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 아담 하와 때부터 이미 선언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즉시 죽었다! 그렇게 뭐 지금 육체를 가지고 돌아 다녀도 다 썩은 냄새나는, 그래서 인간의 모든 문화는 다 냄새납니다. 정치가도 냄새나도, 문화인도 냄새나고 다 그렇습니다. 왜? 죽었으니까, 냄새나는 거죠.
여러분들이 하루만 안 씻어보세요 냄새나는데, 그게 다 죽은 표적이에요. 정 냄새나는 것이 이상하고, 안 죽었다고 싶거든 아침에 간단합니다. 한번만 찍어 가지고 냄새맡아 보세요. 죽은 표적이에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생명의 삶입니다. 그래서 떠날 때에 죽었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다! 그게 원죄 아닙니까! 그 삯이 뭡니까? 영원한 사망!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그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걸어다니니까, 괜찮다는 것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의 마지막은 뭡니까? 영원한 멸망입니다. 바로 죽음이 이게 본 죽음이에요. 영원한 죽음입니다.
이 땅에 있을 동안에는 뭐 지옥이 있니, 천국이 있니, 큰 소리 치고 돌아다녀도 결국은 사단에 속해 있는 자들이 갈곳이 영원한 멸망이에요. 그게 죽음에 본질입니다. 죽음은 뭐 생명이 끊어졌다! 그게 죽음이다! 상관없어요. 사실은 어떤 면에서 죽음! 그러면 뭐 흔히 말하는 것처럼 영혼이 없어진다! 그 다음에 뭐 아무것도 없어진다! 사고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만 정의를 한다면, 예수 믿을 이유가 별로 없어요. 별로 없는 게 아니라 예수 믿고 착하게 살고 진실하게 복음 들고 산다! 이렇게 할 이유가 별로 없어요.
만약에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고, 죽으면 영혼도 없어지고,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없어진다! 그러면 나는 오늘부터 안 믿을래! 왜? 안 믿고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마음대로 방탕하고 그게 낫지! 뭐하려고 그렇게 살 필요가 없거든요. 죽어버리면 끝인데, 그런데 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참 복음 가지고, 이 땅에서 복음의 삶을 살아야 되느냐? 반드시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멸망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기 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한 겁니다. 그 나라를 지금도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복음의 생명을 갖고 살 때에, 이것을 우리가 복음 붙들고 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죽는다는 배경에서 참 죽음은 영원한 멸망! 그것이 참 죽음의 본래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을 보고서, 뭐 죽는다! 그러고, 죽음에 대해서 간단히 말할 때에 참 불쌍한 것이 그런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해요. 전도하다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당장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그러면, '하나님 저 사람을 5분만 지옥에 약간 들어갔다가 나오게 해 주옵소서!' 이러면 5분까지 갈 것 없어요. 뭐 '하나님 5분이 너무 길면 1분만 들어갔다가 나오도록 해 주옵소서!' 여러분 아마 그대로 1분만 지옥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당장 달라질 것입니다. 그때부터 완전...
그런데 여러분 기도가, 그리고 성령으로, 영적으로 기도가 응답된다! 복음을 증거 한다! 그럴 때에, 이 역사가 이루어지면 그들이 알지 못하지만 영적으로 그 사실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된다 그러면, 복음을 안 받고는 견딜 수 없죠. 그래서 우리가 전도할 때에 불신자의 망한 표적부터 쭉 설명하잖아요. 그러면 누구든지 그럽니다. '그렇게 되지 말아야죠!' 이러더라 구요. 그렇게 안 되려고 그러면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때에는 뭡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 영접하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참 죽음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게 되면,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나오게 되어 있어요. 불신자의 6가지 망하는 순서를 조금만 설명해도 돼요. 조금만 이해가 되어도 그렇게 복음을 바로 받을 수 있는 그런 이유가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길은 반드시 먼저 뭐가 필요하냐? 죽음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죽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표적이 아닙니다. 오늘 요나의 표적! 죽음을 말합니다. 누구의 죽음이냐? 그것도 아무나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메시아의 죽음! 이 일이 이루어 져야 인생에, 인간에 참 구원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이것이 나오지 않으면 참 구원의 역사가 나올 수가 없죠. 그래서 이 사실을 쭉 설명한 것이 구약에 제사 제도입니다. 구약에 제사 제도가 어떻습니까? 양을 끌고 와서 제사장에게 자기의 죄를 말하고, 그 다음에 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제사장이 모든 죄가 양에게 갔다는 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 그 자리에서 잡아서 껍질을 벗기고 각을 다 뜹니다. 내장을 끄집어내어서 갔다가 버리고, 그 다음에 그 각을 떠서 번재 단 위에서 그대로 태웁니다. 이것을 구약은 제사라 그랬습니다.
먼저 양을 잡고 피를 흘려야, 쉽게 말해서 메시아가, 오실 메시아가 여러분과 저의 죄를, 원죄를 인간이 마땅히 죽어야 될 사단의 손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그런 영원한 멸망에 본질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구원의 역사가 약속이 됩니다. 이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성육신 메시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신 약속을 성취하신 사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것을 계속해서 설명하는 것이 구약에 설명입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계속해서 그러니까 매일매일!
그래서 말하자면 그 구약에 제사지낼 때에 마치 도랑에 물이 흘러가듯이 피가 성전에서부터 피가 그렇게 흘러갔다고 야서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매 순간 순간 계속해서 양의 죽음은 누구를 말합니까? 오실 메시아의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가 바로 이런 제사죠.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받아합시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없이는, 양이 죽고 피 흘려서 대신 속죄함을 받는 이 원리 밖에... 그래서 이 원리를 구체적으로 성취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이는 여러분과 제게 진실한 구원이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다! 그럴 때는 피 흘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피 흘릴 때에 사단의 요구에서부터 완전히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단의 세력을 꺾는 순간이 바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여러분들이 귀신 좇아내고, 그럴 때에 피에 대한 찬송을 많이 부르잖아요. 그게 다른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 원리를 바로 알면 피에 대해서 '예수 피, 예수 피!' 할 것도 없어요. 주 예수 그리스도 그건 뭘 말합니까?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그러면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 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꾸 이래가지고 피를 자꾸 말하다 보니까, '예수 피! 피, 피, 피, 피!' 이러다가 그만 생활 속에서도 '피!' 그러고 그러다가 뭐 이상한 버릇이 나오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이 다 속하는 겁니다. 그때에 흑암에 세력이 떠나고 사단의 속박에서부터 해방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십자가에서 이 사실을 예수께서 다 완성하셨기 때문에, 구약에서 메시아가 오셔서 피 흘릴 것을 완성하셨고 성취시켰기 때문에, 이 성취한 순간에 그렇게 인간을 붙들어 매고 있던 모든 속박에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음이니라!' 할렐루야!
이 사실이 여러분과 제게 성령은 언약이라 그랬습니다. 이걸 약속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축복의 약속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와 여러분에게 약속을 주시고, 약속을 주신 즉시 우리 약속을 잡고 있는 순간부터 내 인생을 다스려 나가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확인하고, 믿고, 내 인생을 다 맡기는 것이지! 언약에 뿌리를 내린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약을 믿는다! 그러면서도 자기 중심에 있어서 사는 것은 언약을 믿는 게 아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안되기 때문에 오는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바로 할 수 있다면, 먼저 갈라디아 2장 20절에 되어야 된다! 그 말이 그것이거든요. 내 개인의 감정, 개인의 욕심, 개인의 느낌, 개인의 모든 것들을 전부 하나님 손에 맡기는 것!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것! 이때부터 모든 문제 해결입니다.
그러니까 참 이상한 것은, 걱정하지 마라! 네가 가지고 자꾸 서둘지 마라! 네가 가지고 애쓰지 마라! 나한테 다 맡겨라! 내가 다 해주마! 이렇게 좋게, 좋게 말씀하신 것을 못 믿고, 안 믿고, 언약을 안 믿는 것이 이상하거든요. 안 믿고 자꾸 자기가 들고 걱정하고, 자기가 들고 애를 쓰고, 자기가 들고 이빨 갈고, 자기가 들고 눈 부릅뜨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요. 그렇게 하지 마라 그래도 좋은 일을 시키고 쉬운 일을 말해도 못 믿고, 못하고, 또 못 따라오고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사단의 손에 있기 때문에 이게 안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언약을 믿고, 언약에 다 맡기고, 참 믿음으로 살아라! 너무 쉽고 너무 좋은데도 왜 이 안 되느냐? 사단의 손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사단의 노예라 안 그럽니까! 그 사단의 손에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합니다. 내가 주인이 됩니다. 그 사단에 있기 때문에 사단이 주인이 되어야 되는데, 사단이 아주 교활해 가지고 뒤에 싹 숨고 이제부터 네가 주인이다! 속는 겁니다. 네가 주인이다! 뭐가 네가 주인이냐? 사단이 주인이지! 그래서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있고, 자기 자신이 전부가 되어 있는 사람은 전부 사단에게 속는 겁니다.
말세가 될수록 이 감정이, 이 마음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왜 말세가 될수록 사단이 최고로 발악하는데, 그래서 이 시기에 이 땅에 참 우리가 참 구원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시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참 된 구원의 표적이 없다! 이것이 오늘 강조해 주신 말씀이 되겠죠.
그러면 또 한가지 말씀해 주신 것이 뭐냐하면, 반드시 생명의 역사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거든요. 죽었다! 그러면, 죽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면, 복음이 안 되는 겁니다. 반드시 죽음 속에, 죽음이 있어야 살아난다는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이 있어야 살아나는 게 의미가 있는 것 아닙니까! 안 죽었는데 살아났다 그러면 이 건 말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살아있는데, 살아났다 그러면 말이 안 되잖아요. 반드시 죽음이 전제되어야 생명이란 말이 의미가 나옵니다. 살았다는 말의 의미가 나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부활이라는 말이 의미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은 부활의 종교라 그럽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초대교회에 이 구체적으로 복음을 설명할 때에 뭐냐하면 죽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죽었다가 뭘 말합니까? 부활하신 예수! 초대교회에 모든 복음에 증거가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이 사실이 복음에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데로 크리스마스보다도, 어떤 면에서 부활절이 훨씬 기념일로 성대히 지켜져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되어 가지고 성탄절이 많이 이렇게 지켜지고 있는데, 이건 뭐 세상사람들이 지키는 일입니다 만은, 사실 우리는 훨씬 부활절이 여러분과 제게 참 생명의 중요한 요소인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로마서 8장 2절에 말씀했습니다 만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어떻게 했어요? "해방하였음이라"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 것을 가지고 성경은 뭐라고 말하느냐? 예배라! 그랬습니다. 예배라! 저는 그 시간이 갈수록 예배에 대한 개념이 참 중요하구나! 그래서 성도가 예배만 바로 드려도, 막 그냥 막말로 말한다면, '주일날 예배만 바로 드려도 성공한다!' 그건 보장된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생명을 강조하기보다도 율법 속에서도 주일날을 주일날이라는 어떤 의식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대인의 율법 아닙니까! 안식일에는 얼마 정도의 거리는 걷지 마라! 뭐도 하지 마라! 뭐도 하지 마라! 심지어는 댕기도 옛날에는 머리를 묶고 이랬으니까, 그것도 하지 마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뭔가 안식일이라고 그래서, 사실상 이 배경이 예배에 대한 개념을 강조하고 있는 배경인데도, 예배를 드리기 위한 나변의 문제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복음이 아닌 문제거든요.
그래서 예배라 그럴 때에 반드시 전제되어야 될 것이 뭐냐하면, 복음이 안 된 자들은 예배가 시작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참 생명이 없는 자들은 예배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 교회 나왔다! 그럴 때에, 교회 나온 것으로 의미 이전에 중요한 것은 교회 나왔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내게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고, 이 생명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히 나올 수 있도록 은혜주신 이 축복이 여러분 지금 나와있다는 이 축복의 역사가 다릅니다. 여기에 나왔다! 생명 없이 나왔다! 그건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 복음이 없는 사람은 참 예배를 드릴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 자리에 나왔다! 내게 하나님이 생명 주셨구나!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여러분 예배라는 것이 구약에 번재라는 말씀을 안 드렸습니까! 양을 잡고, 양의 피를 완전히 흘리고, 각을 뜨고,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것이 신약에 예배라 그랬습니다. 예배라는 것이 뭐냐하면, 죽음이 전제된 곳에, 그 다음에 살아나는 축복과 역사가 바로 이어진 것이 예배의 의식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지금 구약에 양을 가지고 재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되거든요. 그것을 가지고 예배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신약에 한번 물어봅시다. 신약에는 제물을 가지고 나와야되는데, 어떤 재물을 가지고 나옵니까? 양을 가지고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여기 나왔을 때에 생명을 가지고 나온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를 위해서 내가 죽은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품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게 생명의 예배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에 내 모든 삶이,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것이 이게 연결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만 바로 해도 여러분 인생에 승리가 옵니다.
그래서 류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늘 해요. 미국에 재벌 록펠러가 자기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서 예배드리기 전에, 꼭 40분전에 먼저 왔습니다. 먼저 와 가지고 기도하고, 예배준비를 했습니다. 그에게 지금까지도 미국에, 세계에 그 재벌을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돈 많이 벌기 위해서 예배에 승리하자! 그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조금 예배에 대한 개념이 참 생명의 역사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이 개념이 조금만 바로 세워진다 그러면, 여러분 주일날 하는 일이, 뭐 주일날 '뭘 하면 어떻습니까? 뭘 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물을 필요가 없다. 그 묻는다는 자체가 벌써 예배라는 개념이 첫 번부터 안 되어 있다는 겁니다.
뭔가 여러분들이 그 예배를 따라 가지고, 예배 밖에서 막 성공하려고 발버둥칩니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여러분과 제게는 하나님이 너무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불 신앙 때문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참 된 생명의 표적!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조금만 눈을 떴다!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여러분 공식 예배, 공식예배! 이러니까 다른 것은 뭐 못한다 그럴지라도 주일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 이 예배를 위해서 정말 눈뜨고 말씀을 바로 붙잡을 수 있는, 귀중한 이 예배 위해서 조금만 준비하는 마음으로, 조금만 먼저 와도, 조금만 기도하면서 준비해도 여러분 인생은 달라져 버립니다. 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다 되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 그 수련회 동안에 청년들한테, 우리 청소년들한테 쭉 메시지 속에서 나오는 내용이 뭐냐하면, 믿는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과 경쟁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경쟁하면 경쟁 할 수가 없어요. 왜? 경쟁 상대가 안 되는 데, 여러분 거짓말쟁이하고 참 말하는 사람하고 누구를 더 잘 믿습니까? 거짓말을 훨씬 더 잘 믿어요. 왜? 그게 훨씬 아름답거든요. 참말 하는 사람은 안 아름다워요. 참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아파요. 그러나 거짓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듣기 좋은 말로 안 합니까! 그러니까 일단 여러분 대화할 때에 나한테 듣기 좋은 말만하거든 주의하세요.
어떤 면에서 나한테 듣기 좋은 말보다도 진실한 말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받아 드려도 좋습니다. 일부러 뭔가 비난한다 그런 것과는 말이 다릅니다. 차원이... 이런 면에서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듣고 한 주간 동안 살아간다 그건 뭐 말할 것도 없죠. 그래서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에 조금만 준비하면 이것은 아마 뭐 경쟁상대가 안되죠.
그러면 경쟁상대가 안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뭡니까? 요셉을 예를 많이 들더라 구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다른 형제와 경쟁이 안되잖아요. 그렇지만은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뭐합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축복하시니까 다 되는 문제 아닙니까? 여러분 가정, 신앙, 생활 속에서 다른 모든 어떤 상대와 다른 형제들과 다르다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이 내게 축복하셨다! 다 끝나는 겁니다. 여기는 경쟁이라는 것은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참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참 예배에 승리하고, 성공하게되면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십니다.
그러면 저 사람은 뭐 맨 날 안 되는 것 같고, 맨 날 양보하는 것 같고, 맨 날 이상한 것 같은데, 보면은 뭔가 축복이라! 늘 축복이 따라 옵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요셉을 보고 보디발이 고백한 것이 나오죠. 하나님과 함께 하겠다. 저 사람 뭐가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구나! 이 사실이 바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기도 많이 해서 그렇다! 노력 많이 해서 한다! 착하게 해서 온다!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다른 것보다도 먼저 여러분 아실 것은, 예배에 성공하십시오. 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공식으로 나올 때에, 일주일에 한번 약속한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조용히 한번 예배드려 보세요. 그리고 이 거룩한 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한번 예배드려 보세요. 주님께서 여러분의 생애로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 따라오는 것이 매일 순간 예배입니다. 그래서 계속 메시지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정시 기도를 할 때마다 뭘 얻는다 그랬습니까? 새 힘을 얻는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죽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을 얻을 때에 뭡니까? 새 힘을 얻으리라! 너희는 새 힘을 얻으리라! 독수리의 날개 침 같이 도저히 장정이라도, 소년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지만, 오직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에게는 뭡니까? 새 힘을 얻으리니 중요한 겁니다. 바로 이 새 힘을 얻는 길이 뭐냐하면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에 가장 순간, 순간 지속되는 축소적인 예배가 뭡니까? 기도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죽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죽음을 힘 얻고 그 이름으로 누구한테 나갑니까?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 뒤에는 반드시 뭐라 그럽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게 보증입니다. 그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여기에 나갈 때마다 뭘 받는다, 얻는다! 이런 배경이 아닙니다. '새 힘을 얻으리니' 새로운 치료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능력이 임할 때에 이것이 우리의 모든 삶에 승리하는 축복과 은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할 때마다, 새 힘을 얻는 적은 경험만 와도 여러분 생애는 축복이 약속된 정도가 아닙니다. 풍성해 집니다. 여기에 성령의 충만이 약속하고, 이것이 모든 우리 생활과 삶에, 부요함과 충만함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여기는 아프다, 슬프다, 실패했다! 상관없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무엇으로? 믿음으로! 참 구원과 참 생명의 복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영원한 축복과 은혜의 사실이 날마다 체험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희생과 사랑만이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마 12:38-45 / 전순기 목사
다음 주에 우리는 우리 마음에 품은 태신자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들려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전도의 열매를 잘 맺을 수 있을까?”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거룩한 고민인 줄로 압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전도를 잘하려면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복음을 전하는 능력이 임하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게 하는 그 성령의 능력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어떻게 전도의 능력이 나타나서 열매를 맺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교회사상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잘못된 길로 가 버린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요즘도 가끔 보이지만, 한 때는“능력의 종! 000가 오셨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벙어리가 말하게 되었다. 귀신이 쫓겨나가고, 짧은 팔 다리가 길어졌다. 이빨이 금이빨로 바뀌었다.”는 등의 무수한 치유와 기적의 사례들을 선전하면서, “표적과 기사의 현장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라는 식의 전단지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한 동안은 그런 것에 많은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고, 기왕에 주의 종이 될 것 같으면,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능력의 종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성경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표적과 기사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정립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받아야 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깨닫고, 그런 능력을 소유하게 되기를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복음의 열매를 풍성해 맺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 먼저 세상 사람들은 어떤 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남들보다 더 큰 힘을 가져야 하리라!
본문 38절과 39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 중에 몇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표적 보여주기를 구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느니라.”말씀하심으로 표적 보여주시기를 거절하시고, 오히려 표적 구하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은 좋은 신앙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주님은 이렇게 책망하시고 거절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 노릇하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충분한 표적과 기사를 저들 가운데서 행하심으로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미 충분한 표적과 기사가 베풀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표적은 필요치 않고, 이제는 결단만이 필요합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는 것이 믿음을 갖는데 도움이 될까요?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것이고, 또 사도들도 이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표적과 기사들을 좀 더 주의 깊게 연구해 보면, 표적과 기사를 본다고 해서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너무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말씀과 성령의 역사만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입니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라는 말은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고, 내 죄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표적과 기사가 없어도, 말씀만으로 예수님의 구주와 주님 되심이 믿어집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으면, 표적과 기사를 보아도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표적과 기사를 직접 행하는 능력을 소유하거나, 아니면 경험이라도 하고 싶어할까요? 그것은 인간의 죄악 된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 표적을 구하는 마음속에는 두 가지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첫 번째 동기는 호기심을 채움으로 자기만족을 얻으려는 욕심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다 신기한 일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표적 보는 일은 흥분되고 즐거운 일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믿어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신기한 것을 보고 즐기려는 육적인 욕심에서 신령한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또 두 번째 동기는 표적과 기사를 보거나 직접 행하는 능력을 가짐으로서 남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자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입니다. 병 고치는 능력이나 귀신을 추방하는 능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도 주어지고, 돈도 주어집니다. 그에게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니이체라는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유능한 소년이라면, ‘네가 네 친구보다 더 덕망 있는 자가 되고 싶으냐?’라고 물으면, 빈정대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네가 네 친구보다 더 강한 자가 되고 싶으냐?’라는 질문을 하면, 두 눈을 번쩍 뜨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죄인들의 본성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덕망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기보다는, 힘이 있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왜요? 그래야 다른 사람들 위에 설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고, 대접 받을 수 있고,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힘과 능력을 구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다양한 것이 힘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돈과 권력의 힘이 사람들에게는 가장 큽니다. 또 사회적인 신분과 지위, 본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실력과 재능을 입증해 주는 자격증들, 뛰어난 외모, 학벌, 혈연과 지연과 학연, 다양한 경험들이 다 힘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깨달아야 할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표적과 기사에 지나치게 큰 관심을 두고, 거기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그것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힘과 능력을 숭상하는 세상의 정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표적과 기사는 전혀 필요가 없다든지, 표적과 기사를 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님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처럼 의심을 이기고 연약한 믿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표적을 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주님께서 거절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정말로 표적과 기사가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표적과 기사가 필요하고 안 필요하고는 주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우리가 결정하고 주님께 강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무조건 기적으로 해결되기를 강요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란 말씀입니다. 또 우리가 상식적인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것조차도 기적으로 해결하기를 바라는 태도를 잘못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희생과 사랑만이 구원하는 능력이라!
표적 구하는 자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하시며, 주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한 영혼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표적과 기사가 필요한 게 아니라,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일만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희생과 사랑만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희생적인 사랑만이 진정한 능력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삼년 반을 주님과 함께 살면서 배웠던 제자들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있는 마지막 유월절 만찬장에서까지도 누가 크냐를 두고 다퉜습니다. 그들은 그 때까지도 신앙을 자기를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삼고,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남들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그래야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고,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세속 정신을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세속적인 욕망으로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오순절 성령이 오셔서 십자가 대속의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시자, 비로소 복음의 능력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남들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발휘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깨달은 후에 그들은 모두가 다 주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끊임없이 올라가는 삶을 추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남들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소유하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백팔십도로 달라졌습니다. 자기가 추구하던 힘과 능력이 얼마나 속된 것이고 헛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미련 없이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망은 내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며 살아가자, 그를 통해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상상을 초월하는 전도의 열매들이 맺혔습니다. 바울의 삶은 제2, 제 3의 바울들을 낳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는 오늘날 전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예화) 이번에 노회 교육부 세미나가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에서 열렸습니다. 증도라는 섬은 섬 주민의 90%가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민이 2,200명 정도인데, 교회가 11개가 있습니다. 증도에는 다른 종교가 없고, 미신도 없습니다. 증도가 속한 신안군은 복음화 율이 35%에 이른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한 연약한 여성이 순교의 피를 흘리며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여성에 대해서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1891년에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의 작은 섬에서 출생한 문준경(文俊卿·1891∼1950)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해서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합니다. 1908년 17세의 나이에 신랑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중매결혼을 해야 했는데, 남편은 바람둥이였고, 목포에 소실을 두고 자녀를 낳고 살면서 집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남편 없는 시집살이가 너무 힘이 들어서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었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 그래도 위로가 된 것은 시아버지가 아주 자상한 분이어서 며느리를 잘 보살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극진히 아껴주시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목포로 건너오게 됩니다. 목포에 와서 단칸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면서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중에 전도를 받아서,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데, 그 교회가 그 유명한 성결교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당시 전도사)님이 초가집 한간을 얻어 막 개척을 시작한 북교동 성결교회였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낙도 없었던 그녀에게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평안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기대와 기쁨을 채워 주었습니다.1년 만에 학습과 세례를 받고 열정적인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집사 직분을 받은 그녀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할 것을 서원하고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성봉 목사님의 특별 추천으로 서울에 있는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전신)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전도사의 전도열정은 남달라 방학마다 고향으로 내려가 1933년 진리교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35년 중동리교회, 36년 대초리교회를 차례로 건립했습니다.42세에 시작하여 60세에 순교할 때까지 신안군 14개 읍면에 그녀가 직접 간접적으로 세운 교회는 100여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전도사님의 영향으로 한국 교회에 걸출한 인물들도 많이 배출되었는데, 한국 CCC의 대부인 김준곤 목사님, 한신대학교의 정태기 목사님, 유명한 부흥사이신 이만신 목사님 같은 분들이 대표적인 분들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며 당한 고초는 바울이 당한 고초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녀는 나룻배를 타고 이 섬 저 섬을 돌며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녀는 주민들의 심부름꾼도 되어주고, 먹을 것 없는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외로운 자에게는 친구가 되어주고, 병든 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발을 들어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염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환자들의 방에 들어가서 간병해 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모든 섬주민들의 어머니였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그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목포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었고, 해방 이후에는 공산당들의 모진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6.25가 나던 해에 증도에 들어온 공산군들은 진리 교회 성도들 48명을 모래 구덩이에 생매장해서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고, 문 전도사님은 인민재판을 해서 죽여야 한다고 끌고 목포로 나갔는데, 마침 연합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 고로, 공산군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 때에 이성봉 목사님께서 아직 곳곳에 남아 있는 공산당들 때문에 위험하니, 잠시 피신해 있으라고 만류했지만, 문전도사님은 내 교회 양들이 위험에 처해 있는데, 나 하나 살겠다고 피신할 수 없다며 다시 중동리로 돌아왔다가 공산당들에게 체포되어 순교의 제물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문전도사가 순교당할 때에 수양딸이었던 백정희 전도사도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공산당들은 문전도사를 터진목이라는 모래사장에서 “너는 반동의 씨암탉 같은 존재이기에 처형한다.”면서 죽창으로 잔인하게 온 몸을 찌르고, 총대로 죽도록 패고, 그래도 죽지 않자 숨통을 끊어놓겠다고 하면서 목에다가 총을 쏴서 죽였다고 합니다.
죽어가면서 문전도사님은 세 가지 말을 남겼는데, “나는 죽여도 좋으나 옆에 있는 백정희 전도사는 살려 달라. 또 내 교회 성도들은 손대지 말고 살려 달라. 그리고 너희도 예수 믿고 구원받아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자신은 죽여도 괜찮으나, 백정희 전도사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말에 공산당들도 당황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문 전도사님이 마지막 남긴 유언대로 백정희 전도사도 살았고, 남은 교회 성도들도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교 현장에서 이 모든 사실을 지켜본 백정희 전도사님에 의해서 이 이야기가 전해졌던 것입니다.
문준경 전도사님이 가진 게 뭐가 있었습니까? 문 전도사님에게는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복음은 오직 희생과 사랑으로만 전달된다는 사실을 아셨고, 그 진리를 몸으로 실천해내셨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진정한 능력인지 깨달아지셨습니까? 복음의 능력이란 십자가를 지게 하는 능력입니다. 자신을 희생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으로 무장할 때에 우리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희생하고 사랑하면, 본인 자신은 불행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희생과 사랑의 능력으로 무장하고 영혼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드릴 때에, 가장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문전도사님이 공산당들에게 잔인하게 죽창에 찔리고 총 개머리판으로 맞고, 총을 맞아 돌아가신 것이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한 모습이겠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그분은 가장 복된 사람 중에 하나인 것이 분명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서 여러분들도 한 영혼을 위해서 희생하며 사랑해 보십시오. 문전도사님처럼은 할 수 없을지라도, 아주 작은 일 하나라도 양보하고 희생하며 그 사랑을 실천해 보십시오. 그럴 때에 성령님의 위로하심과 힘주심을 경험하실 것이고, 여러분들은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행복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우소서!
그녀가 순교의 제물이 되어 피 흘린 땅에 순교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문준경 전도사님이 순교 유적지를 돌아보고, 또 그 분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한 번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그리고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지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의 순교비 앞에서 모든 목사님들과 사모님들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침 노회 목사님 중에 교회를 개척하셔서 30년 이상 목회를 하시고 조금 일찍 조기 은퇴를 하시고 네팔이라는 나라로 선교사로 파송을 받으시는 한 목사님 부부를 문준경 전도사님이 순교하신 그 자리에 앉히고 함께 간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함께 축복하는 기도를 하면서 정말 가슴이 뜨거운 감동을 느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복음 앞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듣고 깨닫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됩니다. 깨닫기 위해서 애써야 하고, 깨달았다면, 이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본문 41,42절에서 그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본문을 한 번 다시 보시겠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마지못해서 하는 설교를 듣고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씀을 들으려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당시의 사람들은 요나와도 비교할 수 없고, 솔로몬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친히 행하시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 또 그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완악한 마음으로 회개치 않는 그들을 향해서, 마지막 날에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할 거고, 또 스바 여왕도 그들을 비난할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 부끄럽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41-42절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빨리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아직도 우리 안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가려고 하는 세속 정신이 남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날마다 몰아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는 그것을 몰아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를 두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태신자 초청주일을 정했습니다. 다음 주가 행사 당일인데, 많은 성도들이 태신자를 이미 정하고 기도하고 초청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마음에 한 사람도 품지 않고 그냥 넘기는 성도들도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꾸 성장하고 성숙해가야 합니다. 그냥 현실에 안주하는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지금이라도 한 주간 남은 동안에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전심으로 기도하고 다음 주에는 이 자리로 그분들을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오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결단해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상은 힘과 능력을 가져야 행복해진다고 생각하고 힘과 능력을 숭상합니다. 기독교 안에도 이런 세속 정신이 들어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말씀을 들으신 후에도 여전히 남들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지는 것이 복음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음의 진정한 능력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힘과 능력을 소유하고 그것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고, 희생하고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희생과 사랑 중에 가장 큰 희생과 사랑은 영혼 구원을 위한 희생과 사랑입니다. 여러분! 오직 희생적인 사랑만이 우리가 구해야 할 진정한 능력임을 가슴에 새기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남은 생애는 그 능력으로 무장하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칭찬 듣는 삶을 살려면
마 12:38-50 / 최영기목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건은 다 하나님의 꾸중을 듣는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꾸중듣는 것을 역으로 바꾸어서 하나님께 칭찬 듣는 삶을 살려면 이라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가 예수님에게 표징을 보여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 스도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표징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베풀었던 10 가지 재앙과 같은 징표를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요구를 예수님은 거절하십니다(39절). 왜 거절하실 까요? 이들은 더 큰 표징을 보여주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악하고 음란하 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니 악한 사람들이고 예수님보다 신기한 일을 더 사랑하니 영적으로 음란한 것입니다.
I. 선하고 순결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에게 칭찬 듣는 사람이 되자면 더 많은 표징을 구하지 말고 이미 받은 표 징에 근거하여서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여야합니다.
1. 이미 받은 표징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믿고 신뢰한다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에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 이제는 믿을만한 증거를 다 보여주셨건만 아직도 무엇인지 모를 표징을 기다리 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주님은 악하고 음란하다고 꾸짖을지 모릅 니다.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완전히 증명이 되기를 기다리시면 안됩니다. 믿을만한 이유가 60-70% 있다고 생각되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해야합니다. 그 러면 나머지 30-40% 체험을 통하여 채워집니다. 이미 충분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 구하고 더 큰 증거를 찾으면 귀신을 쫓아도 악한 영의 힘을 빌어서 그러는 것처럼 보였던 바리새인들처럼 마음이 강퍅해져서 영영 믿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표징을 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 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이제는 어려움을 당하면 지금까지 도와주셨던 하나님을 신뢰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하고 걱정합니다. 기적을 베풀어서 하나 님이 살아 계심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이 표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악하 고 음란하다는 꾸중을 듣을지 모릅니다. 선하고 순결하다는 칭찬을 들으려면 위기 상황을 당했을 때에 표징을 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베 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생각하고 신뢰하여 편안한 마음 가운데에 주님 의 도우심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2. 회개의 삶을 산다
예수님은 회개할 줄 모르는 율법학자들을 향하여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방인 아 시리아 사람보다 더 악하다고 꾸중을 하셨습니다(41절). 느네웨는 나중에 북 왕국 인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흉폭한 아시리아 수도였습니다. 이들은 "40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간단한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였습니다(욘 3:4). 그러나 유 대인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서도 회개할 줄 몰랐습 니다. 그래서 악하고 음란하다는 꾸중을 듣는 것입니다.
선하고 순결하다는 칭찬을 들으려면 회개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특별히 자신의 동기를 살펴야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겉으로 보이는 생활에만 집중했기 때문 에 자신들이 경건하다는 자부심을 가졌고 그랬기 때문에 회개하기가 어려웠던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러한 사람들을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속에는 시 체가 썩고 있는 장식된 무덤에 비유하신 것입니다(마 23:27).
그러므로 우리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행동만이 아니라 자신의 동기를 살펴서 회 개하는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자신의 심령을 살펴달라고 기도합 니다(시 139:23). 이러한 자신의 동기를 살피고 회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다 윗은 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었던 것 으로 보입니다. 주기적으로 자신의 심령을 살펴서 회개할 것이 없는가를 찾으시고 정 바쁘신 분들은 성찬식 때를 이용하여 자신의 심령을 살펴서 잘못된 마음가짐 과 동기를 발견하고 회개하여서 선하고 순결한 자라는 칭찬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의 지혜를 구한다
예수님은 또 시바의 여왕의 예를 들으셨습니다. 이 여왕은 솔로몬 왕이 지혜롭다 는 말을 듣고 먼 거리를 여행하여 찾아왔습니다(왕상 10). 그런데 솔로몬과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더 위대한 분이 그 가운데에 있는데 율법학자들은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꾸중을 듣는 것입니다(42절).
선하고 순결하다는 칭찬을 들으려면 표징을 구하지 말고 지혜를 구하여야합니다 . 지혜는 삶의 지혜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지혜를 구하면서 살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악합니다. 결국은 자신을 파괴하고 이웃과의 관계 를 파괴합니다. 예수님의 지혜는 참된 행복을 가져오고 참된 평화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의 지혜에 대해서 이러한 확신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대로 살아서 과연 그렇다는 것을 삶 가운데에 경험하여야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은 선 하고 순결하다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 원하는 식의 표징을 거절하셨지만 결국은 표징을 약 속하셨습니다. 부활의 표징입니다(40절). 요나는 구약에 등장하는 예언자 중의 하 나입니다. 아시리아 수도인 느네웨에 가서 그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했습니다. 그러다가 배가 풍랑을 만났 을 때에 이것이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물에 던져 넣으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해서 사흘만 에 느네웨에 가서 토하게 한 사건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 에 있다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이 땅 속에 사흘간 묻혔다가 살아날 것을 말씀하 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최후의 표징이며 가장 확실한 표징입니다. 우 리는 병 고침을 받음으로 예수를 믿게 되기도 합니다. 기도 응답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믿음 생활을 시작하는 동기는 부여할지 언정 예수 믿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음의 근거가 되면 병이 재발하거나 기도 응답이 안 온다고 생각되면 믿음을 저버릴 수가 있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표징에서 믿음을 시작했더라도 근거는 요나의 표징, 즉 부 활에 두어야합니다. 그러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II. 인간에게 중립은 없는 것을 안다
유대인 지도자들의 악함과 영적으로 음란함을 한탄하시면서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의 예를 들어서 이들을 꾸짖으십니다(43-45절). 한국적인 정서에는 귀신이라 고 하면 죽은 사람의 혼령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귀신은 타락 한 천사입니다. 그러므로 악령이라는 말이 오해를 없앨 수 있는 좋은 표현입니다 만 성경에 귀신이라고 번역을 했으니까 귀신이라는 용어를 쓰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귀신에 관하여 많은 사실들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 귀신 이 아니라 여러 귀신이 한 사람에게 동아리를 틀 수 있다든지 더 악한 귀신, 덜 악한 귀신이 있다든지 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점은 45절 끝에 있습니다. "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 니까? 인간에게는 중립이 없다는 것입니다. 악한 영의 지배 밑에 있던지 성령의 지배 밑에 있던지. 자신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착각입니다.
1. 성령 충만을 사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합니다. 성령충만 없이 도덕적으로 순결한 삶을 살려고하면 오히려 전보다 더 악해질 수가 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 이 좋은 예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들이 거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므로 이방인들을 경멸했고 약한 사람들을 멸시했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아들 을 잡아죽이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거룩하다는 자부심이 영적인 눈을 멀게 하여서 회개할 수 없 게 만들고 하나님의 아들이 귀신을 쫓는 것은 악한 영의 힘을 빌어하는 것처럼 생 각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것 같은 착 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전보다 더 상태가 비참해진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들, 자신이 잘못하고 있 다는 사람들은 오히려 인간미가 있고 주위 사람들에 대한 이해성이 있습니다. 문 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을 보면 주위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과 경멸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근접하기 어렵 고 친밀해지기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하여 가장 가정 적개심을 보이고 예수님 믿는 것에 관하여 가장 거부감을 보이는 것입니다 . 왜입니까? 율법학자와 바리새인과 마찬가지로 악한 영의 지배 밑에 있기 때문입 니다.
진정한 도덕과 윤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도덕과 윤리는 결국에 가서는 더 큰 파괴를 가져옵니다. 예를 들어서 구라파는 이제 기 도교적인 요소를 다 상실하고 인본 주의에 기초한 윤리관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 습니다. 그러니까 모순이 등장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웃의 생명을 앗아간 악 한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반대하면서 무능력한 태아를 살해하는 것에 관하여 서는 눈 하나 깜짝 않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도덕과 윤리가 가져오는 모순이요 파괴의 좋은 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의 지혜를 구하고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하는 것입 니다.
2. 마음을 비우기보다 채우기에 집중한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싶으신 것은 비우는 것보다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 니다. 우리의 마음이나 심령은 빈 상태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로 채워져 야 합니다. 그래서 한 귀신을 쫓아서 비어진 마음을 성령의 충만케 하지 않으면 더 악하고 더 많은 귀신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비우려하지 말고 채우려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미움 을 없애려하기보다 사랑으로 채워야합니다. 슬픔을 없애려기 보다 기쁨으로 채워 야합니다. 악한 생각을 없애려기 보다 선한 생각으로 채워야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스천을 하지 말자 보다 하자에 집중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칙을 에베소서에서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엡 4:25에서는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하지 말라 에 이어서 즉시 해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 4:28에서는 "도둑질을 하는 사 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 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엡 4:29에서 "나쁜 말은 입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 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십시오."라고 말합 니다. 부정적인 말에 즉시 긍정적인 말을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과 이웃의 삶에 참된 변화를 가져오기를 원한다면 부정적인 것을 긍 정적인 것으로 바꾸어야합니다. 비우는 대신에 채우는 것에 집중하여야합니다. 하 지 말자 에 집중하는 대신에 하자에 집중하여야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도 " 숙제 다하기 전에는 TV 보지 말아라"라고 말하지 말고 "숙제 다 한 후에 TV 보아 라"라고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악하고 음 란한 세대가 되지 말자는 대신에 선하고 순결한 세대가 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자연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말버릇과 사고를 살피고 고쳐서 부정적인 대신에 긍정적인 표현을 쓰도록 노력해야합니다.
III.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다 한 가족으로 생각한다
이 때에 예수님의 가족이 찾아왔습니다(46-48절). 아마 가족이 찾아온 이유는 예 수님이 염려가 되어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미쳤다고는 소문도 듭니다. 그래서 찾아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전갈을 듣고 예수님은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 인 무리들을 돌아보시며 이들이 나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49-50 절). 얼른 듣기에는 예수님이 어머니와 형제들을 거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그런 것도 있습니다. 가족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이니까 예 수님이 현재 무엇을 하고 있든지 간에 당연히 만나 줄 것을 기대하는 느낌을 받습 니다. 아들이요 형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느낌 이 듭니다. 이것을 고쳐주려는 의도도 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가족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은 그 사역을 존중해주고 사 역자로서 존경해 주어야합니다. 어른들 가운데에는 아들이 목회자가 되면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면 경어를 쓰는 분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경외심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배우자가 목자이면 남편이며 아 내인 동시에 또한 목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합당한 존경심을 보이고 협조하여야합 니다. 여러분들의 청소년 자녀들도 주님의 사역을 하면 주님의 사역자라는 것을 존중하여 합당한 태도로 대하고 그 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존중해 주어야합니다 . 어린 자녀들이라고 그 사역을 우습게 보고 가사와 상치되면 타협점을 찾기보다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을 가끔 보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여기에서 새로운 가족 관계를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족이라면 피를 섞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가족이라고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서로를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상이 가정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가족의 범위 를 점점 넓혀야합니다. 가족들만 똘 똘뭉쳐서 가족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형제요 자매요 부모 요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교인 전체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관점을 가져야합니다 . 한국 크리스천들을 다 형제 자매로 생각하는 관점을 가져야합니다. 세계의 모든 크리스천들을 형제 자매로 생각하는 관점을 가져야합니다. 내 주위와 내 나라와 세계의 불신자들도 구원받아야할 형제 자매로 생각하여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에피소드를 통하여 새로운 가족 개념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요나처럼
마 12:41 / 강성찬 목사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표적 보여 주기를 원하자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라 하시며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하십니다. (마 12:38-41)
예수님께서 인정한 요나의 전도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요나는 적대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위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선지자의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니느웨는 당시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의 수도 니느웨가 죄악이 관영한 곳이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 니느웨를 버리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하여 이방이 복을 얻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선지자라는 생각이 가득한 요나는 이방인도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과는 반대 방향인 서쪽 다시스로 향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대풍을 내리셨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신을 부르다 못해 가지고 있던 물건을 버리고 심지어 배의 기구까지 버리는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다급한 상황에 처한 사공들과는 다르게 요나는 배의 밑층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폭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지만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최후의 방법은 제비뽑기였습니다. 제비를 뽑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 일을 작정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잠16:33). 제비의 결과는 요나에게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요나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자 요나는 자신이 유대인이며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하나님의 뜻을 어긴 처지를 말하게 됩니다. 요나의 고백을 들은 사람들은 두려워 떨면서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길은 배를 육지에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요나가 선택한 길은 자신이 물에 빠져 죽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죽음이 아니라 회개와 순종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반항하였지만 하나님은 물고기를 이용하셔서 요나를 인도하십니다. 요나는 삼일 삼야를 물고기 뱃속에 있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요나의 표적이라고 표현하신 것으로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온 것은 죽음이 아니라 큰 물고기였습니다. 물고기 뱃속의 요나는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죽음의 순간을 지나 온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요나가 겪은 죽음의 순간은 그로 하여금 구원의 하나님을 찾아 간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와 순종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절망의 상태에 놓인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모두가 포기할 만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손길을 펼쳐서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없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두번째로 임하자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도 합니다.
명하심에 순종하며 전도하는 요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니느웨로 갔습니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일에는 남녀와 노소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빈부와 귀천의 구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순종하고 따르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많은 축복이 약속되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그 모든 약속을 무효화시켜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아무리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갖고 계실지라도 불순종은 은혜와 사랑을 가로 막는 결정적 장애물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누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는 삼 일 길을 친히 걸어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요나가 걸어가는 발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행로였습니다.
전도의 명령을 따르는데는 환경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여자 소경이 한번은 성경책을 가지고 선교사를 찾아가서 "미안하지만 여기 요한복음 3장 16 절에 붉은 줄을 좀 쳐 주시겠습니까 ?" 하고 부탁했습니다. 선교사는 그 성경 구절에 붉은 줄을 처 주었습니다. 이 여자 소경은 중학교 하교 시간만 되면 성경책을 가지고 학교 문 앞에 가서 서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재감거리면서 나옵니다. 그때 이 여자 소경은 "학생, 이리 좀 와봐요, 여기 붉은 줄로 그은 성경 구절에 뭐라고 그랬어요 ? 한번 읽어봐요." 하고 말했습니다. 학생은 그 성경 구절을 자랑스럽게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여인이 그것이 무슨 뜻 인줄을 물었습니다. 학생이 잘 모르겠다고 하자 이 여자 소경은 열심히 설명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셨는데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은 거야. 나는 비록 소경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감격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단다. 그러니 너도 예수님을 영접해야 해."
나중에 그 학교에 서 24 명의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탄생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아프리카 소경 여인의 전도-예화뱅크)
주님이 주신 전도의 명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탐험가이자 선교사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16년을 지내는 동안 그다지 위험했던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단지 그가 아프리카 중심부에서 적대적인 원주민에 싸여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어 밤에 도망할 생각까지 했으나, 어떤 힘이 그로 하여금 평안을 찾게해 주어 마음을 바꾸었던 적이 있었다 합니다.
그는 1856년 1월 중순 어느 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합니다. "이 거대한 지역과 내일이면 야만인들에게 목숨을 빼앗길 많은 사람,-그들의 복지에 대한 나의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됨을 느꼈다-그러나 나는 예수님께서 '가서 모든 사람을 가르쳐라 나는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와 함께 할지니라'고 하신 말씀을 읽었다. 이는 가장 강경하고도 성스러운 자의 말씀이었기에 그것이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오늘밤이 마지막이 된다할지라도 나는 세상을 살펴볼 것이다. 나는 지금 대단한 평온함을 느끼며 이를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변치않는 약속(복음전도지상명령순종선교)
말씀대로 전하며 전도 하는 요나
요나가 선포한 말씀 가운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는 말씀은 이들에게 심판의 경고의 멸망의 말씀입니다.
심판의 경고는 늘 우리에게 옵니다.
찰스 피니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청년 변호사였던 그는 어느 날, 뉴욕 주의 어느 마을에 있는 자기 법률 사무소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는데, 주님이 그에 게 찾아오셨습니다.
"피니야, 네가 지금 하는 일이 끝나면 무엇을 하려느냐?"하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간판을 내걸고 변호사 개업을 하겠습니다." "그 다음 에는 어떻게 하려느냐?"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부자가 되렵니다." "그 다음에는?" "은퇴하겠지요." "그 다음에는?" "죽겠지요." "그 다음에는?" 이제 피니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젊은 피니는 반 마일 떨어진 숲으로 달려갔습니다.
기도하면서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을 맛보지 않고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습니다. 오랜 투쟁 끝에 그는 자기가 하나님 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며, 영원히 그를 기뻐하겠노라는 높은 뜻을 간직한 채 저녁에 숲을 나왔습니다..(시험에서 건지시고 - 생명의 삶)
위대한 설교자요, 전도자인 피니와 같이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믿고 전다며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여야 합니다
어느 복음 전도자의 설교에 한 이야기를 기록한 내용이 있습니다.
한 전방 도시에서 말 한 마리가 마차 안에 어린 아이를 태우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 아이가 위험한 것을 보고 한 젊은이가 생명을 무릅쓰고 말을 붙들어 정지시켰습니다. 구출된 그 어린 아이는 성장하여 무법자가 되었으며, 어느 날 그는 중죄의 언도를 받기 위하여 한 재판관 앞에 섰습니다. 그 죄수는 그 재판관이 수년 전 자기 생명을 구해준 사람인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재판관에게서 나온 말이 그의 모든 탄원을 침묵시켰습니다. "젊은이, 그때는 내가 당신의 구원자였소. 지금 나는 당신의 재판자요. 나는 당신을 교수형에 처할 것을 언도해야만 합니다. .(은혜의진노 예화 뱅크)
어느날 예수 그리스도깨서 배반하는 죄인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그 긴 은혜의 날 동안 나는 구원자였으며 나는 너희를 용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의 심판자이다. 저주받은 자여. 나를 떠나 영원한 불못으로 가라!" 오늘, 하나님은 은혜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일, 그는 진노 가운데 말씀하실 것입니다.
회개하도록 전도하는 요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는 등 회개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이들의 회개는 왕이 조서를 내려 모든 이의 회개를 명령하는 데서 그 극치를 보여 줍니다.
신들의 화신으로 여겨지던 왕의 이러한 태도는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같이 회개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여호와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한 군종 목사님의 간증이 있습니다.
군목 시절 제게는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교육 사령부의 부대장님께서는 아주 명석하신 분으로서 특히 전자과학 분야에서는 그 분을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를 믿을 만한 분인데 믿지 않았습니다. 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신앙을 가지십시오.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하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예배 준비를 하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사령관님이 교회에 나오신다는 전화였습니다. 그 후 그는 주일이 되면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례까지 받게 되어 문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 장군님. 왜 예수를 믿으려고 하십니까." "목사님. 저는 죄인입니다. 죄가 너무 많습니다. 죄를 회개해야겠는데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용서해주실 것 같아서 제가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문답을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는 너무나 기뻐서 교회의 모든 비품을 다 마련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령관님에게 주일날 안내위원으로 봉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 주일이 되자 예배가 시작되기 30분 전에 별을 단 차가 예배당 앞에 선 후 군복에 별과 훈장을 달고 있는 사령관이 성경과 찬송가와 주보를 들고 안내를 하며 서 있었습니다. 사병들이 훈련받다가 예배당에 오자 사령관이 그들의 손을 잡아주며 주보를 나눠 주었습니다. 사병들은 감격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교회가 부흥되기 시작하는데 사령관이 나오니 참모들이 안 나올 수 없었습니다. 장교들 모두가 스스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의자를 계속 늘려가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겸손과 성실로 구원의 열매를 맺어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끼쳤습니다.(구원의 열매 예화뱅크)
요나를 통해서 선포한 말씀 가운데 재앙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회개를 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기로 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사랑과 인애가 인간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작곡가 멘델스존 가문에 전해 내려온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곱사등이었습니다. 한 여자를 짝사랑하였으나 워낙 미녀여서 자기 같은 곱사등의 사랑을 수락할 이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부유한 실업가의 딸이었으므로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이 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 등을 곱사등으로 만든 것은 특별한 것들을 지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허락만 한다면 지금부터 평생 동안 당신의 한숨과 눈물과, 당신의 걱정과 고독과, 당신의 아픔과 가시를 다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대신 짊어지겠다, 책임지겠다는 이 말에 처녀는 몹시 감동되어 몇 달 후에는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십자가에서 아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흘리신 피야말로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표적입니다. 이 하나님의 표적인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요나를 선택해서 부르신 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이야 어떻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요나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그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인간들의 죄악된 모습을 발견하시면서도 그들에게 계속해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재앙을 선포하시지만 회개하고 돌아올 때는 언제나 용서하시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명하심에 순종하며 전도하는 요나 처럼
말씀대로 전하며 전도 하는 요나처럼
회개하도록 전도하는 요나처럼 전도인의 직무를 다합시다.
내 삶의 주인은?
마 12:43-45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내 삶의 주인은?”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내 삶의 주인은?” 저는 명절 때만 되면 지금은 일반목회를 은퇴하시고 경기도 양평에 있는 예영원에서 예수 영성을 실현하고 계신 백남철 목사님 부부를 찾아뵙곤 합니다. 갈 때마다 목사님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곤 하십니다.
“이목사! 목회하면서 너무 힘들어 하지마... 참된 행복이 뭔지 알어?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 이게 진짜야...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인데 도대체 뭔 걱정이야...”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
여러분! 사람들은 집을 지으면서 될 수 있으면 크게 지으려고 하고, 아름답고 생활하기에 편리하도록 지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크고 아름다운 집이 반드시 좋은 집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집과 좋은 집은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아무리 크고 아름답게 지은 집이라 할지라도 그 집에 ‘누가 사느냐?’에 따라서 그 집의 가치는 달라집니다.
왕이 살면 그 집은 궁궐입니다. 그런데 제 아무리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할지라도 그 안에 죄인을 잡아서 가두어 놓았다면 그 집을 우리는 '형무소' 또는 '감옥'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술을 파는 집은 술집이고, 사장님이 살면 사장님 집입니다. 성도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인 곳을 우리는 예배당 즉 교회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그 곳에 누가 주인이고, 누가 사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불려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우리 삶에 주인이 되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우리가 어떤 인생의 집이 되어져 가느냐 하는 것이 결정이 됩니다.
악한 영이 주인이 되어 있으면 우리 인생은 귀신의 집을 지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거룩하고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 자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나는 단지 주인이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십니다.
이 보다 더 짜릿하고 극적인 삶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 내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일들을 날마다 목도하며 사는 삶!’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인생의 앞길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God knows!” 왜냐하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세상 만물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네 인생을 집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집인데, 그 집에 누가 주인인가에 따라서 그의 삶이 180도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3절에서 45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물론 비유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물이 없는 곳으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머물 곳을 구했지만, 머물만한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처음 살고 있던 집으로 다시금 돌아갈 마음을 먹습니다. 그래서 처음 나왔던 집으로 돌아가 보니 집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겁니다. 청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장나고 무너졌던 모든 곳들이 튼튼하게 수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깨끗하게 청소되고 수리된 그 집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겁니다. 귀신이 그걸 보고서 '옳거니, 이게 웬 횡재냐?' 쾌재를 부르면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됩니다.
여러분! 처음 귀신 하나가 살 때보다도 더 악한 귀신 일곱이 같이 살게 되니까, 깨끗하게 청소되고 수리되었던 그 집은 삽시간에 지난번보다 더 더럽고 더 심하게 망가지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비유에서 몇 가지 영적인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인생의 집에 주인의 자리가 비어 있으면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어 있다'는 말은 '한가하다. 무의미하다. 무가치하다. 생명이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이 없는 빈 집은 삶의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고, 도무지 기쁨과 감격이 1도 없는 쓸쓸한 삶을 말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인 없는 빈 집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삶의 주인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삶의 목적도, 가치도, 생명력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오늘도 비어 있는 집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서 주인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여러분! 우리의 대적 마귀가 당연히 어떤 곳을 찾겠습니까? 주인 없는 빈 집을 찾습니다. 주인이 없어 비어 있는 집은 어김없이 사탄 마귀의 표적이요,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귀신이 나간 집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고 잘 수리되어 있지만, 그 집에 주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살지 않고 있는 것이 확인되자 나갔던 귀신은 곧바로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집이 제아무리 깨끗이 청소되어 있다 할지라도 주인이 없으면 그 집은 완전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마는 겁니다. 사탄 마귀의 노리개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똑똑히 목도하고 주의 자녀가 되었던 신앙인들이 왜 그 신앙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서 세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지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들의 마음속이 텅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그 기쁨과 감격은 다 사라진 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과 형식에 치우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가 더 이상 그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탄 마귀의 공격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만 하면 우리는 사탄 마귀의 세력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내가 모시고 산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삶입니까? 날마다 내가 주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무시로 기도하면서 주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생활화! 오직 이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이 제아무리 깨끗이 청소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사탄 마귀는 코웃음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내 힘과 내 능력만으로는 결단코 사탄 마귀를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빈 집은 너무나도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해 놓아도 얼마 가지 못합니다. 우리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인이 없으면 사탄 마귀의 소굴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귀신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귀신에게 주인의 자리를 내어 준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 잘 아시지요?
우리 주위에도 보면 귀신들려서 귀신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5장에서 귀신들린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 3절에서 5절 말씀입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그는 자기 집에서 살지도 못했습니다. 귀신이 그를 공동묘지로 끌고 가서 무덤 사이에서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밤이고 낮이고 귀신이 시키는 대로 온 산을 뛰어다니며 고함을 질러댑니다.
돌로 자기 몸을 상해하는 '자해 행위'도 서슴치 않습니다. 정신도 제 정신이 아닙니다. 몸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귀신이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그러나 힘은 대단히 셉니다. 아무도 그를 이길 장사가 없습니다.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한 가닥 실을 끊어버리듯이 끊어버립니다. 이것이 군대귀신 들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귀신이 우리 인생과 삶에 있어 주인이 되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이렇게 됩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몸이나 자기 마음, 자기 생각을 스스로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주인인 귀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판 가룟 유다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그 마음의 집에 주인으로 있을 때 그는 예수님을 팔려는 더러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서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래서 결국 가룟 유다는 마귀가 시키는 대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먹었습니다. 어찌 제 정신으로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배웠고, 능력과 기적을 직접 체험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은 30이라는 것은 노예 한 사람 몸값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승을 노예 한 사람 몸값으로 팔아먹는 게 도대체 제 정신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귀신의 종노릇했던 배신자 유다의 종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아시지요? 가룟 유다는 나중에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도 귀신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조차 주지 않습니다.
돈을 성소에 던져 넣고는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도록 함으로써 그 영혼을 마침내 지옥으로까지 끌고 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귀신이 주인되어 산 사람의 결말입니다.
귀신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요8:44)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주인이 되면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거짓의 아비인 귀신이 시키는 대로 거짓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귀신은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했습니다.(요8:44) 그래서 귀신이 주인이 되면 사람을 죽이는 일에 도구가 됩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귀신이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 살인자인 귀신의 종노릇하는 사람은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저주하는 것도 귀신이 시키는 것입니다. 예수의 영은 생명을 사랑하는 영이요 생명을 살리는 영인데 반해, 귀신은 생명을 죽이는 영이요 생명을 저주하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귀신에게 자신의 주인 자리를 내어준 사람만큼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모습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무당을 찾아가는 사람도 자신의 인생을 귀신에게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귀신더러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달라고 돈을 주며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귀신이 거처하기 딱 좋은 집으로 마음을 다 고쳐 놓았습니다. 귀신이 거주할 수 있도록 귀신을 위해 마음의 집안이 잘 꾸며져 있는 것입니다.
주방에는 미움과 시기의 그릇들이 가득히 있고, 안방은 불신으로 잘 도배를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허영과 사치의 장롱을 새롭게 마련해 놓고, 정욕과 쾌락의 침대를 들여놓았습니다. 그렇게 좋은 집을 왜 귀신이 빼앗기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집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을 일곱이나 데리고 들어온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꾸만 더 형편은 나빠질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만이 저와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되실 뿐임을 하나님 앞에서 선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그 어떤 존재도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배울 세 번째 교훈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과 삶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주인 없는 빈집으로 놔두어서는 아니 됩니다. 거기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를 마치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비유에 나오는 귀신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 땅에 보내신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주인이십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인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어둠인 세상이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신 주인을 외면했습니다.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1장)
그러나 영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에서 13절 말씀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주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 인생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할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너희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은 "네 빈 집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주인으로 좌정하시면 우리는 그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분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됩니다. 그분 뜻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마음에 가득 품고 그 주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 주님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온전히 주님처럼 되지는 못할지라도 작은 예수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예수의 영인 성령을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영이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십니다. 성령으로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귀신이 머물러 사는 집은 귀신의 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주인 되어 사시는 집은 하나님의 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주인으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인 성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시면 내 삶도 거룩한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뀝니다. 죽음의 자리에 성령이 오시면 생명의 자리가 됩니다. 절망의 자리에 성령이 오시면 희망의 자리로 바뀝니다.
거짓과 미움이 지배하던 자리에 성령이 오시면 진실과 사랑이 풍성한 자리가 됩니다. 불안과 근심의 자리에 성령이 오시면 기쁨과 환희의 자리가 됩니다. 이처럼 성령을 주인으로 모시면 모든 것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삶의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혹여 지금 여러분 마음의 집이 텅텅 비어있지는 않으십니까? 만약 비어 있다면 악한 귀신이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서 속히 예수님을 여러분 삶의 주인으로 모셔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 오시면 여러분의 모든 삶을 성령께서 거하실 아름답고 거룩한 처소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2022년 새해는 여러분의 모든 삶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 주인이 되셔서, 성령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복된 새해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쯤해서 솔직히 한 번 물어보십시다. 여러분 중에 우리 주님께 사기를 당하신 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인생 쫄딱 망하신 분이 있으십니까?
아니지요! 우리가 정반대로 살다가 다 문제가 된 거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속이지 않으십니다. 결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진정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내 삶을 완벽히 인도하신 신실하신 분이실진대 앞으로의 삶도 온전히 인도해 주실 줄 믿고서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가지 더 물어보겠습니다. 집에 들어올 때 대문부터 여십니까? 방문부터 여십니까? 당연히 대문부터 열지요? 대문이 잠겨 있는데 방문부터 여는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 그는 도둑놈입니다. 대문 먼저 열고 들어가야 방문도 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인생이 점점 더 꼬이기만 하십니까? 도무지 잘 될 기미가 보이질 않으십니까? 그렇다고 해서 ‘주님! 이게 뭡니까?’ 주를 원망하지 마시고 내가 먼저 주께 마음 문을 활짝 열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커다란 대문이 닫혀 있는데, 어떻게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들어오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주를 향한 마음 문을 열어야, 우리 주님께서도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혹여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마음 문은 열고 있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있지도 않으면서 '내게 하나님의 크신 복을 달라고... 내 인생도 좀 풀리게 해 달라고...' 애타게 간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을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강요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싫다는 데도 막무가내로 쳐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 삶에 침범해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대신 주님은 문 밖에서 ‘똑똑똑!’ 계속 노크를 하십니다. 그리고는 기다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삶의 문을 열고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온전히 모셔 들이면, 주님은 기꺼이 안으로 들어오셔서 영원토록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면서 크고도 놀라운 일들을 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여러분 마음 문 밖에 서서 노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돌아서시기 전에 어서 속히 여러분의 마음 문을 우리 주님께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런데 여러분?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 구하기만 합니다. ‘주님, 무엇 무엇을 좀 주세요!’라고... 입술로는 나의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주님을 내가 필요한 것을 얻게 해 주는 하수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다 보니 우리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온전히 찾지 않습니다. 대신에 주의 손에 있는 것만 좋아하고, 주께서 행하실 놀라운 기적들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런 모습은 주를 믿는 신자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우리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우리 주님을 지금 도구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후로는 우리가 주님께 내가 원하는 그 무얼 요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물질보다는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물질을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물질의 주관자이신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해 달라고... 오직 바로 그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명예보다 진리이신 우리 주님이 더 필요합니다. 나에게는 건강보다 생명을 주신 우리 주님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건강을 달라고 구하기보다는 오직 생명이신 우리 주님을 모시고 살겠다고... 그러니 제발 나와 함께 살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에게는 돈 보다는 물질의 주관자이신 주님이 더 필요합니다. 나에게는 명예보다는 진리이신 주님이 더 필요합니다. 나에게는 건강보다는 생명을 주신 주님이 더 필요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가 이 찬양을 부르면서 저와 여러분의 확고부동한 신앙고백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기를 원합니다. “내가 주인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다같이 가사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찬양드리겠습니다. (찬양)
“내가 주인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 주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그렇습니다. 여러분? 내 삶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2022년 새해에 마음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마음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후로는 결코 흔들림 없이 내 삶을 주관하고 인도하시는 우리 주님을 진정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서 주님 뜻대로 순종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삶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으로 이 모든 것은 내 주 되신 주께서 하셨노라!" 온 세상에 기쁨으로 간증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집과 성전
마 12:43-45 / 장경동 목사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 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의 것이 아니라’ 사람은 같은데 귀신이 들어오면 귀신의 집이 되고 성령이 들어오면 성령의 전(성전)이 됩니다. 우리가 성전일 때 하나님께서 보실 때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몇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1.귀신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계시고 성령님이 역사 하신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2.인간 안에는 귀신이 들어 올수도 있고 하나님도 내주 할 수 있습니다. 삼상16: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은 우리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보배는 성령님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귀신이 거하는 집입니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까?
3.귀신들린 다양한 집들을 성경 속에서 찾아봅시다.
마8: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군대 귀신들리면 미친 사람이 됩니다.
마12:22 ‘그 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되었습니다.
마11: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귀신들려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막9: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 이다’막9: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귀신이 사람을 죽이려고 물에도 불에도 던집니다. 자기 의지가 자기를 지키지 못할 때 물과 불에 뛰어들게 됩니다.
눅13:11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귀신들려 앓다가 꼬부라져 있습니다.
행5: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더러운 귀신은 사람을 괴롭힙니다. 신경성 이라는 것은 엑스레이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아무런 증상이 없이 아플 때 의학적으로 쓰는 말입니다.
행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귀신들려 점을 칩니다.
4.귀신이 거주하는 집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마귀와 사탄은 귀신의 대장이고 귀신들은 그의 졸개들입니다. 중간의 연락병은 미혹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유익되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고치고 살리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악한 영은 우리를 해롭게 합니다. 괴롭게 하고 아프게 하고 죽게 합니다. 마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13:37-39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 꾼은 천사들이니’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마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귀신이 역사하면 더러움이 생깁니다. 같은 병도 처음 걸렸을 때보다 재발되면 고치기가 더 어렵습니다. 내 마음을 비워지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을 때 즉시 성령을 모셔야 합니다. ‘성령 받으라 성령 받으라 예수 내게 말씀하셔서 할렐루야 성령 받았네 나는 성령 받았네’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행1:4 이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와 연합하기를 원하시고 우리 몸을 성전 삼기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시고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교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던지셨습니다. 우리 몸을 더러운 귀신에게 내어주어 귀신과 연합하며 교제하며 귀신의 집으로 있다가 결국 지옥에 가는 꼴을 주님은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왼편에 있는 자들이 염소요, 가라지요, 어리석은 다섯 처녀요, 한달란트 받은 자요, 성전 되지 못하고 귀신의 집으로 살았을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귀신의 집에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바뀐다고 하는 위대한 역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5.나타나는 증세, 현상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귀신과 그가 사는 집은 더럽습니다. 생각과 언어와 마음과 육체와 삶이 더럽습니다. 여러분은 삶을 깨끗하게 사십시오. 깔끔하게 삽시다. 귀신은 아주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시각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시기를 바랍니다. 귀신은 거짓말 장이입니다. 귀신은 욕심이 많습니다. 귀신은 악령을 집어넣습니다. 반면에,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긍정적이고 창조적입니다. 진실합니다. 욕심 없이 희생적입니다. 선한생각을 확 불어 넣습니다. 갈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생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빈집의 우환
마 12:43-45 / 조용기 목사
<서론>
저는 여러분과 함께 ‘빈집의 우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더러운 귀신에 들려서 고생고생 하다가 어찌어찌하여 그 귀신을 내어 쫓을 수가 있었습니다. 귀신이 쫓겨 나가서 밖에 돌아다니니 괴로워 다닐 수가 없습니다. 사람 몸속에 있을 때는 귀신이 평안한데 사람 몸에서 떠나가면 물 없는 사막으로 다니는 거와 같아서 괴로워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예 사람의 몸을 자기 집으로 삼고 살았기 때문에 자기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 집이 잘 소재되고 수리되고 정돈 되었으나 주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귀신이 밖에 나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충동해서 데리고 떼를 지어 습격하고 들어와서 그 점령하니 그 집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흉악하게 되더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이 세대는 이와 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론>
1. 빈집
여러분 원래부터 빈집이라는 것은 언제나 적막하고 슬픔이 가득한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집이 시골에서 부산으로 모두 이사를 갔습니다. 그때 빨치산의 공격이 하도 심해서 밤마다 안심하고 잘 수가 없습니다. 빨치산이 산에서 내려와서 민가를 습격하고 사람들을 납치해 가고 죽이고 그렇게 하므로 도저히 살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아버님께서 민주인사로써 지목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집은 계속해서 빨치산의 공격을 받아서 된장이니 간장이니 다 훔쳐가고 사람들을 협박하고 해서 동리사람들도 다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이래서 우리 집도 견디다 못해서 모두다 부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만 아래채 집을 지키겠다고 남아 있는데 외로우니까 나만 남겨놓고 갔습니다. 학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화물차가 지나간 바퀴가 눈에 선명히 보이는데 그 바퀴를 보니 눈에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습니다. 집에 돌아오니까 너무나 고독했습니다. 안채에 아홉 형제간들이 떠들썩하게 번잡하게 살았는데 저는 오자마자 제일먼저 어머니가 일하시던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엌이 텅 비었습니다. 세간에 아무런 세간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부엌에 불은 지피지 않았고 더 꺼졌습니다. 적막 합니다. 그 마음에 다가오는 고독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길로 마루를 올라가서 안채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 어머님이 기거하시던 안방도 살림이 다 사라지고 아무도 없고 애들과 왁자지껄하게 살던 건너 방도 가니까 책상도 동생들도 아무도 없습니다. 적막이 가져오는 그 마음속에 슬픔이란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마음속에 버림받은 심정을 너무나 크게 느꼈습니다. 책 보따리를 들고 아래채 할아버지, 할머님이 계시는 방에 들어가서 책 보따리를 놓고 난 다음 ‘나는 버림 받았구나! 부모들이 다 동생들은 데리고 가고 나만 내버려 놓았으니 나는 주어온 자식이구나. 나를 버렸구나!’ 그때 그 절망한 감정이 지금까지 마음에 살아있어 지금도 시골에 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조용한 바닷가에나 산장에 가서 쉬라고 해도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것은 그때 받은 마음에 고독의 충격이 너무나 심했기 때문에 고요한 것 싫어요. 조용한 것 싫어요. 복잡하게 좋아요.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난 다음 혼자 남는다는 것의 슬픔은 경험 안 해보면 모릅니다. 그런 경험을 제가 나이가 많이 들고 또 느꼈어요. 자식들이 커서 해외로 유학을 갔을 때 한두 명이 유학을 떠나고 난 다음에 걔들이 살던 방안에 들어가 보고 마음이 얼마나 쓸쓸한지 모르겠어요. 애들이 쓰던 책상을 손으로 만져보고 책을 만져보고 걔들이 신고 다니던 신발도 만져보고 그렇게 방안에서 인터넷을 보고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던 애들이 없어졌습니다. 방이 적막합니다. 그럴 때 마음에 쓰라린 고독을 또다시 흘리고 느끼고 눈물을 흘린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빈집의 적막이란 언제나 슬픔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울증이나 슬픔이 마음속에 다가와서 자살하는 이유도 마음에 주인이 없고 빈집이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최근에 유명한 탤런트들이 자살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젊은 청춘에 미모를 가지고 앞길이 창창한데 왜 자살하느냐? 외부적으로 볼 때 화려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박수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주인이 없는 빈집의 고독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빈집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명예도 있고, 돈도 있고, 사람들의 칭찬도 있을지 몰라도 인간은 외부적인 환경만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내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자기의 속에 주인이 없는 빈집이 되었을 때 아무리 외부에서 시끌벅적해도 마음의 고독과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주인이 없을 때를 잠1: 27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세계 보건기구(WHO)와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2020년 인류를 괴롭힐 3대 질환 중 하나로 우울증을 꼽았는데, 자살한 사람의 80%가 우울증 환자일 정도로 그 위험성이 치명적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작년 9월 통계청이 발표한 '2005년 사망원인 통계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연간 1만 2천명, 하루에 평균 약 34명이 자살을 하는데 그 34명 자살하는 사람들 중에 70-80%가 우울증으로 말미암아 자살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울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높아지는 이 자살 상황이 정신보건센터에서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성 우울증은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늘어난다고 말했었습니다. 최근 센터의 조사 결과 40대 여성의 약 36%, 50대는 거의 40%, 60대에서는 42%, 70세 이상에서는 거의 절반 이상이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울증이 심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인 것입니다. 더구나 마음에 빈집이 되었을 때 마음이 주인이 없을 때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독함과 버림받은 심정을 견딜 수가 없어서 우울증에 걸려서 자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무도 없거나 사방이 너무 고요하면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을 철학자 스피노자는 '공간공포'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앉아 있어 보십시오. 불안하지요. 더구나 밤에 고요할 때 빈집에 있으면 대단히 마음에 공포심이 있는 것입니다. 빈집은 원래 공포를 가져와요.
저는 어릴 때 학교에 갔다 오면 우리 집은 동리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동네 논,뜰을 지나서 떠나면 산언덕을 지나서 오면 오른쪽에 공동묘지가 있어요. 남부공동묘지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곳에 묻혀 있는데 그 공동묘지 가에는 빈집이 한두 채 있어요. 그곳에서는 상여를 짊어지고 오면 그 상여 따라온 모든 기구를 넣어 놓고 그 사람들이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울굿불굿 한 것을 많이 걸쳐 놓았었습니다. 저는 학교 갔다 오다가 그 빈집 곁을 지나오면 소름이 끼칩니다. 빈집이 그렇게 겁나는 줄 몰랐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은 겁이 안나요. 세상에 빈집을 만나면 소름이 끼치고 그 집 앞에만 오면 뛰기 시작하는데 내 발걸음에 놀래가지고서 한번 뛰면 내 발걸음 소리에 쫓겨서 더 뛰고 목숨을 바치고 뛴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빈집의 우환,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지 몰라요. 여러분 TV 가끔 보시지요? TV에 빈집이 나오는 것 보시지요? 전설의 고향. 언제나 전설의 고향에 보면 산에 안개가 싹 끼어 있는데 빈집에 문짝은 떨어졌는데 그곳에 나그네가 가다가 쉴 곳이 없어 들어가서 방에 찾아가면 어 머리를 늘어뜨린 귀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빈집에는 귀신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빈집에는 언제나 공포심을 가지고 있어요. 오늘날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마음에 주인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빈집들이 길거리에 걸어 다니고 있어요. 시장터에 빈집들이 많이 걸어 다니고 있어요. 빈집들이 길거리에 많이 걸어 다니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겁이 나는 이유는 빈집이 걸어 다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주인이 있는 집이 걸어 다니게 되면 겁이 안 나는데 빈집에서는 무엇이 나올지 모릅니다. 모두다 전설의 고향 같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사람 만나는 것이 겁이 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단돈 1불에 건물 한 동을 드립니다. 그러나 반드시 본인이 들어와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황폐해져 가는 도시를 되살리기 위해서 수년 전 뉴욕시가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광고문인 것입니다. 뉴욕의 일부분의 도시에서 사람들이 다 나가 버리고 빈집이 되니까 단돈 1불을 주고서 들어와서 살아 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파격적인 제안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로 건물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백인들이 살고 있던 곳에 흑인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하자 백인들이 순식간에 그 지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도시는 텅 비게 되고 사람들이 살지 않는 빈 집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사 오는 사람도 없자 부랑자들과 노숙자들이 빈 집을 자신들의 거처로 삼아 생활하며 결국 그 도시는 마약과 범죄가 들끓는 지옥처럼 변하고 만 것입니다. 빈집에는 별도리 없이 부랑자들이나 노숙자들이나 마약중독자들이나 강도들이나 이러한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오는 것입니다. 빈집의 우환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 빈집을 단돈 1달러에 들어와서 전세로 살라고 해도 사람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빈집은 범죄의 온상이 되어 사회와 국가에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2. 일곱 귀신이 거하는 집
그런데 성경에는 빈집으로만 남아 있으면 좋겠는데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빈집에는 그대로 오래 두면은 반드시 일곱 귀신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귀신이 나가서 일곱 귀신을 데려왔다는 것은 일곱이란 온전한 숫자를 말하기 때문에 온갖 귀신을 다 데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워 놓으면 주인이 들어와 있지 아니하면 그곳에 한두 가지 귀신만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 하는 귀신이 들어오는가 하면은 추한 귀신, 악한 귀신, 도둑질하는 귀신, 음란한 귀신, 방탕한 귀신, 술 취하는 귀신, 도박하는 귀신, 살인 귀신 온갖 귀신이 다 들어와서 난장판을 치기 때문에 그 집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황폐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없는 집은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저도 옛날에 동리에 내려가면서 동리에 주인 없는 집을 가끔 보았는데 반드시 동리에 주인 없는 집에 가면 비행청소년들이 그 집에 들러서 그곳에서 몰래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시고, 도박도 하고, 싸움질도 하고 또 빈집에 가면 그 온 동네의 개도 들어와 있고, 고양이도 들어와서 똥을 싸고 빈대 벼룩 온갖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그런 빈집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저는 어릴 때 가끔 그 빈집을 지나오면서 몸서리치던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인이 들어있지 않으면 그 빈집에 오만가지 귀신들이 다 들어오는 것입니다.
롬1:28~32에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보십시오. 오만가지 귀신이 다 들어왔지 않습니까?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오늘날 이 세계에 왜 전쟁과 전쟁소문이 나며 가난과 질병과 고통이 많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을 때는 이 세계는 질서와 평안이 있고 아름답고 귀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주인이 없이 자기가 주인이 되겠다고 태어났는데 사람은 스스로 주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집입니다. 하나님 와서 거하는 집이 되든지, 귀신이 와서 거하는 집이 되든지, 사람은 집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주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인 되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모시고 믿고 의지하고 살지 아니하고 주인을 배반하고 등 돌리고 뛰어 나와서 이 세계가 주인 없는 세계가 되고 난 다음부터 이렇게 큰 혼란이 다가온 것입니다. 주인이 없으니까 마귀와 귀신들이 완전히 날뛰죠. 온갖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 5:19에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인 없으니까 악한 자가 와서 온 세상을 점령했지요. 전쟁과 질병과 가난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렘 6:7에 “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그가 그 악을 드러내니 폭력과 탈취가 거기에서 들리며 질병과 살상이 내 앞에 계속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과 민족,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는 어려움이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주인이 없는 이 세상이 얼마나 가난하지 보십시오.
제프리 D. 삭스가 지은 「빈곤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그는 인류의 1/6인 약 10억 명이 '절대 빈곤'의 사람들이고, 15억 명의 사람들은 '빈곤한 사람들'에 처해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빈곤한 사람들'은 안전한 식수와 제대로 된 화장실 같은 기초적인 편의시설이 없으며 만성적인 재정적 어려움이 일상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절대빈곤의 사람들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말라위는 1인당 하루 소득이 50센트, 1인당 연간 소득이 180달러, 우리 돈으로 약 18만원에 불과할 뿐입니다. 대량 질병과 기근, 기상이변 등으로 기초생활조차 힘이 듭니다. 세계은행의 추산에 따르면 2001년 당시 11억 명이 하루 1.08달러, 우리 돈으로 1000원 정도 수준 이하에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주인 없는 세계는 이처럼 가난과 질병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없는 사회와 국가의 혼란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류 역사는 언제나 전쟁 속에서 시작하고 전쟁으로 계속되고 전쟁으로 끝났었습니다. 가까이 제2차 세계대전을 보십시오. 유럽에 히틀러가 일어나서 유럽 전역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유럽의 문화가 완전히 파괴되고 잿더미가 된 것입니다. 주인이 없는 곳에 악이 들어와서 악한 자가 일곱 귀신을 데리고 날뛰니 그 형편이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아시아도 한가지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일어나서 우리 한국을 강점하고 만주와 중국을 점령하고 온 동남아시아에 살상을 가져오고 고통을 가져오지 않습니까? 오늘날도 정신대에 나갔던 할머니들이 정의를 실천해 달라, 2차 대전은 끝났지만 우리의 생애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그 슬픔을 호소하며 미국 하원에 증언한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주인 없는 세계, 마귀가 주인으로 들어와서 귀신들이 날뛰니 그 참혹한 결과는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공산주의가 일어나서 온 세계에 수억 만 명을 죽였습니다. 공산주의의 해악은 형언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낡은 공산주의 교재에 잡힌 북한과 머리를 맞대고 있으므로 모든 일에 우리는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기도할 때 나라가 임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서 임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나의 가슴에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 국가에 세계에 임하여 주시옵소서. 주인 없는 세상 속에 우리가 더 살 수 없습니다.
암5:10~13에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도다.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주인이 없는 곳에 정의와 인도와 질서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간절히 바라야 될 것은 좋은 주인이 오셔서 우리를 점령하고 우리를 돌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원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좋은 주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2천년 전에 하나님께서 주인 없이 황폐화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참 주인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참 목자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참 주인, 참 목자가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 죄악을 청산하여 마귀와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낸 것입니다. 나쁜 주인이 이 세상을 점령하고 있는데 이를 축출하기 위해서 인간의 죄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나쁜 마귀와 귀신들이 사람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죄에 볼모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 죄 값을 청산하지 않고는 인류를 해방시킬수가 없습니다. 나쁜 마귀와 귀신들을 축출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하나님 앞에서 벌을 받아 몸 찢고 피를 흘려 죄악의 대가를 지불하므로 보혈로 말미암아 마귀를 내어 쫓고 우리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게 된 것입니다.
3. 참 주인이 계신 집
주인이 들어와서 집을 차지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인은 들어오면 집을 잘 소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너진 것을 다 수리하고 정리하고 집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습니까? 언제나 아무리 좋은 집도 세를 줘놓으면 세집에 살다가 세든 사람이 나갈 때 쯤 집에 가면 파벽풍창입니다. 세를 든 사람은 자기 집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집을 잘 돌보지 않습니다. 집이 무너져 가도 돈 들여서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벽이 뚫어져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문짝이 삐뚤어 져도 내버려 놓는 것입니다.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고 나갈 것이므로 수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들어오면 그 집을 잘 소재하고 수리하고 정리하고 아름답게 미화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아무리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파괴 되었을지라도 주인인 주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성령으로 임재 하여 계시면 우리는 완전히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팽개쳐 놓은 집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 살집을 언제나 소재하고 수리하고 정리하고 정돈하고 미화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엡4:22~24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주인이 들어오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소재하고 수리하고 정리하고 미화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의롭게 거룩하게 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돼요.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의롭고 거룩하게 될 수가 없어요.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보면 한 사람이 어느 집에 갔는데 그 집에 먼지가 자욱한데 청소를 한다고 빗자루를 들고 막 먼지를 쓰는데 쓸수록 먼지가 더 나서 온 집에 먼지가 자욱하고 또 쓸면 먼지가 떨어지니 빗자루로 쓰니까 또 공중에 올라가서 돌고 온 집이 먼지도 뽀얗고 벽도 천정도 마루도 안방도 먼지투성이입니다. 빗자루로 열심히 쓸어도 안돼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빗자루로 이렇게 열심히 쓰는데 점점 먼지는 더 공중에 꽉 들어차고 집안이 먼지투성이인데 이것이 무엇입니까?” “아! 이것은 율법주의자를 말한다. 율법이란 것은 아무리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청소하려고 해도 점점 더 먼지가 나고 더러워지고 공기만 나빠지고 율법주의로는 절대로 사람이 깨끗하게 안 된다.” 그 다음 옆방에 가니까 방이 아주 깨끗한데 소재하는 사람을 보니까 물을 쫙 뿌려놓고 난 다음 빗자루로 싹 쓰니까 깨끗하게 청소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으니까 “이 물은 성령의 은혜를 말한다. 성령의 은혜가 와서 빗자루로 쓸어버리면 먼지가 다 날라가 버리고 집이 깨끗하게 된다. 사람이 깨끗하게 되는 것은 율법의 빗자루로 쓸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써 되는 것이다.” 맞았습니다. 여러분 가을이 되어서 나무에 잎사귀를 떨어뜨리려고 장대를 들고 나무를 때려 보세요. 나무 가지만 부러지고 껍데기는 벗겨지고 나무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청소하기가 싫으니까 나무 잎사귀가 한 두 잎 떨어지지 청소하기 싫으니까 한꺼번에 청소하겠다고 나무를 흔들고 장대로 때려도 잎사귀가 다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룻저녁에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불고 난 다음에 아침에 일어나니까 나무가 옷을 벗고 잎사귀가 싹 떨어져서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잎사귀가 다 떨어졌습니까? 비가 오니까 비를 맞으니까 나무에서 잎사귀가 다 떨어진 것입니다. 흔들어도 안 떨어지고 장대로 때려도 안 떨어지는데 비가 오니까 다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으로 흔들고 율법의 장대로 때리고 교훈해도 나무 잎사귀처럼 나쁜 습관과 죄악이 떨어지지 않는데 성령의 단비가 오면 싹 다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않는데 나의 신으로 말미암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를 죄악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가 역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항상 우리와 함께 있으므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들어오시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행복과 보화가 있는 곳으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 주는 것입니다. 주인이 있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주인이 없으면 그렇게 되지 않아요.
고전 2:9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깜짝하는 은혜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도록 우리에게 채워 주시는 것이 주인이 하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엡3:17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인이 계시면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넘쳐 나지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만 빈집 교인이 있어요. 그 빈집 교인은 형식과 의식적으로 교회에 나오지만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빈집 교인인 것입니다. 그런 빈집 교인은 왔다 갔다 하다가 마귀에게 잡혀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교인은 별장교인입니다. 별장은 여러분 1년에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별장입니다. 교회에 크리스마스 때, 부활절 때, 특별한 계절에나 한번 빙긋 들어와 보고 나가는 별장교인, 이 사람들도 빈집 교인인 것입니다. 언제나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 빠져 넘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떠한 사람은 주말 교인이 있는 것입니다. 주말에 한번 씩 찾아가는 주말교인, 주말에 교회에 한번 와보고 그 다음에는 성경과 바이 바이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기도는 한 번도 안하고 성경도 한 번도 안 읽다가 주일 오면 “벌써 주일이냐? 세월이 빠르기도 하다. 아 따 주일이 왜 그렇게 빨리 다가 오냐”그러면서 주말에 한번 왔다가는 이러한 교인도 언제나 마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교인이 진짜 교인이냐. 상주교인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주님께서 마음속에 와서 계시는 주인이 계시는 교인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성령으로 깨끗이 소재해 주시고 우리를 수리해 주시고 정리해 주시고 우리 속에 보화로써 가득하게 채워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좋은 하나님이시라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놓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일을 일으켜 주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로 채워 주시고 거룩함과 성령 충만으로 채워 주시고 치료로 수리해 주시고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채워 주시고 영생복락의 희망으로 넘치게 해주셔서 새로 주인이 있는 집은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넘치는 집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주인을 모시지 않는 집의 우환이란 얼마나 처절한 것입니까? 주인이 있으면 여러분 귀신들이 못 들어옵니다. 지키잖아요. 주인이 집을 지키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치고 혹은 특별히 장치를 해서 도적이 못 들어오도록 주인은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인 되신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밤의 놀램과 낮의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의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사자들을 명하사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인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주인이 우리를 주인의 소유물로 삼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계시면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므로 주님께서 당신의 소유물을 안 돌봐 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성령이 와서 거하시고 천사들을 보내어 우리를 둘러 진쳐주는 것입니다.
요14:16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히1:14에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고 말한 것입니다.
백화점 왕 페니(J.C. Penny)는 시골 침례교회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떠나고 난 다음에 신앙을 멀리했습니다. 많은 시련을 겪어 아내를 둘이나 사별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을 강타한 경제공황은 백화점사업과 자선사업의 선두주자를 꿈꾸던 그의 꿈을 무산시켰습니다. 그는 우울증 치료를 위해 약물에 의지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고 항상 유서를 써서 포켓에 넣어 놓고 다녔습니다. 마음에 주인이 없으니까 마음의 슬픔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언제 죽을지 모르므로 유서를 포켓에 써놓고 다닌 것입니다. 주인 없는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원을 지나다가 복도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과 기도 소리에 이끌려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니 바로 병원 예배실 이었습니다. 거기에 어떤 분이 찬송가 43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그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그 찬송을 듣고 그 옆에 꿇어 앉아 있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 마음속이 서서히 지옥이 물러가고 천국이 다가오는 느낌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혼자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아내를 두 사람이나 사별하고 사업을 망가뜨리고 낭패와 실망을 당하여 절망에 처한 그가 주님께서 지킨다는 그 찬송을 듣고 난 다음에 마음속에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다시 모셔 들이고 어두움이 떠나가고 햇빛이 마음속에 비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기하여 사업에 크게 성공했고 그 후 96살까지 왕성한 사업을 하며 성공적인 인생을 산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주 되신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큰 은혜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찬송 한번 불러 보십시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시91편에 있는 말씀 그대로인 것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주님이 주인이 되시면 우리를 그 날개 아래 병아리를 품는 암탉처럼 우리를 품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함이 없이 안연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인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 모시지 않은 집은 빈집이 되고 빈집을 오래 그대로 두면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난장판을 치고 파벽풍창을 만들고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곱 귀신이 들어온 집은 우환, 질병, 고통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쁨과 평안과 행복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아버지를 섬기며 성령의 은혜 가운데 주인 있는 집이 되는 것이 바로 그 축복인 것입니다. 빈집의 우환을 당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빈집이 되어서 우왕좌왕하고 혹은 빈집에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황폐하게 된 심정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진실한 기쁨과 소망과 사랑을 갖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한 것은 주인이 들어오는 것이고 그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성령의 능력으로 빈집을 소재하고 예수님의 은혜로 수리하고 정리, 정돈해서 보화로 가득채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우리들이 되어야만 할 것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와서 주인으로 집을 점령하든지 그렇지 빈집은 오래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학자 벵겔은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중립은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도 믿지 아니하고 마귀도 섬기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거짓말입니다. 그런 빈집은 오래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찾아 오셔서 주님을 모시면 우리의 생애 속에 새로운 영광이 다가오고 태양이 비취고 소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은 의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는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신에 병든 자는 고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부요하고 축복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천국의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롭게 변화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우리 구주로 모셔 들이고 그리스도를 영광 돌리고 예배 드려야 될 것인 것입니다.
찬송가 324장 우리 다같이 손바닥 치면서 힘차게 부릅시다.
1.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가시관을 쓰셨네 모시어 들이세
우리 죄를 속하려 십자가를 지셨네 받은 고난 크셔라 모시어 들이세
2. 보라 성자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인자 높이 들렸네 모시어 들이세
헛된 교만 버리세 우리 구주 모시고 영원 복락 누리세 모시어 들이세
3. 겸손한자 찾도다. 모시어 들이세 하늘에서 부르네 모시어 들이세
좋은 자리 드리고 주실 은혜 구하세 하늘나라 세우세 모시어 들이세
4. 주여 내가 믿으니 오소서 오소서 주여 환영 하오니 오소서 오소서.
생명 길로 이끄사 슬픔 위로 하시고 진리 알게 하소서 오소서 오소서. 아멘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저에게로 들어가 저와 더불어 먹고 저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4시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을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을 지으시고 여러분을 피로써 값 주고 사주신 참된 주인이요, 마귀와 귀신은 거짓된 도적이요, 마귀와 귀신에게 속아 살지 않게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참주인 되신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우리를 찾아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버림받은 삶을 살고 빈집이 되어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보혈로 우리 죄악을 청산하시고 참 주인으로 오셔서 우리를 소재해 주시고 수리해 주시고 정리, 정돈해 주시고 보화로 채워 주시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참주인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섬기는 기쁨을 우리가 항상 누리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