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2018. 6. 29. 금요일.
날씨 흐리다.
서울에서 수십 년 살았는데도 아직껏 서울생활에는 정착하지 못해서 오늘도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마음은 서해안 시골집으로 가 있는데도 시골에 내려가지 못하게 생겼다.
이주일 전 대구 친정에서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기차로 서울 올라왔다는 며느리는 손녀, 손자 유아원에 데려다주려면 차가 필요하다며 내 차를 가져 갔단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돌려드리겠어요'라고 말했다고 아내는 나한테 말했다.
자동차 없이 기차를 이용하여 내 시골집으로 내려간다는 게 지금에는 무척이나 어렵다.
예전 자가용이 없었을 때에는 버스 타고 역전 나가고, 기차타고 시골 다녀왔지만 그거야 두 다리 성성했을 때의 옛날 이야기이고, 모든 게 부실한 지금은 아니다.
이런 핑계로 아직도 시골에 다녀오지 못하기에 날마다 서울 송파구 아파트 안에서 북박이 장농처럼 지낸다.
늘어나는 것은 짜증이다.
할 일이 없다는 게 무척이나 화가 난다.
고작 컴퓨터 사이버 세계로 들어와 남이 올린 글과 사진을 보나 나한테는 별로이다. 게으른 건달농사꾼한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그렇고 그런 글과 사진만 오르기에.
내가 사는 23층 아파트.
화가 나면 휘익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하도 답답하니까.
송파구 잠실 석촌호수에 걸어나가면 그래도 바람이라도 쐬련만 이곳에서만 40년째 사니 석촌호수 산책로를 걷는 것도 시들하다. 서호에는 노인네들이 바둑과 장기를 두지만 나는 이방인이기에 훈수도 두지 못하고 잠깐 구경하는 체를 하고는 이내 자리를 뜬다.
오늘도 화가 난다.
초여름의 무던운 날씨 탓만은 아닐 게다.
무기력해지는 나에 대한 환멸.
화를 식히려고 아파트 베란다에 나가서 화분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화분에 든 다육식물(염좌)을 중간 크기의 화분에 옮겨 심었다. 분갈이.
삼붕나와(명월초) 줄기 두 개를 잘라서 흙속에 묻었다. 십여 일 뒤에는 새 뿌리가 나와서 새로운 개체가 되겠지.
삼붕나와는 목질의 순을 이따금 잘라주어야만 잎사귀가 달린 부위에서 새 순이 올라온다.
잘라주지 않으면 그냥 목질화되어서 곁가지를 치지 않고 길이가 길게 늘어나는 습성이 있기에 이따금 줄기를 잘라야 하고, 잘라낸 줄기는 다시 흙속에 묻으면 금새 실뿌리가 나와서 새로운 개체가 된다.
상처를 내야만이 더욱 번성하는 식물이다.
지난 6월 8일. 시골에서 서울로 가져온 아스타(야생들국화) 보라꽃 두 개가 피기 시작한다.
어제는 아내가 빈 그릇에 부어둔 쌀뜨물에 오늘은 내가 물을 반쯤 섞어서 화분 이십 개 쯤에 나눠서 부었다.
두 달 전 성남 모란시장에서 사 온 란타나의 잎이 말라비틀어 죽기에 쌀뜨물을 부어주었더니만 금새 잎새에 생기가 나며 싱싱하다.
'만데 빌라' 외국 화초에 꽃송이 하나가 매달렸다.
나팔꽃 모양새로 피며, 붉은 꽃잎이 단조로워서 좋다.
오늘은 23층 고층아파트 실내 베란다에 화분 50개로 화분농사를 지으면서 성깔을 죽인다.
시골 내려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카페 사이버에서 잡글 쓰면서 나를 달래야 했기에.
몇몇 회원의 글이 무척이나 좋기에 댓글도 많이 오른다. 원문과 댓글을 읽으면서 빙그레 웃고.
2.
카페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글을 읽었다.
1960년대 말, 정치학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던 가난한 시골 청년을 떠올린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묘하게 나를 자극한다.
민주주의 앞에 수식어인 '자유' 대신에 다른 용어를 붙이면 나는 금방이라도 1,000개를 붙일 수 있다. 예컨대 한국적민주주의, 한국민주주의, 경제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중진국민주주의, 21세기민주주의 등등.
카페에서 아국 고대사에 관한 글을 읽었다.
1960년 대전으로 전학 가서 학원 다니면서 우리나라 연대표 1,000개를 달달 외웠던 촌아이를 떠올린다.
일본집 2층 마루에 학원을 운영하던 청년 원장이 생각이 난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하는 노래 리듬에 연대표를 넣어서 외웠다. 아마 1,000개쯤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영향일까 국사가 재미있었고, 어떤 이유로 서른아홉 살까지도 국사책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가락이 남았는지 아국 역사에 대해서는 남다르기에 오늘 어떤 고대사에 관한 글에 댓글 다는 체를 했다가...
이제는 다 쓸데 없는 과거이다.
내일은 6월 30일.
내일이면 퇴직한 지가 만 10년이 끝난다. 7월 1일부터는 11년째로 접어들고.
만 10년 전, 퇴직한 즉시로 서해안 시골로 내려가서 아흔 살인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서울을 잊기 시작했다.
엉터리 농사꾼이 되어서 텃밭 세 자리에 과일나무 400그루도 넘게 심고, 화초도 사다가 심었고...
그 어머니가 극도로 쇠약해서 저너머의 세상으로 여행 떠난지도 만 3년이 넘은 지금 시골집은 텅 비었고, 과일나무 조경수들은 제멋대로 웃자란다.
산뽕나무, 억새 등 잡목과 잡초가 주인행세를 하면서 작물을 억누리고 있으며, 낮에는 들고양이가 들락거리고 밤에는 고라니와 멧돼지가 내려오는 곳이 되었다.
마을회관을 깔고 있기에 마을사람들이 뭐라고 구시렁댈 게다. 하늘을 덮어가는 억새가 번지고...
지금쯤 80여 그루의 매실나무에서 매실은 다 떨어졌을까?
열댓 그루의 왕보리수 나무에서는 보리수 다 떨어졌을까?
산뽕나무의 오디는 어찌 되었을까? 밤나무의 수컷냄새, 비린내는 다 졌을 게다.
아름드리 은행나무에서는 풋열매가 바람에 떨어지겠지.
3.
어제는 서울 강동구 길동에 있는 어떤 문학 사무실에 들러서 매달 발간되는 문학지를 받아왔다.
책 말미에 내 잡글도 실려 있기에.
나는 촌사람이라서 촌 이야기 위주로 글감을 고르고 그 글 속에는 늙은 어머니가 늘 들어 있다.
섣달그믐이 생일인 엄니는 열여섯 살에 동네 결혼했고, 스물여섯 살에 남편을 빼았겼고, 딸과 아들 둘을 앞세웠다. 아들조차 대전으로 전학가고... 산골마을에서 머슴 두고 농사 지으면서 한탄하면서 살았던 엄니...
엄니 나이 아흔살 후반에서야 직장에서 퇴직한 아들은 시골 내려가 그때까지도 혼자서 고시랑거리면 살던 호호백발 꼬부랑할머니(엄니)와 몇 년간 함께 산다.
오막살이 집 한 채인 양 마을과는 살짝 떨어진 집.
어린 시절 객지로 떠났던 나...
나도 꽤나 늙어서야 기어들어간 산골마을.
이런 이야기들이 내 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문학지에는 늘 시골이야기가 주로 이어진다.
서해안 내 시골집에 가면 늘 울울하다.
1957년 새로 개축한 함석집은 근동에서 알아주는 큰 집이었으나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제는 낡아서 삵아서 초라한 집이 되었다.
머슴도 사라지고, 그 많던 마을사람도 사라지고, 일가친척도 사라지고, 이제는 외지사람들이 행세를 하고 원주민은 초라하게 밀려났다.
그 작은마을은 또 절단이 났다.
산골마을 동편은 이십여 년 전에 농공단지로 사라지고, 서편은 서해안고속도로가 들어섰고, 최근인 2016년부터는 남쪽 산이 깡그리 사라지고 있었다.
지난 6월 초순에도 폭약으로 바위 터뜨리고, 중장비로 산을 깎기에 흙먼지가 온 사방을 뒤덮는다.
이제는 북편에만 조금 남았다. 뒷산에 금방 오르면 서천군 춘장대해수욕장 부근의 산, 보령시의 무창포해수욕장, 대천해수욕장이 멀리 내려다보이고...
그저께에는 시골 토지보상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직원이 서울로 출장 와서 나한테 도장을 받아가겠다고.
무창포해수욕장으로 가는 지방도로 가운데 산업단지 구간이 확장기에 논이 추가로 또 토지수용된다고.
아무려면 어떠랴 싶다. 자꾸만 줄어드는 고향마을인데...
나도 나이 들어서 이제는 자꾸만 고향을 잊어가고 있는데...
내 자식들은 아비의 고향에서는 전혀 살지는 않을 터.
어제는 대천에서 전화왔다.
큰당숙이다. 어제는 증조부 제삿날.
큰당숙 열 살 무렵에 돌아간 할아버지(나한테는 증조부) 생각이 난다면서 살짝 울먹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바로 직전에 돌아가신 증조부. 일제시대에 마을이장을 하셨기에 마을역사 책(시에서 발간)에는 증조부에 관련한 글과 사진이 몇 군데 나온다.
2016년 토지수용으로 산소 이장하면서 증조부의 유골을 내려다보았다.
여든한 살의 큰당숙은 서울로 올라가기에는 뭐하다면서 서낭당 앞산에 있는 산소에 들러서 절이라도 해야겠다고 덧붙였다.
나는 지난 6월 초에 아내와 함께 산소에 들러서 10여 대의 무덤에 차례 차례로 절을 올리고는 풀을 뽑았다.
아버지 어머니의 합장 무덤 가에서 자라는 둥글레를 조금 파서 옮겨 심었고...
서해안 갯바다를 가리는 솔낭구의 바람소리가 들리고...
아쉽다.
서울에서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
목감기에 걸렸다며 고생하던 아내가 방금 전 잠실새마을 시장 쪽으로 나갔다.
병원에 들러야겠다며.
4.
방금 전 TV '내 고향'에서는 충남 보령시 고대도 섬이 방영된다고 누나가 문자 보냈기에 잠깐 TV를 보았다. 2014년 10월 말에 섬 여행했고, 그 작은 섬에서 일박했다.
우리를 초청한 민박집 할머니가 헤어지기 서운하다며 화분 한 개를 주셨다. 하나 뿐인 '염좌'
그 할머니는 보령아산병원에서 만났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6인 병실에서 정이 들었던 할머니(당시에 아흔 살 쯤).
지금 그 할머니가 살아계실까?
하나 뿐인 염좌(다육식물, 작은 화분)를 내 준 할머니. 그 염좌가 무척이나 굵고 크게 번성했다. 순을 잘라서 여러 개로 새끼를 늘렸다. 남한테 나눠주어야겠다.
언제 기회가 되면 충남 보령시 대천어항에서 배 타고는 그 섬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 비록 그 할머니가 안 계시더라도 그 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따님인 늙은 아주머니가 계실 것 같다.
고대도 섬은 1832년 순조 때 독일인 칼 귀츨라프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곳이다.
'고대도 교회'에서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누나, 아내, 나 셋이서 보낸 시간들이 아름다운 추억거리로 남았다.
2018. 6. 29. 금요일.
마음은 시골에 내려가 있는데... 답답해서 끄적끄적했습니다.
첫댓글 서해안의 텃밭을 가시려면 대중교통수단으로는 많이 힘드시겠어요.
잠실에서 지하철타고
용산에서 장항선 기차타고
또 시외버스를 타셔야되겠네요.
저는 운전면허가 없으니
앞으로의 인생길이 더
힘겨울듯 합니다.
발이 주인잘 못 만나
고생길이 훤합니다.
곰내님이 심심치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댓글 고맙습니다.
베리꽃님
운전면허 따세요. 제 아내도 기계치라서 운전대 잡은 거 아주 서툰데도 용케 면허 땄고, 길치라서 시내에 나가지도 못하는데도 서해안 고속도로는 질주하대요.
운전대를 나한테 전혀 넘기지 않지요. 졸지에 제가 조수가 된 지도 꽤나 오래되었네요.
베리꽃님. 한 번 꼭 도전해서 운전 배우세요. 배우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일 겁니다.
한 번 도전해서 합격하세요.
자동차 2,400만 대 시대에 베리꽃님이 면허증이 없다니...
글 초안 작성 중인데도 댓글 달아주심에 고맙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녀유.
농사꾼이어유.
서해안 촌사람이 훨씬 좋아유.
퇴직하시고 어머니와
단둘이 함께 사신
시골에서의 몇년.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었겠습니다.
지금은 돌보는 이 없어
잡초가 더 많은 엄마의 뜰이 많이도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어서 건강해지셔서
돌보러 가셔야지요.
적어도 엄마나이 만큼은
텃밭을 돌보셔야지요.
예. 맞지요.
열세 살에 엄니와 헤어져서 객지에서 살다가... 환갑을 지난 뒤에서야 엄니하고 살았으니까요.
그 엄니 아흔 살 때... 제 엄니는 서울 올라오지 않으려고 했지요.
당신이 서울 올라가서 살면 고부간 갈등이 생긴다며...
'너 누구편 들래?' 하면서 제게 묻던 엄니의 말에 귀에 생생하네요.
엄니의 말년을 하나뿐인 늙은 아들인 저와 둘이서 몇 년 살았지요.
님이 보는 것처럼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지요.
엄니한테 조금은 빚 갚을 수 있었으니까요.
곰내님 힘내세요 힘든일뒤에는 더 좋은일이 기다린답니다 특히 자살한 생각은 버리세요 고향의 땅에서 농사짓는 보람도 남다르실겁니다 저도 도시사니 농촌이 그리워질적이 많답니다
이따금 그런 생각도 들대요.
왜 사는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서울에는 1960년대 말부터 살기 시작했고, 다시 78년부터 살았지요. 그런데 아직도 정을 못 붙였습니다.
시골 태생이라서 흙냄새가 더 좋은데도 아내가 영 놔주지를 않네요. 혼자 사는 것도..
저.. 그냥 지고 삽니다.
10여대의 조상묘, 산, 밭, 논, 집은 어쩌라고요.
농사는 건달농사이지요. 판매가 아닌 키우는 재미, 관찰하는 재미, 식물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재미.. 수확량이 많으면 남한테 나눠주는 재미...
아마도 나이들어가기에 흙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하나 봅니다.
님의 댓글 고맙습니다.
신 선생님은 농업을 전문하셨기에... 부럽습니다.
살려고 볕쪽으로
고개를 내미는 식물을 보셨죠
나도 왜 사나 생각해보면
이유는 없습니다
자연스런 현상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복지관 다니든지
여행하시든지
카페 모임에 따라다니든지
좋은 대로 사세요
삶이 별건가요
그렇고 그런 것이죠
올려주신 글은
잘 보았어요
댓글 고맙습니다.
살려고 햇볕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트는 식물...
자세히도 관찰했군요.
사람도 그러하겠지요.
저는 조금은 바보처럼 살았네요라는 말이 맞을 겁니다.
'놀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고지직하고, 옹졸하고, 못나고.,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예전 직장 다닐 때에는 그런대로 숱한 사람 틈에서 살았는데 직장 벗어난 지 10년째이다보니 이제는 놀 줄 모르는 늙은이가 되었습니다.
그 좋아하던 여행도 잊고...
님의 조언 정말로 고맙습니다.
나를 반성해야겠습니다.
인생 후반기를 즐기면 되겠지요.
목포지방이니 날씨도 온화할 터. 먹을거리가 풍부한 고장이기도 하고...
무릎이 성성할 때 더 자주 여행 다녀야겠군요.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즐길 수 있겠지요.'
즐기다보면 또 새로운 에너지가 충전되고... 부럽습니다.
화가 나면 휘익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니
꿈찔 합니다..
오래전 일인지라 확실친 않지만
광릉 수목원이 조용하고 괜찮았던 장소로 기억되는데
잠실에서 가깝지 않나요 ?
아이고, 빨리 내려가셔야 겠습니다.
예...
잠실 근처에 사는 며느리가 자기 차는 고장났다며 시아버지인 내 차를 빌려간지도 벌써 2주째.
손녀 손자 유아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온다는 데에는 내가 져야겠지요.
광릉수목원...예전에 구경간 적이 있지요. 직장에서... 이유미 수목원장님이 나무에 관한 책도 여러 권 냈고요.
그 분의 책도 시골집에 있고..
서울이 답답합니다.
시골 농협에서 나눠준 상품권이 내일(6월 30일)까지 써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제 가방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내일이 지나면 휴지에 불과하겠지요.
갯바람, 산바람이라도 쐬야 되는데 오늘은 화가 치밀대요. 말도 못하겠고...
긴 수필 잘! 읽었습니다
어머니 와 사셨던 그때도 효성이
좋앗고 폐쇠된 듯 고층아파트에
서 모습은 좀! 의아한 위험신경
적신호 같았습니다
너무 많은 자부하적 정진 만
원하시는 것이 아닌지요 ?
다 부질없지요 내자신 나 ~
아쉼이 없는 내 생 활이라면
자연괴 함께 하는 자신과
건강이최고에 행복일것
같습니다 ~
댓글 고맙습니다.
서울에서는 무기력해서요. 달팽이껍질에 갇힌 것처럼, 두더지 흙속에 갇힌 것처럼 세상바깥으로 나가지 않았군요.
퇴직한 뒤로는... 시골에 가면 사방이 툭 터졌지요. 낮에는 신나게 일하고, 밤에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흔들리는 나뭇잎에서 작은 풀에서, 꼼지락거리는 벌레한테서, 흙냄새에서... 어떤 행복을 느끼지요. 무엇인가 일했다는 만족을요. 저는 이 세상 모두가 고맙지요.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고, 나를 지탱해주고, 먹을것을 대주고... 그래서 나도 일해서 내가 소비했던 것보다 더 많이 만들어서 다음 세대한테 남겨주었으면 합니다. 빚 갚고, 이자를 내놓은 것처럼요.
예. 제 마음건강에 유의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