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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논검] - 김용
제1부 서독 구양봉편 (전3권)
번역을 마치고
이 작품은 홍콩의 문호 김용의 대하역사소설 《화산논검(華山論劍)》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원저자 김용은 본명이 사량용(査良鏞)으로 1924년 중국 절강성 해령에서 출생했다. 상해에 있는 동오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으며 현재는 홍콩 최대의 일간신문 《명보(明報)》의 주필이자 사장이다. 그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중국 문단의 기인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왔다. 중국 역
사에 정통하고 방대한 유가(儒家)의 경서를 섭렵하고 노장 철학과 불경에 심취하여 학문적 영역을 넓혀 온 그는 이와 같은 해박한 지식을 밑거름으로 빨려 들어가는 문장과 비할 데 없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불후의 명작들을 저술하였다.
그의 작품에 심취하여 그를 존경하는 애독자는 홍콩과 대만은 물론이고 한국과 구미 각국에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고 그 수가 수억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근래 들어 중국 대륙에 휘몰아친 김용의 열풍은 대단하여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는 중이며 등소평 역시 그의 작품을 즐겨 읽는다는 것이다.
김용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나름대로 개성이 있다. 그의 붓끝에서 창조되는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감이 흘러넘친다. 그리하여 독자를 작품 속의 분위기에 끌어들여 몰아의 지경에 이르게 한다. 김용의 작품은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영원불멸의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학문을 '김학(金學)'이라고 부르며 1980년 대만에서 발간
된 '김학연구총서'만 해도 무려 18권이나 된다.
김용은 《녹정기》를 끝으로 절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화산논검》은 《소설 영웅문》의 전편(前篇)으로 최근에 발표되었으며 현재 김용이 집필하고 있는 중인 것을 발표되자마자 긴급 입수하여 번역하였다.
이 작품 《화산논검》은 모두 6부 1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 제5부까지는 서독 구양봉 전기에서 시작하여 동사 황약사, 홍칠공, 단지홍, 왕중양 등 다섯 기인의 일대기를 소설로 그려 내었고, 제6부는 그 다섯 명의 절세 고수들이 화산에서 무예를 겨루는 장엄한 과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하였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 다섯 사람은 《소설 영웅문》에 등장하는 전대의 기인들이다. 《
소설 영웅문》의 주인공인 대협 곽정이 등장하기 이전에 활약했던 다섯 선배 고수들끼리 얽히고설킨 은원관계를 흥미있게 소설로 꾸민 이 작품 《화산논검》이 집필됨으로써 비로소 비로소 《소설 영웅문》은 시작과 끝이 어울려 수미일관(首尾一貫)의 완결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화산논검》의 제1부는 서독 구양봉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구양봉을 중심으로 황약사, 단지홍, 홍칠공, 왕중양의 활약이 그려진다. 제1부는 구양봉이 합마공을 익혀 천하의 고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구양봉의 내면심리를 추적하면서 선악·남녀·정사·생사·애증의 대립을 지양시켜 구양봉을 진정한 대악인으로 잘 표현해 냈다는 점이다. 장을 넘기고 권을
더할수록 김용의 필력이 용트림하는 《화산논검》은 가히 대하역사소설의 압권이다. 신필 김용의 재능에 대해 더 말하는 것부터가 사족이라고 믿으며 감히 일독을 권한다.
1993년 12월
옮긴이
♧ 작가 소개 : 김용(金庸)
수십 년 동안 신필의 칭호를 들어온 김용은 원명이 사량용(査良鏞)으로 중국 절강성 해령에서 1924년 출생하여 동오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으며 젊었을 때는 중국 대륙에서 발간되는 대공보(大公報)의 기자로 일했고 현재는 홍콩 최대의 일간신문 명보(明報) 의 주필 겸 사장으로 있다. 방대한 유가의 경서에 심취하고 노자와 장자의 철학은 물론 불경을 두루 섭렵한 그는 해박한 지식과
신기한 상상력으로 스케일이 웅장하고 이야기 흐름이 양자강처럼 힘찬 명작들을 발표하여 필력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의 작품을 읽은 독자는 이미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어 애독자가 수억에 이른다는 사계의 통계이다.
그의 작품은 독자를 몰아의 경지로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을 뿐 아니라 영원불멸의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그의 작품을 연구한 김학연구총서 가 이미 18권이나 발간되었다.
이 작품 화산논검 은 모두 10부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의 최대 걸작 가운데 하나이며, 구양봉, 황약사, 홍칠공, 단지홍, 왕중양, 양과(후반기), 곽양, 매초풍, 황상 등의 아홉기인들의 활약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한 대하역사소설이다.
화산논검 으로 인하여 비로서 소설 영웅문 은 시작과 끝이 어우러진 수미일관의 미(美)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역자 박영창은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사고 현재 무협소설 작가, 번역가, 평론가로 활동중이다.
역서에는 《동방불패》, 《녹정기》, 《천룡팔부》 등 다수가 있다.
군사쿠데타에 의해 집권한 전두환 시절 《무림파천황(武林破天荒)》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군사정권을 비판했다하여 구속되는 등 커다란 필화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제 무협소설계에서 명실공히 제1인자적 대가(大家)로서 무협소설을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잡게 하는데 진력하고 있다.
<제1장 황약사와 일속>
바쁜 걸음으로 거리를 왕래하는 행인들, 주옥같은 글들이 빛을 뿌리는 청루(靑樓)의 등불들, 그리고 그 불빛 속에서 펄럭이는 치맛자락, 여기저기서 터지는 웃음 소리…….
송나라 효종(孝宗) 말년과 광종(光宗) 초년에는 대륙 일부에 몇 해 동안이나마 평화가 깃들었다.
강북에서는 금의 군대가 이 나라 금수강산을 침략하여 백성들을 처참하게 유린하고 있었으나 이쪽 강남의 풍경은 여전히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청루에서는 여색과 술판으로 밤이 새는 줄 몰랐고 저자에는 보부상(褓負商)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울긋불긋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새긴 들보와 기둥이 늘어선 고대광실에서 흘러나오는 죽현생관(竹弦笙管)의 풍악 소리도 흥겨웠다. 수도 임안(
臨安)은 그야말로 날마다 불야성이었다. 이처럼 주홍빛 대문 안에서는 술과 고기가 썩어 나갔건만 거리에서는 처량한 노랫소리가 애닮게 들려 왔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고종(高宗) 조구(趙構)가 흙투성이 말을 타고 장강을 넘을 때는 그래도 금의 군대를 물리치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 당시 임금과 백성이 일치단결하여 금의 군대를 물리쳤으면 수복이 성사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조정에는 현명한 재상 이강(李綱)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고 변경에는 무장 악비(岳飛)가 있었으니 이 둘 모두 천하에 보기 드문 인재들
이었다. 문(文)에 명재상이 있고 무(武)에는 영장이 있으니, 한결같이 힘을 합해 금을 쳤더라면 잃어버린 금수강산을 되찾았을지도 모르고, 단단했던 이 나라의 강토가 기왓장처럼 깨져 반쪽만 남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간악한 무리들의 농간으로 송은 패하고 깨져서 다시는 원기를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부터 임금들은 대를 이어 가며 풍악을 즐기고 노는 데 취하여 수도 임안
을 아예 향락의 세계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밤마다 불야성이었고, 항상 금성옥진(金聲玉振)의 풍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향락의 세계 임안에서 사람들은 천가(天街)에 모여들고 상인들은 석교(石橋)에서 싸구려를 외치며 고객을 부르고 이따금 술취한 귀족의 공자님들 몇이 꽃 같은 미녀들을 옆구리에 끼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지나가며 풍류 남아의 모양새를 뽐내고 있었다.
여기는 길 옆의 모퉁이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단층집이다.
길을 향해 열린 문 앞의 넓은 마당에는 값이 나갈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딱딱한 나무 걸상 몇 개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사람들의 소매 끝에 닳고 세월과 햇빛에 바래어 반질반질한 탁자 몇 개가 있었다. 탁자들 복판에 작고 네모난 탁자가 하나 또 있었다. 그 위에는 이야기꾼이 흥이 나서 탁자를 탕 칠 때 쓰는 네모난 나무토막이 하나 있었고 탁자 모서리엔 이야기꾼이 목을 축이
는 도자기 주전자와 잔이 놓여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 뜨락에 앉아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정신없이 듣고 있었다. 이야기꾼은 긴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닳고닳은 소매는 해어져서 색이 바래고 실밥까지 드러나 보였다.
이야기에 열이 오른 이야기꾼은 입에 거품을 물고 팔을 휘두르며 격앙된 어조로 떠들어댔고, 앉아서 듣는 청중들 역시 하나같이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야기꾼은 대나무 꼬챙이로 탁자 밑에 있는 갈고(?鼓 ; 양가죽으로 만든 북)를 둥둥둥, 잦은 가락으로 두드리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어 한 곡조 뽑았다.
자고로 충신의 죽음은 슬프도다
짐주( 酒)에 죽지 않으면
싸움터의 피못에 쓰러졌거늘
그 까닭이 임금의 혼용 탓임을
사서(史書)에 남겨
후세 사람이 알게 할지어다.
그리고는 나무 방망이를 탕 치며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양재흥(場再興) 장군은 소상하(小商河)에서 적병 2천을 찔러 죽이고 만호장(萬戶長) 살팔발근(撒八發菫)을 요절내고, 천호장 백호장 1백여 명을 무찌르며 좌충우돌 무인지경처럼 내달으니 금군(金軍) 4만이, 글쎄 3백밖에 안 되는 송군한테 풍비박살나는 판이라! 그런데 이때 그 망할 놈의 화살이 우박처럼 쏟아졌어! 양장군은 몸에 맞은 화살을 쭉쭉 뽑아 뚝뚝 끊어 가며 계속 악전고투 혈전
을 벌였지. 그러다가 그만 말이 수렁에 빠지는 바람에 순국을 하셨으니 이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하지만 소상하에 우뚝 서 있는 화살투성이 양재흥 장군을 보고는 활을 쏘던 금군도 간담이 서늘해져 부들부들 떨었고, 싸움이 끝난 후 금의 통수 김올출(金兀朮)도 군사(軍師)에게 묻기를 '송에 양재흥 같은 사람이 또 얼마나 있소?' 하였으니 그 놈들이 우리 송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우리 악가
군(岳家軍 ; 악비의 군대)을 두려워했는지 알 만했지. 심지어 '산이 요동할지언정 악가군은 어쩔 순가 없다'고 한탄했으니……."
이야기꾼은 갈고를 둥둥둥 울려 댔다. 잦은가락으로 격앙하게 울리는 북소리에 청중들의 가슴에서도 피가 끓었다.
"기막히군! 그 얘기 한번 시원하네."
청중들 속에선 수시로 환호가 터지고 어떤 사람은 걷어부친 팔뚝을 흔들기도 했다.
그즈음엔 이렇듯 사립문 안의 패설야담(稗說野談)이 흥했다. 송의 황제도 무능한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격분을 알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이 모여들어 국사를 의논하면 조정을 비방한다는 누명을 씌워 당장 투옥시켰지만 사립문 안의 야담은 그런대로 방임했다. 황제로서도 민원(民怨)을 없애기는 매우 어려워서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하지 않게만 하면 상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사립문 안의 야담쯤은 내버려두는 것도 무관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까짓 야담으로 조정이 무너지기야 하겠는가?
그런가 하면 송나라 백성들은 울적한 마음을 야담으로나 달래 보려고 이런 장소에 모여들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이야기꾼의 탁자 주위에는 삼교구류(三敎九流) 별의별 사람이 다 모여들었고, 이야기를 듣다가 부지중에 탁자를 탕! 치며 벌떡 일어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끓어오르는 우국지정을 가누지 못해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희한한 일도 자주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막역한 두 친구가 있었는데 하나는 성이 진(秦)씨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악(岳)씨였다. 하루는 그들이 같이 와서 야담을 들었다. 그 날 이야기 제목은 <풍파정(風波亭)>이었다. 이야기 대목이 간신 진회와 근의 여편네 왕씨가 창가에서 귤을 먹으며 악독한 계책을 꾸며 악비를 옥사시키는 데에 이르자, 이야기꾼도 격분한 나머지 목이 다 쉬고 청중들도 주먹을 움켜쥐
며 개탄을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이고!" 하는 비명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돌아보니 세상에, 악씨 성을 가진 친구가 진씨 성 가진 친구의 귀를 물어뜯어 놓은 것이다. 그러고도 분이 가라앉지 않은 악씨는 노기등등해서 진씨를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이 진가 놈아!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놈을 친구로 삼다니. 네 선조가 어떤 놈인지 알았느냐? 오랑캐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 진회야, 진회! 내가 여태 그걸 모르다니. 이제부터 네 놈과는 끝이다. 친구고 뭐고 싹 끊는다, 끊어."
그 바람에 진씨는 자기가 세인들의 질타를 받고 있는 진회라도 되어 버린 듯 말문이 막혀 꺽꺽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청중들도 덩달아 진회를 죽일 놈이라고 욕을 해대는 것이었다.
오늘도 이야기가 고조에 오르니 사람들은 모두 얼굴에 노한 빛을 띠고 주먹들을 움켜쥐더니 양재흥처럼 창칼을 휘두르며 금의 군대와 싸우겠다고 야단들이었다. 죽어도 그렇게 싸우다 죽으면 한이 없다는 것이다.
"흥! 노는 꼴들이 가관이로군!"
바로 그때 청중 중에 있던 한 사람이 그렇게 비웃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차가운 비웃음 소리였다.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며 금의 군대와 이판사판으로 싸우지 못해 이를 갈고 있는 판에 한구석에 앉아 그들을 비웃고 있다니, 청중을 싸잡아서 조소하고 있는 게 아닌가?
"비웃는 놈이 도대체 누구야? 어서 나와!"
누군가가 소리쳤다.
두서넛씩 탁자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에 정신을 팔고 있던 터라 누가 그런 소릴 했는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담이 큰 놈이라도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고 머리를 흔들었다. 도대체 누구를 비웃는단 말인가? 청중들인가, 아니면 영웅 양재흥인가? 양재흥이야말로 소상하 싸움에서 송나라의 위엄을 떨친 당대에 둘도 없는 영웅인데 무엇이 어떻다고 비웃어!
정신이 돈 놈이지, 암.
이윽고 한 사나이가 일어섰다. 빙긋 웃음을 띠고 여러 사람을 돌아보는 그의 눈엔 경멸이 가득했다.
"저 이야기꾼의 이야기가 너무 고약해서 한번 웃어 보았소. 뭐가 잘못되기라도 했소?"
그 사나이는 태연하게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누군가 물었다.
"내가 누구냐고? 내가 누구인지 알려 줄 이유라도 있소?"
사나이는 자기에게 말을 걸어 오는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오만한 기세에 주눅이 들었는지 묻던 사람은 말문이 막혀 입을 열지 못했다.
혈색 좋은 얼굴에 큰 눈과 단정한 입매를 한 스물 안팎의 이 사나이는 이목구비가 청수하고 몸매가 호리호리하여 언뜻 보면 문약한 일개 서생으로 보였다. 손에는 소요선(逍遙扇)이라는 부채를 들고 담자색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옷자락에 놓인 수는 정교한 솜씨로 보아 그 유명한 소주(蘇州)의 수인 듯싶었다.
'미남인데!'
청중들은 그의 깔끔하고 수려한 외모에 내심 경탄하면서도 시기심과 혐오감을 느꼈다.
"우리 송나라의 양재흥이 금나라 오랑캐를 족친 영웅적인 업적이 어떻다고 비웃는 거요?"
누군가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일이야 훌륭한 일이고 말고 좋아 듣기는 좋지만, 당신들이 양재흥을 한번 보기나 하고들 이러시오? 송나라 일은 고종 황제께서 흙투성이 발로 장강을 넘어온 뒤로 송나라엔 칭송할 일이 없어졌소이다. 그런데 야담패설로 밥을 먹고 사는 분들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와서 대송(大宋)이 어쩌구저쩌구 하는지 통 알 수가 없단 말이오."
그 말에 덩치가 커다란 사나이가 일어서더니 큰소리로 떠들었다.
"이거 화가 나서 어디 살 수가 있나!"
"화가 나다니?"
"우리 송나라엔 우러러 모실 영웅이 천지이고 어진 인재, 용맹한 장수 또한 많고 많다. 나라 위해 싸움터에서 목숨 바친 사람, 과거 시험에서 연이어 장원 급제한 사람, 주옥 같은 글을 써낸 일류 문장가들이 너무 많아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인데, 뭐? 칭송할 일이 없다구?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커다란 사나이는 화난 듯 대들었다. 그가 뻗은 네 손가락의 길이와 굵기가 서로 비슷하여 무공(武功)을 아는 사람들은 첫눈에 그가 철사장(鐵砂掌) 같은 무공을 익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청중들은 그 커다란 사나이의 말이 옳다고 떠들며 수려한 젊은이를 잡아먹을 듯이 둘러쌌다.
처음에 이야기꾼은 그 젊은 서생의 말이 괘씸하고 분하여 청중 모두가 달려들어 동네북 치듯 주먹으로 그를 패주었으면 했으나, 막상 사람들이 노기등등하자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까봐 겁부터 더럭 났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말렸다.
"이 공자님의 말씀도 과히 그른 데는 없지요. 우리 송나라가 사실 한심하기도 하잖소. 그러니 공자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밖에요."
이야기꾼은 사람들의 노기를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데, 그게 철사장을 익힌 사나이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너 이 놈, 황제께서 계시는 궁전을 옆에 두고 어디 감히 무엄한 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사나이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혀가 굳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 인간이 궁을 지키는 신용위(神勇衛)쯤 되는가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런 위엄을 부릴 수가 있는가?
그래서 모두들 말은 못하고 숨만 내쉬는데, 소란을 일으킨 서생은 두려움 하나 없는 얼굴에 냉소를 흘리면서 한마디 던졌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커다란 사나이는 묻기를 기다리기나 한 듯이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내가 누군고 하니, 바로 궁내 대도시위(待刀侍衛)로 있는 철장(鐵掌) 수평(隋平)이시다. 이제 알겠느냐?"
그는 자기 신분을 떠벌리며 문약한 일개 서생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거들먹거렸다.
"그런데 네 놈은 도대체 누구냐?"
수평의 물음에 서생은 호탕하게 한번 웃고는 대답했다.
"나는 이름 없는 백성이니 이름을 대도 알지 못할 텐데?"
"물론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야 내가 모를 수가 있나. 이 경성 바닥에서 위로는 왕공 귀족으로부터 아래로는 무림호걸(武林毫桀)에 이르기까지 내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네 놈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거 용케도 아는군. 그렇소, 난 경성 사람이 아니오. 외지에서 왔소."
젊은 서생은 커다란 사나이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수평은 외지에서 왔다는 그의 말에 한결 위세를 뽐냈다. 경성 사람이라면 혹시 그의 친척이나 외척들 중에 권세 있는 자가 있을까 걱정되기도 하겠지만 촌놈이라면 조금도 두려울 게 없었다. 커다란 사나이 수평은 또 한 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허허……. 좋다, 어서 네 이름이나 여쭈어라. 한번 들어 보자."
"내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오? 그저 동해(東海)에 있는 도화도(桃花島) 사람인 줄이나 아시오."
젊은 서생의 대답에 수평은 이 녀석이 동해 사람이라는 것까지 이실직고하는 걸 보니 분명 겁을 좀 먹은 모양이라고 여겼다.
'이 녀석이야말로 객사를 당해도 묻어 줄 사람 하나 없는 놈이로군. 녀석을 감옥에 처넣어 피마대효형(披麻戴孝形)으로 죽여 버린들 녀석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상소장 올릴 놈조차 경성엔 없을 터……. 이번에 이 나으리가 상 한번 톡톡히 타게 되겠구나. 재수가 좋으면 엎어져도 떡판에 엎어진다더니.'
"이봐, 네 이름을 어서 대라. 이름이 도대체 뭐냐?"
젊은 서생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황약사(黃藥師)라 하오."
궁전의 금의위(錦衣衛)인 수평은 그 이름이 꽤나 신기하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뭐라구? 약사? 네까짓 게 약사야? 보기엔 선비 티나 내는 놈이 그래, 약사라고? 네가 정말 고약이나 팔고 병을 고쳐 주는 돌팔이 의생이란 말이냐."
이름만 듣고 사람을 가늠하는 이 궁내 대도시위 수평은 사람을 잘못 보아도 대단히 잘못 보았다. 동해 도화도의 무공은 강호(江湖)에서 독자적인 파가 되어 전진교(全眞敎)의 새로운 교주인 왕중양(王重陽)과, 운남 지역을 쥐고 흔드는 대리(大理 ; 지금의 운남성 곤명)의 단씨(段氏)와 더불어 그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수평은 천하에 황약사 같은 고수가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황약사를 침통이나 흔들고 다니는 의생으로 알고 조소하고 있으니 아마도 제 명에 죽기가 싫은 모양이었다.
수평의 조롱을 들은 황약사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그는 얼굴에 싸늘한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
"그래, 내 이름이 돌팔이 의생 같다고 합시다. 돌팔이 의생이면 어쨌다는 거요? 의생이 여기서 야담 좀 듣는 것이 관아의 법에 걸리기라도 한단 말이오?"
황약사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러나 눈치가 더딘 수평은 황약사가 대단히 하가 난 것도 모르고 더욱더 위풍을 떨었다.
"이 약사 놈아, 그렇다면 잠자코 앉아 야담이나 들을 일이지 건방지게 뭘 비웃어?"
이때 황약사가 몇 마디 구실을 대어 얼렁뚱땅 넘겨 버렸다면 수평도 더 이상 트집 잡지 않고 그만두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황약사가 어떤 사람인가? 그가 한낱 궁내 대도시위에게 겁을 집어먹을 사람인가? 황약사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도대체 눈꼴이 사나워서 그렇소이다. 우리 송나라 사람들이 어째 모두 거세한 환관이나 계집들처럼 변했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우리의 금수강산을 금나라에 바치고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속편히 앉아 야담이나 듣고 있으니 이런 한심한 일이 어디 있소? 선조들이 금군과 싸우던 이야기는 흥이 나서 잘하면서 왜 장방창(張邦昌)이 금을 도와 우리 나라를 망하게 한 이야기는 못하오? 송의
두 황제가 금에 잡혀간 이야기는 왜 못하오? 진회, 나여(羅汝), 집만이(輯萬俟) 같은 작자들 일은 왜 말 못하오? 수백만 인구를 가진 송이 해마다 금의 오랑캐에게 금은 보석을 공납하면서 신하를 자칭하고 남의 아황제(兒皇帝)질이나 하는 수치스려운 일은 왜 말 못하오? 이런 일들은 입 밖에도 내지 못하면서 케케묵은 옛일이나 이야기하고 있으니 어디 들을 맛이 있소?"
그 말에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황약사의 말이 끝나자 수평은 어이없다는 듯이 껄껄 웃어제치더니 천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네 이 놈! 잘난 체하지 마라! 네 놈이 궁궐 뇌옥의 원귀가 되고 싶은 게로구나!"
그러면서 수평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모두들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니, 수평이 내리친 곳이 움푹 꺼졌는데 그 색깔이 불에 탄 듯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 바람에 사람들이 질겁한 것은 물론이고 무공을 좀 아는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저 탁자가 꺼져 들어간 것 좀 봐. 수평의 무술이 여간내기가 아닌걸. 저 손바닥이 젊은 서생의 몸에 떨어지면 아까운 목숨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지!'
하지만 황약사는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이, 마치 그의 무예가 범상치 않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처럼 수평을 덤덤히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까맣게 타들어간 탁자를 슬슬 만지면서 수평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이 나으리께선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군. 왜 죄 없는 탁자에다 공연한 행패를 부리나?"
그런데 황약사가 슬슬 문지르는 사이에 탁자는 어느새 꺼져 들어갔던 자리가 다시 평평하게 돋아 올라오고 있지 않는가.
"어이쿠! 저 봐, 저 탁자 좀 보라구!"
누군가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탁자는 수평의 손바닥에 맞아 꺼져 들어갔던 자리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원래 모양대로 평평해져 있었다. 황약사가 솜씨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수평이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자였다면 황약사가 보인 이 솜씨가 상승(上乘)의 내공(內功)이며 현묘한 장법(掌法)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냉큼 뺑소니쳤을 것이다. 그랬으면 그 많은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수평은 그런 인간이 못 되었다. 궁궐 안에서 위세 부리며 호의호식만 하던 이 자는 걷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이치를 몰랐던 것이다. 그는 황
약사가 그런 솜씨를 보이자 금방 대노하여 부르짖었다.
"이 놈, 네 놈이 감히 나에게 도전하는 거냐?"
교만과 횡포가 몸에 밴 수평은 노기 충천하여 다짜고짜 손바닥으로 황약사를 내리쳤다. 그래도 황약사는 그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수평은 단매에 황약사를 쳐죽이고 싶었지만 야담 장소에서 살인이 나면 어지간히 시끄러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을 혼찌검이나 좀 내주고 명줄기는 놔두기로 하고 6, 7분의 역도(力道)만 손바닥에 넣었는데, 그 힘만도 워낙 엄청나서 주위 사람들 얼굴이 다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옆 사람들은 부지중에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피해 버리고 싸움
을 말릴 엄두도 못 내었다.
수평의 무공도 보통은 아니었다. 철사장법의 정수를 터득하여 그 동작이 대단히 영민하고 변화 역시 교묘했다. 누군가 이 무공을 알고 있는지 자기도 모르게 "사람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수평은 더욱 콧대가 높아졌다. 오늘 사람들이 철장 수평의 솜씨를 보았으니 내일이면 온 경성 바닥에 소문이 뜨르르할 것이다. 이 황약사란 녀석을 혼내는 것은 녀석이 감히 황제에게 불손한 말을 던지고 조정을 비방한 탓이니, 싸움에 명분이 서고 자신도 위풍이 서는 일 아닌가. 수평은 더욱 득의양양해서 다시 한 번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황약사를 단번에 쳐죽일 듯 내리치는 그 일
장은 흉맹하기 짝이 없었다.
황약사는 수평과 맞서지 않고 좌우로 피하기만 했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동해에서 온 저 도화도 사람이 필시 횡액을 당하고 말지. 수평의 손에 목숨을 빼앗기지 않더라도 적어도 중상은 입을 텐데 이걸 어떡하지. 아무래도 수평이란 자가 황약사를 그냥 놔주지는 않을텐데…….'
수평은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위풍을 떨쳐 볼 생각으로 연달아 큰 소리를 지르며 황약사에게 맹공을 가했다. 황약사는 마당 구석까지 물러나서 이제는 더 물러설 자리조차 없게 되었다. 원체 넓지 않은 집안에 둘러서 있는 구경꾼까지 많아서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이다. 그러자 황약사는 수평을 보고 갑자기 히죽 웃었다.
"이젠 화를 좀 삭일 때가 되었지 않느냐? 네가 여태까지 지랄발광을 했지만 난 손 한 번 쓰지 않고 피하기만 했으니 그만하면 화풀이는 했을 것 아니냐? 더 이상 재롱 떨지 마라. 난 이만 가 볼테니."
황약사의 입에서 이죽거리는 말이 나오자 듣고 있던 사람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이 황약사의 무공이 수평을 앞선다는 것을 그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수평이 철사장으로 그토록 야단했어도 여지껏 황약사의 옷깃 한 번 스치지 못한 것이다. 김 안 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더니 정말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던 것이다. 수평에게도 그것은 분
명 자기를 비웃는 웃음이었다. 여태껏 우쭐거리며 덤벼들었어도 황약사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으니, 솜씨를 뽐내기는커녕 황약사의 발꿈치에도 못 미친다고 남들이 웃고 있는 것 아닌가? 평소 백성들을 업신여기고 멋대로 세력을 휘두르는 수평에게 임안성 백성들은 내심 응어리가 맺혀 있었다. 그런 그가 조롱당하는 꼴을 보자 모두들 삼복염천에 얼음을 삼킨 듯 속이 시원해졌고, 그래
서 쾌재의 웃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그들은 황약사가 수평을 혼찌검 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때 퍽! 하고 주먹으로 바가지를 부수는 소리가 났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황약사가 수평에게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그 순간 수평의 얼굴이 새까맣게 질렸다.
"윽!"
수평은 가슴이 콱 막히면서 목구멍에서 비릿한 것이 올라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시뻘건 핏덩이가 왈칵 쏟아질 판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황약사를 바라보는 수평의 눈빛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 녀석의 무공이 이렇듯 고강하다니! 도대체 어느 문파의 전인(傳人)이란 말인가? 동해 도화도가 도대체 어디에…….'
입안에 찬 피를 가까스로 삼킨 수평은 맥빠진 목소리로 몇 마디 뱉었다.
"귀하의 무공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절륜하여 나는……."
그러다가 수평은 울컥 피를 토하고 말았다. 시뻘건 피를 연이어 토하는 수평을 보자 사람들은 그가 아주 중한 내상을 입었다고 놀라워했다.
'동해 도화도에서 온 이 젊은 서생은 틀림없이 세상 밖에서 온 사람인 게야. 손 한 번 쓰지 않고 수평의 철사장을 요리조리 피하는 재간도 그렇고, 손길 한 번 번뜩 날리니 저 유명한 대도시위가 피를 토하잖아. 두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누가 이 일을 곧이들을까?'
사람들은 내심 경탄했다.
이제 여기 더 있어 봐야 이로울 게 없다고 생각한 수평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빠져 나갔다. 사람들도 중상을 입은 그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런데 수평이 문 어귀까지 갔을 때 황약사가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게 섰거라!"
수평이 흠칫하여 멈춰 서니 노여움이 삭지 않은 황약사가 언성을 높여 물었다.
"어서 말 못하겠느냐? 대송(大宋) 사람이 바보나, 아니냐?"
수평은 황약사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황약사는 그를 향하여 한 발자국 성큼 내디디며 호통쳤다.
"어리석은 황제에게 빌붙어 약한 백성을 괴롭히는 나쁜 놈! 네 놈을 일 장에 쳐죽이고 말 테다."
그가 손을 번쩍 치켜 드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들었다.
"나무아미타불! 수평 대도시위께서 돌아가시겠다니 황 시주(施主)께서는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한 번 실수는 석가모니도 하신다는데 속세의 범인이야 더 말할 게 있습니까?"
이런 싸움판에 나서서 참견한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었다. 뛰어난 무공이 없으면 누가 감히 이 싸움판에 끼여들겠는가? 사람들이 바라보니 그 말을 한 사람은 뜻밖에도 젊은 중이었다. 불그레한 얼굴이 번듯하고 준수하게 생겼는데, 얼핏 보면 용맹이 있어 보이지만 그래도 극히 평온한 표정이 속세를 초탈한 고승의 자태가 분명했다.
황약사도 첫눈에 이 중이 범속하지 않다는 걸 알아보고 싸늘하게 웃었다.
"고승께서 제게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그 당시만 해도 동해 도화도의 무공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황약사같이 젊은 무림대종사(武林大宗師)가 무림 중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더구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전진교의 젊은 진인(眞人) 왕중양과 대리의 단씨 집안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왕중양은 무공 못지않게 명성도 대단했다.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금의 공격에 반격했으나 애석하게도 하늘이 그 뜻을 돕지
않아 성사를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강호에 나서지 않고 종남산(終南山)에서 전진교만을 꾸려 가고 있었다.
대리의 단씨 세가는 몇 대를 내려오면서 부유한 대리국(大理國)을 건설한 황족들인데, 그들의 무공이 강호에서 하나의 파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일양지공(一陽指功)은 천하에 둘도 없는 일파절학(一派絶學)이었다.
이외에 서역(西城)의 백타산(白陀山)에도 독특한 무공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들의 무공은 비정비사(非正非邪), 역정역사(亦正亦邪)로 신묘하고 강력하기가 대리의 단씨나 전진교의 왕중양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승은 동해에 도화도라는 섬이 있는 줄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강호의 사람들이 이 동해 도화도를 모두 알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지요. 그것은 물론 도화도에 황약사라는 시주님이 계시는 까닭이구요."
스님이 웃으며 하는 말에 여러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황약사가 수평을 불러 세워 단매에 쳐죽이려는 판인데 이 중은 도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걸까? 수평을 도와 황약사를 잡으려면 잔말 말고 자웅을 겨루어 볼 일이지, 무슨 말이 저리 많은가? 황약사의 무공에 겁을 먹은 건가, 아니면 남의 비위나 맞춰 주고 밥벌이 하는 자인가?
그런데 뜻밖에도 중의 말을 들은 황약사는 얼굴에 희색을 띄우더니 공손한 태도로 중에게 읍까지 하는 게 아닌가?
"말씀 고맙습니다. 황약사 인사 올립니다."
그러자 중도 공손한 자세로 얼른 답례하고는 웃었다.
"소승의 말은 허례허식이 아니라 진정이오니, 도주(島主)께서는 부디 자중하시고 보통 사람과 견식을 달리하십시오."
그 말에 황약사가 대뜸 불쾌한 빛을 띠었다.
"대사께서는 소생이 세상에서 두 가지 일을 제일 싫어한다는 걸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황약사가 코웃음을 치며 하는 말에 중은 다시 한 번 공손하게 읍을 했다.
"귀담아들어 보겠습니다."
황약사는 싸늘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소생은 평생 도화도라는 섬에서만 살아 견식이 없지만 두 가지 인종을 제일 미워하지요. 하나는 가식 많은 글쟁이들입니다. 이자들은 말은 번지르르하나 공명과 녹봉을 탐내 앞을 다투어 관아에 빌붙고 아첨하며 양심을 팔아먹지요. 소생은 이런 인종을 평생 미워하기에, 만나는 족족 죽여 버려 다시는 그런 자들이 사모관대를 뽐내면서 성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리라 결심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인종은 가짜 도학을 떠벌리는 위군자들인데 그들 모두 오입쟁이들 아니면 도적 놈들이면서도 겉으로는 점잔을 빼고, 모두가 악한들이면서도 겉으로는 양순한 체하고 다니니, 공자왈 맹자왈이나 외우면서 사람들을 홀려먹는 그런 개종자들을 보면 속에서 방망이가 치밀어 견디지를 못합니다. 몇백 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따위 이학(理學)쟁이들을 눈으로 보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이런 때 태어나 원수 같아도 보아야 하니 속이 뒤집혀 살 수가 있어야지요. 그저 보는 족족 단매에 쳐죽여 몽땅 꺼져 버리게 했으면 속이 개운하겠습니다."
그 말에 중은 껄껄 웃었다.
"도주의 성미가 시원시원하여 좋습니다. 하지만 도주의 말씀대로라면 함부로 살인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따위 인간들은 죽여 없애야지요. 그런 인간들을 다 죽이지 못하는 것이 소생의 큰 한입니다."
"나무아미타불. 황 시주께선 도대체 어찌하여 여기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그거야 명백하지요. 안팎이 다르고 공로에 눈이 먼 궁내 대도시위 같은 자는 살려 둘 수가 없다 이 말이지요."
그 말에 구경꾼들은 일제히 술렁거렸다. 황약사가 수평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야 백 번 고소한 일이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죽인다면 큰일이었다. 황약사가 타관 사람인데다가 눈꼴사나운 관리 나부랭이에게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 불쌍해서 그를 동정하던 사람들은, 그가 수평을 기어코 죽여 버리려 하자 생각들이 달라졌다.
'괘씸하군. 대도시위를 죽여 버리려면 얼른 죽여 버릴 것이지 공연히 다른 사람까지 걸고 들어갈 게 뭔가? 이학이 어떻다는 거야? 이학이란 당대의 대학문이니 사람마다 정성들여 배워야 할 바이고, 이학을 배워야 부부자자(父父予子) 군군신신(君君臣臣)을 아는데, 동해의 몽매한 일개 백성이 이 천하 제일의 학문을 도대체 뭘로 알고 헐뜯는가 말이다.'
그러나 중은 이 모든 것에 개의치 않고 또 한 번 허허 웃고 말했다.
"내 얼굴을 봐서라도 저 사람을 한 번 용서해 주십시오."
황약사는 별로 시답지 않게 대꾸했다.
"화상(和尙)께서 소생의 성풀이를 좀 해주시겠다면 그럴 수도 있지요."
화상과 무공을 겨루어 보자는 말이었다.
황약사는 이 중의 무예가 보통이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긴장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자, 받으시오."
그러면서 황약사는 낮은 소리로 시를 읊었다.
도화꽃이 떨어지니
신검(神劍)이 날고
백해의 조수가 밀려드니
옥소 소리 구성지네.
무슨 시 구절을 읊는 것 같았지만 황약사는 도화도에 있는 자기 집 문 앞에 써붙인 주련(柱聯)을 읊은 것이었다. 순간, 황약사는 오른손을 들어 엄지손가락과 식지를 오무려 원을 만들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약간 펴 보였다. 그러자 황약사의 손은 한 떨기 난초처럼 보였는데 그 자태가 대단히 미묘했다.
황약사의 '난화불혈수(蘭淹佛穴手)'였다. 이는 황약사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절기(絶技)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그저 꽃을 접는 천수관음의 형상 같아 피식 웃기만 했을 뿐이지 황약사의 불혈공(佛穴功)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중은 황약사가 손을 쓰자 깜짝 놀라 번개처럼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는 어이쿠 소리를 지르고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시주께선 천하의 절학 72식(七十二式) 불지점화(佛指拈花)를 쓰고 계신 게 아니오?"
신명이 난 황약사는 대답도 없이 한바탕 솜씨부터 보였다.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한 그 동작들은 신묘하기 그지없었다.
"대사께서는 우리 도화도에 '난화불혈수'라는 절학의 무공이 있는 줄은 모르시는가 보군요."
그러면서 그는 잠시도 손을 멈추지 않고 중에게 덤벼들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황약사와 중의 무술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황약사의 재촉에 하는 수 없이 솜씨를 보이기 시작한 중은 손가락 하나를 슬며시 뻗쳐 들었다. 그런데 중의 흰 손가락이 척 가리키기만 하면 황약사의 '난화불혈수'는 단단한 금속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흠칫 멎곤 하여 도무지 제대로 재주를 부릴 수가 없었다. 황약사는 잠깐 중을 바라보다가 너털웃음을 터뜨
렸다.
"대사님의 고강한 무예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대사님은 단씨네 일가시군요. 이거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입으로는 죄송하다고 하지만 그의 안색에는 그런 빛이 조금도 없었다.
"오늘 소생은 단씨네 일양지(一陽指)를 보고 견문을 넓혔습니다."
황약사의 말에 화상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소승은 일찍부터 동해 도화도에 뛰어난 무예가 있다는 말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배를 부릴 줄 몰라 가지 못하여 도주와 사귈 인연을 못 가져 매우 유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임안에서 존안을 뵈니 이것 역시 소승의 복인가 합니다."
황약사는 웃으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승과 다시 한 번 겨루어 보시겠소?"
"대사께서 원하신다면 그러지요."
황약사는 선뜻 대답했다.
사람들이 보니 중은 용맹하게 생겼으나 실은 점잖은 편이었고, 황약사는 문약한 선비 같았으나 오히려 예의가 부족한 편이었다. 이번엔 화상이 기어코 결판을 보자고 하는 양이 아무래도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다고 구경꾼들은 생각했다.
둘은 탁자를 가운데에 놓고 서로 마주앉았다. 그리고는 친구들끼리 다정한 이야기나 나누듯이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이번에도 황약사가 먼저 손을 쓰는데 역시 그 72식 난화불혈수였다. 그 솜씨가 얼마나 기묘한지 구경꾼들은 절로 찬탄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손이기에 저렇듯 뱅뱅 돌며 미인의 팔처럼 온갖 자태를 다 부리는 걸까? 그러자 상대편 역시 손가락을 슬그머니 움직였다. 그는 그 손가락 하나로 황약사를 겨냥하여 찔러 왔다. 둘의 손은 서로 찌르고 막으며 수많은 모양을 만들어 내는데, 살
기는 하나도 없고 아름다운 자태가 번뜩여 사람들을 반하게 만들었다. 구경꾼들은 넋을 잃고 멍하니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둘이서 결사적으로 무술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손가락 장단을 하고 있다는 편이 더 적절할 성싶었다. 한 사람은 미인의 손가락처럼 희고 뾰족하여 보기 좋았고 한 사람은 동작이 다소 굼뜬 듯했으나 그 변화가 무궁무진했다. 한 동작이 끝나면 순식간에 다른 동작
으로 변하는데 손가락의 오고 감과 변화함이 마치 두 마리 용이 엇갈려 날고 두 개의 화살이 서로 마주 나는 듯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여러 가지 동작이 지나갔다.
황약사의 안색이 점점 더 침중해지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리 단씨의 일양지공은 과연……."
그러자 중은 몸을 일으키며 호방하게 웃었다.
"황 도주님, 천하의 무림이 이젠 동해에 도화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거요. 그리고 악을 원수같이 미워하는 도화도 도주 황약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만 합시다."
둘은 또 한 번 크게 웃으며 서로 허리를 굽혀 읍했다.
"외람된 물음인지 모르겠으나 대사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오?"
황약사가 물었다.
"존함이랄 게 있습니까? 소승은 대리에서 온 중이 확실하며, 일속(-俗)이 바로 소승의 이름이올시다."
중이 읍하며 대답하는 말에 황약사는 미소를 짓더니 좀 느린 어조로 읊었다.
"불가의 일은 몇천 가지이고 그 변화도 몇만 가지이지만 나는 오직 일속(一俗)이로다."
그 사이에 수평은 언제 뺑소니쳤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호방한 웃음을 터뜨리며 구경꾼들 사이를 빠져 나와 거리로 나섰다.
첫댓글 ``@-@`` 잘보고갑니다,,감사~~
감사합니다.
^^
기대됌니다.
잘보구 갑니다,,.
장미님의 노고에 감사인사드립니다 ...
잘보고 갑니다 .......좋은밤 되세요 ...ㅎ
우연한 만남이로군
즐ㄹ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기대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잘보고 갑니다!좋은날 되세요
기대하며 시작.....즐감^*^
잘보고갑니다
앞으로 기대하며 볼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시봐도 역시
ㅎㅎㅎ
감사합니다.
ㅈㄷㄱ~~~~~~~~~~~~``````````````````````
잘 보고 갑니다.
즐감ㄹ요.
잘보고 갑니다.
흥미진진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
잘보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