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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헤드윅]
나는 헤드윅을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로 꼽지는 않는다.
하지만 헤드윅이 나에게 특별한 뮤지컬임은 주저함 없이 말할 수 있다.
헤드윅은 나에게 뮤지컬이라는 신세계에 문을 열어 준 첫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때 나의 소꼽친구가 소개해준 영화가 있었다.
헤드윅이라는 제목의 그 영화는 당시 10대인 내가 이해하기에는 무척이나 난해했고 대충의 줄거리만 이해할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럼에도 노래는 무척 신났었고.
그 후 몇년이 지나 스물둘의 나이에 우연히 공짜 티켓을 얻어 보게 된 것이 이 헤드윅이었다.
당시의 주인공도 모르고 그냥 헤드윅이라는 뮤지컬이 내가 예전에 한번 봤던 그 영화이구나 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봤다.
생각보다 좁은 무대는 뒤쪽에 자리에 잡고 앉았었도 충분히 무대 전체를 볼 수가 있었고 실제 같은 느낌의 무대와 화려한 조명과 의상과 화장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배우의 느낌이 전달되어 도취되는 듯한 그 생생함이란...
그 때까지 봤던 영화나 드라마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마치 살아있는 듯한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첫번째는 주인공도 모르고 봤고 두번째는 인천에서 공연을 한다기에 이번에는 어떤 무대일까하는 궁금함에 가서 보았다.
하지만 역시 뮤지컬이나 연극은 무대의 환경이 무척 중요하다는 깨달음만 얻고 왔던거 같다.
일단 무대가 헤드윅의 공연을 하기에는 넓고 너무 높았다.
헤드윅이라는 공연은 모텔 리버뷰의 한켠에서 자신들의 악기를 가져다 놓고 헤드윅의 인생을 그의 노래와 말로 풀어나가는 공연인데 인천의 공연장은 관객을 그저 영화관의 관객으로 만들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한번 보게 된 세번째 헤드윅은 모델이자 한참 이름을 날리던 김재욱의 일명 마드윅의 공연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일단 모델출신의 헤드윅 덕분에 눈 호강은 실컷 했으니까. 근데 그의 헤드윅을 그 전에 봤던 다른 헤드윅과 비교하자니 뭔가 독기를 품고 그걸 발산시킨다기 보다 자기 안으로 끌어 안고 삭히고 삭히다 그대로 사그라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나의 네번째 헤드윅은 우선 오만석이라는 배우의 공연을 보기 위해 뒤늦게 자리를 확보하느라 좀 힘들었다.
올 해는 헤드윅을 볼 생각이 없었다. 이미 이전에도 계속 봐왔던 거라 좀 새롭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하던 공연이라 한번 찾아나 보자라는 생각에 티켓팅 사이트에 들어간 순간 나는 왜 좀더 일찍 공연 티켓팅을 하지 않았다 무척 후회했다.
오만석의 헤드윅이라니.
나의 첫 뮤지컬이니만큼 헤드윅에 나름의 애정을 갖고 있던터라 노래는 다 찾아봤었고 특희 김다연이나 오만석의 공연을 실제 다른 무대도 전혀 본적은 없었어도 노래만으로도 충분히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오만석의 헤드윅 소식에 난 무척 흥분했었다.
그가 연기나 노래를 못할것이라는 생각도 안하고 있었고 그가 부르는 Origin Of Love만 즐겨도 티켓값이 아깝지 않을 것이라 확신을 했기 때문이다.
나름 헤드윅을 즐기기 위해 옷 빼입고 화장하고 착석을 하고 기다리는 그 5분이 너무나 설레고 기다려졌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그 설레임이란.
엥그리인치가 무대에 올라서고 이츠학의 소개가 이어지며 조명을 받으며 입장하는 헤드윅은 반짝반짝 눈부셨다. 물론 그의 의상과 화장은 모두 심하게 반짝이긴 하지만.
브라운관에서 봤던 오만석의 모습은 사실 그간 내가 품어온 헤드윅의 섹시함을 얼마나 만족시킬수 있을까 살짝 저어되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오만석은 내시였거나 농부였거나...아무튼...그런 이미지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며 스스로의 매력을 한껏 내뿜는 헤드윅의 모습은 등장과 함께 나의 눈을 뿅가게 만들었다.
특히 Tear Me Down을 부르며 관객들에게 호전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존재감이 뿅간 나의 눈을 확 뜨이게 해줬으며 귀도 뻥 뚫어주었다.
이 노래는 바로 헤드윅이라는 존재를 그대로 설명하는 노래이지 않나 싶다. 도시와 도시 사이에 선 장벽, 남자와 여자 경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고정관념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로써의 헤드윅으로.
후에 자신의 어린시절 엄마가 해주었다던 그 이야기. The Origin Of Love
이 노래는 헤드윅의 인생의 목표이자 궁극적으로 헤드윅 자신이 노래를 하는 이유가 아닐까.
반으로 갈라진 자신의 반쪽을 찾는다는 그 이야기. 이게 헤드윅의 주제일 것이다.
비단 헤드윅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오래 전에 갈라진 반쪽을 찾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건 의식적이 아닌 본능적인 무엇인가가 아닌가 싶다.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고 소울 메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무언가. 특히나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누구나가 같고 있는 외로움이나 가슴 한편이 텅 빈것 같은 공허함을 채우려는 본능은 누구나가 갖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노래로 Sugar Daddy.
사실 이 노래는 신나는 노래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흥얼거리고는 했는데 가사가 굉장히 야한 노래였다. 한셀이 처음으로 육체의 쾌락을 알게 되는 그 순간과 헤드윅이 되어야만 했던 그 과정을 신나는 노래 한곡으로 압축해서 모두가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특히나 이번 헤드윅에서는 중간중간 배우들이 서로 춤을 추며 즐기는 모습이 들어가 더욱더 신나게 들렸다 그러면서 야한 부분이 살짝 덮힌것 같달까.
그리고 다음엔 내가 남자였다면 듣는것이 좀 거북스럽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Angry Inch.
헤드윅의 분노가 잘 담겨져 있는 노래이다. 그때의 헤드윅의 폭발하는 것처럼 내지르는 노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무언가가 되어 버린...상황에 쫓겨 선택지도 없이 떠밀려 버린 헤드윅의 울분섞인 외침이 아닐까 한다.
후에 루터에게 버림받고 트레일러에 앉아 거울 속 자신에게 타이르듯 위로하는 노래, Wig In A Box.
자신을 위로함과 동시에 새로운 자신을 받아들여 다시금 자신의 자아를 찾게 하는 노래가 아닌가 싶다. 가발과 화장 그리고 노래.
딱 헤드윅의 트레이드 마크들이니까.
Wicked Little Town. 이 노래는 헤드윅이 토미를 위해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사를 바꿔 토미가 헤드윅에게 용서를 담아 부르는 노래이다.
참 바보같게도 똑같은 뮤지컬을 네번이나 보고서야 난 헤드윅과 토미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헤드윅이자 토미이고 토미이자 헤드윅.
헤드윅이 찾고 있던 반쪽이 바로 토미였고 토미는 바로 헤드윅 자신이었다.
자신을 버린 토미를 쫓아다니며 우리의 관계를 인정하라고 너를 이루는 모든 것은 자신이라고 외치는 헤드윅을 향해 토미는 자기 스스로 완전하다며 그런 헤드윅을 외면하고 만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절망하는 헤드윅에게 용서를 구하는 동시에 너 자신을 인정하라고 하는 것은 토미, 스스로 완전하다고 말하던 바로 또다른 자신인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반쪽을 찾았지만 그 반쪽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해 떠나고 결국 그 자신을 인정하게 하는 것 또한 그 반쪽이고 그 반쪽은 자기 자신인것이다. 참 아이러니 하지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 다음 노래는 The Long Grift.
처음으로 토미가 작곡을 한 곡인데 헤드윅을 향한 이별의 노래가 되고 만다.
헤드윅이 토미에게 받았다고 느꼈던 모든 것이 거짓이고 결국은 자신을 스쳐지나간 사람들 중에 하나라는 헤드윅의 노래인데 정작 부르는 것은 이츠학이다.
그런데 뒤집에 생각해보면 헤드윅이 여자인 줄만 알았던 토미에게도 헤드윅의 모든것이 거짓이 될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이 꼭 헤드윅에게만 해당하는 노래가 아니라 토미에게도 해당하는 노래로 헤드윅도 토미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불분명해지면서 이츠학이 부르는게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나 헤드윅과 이츠학의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이츠학이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사실 이츠학은 남자이지만 여자가 되고 싶어하며 여성이 불러야할 코러스 부분은 헤드윅의 곁에서 이츠학이 부르게 된다.
자신의 꿈을 위해 미국으로 오고 싶어하는데 그 과정에서 헤드윅은 이츠학에게서 여성으로서의 삶을 빼앗는다.
헤드윅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는 하는것을 보면 그는 언제나 빼앗기기만 하는 약자인데 Angry Inch에서는 오히려 그가 지배하면서 빼앗는 입장이다.
헤드윅을 보면서 헤드윅과 이츠학의 관계를 보면서 일차적으로 그 부분만 생각했었는데 이번 오만석의 헤드윅을 보면서 이츠학이 헤드윅을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다 시피하는 것은 헤드윅은 이미 토미라는 자신의 반쪽을 찾고도 버림받은 후 그것을 이츠학을 통해 메우려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츠학이 노래에 대한 재능이 헤드윅 못지 않음이 분명히 극중에서 나오고 있으며 이츠학은 자신의 성정체성이 헤드윅에 의해 제재를 받고 있으며 토미의 대용으로 밖에 옆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츠학의 증오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이번 공연을 보고서야 들었다.
Hedwig`s Lament 는 헤드윅의 비애라는 제목 그대로인데 이게 독립적인 노래라기 보다는 다음 노래인 Exquisite corpse 의 전조적인 연결이라고 볼 수 있을것 같다.
자신의 난도질한 심장을 그를 버린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면 남은 것은 시체일테니까.
Exquisite corpse라는 노래는 헤드윅이 그동안 자신의 안에 숨기고 억눌렀던 모든 것들이 일시에 터져 나오며 자신의 모든것을 쏟아 부으며 허상같은 자신을 마저 놓아버리는 곡이다.
이 곡에서 찢어질 듯한 기타사운드와 부서질듯한 드럼 사운드 속에서 절규하며 자신을 꾸몄던 가발과 옷을 집어 던지며 여성의 가슴을 흉내내었던 토마토를 으깨며서 헤드윅은 바닥까지 떨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바닥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토미에게서 용서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이 토미를 위해 불렀던 똑같은 노래 Wicked Little Town으로.
그리고 이제 자신의 응어리를 모두 씻어낸 헤드윅은 비로소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주위를 둘러보며 그동안 자신이 빼앗고 있던 것을 이츠학에게 돌려주며 부르는 노래는 Midnight Radio.
자신이 음악을 꿈꿀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라디오. 바로 자신의 꿈을 대변하는 매개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을 든다는 것이 용서와 화해, 그리고 하나됨을 뜻하는 제스처가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너의 꿈을 응원하는 응원까지도.
마지막에는 여성으로서 돌아온 이츠학과 함께 열창하는 부분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음악을 함께 해 온 동지로서 함께하기 때문에 의미가 크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이전까지 헤드윅을 관람하는 것은 즐기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 오만석의 헤드윅은 헤드윅이라는 뮤지컬이 주는 의미를 다시한번 깊게 생각해 볼수가 있었으며 이렇게 글로써 정리를 하고 싶게 만들었던 오만석이라는 배우의 영향이 매우 크다.
마지막 뒤풀이를 위해서 두시간을 쉴새 없이 말하고 연기하고 노래불러야 했던 오만석은 정말 쓰러기지 전까지 객석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컨디션때문에 만족할만 한 무대를 보여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그의 말에 진지하게 오만석의 무대를 다시한번 봐야 할 것이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의 헤드윅은 정말 그동안 보여지는 것에만 만족하던 나에게 헤드윅이라는 공연 자체를 다시한번 사색하게 하는 멋진 공연이었으며 정말 내가 운이 좋아 이러한 무대를 볼 수 있었음이 감사하다. 만약 그의 헤드윅을 보지 못했다면 난 여전히 수박 겉핥기 식의 내용밖에 모르면서 뭔가를 아는 척을 해댔을 것이며 진정한 의미의 헤드윅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한번 관람을 하고 싶은 바이다.
첫댓글 정리를 한 그 정성...기억하렵니다. 역시...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