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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복음 6,12-19
“예수님께서는 ᆢ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12)
밤을 새우며 기도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어떤 절실함으로 그렇게 기도하셨나요?
기도가 그만큼 절실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이른 새벽에 외딴곳으로 가시기도 하고, 때로는 산으로 가시어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모든 일을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 안에서 행하십니다.
기도는 단순히 무엇을 청하거나 자신의 바람을 말씀드리는 시간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알아듣고 그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실히 살아갈 힘을 얻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십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자 모든 일을 하실 수도 있었지만,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부르시어 당신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훗날 예수님을 배신할 사람도 있었고, 십자가 앞에서 도망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고 당신과 함께 일하도록 부르십니다.
사도란 ‘파견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파견한 분의 뜻을 전하고 그분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어 가고자 하셨습니다. 부족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러하십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인간에게 맡기셨고,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사람만을 선택하여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이 축일에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님들과 사제들을 기억하며 기도합시다.
그들이 자신의 뜻보다 주님의 뜻을 먼저 찾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보다 주님의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는 충실한 도구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돌아봅시다.
우리 역시 세상 안에서 주님의 사도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특별한 일을 해야만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주님의 뜻을 드러내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한다면 우리도 그분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기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자신의 생각과 바람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반대로 기도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을 때, 우리는 내 뜻을 앞세우기보다 그분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내 힘만으로 살아가기보다 그분께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물론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실천하는 일이 언제나 쉽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만큼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길도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밤샘 기도를 바라보며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얼마나 진지하게 주님의 뜻을 찾는가?
내가 기도하는 것은 주님께서 내 뜻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그 뜻을 살아가기 위해서인가?
주님, 저희가 기도 안에서 당신의 뜻을 찾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저희에게 맡기신 사명을 충실히 살아가게 해 주소서.
아멘.
(천 사비나 수녀님)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복음: 루카 6,12-19
배우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오늘은 열혈당원 시몬과 유다 타대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시몬은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 혹은 나병에 걸렸다가 치유되어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유다 타대오는 예수님의 사촌으로 알페오의 야고보와 형제지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여러 다른 환경에서 살던 이들의 스승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그전에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신중하게 뽑으셨다는 뜻입니다.
그 가운데는 당신을 팔아먹을 가리옷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머물 열정이 있는 사람들 기준으로 당신 제자를 뽑으셨던 것 같습니다.
교토 대학 영장류연구소의 학자들은 어린 침팬지가 어미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어미를 닮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미에게 몇 개의 색에 각각 반응하는 일본어 글자를 알아보도록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면 빨간색은 ‘ㄱ’, 노란색은 ‘ㄴ’ 식으로 연상하도록 교육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한 색을 보여주었을 때 그 색에 상응하는 글자의 스위치를 누르면 그 보상으로 동전이 나오도록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어미 침팬지는 그 동전으로 자동판매기에 가서 자신이 원하는 과일을 뽑아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미 침팬지가 새끼 침팬지를 안고 있었습니다.
새끼 침팬지는 어미 침팬지가 하는 행동을 보고 혼자 색과 글을 스스로 터득하여 어미가 없을 때 그 기계에 가서 컴퓨터를 켜고 글자를 맞추고는 동전을 받아 어미가 한 것처럼 자판기에서 자기가 원하는 과일을 뽑아먹었습니다.
어미가 자녀에게 가르쳐 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새끼는 그저 어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따라서 배운 것입니다.
[참조: 『당신의 주인은 DNA가 아니다』, ‘제7장: 생각이 있는 부모 노릇’, 브루스 립튼]
누군가와 함께 머문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배우고 싶어지고 배우고 싶어지면 그 배우고 싶어지는 대상을 닮게 됩니다.
그래서 스승이 제자들을 뽑는 기준은 자신과 오래 머물 의지가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런 기준으로 제자들을 뽑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리옷 유다는 조금 다른 의도로 머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서 영화를 얻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통은 그런 의도를 가지고 들어와서도 예수님과 같은 스승 앞에서는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집불통인 유다는 끝까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머물려는 의지가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배우지 못합니다.
새끼 침팬지는 어미를 사랑하였기에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사랑하면 배우고 싶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용하고 싶어집니다.
가리옷 유다는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승을 닮을 수 없었습니다.
경제, 정치, 스포츠, 연예 등 어떤 분야에서건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겐 반드시 그가 사랑했던 스승이 있게 마련입니다.
만나지는 못해도 적어도 동경하며 닮으려고 한 스승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승이 없으면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없다면 자녀도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보편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 비방을 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비방하는 그 존경받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닮고 싶은 스승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현재 은퇴하고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딴 ‘빌 앤 멀린다’ 자선 재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 워런 버핏도 수십조 원을 그 단체에 기부하였습니다.
빌 게이츠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설립한 이 재단은 아프리카의 물 부족과 질병을 없애기 위해 인분을 처리하는 장치를 개발하여 시공해주고 있습니다.
식수로 마시는 강에 인분이 들어가는 것을 막고 그것으로 마시는 물까지 생산하는 방식입니다.
세계 제1의 부자가 미래 삶의 환경을 위해 변기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이런 루머도 있었습니다.
빌 게이츠가 인구수를 줄이려고 일부러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사는 인구가 너무 많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누가 빌 게이츠를 닮으려고 할까요?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이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재벌들의 모델이자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싫어하는 부자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비난받지 않기 위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그런 분들을 비방하여 자신들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루머로 그들을 본받으려 하는 이들에게 스승을 잃게 만듭니다.
이런 예는 간디나 마더 데레사에게도 적용됩니다.
간디는 어린아이를 성추행했다는 누군가의 말에 의해 폄하되고 있고, 마더 데레사도 아이들을 학대하고 팔아넘겼다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슈바이처도 미신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객관적인 행위들은 분명 우리가 모두 본받아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루머들은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지만 그들을 본받으려는 이들에게는 치명타입니다.
증명되지도 않은 내용을 퍼뜨리며 인간이 그렇게 닮아야 할 세상의 스승들을 없애버리려는 시도는 미래를 위해 좋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그런 스승이 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폄하되는 가장 대표적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엔 예수님을 스승으로 여기는 이들보다 어리석은 사기꾼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남이 잘하는 것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누구도 닮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가리옷 유다와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는 스승을 찾고 스승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알게 됩니다.
닮고 싶은 어떤 스승도 가지지 않는 것은 조금도 나은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사랑한 스승이 곧 미래의 나의 모습입니다.
내가 사랑할 스승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루카 6,12-19)
부르심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루카 6,12-16).”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는 것은, 사도들을 뽑으신 일은 ‘사람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실상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와 ‘깊은 대화’를 나누신 일입니다.
아마도 사도로 뽑을 사람들에 관해서, 또 그 사도들이 하게 될 일들과 교회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일,
즉 배반자 유다에 관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누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배반자 유다가 왜 사도단에 포함되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그냥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라고 표현하기만 하는데, 그 일에 대해서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많은 대화를 나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사도들은(사도로 뽑힐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잤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고, 사도들도 기도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단을 구성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두 명을 사도로 부르시고 그들이 응답함으로써 이루어진 일이지만, 관점을 달리 해서 생각하면, 사도로 뽑히기를 바라는 그들의 희망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일은,
즉 모든 것을 버리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선 일은, 그것이 바로 그들 자신들이 원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원하지도 않으면서 억지로 붙잡혀 간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기를 희망하면서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따라나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로 뽑힌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도로 뽑으실 때, 그들의 의향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뽑으신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먼저 당신의 계획을 말씀하시고 나서, 오늘날의 서품식처럼 응답하기를 원하느냐고 그들에게 물으시는 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원한다고 대답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도로 뽑으셨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 수행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2-23).”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5-27).”
바오로 사도는 자신도 ‘복음에 동참하기 위해서’,
즉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일차 목표는 자기 자신이 구원받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는 자기가 실격자가 되는 것을, 즉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아무리 열성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이 구원받지 못하는 실격자가 된다면,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은 열두 사도에게도 해당됩니다.
사도들의 일차 목표는 자기 자신의 구원이었고,
그들의 사도직 수행은 그 구원을 받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이 말씀을 뜻에 따라서, “너희가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주어서 너희의 열매가 영원히 남아 있게 하려고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라고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사도들 자신들의 구원과 인류 구원입니다.
‘열매’는 구원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부르심은 은총’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들이 청한 일이 먼저인지, 예수님께서 그들을 뽑으신 일이 먼저인지, 그 순서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고, 어떻든 이 말씀은 사도들의 간청과 예수님의 부르심이, 또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사도들의 응답이 하나로 합해져서
예수님의 교회가 세워졌고, 구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열두 사도가 자기들 마음대로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니고, 또 그들이 스스로 사도직을 맡은 것도 아니고, 그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인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일방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인간들의 간청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신 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은, 바로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복음 선포 활동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활동입니다.
그 활동으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겠지만, 가장 먼저 구원의 은총을 받는 사람은 그 활동을 하는 ‘나 자신’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부르심’ 자체가 곧 은총입니다.
‘부르심’은 나의 희망과 상관없이 나에게 억지로 임무를 맡기시는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가 받기를 원하는 임무를 나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2026,10 26부터 피정중이심)
10월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복음: 루카 6,12-19: 제자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1. 두 사도의 기억
오늘 교회는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를 기린다. 시몬은 “열성 당원”(Ζηλωτής)이라 불리며, 유다 율법에 철저하고 민족적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유다는 타대오라고도 불리며,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요한 14,22) 하고 질문한 사도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기질과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이 주님의 사도로 함께 불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 됨을 이루시는 분임을 드러낸다.
2. 예수님의 선택과 제자 공동체
루카 복음은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신 후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다고 전한다. 이 선택은 단순한 행정적 결정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대화 속에서 이루어진 거룩한 행위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시기 전에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것은, 제자들이 인간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선택되었음을 보여준다.”(In Matthaeum Homiliae, PG 57, 269)
사도들은 특별히 뛰어난 자격이나 학문적 준비로 뽑힌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강조합니다: “주님은 완전한 이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이들을 부르시어 완전하게 만드셨다.”(Sermo 340, 1) 따라서 제자의 사명은 인간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의존한다.
3. 사도의 본분: 배우고, 따르고, 닮는 것
‘제자’(disciplus)란 곧 배우는 사람을 뜻한다. 사도들은 먼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배우는 사람들이었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며 점차 스승을 닮아갔다. 공의회 문헌 사목 헌장은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자라나도록 협력한다.”(사목 38) 결국 사도 됨은 단순한 직책이 아니라, 스승과 함께 살아가며 “그분처럼 되는 것”(1요한 3,2)을 목표로 하는 삶이다.
4. 오늘 우리에게 주는 초대
열두 사도는 흠 없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부르심에 응답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변화될 수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믿음을 키우며, 그분을 닮아 살아가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도가 된다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다. 그분을 닮으려는 이에게서만 진정한 선포가 흘러나온다.”(Enarrationes in Psalmos, 44,23)
5. 결론과 기도
오늘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의 모범은, 서로 다른 배경과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 분 주님 안에서 하나 되어 복음을 전한 제자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도직 교령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사도직에 참여한다. 이는 교회의 생명과 세상 속에서 복음을 증언하는 데서 드러난다.”(Apostolicam Actuositatem, 3)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선택된 자들’로서 제자의 길을 살아가야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하여, 말씀을 배우고, 사랑으로 살아가며, 세상 속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 미사 안에서, 우리 각자가 주님과 함께하며, 주님처럼 닮아가는 제자가 되도록 은총을 청해야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