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에 들어온 나는 세탁물바구니에 든 그의 와이셔츠를 들었다. 그리고 코에 대 보았다. 늘 그가 쓰는 은은한 향에 누가 맡아도 여자의 것이라 알 수 있는 향이 더해진다. 강하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내 코를 붙잡는 것이 어떤 쪽인지는 몰라도 조금은 밝히는 여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나는 세탁기에 바구니에 든 옷들을 쏟아붓고 탁 뚜껑을 닫았다. 생각해 본다. 언제부터 그가 내게서 조금씩 떨어져나갔는지를. 나는 세탁기를 작동시키고 주방으로 나왔다.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한컵 따랐다. 나는 식탁에 컵을 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에 빠진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대학교 2학년 2학기 때였다. 평소에 너무나 듣고 싶었던 문화사론을 신청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같이 듣자고 꼬셨던 친구들은 그 교수 점수 짜기로 소문났다며 내뺀 탓에, 외롭게 혼자서 수강했다. 첫수업, 내 옆자리에 누가 앉았고, 나는 그 은은한 향을 느꼈다. 잠시 향에 취한 내게 그가 반갑게 말걸었고, 우리는 통성명도 하고, 다음부터 그 수업을 같이 들었다. 그는 자석 같은 이였다. 내빼려 해도 결국 붙어 버리게 만드는 그런 힘을 가진 이였다. 나는 그와 수업 같이 듣는 날을 언젠가부터 기다리게 되었고, 그를 보면 기분이 좋아졌으며, 같이 있다는 사실이 매우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그와 사귀게 된 것은 그해 겨울방학을 앞둔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나온 나는 쌀쌀한 추위에 팔짱을 끼며 걸었는데,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차 안에서 그가 내게 반갑게 손 흔드는 것 이었다. 타라는 듯한 그의 눈치에 나는 반갑게 차를 얻어탔다. 나는 고마워서 근처 식당에 그를 데려가 우동을 사먹었고, 이어서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를 한잔씩 했고, 이어서 내가 취해 버린 바람에 그의 집으로 갔다. 나는 술기운에 그의 방에서 이런저런 주정을 부렸고, 그는 나더러 귀엽다더니 우리의 가까워진 얼굴은 자연스레 닿고 서로의 입술을 빨고 서로의 혀를 내밀 었다. 그리고 짜릿한 밤을 그와 보내 버렸고, 내가 평소에 가진 호감을 고백했고, 그가 사귀자고 했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주스 한컵을 다 마시는 동안 생각에 빠졌던 나는 문득 정신이 들어 시계를 보니 밤 10시. 요즘 그는 퇴근시간 7시에 맞추어 집에 온 적이 없다. 10시는 기본으로 넘겼고, 외박도 드물게 있었다. 그가 오면 좀 따질까 하다가도, 피곤해하는 그를 보며 나는 그냥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을 그냥 넘기기가 싫다. 현관문 따이는 소리가 난다. 그가 왔다. 나는 거실로 나갔다. 막 구두를 벗고 올라온 그가 나를 보더니 살짝 놀란다.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그를 보았다. 그저 미소만을 띠우고. 더 이상 내가 뭔가 안다는 표정은 담지 않은 채. "왜... 그래? 뭐 묻기라도 했어?" 내 시선에 그는 어색해하며 자신의 얼굴을 한번 쓸었다. "당신은 지금 성적표를 숨긴 아들이야. 나는 그리고 오늘 담임한테 시험결과를 들은 엄마고." 여전히 미소를 띠우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자상하게 웃는 내 눈을 껄끄롭게 본다. "피곤해... 나 좀 샤워할게." "나랑 단 몇분 얘기하는 거에 그렇게 인색해지고 싶어?" 나는 선 자세 그대로 내 옆을 스쳐가는 그를 느끼며 말했다. 그가 멈추어서는 내 옆을 본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아도 그의 얼굴은 어이없음을 나타낼 것이다. "왜 이래. 나 쉬고 싶어, 응?" 그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말로 나를 얼른다. 그의 그런 얼름에 나는 너무나 넘어 왔기에 이제는 면역이다. 넘어가지 않는다. "소파로 가 앉아." "뭐...?" "못 들었어? 소파로 가 앉으라니까?" 그의 얼굴이 무너져내리며 어이없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당연할 만하다. 나는 아들을 몰아세우는 엄마처럼 굴고 있으니까. 그래도 그는 오늘 내 반응이 이상 해서 그런지 군말없이 소파에 가 앉았고, 나는 그의 앞에 그냥 가 섰다. "아마 날 보기 좀 껄끄로울테지?" "...왜 이러는 거야. 너 오늘따라 왜." "왜 이상할까? 그 대답은 내가 아니라 이미 니 손에 쥐어졌을 텐데?" 그의 눈을 직시했다. 파고들어갈 듯 아주 깊이 팽팽히 직시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투명하지 않고 불투명하기에 그의 마음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는 그렇게 불투명한 눈동자를 했으면서, 자신은 화가 앞의 흰 도화지처럼 당당하다. "넌... 외도를 시작했어." "......오늘 억지부리기로 작정했니?" "왜 아니라고 못해? 아니면 아니라고 해. 내 앞에서 투명한 눈동자를 보이고 아니라고 해!" 나는 소리쳤다. 내 주먹에 힘이 순간 실렸고, 안압이 높아짐도 느꼈으며, 내 안의 불신이 마구 솟아올라 뱉어내짐을 느꼈다. 그가 머리를 조아리며 나를 거리의 시끄러운 전도사처럼 본다. 그는 답답해서인지 얘기가 길어질 듯해서인지 벗어 놓은 상의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나는 그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고 후 연기 내뿜는 것도 지켜보았다. "뭘 본 아니 어디서 누구한테 뭘 들은 거야?" "보지도 듣지도 않았어." "...그럼 단순히 추측이고 의심이란 얘기야?" "추측은 혼자 하고 의심은 괜히 하니? 하게 만들었잖아." "...대체 뭘?" "와이셔츠에는 언젠가부터 똑같은 여자 향수 냄새가 짙게 베었고, 너 귀가 시간은 언젠가부터 이유없이 계속 늦어졌어. 너는 언젠가부터 나와 얘기하기가 싫어졌고, 너는 언젠가부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어. 더 해야 돼? 이 이상 외도로써 확실 하고 정확한 행동이 어딨어? 어딨니, 응?" 나는 마치 내 안에 들어온 누군가가 대신 떠들어 주는 듯 주절주절 떠들었다. 준비하지도 연습하지도 않았건만, 내가 좋아하는 그의 풀어진 눈 앞에서 나는 떠들었다. 내 치켜뜨인 눈속에 나를 신들린 듯한 무당처럼 보는 그가 들어온다. "왜애? 나 틀린 말 한 거니? 좀 내뱉어 봐. 아니라고 딱 부러지게 말해 보라고오. 해 봐. 해 주면 좋겠어." "그만하자..." 그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끄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부딪치기 싫다는 듯 나를 무시하고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 옆을 스치며 그가 풍긴, 내가 맡아왔던 낯선 여자의 향을 기억하며 나는 닫긴 방문을 싸늘히 바라보았다. 다음날 나는 아는 후배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섰다. 국문과 후배로 요즘 소설 하나 쓰는 중인데, 막힌다며 SOS를 요청했다. 나는 버스로 다섯정거장을 거쳐, 후배가 사는 빌라에 도착했다. 벨을 누르고 몇초 기다리자 벌컥 문이 열리더니 나를 와락 안는다. "음... 괜찮은데? 전반적으로 깔끔하잖아. 이대로 나가면 되지 않아?" 내가 원고를 훑어보며 말하자, 후배가 끓여온 커피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말이 쉽죠. 말대로 되면 나 벌써 베스트셀러 작가 되고도 남았수." 후배는 커피를 후르르 들이켰다. 나도 커피를 들이키며 원고를 좀 더 훑었다. "첫술에 배 부르니? 다 이러면서 시작해가는 거지. 끙끙 앓면 더 문드러지는 법이야. 그냥 내쳐." "으유 모르겠어요." 후배는 기지개 펴듯 팔을 뻗으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참!" 그러더니 다시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나를 건드린다. "응?" "선배 애인 말예요." "...응, 왜?" "아니 내 친구의 친구가 있는데 걔가 글쎄---" 잠시후 나는 집을 나왔다. 괜찮냐고 걱정하는 후배를 안심시키고 나는 하루종일 쓰디쓴 블랙커피만 마신 것처럼 가라앉은 표정으로 빌라를 벗어났다. 후배 친구의 친구가 어느날부터 킹카애인이 생겼다며 자랑했다길래, 후배는 누군지 좀 보자고 졸라 사진을 보았고, 그의 얼굴을 아는 후배는 재차 확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확실하다며 이미 꽤 된 사이라고 기세등등 말했다고 한다. 나는 후배에게 그녀의 스티커사진을 하나 얻어 집으로 왔다. 그날 11시 그가 집에 왔다. 나는 마치 문지기처럼 그의 앞에 서서 그를 맞았다. 그는 또 남았냐는 눈치로 나를 보았고, 나는 살짝 웃었다. "왜... 아직 남은 거야?" 소파에 귀찮아하며 앉는 그에게 스티커사진을 내밀었다. 뭐야 하며 받은 그는 사진속 얼굴을 보더니 잠시 굳어서는 사진을 응시하고,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놀란 그의 눈이 나를 기인이라도 되는 듯 본다. "더 말해야 해? 더 할까?" "......이,이게 뭐 어떻다는 거야?" "말뽄새가 왜 그래? 왜 당황해?" 그는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왜. 다 까발려지니까 속타니?" "......어떻게 안 거야...?" "후배 친구의 친구라던데." 그는 어이없는 미소를 흘리며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팽창하는 이 공간에 그가 내뿜는 담배연기가 그 팽창감을 지워낸다. "그래. 그럼 다 들었겠네." "그래. 신물나도록 다 들었어." "어쩔 거니?" "내 대사 같은데?"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또박또박 그의 얼굴에 박았다. 그는 담배만 피워대며 할 말을 못 찾겠는지 초점 잃은 눈동자를 어디엔가 박았다. "어쩔 거니..." 그가 멍하게 내뱉었고, 나는 서늘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 어쩌고 싶진 않아. 하지만 어쩌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어." 나는 아주 또렷한 시선을 그에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침대에 누운 내 몸, 마음이 묘하게 들뜨는 기분이다. 일주일이 지나고 그와 나는 서로의 입에 얼음을 문 듯 불편하지만 평범하게 보냈다. 다만 그의 눈은 멍하고 뭔가 두려워하며 나를 기분 나쁘게 쳐다볼 때가 많았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치밀어올랐는지 나를 거칠게 붙잡고 내 눈을 자신의 눈으로 파고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내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음이 당연하니까. 나는 소파에 앉아 티비를 켰다. 마침 뉴스화면이 티비에 나타나고, 여자 아나 운서가 무표정하게 읊어나갔다. [오늘 실종된지 3일만에 양재천에서 한모씨가 발견됐습니다. H대 국어학과에 재학중이던 한모씨는 3일전 갑자기 소식이 끊겨 가족이 현재 실종신고를 낸 상태로, 양재천에서 물놀이하던 꼬마들이 한모씨의 시체를 발견해, 현재 국립 과학수사소에서 사망경위를 살펴보는 중입니다. 그럼 김상택 기자 연결해서 자세한 상황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상택 기자-] 나는 리모콘으로 티비를 껐다. 내 입가에 아주 후련하고 만족스러운 웃음이 잔뜩 걸린다. 그러고 보니 그도 3일전부터 계속 멍한 표정을 드러내는가 하면, 갑자기 내게 사나운 얼굴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체 왜 그가 내게 그러는지 모르겠다. 3일전 밤 나는 후배에게 들은 정보대로 그녀의 집에 가 보았다. 한적한 그 골목길에서 기다리던 내 귓가에 그녀의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만 그녀의 뒤로 다가가 준비한 병으로 그녀의 뒷통수를 내려쳤다. 나는 다만 그 유리병은 깨트려 버렸다. 나는 다만 장갑을 끼고 그녀를 근처 양재천으로 끌고갔다. 나는 다만 그녀를 물에 빠트려 버렸다. 나는 다만 내가 입었던 비옷을 벗어 잘 버렸다. 나는 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그랬을 뿐이다. 다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살직전에'에 꼬리말 남겨 주신 porifra님, 앙탈쟁이♬님, 히카리…님, 민들래 님님, 프리티카즈키님, 내사랑은어디님, 루류♥님, 달빛악마v님 감사합니다.
첫댓글 와아. 정말 잘 쓰셨어요 ㅠ_ㅠ. 왠지 모르게 베어있는 섬뜩함; 이런걸 잘 표현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데; 아직 전 .. ㅠ_ㅠ 어째든 너무 잘 쓰셨어요. 잘 읽고 감니다^ㅇ^
와~잘 쓰셨어요,ㅇ_ㅇ 슬프기도 하면서 섬뜩한게 비교대면서 잘 나타나 있네요..잘 읽고 갑니다.^ㅁ^
보고 배우고 싶습니다. 표현력
와~ 감탄사가 절로 나와요^^
첫댓글 와아. 정말 잘 쓰셨어요 ㅠ_ㅠ. 왠지 모르게 베어있는 섬뜩함; 이런걸 잘 표현하는 작가가 되고 싶은데; 아직 전 .. ㅠ_ㅠ 어째든 너무 잘 쓰셨어요. 잘 읽고 감니다^ㅇ^
와~잘 쓰셨어요,ㅇ_ㅇ 슬프기도 하면서 섬뜩한게 비교대면서 잘 나타나 있네요..잘 읽고 갑니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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