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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인터뷰〕
『인형이 가져온 편지』로 동화작가의 길을 걷다
-이준연 선생과의 대담
글: 윤수천. 동화작가. 1942년생.
『꺼벙이 억수』 『인사 잘하고 웃기 잘하는 집』『로봇 은희』
『고래를 그리는 아이』 『내 짝은 고릴라』『나쁜 엄마』 등.
현재 초등학교 4-1 국어활동교과서에 동화 「할아버지와 보청기」가 수록돼 있음.
이준연 동화작가. 1939. 1. 16 -2017. 8. 5
전북 고창에서 출생. 196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인형이 가져온 편지」 당선. 1975년 광복30주년기념 문학창작상. 80년 세종아동문학상, 85년 대한민국문학상 등 수상. 동화 집으로『바람을 파는 소년』『거꾸로 나라 임금님』 『춤추는 허수아비』『밤에 온 눈사람』 등 다수.
윤수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올해도 각 일간지에서 시행한 신춘문예를 통해 새로운 얼굴 들이 여럿 등장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6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동화작가가 되셨지요?
이준연: 맞아요. 「인형이 가져온 편지」란 동화였지요. 어느새 58년 전 일이군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매년 새해가 되면 가슴이 설레는 게...나에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작품이지요.
윤수천: 이 작품을 쓰시게 된 동기가 있으시다면서요?
이준연: 그러니까 1960년 겨울 어느 저녁이었어요. 외출했다가 돌아오는데 집 근처 쓰레기 장에 아기 인형이 버려져 있는 걸
봤어요. 가로등 불빛 아래 외롭게 버려진 인형을 본 순간, “아, 이걸 동화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날 밤 온 밤을
밝히고 쓴 동화가 바로「인형이 가져온 편지」였어요. 나에겐 행운이 찾아온 거지요.
윤수천: 신춘문예 당선 시상식장에서 소문으로만 들으시던 여러 선배 작가들을 만나시고 이게 꿈인가 하셨다고요.
이준연: 아, 그럼요. 마해송, 강소천, 김요섭 선생님을 뵙는 순간 정신이......(웃음) 강소천 선생님은 내 손을 잡으시더니 「인형이
가져 온 편지」를 아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하시면서 동화적 상상력이 퍽 좋았다며 앞으로도 그런 동화를 쓰라고 격려까지
해주셨지요.
윤수천: 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신춘문예 당선은 선생님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면서요?
이준연: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지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마음속엔 오로지 동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요.
서울로 올라온 뒤로 나는 청탁이 있든 없든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작품을 썼어요. 바늘귀만한 시력으로 정성을 들여서요.
시중에서 파는 200자 원고지가 아닌 내가 특별히 제작한 8절지 200자 원고지에다가요.
윤수천: 그만큼 동화 창작에 목말라 하셨군요.
이준연: 준비하는 사람에겐 기회가 오나 봐요. 난 탈고한 작품마다 ‘요건 30매’, ‘요건 25 매’, 하는 식으로 표시를 해 놓았지요.
그러고는 청탁이 올 때마다 작품 성격과 매수를 고려해서 보내곤 했지요. 원고 기일 한 번도 넘기지 않고요. 그랬더니
신문사, 잡지사 쪽에서 ‘이준연에게 청탁하면 실망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은 거 있지요?(웃음)
윤수천: 선생님은 아동문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한국 문단에서 토속적 소재와 정서를 동화로 승화시켜 어린이 문학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을 듣는 작가십니다. 이영호 선생께서 《한국현대아동문학작가작품론》에 쓰신 「이준연론」에 보면
‘이준연은 우리 전통적 생활양식과 인습을 소중히 여기는 작가로 이를 작품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온 작가’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작품 속의 ‘지명’과 ‘인명’에도 상당히 골몰한 흔적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갈미봉’ ‘도토리골’ ‘쑥고개’
‘팽나무골’ ‘새 골’ ‘까치골’ 같은 지명과 ‘만석’ 짝귀‘ ’금동‘ 용팔’ ‘돌쇠’ 같은 인명이지요.
이준연: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인지 난 도시보다는 시골을 좋아했어요. 동화도 시골을 무대로 한 이야기가 좋았고요. 내 작품에
토속적 소재가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봐야지요.
윤수천: 반면에 선생님께서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과학과 물질문명에 대한 경고성 작품도 여러 편 쓰셨습니다. 언뜻 생각나는 작품만
도 손을 꼽을 만합니다. 「감나무골 로봇」「로봇나라 도깨비 대통령」「하루나라의 하루왕」 등등......
이준연: 동화는 어린이를 위한 문학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름다운 이야기여야만 하는 것에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지 않아요.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 수 있는 ‘깨달음’을 주는 메시지도 있어야 한다고 봐요.
윤수천: 선생님, 우리나라에서 소설도 아닌 동화를 써서 생활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 선생님은 50년 동안 전업 작가로서 250여 권의
창작 동화와 소년소설을 창작하신 다작가 (多作家)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특히 1976년엔 극심한 늑막염으로 고생을 하셨을
뿐 아니라 1988년엔 위암 수술까지 받는 등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요.
이준연: 되돌아보면 어려운 일이 참 많았지요. 약골로 태어난 몸인데다가 술까지 좋아하다 보니...게다가 병마까지 겹쳐 죽을 고비도
넘겨야 했고요. 그때마다 내가 하느님에게 뭐라고 빌었는지 알아요? “저를 저버리시지 않는다면 평생 동화 쓰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습니다” 고 했지요.
윤수천: 선생님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받아 주셨구먼요. 선생님, 그렇게 어려운 고비를 넘기 시면서 그 많은 양의 저서를 쓰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바늘귀만한 시력을 가지고서... 저는 ‘인간 승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지금까지 쓰신 작품
가운데서 대표작으로 꼽는 작품은요?
이준연: 단편 동화로는 「인형이 가져온 편지」「지워지지 않는 일기」「도깨비가 된 허수 아비」「까치를 기다리는 감나무」
「꽃신을 찾는 할머니」를 꼽고 싶고요, 장편 동화로는 「철새들의 고향」을 꼽고 싶네요.
윤수천: 선생님은 창작 동화뿐 아니라 전래 동화에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게셨지요?
이준연: 그랬지요. 전래 동화에는 우리 민족의 혼과 정서가 듬뿍 들어 있는 이야기가 많아 요. 그런데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
해 가면서 우리 것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는 것을 보다 못해서 나라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해서 여러 권을 쓰게
됐지요. 마침 도서출판 견지사를 비롯해서 몇몇 출판사 쪽에서도 고맙게 원고를 받아주 었고요.
윤수천: 선생님의 창작 동화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여러 작품이 수록됐지요?
이준연: 언뜻 생각나는 작품만도 여러 편이지요. 「바람을 파는 소년」「보리 바람」「거꾸로 나라 임금님」「풍년 고드름」 등등.
윤수천: 영화가 된 작품도 있다면서요?
이준연: 「철새들의 고향」이란 소년소설이 《달려라 만석아》란 제목으로 제작되어 화제를 불러 일으켰었지요. 태창흥업주식회사
에서 만들었어요.
윤수천: 아 네. 동화나 소년소설이 영화화된다는 건 요즘도 어려운 일인데, 당시엔 대단했겠습니다. 선생님은 평소 술을 퍽 좋아하신
걸로 아는데요?
이준연: 좋아하다마다요. 거의 매일 마시다시피 했지요. 술 속에 마치 동화가 있기라도 한 듯이...(웃음)
윤수천: 누구랑 주로 마셨나요?
이준연: 이원수 선생님, 박홍근 선생님이랑이었지요. 이분들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만 나셨고 그 자리에 꼭 나를 끼워 주었어요.
게다가 술도 좋아하셨지만 내 하모니카 연주를 퍽 좋아하셔서 이야기가 무르익고 술기운이 오르면 나보고 하모니카를
불어 달라고 해요. 그러면 나는 이원수 선생님의 사모님인 최순애 여사의 「오빠 생각」과 박홍근 선생님의 「나뭇잎 배」
를 불어 드리고는 했지요.
윤수천: 아, 그러셨군요. 참, 요즘도 두 분하고 자주 만나시나요?
이준연: 그럼요. 내가 국보문학 인터뷰에 나간다고 하니까 얼마나 부러워하시던지. 왜 자기들은 안 부르냐고 해요.
윤수천: 아, 네.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라고 하세요. 기회 있으면 꼭 찾아뵙겠다고요. 아동문단에서 가깝게 지내신 분을 꼽으라고 하
면요?
이준연: 이영호 선생, 김종상 선생이지요. 이영호 선생은 특히 나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이 곳, 저 곳에 원고를 들이밀
도록 애를 참 많이 써주었어요. 그 덕분에 여러 지면에 동화와 소년 소설을 연재할 수 있었고요.
윤수천: 이영호 선생은 선생님의 문단생활 30년을 기념하는 선집인 「꽃신을 찾는 할머 니」에서도 선생님의 남다른 투지와 열정을
칭송하셨더군요. 엄청난 양의 동화와 소년소설을 세상에 내놓으면서도 수준 미달인 작품이 눈에 띄지 않더라고요.
이준연: 동료의 입장에서 좋게 봐서 한 말이지요. 격려의 뜻도 그 속엔 포함돼 있고요.
윤수천: 화제를 돌려 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평소 음악, 미술, 영화를 좋아하셔서 집안에 소형 라디오부터 오디오, 홈시어터까지
고루 갖추신 걸로 아는데요.
이준연: 내 취미가 좀 다양했지요. 시력이 좋지 못하다 보니 밖으로 돌아다니는 사간보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혼자 즐길 수
있는 것을 찾다 보니...(웃음) 난 원고를 쓰면서도 음악을 들었어요. 동요, 가곡, 유행가 등 가리지 않고요. 그러다보니
원고료를 받으면 CD는 물론 영화 DVD를 사기를 좋아했지요. 우리 집 아이들도 나를 닮아서 음악과 영화를 모두
좋아했어요.
윤수천: 선생님께서는 퍽 가정적이셨던 걸로 아는데요, 사모님은 물론 자녀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셨다면서요?
이준연: 난 원고를 쓰고 나면 맨 먼저 우리 사남매부터 읽혔어요. 그러면 나름대로 각자의 의견을 얘기하는 데 이게 내 창작에 큰
도움이 됐어요. 평론하는 사람들에게서 듣지 못하는 평을 듣는 거였지요. 왜, 있잖아요? 평론가들은 갖은 이론을 내세워가지
고 ‘이 작품은 어떻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건 어린이들보다는 쓰는 사람들에게 하는 소리가 많잖아요.
윤수천: 옳은 말씀입니다. 저도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적엔 선생님처럼 했는데요, 재미없다는 작품은 고치거나 미련 없이 버리곤
했습니다.
이준연: 작가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요. 한 개는 자기 작품에 대한 눈이고 다른 한 개는 독자의 눈이지요. 이 두 개의 눈이 정확
할 때 좋은 작품이 써진다고 봐요.
윤수천: 선생님의 자녀 가운데서 선생님의 뒤를 잇는 자녀가 있지요? 이은경 작가와 이은하 작가요.
이준연: 은경이는 1993년 아동문예 신인상에 동화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은하는 1997년 역시 아동문예 신인상에 동시와 2000년
아동문학평론에 동화가 당선되어 등단했지요.
둘 다 어릴 적부터 문학적 재능이 있었어요. 아버지인 입장에서는 기특하고 고마운 일이지요.
윤수천: 이은하 따님은 대학 교수로도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따님이 펴낸 《이준연 아동문 학 50년》을 봤더니 선생님의 문학을
시기별, 장르별로 잘 정리해 놓았더군요. 따님의 입장에서뿐 아니라 같은 길을 걷는 후배 작가로서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몹시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또 있네요. 언젠가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 이준연 작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니까 “이준연은 나에게 아동문학의 꿈을 갖게 해준 선배이자, 스승이자, 아버지예요.” 라고 했던
기억도요.
이준연: 한 집안에서 세 명의 동화작가가 나왔다는 게 내가 생각해도 신기하다고 할까...암튼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다보니
모였다 하면 동화와 아동문학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지 뭐요. 오죽했으면 우리 집사람이 “아이고, 또 어린이 셋이 모였네
요!”하곤 했지요.(웃음)
윤수천: 저 개인적으로는 선생님의 동화를 ‘재미와 풍부한 상상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느 작품이든 잘 읽힐 뿐 아니라 읽고
나면 가슴에 또렷이 남거든요. 마치 날개를 가진 새가 들어와 알을 품는다고나 할까요. 날개, 하니까 동화집「키다리를
만드는 난쟁이」에 쓰신 머리말이 생각나네요.
나에게는 꿈나라를 날아다닐 수 있는 푸른 날개가 있습니다......나는 한 편의 동화를 쓸 때마다 씨, 별, 꽃, 나무, 돌멩이, 인형, 장난감, 호랑이, 노루, 토끼...뭐든지 됩니다.
푸른 날개는 나한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어린이들에게도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푸른 날개를 알지 못하고 마음 한 구석에 버려두고 있습 니다. 내가 가진 푸른 날개보다 더 푸르고 힘찬 날개를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이준연: 동화는 꿈의 문학이에요.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줘야 하지요. 따라서 동화 작가는 작품을 창작할 때 고난과 역경
같은 어려운 고비를 다룰 때에도 결국엔 이를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제시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뜻에서 ‘날개’는 희망으로 달려가게 하는 동력이라고 봐야겠지요.
윤수천: 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