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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이스말리아]-수에즈 운하Suez Canal
기원전에 계획한 국제 수로 수에즈 운하
최초의 운하는 기원전 7~6세기에 활동한 이집트 제26왕조의 왕인 네코 2세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에 따르면, 네코는 이집트 삼각주 유역에서 교역이 늘어나자 나일 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 건설을 시작했지만 예언자들의 반대로 중단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기원전 500년경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홍해를 거쳐 나일 강 인근의 도시인 부바스티스(Bubastis)까지 수로를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수로는 한때 이집트의 농산물을 실어 나르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나 이슬람교 내분으로 폐쇄되었다. 그러다가 1798년 나폴레옹에 의해 유적이 발견되었고, 통상로로 이용하기 위하여 개발 공사가 이루어졌지만 얼마 되지 않아 계산 착오로 중단되고 말았다.
프랑스는 1859년 카이로 주재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레셉스(Ferdinand Marie de Lesseps)에게 수에즈 운하 건설의 임무를 맡겼다. 레셉스는 토목 기사로서 정식 교육은 받지는 않았지만 젊었을 때부터 운하 건설에 대한 집념을 불태워 온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69년 우여곡절 끝에 운하가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수에즈 운하는 결국 프랑스에 의해 탄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에즈 운하는 인도에서 영국으로 가는 뱃길을 무려 6,400㎞나 단축시켰으며, 1888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에 의해 국제화되었다.
수에즈 운하의 서쪽에는 저지대인 나일 강 삼각주가 있고, 동쪽에는 지대가 높고 지형이 험난한 불모지인 시나이 반도가 자리 잡고 있다. 운하는 개통 당시 수심 약 8m, 폭은 약 22m였으나, 공사를 계속하여 1967년에는 수심 12m, 폭 54m로 일정하게 확장되어 그 길이가 168㎞나 되었다. 운하의 건설로 인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이 지역에 촌락들도 생겨났다. 수에즈 운하는 1967년 6월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으로 일시 폐쇄되었으나 1975년 다시 개통되었으며, 1975~1980년에 다시 확장하여 지금은 흘수 16m의 선박까지도 운항할 수 있다.
공해와 공해를 연결하는 뱃길을 국제 운하 또는 국제 수로라고 한다. 국제 운하는 조약에 의해 모든 외국 선박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러므로 군함을 포함하여 세계 어떤 나라의 선박도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다. 이러한 운하는 전쟁 동안에도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며, 어떤 경우에도 폐쇄되지 않는다. 또한 운하의 양쪽 출입항으로부터 4.8㎞ 이내의 구역에서는 어떠한 적대 행위도 금지되어 있으며, 시설물 일체는 불가침 구역이다.
길이 162.5 km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두 대륙의 경계를 이루는 수에즈 지협에 굴착한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의 포토사이드(지중해측)와 수에즈(홍해측)를 연결하는 세계 최대의 해양운하이다. 이집트의 사르탄에서 칙허장(勅許狀)을 취득한 프랑스인 레셉스가 설립한 만국운하회사가 1859 년 4월 22일에 건설을 착공하여 개통한 것은 1869년 11월 17일이다. 그 후 1875년 영국이 운하 회사의 주요한 주주가 되었으며, 1882년에는 이익보호를 이유로 이집트를 점령하였다. 1888년 10월 29일 종주국 터키와 유럽 8개국간에 콘스탄티노플 조약(Convention of Constantinople)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평화 또는 전시에 관계없이, 국기의 구별 없이 모든 상선 및 군함에 대해 운하를 개방하고 자유통항을 인정’, 일반적 자유 통항의 원칙을 채용하였다(1조). 국제조약에 의한 운하의 국제화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도 운하 관리의 주도권은 영국이 장악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이집트의 내셔널리즘이 고양되어 갔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베르사유(Versailles) 조약에 의해 영국은 터키가 장악하고 있던 권력을 획득하지만 1922년 2월 28일에 이집트의 독립이 선언된다. 그러나 1936년 8월 26일 영국ㆍ이집트 동맹조약 에서 영국군의 운하지대에서의 체류가 인정되어 영국의 권력은 유지된다. 1951년 10월 15일 이집트는 동맹조약의 파기를 결정하고 1954년 10월에 양국은 영국군의 단계적 철수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철수는 1956년 6월에 완료하였다.
수에즈운하의 운영 및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적용에 관해서는 다양한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우선 1948년 5월 14일의 이스라엘 독립선언을 계기로 한 제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선박 및 이스라엘에 대한 선박의 통항을 금지하였다. 이집트는 이 조치를 조약 10조에 기초한 ‘이집트국의 방위 및 공서(公序)의 유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하였다. 국제연합은 1951 년 9월 1일의 안전보장이사회결의에 의해 운하의 자유통항을 요구하였다. 영국군이 철수한 후의 1956년 7월에는 아스반 하이 댐에 대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으로부터의 원조중지에 반발한 이집트 정부가 운하회사를 국유화하였다. 1956년 8월 22일의 런던 회의에서 이집트 및 서유럽 제국에 의한 운하의 공동 관리안이 채택되었지만 이집트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 사회는 1956년 10월 13일 운하에 대한 이집트의 주권존중 및 자유통항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그런데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여 31일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군사간섭을 하였다. 이집트 정부는 4월 24일 국제연합 사무총장에 대해 콘스탄티노플 조약의 존중 및 모든 국가의 자유통항의 보장을 표명함으로써 사태는 해결되었다. 1967년 6월의 제3차 중동전쟁 및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전쟁에서도 운하는 봉쇄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선박의 자유통항이 전면적으로 승인된 것은 1979년 3월 26일의 워싱턴조약부터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운하의 법적 지위는 콘스탄티노플 조약에 기초하고 있다.
수에즈 운하
운하는 기원전 2100년에 계획되어 네코가 지중해와 연결 공사를 시작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중단 하였고 그 후 기원전 500년경 다리우스 1세가 홍해와 대염 호수(Great Bitter Lakes)를 거쳐 부바스티스(Bubastis)의 나일강과 연결하는데 성공 했다.
이 수로는 7세기 아랍의 상인들이 이집트의 농산물을 실어 가는데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백 여년 동안 사용 되다가 회교 내분으로 수로를 이용한 곡물 운반이 중단 되자 운하는 폐기 되었다. 1798년 나폴레옹이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수석 기사의 계산 착오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주 카이로 불란서 영사였던 페르디난드에 의해 1859년 동사가 재개 되었으며 그로부터 10년 후인 1869년 11월에 총연장 161 Km의 운하가 개통 되었다. 즉 이집트의 국가숙원사업이었다.
그당시 이집트는 오스만 트러크의식민지였고 식민지 태수인 무하마드알리는 운하의필요성은 인정하였지만 유럽열강이 이를교두보로이용 터키 침공의 발판을 제공할수있을거라 판단 거부하였지만 국제적여론이 워낙 드세 이를거부할 명분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기술진에 이 공사를주게된것입니다
개통 후 운하의 역사는 프랑스-영국-이집트로 이어지는 지배권의 변화와 함께 제1, 2차 세계대전과 2차, 3차 그리고 4차 중동전쟁 때 오랜 기간 폐쇄되는 아픔을 겪는다. 하지만 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계속적인 운하 폭과 깊이 확장공사를 하였다.
운하의 건설공사는 주 카이로 불란서 영사였던 페르디낭 드 레셉스 에 의해 1859년 시작되었다. 그는 토목기사로서의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젊었을 때부터 이 운하건설에 대한 집념을 품어 왔었다.
첫 삽이 떠진 후 10년동안 드 레셉스는 오로지 7460만 입방미터의 흙을 파내는 대규모 토목공사의 감독에만 전념했다. 드 레셉스는 먼저 건설기지로서 포트사이드에 인공 항구를 만들고, 2만명의 노동자들에게 신선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나일강에서 수에즈 지협까지 수로를 팠다. 북에서 남으로 공사를 진행시켜 나간 드 레셉스는 육지에 깊이 7m의 수로를 파서 도중에 있는 호수들을 연결해 나갔다. 그리하여 남부의 대비터호 (Great Vitter Lakes)와 소(小) 비터호가 홍해와 연결되어 호수가 바닷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수로를 파서 이들 호수를 다시 침사호와 연결 시켰다.
3,000마리의 낙타가 노동자들의 음료수를 싣고 사막을 지나 맨잘라호 까지 나르고, 거기서 다시 거룻배로 음료수를 포트사이드로 운반했다. 지방어민들이 징용되어 얕은 호수 위에 손으로 수로를 팠으며, 이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뗏목 위에서 잤다. 공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약 8만명의 농민들이 고용되었는데, 그들의 일급은 3 피아스터 (약 3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1863년부터 운하가 개통된 1869년 까지 노동자수는 차츰 줄어들고 대신 준설기와 굴착기가 등장했다. 1869년 10월, 프랑스 기선 루이즈에 마리호가 이 운하를 통과하여 외해로 나간 최초의 선박이 되었다. 유럽의 거의 모든 왕가의 대표들이 운하의 개통을 기념하는 식전에 참석했다.
개통일 자정 조금 전에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다. 이집트의 프리기트함 한 척이 포트사이드 밖 30km 지점에서 좌초했던 것이다. 개통식에는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영국,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선박이 새 운하를 통과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불가능하게 될지도 몰랐다. 파리에서 날아온 급전들은 개통식이 연기되어야 할 것이라는 뉴스를 전했다. 다음날 드 레셉스가 , 운하를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각국의 선박들은 사고현장에서 불과 5분 거리밖에 안되는 곳에 육박하고 있었다.
1952년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대통령 압델 나세르는 1956년 7월 수에즈 운하 회사를 국유화하였고, 기득권을 상실한 영국과 불란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강점 하는 등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 후 1967년 6일 전쟁으로 운하가 폐쇄되었다가, 1973년 사다트 대통령의 시나이 반도 탈환과 더불어, 이 운하는 이집트 정부의 관리하에 폐쇄 8년만인 1975년 재개통 되었다.
1922년이집트가 입헌 군주국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1956년까지는 영국이 그 이권을 쥐고 있었다. 나중에 나세르 대통령이 국유화조치를 취한 후에야 이집트에 반환되었다.
하루 평균 100여 척의 선박이 이용하고 있으며 전세계 물동량의 14%가 이 운하를 통과하고 있으며, 통과 소요시간은 약 15시간이 걸린다. 운하의 폭은 200 미터, 평균 수심은 20 미터인데, 교통량이 늘어남에 따라 꾸준한 준설 확장을 계속하고 있고, 현재 운하의 길이는 173 Km에 달한다. 이 운하를 건너 시나이 반도로 들어가는 연결 지점은 4곳의 나루터와 한 개의 해저 터널이 있는데 이 터널은 진입로를 포함하여 총 연장 4.5 Km이다. 운하의 항구는 홍해쪽이 수에즈 이고 지중해 쪽에는 포트사이드 이다.
수에즈 운하
무함마드 알리는 이 시기에 이집트의 지도자로 등극한다.
그는 이집트를 근대화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개혁을 단행한다.
그 중 하나가 수에즈 운하이다.
이 운하를 만들기 위해 12년이 걸렸고, 수만명을 넘는 노동자들이 혹사를 당했으며 그 때문에 이집트는 엄청난 빚을 지고 말았다.
게다가 프랑스의 차관에 의존한 것이라 이집트로써는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배하여 훗날 독일 제국이 되는 프로이센을 상대로 50억 프랑의 빚을 갚아야 할 처지였다. 이것을 눈치챈 영국이 이집트의 상황을 이용하여 1876년에 보호령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도중에 아라비 파샤가 영국과 다퉜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영국은 1914년에는 이집트를 정식으로 식민지로 삼으려 하였으나 이는 이집트인들의 막강한 저항에 부딫쳤다. 당시 이집트인들 중에는 친독적인 성향을 가진 자도 있었다(당시 독일은 영국-프랑스-러시아와는 적이었다).
당시 이집트에 다행인 점은 독자적인 군주와 내각 제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올림픽에 진출한 적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집트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때부터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집트는 1922년에 왕국의 이름으로 독립하였다. 수에즈 운하를 제외하고는 모두 완전 독립을 한 것이다. 조금 뒤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완전 반환됨.
수에즈 운하
수에즈 운하(아랍어: قناة السويس)는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이다. 1869년 11월 17일에 개통되었다. 지중해와 홍해 사이를 지날 때 육로로 혹은 아프리카로 우회해서 갈 필요 없이 유럽과 아시아를 해상로로 바로 연결해준다. 운하의 북쪽 종착지는 시나이 반도 서쪽인 포트 사이드이며, 남쪽 끝은 수에즈 인근이다. 이스마일리아가 두 곳 가운데 지점에 있다.
수에즈 운하의 길이는 192km이다. 가운데에 그레이트 비터 호를 통과하여 수에즈 만과 지중해를 잇는다. 수에즈 운하에는 갑문이 없으며, 바닷물이 양쪽 바다에서 그레이트 비터 호수로 자유로이 흘러들어온다.
운하는 이집트 정부의 수에즈 운하 당국(SCA)에서 관할한다.
수에즈 운하 위성사진
수에즈 운하는 배수량(군함) 15만톤의 선박도 지나갈 수 있다. 선박의 흘수(선박의 바닥에서 물이 잠기는 수면까지 수직 길이)가 20m까지 허용되며, 만적상태의 24만톤 수퍼탱커도 통과할 수 있다. 어떤 수퍼탱커는 너무 커서, 초과 적재량은 따로 내려 운하 소유의 보트에 실어서 따로 보냈다가, 배가 운하를 지나면 다시 싣기도 하였다.
우회로
수에즈 운하 대신 다른 길로 우회하려면 주로 아프리카의 아굴라스 곶으로 돌아간다. 이 항로는 수에즈 운하가 다닐 수 없을만큼 큰 선박이 이용하며,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기 전에는 선박들이 우회로인 아굴라스 곶으로 다녔다. 최근 소말리아 해적이 창궐하면서 안전상의 이유로 아굴라스 곶 항로를 이용하기도 한다.
1869년에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 두 대륙을 오가는 상품을 배에서 내려 지중해와 홍해 사이 육로로 운반하기도 했다. 하루에 운하를 지나갈 수 있는 선박 수는 106척이다.
수에즈 운하는 평탄한 지형 때문에 갑문이 없으며, 운하 양 끝 두 바다 사이의 해수면 차이도 미미하다.
평소에 운하에 세 척의 호송선이 순찰한다. 두 척은 남행이고 한 척은 북행이다. 첫 번째 남행 호송선은 매일 아침 시간에 운하로 진입해서 그레이트 비터 호수로 가는데, 여기서 길을 막지 않도록 통행 항로를 벗어나 정박하며 북행 호송선이 통과하길 기다린다. 북행 호송선은 엘 칸타라 인근 우회로에 정박한 두 번째 남행 호송선을 지나간다. 운하를 통과하는 속도는 8노트(15 km/h)로 11~16시간 정도 걸린다. 느린 속도로 움직여 운하 양안이 배가 일으키는 파동으로 침식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1955년에 대략 유럽의 석유 2/3이 이 운하를 통과했다. 현재 세계 해상 무역량의 7.5%는 이 운하를 통해 이동한다. 2008년 21,415척이 통과하였고, 통과료 수입이 총 $53.81억이었다. 이는 이집트의 2008년 GDP $4,525억의 1.2%에 해당한다. 1척당 평균 통과비용은 대략 $250,000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통과할 때 다음 시설을 볼 수 있다.
* 수에즈 운하Suez Canal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포트사이드 사이에 뚫은 운하로 총길이 195km, 수면의 너비는 365m, 수심 약 20m, 35피트까지의 배들이 항해 가능하다.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에 의해 1869년 개통되었지만, 이 운하건설 계획은 고대 이집트인이 이미 착수한 것이었다.
수에즈 운하 [Suez Canal, ― 運河]
이집트의 수에즈 지협을 가로질러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해수면과 높이가 같은 수로.
이 운하에 의해 지중해와 홍해가 연결되고, 아프리카 대륙과 아시아가 나누어진다.
운하길이는 지중해의 포트사이드(부르사이드)로부터 남쪽 수에즈 만까지 168㎞이며, 부하이라트알만질라(멘잘라 호)·부하이라트앗팀사(팀세 호)·알부하이라알무라(비터 호) 등의 물을 이용한다. 프랑스에 의해 건설되어 1869년에 완공된 이 운하는 유럽과 인도양 및 서태평양을 연결하는 최단거리의 항로가 되었다(→ 색인 : 수에즈 운하 회사). 운하 서쪽에는 나일 강 저지대 삼각주가 있고, 동쪽에는 지대가 높고 지형이 험난한 불모지인 시나이 반도가 자리잡고 있다. 수에즈 지협은 다양한 지형으로 되어 있다. 남쪽에는 풍화와 침식을 견디어낸 수많은 석회암 및 석고지형이 여기저기 그 모습을 현저히 드러내고 있고, 앗팀사 호수에서 남서쪽으로 나일 강 삼각주 중앙부와 카이로까지 뻗은 좁다란 계곡(앗투마이 계곡) 또한 두드러진다.
처음에 이 운하는 수심 8m에, 폭은 바닥에서 약 22m, 수면에서 57m였다. 계속된 수로 확장공사를 거치면서 1967년에 이르러 수에즈 운하는 수로 폭이 가장 좁은 곳이 54m, 수심은 운하 전체가 일정하게 거의 12m(간조)에 달했다. 1978년 이 운하에는 하루 평균 58척의 선박이 통과했다. 수에즈 운하 공사로 인해 과거 수에즈 시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던 이 지역 일대에 촌락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1967년 6월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중에는 거의 모든 주민이 소개(疏開)되었으며, 주거지도 큰 피해를 입거나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후 1975년 운하가 다시 개통되면서 이 지역 일대의 재건사업이 시작되었고, 다른 곳으로 소개되었던 주민들도 1978년까지는 거의 모두 옛 거주지로 돌아왔다. 1975~80년에 또 한 차례의 운하 확장공사가 있었고, 그결과 지금은 흘수 16m의 선박들까지도 운항할 수 있다. 데베르소이르와 앗팀사 호수, 포트사이드에 새로운 우회수로들이 건설되었고, 수로의 꺾어진 부분들이 최소 회전반경 5㎞의 직선로로 개축되었으며, 비터 호수의 정박지들은 수심 및 수로폭이 확장되었다.
수에즈 운하 위기
1956년 7월 26일 이집트의 대통령 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일어난 중동 역사상 중대한 위기.
이집트가 체코슬로바키아 및 소련과 가까워진 데 대한 보복으로 미국과 영국이 전에 이미 약속했던 아스완 댐 건설 재정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촉발되었다. 나세르는 미국과 영국의 이러한 결정에 대응해 수에즈 운하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에즈 운하 관리회사 운영권을 장악했으며 선박 통행료를 모아 5년 안에 아스완 댐을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세르가 운하를 폐쇄하여 페르시아 만과 서유럽 사이의 석유 수송을 차단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적 노력을 통한 위기 해결에 실패하자 수에즈 운하 운영권을 다시 장악하고, 가능하다면 나세르도 실각시키기 위한 군사행동을 비밀리에 준비했다. 이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즉시 이스라엘과 공동전선을 모색했다. 이스라엘은 나세르의 티란 해협(아카바 만 어귀에 있음) 봉쇄와 1955~56년 이집트가 지원하는 의용군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공격 때문에 이집트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 10개 여단(旅團)은 이집트를 침략해 이집트군을 무찌르면서 수에즈 운하로 전진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이 모두 운하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국제연합(UN)의 결정에 따라 정전(停戰)을 시행하기 위해 자신들이 직접 개입할 것임을 선언했다. 그해 11월 5, 6일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사이드 항과 파우드 항에 상륙해 운하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으나 이 군사행동은 영국·프랑스 본국 및 UN의 반대, 소련의 개입 경고로 즉시 중단되었다. 그해 12월 22일 UN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철수시켰으며 이스라엘군도 1957년 3월 철수했다. 수에즈 위기를 통해 나세르는 민족주의 운동의 승리자이며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지는 못했지만, 티란 해협을 운항할 수 있는 권리를 다시 얻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지역에서 행사하던 그들의 영향력을 거의 잃었다.
태어난 때 | 1918. 1.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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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곳 | 알렉산드리아 |
죽은 때 | 1970. 9. 28 |
죽은 곳 | 카이로. |
소속 국가 | 이집트 |
직업 | 대통령 |
이집트의 군장교·총리(1954~56)·대통령(1956~70).
논란이 많았던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서 단명했던 아랍 연합공화국(1958~61)을 세웠고, 이스라엘과 2차례 전쟁(1956, 1967)을 치러 패배했으며, 요르단 내전(1970)을 중재하는 등 아랍 세계의 정치에도 관여했다.
알렉산드리아 바코스 지구의 비포장 도로변 흙벽돌집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지방 우체국장을 맡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이집트 정부는 나세르가 농민 출신임을 보이기 위해 공식자료에서 그의 선조들이 살던 상(上)이집트의 원시 마을인 바니무르를 그의 출생지로 기록했다. 그의 아버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빈곤한 삼각주 마을인 알카타티바로 전근했고 여기서 나세르는 처음으로 학교에 다녔다. 그뒤 카이로로 가서 당시 영국 정부의 감옥에서 막 풀려난 삼촌과 함께 유대인 9가구가 사는 건물에 방을 얻어 살았다. 학교에서 영국인 교사들을 포함해 여러 교사들과 끊임없이 충돌을 빚었고 반(反)영국 가두시위에 자주 참여했으며 어느 한 시위에서 일격을 맞아 일생 동안 이마에 흉터가 남았다. 중학교를 마친 뒤 몇 달 동안 법과대학에 다니다가 왕립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소위로 졸업했다.
수단에 주둔해 있던 이집트군에서 복무하는 동안, 3명의 동료 장교 즉, 나중에 아랍 연합공화국의 부통령이 된 자카리아 모히에디네, 육군원수가 된 아브델 하킴 아메르, 그의 후임 대통령이 된 안와르 아스 사다트를 만났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이집트 왕조를 타도할 것을 목적으로 한 '자유장교단'이라는 비밀 혁명조직을 결성했다. 신생 이스라엘에 대항한 1948년 아랍 전쟁에서 나세르의 대대는 다른 두 대대와 함께 팔루자 지대(Faluja Pocket)라고 부르던 아랍의 몇 개 마을에서 이스라엘군에게 몇 주 동안 포위당하기도 했다.
1952년 7월 23일 나세르는 89명의 자유장교단원들과 함께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군주제를 몰락시켰다. 사다트는 파루크 왕과 몇몇 지배층 인사들을 즉각 공개처형하자고 주장했으나 나세르는 이를 물리치고 파루크 왕 일행의 망명을 허용했다. 모하마드 나기브 소장을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하고 나세르가 이끄는 11명의 장교들로 구성된 혁명평의회가 정부를 장악했다. 그뒤 1년 이상 나세르는 눈치빠른 외국 특파원들도 그의 존재를 모를 만큼 자신의 실제 역할을 잘 숨겼다. 1954년 봄 복잡한 일련의 정치적 음모로 나기브는 해임·연금당하고 나세르가 막후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스스로 총리가 되었다. 같은 해 한 광신적인 이집트인이 알렉산드리아의 대중집회에서 나세르를 암살하려 했다. 범인은 자신이 '무슬림 형제단'의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했으므로 나세르는 이 극단적인 아랍 종교조직을 탄압했다.
1956년 1월 나세르는 일당 정치체제에 이슬람교를 공식 종교로 삼는 사회주의 아랍 국가를 표방한 이집트 헌법을 공포했다. 6월 국민투표에서 500만 명의 투표자중 99.948%가 단일 대통령 후보인 나세르에게 찬성표를 던졌고 99.8%의 찬성으로 헌법이 승인되었다. 그가 명목·실질상의 통제권을 장악하자 이집트의 앞날은 밝아 보였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전쟁물자에 관한 비밀협정을 맺었고, 영국과 미국은 아스완 하이 댐 공사의 첫 단계에 2억 7,000만 달러를 원조하기로 했다. (→ 색인 : 수에즈 위기)그러나 1956년 7월 20일 미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미국의 원조를 취소했고 다음날 영국도 이 조치를 따랐다. 5일 뒤 알렉산드리아의 대중집회 연설에서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 이후 5년 동안 이집트가 징수하는 통행세로 댐을 건설할 것을 약속했다. 10월 29일 자녀 중 1명의 생일파티에 참석해 있을 때 나세르는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를 침입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이틀 뒤 프랑스와 영국 비행기가 이집트 비행장을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의 샤름앗샤이흐까지 점령했고 이집트 공군이 사실상 전멸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세르는 아랍 세계에서의 명성을 전혀 손상받지 않고 치욕스러운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54년에 쓴 〈혁명의 철학 Philosophy of the Revolution〉에서 그는 "어떤 영웅도 수행하지 못했던 영웅적이고 영광스러운 역할"에 대해 언급하고, 5,500만 명의 아랍인, 2억 2,400만 명의 아프리카인, 더 나아가 4억 2,000만 명의 이슬람교도의 지도자가 되리라는 포부를 펼쳐 보였다.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아랍 연합공화국'을 결성했고, 나세르는 아랍 연합공화국이 언젠가는 전 아랍을 통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1961년 시리아가 탈퇴했으나 이집트는 여전히 아랍 연합공화국이라는 명칭을 고집했다. 아랍 연합공화국은 나세르 자신의 3단계 구상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의 레셉스가 건설했는데요 레셉스는 그 당시 이집트의 근대적 태수였던 무하마드 알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하마드 알리는 그 당시 맘룩조 멸망때부터 이집트에 대한 영향력을 뻗치고 있었던 오스 투르크 제국에 대해서 타국을 침범하는 대신에 독립을 획득했고 이집트 근대화의 열망을 가지고 수에즈 운하 건설을 레셉스에 의뢰해서 공사에 착수 했습니다. 당시 수에즈 운하 건설은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 3세가 큰 관심을 지니고 있었고 세계 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던 이슈였습니다. 그러나 공사비를 충당하려고 마련한 주식의 대부분을 영국이 구매해 영국이 수에즈 운하 의 경영권을 가져가게 되었고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가져감과 동시에 이집트를 보호국으 로 전락시킵니다. 수에즈 운하의 건설은 희망봉을 돌아가는 전 루트보다 몇천km 에 달하는 운송 거리를 줄 여 주었고 매일 수백대의 선박들이 수에즈를 지나 아시아를 향하고 아시아에서 들어왔습 니다. 물론 다량의 통행료 뿐만 아니라 유사시 봉쇄도 가능했기 때문에 영국이 기를 쓰고 뺏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후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의 대통령인 나세르가 강제로 국유화 하기 전까지는 계속 영국 의 소유로 남아 있다가 이집트인의 피와 땀이 들어간 공사의 대가를 영국이 챙기는 것은 더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영국에게 강제로 수에즈 운하를 뺏습니다. 한때 이 문 제로 영국은 이집트와의 전쟁까지 고려하지만 소련의 개입을 두려워한 미국의 중재로 이 집트와 화해가 되었지요. 이런 일들로 나세르 대통령은 지금까지 이슬람 세계의 영도자 이자 이집트의 국부로 숭상받고 있습니다. |
수에즈 운하
무바라크 축출 뒤 통과說… 이스라엘 "코앞에 적이…"
이란정부가 1979년 이슬람 공화국 수립 후 32년 만에 군함 두 척을 수에즈 운하를 통해시리아로 보내는 문제를 둘러싸고 관련국들 간에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아비그도르 리에베르만이스라엘외무장관은 16일 "이란 군함 두 척이 16일 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지중해를 거쳐 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는 명백한 도발"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집트 수에즈 운하청은 "군함이 운하를 통과하려면 48시간 전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어떤 정보도 받은 게 없다"고 부인했고, 실제로도 17일 오전까지 군함은 통과하지 않았다. 여기에 필립 크롤리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란 군함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
AP통신은 17일 이집트 관리의 말을 인용해 "이란이 이스라엘·미국의 반응이 나온 이후 군함 통과 허가 요청을 철회했다"고 했으나, 이란 국영TV는 "군함 두척이 수에즈 운하 통과를 위해 현재 운하쪽으로 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란 군함의 수에즈 운하 통과에 대해 관련국들이 주목하는 것은 수에즈 통과 시기와 내용 때문이다. 우선 이란 군함이 수에즈 운하를 거쳐 시리아로 가면 이스라엘군과 가장 가깝게 위치하게 된다. 이스라엘 입장에선 '턱밑'에 적의 군함이 배치되는 셈이다. 이스라엘·미국의 걱정이 클 수밖에 없다. 또 이란 군함의 수에즈 통과 문제는 그동안 이란을 견제해왔던 호스니 무바라크 전이집트대통령이 축출된 이후에 나왔다. 무바라크 집권기인 지난 30여년간 이란 군함은 한차례도 수에즈 운하를 건너지 못했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 닐 패트릭 박사는 "이집트 혁명으로 지역정세가 불안한 상황에서 이란이 수에즈 운하 통과 계획을 취소하지 않는다면 긴장 고조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