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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교회들을 오해한 가이슬러의 치명적인 문제점(2)
김홍기 목사는 예상대로 여덟 번째 글도 가이슬러 글의 나머지 부분을 번역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이번 글 역시 김홍기 목사와 가이슬러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분리된 세 위격들’(잠재적 삼신론)을 기준삼는 삼위일체관을 토대로 쓰여졌다. 우리는 한국 교계가 이번 토론을 통해 이들의 이러한 <잠재적 삼신론 사상>이 정통 신학자들의 <균형잡힌 삼위일체론>과 어떻게 다른지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거듭 지적하거니와, 김 목사가 소개한 가이슬러 글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1) 무지함: 이들이 성경적인 ‘위격 간의 상호 내재’(요14:10)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즉 이들에게는,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들을 포함한 삼위 전체’(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all in each’)라는 정통 신학자들이 가졌던 인식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각 위격이 완전한 하나님’(each person is fully God)이심을 말함으로써 결국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주장한다.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이처럼 삼위가 ‘분리’되는 구조적인 약점을, ‘성자가 성부 안에, 성부가 성자 안에 계신다’라는 ‘위격 간의 상호내재’ 이론으로 보완해 왔다. 그러나 김 목사는 이러한 안전 장치마저 ‘지방 교회식 이단론’이라며 거부한다. 그 결과 이들은 변명의 여지마저 ‘구조적으로 차단된 분리된 세 하나님들’ 신봉자가 되었다. 가이슬러(김 목사)는 이 한 가지만 보아도 함량 미달의 변증가에 불과하다.
2) 오해: 또한 이들은 정통 신학자들이 인정하는 ‘경륜적인 삼위일체론에서의 기능상의 동일시’(고후 3:17)를 양태론으로 오해한다. 이것은 위격을 동일시 한 사도 바울(고후 3:17)과 주 예수님 자신(요14:9-11)까지 양태론 이단이 되게 했다. 그러나 주 예수님까지 양태론자로 만드는 판단 기준이라면 그것은 설득력이 없다. 이 점이 가이슬러와 김 목사가 아무리 지방 교회측을 향해 ‘경륜적 양태론’ 운운해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공허한 외침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3) 이중 잣대 적용: 이 외에도 이들은 삼위 전체가 포함된 ‘한 신격’(골2:9, 마28:19) 개념에 무지하거나 반 틸과 지방 교회측에게 각기 다른 이중 잣대를 적용하는 변증을 했다. 4) 왜곡된 자료로 판단: 마지막으로 전후 문맥을 무시한 왜곡된 자료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이들의 또 다른 고질적인 문제점이다.
위 네 항목들은 가이슬러가 최소한 지방 교회측에게는 전혀 전문가답지 않게 변증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그럼에도 김 목사는 한국 교계를 향해 가이슬러가 대단한 변증가인양 계속 과대 광고를 하고 있다. 즉 김 목사는 ‘가이슬러가 이단이라고 했으니 이단이다.’라는 식이다. 그렇다면 가이슬러가 칼빈주의 5대 교리도 비성경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으니 칼빈주의에 기초한 한국의 장로교단들 역시 비성경적인 이단이 되어야 옳다. 그러나 김 목사는 이런 가이슬러의 반 장로교단적인 모습에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1. 가이슬러의 학력과 경력이 주는 인상은 무엇인가?
김홍기 목사가 자신이 “세계 최초”로 한글로 번역했다는 말까지 써가며 가이슬러의 글을 소개한 것은 역설적으로 지방 교회측의 반박 자료 등을 통해 영어권 내에서만 폭로된 가이슬러의 치부가 한국 교계까지 알려지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또한 김 목사는 가이슬러의 학력과 경력을 장황하게 소개했지만, 그러한 세속적인 성취만으로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겸손하게 주님의 긍휼을 앙망하여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야 ‘하나님’(엡1:17)과 ‘그리스도’(하나님의 비밀이신)(골2:2)와 그분의 ‘몸된 교회’(그리스도의 비밀인)(엡3:4-6)를 참되게 알 수 있다(마16:17).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이슬러가 관여했다는 100여권의 책들 중에서 그가 그리스도를 ‘생명’(요11:25)으로 알고, 몸인 교회를 ‘그분 자신의 충만’(엡1:23)으로 알고 체험한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는 겉 핥기식의 교리적인 성경 지식은 있으되(요5:39-40), 정작 성경의 핵심은 놓치고 있는 것이다(요10:10, 마16:18).
또한 김 목사의 의도와 달리, 소개된 가이슬러의 학력과 경력은 몇 가지 우려와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먼저 가이슬러가 신학을 공부했다는 휘튼 칼리지는 한 종신 여교수가 “무슬림과 기독교는 같은 하나님을 예배한다”라고 말해 논란이 된 바로 그 곳이다(교회와 신앙, 2016.3.23자 관련기사 참조).
또한 가이슬러가 철학을 공부했다는 로욜라 대학은 천주교의 예수회(Jesuit)가 설립한 학교이다. 예수회의 주된 목적은 가톨릭 교리와 사상을 전파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성경과 개신교의 가르침들은 교묘하게 왜곡되고 거부된다. 학교 이름이기도 한 ‘로욜라’(Loyola)는 이 예수회의 창시자이다. 가이슬러는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C.S. 루이스(말년에 천주교로 개종함)와 가톨릭 성인 중 한 명인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영향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라고 평가된다. 이러한 그의 가톨릭 관련성은 요한계시록의 큰 바빌론과 음녀를 로마 천주교로 본 위트니스 리의 해석에 왜 그가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이해하는 한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같다. 물론 가이슬러는 개신교인이다.
가이슬러는 현재 ‘복음주의 신학자 협의회‘(ETS) 와 ‘복음주의 철학자 협의회’(EPS)에 등을 돌린 상태이다. 그는 복음주의 확산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는 풀러 신학교를 우습게 여기고, 지방 교회측을 가장 철저히 연구한 CRI와 AIA(행동하는 답변)와도 불화하고 있다. 그는 칼빈주의 5대 교리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반대한다. 오직 자신의 책을 펴낸 적이 있는 ‘하비스트 하우스’ 출판사, 그리고 자신이 동역자(동업자)로서 자주 출연하는 기독교 TV 쇼 진행자인 존 앵커버그 이 둘과 직 간접적으로 관련을 갖는 ‘오픈 레터 서명자들’ 정도가 가이슬러의 우군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서명자들 역시 엘리옷 밀러의 말을 빌리자면, 왜곡된 1차 자료로만 지방 교회들을 판단하고 있는 “가장 나쁜 종류의 이단 사냥”의 희생자들이다.
요약하면, 가이슬러는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여 교리적인 성경 지식은 있으되, 생명도, 주님의 몸도, 주님의 몸의 하나도 모르며, 단지 자신의 논리적 사고 능력을 과신하는 또 한 명의 <잠재적 삼신론자>일 뿐이다.
2. 가이슬러는 칼빈주의의 핵심인 ‘튤립’(TULIP)도 공격하여 이단시 한다.
한국 교계의 다수를 차지하는 장로 교단은 칼빈의 가르침을 성경 다음으로 매우 비중있게 여긴다. 이러한 칼빈의 가르침은 통상 1) 전적 타락, 2) 무조건적 선택, 3) 제한된 속죄, 4) 저항할 수 없는 은혜, 5) 성도의 견인으로 요약되고, 그 영어 첫 글자들을 모아 ‘TULIP’(튤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가이슬러는 <Why I Am Not A 5 Point Calvinist?>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유튜브 강연에서, 위 다섯 가지 항목들 각각에 대해 그것이 왜 비성경적인 가르침인지를 조목 조목 비판하고 있다. 물론 그 유튜브 아래 올려진 댓글에는 독자들의 논쟁적인 반응들이 길게 달려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d9n_NUoslp0). 그의 이런 주장의 진위를 떠나서 만일 가이슬러의 비판이 정당하다고 간주한다면, 존 칼빈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신봉하는 한국 장로교단은 구원론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이단이 될 수밖에 없다.
김홍기 목사는 현재 자신이 “정통 신학의 보루”라고 광고한 ‘가이슬러가 지방 교회들을 양태론 이단이라고 했으니 지방 교회들은 이단이다’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렇다면 바로 그 가이슬러가 칼빈주의 5대 교리가 비성경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으니 장로 교단 역시 구원론에서 비성경적인 이단이 되어야 옳다. 만일 ‘같은 가이슬러의 비판이지만, 지방 교회측만 이단이고 장로 교단측은 이단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두 개의 다른 저울추를 사용한 것임으로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 될 것이다(신25:13, 16).
3. 이사야 9:6의 “영존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해석 문제
지금부터는 김 목사가 소개한 가이슬러의 주장들을 하나씩 재반박하고자 한다. 김 목사가 지난 토론 글들에서 가이슬러 본문을 가져와 사용하였기에 지방 교회측은 그중 상당 부분은 이미 반박했다. 따라서 이 글은 추가 반박이 필요한 것들에 집중하고 필요하면 예전 반박을 간략히 소개할 것이다. 사실 아래에서 검토할 가이슬러의 주장들 자체도 이미 영어권에서는 수 년 전에 지방 교회측에 의해 철저히 반박된 것들이다. 가이슬러는 현재 이에 대해 재반박 없이 5년째 침묵을 지키고 있는 중이다.
가이슬러는 이사야 9장 6절의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1) 신약 용어이고, 2) 히브리어 원어 성경인 탈굼은 “메시아의 영원함”을 가리키며, 3) “영원한 생명의 공급자”라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러한가?
1) ’아버지’가 신약 용어라는 가이슬러의 주장: 지방 교회측은 이미 <Brothers, Hear Our Defense>(2)에서 이런 가이슬러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거짓임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삼위일체의 첫 번째 위격으로 사용될 때, ‘아버지’라는 용어는 명백히 신약적인 용어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틀렸다. 사무엘하 7장 12-14에서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여호와에게서 임한 다음의 말씀을 전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의 왕위를 견코케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예표론에서 이 예언은 솔로몬을 가리켰지만, … 다윗의 씨에 관한 그 예언의 참된 성취이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마 9:27; 12:23; 15:22; 20:30-31; 21:9; 22:42, 45; 눅 1:32; 롬 1:3; 계22:16).
가이슬러가 공동 저자로 되어 있는 한 책에서 그는 사무엘하 7장 14절에서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리라”라고 한 것은 ‘다윗의 계보에 속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는 로우즈가 그랬듯이 이 절이 다윗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임을 인정한다. 그리스도는 아들이시기에 하나님을 가리켜 ‘그의 아버지’라고 한 표현은 신격 안에 계신 아버지를 가리켜 말한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가이슬러와 로우즈가 삼일성의 첫 번째 위격을 가리키는 ‘아버지’는 구약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주장이다(위의 책, 68쪽).
2)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단순히 “메시아의 영원하심”이라는 가이슬러의 주장: 지방 교회측은 이 점에 대해서도 위 지방 교회측 변증서 안에서 상세히 반박했으나, 지면상 가이슬러가 의존한 ‘탈굼’ 번역 부분에 대한 반박만 인용 소개하고자 한다.
핀란드에 있는 ‘아보 아카데미’의 유대학 분야의 구약 강사직을 맡고 있고, 1995년부터 ‘탈굼 연구를 위한 국제기구 조종 위원회’(the Steering Committee of the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Talgum Study)의 일원이기도 한 로저 싸이렌(Roger Syrén)은 위 절에 대한 탈굼 학자들의 의역에서 “그분의 이름은 이전부터 불리웠다”라는 표현은 별도로 독립되어 있다. 즉 히브리어 본문에서와 같이 약속된 메시아에 대한 묘사의 연장이 아니다라고 논평했다. 싸이렌은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따라서 탈굼 학자들은 메시아에게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기 9장 5절(6절)의 본문을 조작했던 것으로 보인다(위의 책, 75쪽).
지방 교회측은 위 내용이 포함된 반박문에서, “가이슬러와 로우즈는 성경이 고백한 것을 고백하기보다는 이렇게 생략한 해석을 옹호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회피하기 위하여 의역한 탈굼에 근거해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했다.”라고 가이슬러의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3) ‘아버지’가 영원한 생명의 공급자 라는 가이슬러의 주장: 이 역시 ‘위격 간의 동일시’라는 교리적 모순을 회피하려는 꼼수요 근거도 설득력도 없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아들은 …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이사야 9장 6절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것은 성경을 쓰여진 문자 그대로 읽되, 그것을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방면의 동일시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방 교회측 신학 잡지인 ‘확증과 비평’ 고정 기고가인 케리 로비쇼우는 1996년 1월호인 창간호에서 ’Some Biblical Trinitarian Conundrums’(성경적인 삼위일체의 몇가지 난제들)이라는 제목 아래서 이 문제를 깊게 다룬 바 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이 성경상의 삼위일체에 대한 난제를 푸는 열쇠이다. 이 세 구절은 모두 매우 경륜적인 구절들이다. 이사야 9장 6절에서 말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바 된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경륜의 시작인 그분의 육체 되심이다. 그분이 사람이 되셨을 때 아들은 아버지 및 그 영과 독립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의 오심은 또한 아버지의 오심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인데, 어떻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십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그대가 믿지 않습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요 14:9-10). 확실히 아버지는 아들과 동일시되지 않고 아들도 아버지와 동일시되지 않지만, 삼일성의 세 분은 서로가 절대로 분리되어 계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우실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항상 그분 안에, 그리고 그분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영원한 정체성 안에서 하나님은 구별된 세 분이시나, 그분의 경륜적인 구원하시는 행동에 있어서 그분은 한 분으로 일하시며, 주신 바 된 아들은 그분의 일 안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로 불리우실 것이다(전문: http://www.btmk.org/proof/?mode=proof_lst&p=1&i=69&f=&w=).
4. 고후 3:17의 “주는 영이시다” 해석 문제
이 역시 이사야 9장 6절과 동일한 ‘난제’이나 균형잡힌 정통 신학자들의 이해처럼, 이것을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의 위격 간의 동일시가 아니라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기능상의 동일시로 보면 쉽게 해결 될 문제이다. 그럼에도 가이슬러처럼 무리하게 성경 본문을 뒤틀어 이해하려고 하거나, 성경 본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말하는 이들을 양태론자라고 성급하게 단정하여 공격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해당 문맥은 ‘여호와이신 성령’을 의미한다는 가이슬러의 주장: 가이슬러는 “수 많은 해설자들”이 이 구절에서 ‘주’는 예수님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의미의 ‘성령’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 교회측은 아타나시우스와 찰스 하지를 포함한 더 많은 권위있는 성경 교사들이 이 본문에서의 ‘주’는 예수님을,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말한 점을 구체적인 출처 제시를 통해 밝히고 있다. 물론 이 명단에는 박형용 박사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korean/responses/Geisler-Rhodes/scholars-on-Christ-being-the-Spirit.html).
5. 요14:10에 있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 해석 문제
가이슬러는 삼위가 상호내재하시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들은 아버지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을 포함하고” “이것은 그것을 양태론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가이슬러는 지금 자신의 이런 말이 주 예수님을 양태론자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임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왜냐하면 해당 문맥은 빌립이 주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자 주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인데, 어떻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십니까?”(요14:19)라고 자신과 아버지를 동일시 하시면서 그 근거로 자신과 성부께서 상호 내재하심을 언급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가이슬러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믿기 보다는 자신의 조직신학 체계와 철학적 논리의 틀 안에서 성경을 읽다보니, 심지어 주 예수님까지도 양태론자라고 정죄하는 참람한 말을 한 셈이다. 이것은 김 목사가 거듭 과대 광고한 가이슬러의 세속적인 학력과 경력이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가이슬러를 공격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 특히 삼위일체 관련 진리는 인간의 지력과 논리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다만 성경의 모든 말씀에 아멘하고, 잘 모르거나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은 빛 가운데 이해되도록 낮은 자세로 주님을 앙망하며 기다리는 태도가 건강한 신앙인의 모습일 것이다.
소위 ‘사위일체’에 대한 가이슬러의 비판에 대하여: 가이슬러는 지방 교회의 주장이 터무니 없음을 예증하는 증거로 위트니스 리가 ‘넷이 하나 안에 계신 하나님’(four-in-one-God)을 주장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자신의 ‘분리된 세 하나님들’ 사상에 근거한 비성경적인 비판에 불과하다. 만일 그가 (1) 성육신하신 주 예수님은 제 2격 이심(갈4:4)과 동시에 삼위가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 전체(fully God)이시기도 하다(골2:9). (2) 주님의 몸은 이러한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믿는 이들 안에서 충만하신 것이다(엡1:23)라는 균형잡히고 성경적인 관점만 가진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럼에도 가이슬러는 “리는 그리스도의 몸(교회)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과 같은 ….정통 삼위일체의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런 말은 가이슬러의 교회관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빗나간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도 요한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이 내 안에 있으며, 내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요14:20)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부활시 성취되었고, 그 성취된 실재가 바로 주님의 몸이다. 주님은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과 그리스도의 몸을 동일시 하셨다(행9:4-5).
따라서 위트니스 리가 “이 넷은 아버지, 아들, 성령, 그리고 몸이다. 신적인 삼위일체의 셋은 혼동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라고 한 말은 전적으로 성경에 따른 것이며 전혀 문제가 없다. 오히려 “창조주인 하나님의 세 위격들과 피조물인 교회가 하나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가이슬러의 주장이 비성경적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가이슬러는 삼위일체론 뿐 아니라 기독론과 교회론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6.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차이에 관하여
이 단락에서 가이슬러가 한 말의 대부분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다룬 것들이다. 즉 1) 위트니스 리가 한 곳에서는 ‘세 위격들의 구별을 주장’하나 다른 곳에서는 ‘페르소나’(three Persons)라는 용어 사용을 꺼리는 것이 모순이라는 지적은, ‘페르소나’라는 용어 자체가 주는 한계(삼신론이라는 인상)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 위격들이 구별되신다’라는 믿음을 포기한 것은 아님을 여러번 밝혔다.
2) CRI가 예전에 ‘모순’이라고 생각했던 지방 교회들의 용어적 표현들을 이제는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에 가이슬러가 이의를 제기한 것에 대해, ‘하나님은 한 인격이시다’(마28:19)라는 말은 삼위가 다 포함된 ‘한 신격’(골2:9) 개념임으로, “하나님은 구별된 세 위격”이시라는 또 다른 진술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3) 위 두 가지 외에 추가하여 말하자면, 가이슬러는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라는 구분 자체를 부정하는 듯하다가 뒤에서는 “경륜적인 삼위일체는 기껏해야 오직 하나의 본질적인 삼위 일체의 활동들에 관해서 말하는 방법일 뿐이지 그의 본질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제대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가이슬러의 이러한 이해에 공감하고 동의한다. 그러나 다음 단락에서 다룰 가이슬러의 주장에는 강하게 반대한다. 거듭 지적해 온 것처럼, 가이슬러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 ‘한 신격’, ‘위격 간의 경륜적인 동일시’ 등에 관한 이해가 희미함으로 이런 논란이 반복되고 있다.
가이슬러가 지방 교회측과 CRI를 양태론으로 오해한 핵심 부분들에 대한 반박과 해명
우리는 아래에서 가이슬러가 말한 부분을 먼저 인용 소개하고, 해당 문제제기에 대한 지방 교회측의 반박 내지는 해명을 그 뒤에 적도록 하겠다.
1) (가이슬러) ”궁극적으로, 여기에서 지방교회(그리고 CRI 변증가들)의 문제는 이것이다. 첫째로, “본질적인 삼위일체”에 있어서 그들은 a) 하나님 안의 참으로 구별된 세 위격들을 확언하지 않는 전통적인 양태론적 이단 교리를 가지고 있든지”
반론: 우리는 이미 ‘본질적인 삼위일체’ 상의 삼위는 영원히 구별되심을 여러 차례 밝혔다. 가이슬러 본인도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시인했다. “(가이슬러)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확언을 한 것으로 인용된다. “즉 우리는 영원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와 오직 한 본질을 소유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위격들이 혼동되어서는 안 되고 본질이 나뉘어져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삼위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에서 하나이시다.” 따라서 가이슬러의 ‘전통적인 양태론 교리” 운운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2) (가이슬러) “아니면 b) 하나님은 한 위격(one Person)이실뿐 아니라 한 위격이 아닌 구별된 세 위격들이시기도 하다는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반론: 이 역시 양립이 가능한 말이며 결코 모순이 아니다. 즉 하나님은 삼위 전체가 포함된 한 신격(골2:9) 개념에서는 ‘one Person’이라고 할 수 있다(마28:19에서의 ‘세 위격들, 한 단수의 이름’ 참조). 단지 가이슬러가 성경적인 ‘신격’ 개념에 무지하여 모순처럼 보일 뿐이다.
3) (가이슬러) “둘째로, “경륜적 삼위일체”에 있어서 그들은 양태론의 새로운 하부 범주를 구성하는, 경륜적 양태론(operational modalism)이라 부를 수 있는, 이단 교리를 가지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러한 교리는 비정통적인 것으로 배척되어야 한다.”
반론: 이것은 정통 신학자들이 인정해 온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의 위격들 간의 기능적인 동일시’에 대한 가이슬러의 이해 부족에서 나온 말일 뿐 결코 ‘이단 교리’가 아니다. 사실 ‘경륜적인 양태론’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표현이다. 만일 그럼에도 가이슬러가 위와 같은 주장을 계속 고집한다면, 가이슬러 자신이 사도 바울과 주 예수님까지도 양태론자로 정죄하는 참람한 이단으로 규정될 것이다.
만일 위 내용들이 김홍기 목사가 지난 일곱 번째 글에서 언급한 “지방 교회를 ‘양태론 이단’으로 규정한 이유”이자 “미국의 CRI를 ‘이단 옹호자’요 ‘양태론 이단’으로 규정한 배경”이라면 그것은 전혀 근거없는 매우 경솔한 판단이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김홍기 목사가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앞으로 더 이상 위 가이슬러의 말을 근거로 지방 교회측과 CRI를 이단 운운 하는 표현을 자제해 주기 바란다.
“세 번의 나타나심” 안에 있는 한 위격이신 하나님, 그리고 진행적 형태의 양태론
가이슬러는 해당 단락에서, 위트니스 리 책자 여기 저기에서 자신이 보기에 양태론으로 보일만한 언급이나 비유들을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내어 비판하고 있다. 이 역시 가이슬러의 ‘분리된 세 위격들 사상’ 그리고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하여 그분께서 행하신 경륜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오해일 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내용들이다. 우리는 가이슬러의 근본적인 문제점 두 가지를 먼저 다루고 이어서 그가 인용 비판한 위트니스 리 본문들에 대해 간략하게 해명하고자 한다.
1) 가이슬러가 하나님의 경륜을 말하는 성경 본문에 대해 무지함
이사야 54장 5절은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라고 말씀한다.
위 성경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요 ‘구속주’이시며 ‘남편’이시라고 말한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고 상호내재하시는 한 신격이신 하나님은, 구약에서 창조주로 일하셨고(창1:31), 아들 하나님 안에서 성육신하셔서 구속자가 되셨고(요19:30), 부활 후에는 생명으로 믿는 이들의 영 안에 들어와 한 영되심으로 우리의 남편이 되셨다(고후11:2, 고전6:17, 요3:6). 그리고 지금은 우리 안에서 맏아들(남편)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신부로 단장하고 계신다(롬8:29, 엡5:26-27, 계22:17). 그 최종 단계는 그리스도의 몸이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다(계21:2). 이러한 그분의 ‘창조’와 ‘구속’과 사람과의 연합 즉 ‘건축’은 창세 전에 예정하신 ‘휘오데시아’(υΐοθεσίαν, 엡1:4-5, 갈4:5, http://www.localchurch.kr/church/3053)를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성취하는데 필수적인 과정들이다.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두 단계는 그분의 성육신과 부활이다. (1) 먼저 교회 역사상 성육신에 대한 논란 과정에서 가장 많은 이단들이 나왔지만, 그러한 혼란들은 칼케돈 신조로 정리가 되었다. 그러나 (2) 부활하신 분은 누구이시며 현재 어떤 상태에 계신가 하는 문제는 부활하여 생명주는 영이 되신 주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관계에서 여전히 이해가 쉽지 않다(요20:22, 요7:39, 행13:33,고전15:45, 롬1:3-4, 고후:3:17). 위트니스 리는 700쪽이 넘는 <신약의 결론-그리스도>(한국복음서원) 편에서 이런 난제들을 잘 설명하고 있으나 가이슬러는 ‘한 신격’ 개념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깊은 혼돈 속에 빠져 있다.
2) 가이슬러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 무지함
저명한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는 아래 인용문에서 정통 교부들인 “니케아 교부들”의 글들이 상당 부분에서 삼신론적인 인상을 주지만, 그것을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방면을 강조한) 사벨리우스의 견해를 취하여 상쇄시킴으로써 양극단을 피할 수 있었음을 증언한다. 위트니스 리도 원칙상 같은 경우이다. 그럼에도 가이슬러(김 목사)는 위트니스 리 글에서 ‘경륜적인 방면’의 언급들만 가져와서 양태론으로 오해하고, 정작 자신들은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만 고집하여 잠재적 '삼신론'에 빠져 있는 것이 현재 처한 상황이다.
"Many passages of the Nicene fathers have unquestionably a tritheistic sound, but are neutralized by others which by themselves may bear a Sabellian construction; so that their position must be regarded as midway between these two extremes"(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II, p 674,”교회와 신앙, 96년 10월호, 165-166쪽).
3) 양태론으로 오해될 만한 위트니스 리 언급들에 대한 해명
(1) “집에서는 아버지, 대학에서는 교수, 병원에서는 의사인 이 남자는 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세 사람이다.”
(2) “하나님은 사람이 볼 수 없는 하늘에서는 아버지이시고, 사람들 가운데 표현되실 때는 아들이시며, 사람들 안으로 오실 때는 성령이시다.”
(3) “수박이 주스로 진행되었을 때 그것은 쉽사리 우리 안으로 취해져서 참으로 우리의 요소가 된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진행되었고, 지금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4) “모든 사람들의 창조주는 사람이 되셨다. ...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 그리스도는 무덤에 장사되셨다. ... 삼일 후에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하셨다. 부활을 통하여 또한 부활 안에서 그분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다.”
반박 또는 해명: 위 사례들은 위트니스 리를 양태론이라고 정죄하는 이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써먹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언급들은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이 아니라 그분의 구원의 경륜에서 그러하시다는 것이다. (1)의 경우는 위 이사야 54:5처럼 한 신격(성부, 성자, 성령)이 창조주, 구속주, 남편이신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2)-(4)의 경우는 역시 <한 신격의 하나님>께서 인성(人性)을 입고 오셔서 죽고, 부활하신 후 사람 안에 들어오신 과정들(사복음서와 서신서들)로 설명될 수 있다.
위 사례들은 영원히 구별되게 존재하시는 세 위격들께서 한 신격 안에 공존하심을 전제로,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두 위격들이 포함된 신격 전체가 오심”을 가리킴으로, <’1격이 2격이 되신 후 1격은 존재하지 않고, 다시 2격이 3격이 되신 후 1, 2격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믿는 사벨리우스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결코 양태론이 아니다. 위트니스 리는 삼위 모두가 ‘영원하심’과 ‘구별되심’을 확고히 믿고 있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시며 그 동시존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시작이나 끝이 없다. …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요10:30). 그러나 비록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지만 그분들 사이에는 여전히 나와 아버지의 구별이 있다. 우리는 이점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한국복음서원, 37-38, 44쪽).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요일 1:7). …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위트니스 리, 장로 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12쪽).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 하나님. 한국복음서원, 288쪽).
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오심은 분명히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다고 보아야 한다”(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A Compendium [Old Tappan, NJ: Revell, 1960, c1907] p.p.332-333).
위 내용을 볼 때 김홍기 목사가 “영원한 삼위일체와 지방 교회의 진행적 양태론 이단”이라는 유튜브 설교에서 위트니스 리가 사벨리우스처럼 믿는다고 말하면서 양태론 이단으로 정죄한 것은 심각한 사실 왜곡이다. 사벨리우스와 달리 위트니스 리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영원하심을 믿고 있다. 따라서 김 목사는 자신의 양심이 살아 있다면, 위 문제의 유튜브를 즉각 삭제하고 지방 교회측에게 공식 사과해야 할 것이다.
4) 삼위 하나님께서 성육신과 부활을 거치시는 과정 속에서 주로 ‘인성’에 초점을 둔 변화를 가리킴
가이슬러는 란 캔거스 형제가 “하나님은 영원 안에서 변치않으시나, 하나님이 겪으시는 이런 과정에서, “변화되다,” “되다(became)” 그리고 “새로운 존재 상태로 들어가다”와 같은 말들을 사용한다.”라고 한후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그분의 본성에 있어서 변치 않으신다.”라고 말한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 역시 <한 위격은 다른 두 위격을 포함한 온전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정통 삼위일체’관만 가지면, 아무 문제가 없다. 즉 1) 삼위 전체께서 입으신 인성과 관련하여, 성경 자체가 ‘the Word became flesh’(요1:14), 혹은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고전15:45)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2) 삼위 ‘하나님’께서 인성을 입으사 ‘하나님-사람’이 되신 것, 그리고 그 성육신으로 입으신 인성이 부활 후 영원히 ‘죽지 않을 인성’(계1:18)이 되신 분 즉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은 “새로운 존재 상태”이다.
5) 누가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가이슬러는 또한 위트니스 리 책 중에서 문맥을 무시하고,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는 기도하시는 아들이시다. 또한 기도하시는 아들은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시기도 하다.”라는 표현을 가져와 양태론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위 내용은 스가랴 2:8-12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보내신 자(He)’와 동시에 ‘보내심을 받은 자’(I) 둘 다 이심’을 지적한 바로 다음 문장이다. 위 말을 할 때 위트니스 리의 의도는 기도하시는 아들도 ‘만군의 여호와’ 즉 <삼위 전체>이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도 ‘만군의 여호와’ 즉 <삼위 전체>이시라는 전제 하에 한 말이다. 즉 ‘1격=2격, 2격=1격’이라는 말이 아니라 ‘삼위 전체=삼위 전체’라는 말이다. 이것은 칼빈주의 정통 신학자인 로뢰인 뵈트너가 ‘주기도문 상의 성부는 단지 제 1격만이 아니라 삼위 전체’(Triune God)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상 우리가 이 단락의 반론을 마무리하면서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가이슬러에게 ‘한 위격은 삼위 전체’(each person is fully God)라는 인식만 있다면 결코 지금처럼 ‘1격이 2격이 되고 다시 2격은 3격이 되니 양태론이다.’라는 식의 비판을 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라는 말씀은 ‘삼위 전체’이신 ‘2격’께서 육신을 입으신 것을 가리키고, ‘마지막 아담이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5)라는 말씀도 성육신하신 바로 그분의 인성 부분이 부활 후에는 영원히 죽지 않을 인성 즉 ‘영광의 몸’(빌3:21)이 되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요7:39 본문 참조).
우리는 이러한 다소 난해한 주제들에 대해 지면의 한계로 인하여 좀 더 충분히 다룰 수 없었던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 주제를 다시 거론할 기회가 온다면 그 때는 좀 더 깊이 있는 토론을 펼칠 것을 약속한다. 우선은 비록 지방 교회측의 공식 입장은 아니지만 유사한 주제를 다룬 다음 자료를 참고하기 바란다(http://www.localchurch.kr/3993).
7. 지방 교회를 방어함에 진리의 이중성을 사용함
가이슬러는 이 단락에서 장황하게 말했지만, 결국 그의 불만은 지방 교회측이 “하나님은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에서 오직 한 위격이시며 또한 세 위격이시라고 모순되게 주장”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하나님은 하나’(God is one)이시라는 수 많은 성경 구절들이 그분의 ‘한 신격’(one Godhead)을 가리키며, 그러한 한 신격은 세 위격들을 포함한 개념임으로 위 말은 성경에 근거하고 모순이 아니다.
8. 고넬리우스 반 틸을 사용함
지방 교회측이나 반틸이나 “신격 전체가 한 인격(one person)이시다.”라고 함으로써 ‘세 위격들이 다 포함된 의미로서의 한 신격’ 개념을 말했지만, 가이슬러는 반 틸은 용납하고 지방 교회측은 거부하는 편견을 보이고 있다. 즉 그는 1) “그(반 틸)가 했던 것은 하나님은 구별된 세 위격으로 정의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한 위격(a Person)으로도 일컬어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반 틸을 두둔한다. 그런데 지방 교회측도 같은 말을 한 것이다. 2) 그는 이어서 “반틸은 한 본질에 세 위격을 가진 하나님을 규정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조를 부인하지 않았다.”라고 했지만, 지방 교회측 역시 그러한 고대 신조를 부인하지 않는다는 점을 앞에서 입증한 바 있다. 3) 그는 또한 “반 틸이 여기서 정통적이라면, 지방 교회의 비정통적인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그가 사용되어져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자신이 같은 내용이더라도 사람에 따라 기준을 달리하는 불의한 변증가임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9. 신학자 아우구스투스 스트롱을 사용함
가이슬러는 CRI가 지방교회의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고명한 침례교 신학자인 아우구스투스 스트롱”에 호소한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스트롱은 “그들의 위격에 관해서는 구별된 존재들이시다.”라고 말하였기에 “아버지는 아들이시고 아들은 아버지이시다.”라는 “지방 교회의 믿음을 정당화시키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나 가이슬러는 지금 전혀 엉뚱한 반론을 하고 있다. 지방 교회측은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두 위격 모두의 오심이다”라는 면에서 스트롱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가이슬러가 지적한 위격 간의 동일시는 이사야 9장 6절(성자=성부), 고린도후서 3장 17절(성자=성령)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의 ‘기능상’의 동일시이다. 한편 주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자신과 아버지를 동일시하신 근거로 요한복음 14장 10절의 위격 간의 상호내재 사실을 제시하신 것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 외에 스트롱이 “그들의 위격에 관해서는 구별된 존재들이시다.”라고 한 말에 대해 누가 반론을 제기하는가? 지방 교회측 역시 존재론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 세 위격들은 구별되신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10. 결론적 논평
가이슬러는 자신의 긴 답변 글의 말미에 쓴 결론 부분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세속적인 재판 이야기로 채우고 있다. 그외 CRI의 지방 교회측에 대한 태도 변화에 대해 간략히 적고 있다. 그의 주장에는 몇 가지 부정확한 점들이 포함되어 있다.
1) “지방 교회를 신학적으로 혹은 사회학적으로 이단이라 칭하는 합헌성에 관해 텍사스 주 항소 법원이 결정 했다.”라는 가이슬러의 말은 거짓이다. 세속 법원은 종교적인 이단 문제를 결정할 권한이 없다.
2) ”앵커버그와 웰든 및 하비스트 하우스가 지방 교회를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중상모략적으로 딱지를 붙였다는 그들의 나머지 고소에 대하여, 응당 그래야 했었던 것처럼, 법정은 이것 역시 거부했다.”라는 주장도 거짓이다. 법원이 거부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백과사전’ 저자들이 자신들의 명예훼손 혐의를 피해가려고 총론 부분에 쓰여진 악랄한 중상 모략들이 지방 교회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법정 선서 증언과 함께 자백한 것이다. 법원이 명예 훼손을 하도록 허락하지는 않는다.
3) “지방교회는 항상 상대방이 그리스도인 형제들로서 그들을 만나기를 절대적으로 거부했을 때 최후의 방편으로 법적 행동을 취했다고 주장하면서 지방교회의 고소를 정당화시켰다.”라는 말은 사실 그대로이다.
4) 고린도전서 6장이 말하는 믿는 이들 간의 갈등을 ‘교회로 가져가지 않았다’라는 식의 가이슬러의 주장은 이 사건의 본질을 모르는 이야기이다. 이 사건은 ‘백과사전’측의 내부 문서에 의하자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신약 사역’(고후4:1) 자체를 반 사회적이고 반 도덕적인 단체라는 굴레를 씌워 매장시키려고 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고린도전서 6장이 아닌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한 사례와 유사하다(행25:11). 따라서 법정 송사에 대한 조언은 오히려 자신들의 재정 건전성을 위해 서점 등 약자들에게 숱하게 소송을 제기한, 현재 가이슬러가 감싸는 복음주의 출판사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5) CRI가 지방 교회측을 비판하다가 두둔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추가 연구를 통하여 지방 교회측의 주장이 맞고 자신들이 오해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외에 중국에 있는 박해로 인해 투옥당한 경험이 있는 성도들의 존재와 삶 속에서 “신약 기독교의 참된 실재를 체험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의 광채”(우리가 틀렸었다, 5쪽)를 보았기 때문이다.
11. 부록-란 캔거스에게 보낸 편지
가이슬러는 답변 글 말미에 자신이 <확증과 비평> 편집장인 란 캔거스에게 2008년 6월 1일에 보냈던 편지를 소개했다. 그러나 그가 란 캔거스에게 질문한 아래의 여덟 가지 항목은 이미 지방 교회측의 답변들 안에서 밝혀진 것들이거나 가이슬러 자신의 교리 자체에 심각한 하자가 있는 내용들이다.
1) 왜 ‘페르소나’라는 말을 안 쓰는가? - 이미 답변했다. 즉 그 용어는‘삼신론’ 개념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2) ‘삼일’에서 셋은 누구인가? -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킨다.
3) 세 위격은 정통, 한 위격은 양태론이다. - ‘한 위격’은 ‘한 신격’이라는 의미에서는 양태론이 아니다.
4) 제 2격만이 사람이 되었다. - 한 신격 즉 ‘삼위 전체’가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신 것이다(골2:9, 갈4:4).
5) 어떻게 부활하신 몸이 물질이자 비물질인가? -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요20:27, 고전15:45)
6) 단성론과 당신의 견해의 차이는? - 성육신하신 분은 영원토록 참 하나님, 참 사람이시다(레2:4 참조).
7) 하나님에 관한 진술은 모순이 없어야 한다고 믿는가? - ‘하나님’에 관한 언급을 포함한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다만 아멘하고 믿는 것이 건강한 신앙이다(예를 들어, 사7:14의 처녀 잉태).
8) 하나님은 변치 않는 분인데 어떻게 과정을 거쳤다고 하는가? - 하나님의 신성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러나 그분이 인성을 취하시고, 인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거치신 사건은 일련의 ‘과정’(process)이라고 할 수 있다. ‘과정을 거쳤다’라는 말은 그분의 ‘인성’에 관련된 개념이다.
결론적으로 가이슬러와 김홍기 목사는 삼위를 사실상 분리시키는 자신들의 잠재적 삼신론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하는 대목을 ‘양태론’으로 오해함으로써 지방 교회측과 CRI를 부당하게 정죄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잘못된 것임으로 공개적으로 철회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추가 토론의 필요가 있다면 가이슬러는 지금처럼 침묵하거나 ‘자발적’ 대리인(김홍기 목사)을 통해 과거 주장을 되풀이 할 것이 아니라, 지방 교회측이 2011년에 자신의 글에 대해 반박한 <Brothers, Hear Our Defense>(1-4)에 대해 직접 반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쌍방의 토론이 한국 교계의 삼위일체에 대한 전진된 이해에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첫댓글 CRI가 지방 교회측을 비판하다가 두둔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추가 연구를 통하여 지방 교회측의 주장이 맞고 자신들이 오해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외에 중국에 있는 박해로 인해 투옥당한 경험이 있는 성도들의 존재와 삶 속에서 “신약 기독교의 참된 실재를 체험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의 광채”를 보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용기있고 진실되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고백인지요!!
아멘!
아멘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