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유적지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 번지
정약용 유적지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다. 정약용의 5대조부터 뿌리내린 곳으로 그가 나고 자랐으며 말년을 보낸 곳이다. 다산 정약용은 유형, 이익으로 이어지는 실학을 계승했으며 북학파의 사상까지 받아들여 실용지학, 이용후생을 주장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다산은 일생 500여 권이 넘는 저술과 2,700여 수의 시를 남기고, 1836년(헌종 2) 75세의 삶을 일기로 고향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 유적지에는 정약용선생묘(경기도기념물), 생가인 여유당, 사당 문도사, 기념관, 문화관, 문화의 거리가 있다. 기념관에는 정약용의 대표적인 저서들인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의 사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수원 화성의 건축 현장을 재현한 디오라마를 볼 수 있다. 기념관 옆, 문화관에는 총 7점의 미술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정약용 선생을 주제로 제작한 [신아지구방], [정약용 정원] 등의 작품이 있다. 사당인 문도사는 선생의 시호를 딴 사당으로 조선 최고의 학자인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매년 선생의 기일에 후손들이 모제를 지내고 있다.
정약용유적지 근처에는 팔당호, 야생화 꽃밭, 생태연못, 다산생태공원이 있으며, 정약용 선생이 지인들과 함께 차를 마셨던 [삼정헌]이 있는 수종사가 있다. 1986년 이래 매년 이곳에서 펼쳐지는 정약용 문화제(다산문화제)는 다채로운 시민 행사와 공연으로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직접 체험하는 시민문화축제로 정착하였다.
정약용(丁若鏞)
출생-사망 : 1762. 6. 16 ~ 1836
직업 : 실학자, 문인서화가
조선 후기에 활동한 실학자이자 문인서화가이다. 자는 미용(美庸) · 송보(頌甫), 호는 다산(茶山) · 사암(俟庵) · 삼미(三眉) · 철마산초(鐵馬山樵) · 열수옹(冽水翁) · 탁옹(籜翁) 등이며, 당호는 여유(與猶),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본관은 나주이다. 부친은 진주목사 정재원(丁載遠)이며, 모친은 해남윤씨로 문인서화가인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서울에 올라와 이가환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성호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후 경세학에 뜻을 두어 박지원(朴趾源) · 박제가(朴齊家) 등 실학자들과 교유하는 한편 맏형 정약현(丁若鉉)의 처남인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을 배웠다.
1789년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 지평 등을 거쳐 홍문관 수찬으로서 1792년 수원성 축조 때 왕명으로 「수원성제」를 지어 올려 기중기의 원리를 이용케 함으로서 일의 능률과 경비 절감에 공헌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를 지냈고, 이듬해 동부승지 ·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件)에 연루되어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소환되어 좌부승지 · 병조참지 · 동부승지 · 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하였다. 출중한 학문과 재능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은 정조의 급서에 이은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1801년 매부 이승훈, 둘째 형 정약전,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어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었다.
그 해 가을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 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어 1818년까지 18년의 유배생활을 하였다. 강진 유배기간에 정약용은 학문에 몰두하여 정치 · 행정 · 경제 등 각 방면에 혁신적 개혁안을 제시하였고,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대학자로서 경사 · 천문 · 지리 · 법제 · 농정 · 수리 · 역상 · 측량 · 의학 등에 관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은 서화 감식안도 높았을 뿐 아니라 그림에도 능하여 수 점의 작품을 남겼다. 문집에는 유배 중에 두고 온 고향집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향 계곡을 그려 벽에 걸어놓고 향수를 달래었던 정황을 읊은 「희작초계도(戱作苕溪圖)」라는 시도 전한다. 작품으로는 <매조서정도(梅鳥抒情圖)>와 <산수도> 몇 점이 전한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매조서정도>는 유배 중에 그린 것으로 매화 가지에 앉은 한 쌍의 새와 제화시에 가족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담았다. 발문에는 '가경(嘉慶) 18년 계유(癸酉1813) 7월 14일에 열수옹(冽水翁)이 다산(茶山) 동암(東庵)에서 쓴다.'는 관지가 있어 강진 유배시절에 그렸음을 알려준다. 서툰 듯 그린 새와 나뭇가지의 표현에서 여기화가다운 소박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산수도> 역시 갈필과 담묵으로 처리된 바위와 산, 그리고 담청의 부드러운 설채가 어울린 담백한 그림이다. 정약용은 심미적 안목도 갖춘 비평가로서 서화에서 기본적 법도와 정확한 묘사력을 강조하였다. 서예에 있어서도 서예 자체가 지닌 기능을 중시하여 기본적인 법도를 강조하였다. 글씨는 단정하면서도 강단있는 해서와 행초서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57세 때인 1818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간 후 저술과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외에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각 분야에 저술한 문집이 수 백 권에 이른다.
정약용 유적지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