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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인터뷰〕
『강아지 똥』은 바로 나의 이야기
-권정생 선생과의 만남
글: 윤수천. 동화작가. 1942년생.
『꺼벙이 억수』 『인사 잘하고 웃기 잘하는 집』『로봇 은희』
『고래를 그리는 아이』 『내 짝은 고릴라』『나쁜 엄마』 등.
현재 초등 4-1 국어활동교과서에 동화 「할아버지와 보청기」 가 수록돼 있음.
권정생: 동화작가. 1937. 9. 10-2007. 5. 17.
일본 도교생. 1946년 한국으로 건너옴. 만성 폐결핵을 안고 전국을 전전하다가 1967년 안동 조탑동에 안주. 교회 종지기 로 생할을 하며 동화를 쓰기 시작함. 『강아지 똥』 『몽실 언 니』『점득이네』『하느님의 눈물』등을 펴냄.
윤수천: 생전에 외부와의 인터뷰를 극도로 싫어하신 선생님께서 이렇게 쾌히 허락해 주신 데 대해 정말 감사드립니다.
권정생: 그랬었지요. 나처럼 인터뷰니 만남을 싫어한 작가도 드물 겁니다.
윤수천: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셨던가요?
권정생: 내 성격 탓이지요. 누구를 만난다는 게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아서요. 옷차림에도 신경이 쓰이고...말도 변변찮고...오죽했으면 상을 주겠다며 일부러 찾아온 분을 그냥 돌려보냈을라고요. 내가 좀 괴팍한 편입니다. 아니, 모자라도 많이 모자라지요.
윤수천: 그러셨던 선생님께서 저의 인터뷰를 허락해 주신 것은 예외라고 보입니다. 저 역시 큰 기대를 하지 않았거든요.
권정생: 세상을 떠나 이곳에 와 보니 생각도 달라지더라고요. 너무 속 좁게 살다 왔구나, 하는 자괴감도 들고...그러던 참에 선생의 전화를 받았지요. 그건 그렇고, 나를 뭣 땜에 불러냈는지 궁금하네요. 세상을 거의 등지다시피 한 채 동화 몇 편을 쓴 게 고작인 나를 이런 특별한 자리에 불러내다니......
윤수천: 거 무슨 말씀을요. 선생님처럼 평생 마음속에 어린이를 품고 동화만을 쓰신 분이 세상에 누가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선생님을 작가의 표본이자 거울로 생각들을 한 답니다. 저 역시 동화를 써오면서 선생님을 문학의 스승으로 여겨왔지요. 평생 병 고로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작품에만 매달리신 그 작가의 혼,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권정생: 아, 너무 그렇게 치켜세우지 마세요. 내가 되레 부끄러워지네요. 솔직히 말하지만 내 처지에 놓였다면 누구나 그렇게밖에 살 수가 없었을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절망의 연속적인 삶 속에서 하루하루 매달릴 수 있었던 오직 하나는 동화밖에 없었으니까요. 동화가 곁에 없었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 몸이지요.
윤수천: 선생님은 일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더군요.
권정생: 1937년생이니까 해방되기 8년 전이지요. 5남 2녀 중 4남이었어요. 아버지는 시청 환경미화원이셨는데 월급이라는 게 말이 월급이지 아홉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 웠어요. 그러다 보니 어머니도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해야 했고요. 이때의 영양실조 로 얻은 결핵이란 병을 난 죽을 때까지 지니고 살아야 했지요.
윤수천: 선생님에게 있어 가난과 병마는 타고난 운명이었던 셈이네요.
권정생: 그렇다고 해서 불평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 덕분에 문학을 하게 됐으니까요. 환경미화원이셨던 아버지는 거리 청소를 하시다가 버려진 헌 책을 보면 무조건 집으 로 가져와 뒤뜰에다 모아놓곤 했지요.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되셔서 그랬지 싶습니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모아 놓은 헌 책 가운데서 읽을 만한 책을 골라내어 읽기를 즐겼어요. 그때 여러 권의 동화책을 읽었는데 동화는 내게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고 나도 이다음에 동화를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
윤수천: 가난과 고통이 문학의 자양분이 됐다는 말씀이네요.
권정생: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된 다음해에 우리 가족은 일본을 떠나 한 국으로 돌아왔지요. 누가 오라고 한 건 아니지만 타국보다는 고국이 그래도 낫겠지 하는 기대를 안고 말이에요. 그러나 막상 귀국해 보니 살아가기가 더욱 막막했어 요. 여기에다 뜻하지 않은 6.25를 겪으면서 우리 가족은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지요. 이때부터 난 전국을 떠도는 신세가 됐어요. 거의 거지나 다름없는 생활을 한 거지요. 그러다가 발길이 머문 곳이 경상도 안동이란 곳이었어요.
윤수천: 일부러 안동을 찾아가신 게 아니구먼요.
권정생: 하루 종일 걷다가 문득 하늘을 보니 빨간 노을이 내리고 있었어요. 그때 내 귀에 종소리가 들렸어요. 난 무작정 그 종소리를 따라갔지요. 그러고는 종을 치는 분에게 매달렸어요. 먹고 잘 만한 곳만 마련해 주면 평생 종을 치겠다고요. 종을 치던 분이 바로 그 교회 목사님이었어요.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교회에서 평생 종지기로 살게 된 거지요.
윤수천: 비로소 생활의 안정을 찾으셨네요.
권정생: 그렇지요. 손바닥만 한 문간방이었지만 내겐 천국이었어요. 그곳에서 그동안 가슴 속에만 넣고 다니던 동화를 쓸 수가 있었으니까요. 1969년 어느 날, 월간 기독교란 잡지에서 주최하는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현상모집 광고를 보았어요. 마감 날짜를 보니 꼭 50일이 남았더라고요. 난 그날부터 당장 동화 쓰는 일에 매달렸어요. 보리쌀 2홉을 냄비에 끓여 3등분하여 한 끼에 한 등분씩 먹어가면서요.
윤수천: 선생님, 그 동화가 바로 「강아지 똥」이지요?
권정생: 맞아요. 내겐 첫 작품이면서 출세작이지요. 하필이면 강아지가 눈 똥으로 태어난 나. 그러다 보니 주위로부터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받지요. 똥을 좋아할 친구는 이 세상에 없잖아요? 그런데 그 똥이 거름이 되어 이듬해 봄이 되자 꽃을 피우지요. 난 세상에 태어난 생명은 그 어느 것이나 다 소중하다는 것을 그 동화로 말하려고 했어요.
윤수천: 「강아지 똥」은 책뿐 아니라 뮤지컬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습니다. 선생님의 삶이 동화가 된 셈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그러고 나서 선생님은 7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화 「아기양의 그림자 딸라리」를 내어 가작 입선하셨고, 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무명저고리와 어머니」를 내어 당선 하심으로 해서 작가로서의 탄탄한 기반을 다지셨어요. 이들 작품은 어려운 삶 속에 서도 굴하지 않는 생명력과 기독교 정신을 보여주고 있고, 이는 곧 선생님의 생애 와도 연관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권정생: 작가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대변인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만약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다면 그런 동화를 쓰진 않았겠지요. 아니, 문학을 하지도 않았을지 몰라요. 내 동화는 거의 슬픈 색채의 작품이 대부분이에요. 이 역시 나의 불우한 삶과 연관이 있다고 봐요. 언젠가 독자와의 만남 자리에 나갔더니 한 주부가 이런 질문을 해요. 선생님의 동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일테면 문학관이 뭐냐는 거겠지요.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난감하더라고요. 그때까지 동화관 이니 문학관이니 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한참을 머뭇 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해 줬어요. 내 동화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슬픈 이야기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슬픈 사람에게는 슬픈 이야기가 위로가 되고 때론 희망이 되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윤수천: 선생님은 가난과 병마를 달고 사시면서도 생전에 참 많은 동화를 남기셨습니다. 언뜻 생각나는 작품으로도 여러 편이 되는군요. 1990년 MBC 드라마로 방영된「몽실 언니」를 비롯하여「점득이네」「하느님의 눈물」「사과나무밭 달님」「강아지와 염소 새끼」「반달곰」「까치 울던 날」「슬픈 나막신」「황소 아저씨」「비나리 달이네 집」「벙어리 동찬이」등등입니다. 헌데 이렇게 많은 작품 활동을 하시면서 도 선생님은 생전에 문학상과는 거리가 참 멀었다는 느낌입니다. 그 많은 문학상에 이름을 올린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서운하다거나 섭섭하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권정생: 서운하긴요. 난 상을 받으려고 글을 쓴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말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웬 문학상이 그렇게 많은가요? 어린이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처럼 순수한 일은 없는데......어떤 이들은 상을 타러 글을 쓰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이왕 하는 김에 한마디 더 해야겠네요. 심사위원이란 사람들도 몇몇 사람들은 아예 붙박이장처럼 고정돼 있더라고요.
윤수천: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요, 아동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이 그 뒤 에 어떻게 됐는지 그게 늘 궁금하지요. 서점가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고...상으로만 끝나는 작품들이 허다하니까요.
권정생: 문학은 문학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학을 출세의 도구나 자신의 치장에 써서는 안 되지요. 언젠가 나를 찾아온 문인이 놓고 간 명함을 보니까 이건 문학을 하는 사람인지, 정치나 장사를 하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되더라고요. 문인은 어디까지나 작품으로만 이야기하면 되는데......
윤수천: 그 말씀 역시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책의 날개나 뒷면에 적는 작가의 약력을 보면 어떤 이들은 별의별 것들을 다 인쇄한 것을 봤습니다. 심지어 글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이력을 깨알처럼 박아 놓기도 하고요. 그런 책은 내용 또한 별 게 없더라고 요.
권정생: 내게 보내오는 책 가운데도 그런 책이 많아요. 난 그런 책은 읽고 싶은 생각이 안 납니다. 되레 불결함 같은 느낌을 받지요. 얘기를 하다 보니 별 얘기를 다 한 것 같네요.
윤수천: 선생님은 작고하셨음에도 우리 아동문학가 가운데서 인세를 가장 많이 받는 작가십니다. 그 많은 인세를 어떻게 관리하고 계신지요.
권정생: 이곳에 오기 전에 재단을 하나 만들었어요.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라고요. 그곳 에서 관리해 주고 있어요.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그 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동화를 썼고, 어린이들에게서 인세를 받았으니 어린이들을 위해 돈을 써야 당연한 일이지요.
윤수천: 끝으로 후배 작가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한마디만 부탁드립니다.
권정생: 작가에겐 작품보다 더 소중한 게 없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그러자면 달콤한 시간에 너무 자신을 빼앗기지 말고 글 쓰는 일에 매달리라고 하고 싶네요. 인생은 잠깐 이에요.
윤수천: 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달프게 사셨으니 모쪼록 편안한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실감나게 잘 썼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