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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감후(晩甘侯)
단 맛이 늦게 나타난다는 뜻으로, 차(茶)를 의미한다. 사람도 차 맛과 다를 게 없다. 처음에 조금 맛이 쓴 듯해도 겪고 보면 길게 여운이 남는 사람이 좋다는 비유의 말이다.
晩 : 저물 만(日/8)
甘 : 달 감(甘/0)
侯 : 제후 후(亻/7)
(유의어)
고구사(苦口師)
냉면초(冷面草)
옥선고(玉蘊膏)
출전 : 도곡(陶穀)의 청이록(清異錄) 명천문(茗荈門) 권하(券下) 명천(茗荈)
단 맛이 늦게 나타난다는 뜻으로, 차(茶)를 의미한다. 옥선고(玉蘊膏), 냉면초(冷面草), 고구사(苦口師)라고도 한다. 만감후(晩甘侯)는 중국 송(宋) 나라 때 도곡(陶穀)이 지은 청이록(清異録) 卷下 차에 대한 이야기를 모은 명천(茗荈)이라는 장에 나오는 말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나라 때 손초(孫樵)가 차를 초형부에 보내면서 쓰기를, "만감후 15인을 시종토록 재각에 보냅니다. 이들은 모두 우레 소리를 기다렸다가 따서 삼가하여 물과 혼합을 합니다. 건양 단산은 모두 물이 맑은 고장으로, 밝은 달이 푸른 계곡에 비추어지고 구름이 산꼭대기에 걸터 앉아 있을 때 마실만한 차입니다. 부디 함부로 쓰지 마십시오(晩甘侯, 孫樵送茶與焦刑部, 書云 : 晚甘侯十五人遣侍齋閣, 此徒皆請雷而摘, 拜水而和, 蓋建陽丹山碧水之鄉, 月澗雲龕之品, 慎勿賤用之)."
(清異錄/茗荈門)
고구만감 (苦口晩甘)
이덕리(李德履)가 쓴 동다기(東茶記)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차에는 고구사(苦口師)니 만감후(晩甘侯)니 하는 이름이 있다. 또 천하의 단것에 차만 한 것이 없어 감초(甘草)라고도 한다. 차 맛이 쓴 것은 누구나 말한다. 차가 달다는 것은 이를 즐기는 사람의 주장이다.'
표현이 재미 있어서 찾아보니 각각 출전이 있다. 당나라 때 피광업(皮光業)은 차에 벽(癖)이 있었다. 그가 갓 나온 감귤을 맛보는 자리에 초대받아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잔칫상에 차려 내온 훌륭한 안주와 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차부터 내오라고 야단이었다.
큰 잔에 담아 차를 내오자 그가 시를 지었다. '감심씨(甘心氏)를 아직 못 보았으니, 먼저 고구사(苦口師)를 맞아야겠네(未見甘心氏, 先迎苦口師).'
(異錄/茗荈門)
감귤(柑橘)은 속 알맹이가 달아서 감심씨, 즉 속 맛이 단 사람이라 했다. 차는 첫입에 맛이 쓴지라 입이 쓴 선생이란 뜻으로 고구사라 불렀다. 고구사가 차의 별명으로 된 연유다.
또 당나라 손초(孫樵)는 초형부(焦刑部)에게 차를 보내며 이렇게 썼다. '만감후(晩甘侯) 15인을 계시는 거처로 보내서 모시게 합니다. 이들은 모두 우렛소리를 들으며 따서 물에 절을 올리고 만든 것입니다.'
단차(團茶) 15개를 만감후 15인이라 했다. 차를 마시면 단맛이 뒷맛으로 오래 남는다. 그래서 차를 의인화해 '늦게서야 단맛이 나는 제후'라는 의미로 이 표현을 썼다. 이후 만감후도 차의 별칭으로 쓴다. 명나라 때 육수성(陸樹聲)의 '다료기(茶寮記)'에 나온다.
차의 맛은 단가 쓴가? 고구사와 만감후 두 단어에 그 대답이 있다. 정답은 '첫맛은 입에 쓰고 뒷맛은 달다'이다. '고구만감(苦口晩甘)', 처음 혀끝에 어리는 맛은 쓴데 이뿌리에 남는 뒷맛은 달다. '감탄고토(甘呑苦吐)', 달아 덥석 삼켰다가 쓰면 웩 하고 토한다.
입속의 혀처럼 달게 굴다가 쓰디쓴 뒷맛만 남기고 사라지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사람도 차 맛과 다를 게 없다. 처음에 조금 맛이 쓴 듯해도 겪고 보면 길게 여운이 남는 사람이 좋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태어나서 어머니 아버지와 만남을 시작으로 형 누나 동생 그리고 일가친척 그리고 유치원 초등학교 그리고 선생님 이후 사회 속에서도 우리는 매일 매일을 수많은 만남 속에서 살아간다. 이 수많은 만남 속에서 그들의 인격 됨됨이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교제의 거미줄을 그리며 살아 가고 있다.
나는 과연 그들과 만남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성급한 사람은 아닌지 덤벙대지는 않았는지. 냉정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는 않는지. 주책없다고 손가락질을 받지는 않는지. 너무 침착하여 차갑다는 소리를 듣진 않는지. 따뜻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시작도 끝도 없이 미지근한 사람은 아니었는지. 그러나 분명 사람마다 태어나면서 지닌 재능이 있다.
이 재능을 악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용하여 사용 되어지길 원한다면 그대는 어떤 모습으로 상대에 비추어지던 분명 그들 가슴에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사람이 될 것이다. '여운이 있는 사람' 이 단어만 들어도 흥분되지 않는가. 이 말만 들어도 가슴이 저며 오는 그 무엇이 있지 아니한가. 올 한해 나도 과연 수많은 만남 속에서 사람들의 가슴에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사람이 되었는가. 가슴에 두 손을 조용히 얹어보자.
이덕리(李德履)와 동다기(東茶記)
동다기(東茶記)는 이덕리(李德履, 1728- ?)가 지은 차에 관한 문헌이다. '동다기'는 초의 스님의 '동다송(東茶頌)'의 주석에 한 대목이 인용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다만 실물이 전하지 않아, 그간 엉뚱하게 다산 정약용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2006년 9월 필자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 백운동의 이효천 선생 댁에서 '강심(江心)'이란 표제의 필사본에 수록된 '기다(記茶)'가 바로 초의가 인용한 '동다기'의 원본임을 확인했다.
기다(記茶)인가 동다기(東茶記)인가?
먼저 책의 정확한 명칭에 관해 따져보자. 우선 '동다송'에 인용된 책 이름은 '동다기(東茶記)'다. 1992년 용운 스님이 발굴 소개한 법진본 '다경(茶經)' 속에는 그냥 '다기(茶記)'로 되어 있다. 필사본 '강심(江心)' 속에 수록된 글은 거꾸로 '기다(記茶)'라고 했다. 이덕리는 자신의 다른 저술인 '상두지(桑土志)'에서 자신이 '다설(茶說)'을 지었다고 했다. '전의리(全義李) 저(著)'로 표기된 법진본 '다기'는 '기다(記茶)'와 내용이 같지만, 원문의 뒷부분이 모두 탈락된 불완전한 사본이다.
동다기(東茶記) 또는 다기(茶記)란 명칭이 있었고, 이덕리 문집의 전사본에서는 기다(記茶)로 표기하였고, 다른 책에서는 스스로 다설(茶說)을 지었다 하여, 같은 자료를 두고 모두 4가지 다른 명칭이 존재한다.
먼저 따져볼 것은 초의 스님이 '동다송'에서 말한 '동다기'가 이덕리의 '기다' 또는 법진본 '다기'와 같은 것인가 하는 점이다. '동다송'에서 초의는 "동국에서 나는 것도 원래 서로 같나니, 색과 향 기운과 맛 중국과 한 가질세. 육안차의 맛에다 몽산차의 약효 지녀, 옛 사람은 두 가지를 아울렀다 평가했지(東國所産元相同, 色香氣味論一功. 陸安之味蒙山藥, 古人高判兼兩宗)"라고 노래했다. 그리고는 위 시의 구절 아래 단 주석에서 고인의 이 말이 '동다기'에 나온다면서 그 근거가 된 한 구절을 인용했다.
정작 이덕리의 저술을 그대로 베낀 것으로 보이는 '강심'에서는 '기다(記茶)'라고 했는데, 왜 초의는 책 이름을 '동다기'라고 했을까? 법진본의 '다기' 또한 제명이 다르고, 내용에도 상당한 누락이 있다. 이덕리의 이 저술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베껴져서 유통되었고, 베껴 쓰는 과정에서 제목도 필사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 동다기와 다기 및 기다는 그래도 계열성이 있어 보이는 이칭인데 반해, 자신이 '상두지'에서 밝힌 다설(茶說)은 다르다. 이는 책 제목으로 쓴 것이 아니라 차에 관한 논설이 있다는 정도의 의미로 쓴 듯하다.
이 책의 공식 제명은 '기다' 또는 '동다기' 둘 중의 하나로 해야 옳다. 이에 있어 '동다송'에 인용된 '동다기'란 명칭이 오래 사용되어 왔고 문헌 근거가 있으며, '동다송'이란 명칭과도 세트를 이루고, '동(東)'이란 접두어에서 차 일반론이 아닌 우리 차에 대한 기록이란 의미를 강조할 수 있으므로, 공식 명칭은 '기다' 보다는 '동다기'로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따라서 이후 표기는 '동다기'로 통일한다.
이덕리는 누구인가?
'동다기'의 저자는 누구인가? 근대 이능화나 최남선, 문일평 같은 쟁쟁한 학자들은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이 책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작이라고 했다. 초의는 '동다기'의 저자를 그저 '고인(古人)'으로 적었다. '동다기'가 다산 정약용의 저작이었다면 초의가 살아 있는 스승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을 리가 없다. 고인으로 적은 것은 자신과 시간적 거리가 상당하다는 뜻이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법진본 '다기'에서도 저자를 '전의리(全義李)'라고만 했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반면 '강심'에 수록된 '기다'에는 끝 부분에 필사자 이시헌(李時憲)이 남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강심(江心)’의 의미는 분명치 않다. 이 한 책에 적힌 사(辭)와 문 및 시는 바로 이덕리(李德履)가 옥주(沃州)에서 귀양 살 때 지은 것이다(江心之義未詳. 此一冊所錄辭文及詩, 乃李德履沃州謫中所作)."
이 책의 저자가 이덕리(李德履)이고, '옥주적중(沃州謫中)'에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했다. 옥주(沃州)는 진도(珍島)의 별호다. 이덕리가 죄를 지어 진도에 유배와 있으면서 지은 것이다. 당시 죄인 신분이었던 그는 이 때문에 자신의 저서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본관만 밝혔던 듯하고, 이것이 필사되어 유통되면서 법진본의 '전의리(全義李) 저(著)'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시헌은 이 책의 저자가 이덕리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필사 후 위의 언급을 남겨두었다.
여러 문헌 자료를 통해 볼 때, 이덕리의 본관은 전의이고, 자는 수지(綏之)였다. 그는 숙종조 조선 최고의 무인이었던 장한상(張漢相)의 외손이며,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거쳐 영조 때 병조판서에 올랐던 무신 이삼(李森)의 처조카였다. 무인 계통의 명망 있는 집안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49년에는 성균관 생원(生員), 1759년에는 진사(進士) 신분이었고, 1763년에는 조선통신사의 자제군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1772년 정 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에 가좌되었고, 1774년 9월에는 도성 경비의 책임을 맡은 종 2품 창경위장(昌慶衛將)이 되었다.
이덕리의 문장은 윤광심(尹光心)이 당대 뛰어난 문인의 시문을 모아 엮은 선집인 '병세집(幷世集)'에도 실려 있다. 이 중 '제고이헌납중해시(祭告李獻納重海詩)' 9수가 수록되었다. 1775년 이덕리 48세 때 쓴 글인데, 헌납 벼슬을 지낸 이중해(李重海)와 평소 절친한 사이였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이 이중해가 누군고 하니, 앞절에서 살핀 '부풍향차보'의 저자 이운해의 친동생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덕리는 이운해의 '부풍향차보'를 동생 이중해를 통해 진작에 보았을 가능성이 있고, 이를 계기로 차에 대해 일정한 안목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최초의 다서라 할 '부풍향차보'와 '동다기' 사이에 일말의 연결점이 시사되는 것이다.
병세집(幷世集)은 당대 최고의 문장이었던 박지원과 이덕무 등의 문집에 실리지 않은 글이 수록되어 있을 만큼 현장성이 강한 엔솔로지다. 이 책의 시권과 문권 모두에 이덕리의 이름이 올라있는 것을 보면, 이덕리는 당대 문명이 높았던 문인이었음이 분명하다.
막상 전의이씨 대동보에는 이덕리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는 그가 진도에 장기간 유배되어 세상을 뜬 일과 관련이 있다. 또 그가 일관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족보에 마저 이름이 지워진 것을 보면, 그의 죄는 역모죄나 이에 준하는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대동수경(大東水經)에 이덕리의 다른 저술인 상두지(桑土志)를 각각 한 차례 씩 인용하였다. '상두지'는 국가 경제와 지리 등의 내용을 담은 실학 계통의 서적이다. 이 책 또한 '동다기'와 마찬가지로 현재 다산의 저술로 오인되어 1973-74년에 다산학회가 편찬하여 간행한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 제3권에 실려 있다.
상두지(桑土志)의 서문에 '계축정월상간서(癸丑正月上澣序)'라고 했으니, 이 책은 1793년(정조 17)에 지은 것이다. 이 또한 저자가 밝혀져 있지 않고 서문 끝에 "공은 야인으로 이름을 칭탁코자 했으므로 권도로 이 서문을 써서 스스로를 감추었다(公欲托名野人, 權爲此序以自晦)"고 적었다. 이글 역시 이덕리가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지은 것이다. 다산이 이 책을 두 차례나 인용하면서 분명하게 이덕리가 지었다고 했으니, '상두지'는 다산의 저술일 수 없고, 이덕리가 지은 것이다.
'강심'에 수록된 실솔부(蟋蟀賦)에는 이덕리 자신의 신상과 관련된 한 가지 단서가 더 있다. "나는 병신년(1776년, 영조 52), 4월 은혜를 입어 옥주(沃州)로 유배왔다. 성 밖 통정리(桶井里)에 있는 윤가(尹家)에서 살았다.(중략) 3년만에 통정리 서쪽 이가(李家)로 옮겼다(余以丙申四月, 恩配于沃州. 居城外桶井里尹家... 三年移住井西李家)."
이로 보아 이덕리는 49세 때인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4월 초에 사도세자 복권 움직임과 관련해서 일어난 상소 사건에 연루되어 역모죄로 진도로 유배온 듯 하다. 전후의 자세한 정황은 남은 기록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진도에 유배온 지 10년 정도 지난 1785년을 전후해서 '동다기'를 저술했고, 66세 때인 1793년에는 국방에 관한 중요한 제안을 담은 '상두지(桑土誌)'란 책을 잇달아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역모죄에 연루된 유배 죄인의 신분이었기에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익명으로 이들 저술을 세상에 공개했다. 그간 저자 문제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동다기는 어떤 책인가?
이제 '동다기'의 내용을 살펴보자. '동다기'는 서설 5단락과 본문 15 항목, 그리고 '다조(茶條)' 7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분량이래야 모두 14쪽에 불과하다. 더욱이 이시헌이 이덕리의 원고 '강심'을 필사할 당시 원본은 서문도 없고 체재도 갖추어지지 않은 난고(亂藁) 상태였던 듯하다. 필사자 이시헌은 다산이 아꼈던 강진 시절의 막내 제자였다. 뒤편 다산 떡차론 관련 글에 인용된, 다산이 3증3쇄 떡차의 제조법을 일러주며 차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편지의 수신인이기도 하다.
본문 15항목의 끝부분에는 이덕리의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다. "앞의 십여 조목은 모두 차에 관한 일을 떠오르는 대로 적은 것이다. 하지만 국가에 보탬이 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큰 이로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제 바야흐로 본론으로 들어가려 한다(右十數條, 皆漫錄茶事. 而未及其裨國家裕生民之大利. 今方挽入正事)."
그리고 이 메모 아래 필사자인 이시헌이 작은 글씨로 "이하 10조목은 지금 책이 흩어져서 적을 겨를이 없다(以下十條, 今散帙, 不暇錄)"고 부기하였다. 이덕리가 '동다기'를 한 번에 저술한 것이 아니라 두 차례에 나눠 썼고, 앞쪽은 차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뒤쪽은 차가 국가 경제와 민생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에 대해 쓴 것임도 알 수 있다. 법진본 '다기'가 앞쪽만 싣고 뒤쪽은 싣지 않았던 것은 원본의 어지러운 상태와도 무관치 않다.
이어 '강심'의 맨 뒤쪽에 '다조(茶條)'란 제목 아래 다시 4쪽 7항목의 글이 이어진다. 제목 아래 "마땅히 앞의 '다설(茶說)' 아래 놓여야 한다(當在上茶說下)"라고 적혀있다. 이 '다조'가 앞서 말한 '기다'의 속편임을 밝힌 것이다. 이 7항목이 법진본에는 모두 빠져있다. 또 앞부분에서도 법진본은 백운동본의 서설 3단락 일부와 4단락 전체가 탈락되어 있고, 본문의 11단락도 누락되어 있다. 그러니까 현재 남은 분량으로 보면 법진본은 백운동본의 절반 가량만 남아있는 셈이다. 특별히 여기서 앞부분의 글을 '다설(茶說)'이라 한 것이 주목되는데, 혹 다른 필사에서는 앞쪽 글을 '다설'이라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덕리는 무슨 의도로 '동다기'를 저술했을까? 서설 다섯 단락을 검토하여, 저술 동기를 살펴보자. 다섯 단락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 단락은 도입 서설로, "황량한 들판의 구석진 땅에 절로 피고 지는 평범한 초목에서 얻어 이것으로 국가를 돕고 민생을 넉넉하게 할 수만 있다면, 어찌 그 일이 재물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 하여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차로 국부 창출의 자원으로 삼을 수 있음을 말했다.
둘째 단락에서는 중국 차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하고, 역대 중국 왕조가 차를 미끼로 북방 민족을 제어한 일을 적었다. 북방인은 육식만 하므로 차를 마시지 않으면 배열병(背熱病)에 걸린다. 그런 까닭에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남방의 차를 사마시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해, 그 수요의 일부를 우리 차로 감당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셋째 단락은 차에 무지한 조선의 실정과, 발상 전환을 통한 차 무역 제안을 담았다. 이 부분은 전체 단락을 함께 읽어 보겠다.
우리나라에서는 호남과 영남의 여러 고을에서 차가 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고사촬요(故事撮要) 등에 실려 있는 것은 다만 열 곳 백 곳 중에 하나일 뿐이다. 우리나라 풍습이 비록 작설을 사용하여 약에 넣기는 해도, 대부분 차와 작설이 본래 같은 물건인 줄은 모른다. 때문에 예전부터 차를 채취하거나 차를 마시는 자가 없었다. 혹 호사가가 중국 시장에서 사가지고 올망정, 가까이 나라 안에서 취할 줄은 알지 못한다. 경진년(1760년, 영조 36)에 배편으로 차가 오자, 온 나라가 비로소 차의 생김새를 알게 되었다. 10년간 실컷 먹고, 떨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또한 따서 쓸 줄은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차는 또한 그다지 긴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있고 없고를 따질 것이 못됨이 분명하다. 비록 물건을 죄다 취한다 해도 이익을 독점한다는 혐의는 없을 것이다. 배로 서북 지역에 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운반하여, 차를 은과 바꾸면 주제(朱提)와 종촉(鍾燭) 같은 양질의 은이 물길로 잇달아 들어와 지역마다 배당될 수 있다. 차를 말과 바꾼다면 기주(冀州) 북쪽 지방의 준마와 양마가 바깥 관문에 가득하고 교외 목장에 넘쳐날 수가 있다. 차를 비단과 맞바꾸면 서촉(西蜀) 지방에서 짠 고운 비단을 사녀(士女)들이 나들이옷으로 걸치고, 깃발의 천도 바꿀 수가 있다. 나라의 재정이 조금 나아지면 백성의 힘도 절로 펴질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럴진대 앞서 황량한 들판 구석진 땅에서 절로 피고 지는 평범한 초목을 얻어서 나라에 보탬이 되고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我東産茶之邑, 遍於湖嶺. 載輿地勝覽, 攷事撮要等書者, 特其百十之一也. 東俗雖用雀舌入藥, 擧不知茶與雀舌, 本是一物. 故曾未有採茶飮茶者. 或好事者, 寧買來燕市, 而不知近取諸國中. 庚辰舶茶之來, 一國始識茶面. 十年爛用, 告乏已久, 亦不知採用, 則茶之於東人, 其亦沒緊要之物, 不足爲有無, 明矣. 雖盡物取之, 無榷利之嫌. 舟輸西北開市處, 以之換銀, 則朱提鍾燭, 可以軼川流而配地部矣. 以之換馬, 則冀北之駿良駃騠, 可以充外閑而溢郊牧矣. 以之換錦段, 則西蜀之織成綺羅, 可以袨士女而變㫌幟矣. 國用稍優, 而民力自紓, 更不消言. 則向所云得於荒原隙地, 自開自落之閑草木, 而可以裨國家裕民生者, 殆非過言).
우리나라는 영남과 호남 각처에서 차가 생산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작설을 고약처럼 달이고 고아서 약용으로 쓸 줄만 알 뿐, 애초에 차와 작설이 같은 물건인지조차 모른다. 1760년에 차를 가득 실은 중국 무역선이 전라도 섬 지역에 표류한 일이 있었다. 이 표류선에서 흘러나온 차가 호남 지역에 널리 유통되면서 온 나라가 비로소 차의 생김새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때 중국 배에서 유통된 차를 전체 조선이 10년간 실컷 마셨다. 그 차가 떨어진 지가 벌써 오래 되었는데도 여전히 주변에 널려 있는 차를 따서 마실 생각은 못한다. 애초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차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긴요하지 않은 물건이었던 것이다.
실제 1760년에 표류해온 중국차를 가득 실은 배 이야기는 박제가의 '북학의'에도 나온다. '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浙江商舶議)'에서 "나는 황차(黃茶)를 실은 배 한 척이 표류하여 남해에 정박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온 나라가 그 황차를 10여년 동안 사용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 선박의 표류를 계기로 호남 지역에서 차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된 듯하다. 이덕리가 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일과 무관치 않다.
그렇다면 이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상관없는 차란 물건을 국가에서 모두 취해 그 이익을 독점한다고 해도 달리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차를 서북 개시로 가져가서 북방의 은이나 말 또는 비단과 맞바꾼다면, 온 나라에 질 좋은 은이 넘쳐나게 되고, 준마와 양마의 수효가 급증할 것이며, 귀한 비단 옷을 모든 백성이 입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있으나마나한 차를 팔아서, 없어서는 안 될 귀한 물건을 풍족하게 얻을 수 있다. 나라 살림에 큰 힘이 되고, 다급한 민생에도 획기적 개선이 이루어질 터이니, 그야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 아니겠는가?
넷째 단락은 재물을 버는 방법에 대해 논했다. 그 핵심은 근원을 틔워 흐름을 끌어오는 것이다. 교역과 효율적인 정책의 시행을 통해 천하의 패권을 장악했던 월나라와 진나라, 그리고 관중(管仲) 등의 예를 통해 부국의 방법을 설명했다. 여기서 이덕리가 통상의 원리로 제안한 것은 일종의 국가 전매정책의 강화를 통한 유통구조 개선과 가격 조절 정책이다.
마지막 다섯 째 단락은 당국자에 대한 차무역 정책의 건의로 글을 맺었다. 전체 원문을 보자.
중국의 차는 아득히 먼 만리 밖에서 난다. 그런데도 오히려 취해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오랑캐를 방어하는 기이한 재화로 삼는다. 우리나라는 차가 울타리 가나 섬돌 옆에서 나는데도 마치 아무 짝에 쓸데없는 토탄(土炭)처럼 본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조차 잊어버렸다. 그래서 차에 관한 글 한 편을 지어 차에 대한 일을 다음과 같이 조목별로 구분하였다. 이것으로 당국자가 시행해 볼 것을 건의한다(中國之茶生於越絶萬里之外. 然猶取以爲富國禦戎之奇貨. 我東則産於笆籬堦戺, 而視若土炭無用之物. 並與其名而忘之. 故作茶說一篇, 條列茶事于左方, 以爲當局者建白措施之地云爾).
구체적 방안 제시에 들어가기 앞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수렴하고, 당국자의 정책 입안을 건의한 내용이다. 중국은 만리 밖 남방에서 나는 차를 가지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외적을 막는 수단으로 삼는다. 우리도 호남과 영남 각지에 차나무가 중국 못지않게 많이 자란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과는 달리 아무도 차를 거들떠보지 않을 뿐 아니라, 차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이덕리는 자신이 차에 관한 논설 한편을 지어 차를 소개하고, 차무역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려는 것은 이런 현실이 안타까워서라고 하면서, 부디 눈 밝은 당국자가 자신의 이 글을 읽고서 시행을 건의해 줄 것을 당부했다.
여기까지로 전체 글의 서론이 마무리 된다. 이글을 통해 볼 때, 당시 조선 사람들은 차에 대해 거의 무지한 수준이었다. 아는 경우라 해도 고약처럼 고아서 급할 때 약으로 쓰는 정도였다. 차를 일상의 기호 음료로 생각하는 인식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때로 지식인 가운데 차를 즐긴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 중국 사행 길에 연경에서 구해온 차를 가지고 시늉이나 하는 정도였고, 그나마도 대어 놓고 마실 형편은 못 되었다. 이는 앞서 살펴본 '부풍향차보'의 기술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물론 신라와 고려 때 우리나라에서 차 문화가 대단히 성행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우리의 차 문화는 명맥이 거의 끊어지고 말았다.
이런 척박한 상황에서 이덕리는 차의 국가 전매와 국제 무역을 통한 국부 창출을 과감하게 주장했다. 기호품인 차가 국제 교역 시장에서 갖는 상품 가치를 꿰뚫어 보고 국가적 차원에서 차를 관리하고 전매해서 그 이익으로 국방을 강화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그 실행 방법과 단계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 방법 또한 대단히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식이었다.
茶에 미친 사람들의 담론
(차의 효능에 얽힌 이야기)
배움은 무지(無知)와 무식(無識)의 자각(自覺)이라는 말이 있다. 요즈음은 차를 마실 때마다 이 말이 그 무게를 더해가며 가슴 한 구석을 짓누른다. 차를 마시는 세월이 길어지고 경험이 많아질수록 정작 알아야할 중요한 것들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차 생활을 시작할 때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것은 차의 역사나 예법, 정신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茶 자체요 茶를 마셨을 때 몸에 나타나는 반응 즉 茶의 효능에 관련된 것이다. 茶의 냉성(冷性), 재배차(栽培茶)와 야생차(野生茶), 구증구포(九蒸九曝), 茶의 기감(氣感), 체질에 맞는 茶 등이 그것이다. 이는 다인들 사이에서 관심 있게 거론되고 있는 현안(懸案)들이다.
일부 다인들은 그것들이 茶의 효능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며 음차(飮茶) 후 몸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반응들을 그 근거로 내놓고 있다. 그러나 자연과학적 사고(思考)로 무장한 현대인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정론(正論)이 될 수 없다. 그저 茶에 미친 사람들이 찻자리에서 벌이는 담론(談論)일 뿐이다. 현상은 분명히 있는데 그 근거는 담론에 머무르고 있다.
1. 어떤 차를 마시면 몸이 불편하다?
몇 년 전 어떤 도예가를 찾았을 때의 경험이다. 그는 직접 만들었다는 녹차를 정성껏 우려 주었다. 낯 선차를 마셔야하는 것이 곤혹스러웠지만 피할 수 없었다. 茶를 마시니 이내 머리가 무거워지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내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역역하고 동행자의 표정에도 당혹감이 엿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동행자는 근처의 찻집에 들려서 보이차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자신도 가본 적이 없어서 좋은 차를 마실 수 있을지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대만까지 가서 공부했다는 주인장을 믿어보자는 것이었다. 녹차로 인한 부작용에는 보이차가 좋다는 경험적인 판단과 더불어 어쩌면 좋은 차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찻집을 찾았다.
젊은 주인장은 10 년 된 노차(老茶)라는 설명과 함께 보이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끝으로 전해오는 자극적인 차향과 함께 기대는 무너졌다. 사양할 수 없는 처지에 몇 잔을 마시고 일어서는데 중국 운남성의 옥룡설산 고지(高地)에서 겪었던 증세가 나타났다.
갑자기 귀가 먹먹해지고 가슴이 뛰며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데 동행자가 옆자리에 올라앉으며 편찮은 표정으로 두 번째 제안을 했다. "얼른 두부라도 먹으러 가십시다." 그 날의 동행자는 오랜 세월 차를 만들어온 존경하는 다인이요 수행자였다.
음차 후 이상증세에 대하여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지인이 어느 날 갑자기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차를 먹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차를 마시고 고생했던 사실을 털어놓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차를 마시고 몸이 불편했던 경험을 말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실제로 다인들 중에는 차를 매우 좋아하면서도 차를 대접받아야 할 때마다 곤혹스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남이 내는 차는 절대로 마시지 않는 사람, 자기가 먹을 차를 아예 지참하고 다니는 사람, 꼭 대접을 받아야할 경우에는 차라리 커피나 대용차를 마시는 사람, 다례를 가르치면서도 정작 자신은 차를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인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차를 마시고 몸이 불편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일부 다인들은 부패 변질된 차, 농약에 오염된 차, 법제(法制)되지 않은 차를 그 원인으로 지목한다. 차의 부패나 변질은 제조과정이나 저장 유통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다. 특히 보이차는 소위 매변(霉變)으로 인하여 먹을 수 없는 것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충분한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농약에 오염된 경우는 그 정도에 있어서 답변하기 곤란하다. 농약 과다사용으로 인하여 중금속이 검출되는 중국차가 수입되고 있다는 언론보도를 접하기는 했지만 과연 음차 후 곧바로 중독 반응이 일어날 만큼 농약에 오염된 차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법제되지 않은 차에 대한 견해를 이해하려면 먼저 법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법제란 자연에서 채취한 원생약(原生藥)을 복용하기 좋은 약으로 처리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렇다면 본래 약으로 이용되던 찻잎도 다른 약재들처럼 일정한 처리과정을 통해서 저장이 용이하고 먹기 좋고 몸에 이롭도록 만들어 먹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실제로 떡차, 연고차, 잎차 등은 찻잎을 찌고, 빻고, 모양내고, 말리고, 굽고, 볶는 등 일련의 처리과정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 처리과정을 법제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며 차의 법제 여부는 음차 후 이상증세와 관련이 있다.
동다송(東茶頌)에는 이를 추론할만한 의미 있는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는 중국의 것과 색향기미의 차이가 없고 중국의 육안차의 맛과 몽산차의 약효를 겸했다(東國所産元相同 色香氣味論一功 陸安之味蒙山藥 古人高判兼兩宗)." 법대로 만든 두강차는 이 때부터 성행하고(法製頭綱從此盛)라는 기록이 그것인데 '색향기미론'이나 '법제'는 본초학을 떠올리게 한다.
음차 후 이상증세는 같은 차를 마셔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상당한 중세를 경험하는데 반하여 어떤 사람은 전혀 증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내성(耐性)에 있다. 내성이란 독기나 독소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그에 대한 감수성이 점차 감소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담배를 피울수록 담배가 지닌 독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나 반대로 산속에 사는 사람이 도시의 오염된 환경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과 통한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이는 체질, 인성(人性)과 관련이 있다.
또한 음주, 흡연, 육식, 가공식품을 즐기는 사람이나 오염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내성이 강하다. 그런데 처음에는 증세를 느끼지 못하던 사람도 법제된 차를 지속적으로 마시게 되면 민감해진다. 이는 인체를 정화(淨化)해 주는 차의 효능과 관계가 있다. 이와는 다른 경우이지만 차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쁘거나 체질적으로 몸이 약한 사람이 불편한 증세를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법제된 차일지라도 연하게 우려서 조금씩 마셔야한다.
2. 차는 냉(冷)하다?
차의 냉성(冷性)에 대한 견해는 대중매체를 통해서도 접할 수 있을 만큼 일반화되어 있다. 차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두 번쯤은 들었을 법한 이야기가 ‘손발이 차고 속이 냉한 사람에게는 녹차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차와 과학이라는 등식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최소한 일부 다인들 사이에서는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식재(食材)나 약재(藥材)를 냉온성(冷溫性)으로 분류하는 것은 음양오행설을 근간으로 하는 한의학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오랜 옛날부터 약재로 사용되어 온 차가 한의학의 영역 안에서 그 성질과 효능이 정리되는 것은 당연하며 역시 동일한 사상적 범주 안에서 쓰인 다서(茶書)에서 유사한 기록을 접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의서나 다서에서 말하는 차의 성질은 대체로 '고감미한(苦甘微寒)' 즉, '차는 그 맛이 쓰고 단맛이 있으며 성질은 조금 차다'는 것이다. 육우의 '다경'에는 '차가 본래 냉하다(茶之爲用味至寒)'고 했고, '본초강목'에는 '차는 그 맛이 쓰고 달며 성질은 차고 음(陰) 중의 음으로 가장 열을 잘 내린다'고 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차는 성질이 조금 차며 그 맛은 달고 쓰면서 독이 없다'고 했다.
근래에 들어서도 차의 냉성에 대한 견해는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혜우 스님은 '다반사'에서 '차는 찬 성질이 있다'고 했고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역시 '차 자체는 냉한 성질이 있다'고 했다. 고명석 교수는 '현대생활과 차의 효능'에서 '차나무는 상록수이며 음지에서 잘 자란다. 겨울 동안 동설(冬雪)을 머금고 난 새싹을 취하여 제조하기 때문에 그 성질이 한(寒)하다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영선 교수는 '한국 차 문화'에서 '저혈압 환자나 손발이 차고 찬 음식을 먹어서 설사를 하는 사람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하며 차의 냉성을 짐작케 하는 견해를 피력했다.
차의 유해성에 대한 중국 한의서의 기록을 근거로 무분별한 음차생활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글도 눈에 띤다. 저자는 건강을 위해서 차를 알고 마셔야 한다면서 본초강목과 본초구진의 기록을 차례로 소개했다.
기(氣)가 허(虛)하고 차(寒)며 혈압(血壓)이 약한 사람이 이미 차(茶)를 마신 지가 오래면, 비위(脾胃)에 오한(惡寒)이 나며, 원기(元氣)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상(損傷)된다.
많이 복용하면 수면이 적고, 오래 복용하면 몸이 마르고, 공복(空腹)에 차(茶)를 마시면 신장(腎臟)으로 들어가 화(火)를 삭이며, 다시 비위(脾胃)로 들어가 한기(寒氣)가 생겨나니, 결코 복용에 적당치가 못하다.
이상과 같은 기록이나 견해를 그냥 지나치기는 어렵다. 한의학은 우리의 정서에 깊이 뿌리박혀 있고 지금도 공인된 치병(治病)의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견도 많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차의 냉성’에 대한 관심은 음차 후 이상증세와 맞물려 서서히 증폭되어가는 느낌이다.
황제내경 소문편 음양응대론(陰陽應象大論)에 의하면 '음양이란 천지의 도이며, 만물의 근본이며, 변화의 원천이며, 생사의 시본이며, 신명의 부이니, 질병을 고치는데 있어서도 이 원리 원칙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양은 따듯함과 밝음이요 음은 차가움과 어둠이다. 한의학에서는 음양의 평형이 건강을 보증하는 필수조건이며 음양의 실조(失調)를 질병 유발의 근본 원인으로 본다. 그렇다면 차의 냉성은 인체를 구성하는 음양의 조화에 영향을 끼치며 음차 후 이상증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일본의 의사 '신도 요시하루'는 그의 저서 '냉기제거 건강법'에서 이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돕고 있다. "동양의학에서는 음과 양, 두 종류의 에너지가 체내를 순환하고 있으면 건강하다고 본다. 이 순환이 흐트러지고 정체현상이 일어날 때 발병(發病)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에너지의 순환이 나빠지는 것이다. 혈액은 에너지와 함께 순환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에너지의 순환이 나빠지면 혈액의 순환도 함께 나빠진다."
3. 구증구포(九蒸九曝)에 대하여
오늘날 일부 다인들은 소위 '구증구포'를 명차의 필수조건처럼 여기고 있다. 구증구포라는 글귀가 인쇄된 차통(茶桶)이 시중에 많이 보이고 이런 차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다. 그러나 회의(懷疑)적인 견해를 피력하거나 구증구포 불가(不可)를 주장하는 다인들도 많다. 이들의 주장은 주로 제다의 현실적인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다.
구증구포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풀이해 본다면 아홉 번을 찌고 아홉 번을 말린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구증구포로 만든 차는 우리 전통차인 덖음차가 아닐 뿐만 아니라 찐차도 아닌 실체가 없는 제다(製茶)의 또 다른 유령일 뿐이다.
너무 오랫동안 덖게 되면 비타민C, 비타민B, 니아신, 사포닌, 카테긴스, 카페인, 탄수화물, 무기질 등 중요한 유효성분들이 손실 또는 파괴되기 쉽기 때문에 생약을 법제하는 구중구포식 제다방법은 결코 자랑할 바가 못 된다.
고온의 가마솥에 아홉 번 덖고 아홉 번 비빈다면 찻잎은 모두 부서지고 만다. 적당히 흉내만 낸다면 더는 못하겠느냐?
덖고 비비기는 횟수보다 찻잎의 함수량 감소에 따른 솥의 열도 조절, 전체 가열량, 비비기의 강도와 횟수 등의 요소를 잘 맞추어야 한다.
이에 비하여 구증구포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현실성에 있어서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구증구포란 한약을 법제하는 방법 중 하나로 몸에 이로운 차를 만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며 튼실한 야생 찻잎을 적정한 온도로 덖고 적절하게 비비기를 하면 구증구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문헌적 근거로는 2004 년 8 월 27 일 순천 선암사에서 열린 한국전통차문화 심포지엄에서 호남의 차문화전통을 발표한 동국대학의 김상현(金相鉉) 교수가 조선 말기 문신인 이유원(李裕元)의 문집 '임하필기(林下筆記)'를 열람하다가 구증구포에 대한 기록을 발견한 사실을 들기도 한다.
차를 평가함에 있어서 오직 색향미(色香味)와 영양가만을 따진다면 구증구포는 제다법과의 관련 유무와 상관없이 별로 가치가 없다. 생산성도 없고 상업적으로 만족하기도 어려운데 공연히 한약을 만드는 까다로운 방법에 매달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분명한 사실은, 굳이 구증구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아주 오래 전부터 차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만들어져 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생화학적인 성분과 효능만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생엽을 그냥 먹거나 나물로 무치든지 국을 끓여서 쉽게 많은 양을 먹을 수 있고 저장을 위해서는 단순 건조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차이가 있을지언정 일정한 원칙에 의해 현묘(玄妙)한 방법으로 제다(製茶)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구중구포 이전에 법제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초제(炒制)는 본초학에서 말하는 법제의 한 방법이니 찻잎을 가마솥에 덖는 것도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몇 번을 덖고 비비든지 차가 건강과 직결되는 음료인 만큼 찻잎을 법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찻잎의 이로운 기운이나 요소를 증강시키고 반대로 해로운 기운이나 요소를 감소시키거나 제거하는 과정 즉 법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로 보건데 차의 법제와 음차 후 이상증세와의 관련성은 부인할 수 없다. 혜우 스님은 "찻잎의 본래 성질은 차(冷)나 덖음차 제다법에 의해서 차로 만들어진 후에는 그 성질이 평해진다"고 하였다. 혹자는 '초(炒)의 목적은 치료효과를 높이고 약성을 누그러뜨리고 개선하여 주며 독성과 자극성을 감소시키고 향과 미(味)를 찾아 교취교미(橋臭橋味)하여 준다'고 했다.
차는 반드시 법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만의 비법(秘法)을 내세우며 터무니없는 고가로 차를 판매하는 것은 법제가 아니라 상술(商術)이다. 법제는 온갖 잡다한 방법이 동원된 복잡한 과정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경우에는 차가 모든 기운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최선의 법제 방법은 무엇인가? 구증구포인가? 그렇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몸에 전적으로 이롭고 누가 마셔도 이상증세기 나타나지 않는 차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차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나 방법을 법제라고 하는데 법제의 방법은 차의 종류, 생엽의 상태, 기후 등에 따라 부분적인 차이가 있다. 법제는 많은 지식과 경험을 요하며 반복되는 연구와 실험을 필요로 한다. 법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정직하게 지극정성으로 차를 만드는 것은 제다인들의 몫이다. 또한 법제된 차의 가치를 인정하고 합당한 가격을 지불하는 것은 소비자들의 몫이다.
4. 차의 기감(氣感)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차의 효능에 대하여 '기(氣)를 내리고 오랜 식체를 삭히며 머리와 눈을 맑게 하고 오줌을 잘 나가게 한다. 또한 소갈증을 낫게 하고 잠을 덜 자게 한다. 그 밖에 굽거나 볶아서 먹어 생긴 독을 푼다'라고 했다.
차의 효능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차의 생화학적인 성분에 기초한다. 차의 성분이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그에 따르는 약리작용들이 밝혀짐으로써 많은 효능들이 의학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동의보감의 '기(氣)를 내려준다'는 효능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과학적 사고로 무장한 현대인들이 한의학적인 효능을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체계적으로 연구된 바가 거의 없고 단지 일부 다인들이나 기수련(氣修練)을 하는 사람들만이 '차의 냉성'과 더불어 관심을 보일 뿐이다.
2003 년도 한국차연구회 학술발표 자료 중에 '차나무 품종․ 차 제품의 종류 및 이용을 위한 기감(氣感)에 관한 연구'라는 전라남도 농업기술원 차 시험장 김주희 씨의 글이 들어있다. 그는 더 많은 연구와 과학적인 증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차의 기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한국의 차나무는, 한국 산하에 있는 재래종 차나무는 많은 기감을 가지고 있는 곳도 있고 그렇지 못한 곳도 있다... 세계 6대 다류를 이루는 차나무의 대부분이 한국산을 제외하고는 거의 기를 느낄 수 없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기감(氣感, Energy)이란식물과 동물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물질은 원소로 구성되어 다. 그 원소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 에너지는 빛과 파장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마그네슘과 유황화합물 및 많은 원소들이 관여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 재래종 차에는 기가 많아서 인체 내의 기를 원활하게 소통시켜주고 있다... 장부는 각 부분마다 기를 발산하고 있으며 그 균형 유지를 위해서 유기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차가 관여하는 기관은 12개이며, 관여하지 못하는 기관은 8개 기관으로 보인다.
자연과학적인 사고로 기(氣)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의학에서는 '만물이 탄생하고 자라고 운동하는 모든 것이 기의 작용이며 형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는 것이 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기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를 내려주는 효능'은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진 다인들의 견해는 대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법제(法製)된 차를 마시면 기가 하강하여 단전에 모이고 단전에 모인 기가 몸 전체로 운행되면서 혈(血)의 순환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신진대사가 원활해진다. 이렇게 되면 머리와 눈이 맑아지고, 몸이 따듯해지고, 체내의 독소나 독기가 배출되고, 온몸의 구석까지 영양이 공급되면서 피로가 풀리고 심신이 편안해 진다. 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생화학적 효능을 능가한다. 고혈압이나 당뇨 등 소위 성인병이라 불리는 각종 대사성질환의 근본 원인이, 공해와 스트레스로 인한 기의 상승(上乘) 정체(停滯)에서 비롯된다고 볼 때 이 효능은 현대인들이 차를 마셔야하는 명제를 만족시켜 주는 최고의 것으로 꼽을 수 있다.
차의 효능은 원료인 찻잎과 법제 여부에 의해서 결정된다. 산삼과 재배한 인삼은 성분상의 차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청난 효능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성분의 차이가 아니라 기운(氣運)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약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찻잎만 예외일 수 없다. 육우는 다경에서 '차는 야생차가 상품이며 차밭에서 딴 것이 버금간다'고 했다. 그러나 재배한 차라도 당시의 것과 작금의 것은 단순 비교할 수 없다. 당시에는 다수확을 위해 화학비료나 농약을 살포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야생 찻잎의 순수성에 대한 시비(是非)를 감안하더라도 최소한 장뇌삼과 인삼의 차이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비료나 농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찻잎을 법제하여 만든 차의 품질이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차의 성분과 효능에 대한 생화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차의 생리활성기능에 대하여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는 차의 세 가지 기능(일차기능: 영양기능, 이차기능: 감각기능, 삼차기능: 체조절기능) 중에서 삼차기능에 해당하는 것인데 근래 들어 건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주목받고 있다. 그것은 생체방어, 질병의 예방, 회복, 체조절 리듬, 노화억제 등이다. 이는 몸의 신진대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선인(先人)들은 이미 오래 전에 신진대사에 근원적으로 작용하는 차의 효능을 이야기했으니 그 지혜가 놀랍다.
지금까지 거론한 내용은 서두에서 밝혔듯이 대부분 담론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차에 미친 사람들의 담론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현상에서 비롯된 담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현대과학의 오만과 상업적 이해 관계에 가려서 영원히 담론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 晩(늦을 만)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날 일(日; 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免(면, 만)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免(면, 만)은 애를 낳다, 여기에서는 면(人+免; 엎드리다, 머리를 숙이다)의 뜻이 있다. 해가 지는 해질녘을 말한다. ❷형성문자로 晩자는 '늦다'나 '쇠하다', '(해가) 저물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晩자는 日(해 일)자와 免(면할 면)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免자는 '면하다'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면, 만'으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晩자는 본래 '(날이) 저물다'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다. 그러니 日자가 의미요소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晩(만)은 ①늦다 ②해가 저물다 ③늙다, 쇠하다 ④해질녘, 황혼(黃昏) ⑤저녁 ⑥늦은 밤, 깊은 밤 ⑦노년(老年), 만년(晩年) ⑧끝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이를 조(早)이다. 용례로는 저녁 식사를 만찬(晩餐), 늦가을을 만추(晩秋), 혼기가 지나서 늦게 한 혼인을 만혼(晩婚), 사람의 일생에서 나이 많은 노인의 시절을 만년(晩年), 늦게야 이루어짐을 만성(晩成), 느즈막한 시기를 만기(晩期), 저녁이나 늘그막을 만모(晩暮), 늙어서야 지각이 남 또는 뒤늦게 깨달음을 만각(晩覺), 늘그막에 누리는 복을 만복(晩福), 늦게 다다름을 만도(晩到), 늘그막에 낳음 또는 예정한 날짜를 훨씬 지나 아기를 낳음을 만산(晩産), 날이 저물어 가는 어스레한 빛이나 철이 늦은 때의 경치를 만색(晩色), 해가 질 무렵의 경치를 만경(晩景), 늙어서 자식을 낳음을 만득(晩得), 제철보다 늦게 곡식이나 식물을 심는 일을 만식(晩植), 나이가 들어 늦게야 배움을 만학(晩學), 늙바탕에 사귄 친구를 만교(晩交), 저녁에 술을 마심 또는 그 술을 만작(晩酌), 세밑으로 한 해가 끝날 무렵을 세만(歲晩), 늦가을을 추만(秋晩), 나이가 매우 많음을 연만(年晩), 어젯밤이나 어제 저녁을 작만(昨晩), 기준이 되는 때보다 조금 늦음을 차만(差晩), 지체하여 늦어짐을 계만(稽晩), 이름과 늦음을 조만(早晩), 때늦은 한탄이라는 뜻으로 시기가 늦어 기회를 놓친 것이 원통해서 탄식함을 이르는 말을 만시지탄(晩時之歎), 늦가을의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 말을 만추가경(晩秋佳景), 배가 고플 때 먹으면 무엇이든지 맛이 있어 고기를 먹는 것과 같다는 말을 만식당육(晩食當肉),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크게 될 인물은 오랜 공적을 쌓아 늦게 이루어짐을 일컫는 말을 대기만성(大器晩成), 어찌 보는 바가 늦느냐는 뜻으로 깨달음이 늦음을 이르는 말을 하견지만(何見之晩), 비파나무는 늦은 겨울에도 그 빛은 푸르다는 말을 비파만취(枇杷晩翠) 등에 쓰인다.
▶️ 甘(달 감)은 ❶지사문자로 입 속에 물건을 물고 있음을 나타내며 입속에 머금고 맛봄을 뜻한다. 甘(감)의 음은 머금다의 뜻을 나타냄으로 나아가서 맛있다, 달다의 뜻이 있다. ❷지사문자로 甘자는 '달다'나 '맛좋다', '만족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甘자는 口(입 구)자에 획을 하나 그어 입안에 음식이 들어가 있음을 표현한 지사문자(指事文字)이다. 甘자는 이렇게 입안에 음식이 들어와 있다는 의미에서 '만족하다'나 '달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甘자의 사전적 의미는 '달다'나 '맛좋다'이다. 그러나 실제 쓰임에서는 甛(달 첨)자가 '달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甘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주로 '먹다'와 관련된 뜻을 전달하고 있으니 甘자를 반드시 '달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甘(감)은 (姓)의 하나로 ①달다(꿀이나 설탕의 맛과 같다) ②달게 여기다 ③맛좋다 ④익다 ⑤만족하다 ⑥들어서 기분 좋다 ⑦느리다 ⑧느슨하다 ⑨간사하다(거짓으로 남의 비위를 맞추는 태도가 있다) ⑩감귤(柑橘) ⑪맛있는 음식(飮食)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기쁠 희(僖), 기쁠 희(喜), 즐길 오(娛), 기쁠 이(怡), 기쁠 열(悅), 즐거울 유(愉), 기쁠 희(憘), 즐길 낙/락(樂), 기쁠 흔(欣), 기쁠 환(歡), 즐길 탐(耽)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슬플 애(哀), 슬퍼할 도(悼), 성낼 노(怒), 슬플 비(悲), 쓸 고(苦)이다. 용례로는 군말 없이 달게 받음을 감수(甘受), 콩과에 속하는 다년생 약용 식물을 감초(甘草), 달콤하여 맛이 좋음을 감미(甘美), 단 것과 쓴 것이나 즐거움과 괴로움 또는 고생을 달게 여김을 감고(甘苦), 달콤한 말로 남의 비위에 맞도록 듣기 좋게 하는 말을 감언(甘言), 단술이나 막걸리를 감주(甘酒), 괴로움이나 책망을 달게 여김 또는 그런 마음을 감심(甘心), 달고 쏘는 맛이 있음을 감렬(甘烈), 단맛으로 설탕이나 꿀 따위의 당분이 있는 것에서 느끼는 맛을 감미(甘味), 음식을 맛있게 먹음을 감식(甘食), 달갑게 여기어 승낙함을 감낙(甘諾), 좋은 맛 또는 맛있는 음식을 감지(甘旨),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보내던 공문을 감결(甘結), 알맞은 때에 내리는 비로 가뭄 끝에 오는 반가운 비를 감우(甘雨), 죽기를 달게 여김을 감사(甘死), 물맛이 좋은 우물을 감정(甘井), 달콤한 말을 감사(甘辭), 스스로 달게 여김을 자감(自甘), 향기롭고 달콤함을 방감(芳甘), 살지고 맛이 좋음 또는 그런 고기를 비감(肥甘), 단맛을 나눈다는 뜻으로 널리 사랑을 베풀거나 즐거움을 함께 함이라는 말을 분감(分甘), 선정을 베푼 인재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감당지애(甘棠之愛), 달콤하고 아름다운 말을 이르는 말을 감언미어(甘言美語), 달콤한 말과 이로운 이야기라는 뜻으로 남의 비위에 맞도록 꾸민 달콤한 말과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남을 꾀하는 말을 감언이설(甘言利說), 물맛이 좋은 우물은 먼저 마른다는 뜻으로 재능 있는 사람이 일찍 쇠폐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감정선갈(甘井先竭), 물맛이 좋은 샘은 먼저 마른다는 뜻으로 재능 있는 사람이 일찍 쇠폐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감천선갈(甘泉先竭),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으로 사리에 옳고 그름을 돌보지 않고 자기 비위에 맞으면 취하고 싫으면 버린다는 말을 감탄고토(甘呑苦吐) 등에 쓰인다.
▶️ 侯(제후 후, 어조사 혜)는 ❶형성문자로 帿(후), 兮(혜)와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후)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옛 자형(字形)은 후(厂+矢)로 활을 쏘아 맞히는 과녁의 뜻의 회의자(會意字)이다. 또 왕후(王侯)의 侯(후)의 뜻에 빌어 쓰여졌다. 사람인변(亻)部와 (厂+矢)의 합자(合字)이다. ❷회의문자로 侯자는 '제후'나 '임금', '과녁'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侯자는 人(사람 인)자와 厂(기슭 엄)자, 矢(화살 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서는 단순히 기슭에 화살이 꽂혀있는 모습만이 그려져 있었다. 제후란 변방에서 일정 부분의 영토를 가지고 백성을 다스리던 군주를 말한다. 侯자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없다. 일부에서는 활을 쏘는 실력으로 제후의 지위가 정해졌다는 설이 있다. 또 제후가 다스리든 지역은 이민족이 사는 변방에 있기에 이 지역을 방어하는 역할을 표시하기 위해 영토의 끝을 의미하는 厂자와 矢자가 결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侯(후, 혜)는 (1)후작(侯爵) (2)제후(諸候) (3)솔 (4)5일간을 일컫는 말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제후(諸侯) ②임금 ③후작(侯爵: 다섯 작위 중 둘째 작위) ④과녁 ⑤오직 ⑥어찌 ⑦아름답다, 그리고 ⓐ어조사(語助辭)(혜)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조그마한 나라의 왕을 후왕(侯王), 봉건시대에 일정한 영토를 가지고 그 영내의 인민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제후(諸侯), 천자에게 조공을 하는 작은 나라의 임금을 열후(列侯), 천자에게 조공을 하는 작은 나라의 임금을 봉후(封侯), 제후 중에서 관위가 높은 사람을 통후(通侯), 적군의 동정이나 지형 등을 몰래 탐지하기 위하여 먼 곳으로 파견되는 일을 원후(遠侯),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를 이르는 말을 제후국(諸侯國), 일만호의 백성을 가진 제후 곧 세력이 큰 제후를 일컬는 말을 만호후(萬戶侯),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제후를 이르는 말을 만리후(萬里侯), 제왕과 제후와 대장과 재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을 왕후장상(王侯將相), 옛날 수나라 임금이 뱀을 도와 준 공으로 얻었다는 보배로운 구슬을 이르는 말을 수후지주(隋侯之珠)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