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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삶을 원합니까?
농부들이 풍성한 가을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농사는 하늘에 달려있습니다. 적절한 일조량이 없이는 그 어떤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적절한 양의 비, 시기에 맞는 적당한 기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농작물들은 마치도 자식 같아서 농작물들을 위한 농부의 지극정성이 필요합니다. 언젠가 텃밭을 시작해놓고 한 달 가까이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출장에서 돌아와 텃밭에 갔다가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습니다. 완전히 잡초 왕국이더군요.
씨만 뿌린다고, 모종만 심어놓는다고 자동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매일 조금씩 되풀이되는 농부의 노력이 성공적인 수확의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잘 준비된 좋은 토양이 필요합니다. 이는 가장 농사에 있어서 가장 기본입니다. 본격적인 농사 시작에 앞서 당연히 갖춰야할 여건입니다.
그런데 비옥한 토양이 되기 위해서는 지난해 농사 이후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의 형태를 고수해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땅의 입장에서 힘든 일이 되겠지만 속살과 치부를 완전히 드러내는 고통, 완전히 한번 뒤집은 과정, 다시 말해서 한바탕 완전히 갈아엎는 혼란이 필요합니다. 결국 완전히 자신을 죽이는 과정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코린토 1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 다시 말해서 하느님 자녀로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 결국 열배 백배 열매 맺는 좋은 토양이 되기 위해서 ‘죽는 과정’ ‘묻히는 과정’의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코린토 1서 42~44절)
희망에 찬 새로운 삶,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삶을 우리 모두 꿈꿉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불멸의 삶을 살기를 염원합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먼저 겪어야할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답답하지만 먼저 땅에 파묻히는 것입니다. 고통스럽기 그지없지만 먼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내려놓아야, 내가 크게 한번 뒤로 물러서야 나를 희생해야, 거기서부터 새로운 삶, 부활의 삶, 열매 맺는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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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9.20 연중 제24주간 토요일(순례32일차), 1코린15,37-39.42-49 루카8,4-15
희망하십시오. -깨달음의 은총-
어제 순례31일차, 폰헬라다에서 여기 빌라프랑카까지 24km,
아침6:30분에 출발하여 오후12:30분에 선착순으로 도착했습니다.
이냐시오 도반과 저는 매번 도착지 순례자 숙소에 선착순으로 도착하여
가능한 좋은 위치의 방을 배정 받아 왔습니다.
어디나 부요해 보이지는 않아도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기품있어 보이는 스페인 나라요 사람들입니다.
여기 작은 도시도 그대로 역사 박물관 같습니다.
12세기 이후 거대한 성당들과 건축물, 거리가 자연과 조화되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 깨달음을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깨달음은 은총입니다.
깨달음을 통한 앎에 변화요 자유로운 삶입니다.
1.
사람은 정신력과 체력만으론 부족합니다.
성령 안에서 몸과 맘이 하나될 때의 영력만이 진정한 힘입니다.
장시간, 장거리 순례를 하면서 절감하는 진리입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묵주기도를 통해
산티야고 순례는 물론 평생순례여정에 묵주기도가 얼마나 아름답고 유익한지 깨닫습니다.
그 먼거리도 지치지 않고 활력있게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묵주기도의 은총입니다.
묵주신공과 성로신공은 교회가 전해주는 보물과 같은 보편기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2.
이냐시오 도반이 어느 순례중인 형제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허탈해 했습니다.
즉시
'아, 말에도 영양가가 있구나. 화려하고 풍성하나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영양가 없는 음식처럼,
말도, 글도 화려하고 풍요로워 보이지만 영양가 없을 수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읽어도, 들어도 감동이나 통찰이 없는 영양가 없는 글이나 말은 얼마나 많은지요.
영양가 없는 말이나 글의 주인공은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3.
하여 침묵과 기도입니다.
산티야고 순례는 침묵과 기도의 순례길입니다.
걷는 것, 쉬는 것, 먹는 것, 나누는 것, 자는 것뿐이라면 영양가 부족한 순례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침묵과 기도가 필히 동반해야 영양가 풍부한 영적 삶입니다.
4.
길과 여행은 인간의 원형 종교 개념입니다.
비단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종파를 초월해 무수한 이들이 산티야고 여행길에 오릅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겐 산티야고가 상징하는 여행길의 목적지가 하느님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 역시 그 무엇을 향한 갈망이 있을진대, 깊이보면 누구나 종교인임을 깨닫습니다.
5.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를 찾을 때는 우선 순례자 많이 모이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잘되는 좋은 서비스업인 음식점이나 병원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우선 사람이 많으면 믿을만 하고 편안하며 이런사람 저런사람들 사이에서 체험도 풍요롭습니다.
많은 이들이 집에서 못한 가정공동체 체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어제 오후 널려있는 오색찬란한 빨래에 곳곳에서 다양하게 펼쳐지는 무장해제된 모습들의 어울림이
흡사 잔치와도 같이 참 넉넉하고 풍요로워보였습니다.
주님 안에 이루어진 인류가족공동체를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입니다.
도대체 이런 한 인류공동체의 모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런지요.
스페인 형제들이 애견과 같이 순례하는 모습도 자주 목격합니다.
어제는 개와 순례하는 형제의 모습이 재미있어 '개도 순례에 동참하는구나'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6.
사랑하는 분들에게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는 일도 재미있습니다.
평생 찍은 사진보다 안식년을 맞이하여 찍은 것이 족히 수백배는 될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도 사랑하는 이가 있고 말이 들어가야 의미의 빛을 발하듯
인류역사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인류역사를 배경으로 예수님이 계시고 말씀이 있기에
비로소 의미의 빛을 발하는 우주만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이 빠져버린 인류역사라면 참 공허하고 무의미할 것입니다.
7.
머뭄과 떠남은 삶의 리듬입니다.
밀물처럼 들어왔다 다음 날 아침은 썰물처럼 빠지는 순례자 숙소입니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라'는 불가의 진리가 그대로 실현되는 순례자 숙소입니다.
잘 머물다 잘 떠나는 삶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오늘 말씀의 주제는 희망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끊임없는 깨달음의 은총이요 낙천적 삶입니다.
깨달음과 함께 증대되는 희망입니다.
여기서 더욱 말씀을 탐구하게 되고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뒤따릅니다.
끊임없는 깨달음, 희망, 찬미, 감사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농부는 땅을 탓하지 않는다.'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생각납니다.
진정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찬미와 감사의 사람들에게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정불변의 환경이나 마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게 모두의 가능성이자 희망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의 은총이 깨달음을 촉진하고 희망을 증진시키며 찬미와 감사의 신비가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바오로의 심오한 부활에 대한 희망의 깨달음도 여기서 연유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 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 납니다."
주님께서 신비가 바오로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참으로 고무적인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말씀의 풍부한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에게 풍부한 깨달음의 은총과 희망을 선사하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걸어가라. 생명의 빛 속에서 걸어가라."(시편56,14ㄷㄹ).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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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1코린 15,35-37.42-49
복음 루카 8,4-15
많은 분들이 기도가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쉽지는 않지요.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점점 황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기도하지 않으면 무미건조해집니다. 삶이 나태해지고 불성실해질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기도가 줄어들고 죄와 타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일과 분심거리로 내 마음 속을 채워 나가면서 힘들어 집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시련과 고통이 찾아와도 제대로 이겨내기 힘듭니다. 참 신앙인들은 이를 극복하여 더 강한 선(善)을 가져오는데, 기도를 하지 않다보면 믿음이 생기지 않아 선이 아닌 불평불만으로 그 순간을 채우게 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묵상기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과 함께 홀로 있기 위하여 자주 시간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란 단순히 하느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기도를 통해서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게 될 것이며, 또한 주님의 말씀을 내 마음 안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 일이 바쁘다면서 소홀히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나요? 주일 미사 한 번 참석으로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며, 그 외의 기도는 특별할 때에만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과 가까워질 수도 주님과 함께 할 수도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 비유의 뜻도 설명해주시지요.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길가,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은 하느님의 말씀이 떨어진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좋은 땅에 떨어져야 백 배 이상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 마음이 과연 좋은 땅이냐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성경을 읽고, 자주 기도하며,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요? 이렇게 살고 있다면, 분명 내 마음은 좋은 땅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성경에은 먼지만 잔뜩 쌓여 있다면,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원리원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내 마음은 씨가 열매 맺지 못하는 길가, 바위, 가시덤불과 같은 상태일 것입니다.
주님께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기도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도 생기고, 그래야 주님의 뜻도 ‘나’라는 이 부족한 몸을 통해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렵고 힘들지요. 세상 안에서 해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을 통해 주신 선물인 믿음과 인내와 생명을 지닌 사람들은 오히려 하느님께 더 많은 것들을 받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물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새도 날개를 펴지 않고는 날 수 없다. 인간도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마크 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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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간 토요일>(2014. 9. 20. 토)(루카 8,4-15)
<못하는가? 안 하는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받아들여서 믿은 사람이 있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사람이 있습니다.
받아들여서 믿은 사람들 가운데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이 있고,
중간에 믿음을 잃고 떨어져 나간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복음 선포의 과정과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과 비유 속에 들어 있는 뜻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은 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의 씨를 사람들에게 뿌리는 것은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밭에서 얻은 열매는 농부가 차지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맺은 열매는 하느님의 것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것입니다.
(어차피 세상 모든 만물은 하느님의 것이니 따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사람들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무슨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오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씨를(말씀을) 뿌리는 것은 오직 밭을(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오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에 다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사이비 종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위해서 말씀의 씨를 뿌리는데,
그것이 자기들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받아들였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열매를 맺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다시 읽으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설명하신 말씀에서 '못한다.' 라는 표현은
사실은 '안 한다.' 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2)."
이 말씀을 뜻에 맞게 조금 바꾸면,
"'길'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말씀을 믿지 않고 악마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서
구원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가 됩니다.
힘이 없어서 못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악마가 와서 힘으로 누르고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면
그것은 악마의 죄이지 우리의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악마가 와서 유혹할 때 그 유혹에 귀를 기울이고,
유혹하는 대로 따라가면 그것은 우리의 죄가 됩니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루카 8,13)."
이 말씀은, "'바위'는 들을 때에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를 내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
편안한 때에만 믿고
시련의 때가 오면 힘들다고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4)."
이 말씀은, "'가시덤불'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열매를 제대로 맺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인생 걱정이나 하고, 재물과 쾌락만 찾는 사람들이다."입니다.
그들은 열매를 못 맺는 사람들이 아니라 안 맺는 사람들입니다.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과
먹고사는 문제만 생각하느라고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는
환경과 여건의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의지와 정성과 노력의 차이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도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고,
먹고사는 일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데도 그 핑계를 대면서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루카복음 5장에 나오는 '중풍 병자'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가의 병자'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병자였습니다.
그런데 루카복음 5장의 중풍 병자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께 갔습니다.
(그 병자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부탁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가족이나 친구들의 권고를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병자와 그를 도와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등의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고,
자신의 상황을 불평하기만 했습니다.
두 병자 모두 예수님 덕분에 건강해졌는데 그 다음의 모습이 정반대입니다.
루카복음의 병자는
건강하게 되자 예수님의 지시대로 행동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루카 5,25).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믿고 따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병자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밀고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요한 5,15-16).
그는 몸의 건강만 바라고 영혼의 구원은 거부한 사람입니다.
(나중에라도 회개했다면 구원을 받았겠지만...)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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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해야 하는 단 한 가지 >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생긴 지 막 3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 운동장 한 가운데 산소가 하나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묘지 위에 세워진 학교였는데 그 산소 주인만이 학교가 제시한 금액에 협의를 해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이장하여 깎아서 운동장을 만들었는데 단 하나의 산소만이 운동장 위에 불뚝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주위를 돌며 공을 찼고 가끔은 산소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열 받아서 산소를 차기도 하고 누군지도 모르는 그 자손들을 욕하기도 하였습니다. 돈이 좋기야 좋지만 조상의 묘자리를 빌미로 과연 그렇게 몇 년 동안 방치해 두여야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항상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 높이 있는 산소는 평상시에도 잘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풀이 우거질 것인데 항상 짧게 잘려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와서 그 높은 곳에 올라가 산소를 정돈하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몰래 와서 묘를 잘 단장하는 것이 조상이 기뻐하는 일일까요? 사실 그들의 노력은 조상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상이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봉사하면 기뻐하실 것이다, 봉헌을 많이 하면 기뻐하실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하면 기뻐하실 것이다, 선교를 하면 기뻐하실 것이다 등 많은 일들을 하느님께 해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 과연 필요한 것일까요? 하느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을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닌 이상에는 무슨 일을 하던지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바오로는 땅에서 씨앗이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부활의 원리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첫째 아담에게서 나온 땅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은 하늘에서 난분이기에 하늘에 계신 분과 닮으려면 땅에서 난 자신을 죽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신들을 죽이고 그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교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 각 개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례 받을 때의 우리 자신이 완전하게 죽지 않으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해야 했던 일은 오직 죽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래야 새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는 땅의 인간을 묻어 하늘의 인간으로 조금씩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이 삶의 의미란 뜻입니다. 애벌레의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자기가 죽어서 고치가 되어 다시 나비로 태어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시간을 주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흙으로 된 육체적인 우리 자신을 죽여 그리스도를 닮은 영적인 나로 새로 태어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모든 노력들은 결국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 또한 새로 태어나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습니다.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합니다. 미리 공부도 하고 옷도 마련하고 신발도 편한 것을 삽니다. 미리 걷는 연습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리고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황당한 경우는 여권을 가져오지 않았을 때일 것입니다. 저는 유학할 때 그런 경험이 있어서 가야 할 곳을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라도 꼭 필요한 한 가지만을 먼저 챙깁니다. 나머지는 면세점이나 그 나라에 가서 다 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꼭 챙겨야 하는 그 단 한 가지는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입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모든 노력들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됩니다. 매일 자아를 죽이고 그분을 나의 참 주인으로 삼고 살아갑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 죽지 않고서는 절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음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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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갈아엎어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땅은 다 좋은 땅입니다. 모래땅에서는 땅콩이 잘 자라고 진흙땅에선 미나리가 자라고 습한 땅에서는 버섯이 잘 자랍니다. 기름진 땅에는 콩이나 고추가 잘 자랍니다. 각기 주어진 땅에서 알맞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도 관리하지 않을 때 못 쓰는 땅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는 수고와 땀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내 마음의 밭은 선합니다. 좋은 밭입니다. 이 좋은 땅이 어느새 길바닥으로, 바위로, 가시덤불로, 방치되지는 않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고 그 땅을 결코 못쓸 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땅은 다 좋은 땅이 분명한데 관리를 하지 못해 폐허가 된다면 그 책임은 관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씨의 운명은 그 씨가 떨어진 땅에 의해 좌우됩니다. 혹시라도 씨앗이 싹트지 못하고, 자라지 못할 땅이라면 지금 갈아엎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큰 은총을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리게 됩니다. 많은 경우 자기가 잃어버리고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주어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루가8,15)을 두고 하는 말이니 만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길바닥이라는, 바위라는, 가시덤불이라는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워말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 발 내 딛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하느님의 숨을 받은 우리는 모두가 좋은 밭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께서 책임져 주시는데 왜 주저하고 좋은 밭을 묵혀 두려하십니까?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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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사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뿌린 씨가 좋은 땅이 아니면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몸소 비유에 대한 풀이까지도 해 주십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든 지금의 우리이든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혹시 나는 이 당연한 것 같은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며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봅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씨 뿌리는 사람’이 아니라 ‘씨앗’과 그 ‘씨앗이 뿌려진 땅’, 그리고 ‘열매’입니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세 가지 유형의 삶(길, 바위, 가시덤불)과 복음을 받아들인 삶의 모습(좋은 땅)이 대조됩니다. 그 기준은 결실인 열매를 맺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땅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제 이 비유가 말씀을 듣는 이의 ‘책임’에 관하여 말하고 있음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니 이 비유에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이 비유를 알아들었다는 것은 더 이상 표면적 의미의 이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에 필요한 결단과 실천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아직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실천적 인식’이 어려운 까닭은 ‘존재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부활의 참뜻을 알려면 뿌린 씨가 죽지 않고는 살아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알아듣는 것’은 옛 생활의 ‘죽음’이라는, 존재의 변화가 필요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어렵고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 꾸준히 머무는 이는 행복한 결실을 거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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