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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를 설명하심
마 13:10-23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 13:10-23 /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막4:8-12,눅8:9-10] 제자들이 와서 예수께 물었다. `왜 저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11)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13)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넉넉하게 되겠지만 갖지 못한 사람은 조금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게 하려는 것이 내가 비유를 쓰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듣고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14)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ㄱ) `너희가 듣기는 아무리 많이 듣더라도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너희가 보기는 끊임없이 보더라도 그 의미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ㄱ. 사6:9-10) 15)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귀를 막아 버려라. 눈을 아예 감겨 버려라.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아 내게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여라. 그들이 고침받는 일이 없게 하여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볼 줄을 아니 행복하고 너희 귀는 들을 줄을 아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믿음이 깊은 사람들이 너희가 본 것을 보려고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18) [씨뿌리는 비유의 설명;막4:13-20,눅8:11-15] 씨뿌리는 농부에 대한 비유의 뜻을 들으라. 19) 씨가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악한 자가 와서 그의 마음속에 있는 씨를 빼앗아 간다. 20) 흙이 얕은 돌밭은 가르침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21) 그의 생활에 깊이가 없어서 그 씨가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은 어려움이 닥치거나 박해를 받게 되면 곧 열정은 식어지고 믿음이 흔들려 넘어지고 만다. 22) 또 가시덤불에 덮인 땅은 가르침을 듣기는 하지만 생활에 대한 걱정과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막아버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은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깨달아 삼십 배, 육십 배, 또는 백 배로 열매를 맺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밝히시고 비유의 참뜻을 설명하십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10-12) 비유를 들은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비유가 그들의 영적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묻자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여기서 비밀은 인간의 지식으로 도저히 알 수 없고 오직 계시로만 알 수 있는 영적 진리를 말합니다(고전 1:18-31). 비유의 특징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감추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있는 자”는 믿음이 있는 자를 말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진리를 깨닫는 기쁨이 날로 더해지지만, 믿음이 없는 자는 있던 지식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예언의 성취(13-17)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셔서 듣고도 듣지 못하고, 기적을 보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적 무감각을 책망하십니다(사 6:9-10).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왕국이 멸망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지만 백성은 듣고도 듣지 않은 것처럼, 보고도 보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길을 고집하다 멸망하였습니다. 이처럼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천국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기적을 행하셨지만 눈과 귀를 스스로 막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거룩한 씨를 남겨주셨듯이 예수님 당시에도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는 복 있는 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비유 설명(18-23) 첫째, 길 가에 떨어진 씨를 새가 와서 쪼아 먹는 것처럼 말씀을 듣고도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가기 전에 사탄이 지워버리기 때문입니다. 둘째, 돌밭에 떨어진 씨가 빨리 자라지만 금세 말라버리는 것처럼 어떤 이들은 말씀에 즉흥적으로 반응하지만 환난과 박해를 견디지 못하여 곧 시들해집니다. 즉흥적인 이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깊은 깨달음입니다. 셋째,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씨가 질식하는 것처럼 어떤 이들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막혀 성장을 멈춥니다. 넷째, 좋은 땅에 떨어진 씨처럼 참된 신자는 말씀을 받고 성장하며 열매를 맺습니다. 같은 농부가 같은 씨앗을 뿌렸지만 밭에 따라 결실이 달라집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또한 복음사역자들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을지라도 성실하게 전하였다면, 결코 실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성경을 읽다가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깨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를 드리거나 깨닫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한 적이 있습니까?
천하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명도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요, 다시 살아남의 단계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노화는 천천히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성경이 알려주는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믿음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죽음너머에는 이세상보다 더 좋은 세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비유의 설명
마 13:10-23 / 이상호 목사(세광교회)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의 사역은 크게 3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천국복음을 선포하신 것이고, 둘째는 회당에서 많은 경건할 유대인들에게 구약을 신약적으로 이해하도록 가르치신 것이며, 셋째는 기적을 행하시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주이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가운데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천국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 것과 천국의 복음에 대하여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가를 배우면서 은혜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계시는 동안 한 집에 거하셨는데 어느날 바닷가에 나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께 베들레헴에 태어나시고 요셉의 고향 나사렛에서 자라셨지만 공생애 기간을 보내시며 사역하셨던 곳은 가버나움이기 때문에 가버나움을 제2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버나움과 벳세다 고라신, 갈릴리 바다의 북쪽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지금도 그 지역에는 산상교훈을 선포하셨던 산상팔복교회와 오병이어 기적교회와 베드로에게 어린양을 맡겼던 교회 등 여러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들의 기념교회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닷가에 나오셨을 때 큰 무리가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랍비들이나 유대의 선생들과 달라 능력있고 권세있는 영적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무리들로 인하여 예수께서는 배를 타시고 뭍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유는 마치 건물의 창과 같아서 말씀을 밝게 비추어 줌으로 이해가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엔 7가지의 천국비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첫째 비유가 오늘 본문의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짐으로 시작이 되고 이 말씀이 뿌리가 내리고 싹이 나서 자라고 열매를 맺으므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배를 타시고 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멀리 언덕 위나 넓은 평지에서 농부들이 농사하는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그 모습을 예로 천국 비밀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데 씨를 뿌릴 때에 어떤 씨앗은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지고,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더러는 옥토에 떨어진 것과 같이, 하나님의 복음이 이 세상에 떨어질 때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새들이 먹어버리고, 돌밭에 뿌려진 씨앗은 싹이 나긴 하지만 흙이 얇아 뿌리를 내리지 못하므로 죽어 버리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자라긴 하지만 가시덩굴이 기운을 막아 죽게 되고 옥토에 떨어진 씨앗만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몰려든 사람들의 마음밭을 네 가지로 정의하신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듣지만 길가와 같이 말씀이 뿌리조차 내리지 못하고, 또는 말씀을 즉흥적으로 감정적으로는 받지만 조그마한 환란이나 핍박이 오면 그만 넘어지고, 또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잘 자라는 것 같다가 물질적 유혹이나 이 세상의 염려 때문에 자라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교회에도 이와 같은 마음 밭을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옥토와 같이 되어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성령 하나님의 감동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1. 천국(天國, 하늘나라)은 씨뿌리는 밭에 있다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1) 곡식 씨는 하나님의 말씀 곧 천국복음입니다.
나라마다 좋은 씨를 개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당신이 만일 정말 좋은 씨를 만났다면 당연히 그만한 값을 지불하고 그 씨를 살 것입니다. 그 씨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개발하신 최상의 씨입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마 13:19)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
그 씨 안에는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핵심이 들어가 있습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이 씨앗 실제로 천국이 탄생된 날에 사람들의 마음 밭에 뿌려졌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8-41)
이 씨앗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문제는 씨가 좋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밭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2) 밭에는 네 종류가 있습니다.
아무리 말씀이 좋아도 밭이 좋지 않으면 풍년이 될 수 없습니다.
① 길가 밭 :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아무리 진리의 복음, 천국복음을 들어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더 사랑하여 항상 마음에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② 돌 밭 : 이런 사람은 쉽게 듣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나 인내심이나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양재기와 같은 마음의 사람이라 쉽게 뜨거워지고 이내 식어버립니다. 진리를 받으면 반드시 햇볕이 쪼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핍박이 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구원이라는 것도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③ 가시 떨기밭 : 가시 떨기는 재리 곧 부귀의 명예의 유혹이나 탐심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진실하게 시작하다가 끝내 여러 가지 부끄러움으로 마칩니까? 특히 오늘날 개신교 지도자들의 끝을 보세요. 이는 그들 안에 자라나는 가시떨기를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④ 옥토 밭 : 오순절 날부터 뿌려진 진리를 순종하는 자는 그 영혼을 깨끗이 함을 받고 말씀으로 다시 태어남을 받게 됩니다. 진실한 사람은 회개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세례를 순종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2-25)
말씀이 씨앗이지만 또 다른 비유에서는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이 천국의 씨앗입니다.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마 13:38)
그러므로 말씀을 받는 신자가 있다면 그 씨를 전도자는 묻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씨가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그를 그리스도와 함께 심어주는 것입니다. 심는 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생명을 틔우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야고보가 증거한 씨앗과 동일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순종없는 믿음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2. 천국 비밀은 많은 이들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12절).
천국에 대한 진리는 어떤 이들에게는 감추어진 비밀이었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 13:11)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천국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귀나 천국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
천국에 대해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 중에 구약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아무리 진실한 종이었을지라도 이 비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 13:16,17)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13:35)
예수님은 당시 제자들 중에서도 죽기 전에 천국을 볼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8)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천국의 비밀에 대해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6-9)
3. 백배의 결실을 얻으려면
본문은 자연의 진리를 통하여 백 배의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 배의 축복이 작은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백 배의 축복을 받읍시다.
1) 심어야 백 배로 받습니다.
본문에도 심었더니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거뒀다고 하셨습니다. 심지 않았더라면 아무 것도 거둘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도 심어야 거둔다는 진리입니다. 건강을 거두려면 건강을 심고 물질을 거두려면 물질을 심어야 거둡니다. 그래서 성경은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는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2) 밭이 좋아야 백 배로 받습니다.
본문에도 네 가지 밭을 말씀하면서 좋은 옥토가 되어야 백 배로 결실한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백 배로 받으려면 마음의 밭이 좋아야 됩니다. 아무리 좋은 씨를 심어 놓았다 할지라도 길가나 돌밭에 씨앗을 심는다면 씨앗은 자랄 수 없습니다. 요즈음은 마귀들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짓밟아 놓았던지 길가와 같습니다. 그러니 백 배의 축복은커녕 씨앗까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백 배로 받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심고 가꾸었다 할지라도 자연의 혜택이 없이는 안 되는 것처럼 백 배의 축복은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의 노력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조건이 갖추어 있는 자에게 백배로 축복해 주십니다.
4. 맺는 말
성도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넓혀야 합니다.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눅 19:16-19)
많이 거두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장막 안에 사는 동안 얼마나 하나님께 큰 헌신과 충성을 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좋은 밭이 되고 말씀을 받아 결실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비밀을 허락받은 자
마 13:10-17 / 박성복 목사(동인교회)
마태복음 13장에는 중요한 일곱 가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참 중요한 내용이니까 잘 들어주십시오. 은혜 시대 때는 십자가 피의 구속의 은총에 감사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원의 날이 올 때는 말씀이 주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눈으로 먹고 귀로 먹고 입과 마음으로 먹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1절과 2절에 보면 ‘큰 무리들이 모였다’라고 성경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무리’라고 하는 단어가 서너 가지가 있는데, 오늘 여기에 이 ‘무리’는 ‘오클로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신약 성경에 ‘오클로스’라고 하는 단어가 백칠십 다섯 번이나 들어 있습니다. 이 무리는 어떤 무리냐면 세상에서 전혀 빽도 없고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힘도 없는 무리를 ‘오클로스’라고 그럽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회당에 모인 여러 사람들을 말할 때에 그 무리들은 ‘에모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거기에는 세상의 힘이 있는 무리들도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프레도스’라고 하는 무리가 나오고, 또 빌라도 앞에 모인 여러 무리들이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간에 오늘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무리는 전혀 세상에서 비천한 무리인 ‘오클로스’라는 무리입니다. 이 ‘오클로스’라고 하는 단어를 예수님이 가장 많이 사용하셨고, 또 실제로 예수님께 오는 대부분의 무리들이 ‘오클로스’라고 하는 무리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왜 따라다녔느냐면 빵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어렵기 때문에 따라 다녔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먹는 문제 앞엔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 같습니다.
그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왔을 때에 너무나 가난하고 너무나 비천하고 없으니까 예수님께 와서 빵 얻어먹어 본 재미를 본 사람은 예수님을 계속 찾아다닙니다. 또 질병 때문에 병 낫기 위해서 예수님께 온 사람들도 예수님을 쫓아다닙니다. 그러고 어떤 무리는 예수님을 책 잡아서 모함하고 죽이려고 따라다니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제자들 같이 섞여 있는 몇몇 무리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때문에 따라 다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딱 말씀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귀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세상 하늘땅 밑에 기형으로 태어나지 아니한 사람치고는 귀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 9절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는데 원문에 보면 ‘귀 가진 자는 청취를 해라’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귀 가졌지요? 그래서 계시록 2장 계시록 3장 보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귀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29장 4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도 먹고, 반석에서 나는 생수도 마시고 지도자 모세의 인도 따라 고향 땅을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을 주지 않아서 광야에서 쓰러졌다고 했습니다. 만나를 눈으로 보고 주워 먹고 모세가 하는 소리도 듣고 다 그랬는데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없었다는 것은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안의 눈이 없어서 그 영안의 세계가 열리지 않았으며, 영안의 귀가 열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히도록 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20세 이상이 전부 다 광야에서 쓰러집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이 잘 들으시고 이 말씀을 마음에 담아가셔서 한주간을 사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우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답변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국의 비밀이 허락된 자가 있고 허락되지 아니한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몇 종류입니까? 말씀을 듣는 자 가운데 두 종류라는 말입니다. 이 ‘천국의 비밀’을 누가복음 8장 10절에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 그랬습니다.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나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허락지 아니한 자가 있고 허락한 자가 있다고 했다면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천국의 비밀을 허락받은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 ‘천국의 비밀을 허락하다’ 이랬는데 원어를 찾아보니까 ‘천국의 비밀을 위탁했다. 천국의 비밀을 맡겼다’ 라는 단어더라고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엄청난 그 나라의 비밀을 위탁받은 자, 맡김을 받은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헬라어에 ‘비밀’이란 단어의 해석을 찾아보니까, “미스테리온”이라는 단어인데 “은밀히 감추어 놓은 것, 닫아 놓은 것, 안보이도록 숨긴 것, 가두어 놓은 것”이란 뜻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의 양식이 돼야 되고, 세계 도처에서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기 바랍니다. 제가 대만에서 예배드리는 화면을 보니까 금 형제님도 오늘 참석해 주셨네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가 이따가 예배 마치고 인사한번 해야 되겠네요.
여러분, 남편이 신앙이 좀 약하다 해도 아내가 독실하면 함께 믿음의 힘을 얻고 나갈수 있습니다, 여러분, 돈 버는 힘은 누가 셉니까?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옛날에는 남자인데 요사이는 돈 버는 힘이 여자가 더 세요. 그러니까 남자를 쉽게 쫓아냅니다, 벌을 치다보면 숫벌이 필요 없으면 다 쫓아 내버려요. 이처럼 요사이 돈을 못 버는 남자들이 외국에 함께 나갔다가 버리고 올까봐 쩔쩔 매구요, 둘째는 이사 갈 때에 남편을 버리고 갈까봐 쩔쩔 맨데요. 그래서 이삿짐 다 실어놓으면 조수석에 남편이 강아지를 안고 딱 앉아서 아무리 끄집어내도 안 내러 온답니다. 그래서 그걸 보면 마누라가 돈을 많이 벌어도 안 되겠어요. 어떤 분이 이사 가면서 아무래도 낌새가 자기를 버리고 갈 것 같아서 냉장고 속에 딱 들어가 있었는데 이삿짐을 싣고 가다가 고물상 앞에 가서 냉장고를 던지고 가버려서 결국 또 떨어졌다고 그래요. 이게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소문을 들었어요.
어쨌든 간에 여자가 신앙이 좋은 신앙이라야 가정이 삽니다. 이번 주일학교 여름 성경학교에서 제가 교장이니까 아이들에서 개교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의 어머니 한나와 사무엘에 대해 첫 설교를 했습니다. 훌륭한 어머니 아래서 훌륭한 사무엘이 난 걸 말씀 드렸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가르쳐주었다고 했는데 이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감추어 놨다, 덮어 놨다, 안 보이게 해놨다, 닫아 놓았다, 숨겨놓았다”라는 뜻인데 신약성경에 이 비밀이라는 단어가 28번이나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21번이나 사용했어요.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4번 있고요,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일곱별의 비밀은 나오죠? 일곱별의 비밀이 뭡니까? 일곱별은 일곱 교회 사자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7장에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17장 5절과 7절에 나오는데 계시록에 4번 들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비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한번입니다. 왜 한번이냐면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도 있고 누가복음에도 있고, 마가복음에도 있는데 같은 내용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에 들어있는 내용의 뜻이 한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 보십시오. 천국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자라야 이 비밀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천국의 대한 비밀을 위탁 받은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제일 많이 사용한 비밀은 십자가의 비밀이에요. 그 다음에 부활의 비밀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여러 비밀이 나오지만 사도 바울의 주된 비밀은 십자가 부활의 비밀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 봐 보십시오. 왜 천국의 비밀을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겐 모르도록 해놨다고 했을까요? 이는 알 사람만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귀하고 중요한 비밀은 자기 사람에게 알려줍니다. 다니엘서 2장 18절에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비밀을 다니엘에게 알려줍니다. 여러분, 다니엘은 포로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이에요. 이는 정말로 내가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그 시대의 종이 되면 그 분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알려 준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음란하고 그 악한 시대에 하나님께로부터 물 심판하는 비밀을 받았습니다. 자기 사람에게 알려준 겁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 당시에 “하나님의 사람에게 은밀한 것을 알려줬다‘고 하면서 다니엘서 2장 19절에 보면 은밀한 것이 나오는데 은밀한게 뭡니까? 비밀이죠? 28절에 보면 ”은밀한 것을 나타내어 주신 것은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30절도 은밀한 비밀을 다니엘에게 나타내었다고 했는데 은밀한 비밀은 미래에 될 일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다니엘 2장에 금신상이 나오는데 그것이 뭡니까? 금 신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 다시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으로 된 그 신상을 보여주었는데 공중의 뜬 돌이 그 신상을 치니 그 신상이 무너져서 온데 간 데 없어지고 그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다라고 그랬죠? 자, 그래서 다니엘이 44절에 보면 ”열 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것이 뭐냐면 미, 영, 불, 소등 각국 나라들이 열 왕이에요. 열 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그 나라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하고,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가지고 않고 도리어 그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뭐냐면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 때에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나라가 지금 말하는 천국입니다. 예수께서 말하는 천국은 이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비밀이 허락된 자와 허락되지 아니한 자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비밀을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라고 했는데 그 ‘너희’가 누구입니까? 그 당시에 제자들인데 두고 보세요. 제자들이 아닙니다. 제가 조금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정리를 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집중적으로 들어줘야 됩니다. 왜냐면 내 마음이 찬송을 부르다가도 집에 갔다 올 때가 있습니다. 몇 절 부른지 모릅니다. 찬송을 부르다가 엉뚱한 데 갔다 옵니다. ‘아이고, 내가 연탄불을 끄고 왔나? 안 끄고 왔나? 내가 문을 잠궜나 안 잠궜나?’ 하는 그럴 때 있어요? 없어요? 그게 우리에게는 깜빡 깜빡 깜빡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비밀을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이렇게 말해 주신 걸까요? 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 허락됐다” 고 했는데 그 당시에 주님이 “너희”라고 했는데 과연 너희가 너희인가 봐보세요. 다음에 나옵니다. 그리고 11절 하반 절에 보면 이 비밀이 허락되지 아니한 자가 있습니다. 그 당시 허락되지 아니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바깥에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율법사들이고 또 주님의 말씀을 들어도 육의 문제만 생각하고, 육의 생각만 가지고 온 사람들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여러분,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면 그 나라의 비밀을 움켜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것은 뭐라고 말했느냐면 12절에 보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무룻’은 ‘누구나’라는 말입니다. 그럼 뭐가 있기에 넉넉하다는 말입니까? 뭐가 있기에 넉넉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없는 자는 뭐가 없기에 빼앗긴다고 합니까? 여러분, 우편강도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오늘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고, 삭개오에게도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했다”고 하셨는데,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 받아서 넉넉한 것은 뭐며, 빼앗기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말입니다. 있는 자는 더 넉넉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오늘 있는 자는 돈이 있는 거 아닙니다. 원뜻은 “천국의 비밀을 움켜쥐고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움켜쥐고 있는 자는 더 넉넉하게 되겠다고 했는데 이 말은 ‘차고 넘치게 해주겠다’ 이 말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자는 점점점 차고 넘치도록 가득 차게, 충만하게 해주겠다는 것이고 이 말씀이 없는 자는 아예 도둑맞게 해서 빼앗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느 시대가 들어옵니까? 천국의 비밀을 움켜쥔 자의 그 사람 시대가 온다는 말입니다. 이해됩니까? 그러면 이 비밀을 가진 자는 점점 많아진다? 줄어든다? 점점 많아지고 완벽하게 채워집니다. 이것이 더 많아지는 역사며 넘치는 역사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이 진리를 배격하는 자는 처참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이제 결론은 17절에서 마칠 텐데 잘 들어주셔야 ‘아, 그렇군요. 정말로 그렇습니다.’ 라고 하는 도장을 꽝 찍게 됩니다. 14절, 15절 보면 이사야 6장 9절에서 10절을 인용했습니다. 여러분, 이리 좀 보세요. 이사야 5장 보면 좋은 포도, 최상품 포도를 심었는데 왜 이렇게 들포도가 되었느냐 라고 하면서 그 들 포도를 싹 갈아 엎어버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6장에 갈아서 엎기 전에 “저 개포도가 된 저기에 누가 가야 되겠나?” 라고 할 때에, 이사야가 “나를 보내소서. 내가 가겠습니다”라고 할 때에 이사야의 입술을 불로 지져버렸다고 했습니다. 왜냐면 더러운 입가지고는 안 되기에 이 더러운 입을 태우고 가서 전하되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것이 언제까지 그렇게 됩니까?라고 하니까 “성읍들이 다 무너지고, 심판 때까지 안 들을 사람은 죽어도 안 들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 예수님이 그 구절을 인용했어요. 자, “눈은 보고 귀는 들어도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고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비밀이라는 말이 본장과 마가복음 4장과 누가복음 8장에 있는데 내용이 똑같아요. 그런데 마가는 4장 11절에 “그들이 깨닫지 못하여 죄 사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깨닫는 다는 것은 축복받기 전에 기초입니다. 외인들에게는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람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 구절을 마가는 4장 11절에 넣어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라고 그랬지요?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은 마음이 너무 살쪄서 둔해졌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말씀하실 때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 그랬지요? 그 마음 자체가 ‘성령’으로 성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는 말이고, “천국이 저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는 마음이 너무 살쪄서 비대해 가지고 둔해졌다는 것이니 귀가 듣기에 둔해졌다는 말은 귀가 너무 무거워 졌고 어지러워져서 이 말씀을 못 듣는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눈은 감기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안 들어 지는 사람은 자기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도 내가 아니에요. 눈을 열어주는 분이 계시고, 귀를 열어주는 분이 계시고, 마음을 열어주는 분이 계셔서 깨닫게 되는 것인데 ‘귀도 막아라, 눈도 막아라, 마음도 열지 못하게 해라’고 했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그분 허락 없이는 못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깨달아졌다고 하면 내가 아니요, 내 속에 성령의 역사라고 믿어야 됩니다.
그래서 ‘눈이 감기게 하라’고 했는데 이 감긴다는 말은 ‘닫아버려라’는 말입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다고 해요. 고대에 어떤 사람이 재판 받기를 그가 잘 못보고 입을 함부로 놀려서 치명타를 입히게 되는 일이 있다고 생각되면 눈을 완전히 가려서 못 보도록 하는 실형이 있었답니다. 그는 눈을 안 뺀 것만 해도 다행이지요? 밀랍으로 딱 붙여가지고 일 년이나 6개월이나 그 형량에 따라서 딱 눈을 봉해서 눈을 못 뜨도록 하였다가 만약에 일 년 만에 눈 뜨게 되서 바로 햇빛을 보면 눈 시력이 가버린답니다.
그래서 여러분, 광산이나 어디에 오래 묻혀 있다가 끄집어 내서는 바로 눈부터 가리지요? 그것의 원인이 그렇답니다. 그런데 여기에 눈과 귀를 감기게 해서 깨닫고 돌이키지 못하게 했다고 했는데 돌이킨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말이기에 그가 나으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얼간이 같은 사람이 이런다고 해요. ‘아, 내가 못 깨닫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구나, 내 잘못이 하나도 없구나’라고 하면서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 지겠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정말로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자, 그런데 16절, 17절 잘 보십시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했는데, 뭘 보고 뭘 듣습니까? 지금. 제자들을 앞에 놓고, 너희 눈은 보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 했는데, 뭘 보고 뭘 듣기 때문에 복이 있다고 하는 겁니까? 이것은 천국의 비밀을 내가 너희에게 줬기 때문에 “너희가 제일 복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제자들인 것 같은데 아닙니다. 17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뭐라 그랬습니까? 여기 바로 앞에 헬라어로에 ‘호티’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이유는”이란 단어입니다. 그럼 “그 이유는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이 너희 보는 것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보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듣는 것들이 뭡니까? 이리 좀 보세요.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앞에 놓고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 그랬는데 17절에 와서는 “많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너희들이 보는 것을 보고자해도 못보고 죽었다”는 말이에요. 이해됩니까? 이 문제가 어디로 넘어 가야되느냐면 히브리서 11장 13절로 14절로 가야하는데 거기엔 옛날 믿음의 선진들이 “이 약속을 받지 못하고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 약속이 뭡니까? 천국에 비밀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받지 못하였기에 그들은 본향을 그리워하며 환영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 “너희는 봄으로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제자들에게 그랬는데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이 약속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사모했으나 받지 못하고 다 죽었고 사도들도 역시 이 약속을 받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맞죠? 그러니까 오늘 천국의 비밀의 말씀도 주님께서 그 당시의 사도들을 놓고 말한 것 같겠지만 아닙니다.
본문 17절에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했는데 히브리서 11장을 보니까 이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다 그 나라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살아서 들어가는 약속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으니까, 이제 오늘 제가 그 말씀을 이어서 설교를 한다면 선지자들과 의인과 사도들도 역시 약속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성경본문에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사도들은 받은 것 같이 돼있어요. 그러나 이제 우리가 보니까 사도들 역시 이 약속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을 가지고 있는 자가 가장 복 있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이 천국의 비밀을 가진 너희가 복이 있다는 말은 그 당시의 사도들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약속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죠? 17절에 그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11절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됐다” 그랬는데 여기에 ‘안다’라고 하는 말은 ‘깨닫고 가지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허락받은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허락받은 비밀인데 마지막의 이 비밀을 가져 보려고 그렇게도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다 기다리고 사모했으나 다 놓쳤다는 말이고 이제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와 있다는 이 말입니다. 그럼 이 비밀의 말씀은 우리에게 약속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는데 이것이 요한계시록에도 ”성령의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어야 된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비밀을 허락받은 자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사도와 선지자들이 약속을 못 받고 죽었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았다는 소리는 아니죠? 그들은 구원을 받았지만은 무슨 약속을 못 받았느냐면 천국의 비밀의 성취권을 가지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말씀은 오늘날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말씀인줄로 믿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이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여 그 천국에 들어가는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가시밭
마 13:22 / 장경동 목사
씨 뿌리는 비유에 뿌릴 때와 거둘 때를 보세요. 뿌릴 때는 조그마한데 거둘 때는 엄청나죠.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된 우리는 보잘 것이 없죠.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것은 아닙니다. 씨앗은 같은데 어느 밭에 떨어졌느냐에 따라 두고 보기에도 아까울 수도 있지만 안타까울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그런 인생은 생각도 마음도 말도 행동도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인생으로 살아가실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믿음장이라면 마태복음 13장은 천국 비유장입니다. 7가지 비유가 나오고 있는데 마13장3-9절은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오고 18-23절은 씨 뿌리는 비유의 해설이 나옵니다. 24-30절은 가라지 비유인데 그 해설은 36-43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4가지 밭이 나옵니다. 옥토밭, 가시밭, 자갈밭, 길가, 즉 씨는 같은데 밭이 다르다는 것이고 가라지 비유는 씨앗의 비유입니다. 즉 밭은 같은데 씨가 다르다는 거예요.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세 악한 자, 원수 이것은 다 마귀와 그의 종들을 의미합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하나님 말씀의 씨앗을 주워 먹고 환난, 핍박을 주어서 옥토가 열매 맺지 못하게 하고 세상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주고 가라지를 알곡 속에 부지런히 뿌리므로 알곡이 자라는데 방해를 하고 다닙니다. 즉 밭은 옥토가 못되게 하고 씨는 알곡이 못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가시밭”에 대해서 집중조명을 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마13:7 “더러는 가시떨기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13:22 “가시떨기에 뿌리 웠 다는 것은 말씀은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밭의 종류를 보면 길가, 자갈밭, 가시밭, 옥토가 있듯이 세상 사람들의 종류를 봐도 불신자가 있는가 하면 믿다가 실족한 사람이 있고 교회는 다니는데 아직 제자 되지 못한 교인이 있는가 하면 은혜 받고 제자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 교인이 바로 밭에 비유로 보면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도할 때 “와 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데려오면 인도고, 인도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야 전도한 것입니다. 인도는 교인 된 것이며, 전도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교인은 밭으로 비유하자면 가시밭이요. 제자는 옥토 밭입니다. “와 보라”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만날 때 옥토 곧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흔하면서 가장 위험한 것이 가시밭입니다. 아직 제자 되지 못한 이 교인들은 잘못 시험 들면 세상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교인과 제자를 구분하지 못하고 가시밭과 옥토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장의 가치로만 구분하면 안 됩니다.
오늘 성경 속에 있는 가시밭 같은 인물들을 찾아보면서 그들의 삶속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구약 속에 사울 왕을 들 수 있습니다.
삼상8장 이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정 정치를 하나님은 원했는데 백성들이 싫어했습니다. 은혜가 있으면 하나님이 좋고 은혜가 없으면 하나님이 싫어지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울 왕을 세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처음에는 잘했습니다. 그러나 아말렉을 멸하라 했을 때 대충하고는 순종했다 합니다. 자기 식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니까, 명분은 제사인데 내면은 사욕입니다. 사람이 망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사욕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사욕에 사로잡히면 힘이 빠져나갑니다. 힘이 빠지니까 블레셋이 쳐들어 왔습니다. 사무엘이 말 했습니다. “왕이시여 제사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모르시나이까?” 사욕을 다 버리고 싹 돌아서면 되는데 인간이 어리석어 돌아서질 못합니다. 골리앗이 나타나서 “여호와가 누구냐?”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습니다. 이때 성령 받은 다윗이 대적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했을 때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때 “그래, 나는 천 천이고 다윗은 만 만이다” 라고 용납하는 것은 옥토입니다. 가시밭은 용납이 안 됩니다. 평생 다윗 죽이려는데 일생을 소비하게 됩니다.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끝까지 놓지 않고 그의 일생을 파멸로 끝내고 만 것입니다.
2. 신약 속에 가룟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머리도 좋아 계산이 빨라 예수님의 제자로 3년 동안 재무를 봅니다. 모처럼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 마리아가 옥합을 깰 때입니다. 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 이러라” 유다는 도둑 이었습니다. 돈 주머니를 맡아 늘 그것을 꺼내 쓰고 있었습니다. 명분은 구제인데 내용은 사욕입니다. 결국 자살로 끝이 나고 맙니다. 사욕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사욕을 챙긴다면 그것이 바로 가시 밭 같은 마음입니다. 열매가 없어서 가시밭입니다. 교회 안에 가시 밭 같은 마음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갈아엎고 물대주지 않으면 옥토가 1·년 만에 가시밭이 되고 자갈밭이 되는 것처럼, 오늘도 회개하고 말씀으로 은혜 받고 하나님의 은혜 단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나도 모르는 순간 가시밭으로 바뀌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그밖에 가시밭
막10:17 부자관원. 행5:1이하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여호수아7장1절 이하의 아간. 딤후4:10-11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데마, 그레스게, 디도는 가시밭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것이 바로 옥토입니다.
가시밭은 재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십일조를 떼어먹는 마음 밭, 그것이 전형적인 가시밭입니다. 내 마음속에 은혜의 단비가 내리지 않고 말씀의 거름이 오지 않고 회개의 참예하는 마음이 오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시밭으로, 자갈밭으로, 길가 같은 밭으로 그래서 말씀이 아무리 떨어져도 마귀가 와서 다 주워버립니다. 그것에 무슨 열매가 있겠습니까? 가시밭 같은 마음이 오늘 은혜 받고 귀경해서 옥토로 돌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의 경제
마 13:18-23 / 이정선 목사
예수께서는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씨가 길가에 떨어지자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누구든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마음이 길가에 비유되고 있는데, 길가는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녀서 단단해진 땅입니다. 그래서 씨앗이 떨어졌어도 쉽게 싹이 틀 수 없는 땅입니다. 천국 복음을 듣고도 응답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복음에 대해서 응답하지 않는 유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아예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씨앗이 땅 속으로 뿌리를 내려야 싹이 트는데, 복음이 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틈이 전혀 없어서 싹을 틔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잘못된 가치관이나 신념에 사로잡혀 있어서 복음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영혼과 사후세계에 대해서 냉소적인 사람에게 천국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나 신앙을 가진 사람도 그럴 가능성이 많지요. 또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복음에 적대적인 사람도 길가와 같은 마음입니다.
복음을 듣고도 여러 가지 이유로 망설이거나 미루는 사람도 길가의 마음에 포함됩니다.
복음에 대해서 특별히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도, 왠지 손해 보는 느낌 때문에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장 교회에 다니면 담배부터 끊어야 할 것 같고, 양심에 거리끼는 일들도 못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가족의 반대 때문에, 예를 들면 아버지가 반대하셔서 나중에 믿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런데 모든 것은 변합니다. 강산도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변합니다. 아무리 단단한 땅이라도 비를 맞고 바람을 맞으면서 부드러워질 수 있습니다. 도저히 예수를 안 믿을 것 같던 사람의 마음도 변하고, 예수 믿을 수 없는 이유를 아흔아홉 가지나 댈 수 있던 상황도 변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 땅이 부드러워지면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울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때까지 씨앗이 그 자리에 남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마음에 뿌려진 복음을 빼앗아갑니다. 사탄은 자기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이 복음에 노출되는 것에 대하여 결코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복음의 씨앗이 그대로 남아 있기만 했더라면, 언젠가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서 천국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터인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이 사람은 희망이 없으므로 우리가 포기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런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그 마음의 밭이 딱딱해서 복음을 거부하고 새들이 와서 먹어버린다 하더라도, 또 그 밭에 씨앗을 뿌려야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상황이 변하거나 마음이 바뀌어서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복음의 씨앗이 없어서 싹을 틔우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순간에 싹을 틔울 씨앗이 그 마음 밭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우리는 반복해서 그 마음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거나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 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 밭이 부드러워졌을 때 아직 그 땅에 씨앗이 남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복해서 씨를 뿌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땅이 부드러워졌다는 싸인이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씨를 뿌리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겠지요.
두 번째로 언급된 땅은 돌밭입니다.
여기서 돌밭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돌이 많은 땅이 아니라, 흙 밑에 바위가 있는 땅입니다. 씨앗이 떨어졌을 때 금방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는데, 뜨거운 햇볕에 그만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흙이 얕아서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경우를 말씀을 인한 환난이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식물이 자라는 데 있어서 햇볕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 식물이 햇볕 때문에 죽어버렸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은 아이러니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인하여 당하는 환난이나 핍박은 우리의 신앙 성장을 위하여 꼭 필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성장하고 단련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롬 5:3-4)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생명은 박해를 이기는 데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처음 시작부터 박해와 함께 성장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 그리스도인들이 뿔뿔이 도망을 쳐야 했지만, 그렇게 도망간 사람들에 의해서 사방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기독교에 의해 정복을 당했습니다. 사자에 찢기고 화형을 당하면서도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기독교는 박해 받던 종교에서 박해하는 종교로 변했고, 권력을 갖게 된 기독교는 부패하고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핍박이 없어지면서 기독교는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권세가 정점에 이르렀던 중세 시대의 기독교는 미신에 가까운 수준으로 타락했습니다. 반면에 수십 년 동안 박해를 견뎌낸 공산국가의 지하교회들을 보면,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순수하고 뜨거운지, 우리가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핍박은 식물에게 햇볕처럼 생명과 같은 것인데, 여기 돌밭에 난 싹은 그 햇볕에 그만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뿌리라는 것은 정말 무시할 수 없는 큰 자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의 감독을 뽑는 기준으로 새로 입교한 사람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딤전 3:6).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감독으로 추천할 정도라면, 그 신앙의 열정이나 리더십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뿌리가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잎은 짧은 기간에 무성해질 수 있지만, 뿌리는 하루 아침에 깊어질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박해의 주동자였던 사울이 회심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즉시로 회당에 나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해서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만큼 뛰어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사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고향으로 내려가 10여 년 동안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야 그는 신약성경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큰 일을 감당하거나 큰 환난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믿음의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 다닌 지 오래 됐다고 다 뿌리가 깊은 것은 아니지요. 충분한 영양 공급이 있어야 튼튼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올바로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경건의 연습에 힘쓰는 삶이 반복되고 지속될 때, 우리 믿음의 뿌리는 깊어지고, 그래서 환난도 이겨내고 하나님의 손에 크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결실하지 못하는 곳은 가시떨기입니다.
여기는 땅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흙은 싹이 틀 만큼 부드럽고, 뿌리도 깊게 내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싹이 자랄 수 없도록 가시떨기가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경우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 정신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거나 철저하게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 세상과 결별하고 사는 수도 있고, 프란체스코처럼 가난으로 벗을 삼고 모든 물질적인 욕망을 끊었던 성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래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독교 정신과 신앙은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고 증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시장경제의 법칙 아래 이윤을 추구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 경제활동까지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부동산 투기 같은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사실 자본주의 경제 내에서도 공정한 게임이 아닐 뿐 아니라, 내가 부도덕하게 이익을 챙기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큰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내가 더 많이 갖겠다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좋은 집에 살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보고, 더 편하고 안락하게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손해 보지 않으려고 양심에 거리끼는 일도 하게 되고, 돈 되는 일이라면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는 일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풍족하게 살아도 한평생이고, 좀 없이 불편하게 살아도 한평생입니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천국 복음이 막혀서 결실을 못 하게 되면, 잠깐 사는 세상 다 살고 난 후에 어떻게 될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빠져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이 세상에 초점을 맞추고 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은 세상의 것보다 천국의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골 3: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재물에 대하여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는 잠언 말씀처럼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잠 30:8)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세상의 염려나 재리의 유혹이 무슨 힘을 쓸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여기에 천국의 비밀이 드러납니다. 복음의 경제성은 25%에 불과했습니다. 네 군데의 땅에 씨앗이 떨어져 겨우 한 곳에서만 결실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좋은 땅에서의 결실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입니다. 백 배면 10,000% 아닙니까? 75%의 손실을 보충하고도 넘치도록 남습니다. 이것은 산술적으로 계산하자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일은 이 세상의 일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일은 세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세상의 계산으로 가늠할 수 없습니다. 차원이 다르지요.
우리가 살면서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딱딱한 길가의 땅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도 않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또 돌밭처럼 살 때도 있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해 흔들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가시떨기 속에 있는 것처럼 온갖 염려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생각되고,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추구하느라 정신이 팔려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씨앗이 우리에게 떨어졌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우리가 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지요. 세상에 옥토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다 흠도 있고 실수도 하고 욕심 많은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떨어진 복음의 씨앗을 싹 틔우고 열매 맺어야지요. 그러자면 가시떨기 잘라서 걷어내고, 돌밭에 돌도 캐내고, 딱딱한 땅 쟁기로 갈아엎든지 물을 대든지 해서 부드럽게 만들어야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밭으로 보신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일 것 같습니까? 좋은 땅에 떨어진 복음의 씨앗이 풍성하게 결실해서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다운 광경이 바로 여러분의 날마다 살아가는 모습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마 13:18-23 / 정필도 목사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는 한밤중에 은밀히 예수님을 찾아와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당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중의 한 사람으로 유대인의 관원이며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매우 점잖고 성품이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생전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이 말씀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에게 하신 이 말씀이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시는 말씀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한번은 미국에 갔을 때 한 미국 여인을 만났습니다. 저는 전도하기 위해 그 여인에게 예수님을 믿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의외로 “Born again Christian”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좬거듭난 신자좭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했던 이 여자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언제 어디서나 “나는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입니다.”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성령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성도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라야 참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몇월 며칠에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저도 거듭난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초등학교 6학년 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를 통해 그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증거는?
1. 믿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란 내가 죽고 사는 것, 흥하고 망하는 것, 이기고 지는 것,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고 믿고 항상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잠시 죄 가운데 살다가도 고난과 환난이 오고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또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할 뿐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믿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며 기쁨으로 헌금을 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루도 살 수 없음을 아는 사람이 거듭난 신자입니다. 이 시간까지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건강하게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 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 은혜입니다. 일반 은혜는 예수님을 믿거나 안 믿거나 의인이나 악인이나 구별 없이 모든 인간들과 모든 생물에게 베푸시는 일반적인 은혜입니다. 햇빛과 물과 공기 등등이 이에 속합니다. 그러나 특별 은혜는 아무에게나 주시는 은혜가 아닙니다. 창세 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일반 은혜가 아닌 특별 은혜란?
1.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2.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게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3.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4.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5.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되는 은혜입니다.
요한복음 15:16을 보면 좬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좭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께서 택해주신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저와 여러분을 택해주신 이유는 우리 자신들이 과실을 맺기원하시고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좭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5:8).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창세 전에 택하실 때 무작정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시는 뜻과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택하신 자들을 향하여 좬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좭, 좬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은 자좭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 43:7, 10).
지난 금요일 철야 기도회에서 일본 목사님이 간증을 하셨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자신을 남들보다 앞서 먼저 예수 믿게 하신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도록 하시려고 구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니면,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자가 아니면 도저히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증인,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려고 먼저 믿게 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수님이 말씀하신 씨뿌리는 비유를 보면 [길가], [돌밭], [가시떨기 밭], [좋은 땅] 네 종류의 밭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네 종류의 밭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길가나 돌짝 밭이나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전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만이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씨가 좋은 밭에 뿌려질 때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좋은 결실을 맺게 되는 비결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안타깝게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거나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깨달아지고 감동이 오고 교훈이 깨달아진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은혜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두눈으로 보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귀로 들으면서도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로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인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전하는 천국복음을 들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일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관원들의 지혜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세상 지혜는 많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지혜는 없었습니다. 만일 이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메시아인줄 알았을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고전 2:6-8).
그러나 이들과 달리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메시아인줄 알고 믿게 되는 것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어디를 가시든지 수만 수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줄 몰랐습니다. 그저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거나 엘리야나 예레미야같은 선지자 중의 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이들과 달리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좬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좭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17).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습니까? 이것은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해서 받아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은혜입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깨닫고, 말씀을 듣는 중에 깨닫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지 못하므로 회개가 없습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교만합니다.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되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시간이 있었다면 이는 분명히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된 증거입니다. 이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회개한 사람에게는 변화가 있습니다.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경건해지고 거룩해집니다. 예전에 행했던 잘못된 것들을 스스로 버리기 시작합니다.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게 되므로 좋은 열매를 많이 맺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행전 2:37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스스로 마음이 찔려 어찌할꼬 하면서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숫자가 무려 삼 천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모두 택함 받은 백성들이었기에 이런 역사가 가능했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죄와 허물을 깨닫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입니까? 그러나 이와 반대로 사도행전 7:54 이하를 보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었던 사람들도 마음이 찔렸으나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이를 갈며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모습을 보였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으나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회개하는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더 완악해지고 강퍅해져서 돌을 들어 스데반을 죽이는 패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마다 깨달아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죄와 허물이 깨달아질 때마다 회개하게 되는 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은혜를 받는 사람은 거룩하여지고 겸손해지며 자신의 삶 속에 아름다운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 강퍅해지고 더 교만해져서 사람이 방자해집니다.
저는 어떤 목사님에게 들은 잊을 수 없는 간증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 훌륭한 장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자수성가하신 의사로 부유하게 사시며 교회 봉사도 잘하시고 매우 점잖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광신자로 여기고 또 가난하게 사는 분을 보면 예수를 바르게 믿으면 나처럼 축복받으며 잘 살텐데. 왜 교회 안에는 이렇게 못 사는 사람이 많으며, 형편없는 사람들이 많은지 그것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이 장로님은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모처럼 휴가를 내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마침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에 천막을 치고 집회를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이 장로님은 이왕 산에 왔으니 은혜를 받고자하는 생각으로 천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열광적으로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며 질려서 예배를 마치자마자 냄새나는 그곳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 혼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한지 사흘 째 되던 날 그것도 한낮에 저 멀리서 반짝이는 한점의 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이 자신의 앞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 물체가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 서있는 이 사람에게서 고약한 냄새나고 걸친 옷 또한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 이 세상에서 다시 본적이 없는 형편없는 모습을 한 거지였습니다.
그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던 장로님은 그만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습니다. 그 얼굴은 다름 아닌 자기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신만이 잘 믿고 축복받아 잘 살고 훌륭한 줄 알았는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교만한 인간인지 똑똑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장로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장로님은 앉으나 서나 눈물이 마르지 않았으며 예배시간에도 울고 길을 가면서도 울고 석달 열흘 넘게 울었다고 합니다. 그후로 이 장로님은 아주 겸손해지셔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훌륭하게 생각하며 돌아가실 때까지 교회에 덕을 세우고 훌륭한 일을 많이 하며 본이 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 중에 교회에 나온지 오래 되었으나 좋은 열매가 없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회개가 없고 변화가 없고 열매가 없는 부끄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좋은 열매를 맺기 원합니까? 말씀을 들을 때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깨닫는 은혜를 받아 백배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백배의 열매(천국 비유)
마 13:18-23 / 이강웅 목사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한 국가의 성립 요소는 영토, 백성, 주권을 꼽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의미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일관되게 말씀합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천지만물의 왕이 되시며, 그 나라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를 예고해 줍니다. 복음서에는 왕으로 오신 예수께 대한 증언입니다. 예수님도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 분의 설교 핵심이었고, 모든 사역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사도행전과 나머지 서신서들도 왕이신 예수님과 그의 나라의 권세와 능력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예수께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왕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성경 전체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증거해 줍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그 분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바로의 학정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둠의 권세자 마귀의 종살이 하던 우리가 빛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들어가 그 분의 통치 아래 샬롬을 충만히 누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 목회자의 가장 큰 안타까움과 한계는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로운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그 나라의 부요함과 충만함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통치하시는 왕국이 너무도 영광스러워서 인간의 언어로 담아내려는 자체가 무리라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가장 큰 장애는 목회자 자신입니다. 목회자의 자신의 인간적 한계와 약점 때문에 그 은혜의 왕국을 제대로 증거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지만 부분적인 것 밖에 그려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늘 저에게도 있습니다. 이렇게 빈약한 복음을 전하니까 교회와 성도들의 삶조차 풍성하지 못하지 않나하고 생각해 봅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기독교가 세계 종교 중 하나이고 또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 믿습니까? 영혼 구원을 받기 위해 믿습니까? 더 축복 받고 싶고, 불행한 일을 피하기 위해서 믿습니까? 대체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복음은 이 정도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이 정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쉽게 시험에 빠지고 주저앉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쏟은 정성과 물질과 시간이 아깝게 느껴집니다. 헌신하여 봉사하다가 나만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코로나팬데믹 상황을 맞고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관심은 멀어지고 세상 일에 온통 신경에 쓰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매일 염려하고 초조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 일입니까? 아닙니다. 세상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수록 우리는 더욱 더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우선순위입니다. 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눈을 돌려 하나님 말씀에 경청하게 되면 세상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속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전개시켜 가는 무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역사 무대의 중심 되는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중심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연히 교회는 역사의 중심이고, 성도들은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한 중앙에 서 있습니다. 이 구원의 역사의 한 중앙에 있는 우리의 위치와 방향, 목적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결단코 쉽게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천국에 관한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오늘은 ‘씨뿌리는 비유’로 알려진 천국 비유입니다.
농부에게 가장 큰 기쁨은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이른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 뙤약볕에 김 매고, 비료를 주어 가을에 거두게 되는데 우리 신앙생활 역시 농사를 짓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신비한 비밀을 세상의 농사법에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농부가 들판에 먼저 씨를 뿌린 다음에 쟁기로 밭을 갈았습니다. 그러니 어떤 씨앗은 길가에 떨어지기도 하여 땅이 굳어서 뿌리가 내리기도 전에 새가 와서 먹어버리고, 또 어떤 씨앗은 흙이 얇은 돌 위에 떨어지는 수도 있어 뿌리를 내리기는 하지만 곧 말라죽게 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가시덤불 있는 곳에 떨어지기도 하는데 뿌리를 내리고 줄기도 자라다가 가시에 막혀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잘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이 비유에서 씨를 뿌리는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씨를 부리는 자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천국 복음을 의미하는데 이 복음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벧전 2:23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듣는 이의 가치관을 변화시킵니다.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한 알의 씨앗과 같아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한 알이 땅에 떨어지지만 그것이 열매를 맺으면 엄청나게 불어납니다. 비유에서 씨를 받은 네 종류의 밭은 천국 복음을 듣는 이의 마음 상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러 밭의 상태를 말하는 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그리고 하나님 나라 사역에 그만큼 방해 되는 장애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13장 이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파시며 모든 질병과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과 확신을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하였던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묻습니까?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이것은 무슨 질문일까요? “당신, 메시야가 맞습니까?”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 마저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12장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비방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라고 합니다. 당시 종교에 가장 열성적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지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악평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충분히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 만큼 그 당시 유대 사회가 불신앙, 불순종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마저도 믿지 않았습니다. 12장 맨 끝에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에 그들도 잡아 가두려고 온 것입니다.
13장에서는 큰 무리가 예수께 모여들었습니다. 천국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 듣고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선동에 놀아나 무죄한 예수를 십자가로 못박으라고 입을 모아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천국이 비밀을 아는 것이 저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시며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반면에 예수께로 나오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는 이미 세상에 도래하였고, 지금 활동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어떤 이들에게는 열려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닫혀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영접을 받지만, 어떤 이에게는 거절을 당합니다. 지금도 하나님 나라는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 성공은 그 나라를 수용하는 사람들의 응답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는 자의 마음 상태와 자세가 그 결과를 달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1. 먼저, 길가에 뿌려진 씨입니다.
팔레스틴에는 밭과 밭 사이에 약 1m 쯤 되는 좁고 긴 땅이 있었습니다. 농부가 곡식을 가꿀 때 오고가는 길입니다. 누구나 이 길을 밟고 다닐 수가 있기 때문에 마치 포장도로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씨앗이 이런 곳에 떨어지면 땅 속에 파묻힐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길가에 뿌려진 씨의 상태처럼 이러한 마음을 닫혀진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닳고 닳아서 진리를 수용하지 못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꽉 막혀서 전혀 소통이 불가능할 때에 “저 사람은 앞뒤가 꽉 막혔어. 저 사람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사람이야”라고 합니다.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힌 사람들은 마치 바리새인들의 병든 심리와도 같습니다. 교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서 예수님을 정당하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국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선동합니다. 이런 병든 심리를 가진 사람을 가장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주의적이기에,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니까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모든 갈등과 다툼과 분쟁의 요인은 바로 자기중심적, 이기적인 심리에서 비롯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이나 의견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기분과 의견을 더 중요시 합니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부모의 사정을 알 수 있습니까?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안 해주면 무조건 떼를 씁니다. 이처럼 병든 사람들의 심리는 이기주의적입니다. 신앙도 자기 신앙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신앙과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모두 정죄해 버립니다.
왜 이렇게 마음이 닫혀 있을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지식이나 경험이 있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예수님 당시에 그 분의 말씀이 권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기들의 성경을 아는 지식과 편견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경험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경험이 반복될 때 자기 나름대로의 고집이 생깁니다. 물론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소신도 필요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력을 잃게 됩니다. 완고해지며 완악하게 됩니다. 이것이 길가에 뿌려진 씨의 상태입니다.
이렇듯 길가에 뿌려진 씨는 결국 새의 밥이 되고 마는데 새는 마귀를 상징합니다. 즉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흐릿하게 하면 아예 안 믿는 것보다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귀의 이용물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가룟 유다에 대해서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울 뻔 했다"고 말씀하신 바 있지 않습니까?
2. 돌밭에 뿌려진 씨입니다.
팔레스틴에는 작은 석회석의 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토지 속에도 이러한 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밭 한 가운데, 구석에 큰 암반이 흙 밑에 깔려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흙이 얇아서 식물들이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땅에 씨가 떨어지면 싹은 빨리 나옵니다. 그런데 태양의 뜨거운 열을 견뎌내는데 필요한 습기와 자양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식물은 곧 시들어서 죽어 버립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고서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없어서 환란, 핍박이 있을 때에 넘어지게 됨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 보낸 편지 디모데후서에서 제자이었던 데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는 사도 바울을 만나서 복음을 받아드렸습니다.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하나님 나라에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함께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복음으로 인한 고생도 함께 하였습니다. 그런데 존경하는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히고 죽임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데마는 돌밭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복음의 좋은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처음에는 다소 성장합니다. 기본적인 진리의 일부를 이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리가 자신들의 영흔 속에 들어가 자신의 삶을 변화 시키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뿌리가 없고, 따라서 잠시 견딜 뿐입니다.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 복음을 버리고 뒤로 넘어집니다. 사단은 슬픔, 환난, 박해를 사용하여 두려움을 안겨 주어서 믿음에서 후퇴하게 하거나 포기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말씀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슬픔이나 환난, 그리고 박해를 만나도 믿음에서 후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합니다.
3. 가시 떨기에 뿌려진 씨입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것에 마음이 나누어진 마음을 가리킵니다.
가시 떨기 밭은 땅 자체로 볼 때는 좋은 밭입니다. 하지만 잡초가 영양을 다 빼앗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영적 양식을 뺏어가는 잡초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를 알고, 영생을 믿고, 천국에 대한 소망도 있어 주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지만, 걱정 근심, 두려움 때문에 헌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있을 때는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지만, 세상에서는 이런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다시 걱정 근심으로 가득합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예수가 나의 구주임을 믿고, 그로 말미암아 영생 얻을 소망을 갖고 있지만 자녀 때문에, 혹은 남편이나 아내 때문에, 혹은 재물 때문에 매일 근심 걱정만 하며 사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은 가시밭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재리의 유혹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처음에는 신앙생활을 순수하게 잘 하지만 탐욕 때문에 변질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에 등장하는 발람 선지자가 그러했습니다. 발람이 암몬왕 발락의 부탁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 하자 발람은 꾀를 내어 이스라엘을 타락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발락 왕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모압 여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케 하여 음행과 우상 숭배에 빠지도록 한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도록 사주한 것입니다. 그는 금은보화에 팔려서 결국 하나님 나라를 져버렸습니다.
4. 그러나 옥토에 뿌려진 것만 열매를 맺습니다.
옥토는 씨를 잘 받아들여 열매를 100배, 60배, 30배를 맺습니다. 이런 밭에 씨가 떨어지면 땅 속 깊이 들어가 필요로 하는 자양분과 수분을 빨아들여 잘 자라게 됩니다. 좋은 밭은 말씀을 잘 듣고 깨닫는 마음을, 진리를 듣고 순종하는 겸손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생산량이 제각각 입니다. 30배를 거두는 것도 있고, 60배를 거두는 것도 있고, 100배를 거두는 것도 있습니다.
결론
우리나라에서도 복음을 제일 처음 전한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우리가 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만 기억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의주 땅에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등 네 분들이 만주에서 로스 선교사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나게 되어 복음이 심어지게 됩니다.
압록강 하류 국경지방에 [고려문](Korean Gate)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출입국 관리소와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 선교사들이 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조선은 선교사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조선 사람들을 찾던 중에 장사꾼으로 온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이런 분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 한국말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말만 배우고 서양 종교를 전하는 일 등은 하지 않도록 약속하고 함께 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배우다 3년 만에 그들이 회개합니다. 믿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거기서 네 분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 해가 바로 1876년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들어온 것이 그후 1885년이 되어서 입니다.
우리나라 밖에서 네 사람의 도움으로 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합니다. 1882년 누가복음, 요한복음, 1884년 마가, 마태복음을 번역해서 나중에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들어올 때 이 성경을 갖고 들어옵니다. 그러기 전 1887년에 이미 신약을 다 번역하고, 한국인 네 사람이 압록강을 건너오게 됩니다. '이성하'라고 하는 분이 성경을 가지고 오다 여인숙에 투숙하였는데, 수상히 여긴 여인숙 주인에 의해 성경이 불태워지고 압록강에 버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성경이 들어오지 못하고, 그 다음 서상륜과 백홍준이 성경책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들은 성경책을 모두 새끼줄로 만들어서 그것으로 짐들을 묶어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것을 모두 다리미로 펴서 성경책을 만들었습니다. 서상륜은 황해도 솔내로 들어옵니다. 솔내 마을이 58가정인데 50가정이 예수를 믿습니다.
복음은 말 잘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변이 좋아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 예수의 능력이 듣는 이들의 마음에 역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 밭에 생명의 씨가 심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씨이기에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로 솔내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고, 1887년에 백홍준 장로님에 의해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오늘과 같이 전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원(燎原)에 불이 번지는 것처럼 백년 사이에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기적입니다. 씨가 옥토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처럼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복음의 열매가 맺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듣는 이들의 마음과 태도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 천국 복음을 듣는 밭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 마음 밭이 평가됩니다. 우리가 맺는 말씀의 열매가 우리의 마음 밭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길가, 돌 밭, 가시 떨기 밭, 그리고 옥토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이 뻣뻣하게 굳습니다. 매우 부드러운 간이 굳으면 간경화가 되어 죽게 됩니다. 동맥도 경화가 되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강팍케 되면 패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려면 새 영을 받아야 합니다. 새 영을 받을 때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져 옥토처럼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10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새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겔 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리고 오순절이 되자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행 2:1-4)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제 믿는 이의 마음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기경해주시기를 구할 때 정한 마음, 정직한 영으로 새로워 질 줄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합시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줄 믿고 우선 회개의 기경을 시작합시다. 그래서 나와 이웃의 마음속에 있는 불신의 덩어리들을 다 가려냅시다. 그리고 염려 근심의 가시덤불을 제거하고 불사릅시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백배 열매 맺는 성도들이 다 되기 바랍니다.
천국을 쟁취하는 6단계
마 13:18-23 / 이한규 목사
본문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는 농사와 관련된 비유다. 그 비유를 통해 얻는 교훈으로서 천국을 쟁취하는 6단계는 무엇인가?
1. 밭의 준비 단계 (마음 준비)
농사를 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밭이다. 본문에는 말씀을 받는 4가지 마음 밭이 나온다. 첫째, 길가 밭 마음이다. 그 마음은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마음이다(19절). 사탄은 핵심적인 일은 말씀의 은혜를 빼앗는 것이다. 길가 밭 마음은 자아가 강해서 자기 생각을 내세우고 초월과 신비를 외면하면서 말씀을 거부한다.
둘째, 돌밭 마음이다. 그 마음은 처음에는 말씀을 듣고 감정적으로 기쁘게 받지만 뿌리가 없어서 환난과 박해가 있으면 금방 넘어진다(20-21절). 감정적으로 믿으면 영혼의 기복이 심하고 믿음도 잘 자라지 않는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군중은 5일 전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뜨겁게 외쳤던 사람들이었다. 감정을 이용하는 사탄의 수법에 넘어가지 말아야 인격과 관계와 자리를 잘 지킬 수 있다.
셋째, 가시떨기 밭 마음이다. 그 마음은 말씀의 씨가 떨어져 어느 정도 성장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22절). 먼저 세상 염려의 가시를 제거하라. 염려는 말씀의 역사를 방해하는 핵심 요인이다. 재물 유혹의 가시도 제거하라. 돈의 종이 되어 지배되지 말고 돈의 주인이 되어 다스리라. 어떤 후원자는 힘써 후원하면서도 전혀 공로의식이 없어서 더 감동을 준다. 욕심을 잘 극복해야 천국 삶이 펼쳐지기에 돈을 힘써 벌면서도 동시에 힘써 드리고 나누고 베풀어서 행복도 얻고 좋은 열매도 많이 맺으라.
넷째, 좋은 밭 마음이다. 그 마음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하여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가 되는 마음이다(23절). 말씀을 잘 들을 때 나타나는 핵심 특징이 있다. 그것은 말을 잘 듣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주관이 있고 소신이 있는 것은 필요하지만 주관과 소신이 고집불통이 되지 않게 하라. 어디서든지 바른 말을 잘 듣는 사람이 행복도 얻는다.
2. 씨 뿌리는 단계 (말씀 생활)
좋은 밭 마음이 되었으면 그 밭에 말씀의 씨가 뿌려져야 한다. 말씀은 영혼의 양식과 같다. 아무리 마음이 좋아도 말씀이 없으면 분별력을 잃고 미혹될 수 있다. 힘이 없는 것보다 가진 힘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 더 문제이기에 말씀 중심적인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말씀 중심적인 삶을 살려면 말씀을 잘 아는 것보다 말씀대로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한다.
한 청년 자매는 회사에서 사람들이 다 칭찬하고 인정했다.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자매가 다니는 교회 목사가 설교 중에 말했다. “여러분! 하루라도 성도답게 살아보십시오.” 그 말씀이 마음에 꽂히면서 그때부터 그녀는 하루라도 성도답게 살기로 작정하고 실천했다. 그러자 점차 말씀대로 사는 삶이 쉬워졌고 결국 인정받는 회사원이 되었다.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대로 살면 세상도 인정해 주고 하나님도 인정해 주신다. 조지 뮬러가 말했다. “충분한 말씀 묵상 시간 없이 살았던 날은 잃어버린 날과 같다.” 불신자들은 교인들이 말이 많다고 한다. 그 뜻은 정말로 말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말한 대로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백 톤의 말보다 일 그램의 실천을 중시하라. 말씀을 잘 소화하고 실천하면 어떤 고난과 유혹도 이겨내는 무적의 영혼이 된다.
3. 물을 주는 단계 (기도 생활)
옥토 밭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진 후에는 물을 주어야 한다. 신앙생활에서 물을 주는 삶은 기도 생활을 뜻한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다.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기도를 통해 무엇을 얻기 전에 먼저 내가 강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대개 외적인 문제보다 내적인 문제다. 이천 년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는 대개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 때문에 타락하고 무너졌다.
힘이 모자라면 외부의 도움을 받으면 되지만 스스로 지치고 무너지면 어떻게 할 수 없다.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보다 그로 인해 자신감과 의욕을 잃고 무력감에 빠지는 것이 더 문제다. 인생의 약점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극복된 약점은 그때부터 장점이 된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강해져야 한다. 그것을 위해 기도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바쁜 삶에서 매일 기도 시간을 내려면 기도가 인생의 짐처럼 느껴지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짐은 사실상 짐이 아닌 연줄이다. 하늘을 나는 연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이 줄을 끊으면 얼마나 자유롭게 창공을 날까?” 그러나 연줄이 끊어지면 더 멀리 창고를 향해 날게 되지 않고 곧 추락한다. 연줄은 연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날게 하는 것이다. 기도 생활의 연줄이 있으면 인생은 추락하지 않는다.
4. 김을 매는 단계 (회개 생활)
옥토 밭에 좋은 씨앗이 떨어지고 물을 줘도 호시탐탐 못된 식물이 옆에서 자라 나쁜 식물을 해칠 수 있다. 그 나쁜 식물을 뽑으려면 김을 매야 한다. 김을 매는 삶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삶을 상징한다. 회개를 통해 죄 문제를 청산해야 힘차게 내일을 향해 뻗어나갈 수 있다.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라고 외친 후 나눔의 삶을 도전했다(눅 3:8-11). 회개는 자책이나 후회나 애통으로 끝나지 말고 변화된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다.
오래 전에 미국에서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후 옛 교회 청년들과 설악산에 갔다. 그런데 돌아올 때 설악산 근처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넣었는데 그 뒤로 차가 자주 시동이 꺼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불량 기름 때문이었다. 죄가 있는 심령은 불량 기름을 넣은 차처럼 인생의 힘찬 전진을 막는다. 인생 자동차를 잘 운행하려면 회개 생활을 통해 죄 문제를 깨끗이 처리하라.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는가? 인류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해서였다. 그 사실은 다른 복도 소중하지만 속죄의 복이 최대의 복임을 암시한다. 그 속죄의 복이 나의 진실한 회개를 통해 이뤄지면서 구원받고 영생 천국을 소유하게 됨을 생각할 때 회개하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5. 꽃이 피는 단계 (감사 생활)
대부분의 식물은 열매를 맺기 전에 먼저 꽃이 핀다. 꽃이 피는 것은 감사 생활을 상징한다. 지상 최대의 천국 언어는 감사하는 말이다. 감사하는 말로 감사 생활을 체질화시키라. 힘들 때도 감사하라. 삶이 늘 맑지는 않다. 비가 오면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비가 오니까 색다른 세계가 펼쳐진 것 같습니다. 제 마음에도 이런 단비가 늘 내리게 하소서.” 어려울 때도 감사거리를 찾으면 천국을 빼앗기지 않는다.
필자는 약이 아주 잘 듣는 편이다. 특히 내부적인 병은 타이레놀의 일종인 서스펜이 잘 듣고 외부적인 피부 관련 증상은 알로페론이 잘 듣는다. 피부가 가렵거나 이상이 생기면 바로 알로페론 제품을 바른다. 목욕 후에는 발가락 주변에 알로페론을 최대한 아껴서 바른다. 가격이 비싼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새로 개봉해 몇 번 쓰지 않은 알로페론을 목욕탕에서 잃어버렸다. 그러자 최대한 아껴서 발랐던 마음 씀씀이와 시간들이 너무 아깝고 허무해진 느낌이었다.
그때 속상함이 내면에 은근히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즉시 입술로 나직이 기도했다. “하나님! 알로페론은 잃었어도 인생은 잃지 않게 하시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즉시 마음이 평안해졌다. 인생은 잃어버림을 수없이 경험하는 과정이다. 주변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집과 재산을 잃고 목숨까지 잃은 사람도 있다. 살면서 그런 잃어버림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줄여 주시고 또한 잘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면 감사거리가 더 넘치게 될 것이다.
6. 추수하는 단계 (인내 생활)
농부가 수확의 기쁨을 맛보려면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 신앙생활에서도 때를 기다리고 인내해야 천국 삶을 살 수 있고 좋은 작품이 나온다. 인간관계에서도 인내하면 많은 것을 얻지만 인내하지 않고 감정을 즉시 배설하면 잠깐은 감정이 풀려서 좋은 것 같아도 나중에는 후회와 손해뿐이다. 천국을 쟁취하려면 기다릴 줄 알라.
유명한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급한 성질로 아내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어느 날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졌고 5분을 참지 못해 아내를 마음 아프게 한 일로 자주 울었다. 분노가 생길 때 5분을 참지 못하면 통곡할 날이 온다. 오래 참다가 밀려나면 하나님이 다시 중심으로 이끄시지만 참지 못하고 뛰쳐나오면 더 소외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때를 좀 더 기다리고 감정의 폭발 전에 5분만 더 참으라.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와 천국 소망을 바라보고 인내하라. 인물은 인스턴트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리더도 태어나기보다 오랜 기간 만들어진다. 행복과 천국의 삶도 낳아지기보다 만들어진다. 문제가 무엇인가? 과정과 단계를 생략하고 좋은 열매를 얻으려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시련과 유혹이 있어도 하나님의 손길과 내가 섬기는 교회에 온전히 소속되어 꾸준히 인내함으로 천국 삶을 누리고 많은 열매를 얻는 복된 심령이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