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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朋黨)은 조선 중기 이후 특정한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이다.
또한 붕당정치(朋黨政治)는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각 붕당들 사이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의 정치 운영 형태이다.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원리로 하는 붕당정치는 현대의 정당정치와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지만 정치적인 이해 관계는 물론 구성원 사이에 학문적 유대 또한 공유했다는 점이 조선 시대 붕당의 특수한 성격이다.
16세기 중엽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을 최초의 붕당 성립 시기로 본다.
이 시기의 붕당은 특정 가문의 권세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을 통해 조선 중기 정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9세기 초엽 이후 붕당정치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특정 양반 가문이 권력을 쥐고 독재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었다.
붕당정치를 당쟁(黨爭) 또는 당파 싸움이라고도 부르나, 이 용어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의견의 교환과 대립에 대해 당의(黨議)라고 표현하였다.[1]
붕당은 본래 중국에서 정치인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유교적 정치 이념 하에서 붕당을 형성하는 것은 범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송나라 이후 성리학 이념은 군자(君子)끼리 모인 '군자당'(君子黨)이 소인(小人)을 배제하고 정치를 주도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지지했으므로 이를 받아들인 조선의 유학자들도 조선 중기 이후 붕당을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중엽 사림파 가운데서도 신진 세력인 김효원, 유성룡, 이산해 등의 관료들이 연합하여 동인(東人)을 결성한 것을 일반적으로 조선 최초의 붕당으로 본다.
이들은 주로 이황, 조식, 서경덕 문하의 동문들로 이들의 연합은 학연의 성격이 짙었다.
동인의 구성원들은 주로 사림파 가운데서도 급진파로 이루어져 있어 기존의 훈구파 세력을 몰아내는 데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므로 보다 온건파에 속했던 선배 사림파들과 대립하였다.
이중 온건파 사림들이 심의겸을 중심으로 뭉쳐 서인(西人)을 형성하였다. 초기에 서인은 학문적 구심이 없어 큰 세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동인과 서인 사이의 중재역을 자처하던 이이가 서인에 합류하고 성혼도 서인에 합류하면서 두 사람이 서인의 구심을 이루게 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서인은 동인을 배제하고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서인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화하는 것을 꺼린 선조가 동인의 편을 들어주면서 동인은 세력을 회복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조식 학파인 북인(北人)과 이황 학파인 남인(南人)으로 갈라졌다.
임진왜란의 혼란 가운데 정권을 잡은 남인은 일시적으로 서인과 북인과의 공존체제를 취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화의 계획이 실패하면서 강경책을 취했던 북인이 득세하고, 북인이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되어 광해군 즉위와 함께 대북이 정권을 잡았다.
서인과 남인에 비해 학문적 기반이 부족했던 대북은 왕권 중심의 강력한 정치를 지향하고 다른 당파의 배제를 꾀하였다.
그러나 북인의 탄압을 받던 남인과 서인이 연합하여 인조반정을 일으키면서 북인은 숙청되고 서인과 남인의 공존체제가 회복되었다.
숙종대에 이르러 상호 비판을 전제로 100년 가까이 공존하던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세 차례에 걸친 환국의 와중에 남인과 서인은 서로를 숙청하고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경신환국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가 기사환국으로 실각한 서인은 이 과정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박세채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나뉘었다.
노론과 소론은 경술환국을 통해 복권하면서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였고, 이후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영조 즉위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당쟁이 치열해질수록 숙종은 성군이 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백성들도 살기 편했다. 왜냐하면 정적이 건재하여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부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즉위하던 해(1724년)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책(蕩平策)을 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사이의 화해를 유도하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선언해 이전까지의 격렬한 당쟁은 영조대에 이르러 사라졌다.
또한 노론과 소론 양쪽의 주요 인물들을 외척으로 만들어 세력의 안정화를 꾀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탕평책을 지지하는 탕평당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당파를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당쟁의 표면적 안정에 중점을 두고 능력에 관계없이 양쪽을 고르게 등용한 영조와는 달리, 정조는 비교적 안정된 정국을 바탕으로 능력에 따라 사람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붕당 간의 당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정조의 정책에 찬성하는 시파(時派)와 반대하는 벽파(僻派)로 새로운 당파를 형성하여 당쟁을 계속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 대신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국내 로마 가톨릭 신자 탄압을 빌미로 시파를 모두 숙청하였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난 후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잡게 되고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붕당은 정치 세력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였다.
일본 역사가들과 그에 영향받은 일부 역사가들은 격렬한 당쟁의 폐해 때문에 조선이 자주적인 근대화에 실패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국인의 민족성이 본래 싸움을 좋아하고, 잔혹하고,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기 때문에 당쟁이 가열되었다고 주장하였다.
[2] 또한 조선이 임진왜란 초반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한 이유가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
계급 투쟁에 초점을 맞춘 역사가들은 붕당이 지배 계층인 양반 사회의 이득만을 대변하는 정치 집단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붕당은 계급의식이 깨어나지 않았던 근대 이전의 시대적 한계 속에서 발전된 정치 형태로서의 기능을 훌륭히 수행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붕당 정치는 외척과 공신의 폐해가 컸던 조선 사회에서 특정 가문이나 공신 집단의 횡포를 효과적으로 견제하였다.
또한 절대군주제 하에서도 신하들의 소수 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중소지주계급 전체로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오히려 정조 이후 붕당정치가 붕괴하고 특정 가문의 독재가 시작되면서 조선왕조가 휘청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거꾸로 붕당의 정치적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종래에 학자들이 당쟁으로 말미암아 무수히 많은 사람이 사약을 받아 죽었다고 주장해 왔으나 사실무근이다.
당쟁이 격심했던 이 시기는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으로부터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까지 50년 정도였으며, 이때 정치적 이유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이건창이 지은 《당의통략》에 따르면, 모두 79명으로 1년에 약 1.6명이다.
이는 서양에서 당파 사이의 대립이 격심했던 때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가 희생되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혁명 당시인 1792년 8월 10일에만 무려 1천3백 명이 정치적 이유로 희생되었으며, 파리 코뮌 기간, 흔히 “피의 주간”이라 불렸던 1871년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7일 동안 2만5천 명이 희생되었다.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1905년 1월 22일에는 15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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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3 10: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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