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세고비아는 / 김정희
기타는
오랫동안 울림통에 고여 있던 묵은 가락이 버거웠던 것일까
어느 날 스스로 모가지를 버렸다
스물 몇 해의 시간을 단번에 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기타는
해자(該字) 같은 적막을 뒤집어쓴 채
벽에 등을 대고만 있다
나는 밤마다
소리유적(遺蹟) 앞에 앉는다
도굴꾼 마냥 귀를 걸어놓고
어둠 속에서 무늬로 남은 가락들을 더듬어간다
어디선가
잠든 세상을 열고 나온 손가락들이
기타 줄을 퉁긴다
동면을 마친 배암처럼 고개쳐드는 노랫소리들
서서히 靜과 動의 경계를 지우며
내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흐르다가 주절대다가 애무하다가 술병처럼
쓰러지다가 나를 휘감다가
눈을 떴다
더 이상 몽상을 할 수 없는 기타는
여전히 부러진 모가지를 달고 잠들어 있다
어제도 내일도 캄캄하게
나는
마음 수첩을 펼쳐
그간의 내력들을 적어내려 간다
카페 게시글
┌………┃추☆천☆시┃
소리 없이, 세고비아는 / 김정희
빗새1
추천 3
조회 314
24.04.03 04:28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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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시인은 움직이지 못하는 사물을 보고 시를 쓰는 재질이 뛰어난 시인인 것 같습니다 모가지가 부러진 벽에 기대어선 깃털을 보고 어쩌면 이렇게 세세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