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출현은 신으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신은 보이지 않는 절대의 힘으로 동서양의 사람들을 가공하게 억눌러 왔다.
고오타마 싯다르타가 대각을 얻고 난 뒤에 그 신의 허구를 보았다. 신은 죽은 것이 아니라 신은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수많은 신들을 만들어내어 인류사의 암흑시대를 만들었다.
부처는 신으로 움직이는 세상을 인간의 세상으로 돌려놓았다. 그것이 바로 신본주의의 기성종교로부터 인본주의로의 인간 혁명을 내건 불교라는 것이다.
조선 500년에 그 누구도 깰 수 없었던 두 계급이 있었다. 바로 양반과 천민이었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갑오경장 이후 일본의 침략으로 완전 깨졌다.
고작 500년의 관습도 스스로 깰 수 없었는데 천 년이 넘게 아리아인들이 만들어놓은 브라만교의 사성계급을 누가 깰 수 있었겠는가. 그것을 부처 한분이 나타나 단번에 깨버렸다.
기독교는 아직도 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불교는 기독교보다 적어도 2500여년이나 앞 선 종교다. 그런데도 크리스마스 날 어느 유명 절에서 아기예수 탄생을 축하한다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예수는 자기가 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부처는 그 카스트제도를 부수고 신에 대한 제사를 멈추게 했다. 그러면서 나는 신 위에 있다고 선언했다. 그래도 그분은 80까지 거뜬히 살다가 조용히 열반하셨다.
부처가 열반하셔도 워낙 출중하고 위대하신 분이다보니 근 200년 동안은 브라만교도들이 꿈쩍 않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신을 열망하는 세력들이 힌두교를 만들었는데 그 기세가 들불과 같았다.
불교는 처음에 대승불교를 일으켜 그들을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신을 모시고자 하는 세력이 워낙 거세서 잘못하다가는 불교가 도리어 힌두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자연주의와 인륜주의가 판을 치던 중국으로 쫓겨나듯 도망쳤다. 중국의 향토문화와 토착신들이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불교는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교리로 우여곡절 끝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런 불교가 장구하다보니 퇴색과 변형이 되어 원래의 순수한 목적을 완전 잃어버렸다. 경은 하나의 장식용이 되었고 율은 이미 도덕룰이 되었으며 논은 어렵다고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
그 대신 불교를 중흥한답시고 경쟁하듯이 고래등같은 대형사찰을 짓고 동양최대니 세계최대니 하는 거대한 불상과 온갖 보살상을 조성하는데 몰두했다. 그리고 거기에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맹목적 기도를 종용하고 있다.
세상에 우리만큼 많은 불보살상을 만든 자들이 인류역사상 또 있었던가. 신을 믿는 개신교는 조각상 하나 없이도 그렇게 전도를 잘 하고 원불교는 불상 하나 없이도 그렇게 전법 잘 해 왔는데.
신들의 우상과 기복으로부터 벗어난 불교가 도리어 신상같은 불보살상을 더 많이 모셔놓고 기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다 후일 신도들이 급감해서 사찰이 폐허가 될 때 생돈 들여서 조성한 그 불보살상들은 다 어떻게 될까.
폐허된 사찰에 뒹구는 불보살상들을 본 적이 있는가. 음산하고 섬뜩하다. 신처럼 받들며 기도하던 거기에 무슨 자비가 있고 무슨 영험이 있겠는가. 그저 무섭고 두렵기만 할 뿐이다.
신과 보살이 어떻게 다른지 아는가. 신은 인간과 종속관계를 원한다. 끊임없이 인간에 우환을 주고 또 물리쳐 준다. 그러면서 댓가를 받아먹는다.
한번 빠지면 결코 그 신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한 번씩 내려주는 그 짜릿한 기분에 평생을 절에 다니면서 또 다른 해결을 찾는 신자들이 다 여기에 속한다.
보살은 인간과 동료관계를 맺는다. 보살은 인간에게 동일한 목적을 향해 같이 나아가자고 한다. 금광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같이 금을 캐러가자고 한다. 같이 채굴해야 경쟁도 되고 능률도 더 오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보살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좋은 선배동료가 된다. 그 선배가 원하는 것은 같이 하자는 것이지 자기를 믿고 빌어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신은 다르다. 신은 결코 공짜로 주지 않는다. 반드시 조건이 있다. 나에게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해 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운다. 그러므로 신은 대단히 이기적이고 조건적이다. 그들은 고리대금업자와도 같다.
고리대금을 원하는 자는 다급함의 종극에 있다. 기도를 해서 문제해결을 바라는 자들도 다급함의 종극에 있다. 그때 신이 나타난다. 우선 필요하다고 신의 힘을 당겨쓴다면 그것은 급히 빌려 쓰는 급전과 같다.
신은 다급할 때를 노린다. 기도하는 자가 다급하지 않을 때는 그들의 미끼를 물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불전에서 성취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다 신의 미끼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다.
힘든 삶을 원활하게 하려하거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세속적인 기도는 반드시 마가 신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물론 세속을 벗어나고자 하는 발원기도에도 신은 반드시 달라붙는다.
보살을 숙주로 신이나 마가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사람들이 보살에게 소원을 빌 때 그 대응은 보살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마나 신이 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문제다.
스님들이 보살의 자비를 말하지만 실은 마의 도움을 받도록 유도하고 있다. 수 백 번도 더 말했지마는 보살은 중생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다. 보살은 오로지 중생을 벗어나겠다는 자들에게만 관여한다.
마와 불보살의 차이가 뭔지 아는가. 마는 나타났다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바로 사라진다. 그리고는 또 다른 미끼를 던진다. 아주 다양한 조건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한 개라도 물면 그 인생은 끝장난다.
애가 타게 불보살의 가피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가 불보살의 모습으로 턱 나타나면 가만히 있겠는가. 절대로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즉시에 황공스럽게 엎드리고 덥석 물게 되어 있다.
공덕에 의해 나타난 불보살은 오랫동안 그대로 있다. 그때 기도하는 자는 무궁한 복덕을 얻는다. 복덕에 의해 불보살이 나타나고 그로 인해 무량한 복덕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마와 불보살을 구분하는 데는 그 나타난 모습이 바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그대로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불교는 복 있는 자가 기도하는 것이지 복 없는 자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복 없는 자가 기도하면 있는 복 마저 잃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는 불러서 밖에서 오고 불보살은 공덕에 의해 내면에서 일어난다. 즉 밖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마이고 내 안에서 나타나는 것은 불보살이다.
진정으로 불보살을 친견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5문수행을 먼저 해야 한다. 그러면 공덕이 쌓여 업장이 닦여진다. 마음은 거울과 같아서 업장이 닦여지면 불보살이 거기에 나타난다.
공덕없이 불보살의 가피를 바라는 자는 억지를 부리는 자다. 그들은 절대로 불보살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그렇게 많이 기도하던 자들이 다 절을 떠나버리고 없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불보살이 밖에서 오는 줄 알지만 그것은 사실 내 안에서 나타난다. 나를 도와주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출현한다. 그래서 불보살은 단 한시도 내 곁을 떠나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내 안에서 나타난다고 해도 다 진짜의 불보살은 아니다. 내 안에 죄업이 불보살의 모습으로 화작할 수 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자기 기도 중에 불보살이 나타났다고 감격한다. 진위를 가려주는 스승이 없다면 그는 평생 그 모습이 진짜 불보살인 줄 알고 죽는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ㅡ계속ㅡ
출처 : 대승기신론해동소 전문도량 원효센터 1부법회 중 공파스님 법문 초록
카페 게시글
우리들의 이야기
기도해서 가피받았다 하는 사람들 진짜 조심해야 한다. 언젠가는 받은 것 이상으로 뺏긴다. 근기 낮은 불자에게는 위험할 수 있는 글.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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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감사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 ~~~~~~~~~~~
폐사된 사찰 쓰레기더미 속의 플라스틱 불상들!
해 빠지고 비오는 날 겁나고 으스스하지요.
헝겊인형도 무서운데 바닥에 나뒹구며 눈 뜨고 쳐다보는 폐기된 불보살상들 겁납니다.
아무도 없는 절, 천불전에 들어가는 그 스산한 느낌! 간이 작은 사람은 뒷골 서늘!
나무아미타불.
한 가지 소원쯤은 꼭 들어주신다고 해서 절에 공부하러갔더니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
그래도 어쩌겠어요, 태양을 손으로 가릴 수는 없고
이것이 진실인듯 하니....
하지만 짝퉁말고 진짜 불보살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승불교는 중생들의 삶을 도와주는 종교가 아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탈피하고 중생의 삶을 윤택하게하고자 보살들의 도움을 기도로서 간구한들 그것은 불가능.
보살들은 한결같이 진실되게 깨달음의 고지를 향해 여실수행을 하시는 분들.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들이지만 우리는 그분들을 지극히 존경은 하되 신처럼 결코 숭배는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그분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그분들이 앞에서 끌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는 것.
그분들은 우리에게 고통의 사바세계를 건너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고 신앙의 디딤돌 역할을 충분히 해 주시기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귀의대상은 수행자 집단인 상가인 것이지 그분들만을 특별히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염생사고 구열반락 _()_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_()_
어제 달린 나무아미타불 카페 도토리키재기님 댓글 퍼왔읍니다.^^
율은 도덕률이 되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계율은 부처가 되는 바탕이 되고
도덕률은 인간이 되는 바탕이 됩니다.
계율은 출세간을 향하고
도덕률은 세간을 향합니다.
그러니 계율과 도덕률의 목적이 다른거지요.
도덕률로 계율을 보면 안되고
계율로 도덕률을 보면 안되는데
세상사람들은 계율과 도덕률을 같이 보고 있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_()_
하늘엔 별 내 마음엔 도덕률, 내마음을 버리기 위한 계율이라 한다면 칸트에게 한대 쥐어박히려나^^
선과 악이 상대적으로 맞물려 있는 중생세계에서 도덕적으로 절대적 선을 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선의 최고가 산이라면 악의 최고는 물 속에 비친 산이다 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함께는 갈 수 없는 부처의 길, 중생의 길.
불교는 참으로 아름다운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