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2020년 10월 9일.
아내가 운동화 하나를 새로 샀다며 종이박스를 풀렀다.
나는 힐끗 쳐다보고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금 신고 다니는 랜드로바 뒷쪽 안이 조금 떨어지고, 헐었을 망정 신발바닥은 아직도 튼튼하니까 더 신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난 나였다.
아내는 '헌 신발을 신지 말고 보다 깔끔한 것을 신으라'고 지청구를 했지만 나는 그게 아니었다.
다소 헌 신발이면 어떠랴 싶다. 발바닥이 넓고 발가락 틈새가 벌어진 나는 그저 볼이 넓은 구두나 신발이면 그것으로서 충분했다.
공식적으로 오갈 데가 별로 없는 나는 그저 아무 신발(구두)를 신고 다녀도 무방했다. 일흔세 살 먹은 늙은이,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은 늙은이가 뭐 그리 대단할까? 그저 허름할 망정 옷에서 냄새가 나지 않으면 족하고, 또한 남들은 남이 신는 신발을 내려다보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게 내 생활철학이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이 무엇을 입었는지, 어떤 옷차람새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얼굴에 무엇을 발랐는지, 머리카락을 어떻게 꾸몄는 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나는 단지, 그가 말하고, 그가 처신하는 것들이 과연 정확하며, 무엇이 옳바르는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졌고, 그 사람의 능력이 진짜는 무엇일까라는 것에만 주시했다.
이런 나이기에, 반대로 남이 나의 행색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를 할까?에 대해서는 나는 하등의 생각조차도 없다.
하물며, 지금은 행색이 초라한 늙은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저 남한테 심각한 혐오감이나 주지 않고, 옷과 신발 등에서 구역질나는 냄새가 없다면 그 어떤 것도 다 괜찮다고 보는 나였다. 앞으로도 그럴 게다.
이 나이에 내가 외모에 신경을 쓸까? 전혀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내 아내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함께 나들이를 하는 남편의 행색에 걱정이 되나 보다.
별 거 다 신경을 쓰는 게 여자, 할머니인가 싶기도 하고.
어제 사 왔던 신발이 여름용이라며 타박을 주웠더니만 오늘 오후에 아내는 가죽 구두 랜드로바를 새로 꺼내면서 발에 맞는지 확인해 보란다. 내가 왜 또 샀어? 하는 듯이 얼굴을 다소 찌뿌리면서 신었더니만 구두의 볼이 넓어서 속이 넉넉했다.
아내는 그제서야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어제 샀던 운동화도 꺼냈다. 아니 반납한 것이 아니었어?
친정에 온 큰딸이 함께 거둘었다.
아내는 또 신발장에서 새 구두를 하나 꺼냈다. 몇 해 전에 산 구두였는데도 내가 '왜 또 사왔어?'하면서 타박을 주고는 전혀 신지 않았던 구두였다.
내가 사는 아파트 면적은 비좁다. 그런데도 신발장에는 예전에 신었던 구두, 신발들이 잔뜩이나 있다.
내 구두바닥이 조금 닳면... 이런 거 신지 말라면서 새 구두와 운동화를 사왔던 아내였다.
내 연금통장을 아내가 알아서 쓰기에 나는 이런 살림살이에는 일체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서해안 산골 태생인 나한테는 그저 옷과 신발이 헐렁헐렁하고, 넉넉하고, 큼직하면 그뿐이지 그 이상의 멋에는 하등의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나한테는 모양보다도 튼튼한 것, 실용적인 것이 훨씬 가치가 있었기에.
'지금껏 신었던 구두(운동화)는 시골에 가서 일할 때나 신어요'라는 아내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골에 자주 내려가지도 않거니와 내려갔다고 해도 밭일을 할 때에는 구두나 신발보다는 목이 긴 고무장화가 훨씬 안전하고 실용적이기 때문이다.
거칠고 험한 땅, 밭에서 농기구 연장을 다룰 때에는 목이 길고 두툼한 장화가 제격이다. 구두, 신발? 그런 것은 멋이나 부릴 때에나 적합할 게다.
키 큰 나무가 많고, 잡목과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진 텃밭에서 일을 하려면?
제일 겁이 나는 게 뱀과 왕탱이-말벌이다. 자칫하면 이들한테 물리고 쏘일 수도 있기에.
둘째로는 농기구로 발을 찍고, 손에 가시가 찔려서 다칠까 하는 우려이다.
농사꾼한테는 멋보다는 튼튼한 바지와 장화, 장갑이 제격이다.
이런데도 서울에서 신었던 헌 구두를 시골로 가져가서 농사 지을 때나 신으라는 아내의 말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이다. 아내는 새 신발(구두)를 신으라는 뜻으로 말을 했을 게다. 늙은 남편의 심성을 잘 알기에 남편을 달래려고 그냥 해 본 소리일 게다.
이미 돈 주고 사 온 이상, 그 상품을 도려 물릴 수가 없는 이상 나는 그저 모르는 체하고는 새 구두를 신어야 할 터. 신발장에도 여러 켤레의 새 구두도 있을 터.
자꾸만 늙어가고 등허리가 굽어가는 내가 새 신발을 신고 걸어다닐 수 있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더 남았을까?
이런 생각도 드는 오늘이다.
자꾸만 늙어가는 남편이 안쓰러운가?, 나날이 등허리가 굽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게 조금은 안타까운까?
심성이 고운 아내, 자식들의 마음씀씀이에 고마워하면서도 나는 자꾸만 어깃장을 놓는다.
나는 아무래도 가난했던 산골마을의 태생이라서 그럴까? 아직껏 물건 저장강박증이 남아 있는 탓일까?
한 번 사 온(만든) 물건은 끝까지 다 쓰자는 생각을 지녔다. 어쩌면 '다쓰족(다 쓰자는 주의자)일까?
아무려면 어떨까 싶다.
이 세상은 물건(상품)이 너무나도 넘쳐난다.
다 사용하지도 않았는데도 내다버려서 생활쓰레기가 엄청나게 발생한다.
그 쓰레기를 어떻게 수거해서, 분리해서, 처리할 것인데? 하는 걱정이 앞선다.
선별해서 재활용하면 좋으련만 대부분의 폐품은 쓰레기 매립장으로 보내져서 불 태우거나 땅속에 묻게 마련이다. 불 태워서 그 에너지를 활용한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고 단지 없애려고 한다면 엄첨난 공해를 발생한다. 매연과 재(찌꺼기)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데?
또한 태우지 않고 땅속에 묻는다면?
그거 묻을 땅이 어디에 남아 있느냐고?
그거 해외에 수출이 쉽냐?
충남 보령시 웅천읍 노천리 간사지 건너편 산(됨방산) 하단 산자락에는 폐기장이 숨어 있다. 멀리에는 들판, 가까운 곳에는 산이 가로 막아서, 시야가 가려져서 눈에 띄지는 않으나 산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눈에 확연히 들어날 터. 땅을 파고 묻고, 이게 자꾸만 쌓아서 상당한 높이로 쌓이면... 그 위에 흙을 덮는 체를 한다고 해도 또 하나의 구릉(언덕)이 될 터.
몇 년이 지나야 쓰레기가 분해됄까? 1만년 뒤에? 5만 년 뒤에? 10만 년 뒤에?
내가 그때까지 산다면야 쓰레기가 어떻게 분해되어서 어떤 물질로 변했을까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신이 아닌 나는 먼 미래를 전혀 보지도 못할 터. 상상조차도 안 되는 먼 미래이다.
생활쓰레기를 덜 버렸으면 싶다.
그 방법의 하나이다. 물건을 덜 사고, 샀으면 끝까지 다 사용하고, 사용한 뒤에도 다른 용도로 재활용하고, 최종적으로 버릴 때에는 부피를 가장 적게끔 줄여서 버렸으면 한다.
나는 가난했던 산골마을에서 태어났고, 자랐던 나. 물자가 너무나 풍부한 21세기를 산다.
이왕이면 낭비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껴 쓰는 게 곧 돈을 버는 것이기에.
이런 글감은.. 잔뜩 이어질 게다.
잠깐 쉬자. 단숨에 썼으니 오탈자도 많을 터.
나중에 보탠다. 보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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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자로, 한자말로 글 쓴다면.. 그게 과연 제대로 쓸까?
전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로 글을 쓰기에 이런 글쯤이야 단숨에 쓴다.
1초에 1자 이상을 더 쓸 수 있기에.
그만큼 쓰기 쉬운 한글이다. 우리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