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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불꽃처럼 살다간 최욱경 | |
한국현대 미술에 초석이 된 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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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점의 그림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상납용으로 사용됐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의심을 받고 있는 것. 수뢰 혐의로 수감중인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부인인 이모씨가 작년 10, 11월께 갤러리에 그림을 들고와 팔아달라고 맡긴 그림으로 작가가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38×45.5㎝ 크기의 추상화다. 추정가가 3천만∼4천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세상을 떠났다. 열리기도 했다. | ||||||||||
한국현대 미술에 초석이 된 화가. 최욱경은 그 화려한 이력과 유학파 여성화가로 한국화단에 추상 표현주의로 한 획을 그은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열정적인 화가의 삶을 살았다. 색채와 형상, 구성의 실험을 거쳐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신비한 색채감과 환상적인 형태로 귀결된다. 그가 유학을 시작한 1963년에는 추상표현주의가 사실상 하나의 완성을 보고 이에 반발한 새로운 움직임으로 팝아트와 미니멀리즘 등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화가와 화면과의 끊임없는 대결’이라는 추상표현주의의 기조는 여전히 젊은이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고 열정적인 기질을 지닌 20대의 최욱경에게는 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강렬한 원색의 색채가 특징으로 초기의 서구 양식의 영향으로부터 자신의 조형양식을 찾아가는 실험적인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빨강과 노랑, 파랑의 원색 대비와 사납고 격렬하게 휩쓰는 획, 그리고 끊임없이 상호 침투하고 변화 많은 표면은 특히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한다. 역동적인 획과 충돌하는 듯한 크고 작은 색면들로 전개되는 화면에는 팽팽한 힘의 대립과 더불어 미묘한 삼차원의 공간감이 형성되는 것이 특징이다. | ||||||||||
제2시기는 1971년에서 1978년까지로 한국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미국에 가서 본격적인 작가로 발돋움하는 시기이다. 이는 60년대와 같은 에너지의 분출보다는 형상과 색채, 구성에 대한 체계적인 실험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원색보다는 노랑, 분홍, 보라, 파랑의 밝은 색채가 많아지고 형상이 이전보다 뚜렷해지면서 배경에서 완연히 분리되기 시작한다. 형태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화하며 강렬한 햇살을 연상시키는 빗살무늬와 같은 사선의 표현이 많아진다. 이 시기에는 형태와 색채에 대한 관심이 자연이라는 주제와 결합되어 새와 꽃, 물고기, 육중한 동물을 연상시키는 유기적 형태들이 나타나고 화면이 율동적인 곡선으로 가득 차게 된다. 작가가 한국의 지방을 여행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는 시기이다. 강렬한 태양광선과 그 광선에 따라 변화되는 빛나는 색채를 표현하면서 화면이 밝은 파스텔 빛으로 바뀐다. 색채는 서로 공명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형태와 선이 보다 섬세하고 원숙해진다. 이 시기에는 또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꽃이라는 소재를 통해 표현되기도 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을 작가 자신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했다. 감정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은 큰 화면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 속에 융화된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의 작업과 이것에 대한 나의 태도는 정력의 폭발이었고 지금은 한걸음 물러서서 전체를 볼 수 있는 객관화를 필요로 하며 좀더 절제된 상황에서 천천히 자유롭게 흘러나오는 감성을 다듬어 나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러한 의식에 눈뜬 지 오래지 않아 아직은 유아기적인 상태이지만 나 여자로서의 감성과 체험에서 걸러 나온 여성의 의식과 관련된 표상을 창출시켜 직접적으로 구사한 시각적 용어로 표현, 전달하는 것이다.” | ||||||||||
■ 작가의 생애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인 그는 10살 때부터 김기창(金基昶, 1914~2001), 박래현(朴來賢, 1920~1976) 부부의 화실에서 개인지도를 받는 등 부친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최욱경은 서울예고와 서울대 미대를 다니면서 한국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미술교육을 받았고, 대학 졸업 후에는 유학의 길을 선택하여 1963년에 미시간 주의 크랜브루크 대학(Cranbrook Academy of Art)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 막스 베크만(Max Beckman) 장학금을 받고 1년 동안 뉴욕에 머물면서 작업활동을 한다. 1966년에는 메인주의 스코히간 미술학교(Skowhegan School of Painting and Sculpture) 여름학교를 다녔는데 이 시기에 ‘스코히간 미술학교 학생전’에 출품한 작품은 소묘부 1등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는 뉴저지주에 있는 병원에서 정신박약아들에게 그림을 지도해주는 일 등을 전전하다가 1968년부터 1971년까지는 3년간 프랭클린 피어스 대학(Franklin Pierce College)에서 미술교사로 일했다. 이 시기에 최욱경은 비교적 여유롭고 안정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곧 안정된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변화를 찾아 일시 귀국을 결심한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신세계 화랑에서 귀국 개인전을 가진 후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하면서 단청과 민화 등에 나타나는 한국의 전통적인 색채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4년에 캐나다의 업스테어(Upstair) 화랑에서 열린 초대전을 계기로 최욱경은 3년 간의 한국 생활을 접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아크릴화, 소묘 등을 가르치면서 창작활동을 하던 최욱경은 1976년에 뉴멕시코의 로스웬 미술관(Roswell Museum)의 연구비 지원 작가로 선정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약 10개월간 뉴멕시코에서 지내게 되는데 이 10개월은 그가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귀국 후의 한 인터뷰에서 최욱경은 이 시절을 “자연에 가까울 수 있고, 현실을 떠나 예술에 탐닉할 수 있고, 예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 넓은 하늘과 단조로운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뉴멕시코의 새로운 환경은 그녀에게 자연이라는 주제에 대한 관심을 키워주었다. ‘뉴멕시코 인상展’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 초대전에 대해서는 미국적 냄새가 너무 강하다는 비평과 독특하고 개성적이라는 호평이 엇갈렸다고 한다. 1979년부터는 영남대학교 사범대학 회화과의 부교수로 재직하면서 또 다른 환경에서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경상도 일대를 여행하면서 바다와 섬, 그리고 산들의 아름다운 능선에서 큰 감동을 받았으며,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작품을 통해 표출했다. 이시기에 최욱경은 여성작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는데, 여성의 교육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이 계기가 되어 1981년에는 덕성여대로 옮기게 된다. 덕성여대 서양화과에서 부교수와 교수를 지내던 최욱경은 1985년 7월에 45세라는 젊은 나이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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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아트 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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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화상의 파랑 노랑 연두의 색감이 좋군요... 파아란님께서는 예술을 무척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바탕이 검정이라서 돋보이는 그림...
차마 잊을 수가 없습니다....사랑한다는 것은 영생이기에/영원한 연인이 되려고/금지된 꿈을 꿈 속에서 꿈꾸었습니다.-애멸된 독백에서/최욱경..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최상의 예술을 영위한 그녀에게도 생을 저버릴 만큼의 아픔도 있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