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밭을 일구다가 백자 파편이 눈에 띄어 한두 개씩 모은 것이 큰 바구니에 가득 찼다. 산성 밑의 이곳이 옛날 집터 자리인지 기와 조각도 잡힌다. 대숲이나 풀숲, 논둑, 물 흐른 도랑에도 파편은 엎드려 있다. 전에도 절터에서 가끔 백자 파편을 보아왔지만 그냥 지나쳤는데 요사이는 그 파편들의 빛깔에 이끌리어 모으기 시작했다. 은은한 빛깔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굽마다 형태가 달라서 술병인지 접시인지 혹은 막그릇인지를 짐작케 한다. 파편 한 조각에서도 연꽃처럼 달처럼 그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혹은 쑥떡 같고, 바보 같고, 멍텅구리 같게도 느껴진다. 그런데 그 맛이 날이 갈수록 담담하면서 은은히 다가와 마치 천 년 전의 옛사람을 보는 듯 순수한 정감에 빠져든다. 백자의 매력은 소박하다는데 있다. 평범하면서 꾸미지 않아 그 소박함이 진실의 깊이를 일게 한다. 얼핏 보면 부족한 듯한 느낌이지만, 체하거나 오만함이 없어 마음을 잡는다. 이런 것이 백자의 신비가 아닌가 한다. 자연스런 형태는 도공의 무심에서 빚어진 것일 것이다. 무심의 경지가 아니고선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잡는 그릇을 만들지 못한다. 그저 그릇을 만들고 항아리를 만들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흙과 함께 자기 자신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흙을 사랑했던 도공, 그 흙으로 자신의 마음을 빚은 도공. 어떠한 기술로도 따를 수 없는 게 흙의 재료라고 하는데, 우리 흙 속엔 독특한 성질이 있다고 한다. 일본 도공이 이것을 알고 우리 흙을 원했을 때 이곳에 와서 빚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솜씨가 우리 도공의 것과 달라, 손과 흙, 마음의 반죽에 따라 다른 것을 알았다 한다. 우주의 원소는 물 불 흙 공기이다. 사람의 원소도 그와 같다. 그런데 도자기의 원소도 바로 물, 불, 흙, 공기이니, 도공이 만든 그릇이야말로 자연에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물과 불과 흙의 정기가 모여서 핀 그릇의 꽃, 조선의 도자기, 지금 나는 그 도자기를 빚은 도공의 영혼과 마주하고 있다. 백자의 파편을 주워 모을 때였다. 그것이 물속에 있으면 물처럼 보이고, 돌밭에 뒹굴 때는 돌멩이 같았으며, 흙속에 있을 때는 흙덩이 같았다.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있었으니 자연과 일치한 그 형태가 해탈한 부처와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백자는 한국인의 얼굴이다. 꽃 핀 눈박이 사발을 보면, 마디 굵은 촌 아낙의 손바닥에 박힌 괭이 같다. 있는 듯 없는 듯한 문양 박힌 백자는 간밤에 꿈을 꾼 도공의 꿈을 그린 듯하다. 꾸미지 않은 듯 꾸미고, 산야에 물 흐르듯, 바람에 흔들리듯 굽고, 자신을 닦듯이 자기를 굽는다고 어느 도공은 말했다. 도자기는 강이 아니고 개울이요, 산이 아니고 언덕이어서 겸손한 자연이라고 생각한다. 소박한 백자의 색은 하늘빛과도 같다. 내 집의 바구니 속에 회백, 청백, 난백, 유백색의 하늘이 가득하다. 구름이 흐르고 달이 흘러가듯 자연의 넉넉함이 담겨져 있다. 우리가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을 일본 역사에서는 ‘도자기 전쟁’이라 말한다 한다. 도공을 빼앗아 가는 전쟁, 금공 석공 목공 세공품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선진문물의 약탈을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내가 주워 모은 백자 파편을 어느 일본인이 소중히 여기고 주워 갔다고 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좋은 점을 놓치지 않았다. 백자에서 우리의 혼이 무엇인가를 배우려 할 것이다. 나는 백자 파편을 주우면서 잃어가고 있는 것을 진주를 꿰듯 주워 모았다. 조선조 백자의 깊고 깊은 비색은 하늘에 끼어 비치는 구름, 청화 백자의 청은 우리가 좋아하는 쪽빛, 순수 백자는 하늘에 두둥실 뜬 흰 구름이다. 이 빛은 청아한 우리 민족의 순수 자체일 것이다. 어떤 도자기 전문가는 좋은 도자기를 만나면 비애와 우수에 빠져든다고 했다. 약탈을 당한 전쟁과 슬프도록 아름답고 우아한 내면의 극치에 전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백자를 보면 하늘을 들여다보는 듯하고, 바다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그리고 한 조각의 백자 파편에서 신비의 예술을 본다. 예술을 하는 사람, 도공의 마음에 젖어든다.
(최은정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