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소개된 대한제국시대의 도시의 변화는 고종의 개혁의지를 얼마큼 잘 나타났는지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도시개발(개조)사업은 광무개혁의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시사업을 진행시키면서 같이 대한제국군의 군사에도 많은 개혁을 단행하게됩니다.
당시 우리는 힘이없었던 큰이유는 바로 국방이었습니다. 자국가의 기본이 되는 국방의 개혁이야말로 자주국가의 큰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갑오.을미개혁으로 기존의 조선군대의 해산과 일본식군사훈련으로 일본식화되어 있었던 군대를 다시 바꾸어 놓는일이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당시 도시개발(개조)사업 아관파천을 단행한후 본격적으로 시작했듯이 군사개혁또한 아관파천을 단행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게됩니다.
당시 러시아 리콜라이2세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로 민영환일행을 파견한 고종은 하나의 승부였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지원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개혁이 진행되는가 또한 일본의 세력을 견제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어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고종은 5개항의 조선정부안을 러시아 리콜라이 2세에게 적극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1. 조선 군대가 훈련을 쌓아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 러시아 군대가 국왕을 호위해 줄 것.
2. 군대와 경찰의 훈련을 위해 다수의 군사교관을 파견해줄것.
3. 내각과 산업 및 철도 분야를 지도할 고문을 파견해줄것.
4. 일본 부채를 말소하기 위한 300만원의 차관을 제공해줄것.
5. 조선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육전신선의 가설에 중의해줄 것.
위의 5개조항은 당시 러시아에서 들어줄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조선을 일본에 양보하는 대가로 만주를 차지하고 그중간의 조선을 완충지대로 사용하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리콜라이 2세는 일단 조선국왕의 호위와 군사훈련을 담당할 교관과 고문단을 파견하여 민영환과 함께 귀국하게됩니다.
당시 장교 3명과 하사관 10명이 입국하였는데 추후에 2진으로 들어온것을 포함하여 총 4명의 장교와 10명의 하사관으로 편성되게됩니다.
이들은 1896년 8월에 입국하여 이에 10월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일단 당시 중앙군인 친위대 5개대대 1개대대의병력수가 대대장을 포함한 20명의 장교와 하사관 및 병사 665명으로 편성 총 보병 병력 3315명에서 정예군사를 800명을 선발하여 러시아식 군사훈련을 실시 하였습니다.(초기160명을 1개 중대로 5개 중대로 편성)
당시 러시아군 편제로 개편된 부대는 4개 소대를 1개 중대로 편성하고, 5개 중대를 다시 1개 대대로 편성하는 러시아식 기본편제로서, 점차 지방군으로 확산되어 대한제국 군제의 기본 골격이됩니다.
러시아 교관들에 의한 훈련성과를 대외적으로 과시한 것은 1897년 5월에 실시된 사열식이였습니다. 이 자리에 고종이 참석하여 중대훈련등 시위대대가 숙달한 각종 전기전술을 사열 하였습니다. 고종이 임석한 연병장에서 조선인 장교가 조선 군인을 훈련시키는 형식을 가추어 진행되었습니다.
글: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서인한) 인용
사진 : http://dugok.x-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