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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소논문
제출자 선형수 목사
본문 전도서 7:1-14
1.서론
"인생사에 무엇이 선한지 누가 알랴?"(전6:12).
인간의 지식은 무한해 보이나 사실은 제한적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비참함은 지혜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역설적 어리석음 때문일 수도 있다 (1:12-18;2:12-16). 지혜자도 뇌물이나 억압 혹은 유혹에 넘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실로 지혜는 어리석음보다 낫다.
지혜를 깊게 하는 것은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요 깊은 두려움이요 장애물이다.
역설적으로 인간의 구원의 실마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이면서 구원의 시작이다.
인간은 스스로 행하는 모든 노력으로 영원하고 궁극적인 의미를 얻을 수 없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어떤 것도 새롭거나 특별하지 않다(1:5-11).
Gregory 는 전도서의 목적이 "모든 일들과 인간의 추구함이 헛되고 쓸모없음을 보여주고, 우리를 하늘의 것들로 인도한다" 고 했다(anchor bible, 192).
전도자는 당시에 통용되던 여러 가지의 잠언들을 사용한다.
그런데 그것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 속에서 하나님의 때에 삶을 즐겁게 사는 것이 인생의 참된 의미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때를 정하신 것을 믿고, 역경의 때에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선한 것을 바라 보아야 한다.
2. 형식/구조/배경
구약 지혜서
구약의 지혜서는 잠언, 욥기, 전도서, 아가를 말한다. ???? 호흐마 를 주제로 다루는 책들이다. 바른 삶 혹은 효과적인 삶에 관심을 갖는다. 지혜서 외의 책들이 이스라엘의 구속사, 언약, 선민,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갖는데 비해 지혜서는 보편적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갖는다. 선택된 백성이 아닌 일반 개인의 삶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한다. 잠언의 목표는 인격 형성(the formation of character)이다(현창학,21 : W.P. Brown 의 말이다). 비지혜서는 언약, 구속사, 선민, 하나님나라 등 특별은총에 관심을 갖는다.
지혜서는 일반은총의 삶에 관심을 갖는다.
지혜(호흐마 ????) 는 "경험에 의해 얻어진 삶과 우주의 질서에 대한 지식이며, 그 지식에 조화하여 바른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능력"이다(현창학,32).
전도서의 철학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hebel은 수증기, 호흡 이란 뜻으로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으나 잡을 수 없고 순간적이고 무익하다.
인생의 모든 것은 공허하고 완전히 헛되다.
수증기처럼 잡을 수 없고 호흡처럼 달아나고 결국 아무것도 없다.
해 아래서 인간의 평생에 고생과 수고가 무엇이란 말인가? (1:3).
세대는 오고 가고 변하는 것은 없다.
새로운 것은 없다(1:3-11).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계를 그대로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Scott,202).
사실 세계가 변하는 것이 인간의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은 아무런 노력으로도 변개시킬 수 없는 굽어 보이고 결함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1:15, 7:13).
전도자는 무엇이 일어나는지 그 비밀을 밝히고자 자기 방식의 실험을 행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저 허공을 만지는 것 같았다(1:12-14).
지혜의 성격을 알고자 했고 지혜와 어리석음을 구분하고자 했다. 그러나 소득이 없었다(1:17-18, 7:23-8:1).
선을 정의하고 쾌락과 소유를 선에서 분리해 보고자 했다. 그러나 찰나의 행복을 발견했을 뿐이다(2:1-11, 18).
지혜의 가치와 수고의 열매는 죽음의 벽에 막혔다(2:14-16, 18-26).
인간의 만사가 미리 정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일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인가? (3:1-15, 7:23-24, 8:16-17, 9:11-12).
경험은 권선징악의 신학적 원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을 증명한다.
인간의 성격이나 성취가 운명의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지혜자나 어리석은자나 일반이다(3:16, 7:15, 8:14).
인간도 짐승도 죽는 것은 같다(3:18-21).
어리석음이 지혜와 명예를 압도한다(10:1).
유명한 자가 곧 잊혀진다 (4:13-16).
H.Wheeler Robinson 은 "비 히브리 인생 철학이 죽음을 숭고히 묘사한다. 전도서는 죽음에 대한 무덤 냄새가 난다." 고 했다(Scott,20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기쁨이 인생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복이다.
그래서 헛된 인생, 무기력한 인생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전도서 저자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본문 여러 곳에서 솔로몬 왕이 저자임을 시사한다(1:1,12,16; 2:4-9; 7:26-29; 12:9)(김성수,3). Zimmerli는 ???? 코헬렛 을 솔로몬이 아닌 후대 지혜 교사로 본다. 솔로몬은 한 사람의 지혜 교사로서 객관적으로 인생을 본다. 솔로몬을 전도자로 보는것이 무난하다(김성수,5).
전도서 문학적 특징과 강조점
전도자는 당시 통용된 잠언들을 사용하나 그것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전도서는 산문체를 포함한 운문이다(김성수,6). G. Archer 는 비교할 수 없는 그의 지혜(1:16), 그와 겨를 수 없는 재물(2:8), 엄첨난 그의 심복들(2:7), 감각적인 여러 쾌락의 기회들(2:3), 방대한 건축 공사(2:4-6) 등의 언급은 솔로몬에 비할 사람이 없으므로 전도서 저자(1인칭 나로 표현됨)는 솔로몬이라는 내적 증거이다(Archer, 구약총론, 547-48쪽 : 현창학, 144). 박윤선도 솔로몬 저작을 지지한다(박윤선, 성경주석:욥기 전도서 아가서, 영음사, 2000, 397-99쪽 : 현창학, 156).
전도서 목적과 교훈
인간은 스스로 인간의 영원한 의미를 이룰 수 없다(1:5-15).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낫다(2:13이하).
경험 속에서 부조리들과 비정상적 일들에 부딪히나 지혜가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죽는다(2:15; 3:16이하).
그래서 지금 현재를 하나님의 선물로 누리고 즐거워 하라. 그것이 현실의 부조리를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꾀를 내어 욕심을 채운다.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다. 어려운 사랑의 대상이다.
인간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2:18; 6:12).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3:16-22).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정하셨다(3:1-15).
인간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주어진 현재의 삶속에서 일하고 먹고 마시고 누리며 사는 것이다(김성수,13-17).
헤벨(???)
헛되다(vanity)가 구약 전체에 59회 나온다. 전도서에 전체의 절반 이상인 38회 나온다. 물론 빈도수로는 전도서에서 ??? 62회, ??? 51회, ??? 51회, ??? 46회로 헤벨은 다섯번째 빈도이다(현창학,164). 헤벨(???)은 전도서 핵심어(key word)로 볼 수 있다. 헤벨은 vanity (헛됨)와 absurdity (부조리)로 번역된다. 전도자는 인생을 헛되고 부조리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생사화복을 정할 수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절대주권 하에 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주어진 삶을 받아 들이고 현재의 삶과 일을 누리고 먹고 마시고 과정을 즐기며 살아야 한다.
Carpe Diem 현재를 누리라
7:2절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한다.
Charles Wright 에 따르면 탈무드는 본 구절과 소위 carpe diem 단락(2:24-26등) 등과 조화를 얻는데 갈등을 겪었다(Tremper Longman,182). carpe diem 단락은 하나님 경외의 문맥 속에서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격려한다. 즐기는 것이 결코 궁극적 선은 아니다. 2:24-26에 제시된 상대적 선은 "이것 역시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라고 결론 짓는다.
산 자는 죽음의 빛 속에서 살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도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도서의 적용
현대 문화는 물질주의가 팽배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지식이 최고이고 완전한 진리는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1)모든 시대에 전도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보응을 인정하고, 하나님 경외를 말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2)현대는 개인과 공동체 관계가 재시험대에 있다. 전도서는 개인의 생의 존재적 투쟁을 말하고 개인의 생이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나, 개인의 복리가 공동체의 선 안에서 흡수 혹은 희생되지 않지만, 공동체가 잘못되면 개인의 복리는 안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3)비지혜서가 우리를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나,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문제를 제기하신 세상에서 신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안내서이다. 전도서는 하나님이 멀게 경험될 때 창조 안에서 삶과 일을 통한 인간의 역할의 가능성을 말한다.
(4)전도서는 복합적 사회와 문화적 환경을 반영한다. 이스라엘의 전통 즉 지혜와 군주제와 제의(cult) 등이 포함된다. 주변에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지혜의 전통이 있다. 헬라 철학도 배경으로 떠돈다. 현대의 복합적인 세상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내부 전통과 주변 문화들의 통합과 비평을 전도서를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다.
(5)전도서는 탐욕과 행복의 간섭(interference)을 말한다. 전도자(Qohelet)는 인간적 일과 노력이 인간이 의도한 행복을 오히려 막을 수 있음을 말한다.
(6)전도서는 진리와 지식에 인간이 접근하는 것이 제한적임을 말한다. 전도서는 인간의 지식은 일시적이라 말하나,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런 말을 진부하게 치부함으로 서로 극단으로 치닫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의 가능성과 능력을 과장한다.
(7)전도서는 수수께끼 같다. hebel의 히브리어 숫자 값이 37이다(A. Wright : E. Huwiler,175-7). 그런데 더해지지 않는 숫자들이다. 포스트모던 문서도 수수께끼 같다.
해아래 새것을 찾는 딜레머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전도자도 그 길을 걸었음을 말한다.
전도서의 구조
1:1-11 프롤로그
1:12-12:8 전도자의 지혜의 말들
12:8-14 에필로그
서두의 "헛됨"이라는 주제가 전도서 전체를 감싸는 골격을 형성한다(1:2; 12:8).
전도서 1-2장의 끝없는 환멸이 11-12장의 삶을 위한 건전한 교훈으로 이동하여, 성숙된 지혜가 인간 상황에서 찾은 타협의 발전을 보인다(niv study bible, 1006).
7장 구조
7:1-7 초상집으로 가라
1절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라
2-4절 죽음은 삶의 거울이다
5-7절 충고를 달게 받고 삶을 고쳐가는 지혜인이 되라
7:8-14 형통의 날에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 생각하라
8-10절 견디며 끝까지 이루어 가는 삶을 살라
11-12절 생명을 풍성케 하는 지혜를 누리라
13-14절 잘 될 때 기쁨을 누리고 ,어려울 때는 생각하라
7:15-22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
15-18절 과하게 의인이 되지 마라
19-22절 나 자신의 죄 됨을 보고 타인에게 관용하라
7:23-29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23-24절 지혜를 향하여 끝없이 탐구하라
25-26절 인간은 악하다
27-29절 하나님의 은혜 아래 인간의 죄성을 분별하라
6:12의 질문 "무엇이 선한지 누가 알겠는가?" 는 7:1-14 의 "선"에 관한 문제 제기로 볼 수 있다.
catch word 인 ??? (선, good/better)
는 7장에 15회, 1-12절에 8회 반복된다.
추가로 중요한 반복 단어는 ??? (vexation, 분노) 는 3, 9절에; ?? (heart, 마음) 은 2, 3, 4, 7절인데 특히 4절은 두번 반복된다. ??? ???
(house of mourning, 초상집) 은 2, 4절; ???? (fool, 바보)는 4-6절; ??? (wise, 지혜로운) 은 4,5,7,10-12; ??? (spirit, 영 ) 8-9절 은 ???? 라는 종결 운율과 함께 쓰였다(Roland Murphy,62).
1. 7:1a, 좋은 이름 --- 7:1b-4, 그러나 죽은 후이다!
2. 7:5-6, 어리석은 자가 아닌 지혜자에게 귀기울이라 --- 7:7, 그러나 이것도 헛되니 지혜자도 실패한다.
3. 7:8-9, 이상적 지혜는 자기 관리(self control)와 주의(caution) 이다 --- 7:10, 그러나 이것도 지혜롭지 못한 과거의 보수적 칭찬(praise)에 이를 수 있다.
4. 7:11-12, 지혜의 큰 가치 --- 7:13,14, 그러나 당혹스럽게도 하나님의 주권적 뜻은 선과 악 뒤에 있다. 그래서 인간은 균형을 잡지 못한다.
5. 전도자는 전통적 인과응보(15절) 설의 실패를 관찰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갈등장치(16-17절)로 이끈다. --- 인간의 태도의 얼굴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에만 있을 수 있다(18절).
6. 7:19, 지혜의 힘 --- 7:20-22, 그러나 의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21-22절의 권고 "너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신경쓰지 마라. 너도 똑같이 행한다" 와 같다.
7. 7:23-24, 지혜는 획득 가능하지 않다. 여기서 전도자는 지혜를 찾는데 실패했음을 인정한다.
8. 7:25-29, 최소한 전도자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 그것은 인간에 대한 결론이다(29절)(Roland Murphy,62) .
3.본문(전7:1-14) 주해
7:1-7 초상집의 교훈
1절 죽음후 이름의 무게
부자가 죽어서 시신에 비싼 기름과 방향제, 방청제를 발라도 추하고 악한 이름을 남기면 부끄럽고 누추한 죽음이다. 그러나 죽는 순간 좋은 평판과 이름을 남기면 초라하고 가난하게 초상을 치른다 해도 아름다운 인생을 산 귀한 죽음이다(E. Huwiler, 199).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인생을 살라
호랑이는 호피를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인생을 마칠 때 각자의 이름 값이 매겨진다. 그 이름값은 각자의 지위나 재산이 아니라, 그의 인격과 영향력에 의해 매겨진다(김성수,43). 죽음 이후에 남겨질 내 이름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현재를 살라.
예수님을 닮는 인격을 지금 세워 가라.
죽음 이전에 누군가를 행복하다고 단정하지 말라. 어떻게 끝마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Roland Murphy,63).
죽음은 인생의 억압과 허무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Tremper Longman III,182).
2-4절 죽음과 삶 사이에서
초상집에 가면 인생의 한계인 죽음과 대화할 수 있다. 잔칫집은 결혼이나 생일 잔치 같은 것이다. 잔칫집은 인생이 희극인 줄 착각케 한다. 산해진미와 노래와 춤은 고난과 아픔과 죽음이 타인의 것인양 나를 속이는 것이다.
2절
Charles Wright 에 따르면 탈무드는 본 구절과 소위 carpe diem 단락(2:24-26등) 등과 조화를 얻는데 갈등을 겪었다(Tremper Longman,182). carpe diem 단락은 하나님 경외의 문맥 속에서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격려한다. 즐기는 것이 결코 궁극적 선은 아니다. 2:24-26에 제시된 상대적 선은 "이것 역시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라고 결론 짓는다.
산 자는 죽음의 빛 속에서 살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도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잔칫집이나 초상집이나 틀린 것은 없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둘 다 축복하셨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첫 기적으로 잔치를 빛내셨다. 나사로 무덤에서 괴로워하시고 우셨다 (요11:33-35). 우리도 두 장소에서 모두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초상집의 가치는 그 자체로 교훈이다. 모든 인간의 끝이 여기 있다(Charles Bridges,135).
3절
웃고 있으나 마음은 슬픔에 잠겨 있을 수 있다. 기쁨의 끝이 슬픔이 될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슬픔의 경험은 유익을 낳을 수 있다. 슬픈 얼굴은 참된 기쁨을 감출 수 있다. 슬픔은 웃음보다 낫다. 웃음은 단순히 마음없는 들뜸이다(Roland Murphy,64). . 지혜자는 당대의 사람들의 전통과 갈등한다. 그래서 스스로 갈등을 겪는다.
슬픔이 아닌 분노 혹은 절망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kacas는 분노로 더 자주 쓰인다.
특히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에 분노로 쓰인다 (왕상14:9; 16:2)(Iain Provan,140).
인생의 경박한 자세는 현재의 억압과 미래의 죽음이 있다는 사실과 모순된다(Tremper Longman,184).
4절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4절).
마음은 인간의 관념(7:23), 사고(신7:17), 이해(왕상3:9)와 기억(신4:9)의 중심이다.
초상집의 죽음은 지혜자의 사고와 관심을 깨어 있게 한다. 어리석은 자는 영적인 문제(전2:14)에 장님이고 장님인 상태로 만족하고(잠언1:22), 머리가 비어있고(잠언18:2), 사회 혹은 공동체의 골칫거리(잠언14:7)이며 잔칫집에만 관심을 갖는다(Michael A. Eaton, 119-110).
웃음은 인생의 고난과 슬픔과 죽음을 망각하게 만드는 환락이다 (김성수,44).
거짓된 웃음과 비현실적 낙관주의를 벗으라. 고난과 슬픔과 죽음이 담긴 인생을 대면하라. 참된 기쁨은 깨어 있는 슬픔을 통해 얻는다.
궁극적 죽음을 묵상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나, 어리석은 자는 인생이 끝없이 지속될 것처럼 분별없이 산다 (Tremper Longman, 184).
죽음의 현실을 부정하고 어리석은 자는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한다. 이것은 전도서 전체의 carpe diem 단락과 긴장 관계에 있다. carpe diem 단락은 먹고 마시고 일하고 누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한다.
전도자는 혼란을 겪고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주어진 분복을 따라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먹고 마시고 일하며 누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항상 죽음과 함께 부활의 소망을 갖는다.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모든 것을 수용함으로 얻는다. 그리스도와 세례받은 때에 우리의 옛사람의 죽음을 경험했다. 고난과 슬픔과 죽음을 능히 이기게 하시는 부활과 생명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어진 인생을 누리라.
5-7절 듣는 귀
"지혜자의 책망을 달게 들으라"(5).
잠언12:1"경책을 사랑하는 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다. 그러나 훈계를 미워하는 자는 어리석다."
어리석은 자의 웃음 소리는 '솥 아래 타는 가시나무' 처럼 요란하나 곧 사그라진다 (6절).
주위에 충고와 조언과 쓴소리를 말해 주는 사람들이 있고 그 말을 달게 받는다면 그 사람은 복이 있다. 지도자나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속한 공동체도 복이 있다.
7절 지혜자도 실패할 수 있다. 개인적 억압이나 뇌물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 뇌 뇌물은 지혜의 전통에서 경계의 대상이고(잠언17:8;15:27), 율법이 정죄한다(출23:8;신16:19). 뇌물은 지혜자도 압도하는 유혹이 될 수 있다. 지혜의 효과를 항상 낙관해서는 안된다( Roland Murphy,65).
James Crensaw에 의하면 "지혜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지혜는 잔인한 힘 혹은 속임수에 의해 무력화 될 수 있다." (Tremper Longman III,187).
지금 우리 사회되 유전무죄 무전유죄 혹은 유권무죄 무권유죄의 냉혹하고 부조리한 (absurdity) 현실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돈과 권력 위에 계신 하나님의 의를 믿고 싶다.
7:8-14 잘되면 기쁨을, 어려우면 생각을.
8-10절
조급하면 일을 그르친다. 분을 내는 것은 무익하고 더 손해를 가져온다.
지혜자는 상황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좀더 긴 관점에서 기다리고 충분히 살핀 후에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하고 행동한다.
교만하게 분노를 나타내고 즉시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모습이다(잠언12:16;14:29).
8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용두사미 인생들이 많다.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 그러려면 겸손히 참고
견뎌 나가야 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을 시작보다 더 복되게 하셨다(욥기 1, 42장)(Charles Bridges, 144).
인내는 믿음의 아들이다(Charles Bridges, 146). 반드시 결말이 있다고 믿으면 서두르지 않는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둔다(시편126:5).
9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화를 내면 당신이 바보 임을 증명하는 것이다(Tremper Longman III,188).
결과 지상주의가 개인이나 사회를 황폐화 시킨다. 다급해지고 인간의 감정이 앞서게 된다. 분을 내는 것은 스스로 다스리지 못함이다. 과정을 중시하고 즐기는 개인이나 사회가 성숙하고 안정된 모습을 이룬다. 우리 사회와 개인은 '빨리 빨리' 라는 능률과 결과에 집착하는 것을 탈피해야 한다. 함께, 같이 가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도와주는 따뜻한 개인과 공동체로 변화되어야 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한다(엡4:26).
예수님이 안식일 논쟁으로 손마른 사람을 고치시는 것을 꺼려하는 회당안의 그들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시고 저희를 둘러 보셨다(Charles Bridges, 146). 그리고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다(막3:5). 거룩한 분노는 예수님도 내셨으나 죄를 짓지 않으셨다. 분노와 실수는 성급함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 혹은 글로 실수한다.
10절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전도자는 과거, 현재, 미래는 결국 똑같다(1:9; 2:16; 3:15)(Tremper Longman III, 189).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헛되다.
모든 시대에 투덜거리거나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햇빛을 보기 위하여 하늘에 뜬 흐려진 구름을 걷어 낼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게 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에 집중하자. 우리 자신의 일이 세계를 바꾸는데 별 영향을 주지 못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의 세대를 섬기는데 집중하자 (Charles Bridges,151).
과거에 대한 향수는 현재에 대한 불만족과 조급함과 교만에서 생기는 것이다.
과거는 내가 다시 불러 올 수 없는 시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다. 지금 이 시간도 내가 붙들 수 없다. 지금은 그저 나에게 주어진 기회이다. 지금 내가 그 기회를 붙들고 무엇인가 해야 한다. 지금은 과정이다. 건강한 과정이 쌓여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11절
"지혜는 유업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살아 있는 자는 햇빛을 볼 수 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자에게 지혜는 유익하다. 재산이나 가업을 물려받은 사람은 좀더 유리한 출발선 위에 선다. 그러나 물려받은 재산이나 가업을 얼마 못가서 날려 보내는 미숙한 자들이 많다. 지혜는 유업보다 더 든든하고 확실하며 지속 가능하다. 물질이 볼 수 없는 것을 지혜가 보게 한다.
일부 학자들은 지혜와 유산을 등가로 본다. 그러나 트렘퍼는 회의적으로 본다. 잠언이나 욥28은 지혜를 보석에 비할 수 없다. 아무것도 지혜의 영광과 비교 불가하다 (Tremper Longman III, 190).
12절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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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가 자신이나 타인의 목숨을 잃게 할 수 있다. 스무살 아기 엄마가 놀이 공원에 놀러 갔다. 생후 두달된 아기를 열시간 가량 혼자 방에 두고 간 것이다. 돌아오니 아기가 엎어져서 질식해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지혜는 생명을 지켜 준다. 지식이 더한 지혜는 더욱 힘이 있다.
트렘퍼는 지혜와 지식을 여기서 동의어로
본다. 그래서 지혜는 돈보다 더 훨씬 가치있는 것이다. 그러나 돈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Tremper Longman III, 191). 전도자는 장수하는 것에 특정한 가치를 두지는 않는다(E. Huwiler, 200).
13절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지혜자는 하나님이 행하심을 변개시키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과 함께 가고자 함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일하심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전도자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관찰하라고 촉구한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무력하다(Tremper Longman III, 191).
인생의 길은 항상 탄탄대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굽은 길이나 수렁이나 산 길이나 계곡이나 강이나 바다를 만날 수도 있다.
인생 길에서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고 사는 자가 복이 있다. 주어진 위치와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때로는 기다리고 막힌 길은 돌아간다.
영원한 생명은 좁은 길에 있다 (마7:13-14). 좁은 길은 지혜를 우상화하는 것과 지혜를 경시하는 그 양극단 사이에 놓인다(Iain Provan,143).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마5:4). 인생사는 진지하게 그 길을 가는 것이다.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인간은 연약하다. 생사화복을 미리 알거나 마음대로 조절 할 수 없다.
지혜자에게 조차도 미래의 길흉화복은 가려진 것이다(Tremper Longman III, 192).
전도자는 선악간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시편 1편은 인생의 두가지 길을 말한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
4.적용 및 결론
1)적용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한다. 인간은 스스로 누구인지 망각하며 살 때가 많다. 인간은 흙 즉 먼지에서 온 존재이다 (창2: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라 (창3:19). 욥은 자신의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잃고 자기 생일을 저주한다 (욥3:1-10). 욥은 하나님과 쟁변하고자 하나 후에 먼지와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 (욥42:6). 토기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따질 수 없다 (사45:9). 바울은 네가 누군데 하나님과 논쟁하려 하느냐 한다 (롬9:20).
인간은 스스로에게 무엇이 좋은지 모른다.
William Brown은 "전도자는 교회에 상기시키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은 죽음 전체를 대면하는 것이고.....부활의 희망은 죽음의 부정이 아니라, 죽음의 전 영역을 수용함으로 얻어진다. 전도자에게 죽음이 지혜 여행의 시작이듯이, 세례 안에서 죽음은 믿음의 여행의 시작이다" 했다 (Brown, Ecclesiastes, 75-; Sidney Greidanus, 165).
고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울타리로 돌아오게 하는데 쓰였다 (삿3:7-30;사40:1-2). 그와같이 전도자는 인간의 고난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역경의 때에 사람들이 상대적인 선을 바라볼 것을 말한다(Sidney Greidanus, 166). 신약에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한다 (마5:4). 바울 역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한다 (롬8:18-19).
전도서 7:9과 관련하여 야고보서 1:19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고 화는 천천히 내라 한다.
2)결론
하나님의 정하신 그대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자.
삶의 과정 속에서 누리며 즐기자.
제한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자.
행하지 않으면 아무일도 생기지 않는다.
행함 가운데 신중하고 지혜를 따르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자(12:13).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전도서 5:18 KRV).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고 과정을 즐기자.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고 신뢰하자.
내게 지금 주어진 삶의 몫에 감사하고 일하고 먹고 마시고 누리고 과정을 즐기자.
참고 문헌
김성수, 전도서.아가서 해설, 고신대원, 2016.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Ecclesiastes, Eerdmans, 2010.
Roland E. Murphy, Ecclesiastes wbc 23a, Word books, 1992.
Iain Provan, Ecclesiastes, Songs of song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Zondervan, 2001.
D.A.Carson, NIV study bible, Zondervan, 2000.
Tremper Longman III, Ecclesiastes NIC, Eerdmans, 1998.
R.B.Y.Scott, Proverbs/Ecclesiastes the anchor bible, 1965
R. Murphy and E. Huwiler, Proverbs, Ecclesiastes, Song of songs, Hendrickson, 2003.
Charles Bridges, Ecclesiastes Geneva series commentary, Banner of truth, 1985.
Michael A. Eaton, Ecclesiastes, IVP, 1983.
현창학, 구약 지혜서 연구, 합신대학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