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참 많았던 여름이 지나가고 완연한 가을이 왔지만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은지 가을비도 심상치 않게 내리고 있다. 며칠 남지 않은 자라섬 재즈페스티벌 기간에는 제발 비가 오지 말아야 할텐데. 아무튼 남자의 계절 가을이 왔다. 언제부터인가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마음이 허전한 것이 가을을 타고 있는 것 같은데 모름지기 음악 관련 일을 하니 계절도 좀 타야지 목석 같이 뻣뻣해서야 될까. 그래서인지 마흔을 훌쩍 넘은 아저씨이지만 남자의 자격 합창단을 보고 눈물도 흘리고, 가을만 되면 가슴 한쪽이 휑한 것이 삼시세끼를 거르지 않아도 배고프고 헛헛하다. 이렇게 센치해질 때는 그쪽으로 확 빠져 보는 것이 어떨까. 그래서 이 외로운 남정네의 옷깃을 여미게 해줄 가을 재즈 10곡을 골라보았다. 재즈의 특성상 유명 스탠더드는 수백수천가지의 버전이 있어 한곡만을 추천이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귀에 익숙한 곡을 우선적으로 선정했으니 좀 더 재즈로 위로를 받고자 한다면 곡명으로 검색해 같은 곡의 다른 버전을 찾아서 들어보길 권한다. (알파벳 순)
1. Autumn In New York / Kenny Burrell / Blue Lights Vol.1 & 2
재즈 관련 일을 하면서 뉴욕에 독신으로 사는 꿈을 간혹 꿔본다. ‘Autumn In New York’이 흐르는 공간에서 차가운 도시 남자가 되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가. 그래도 내 여자에게는 따뜻하겠지. 상상이 지나쳤지만 아무튼 가을-재즈-뉴욕을 한데 묶을 수 있는 명곡으로 ‘April In Paris’의 작곡자인 베논 듀크의 대표곡이다. 1949년 <더 보이즈>에 수록되었지만 우리에게는 리처드 기어와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2000년 영화 <뉴욕의 가을>로 유명하다
2. Autumn Leaves / Eddie Higgins Trio / Bewitched
이브 몽땅과 줄리엣 그레코의 노래로 유명한 샹송으로 조셉 코스마가 곡을 쓰고 프랑스의 시인 자끄 브렐이 가사를 썼다. 이후 1950년에 조니 머서가 영어 가사를 붙인 후 빙 크로스비가 노래해 큰 인기를 얻은 재즈 스탠더드로 한 소절만 들어도 낙엽 타는 냄새가 상상될 정도로 가을을 대표하는 곡이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해 연주자를 몰라도 앨범에 이곡이 수록되어 있으면 무조건 구매했던 기억이 있다. 캐논볼 애덜리의 알토 색소폰과 마일스 데이비스의 고독한 트럼펫 연주가 압권인 [Somethin' Else](1958)의 연주가 가장 유명하지만 편하게 듣기에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에디 히긴스 할아버지의 연주가 훨씬 좋다.
3. Black Coffee / Peggy Lee / Black Coffee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에 커피 전문점에서 테이크 아웃해서 마시는 커피 한잔은 마시는 사람뿐 아니라 보는 사람마저 따뜻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러다보니 커피 전문점에서는 재즈가 자주 흘러나오는데 이곡만큼 어울리는 곡도 없지 않나 싶다. 베니 굿맨 빅밴드에서 노래한 블론디 보컬의 간판주자 페기 리의 건조한 보컬이 인상적인 ‘Black Coffee’는 공복에 마시는 쓰디쓴 블랙커피 한잔 같다.
4. I’m A Fool To Want You / Billie Holiday / Beautiful Memories
가슴을 저미는 선율이 인상적인 이 곡은 패션제품 TV-CF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적이 있어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떠난 연인을 잊지 못하고 ‘당신 없이는 살아 갈수 없어요’ 라고 애타게 부르는 이곡은 특히 여성 보컬리스트들이 즐겨 부르고 있다. 재즈 보컬의 3대 디바 중 한명인 빌리 홀리데이는 곡절 많은 인생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허스키 보이스로 그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페이소스를 들려주고 있다.
5. It Never Entered My Mind / Miles Davis / The Essential Miles Davis
재즈 스탠더드의 명콤비 로렌즈 하트와 리처드 로저스가 1939년에 만든 명곡으로 재즈계 스타일리스트인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가 유명하다. 마일스가 예전에 연주한 곡이지만 1999년 리처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로맨스 영화 <런어웨이 브라이드(Runaway Bride)>에 삽입되어 다시 한 번 들려지기도 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과감한 연주가 장기이지만 이렇듯 발라드 연주에서도 자신만의 컬러를 보여준다.
6. Love Letters / Scott Hamilton / Back in New York
메일과 메신저, 그리고 휴대폰 문자로 소통하는 시대이지만 직접 쓴 편지만한 것은 없다. 그래서 이곡을 듣다보면 한편의 옛 흑백영화를 보는 듯하다. 애인과 헤어져 있어도 쓸쓸하지 않다는 내용의 발라드로 1945년 영화
의 주제가로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블론디 보컬의 대표주자 줄리 런던의 중저음 보이스가 유명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만큼 멋진 테너 톤을 가지고 있는 정통파 스콧 해밀턴의 연주는 어떨까.
7. My Funny Valentine / Chet Baker / Chet Baker Sings
가을에 어울리는 곡이 아니라 4계절 언제 들어도 늦가을을 연상시키는 곡이 바로 이곡이다. 1937년 <베이브스 인 암스(Babes In Arms)>에서 처음 소개된 후 수없이 많은 영화에 삽입된 곡으로 쳇 베이커의 중성적이면서 우수에 찬 보컬 버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영화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에서 맷 데이먼이 재즈 클럽에서 머뭇거리며 어눌하게 불러 다시 한 번 사랑을 받은 곡이기도 하다.
8. My Romance / Bill Evans / Waltz For Debby
앞서 소개한 ‘It Never Entered My Mind’를 만든 콤비 로렌즈 하트와 리처드 로저스의 곡으로 ‘당신만 있으면 된다’는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가 매력적이다. 보컬버전과 연주버전 모두 다양하지만 재즈 편성의 기본인 피아노 트리오(피아노-베이스-드럼)로 연주된 빌 에반스 트리오 연주가 가장 아름답다. 함께 연주하는 천재 베이시스트 스캇 라파로는 이곡을 연주하고 2주 뒤에 교통사고로 서른도 못되어 세상을 떠나게 된다. 발췌는 뉴욕 빌리지 뱅가드 클럽 실황작인 [Waltz For Debby](1961)이다.
9. 'Round Midnight / Dexter Gordon / Round Midnight
겨울이 가까워질수록 밤은 길어지는데 깊어가는 가을밤을 책임질 곡이 바로 이곡이다. 비밥의 혁신가이자 뛰어난 작곡 능력을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 델로니어스 몽크의 곡으로 인상적인 멜로디를 가지고 있어 수많은 연주자가 지금도 연주하고 있다. 실제 재즈 연주자(버드 파웰)의 에피소드를 가지고 만든 재즈 영화 <라운드 미드나잇(Round Midnight)>에 제목으로도 쓰였고, 테너 색소포니스트 덱스터 고든이 직접 연기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극중에서 연주하는 버전이다.
10. When I Fall In Love / Chris Botti / When I Fall In Love
사랑과 관련 있는 장면이 흐르는 곳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곡으로 1952년 영화 <분호작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영화에 삽입되어 인기를 얻었다. 특히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이 출연한 로맨틱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에서 셀린 디온과 클리브 그리핀의 듀엣 버전은 아직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당연히 재즈에서도 자주 연주되고 있는데 멋진 슈트를 차려입고 트럼펫을 연주하는 핸섬 가이 크리스 보티의 모습을 보고 반하지 않을 여성은 없으리라. [글: 김광현‘재즈 피플’편집장]
첫댓글 공복에 마시는 블랙커피를 즐기는 편인데 외로울 때 찐한 재즈음악까지 듣고 있으면 울 것 같은데요. 한바탕 울고나면 외로움도 해소 될까나요? 머쓱해져서 웃을수도 있겠네요. ㅋㅋ 어젯밤에 찾아서 들어볼 걸 그랬네요. ^^
에이, 나영님도 가을타시는구나. 다음에서 홍보하는 거라 다음뮤직에서 1곡씩 살 수 있을 겁니다.
난 가을을 타는 게 아니고 가을에 깔려 있습니다.
저는 가을 위에 떠 있는데요.^^
퓻~ㅋ...
가을이 되면 마음이 싱숭생숭 가슴도 벌렁벌렁
병일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럽니다.
똑같은 음악도 가을에 듣는 음악은 감동이 더 해요.
거 참 묘합니다. 선생님께서 소개하신 음악을
검색창에 딸각 해서 바로 들으렵니다.
그러니 사람이지요. 날씨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음악이 다 다르게 듣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