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북위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몇일 동안 워낙 정신이 없고 바빠서 글을 올리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아직도 차분히 컴퓨터앞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몇시간이 되지 않는 열악한 상황이라서 글을 올리는 것이 무척 힘듭니다. 이해 바랍니다.
이것은 지난주에 한참 토론을 했던 유정님과의 평양 토론문제에 대한 보충 설명의 성격도 띄지만, 여러분들에게도 고구려 대외관계의 일단면을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입니다.
나는 고구려가 북위와의 관계에서 결코 조공국이었다는 일본인들과 과거 우리 학자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고구려의 발견』에서 이미 밝혔듯이 고구려는 북위와의 관계에서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고구려가 북위를 지배했다거나, 종주국으로써 북위의 정치를 좌우했다는 야사류의 과장된 역사인식도 반대합니다.
고구려가 북위와의 관계를 다룸에 있어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쓰여진 기록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국인이 표현한 문장을 그대로 해석만 한다고 역사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쓰여졌는지, 당시 시대분위기가 어떠했는지, 과연 이 기록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의 입장에서 재해석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남긴 기록들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삼국사기 조차 중원인들이 남긴 책들을 보고 적은 것이 태반입니다. 어떤 사건의 경우 이해당사자는 서로 사건을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한쪽에서 말하는 자료만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사건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까.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기록에서 고구려측에서는 과연 어떤 입장이었을지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으로 다시 살펴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자, 각설하고 본격적으로 논의해보겠습니다.
먼저 다음 기록을 보자. 위서 100 고구려전의 기록이다.
<正始>中(504-507), <世宗>於東堂引見其使<芮悉弗>, <悉弗>進曰: 「<高麗>係誠天極, 累葉純誠, 地産土毛, 無愆王貢. 但黃金出自<夫餘>, 珂則<涉羅>所産. 今<夫餘>爲<勿吉>所逐, <涉羅>爲<百濟>所幷, 國王臣<雲>惟繼絶之義, 悉遷于境內. 二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是爲.」 <世宗>曰: 「<高麗>世荷上將, 專制海外, 九夷黠虜, 實得征之. 甁罄罍耻, 誰之咎也? 昔方物之愆, 責在連率. 卿宜宣朕旨於卿主, 務盡威懷之略, 揃披害羣, 輯寧東裔, 使二邑還復舊墟, 土毛無失常貢也.」
(해석 : 정시 연간에 세종이 동당에서 고구려사신 예실불을 만나니, 예실불이 말하기를
“고구려는 하늘과 같은 정서응로 여러 대에 걸쳐 충성하여 땅에서 나거나 거두어들이는 것을 조공에 빠뜨리지 않았었습니다. 오직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구슬은 섭라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 우리의 왕(문자명왕)께서는 끊어진 나라를 잇는 의를 생각하여 이들을 고구려 영토내로 옮겨 살게 했습니다. 지금 두가지 물건을 왕부에 올리지 못하는 것은 이들 두 도적 때문입니다.“ 그러자, 세종은 ”고구려가 대대로 상장의 직함을 갖기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구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지난날 공물의 허물은 그 책임이 물길과 백제에게 있소,. 곡 짐의 뜻을 경의 군주에게 전하여 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ꡓ)
자. 이 문장을 보면 그냥 해석하면 고구려가 조공한 기사로 보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북위의 입장에서 서술된 자료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위서는 위수 등이 편찬한 책으로 북제 시대인 551-55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수문제는 위수의 위서에 불만하여 위담수지추, 장덕원에게 서위를 정통으로 하는 위서를 편찬토록 명하여 위수의 위서를 크게 고쳤다. 수양제는 위담의 위서에 불만하여, 양소, 번징 등에게 재차 편찬케 하였으나 완성되지 못했다. 당나라 초기에도 후위, 북제, 주, 수, 양, 진의 6대사를 편찬케 하였으나 위서는 미완성되어 오대사만을 완성했는데, 그것은 그 만큼 위서가 고칠 것이 많았던 것이고, 그 만큼 문제가 된 부분이 많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이민족이 중원의 천자가 된다는 문제였고, 두 번째는 중국의 정통론에 입각해서 북위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북위의 대외관계 문제도 일부 개악을 면치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위서에서 고구려와의 관계는 특히 북위의 입장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문장이 살아남고, 자국중심적 문장으로 많이 수정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 위 문장을 다시 보면 북위는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는 고구려란 표현이 보인다. 그리고 위압과 회유로 고구려가 알아서 북위와 백제를 진압해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후대의 신라와 당과의 관계와는 현격한 격차를 보인다. 북위는 표현상 고구려가 조공을 하는 것으로 했지만, 실상은 만리장성 이동 지역에 대하여 전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남제서 58 고구려전
亦使魏虜,然彊盛不受制。虜置諸國使邸,齊使第一,高麗次之。永明七年,平南參軍顔幼明、冗從僕射劉思效使虜。虜元會,與高麗使相次。幼明謂僞主客郎裴叔令曰:「我等銜命上華,來造卿國。所爲抗敵,在乎一魏。自餘外夷,理不得望我鑣塵。況東夷小貊,臣屬朝廷,今日乃敢與我躡踵。」思效謂僞南部尙書李思沖曰:「我聖朝處魏使,未嘗與小國列,卿亦應知。」思沖曰:「實如此。但主副不得升殿耳。此閒坐起甚高,足以相報。」思效曰:「李道固昔使,正以衣冠致隔耳。魏國必纓冕而至,豈容見黜。」幼明又謂虜主曰:「二國相亞,唯齊與魏。邊境小狄,敢躡臣蹤。」
(해석 : 고구려는 위 오랑케에게도 사신을 보냈지만, 세력이 강성하여 남제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 위 오랑캐는 여러 나라의 사신 관저를 두었는데, 제나라 사신의 관저를 제일 큰 규모로 하고 고구려는그 다음으로 가게 하였다. 489년 북위의 연회에서 고구려의 사신과 남제사신을 나란히 앉게 했다.
(중간 번역 생략 - 남제 사신이 같이 앉게 한 것에 대해서 북위에게 항의하자, 북위 사신이 답하기를)
그 자리도 매우 높은 자리이니, 이것으로 갚음이 될 것이다.(此閒坐起甚高,足以相報), (번역 생략 - 그러자 남제의 사신이 답하기를) 두 나라가 버금가기는 오직 제나라와 위나라 뿐인데, 변방의 작은 오랑캐가 감히 신의 발굼치를 밟고 있다.)
자. 이 기록을 보면 남제 사신이 북위가 고구려를 우대하는 것에 대해서 질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북위는 고구려를 최상의 대우를 해주었다. 위나라가 주변국을 대우할 때 제나라가 1위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고구려와 같거나, 그 보다 못한 대접을 북위로부터 받았다. 고구려가 당시 북위와 제와 함께 동아시아 최강의 나라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5-6세기 동아시아에는 북위를 괴롭히는 유연을 포함한 4강체제였다.
이들 사서를 먼저 제시해본 것은 이러한 사료를 읽을 때 문장 그대로 해석도 중요하지만, 그 행간에 들어있는 의미를 읽고, 고구려의 입장에서 재해석해보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우리 학자들이 가진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중국측의 일방적 역사기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막상 우리측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측의 상황에 대한 적극적 해석을 시도하는데 주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위 기록들 속에서 고구려의 입장을 적극해석해 본 것이다.
자, 이제는 간략히 정리를 해보겠다.
435년 북위의 공격을 받은 북연은 국가적 위기에 몰리자, 고구려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자, 고구려에서는 갈로, 맹광 장군을 보내 북위의 왕과 백성들을 구해서 고구려로 돌아온다. 이때 북연의 수도인 용성 - 즉 지금의 조양에는 북위의 군대가 이미 와있었다. 그러나 북위의 사령관 고필은 고구려군의 위세에 놀라 감히 공격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북연의 멸망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정세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먼저 북연의 풍홍은 고구려에서 자신을 아주 낮게 대접해주자, 몰래 송(남조)나라에 사람을 보내 자기를 받아들여 달라고 했다. 송나라는 왕백구와 조차흥을 사신으로 파견해 이들을 맞이하게 하고, 아울러 고구려에게 풍홍을 송나라로 보내 주도록 요구했다. 장수왕은 풍홍이 송나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손수, 고구 등을 보내어 풍홍을 죽여 버렸다. 그러자, 송나라 왕백구는 휘하 7천여명을 거느리고 손수 등을 몰래 공격하여 손수를 사로잡고 고구 등을 살해했다. 이 사건이 벌어지자, 장수왕은 왕백구 등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그들을 체포해서 송나라로 압송했다. 송나라왕은 고구려의 뜻을 거슬리고 싶지 않아, 왕백구 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놓아 주었다. (송서 고구려전). 이 사건은 고구려가 송나라를 전혀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음을 물론 송나라가 고구려의 눈치를 본 사건이었다.
435년 북위는 조양에서의 수모를 만회하기 위해 고구려 정벌를 논의한다. 그러나 낙평왕 비(丕)의 주청으로 뒷날을 기다려 거병하자고 건의하여 중지하고 말았다. 북위로서도 먼저 군비를 충실히 준비하지 않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던 상대가 고구려였다. 북위는 고구려의 정세를 파악하고자 사신 이오를 파견한다. 이때 이오가 고구려의 인구가 위(조씨가 세운 나라)때보다 3배는 된다고 보고하여 고구려가 강성함을 북위에 알렸다.
439년 송나라는 고구려에게 북위를 함께 토벌하자고 요청한 사건이 벌어졌다. 장수왕은 말 8백필을 송에게 주고, 북방의 유연과의 교류를 중재하여 3국 동맹을 맺게 하였다. 북위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송나라는 외국에게는 처음으로 1등급인 차기대장군이란 관직을 수여하는 조치(자기들이 만든 자기들의 짓거리지만 어쨌든 주변나라를 보는 송의 입장에서 고구려가 첫 번째로 중요한 상대임을 인정하는 사건이다)를 취한다.
북위와의 결혼사건은 더욱 고구려의 위상을 잘 살펴보게 한다.
북위 헌문제(465-471)의 부인인 문명태후가 헌문제의 6궁이 채워지지 못했다고 장수왕에게 딸을 바치도록 요구했다. 이때 북위는 안락왕 진, 상서 이부(李敷)등을 보내어 국경까지 가서 폐물을 보내는 등 예의를 다했다. 그러나, 장수왕은 거절했다고 위서 고구려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헌문제 다음왕이 효문제는 고구려인인 문소태후와 결혼했고, 문소태후는 선무제(499-515)를 낳았다. 문소태후와 결혼한 것은 북위가 고구려에게 강압적으로 결혼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구려의 압력으로 결혼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문소태후의 오빠인 고조가 북위의 정권을 잡은 것이 그러한 예이다. 위서 정준 열전에 보면 오히려 고구려가 북위에게 청혼한 사실이 보인다.
延興(471-476년)末, 高麗王璉求納女於掖庭, 顯祖許之 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북위왕을 사위국으로 맞이하고 싶었던 것이며, 이것이 오히려 실현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정준은 평양성까지 왔다. 정준은 장수왕이 출가 문제로 망설이자, 여러차례 왕복했다. 북위가 시비를 걸자, 장수왕은 분노를 참지 못해 마침대 정준의 시종자들의 술과 음식을 끊었고, 북위의 사신을 핍박하고자 했으나, 해치는 것은 그만두었다. 고구려는 북위사신이라고 특별한 대접을 하지 않았다.
즉 헌문제의 결혼문제에서는 고구려의 반대로 양국이 혼인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그 다음 왕인 효문제는 고구려측의 요구에 의해 혼인이 강요된 것이다. 그리고 효문제의 부인인 문소태후와 그의 형제인 고조(高肇)와 그 일당들은 선무제 집권시기에 크게 세력을 키워 북위의 정치를 좌우한다.
더욱이 헌문제는 장수왕이 491년 죽었을 때에 소위모라는 흰색 모자와 포심의라는 상례복을 입고 동쪽 교외에 나가 애도를 표하는 의식을 거행했고, 519년 문자명왕이 죽었을 때에 북위에서는 권력을 쥔 영태후가 슬퍼하여 동쪽 사당에서 애도를 표시하고, 조문사절을 보냈으면, 508년에는 북위의 선무제가 청주에 고구려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라는 사당을 짓기도 했다. 이러한 행태는 북위가 고구려를 상국으로 모시거나 특별히 왕실간에 인척관계, 상하서열이 분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고구려는 북위의 왕이 죽었을 때 조문사절을 보낼 지언정, 사당을 짓거나, 애도식을 거행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고구려왕의 지위가 북위왕보다 낮지 않았음을 지적할 수 있다. 즉 선문제 등이 고구려와의 관계 - 처가, 강력한 우방세력 등 -을 고려하여 이런 행동들을 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북위의 변방을 공격하기도 했다. 대릉하 유역의 중심도지 조양에서 발견된 한기의 묘지명에는 평주사마 자의참군직에 있는 한상이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520년대에 포로로 잡혀왔다는 기록이 있다.
북위의 장군 강과는 도적이 횡행함에도 국가에서 도와주지 않아 자기가 거느린 자들을 데리고 537년경 고구려로 망명한 사건이 벌어졌고, 고구려는 북위를 계승한 동위의 요청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544년경 북중국 혼란으로 60만 이재민이 생겼는데,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10만 정도로 추정) 고구려로 망명했고, 552년 북제의 요청으로 5천호, 약 2-3만명을 돌려보낸 기록도 있다.
위서 봉의전에는 고구려 문자명왕이 병을 핑계로 사신으로 간 봉궤를 만나주려고 하지 않다가 겨우 만나주었다. 이에 앞서 거란이 북위 변방의 백성 60여명을 약탈하였고, 또 고구려의 호위하에 북위의 변방 백성을 약탈하여 동쪽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봉궤가 그러한 일에 대해 항의하자, 문자명왕은 거란이 노략해간 재물과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고구려의 이같은 중원 국가에 대한 태도는 수나라에게도 이어졌다.
수 문제의 조서 - 고구려는 해마다 조공하면서 번부라고 자칭하지만, 진정한 예절을 다하지 않고, 말갈을 못 견디게 괴롭히고, 거란도 금고시켰소, 여러해 전에는 비밀리 재물을 뿌려 소인들을 선동해 사사로이 弩手들을 데리고 갔고, 자주 기마병을 보내어 변방 사람들을 살해하기도 했고, 수나라의 사정을 비밀리 염탐하곤 했으며, 수 사신을 빈 객관에 앉혀놓고 삼엄하게 지키기도 했다.
결국 이런 관계가 영양왕이 기병 만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이다.
고구려와 북위와의 관계를 요약하면 대개 이렇다.
북연 분쟁 - 고구려가 북연을 구원, 북위는 고구려군의 위세에 눌려 싸우지도 못함
전쟁 논의 - 북위가 전쟁을 준비하자, 고구려는 송, 유연과 연결, 북위는 전쟁 포기
결혼 논의 - 북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강요. 문소태후가 선문제를 낳음,
고조는 문소태후의 오빠로 북위의 권력을 장악, 북위가 고구려 부마국임
사당 제사 - 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선문제(고조)는 상례복장을 하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식 거행, 문자명왕이 죽자 북위의 권력자 영태후가 사당에서 애도함.
508년에는 고구려 시조를 제사하는 고려묘를 청주(산동반도)에 세움
침공과 약탈 - 고구려는 수시로 북위의 변방(대릉하 유역의 조양)을 공격 백성을 약탈
사신 대우 - 주변국과 비교해서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1위국가로 대우함, 남제 등이 이를 항의하기도 함. 고구려는 북위사신의 접견을 거부하기도 함
상호 인정 - 북위는 고구려가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한다고 인정(만리장성 이동지역)
침략 의도 - 백제, 물길이 각각 고구려 공격 제안함. 북위는 반대로 고구려에게 알림
조공 문제 - 기록에는 고구려가 조공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그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기록의 문제 - 중국인에게 수치스러운 기록 삭제 - 위서 개찬(수문제, 수양제, 당태종)
첫댓글 북위에서 고구려의 시조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놀랍습니다. 다 짜르고 저 기록만 본다면 속국이라고 착각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