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그랜드캐니언, 통리 협곡의 봄
통리재에서 바라본 심포리 산비탈의 한 농가. 사방에 봄꽃을 거느리고 있다.
두메산골의 봄은 뒤늦게 찾아온다. 강원도 삼척과 태백의 경계를 이루는 통리 협곡에도 봄이 와서 모처럼 춘화세상이 펼쳐졌다. 그 봄향기를 이따금 영동선 기차가 덜커덩덜커덩 실어나르는 첩첩산중의 협곡마을. 통리 협곡은 해발 700여 미터의 거대한 바위산이 이른바 단층 작용에 의해 200~250미터쯤 직벽으로 갈라지고 깎여 가파른 계곡을 이룬 곳이다. 이를 두고 지질학계에서는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지만, 한국의 지형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새순 너머로 보이는 미인폭포 물줄기.
하지만 1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협곡을 샅샅이 훑어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먼저 협곡의 지형지세가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바위절벽인데다, 미인폭포라는 거대한 폭포마저 협곡의 접근을 막고 있다. 이 폭포의 물줄기는 오십천 최상류를 이루는데, 그 거센 물줄기가 협곡을 만들어낸 주역이기도 하다. 옛날 50평의 기암괴석에 50척 높이의 바위에서 물이 떨어진다 하여 오십장폭포라 부르기도 한 이 미인폭포는 심포리에서 구사리로 넘어가는 경계에 자리하고 있으며, 봄, 여름, 가을철 해 뜨기 전과 해 진 뒤에 폭포 주변에 따뜻한 바람이 불면 풍년이 들고, 찬바람이 돌면 흉년이 든다 하여 이 곳의 바람으로 그 해의 흉풍과 길흉을 점쳤다고 한다.
미인폭포 가는 길가의 산비탈에 군락을 이루어 핀 남산제비꽃.
협곡을 샅샅이 훑어보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미인폭포를 만나기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큰길(427번 지방도)에서 약간만 내려가면 만날 수가 있는데, 내려가는 길에 협곡의 진풍경도 만날 수가 있다. 바로 미인폭포 쪽으로 내려가다 혜성사 쯤에서 왼편으로 꺾어져 돌아가면 협곡의 일부 구간이 그 신비한 모습을 드러낸다. 더욱 다행인 점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그 일부 구간이 협곡의 ‘절정’이라는 것이다. 협곡 바위벽의 선명한 지층도 여기서 만날 수 있다. 붉은색이 감도는 거대한 바위병풍을 양쪽에 나란히 펼쳐놓은 듯한 그 웅장하고 신비한 풍경.
신리 초등학교 운동장에 마치 눈처럼 떨어져 쌓인 벚꽃잎(위). 벚꽃잎이 꽃비처럼 날리고 있다(아래).
노랗게 핀 꽃다지밭 아래로 보이는 신리 너와집 지붕.
미인폭포가 있는 협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이맘때면 숨은 꽃길이 된다. 진달래는 흔하게 피어 있고, 현호색도 무리지어 군락을 이룬다. 드문드문 노란색으로 피어난 회리바람꽃도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많은 꽃은 남산제비꽃이다. 남산제비꽃은 미인폭포 주변에서부터 협곡의 산비탈과 길가에 군락을 이루어 피어 있다. 개별꽃과 봄구슬봉이도 협곡으로 내려가는 산비탈에서 흔하게 만나는 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통리 협곡의 봄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역시 나무들의 새순이다. 큰나무는 큰나무대로 작은나무는 작은나무대로 꽃만큼이나 어여쁜 새순을 피어올린다. 이 새순은 하나같이 햇살을 받으면 투명하게 실핏줄같은 연하고 순한 잎맥을 드러낸다
이제 막 봉오리를 터뜨리는 붉은병꽃(위)과 조팝나무 너머로 보이는 황조리 성하밭의 외딴 산마루 집(아래).
황조리 덕지기 길가에서 만난 홍도화. 화려하고 관능적인 자태다.
산에는 어느덧 조팝나무꽃이 피어 꿀냄새를 천지에 풍기고, 붉은병꽃도 막 꽃봉오리를 열었다. 하천가에는 유난히 관능적인 자태를 뽐내는 붉은 꽃이 피어 눈길을 끄는데, 홍도로 보인다. 홍도화 핀 그늘에서 나는 이리저리 꽃을 살피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10년 넘게 직업 삼아 여행을 다녔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꽃은 처음 본다. 무릇 ‘본다’고 봄이라 했던가. 봄이 아니면 보지 못할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 글/사진: 이용한 http://blog.naver.com/binkond
첫댓글 사진을 여러장 보니 제가 꼭 저곳에 있는 기분이에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