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승리의 마차를 탄 앙리 4세, 루벤스 』

앙리4세
프랑스 국왕(1589∼1610)·나바르국왕(1572∼1610). 앙투안 드 부르봉과 잔 달브레(나바르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칼뱅 주의 교육을 받았고 제 3 차 종교전쟁(위그노전쟁) 때 신교도군의 총수로서 활약하였다. 1570년 생제르맹의 화의(和議)에 의해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의 화해가 성립되자, 72년 8월 프랑스국왕 샤를 9세의 누이동생 마르그리트와 결혼하였다. 1주일 후 성 바르톨로뮤의 학살사건이 일어나 궁정에 연금되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 뒤 탈출하여 신교로 복귀하였다. 국왕 앙리 3세의 아우 알랑송공이 죽자 왕위 계승인으로서 이른바 <3앙리의 싸움>을 벌여 89년 앙리 3세가 암살되자 비로소 앙리 4세로서 부르봉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살리카법전(法典)에 국왕은 가톨릭이어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으므로 93년 생드니성당에서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이듬해 샤르트르에서 축성식을 받은 뒤 파리로 입성하였다. 30년 이상이나 계속된 종교전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98년 신앙에 관한 평화 공존을 기조로 한 <낭트칙령>을 공포하고 왕국의 통일을 이룩하는 동시에 쉴리를 기용하여 경제·재정의 정비 및 재건을 꾀하였다. 1604년 폴레트법을 제정하여 관직의 매매와 세습제를 인정하고 프랑스 관료제의 근간을 굳혔다. 대외적으로는 사부아공으로부터 부르고뉴 남부지방을 양도받고 평화노선을 취하는 한편 에스파냐의 고립을 획책하였다. 1599년 마르그리트와의 결혼을 파기하고 이듬해 메디치가의 마리와 재혼하였다. 그는 많은 애첩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호색왕>이라는 별명을 남기고 있다. 1610년 5월 파리에서 가톨릭 광신자 라바야크에게 목숨을 잃었다.
------------------------------------------------------------------------
프랑스의 왕(재위 1589∼1610), 나바라의 왕(엔리케 3세, 재위 1572~1589).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정치
본문
부르봉왕조의 시조이다. 프로테스탄트로서 위그노전쟁에서 활약, 1572년 신구 양 교도의 화의를 다지기 위하여 프랑스 왕 샤를 9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결혼하였다. 그 직후인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의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궁정에 연금되어 구교로의 개종을 강요받았으나, 4년 뒤인 1576년 2월에 탈주하여 고향인 베아른으로 돌아온 뒤 다시 신교도의 수령으로 활약하였다. 성격이 호쾌 활달하며 무술 ·전술에도 뛰어나 1585년 이후 신교도군을 이끌고 북상, 1589년 앙리 3세가 죽은 뒤 즉위하여 부르봉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구교도는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아 에스파냐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다.
1593년 다시 개종하여 가톨릭 세력과 화해하였으며, 1598년 낭트칙령(勅令)을 발하여 신교도의 권리도 보장함으로써 30년간 계속된 프랑스의 종교내란을 종식시켰다. 또한 그해 베르뱅조약을 맺어 에스파냐와도 화의하였다. 정치에서는 신교도인 M.B.쉴리를 기용하여 재정 ·농업 ·목축 ·교통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캐나다에 최초의 식민지 퀘벡을 개척하였다. 1610년 프랑스의 안전과 영구평화의 유지를 위하여 그리스도교 국가의 국제연맹을 결성하려는 이른바 ‘대계획’을 추진하였다. 대계획의 날짜를 5일 앞둔 5월 14일 쉴리 공작에게 문병가는 도중 파리 페롱네리 거리에서 구교도 광신자의 칼에 찔려 죽었다. 비극적인 죽음으로 생을 마쳤으나,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왕의 한 사람으로서 수많은 로맨스을 남겼다.
---------------------------------------------------------------------
16세기 프랑스에서 신·구 교도간의 종교적 내란으로 시작된 위그노전쟁(Huguenots Wars/1562∼98년)은, 독일의 30년 전쟁과 마찬가지로 외세의 개입과, 제후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쉽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전쟁의 구교측 우두머리는 기즈가(Guise 家), 신교측 우두머리는 나바르왕국의 엔리케 3세(앙리 드 나바르 /Henri de Navarre/1553 ~ 1610), 여기에 양측을 조정하면서 실익(實益)을 챙기기에 동분서주 했던 것이, 마키아벨리스트라고 소문난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1519 ~ 1589) 등이였다.
구교측 우두머리가 된 기즈가문은 로렌家의 L 클로드가 프랑수아1세를 위하여 세운 전공으로 기즈공작이 되었고(1527), 그의 아들 L 프랑수아는 그의 질녀가 되는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메리를 프랑스왕 프랑수아 2세와 정략결혼시키고, 추기경인 동생 기즈 샤를과 실권을 장악, 1562년 3월 1일, 바시에서 신교도들을 학살하여 위그노전쟁의 막을 올렸다.[소위 바르톨로뮤의 대학살] 그러나 그는 오를레앙에서 신교도에게 암살당하고(1563), 그 역할은 그의 아들 기즈공작 앙리가 이었다.
구교측에 도전한 신교파의 우두머리 부르봉가문의 앙리 드 나바르는 베아른 태생으로, 그의 본거지 나바르(공국)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바스크지방에 있었는데, 이곳의 바스크(Basques) 인들은 피레네산맥의 동서 사면(斜面) 산간지대에 거주하고 있었던 매우 보수적인 사람들로서, 인도·유럽어계와는 구분되는 어계(語系)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기원(起源)은 확실치 않다고 한다. 머리에는 베레모를 쓰고, 남편이 아내의 출산을 흉내(?)내는 의만(擬娩), 붉은 띠와 춤과 음악 등의 풍습이 특이했고, 매우 용감하여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그들만의 자치 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에스파냐 정부는 이들의 자치를 허용하고 있다. 예수회를 조직한 로욜라가 스페인 사람으로 스페인령 바스크에서 태어났다면, 앙리 드 나바르는 프랑스인으로서 프랑스령 바스크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의 행동에는 바스크인들의 기질과 닮은 점이 많았다고 한다.
피렌체의 상인군주 메디치가문 출신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앙리 2세의 왕비로서, 앙리 2세가 토너먼트 경기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1559), 그의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였으나 기즈가문에 눌려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프랑수아 2세가 즉위 1년만에 죽고, 차남 샤를 9세가 열 살의 나이로 즉위하자(1560) 그 모후로서 섭정(攝政)이 되었다. 그녀는 철저한 구교옹호자였고, 동시에 마키아벨리즘의 신봉자였다.
1589년 앙리 3세가 후사(後嗣)없이 광신적인 도미니크파 수도승에게 피살되고, 앙리 드 나바르(나바르왕 엔리케 3세)가 스스로 프랑스 왕이라고 선언(1589), 이로써 발루아왕조는 단절되고 부르봉왕조가 시작되었다.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앙리 4세는, 이름만 왕일 뿐, 프랑스 내에서 그를 지지한 곳은 1/6에 불과 하였고, 그가 1572년 정략적으로 결혼하였던 아내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별거 중이었다. 따라서 풍채 좋고, 용감하고, 지적이고, 전쟁경험 많은 35세의 앙리 4세는, 돈도 병사도 아내도 없는 왕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기에, 병력을 모아 구교도가 지키는 파리를 공격했으나, 스페인의 지원을 받은 파리가 완강하게 저항, 패배하고 말았다. 이래서 그가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선택한 것은 카톨릭으로 개종, 이런 변신이 적중하여, 파리에서는 성문을 활짝 열고 그를 마지하였고, 성대한 대관식을 가질 수 있었다(1594)
그러나 앙리 4세의 이런 급작스런 개종(改宗)에 구교측에서는 그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신교측에서는 구교에 대한 적개심(敵愾心)을 더욱 촉발(觸發)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런 험한 분위기가 내란(內亂)직전에 이르게 되자, 그 해결책으로 내 놓은 것이 낭트칙령(Edit de, Nantes /1598)이다. 낭트칙령이 정략적이라고는 하지만 구교의 국가에서 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와 공직(公職)취임을 허용한 것 등은 이들을 배려한 일종의 관용(寬容)으로서, 국내의 종교적 분쟁내지는 정치적 분열을 막고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음은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국왕의 개종이나, 신교도의 배려만으로 만사가 해결되었는가? 결코 그렇지는 못했고 내연(內燃)의 불씨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위그노 전쟁은 프랑스의 변화를 재촉하였고, 질서와 평화를 바라는 소리도 높았다. 군웅 할거의 난세에서 평화와 질서를 찾는 길, 그것은 강력한 힘을 가진 자를 구심 체로 하여 모일 수밖에 없었고(統一), 그 구심체가 국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