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화(2)
- 빌립보서 2:12-18에서의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진의 -
전철 안에서 한 여자분이 승객들을 안타깝듯이 여기는 표정 속에서 참으로 간절함으로 전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이런 저런 죄의 악함에 있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승객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의식하며 하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기도생활을 열심히 잘해야지 기도생활을 잘하지 않으면, 또는 이런 저런 신앙생활을 열심을 갖고 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그러면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잘하지 않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속고 있다고도 말하였습니다. 이 여자분의 말을 들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는 신자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므로 죄에서 구원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나라인데, 기도생활을 한다거나 이런 저런 신앙생활을 잘해야지 이러한 것이 있거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못하는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 되는지요.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그가 주로 받아 섬김에 있는 예수님에 의해서 죄에서 구원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그가 섬기는 주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만일에 교회 연합에 함께 하지 못하고 예배에 참여를 갖지 못하고 기도생활을 하지 못했으며 성경을 읽고 그 묵상에 있지 못했으며 전도생활을 하지 못하고 성도의 친밀한 교제와 봉사에 있지 못하는 등 이런 저러한 신앙생활을 전혀 갖지 못하였다고 하면 그것이 없는 것이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는지요. 혹자는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지만, 지식의 믿음으로만 갖고 있고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힘써 이루어 가는 행함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니 속지 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런 저런 악한 죄에서 벗어나는 변화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하나된 것에 있는 변화의 모습이 있어야 할 것이라며,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이 이렇고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왜 이렇게 알고 있는지요. 이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구원의 시작으로 생각하며 이때부터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자신의 구원을 힘써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온전함에, 구원의 완성에 이를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감에 있는 변화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다면 이는 그의 구원을, 믿음을 의심할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한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가 지닌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되는 것이라면서요. 그래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명분으로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이 행위에 있는 것을 구원을 이룸의 과정에 있는 '성화'로 말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을 이루신 의로움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구원의 은혜가 임한 자만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이 구원에 우리가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며 그런 우리 안에 성령을 내주하게 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론적 섭리를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아들과 같이 될 수 있도록 정하시고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씀으로 하십니다(롬 8:31). 우리가 구원의 예정에 있으며,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이 있으며, 그리고 영화에 우리가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이루신 대속의 효력과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이 죄로부터의 구원을 교회는 칭의와 함께 성화로 말해왔습니다.
칭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신 대속의 은혜를 통해서 나타내신 구원의 효력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난 자인 우리에게 영원히 행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죄에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는 하나님의 의는 완전한 의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의에 두심으로 우리에게 있는 모든 죄로부터의 죄책을 없애주십니다. 그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두심으로 우리에게 있는 모든 죄로부터의 오염[부패]에서 깨끗한 자로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죄 없다 하십니다. 이것을 성화로 말합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완전한 의이며 이 의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우리를 거룩하다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 또한 완전한 거룩이며 이 거룩이 우리의 모든 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에 나타내시고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을 봅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며 또한 거룩하다 하시는 구원을 언제나 이루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화는 칭의라는 용어와 함께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화를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으며, 이를 우리가 점진적인 진행에 의해서 변화되어 가는 것에서 보려고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의 과정에 있다거나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진행시켜 나가신다는 말을 사용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진 구원의 목표를 성령께서 진행시키시는 것에서입니다. 즉 성령께서 일해 나가시는 구원 사역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구원의 시작과 그 과정과 마지막이 모두 성령의 구원 사역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게 전적으로 성령께서 해나가시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을 말하면서, 그래서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 오직 믿음에 의한 성화를 말하면서, 영단번의 성격으로 말하는 칭의와는 다르게 성화는 점진적인 과정에 의한 변화의 성격으로 말하는 것은 구원의 본질, 그 진정성을 곡해하고 있는 것이며 왜곡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성경 본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 요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오늘 채택한 성경 본문에서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2-18)
이 성경 본문을 가지고 대개는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것으로서의 성화를 말하는 근거 구절로 빈번하게 삼습니다. 과연 그럴 수 있는 것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이 구절을 성화의 근거 구절로 말하는 것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를 '우리가 받은 구원을 더욱 온전히 이루어가라(만들어가라)', 그래서 '우리가 받은 구원을 힘써 완성시켜 나가라'는, 또는 '힘써 구원의 완성의 자리에까지 나아가라'는 뜻에서 한 것으로 이해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갈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서 구원을 이룸으로써의 성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 것인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문맥을 통해서 앎으로써 사실은 쉽게 풀어집니다. 바울이 말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이 구절만 가지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빌립보교회에 권면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진정한 의미는 바울이 빌립보교회의 신자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이 늘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따라 주었다는 것을 기억시키면서, 이제 자신이 비록 그들을 떠나가게 되더라도 그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자인 것을 주지시키고 그런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옳은 일인 구원의 복음에 지속적으로 서나가며 또한 이를 전하는 일에 더욱더 힘써 주기를 바란다는 권면을 하는 것으로 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 까닭은 그들 속에서 그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 일을 해 나가실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그 일을 이루심으로 온전(완성)케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빌 1:5-6)
12절인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내가 함께 있을 때 항상 순종한 것같이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 문구를 가지고 마치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 가르쳐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듯이 설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자율주의(自律主義)의 구원관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두려움과 떨림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두려움’을 뜻하는 말은 ‘놀람’, 혹은 ‘공포’, ‘두려움’이라는 뜻과 함께 ‘공경’, ‘존경’, ‘경외’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본 절에서는 단지 큰 무서운 일을 겪는 일로 인하여 갖는 공포나 두려움의 의미로서가 아닌 하나님에 대한 큰 경외심에 있는 것에서 갖는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떨림’을 뜻하는 말은 ‘떨림’, 공포‘, ’두려움으로 전율함‘을 의미하는데, 이 단어 또한 하나님을 높이 경외하는 마음에 있음으로 갖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빌립보교인들 가운데 영적으로 역사하고 계시니 만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확고한 까닭입니다.
이것은 본 절에서 가장 문제시되고 있는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말에서도 확인됩니다. 여기서 ‘이루라’는 말에 해당되는 말은 ‘완전히 일하다’, 즉, ‘완수하다’, 함축적으로 ‘마치다’, ‘만들다’, ‘일으키다’, ‘(행위를)행하다’, ‘수행하다’, ‘성취하다’ 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하나님이 거저 주신 구원에 온전히 있게 하여 나가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어지는 그 다음 구절인 13절과의 연계에서 잘 나타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서 역사하시므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가지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구절에서 보는 대로 12절에서의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에서 ‘이루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 안에서 계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품도록 그들의 마음에 소원을 일으키시고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여 나가게 하실 것이란 의미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서 그 해야 할 일에 더욱더 힘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3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하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빌립보교회의 신자들 안에 계시면서 그들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일으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해 나가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신자들에게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행하여 나가시는 구원의 복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지금 자신들이 하나님 앞과 하나님이 하실 일인 구원에 놓여져 있으므로, 마땅히 이런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잘 이해하고 그 구원에 지속적으로 있으면서 그들에게 맡겨진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해 애씀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선한 일을 시작해 나가신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빌 1:5-6). 그럼으로써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실 일을 정하신 그 계획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방에서 모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 부르신 모든 자들로, 곧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모두를 다 하나님의 아들들로 통일을 이룰 것입니다(엡 1:4-5; 9-10).
그렇다면 바울의 가르침은 소위 점진적 구원의 과정으로서나 점진적 변화를 뜻하는 성화적 개념의 차원에서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복음으로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구원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그 구원의 복음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경외함에 그들의 믿음이 지속적으로 잘 서나갈 수 있게 하실 것을 말하는 것에서 권면하는 것에서 하시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처음 복음이 주어진 때부터 그 이후 빌립보교회 신자들에게서 있어 온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그들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 것이었으며, 이것으로 큰 경외하심을 가지고 빌립보교회가 주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복음에 지속적으로 견고히 잘 서나가야 할 것임을 권면하는 것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빌립보서 2장 12-13절은 하나님께 순종하여서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구원, 또는 인격, 성품, 삶을 얼마나 더 온전히 만들어가야 할 것인지를 말하는, 그래서 마침내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가야 할 것을 말해주는 성화를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4-16절에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에서 말하고 있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흠 없는 자녀로’란 표현도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것에서의 성화 개념에서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과 다툼에 있으며 마음이 비뚤어지고 완고한 사람들이 가득 찬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그리스도에 의한 생명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에 있으면서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에 두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져다 준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으며 하나님이 그 선한 일을 끝내실 것에서 하나님의 보호 속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에 있는 우리의 믿음이 보존되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빌립보서 2:12-18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