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어 버리는 반전도형의 詩, 그 날이미지를 만나다
아이와 망초
오규원
길을 가던 아이가 허리를 굽혀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돌이 사라진 자리는 젖고
돌 없이 어두워졌다
아이는 한 손으로 돌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를 몇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날개를
몸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허공은 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웠다
아이의 손에 멈춘 돌은
잠시 혼자 빛났다
아이가 몇 걸음 가다
돌을 길가에 버렸다
돌은 길가의 망초 옆에
발을 몸속에 넣고
멈추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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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 오규원의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를 읽고 있다. 연 구분 없는 원시(原詩)를 독해 상 4개의 연으로 구분 해 보자. 아이가 던진 돌이 사라진 자리가 슬픈 눈물에 젖으면서 이내 공허한 어둠이 깃든다. 정든 돌을 떠나보내야 하는 구멍 난 자리는 슬픔의 눈시울이 이내 붉어진다. 허공으로 수직을 반복하는 돌멩이에서 시인은 ‘숨겨진 날개의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이는 어쩌면 ‘루빈의 술잔’에서 만나듯 ‘반전도형’의 시 쓰기 방법이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이미지 작업에서 시적 대상의 중심을 주변의 자리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던져진 돌의 은유가 고스란히 환유로 이행되면서 말 그대로 ‘환상적인 날(生)이미지’로 직조되고 있는 것이다.필자는 이를 착시의 시학이라 부르고 싶다.
2.
2연에서는 그러한 ‘날(생)이미지’가 더욱 도드라진다. 돌멩이가 날개를 제 몸속으로 드리우며 날아 오르내린다며 시인은 능청그럽게 호들갑을 떤다. 수직운동을 되풀이 하는 돌멩이에서 ‘숨겨진 날개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감각이 일급 화가의 터치(touch)처럼 경이롭고 싱그럽다. 이 시가 오롯하게 담겨있는 오규원의 『새와 나무』를 읽어 본 독자들은 그에게 있어서 시는 ‘허공(虛空)이고 땅이고 사람’임을 간파 할 것이다. 그렇다. 『새와 나무』에 묶여진 모든 시들은 접속조사 ‘와/과’로 조합 된 명사 두 개를 테마로 삼고 있는데, 이 이음매로서의 ‘사이’는 비어있음이요, 그것은 곧 침묵이자 허공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허공은 부재(不在)하는 존재요 존재하는 부재일터. 그것은 곧 반전도형의 착시에서 시의 환유적인 배경으로 이미지화 되고 있으므로.
3.
3연을 위와 같은 ‘날(生)이미지’ 입장에서 계속 더듬어 보자. 오규원의 ‘허공’은 부재(不在)하는 존재요, 존재하는 부재‘라 했던가? 곧 허공은 우주이리라. 그러므로 허공은 돌멩이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우고 있지만 지웠다는 그 사실 자체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터이다. 아이가 무심코 허공에 던진 돌멩이는 우주의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결국 시적 화자인 아이의 무심한 행동은 전연에서 보듯 젖은 슬픔의 자리를 만들어 내더니, 존재와 부존재를 깨닫게 하고, 허공과 돌의 조우를 날(生)이미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무한한 인과(因果)의 사슬을 통해 존재와 부존재의 동일성이라는 우주에서의 형이상학적 깨달음이 시적 울림으로서 알레고리화 되고 있다.
4.
귀결연에서도 시인은 허공에서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가는 돌멩이에서 ‘몸속에서 돋아나는 발’을 보고 있다. 그 돌이 망초옆에서 멈추어 설 때, 시인은 돌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발을 보고 있지 않는가? 날(生 )이미지의 현장이다. 반전도형의 착시적 인식으로 시적대상을 관찰하는 독특한 자세는 곧 오규원의 시적 자화상이다. 시적 대상의 중심을 주변의 자리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이미지가 스스로 사고하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철저히 관념을 배제한’ 시 쓰기는 시 언어에 대한 예민한 관심의 소유자로서 ‘현대 시사에서 ’날(生 )이미지‘를 창조한 견자(見者)라고 칭송받는 이유이리라. < 㥁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