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7리, 예안현(禮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51리, 남으로 안동부 경계에 이르기까지 41리, 서로 풍기군(豐基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북으로 풍기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3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내이군(奈已郡)이다 내(奈)는 날(捺)로 된 것도 있다. 신라(新羅) 파사왕(婆娑王)이 취했고, 경덕왕(景德王)이 내령군(奈靈郡)이라 고쳤다.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강주단련사(剛州團練使)라 고쳤고, 현종(顯宗)은 길주(吉州)에 귀속시켰더니, 인종(仁宗)이 순안현령(順安縣令)이라 고치고, 고종(高宗)이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인준(金仁俊)이 살고 있는 시골이라 하여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시켰다.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세조(世祖) 3년에 순흥(順興)을 없애버리고, 마아령(馬兒嶺) 아래 물 동편 땅인 부석(浮石)ㆍ무짐이[水息]ㆍ관천(串川)ㆍ파문단(破文丹) 4리(里)를 끊어서 이 군에다 귀속시켰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내이(奈已)ㆍ내령(奈靈)ㆍ강주(剛州)ㆍ순안(順安)ㆍ영주(榮州)ㆍ귀성(龜城) 【성씨】 본군 민(閔)ㆍ우(禹)ㆍ애(艾)ㆍ팽(彭)ㆍ동(董), 고(高) 내성(來姓)이다. 연(延) 촌성(村姓)이다. 정(鄭) 봉화(奉化) 김(金) 영월(寧越) 전(全) 정선(旌善). 【풍속】 풍속은 검소하고 진솔함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 인물은 번성하고 많았다 문헌(文獻)의 제민루기(濟民樓記). 【산천】 철탄산(鐵呑山) 군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귀산(龜山) 군의 서남 1리에 있으며, 군의 옛 이름 귀성(龜城)이 이에 말미암았다. 학가산(鶴駕山) 군 남쪽 40리에 있다. 봉황산(鳳凰山) 군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순흥에 속하였다가 이제 이 군에 귀속되었다. 마아령(馬兒嶺) 군 북쪽 36리에 있는데, 길이 심히 험하였으며, 충청도 영춘현(永春縣)으로 가는 길이다. 관적령(串赤嶺) 군 북쪽 33리에 있다. 방하수(防河藪) 군 서쪽 2리에 있다. 덕산수(德山藪) 군 남쪽 3리에 있다. ○ 이 고을은 본래 수재를 근심하였는데, 하륜(河崙)이 군수가 되었을 때, 흙을 쌓고 나무를 심어 이 두 수(藪)를 만들었다. 그 뒤에 백성들이 그 이익을 힘입었다. 임천(臨川) 군 서쪽 3리에 있다. 풍기군의 남북쪽 냇물과 옛 순흥(順興) 동쪽 냇물의 하류로, 귀산 밑을 지나 남으로 흘러서 사천(沙川)에 이르러 합하여 예천군(禮泉郡)의 사천(沙川)이 되었다. 사천(沙川) 군의 동쪽 15리에 있으며, 봉화현(奉化縣) 물야계(勿也溪) 하류이다. 『신증』 봉산(烽山) 군 동쪽 15리에있다. 연화산(蓮花山) 군 남쪽 15리에 있으며, 백병산(白屛山) 군 북쪽 50리에 있다. 풍락산(豐樂山) 군 동쪽 56리에 있다. 담보산(韂甫山) 군 북쪽 5리에 있다. 백령(白嶺) 군 남쪽 15리에 있다. 병령(竝嶺) 군 동쪽 20리에 있다. 장암천(藏巖川) 군의 남쪽 12리에 있다. 초수정(椒水井) 군 북쪽 42리에 있다. 【토산】 종이[紙]ㆍ잣[海松子]ㆍ인삼(人蔘)ㆍ송이[松蕈]ㆍ꿀[蜂蜜]ㆍ옻[漆]ㆍ은어[銀口魚]ㆍ지황(地黃)ㆍ복령(茯苓)ㆍ왕골[莞草]ㆍ석이버섯[石蕈]. 【성곽】 귀산성(龜山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2백 81척이요, 높이가 9척이며, 그 안에는 우물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성내산(城內山) 봉수 군 북쪽 14리에 있다. 동으로는 안동부(安東府) 내성현(奈城縣) 당북산(堂北山) 봉수에 응하고, 서로는 풍기군(豐基郡) 망전산(望前山) 봉수에 응한다. 【누정】 자민루(字民樓)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선덕(宣德) 정미년에 군수 권상(權詳)이 세웠다. 제민루(濟民樓) 귀산(龜山) 남쪽에 있다. 선덕 계축년에 군수 반저(潘渚)가 세웠으니, 곧 의학루(醫學樓)이다. 교수관(敎授官) 문헌(文獻)이 기(記)를 지었다. 소루(小樓) 객사 남쪽에 있다. 천순(天順) 년간에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세웠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記)에, “죽령(竹嶺) 남쪽에 자리잡은 고을 중에 영천이 제이(第二)가 된다. 그 산천은 밝고 빼어났으며, 그 고을 터는 상쾌하고, 그 백성의 풍속은 검소하고 순박하였다. 이 고을에 원으로[製錦] 오는 이가 가끔 군자(君子)가 많았으나 그 중 남의 이목에 표표히 뛰어난 이는 하호정(河浩亭)ㆍ정습인(鄭習仁)ㆍ최원부(崔元傅) 세 사람뿐이었는데, 지금의 수령 오천(烏川) 정 선생(鄭先生)도 역시 그들과 같이 칠 수 있는 이었다. 그는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대부(臺府)를 사직하고 이 고을을 맡았다. 무릇 그의 시설한 것은 마치 현보(縣譜)를 가진 듯하거니와, 공경으로써 윗사람을 받들고 따사로움으로써 백성을 사랑하고, 정직함으로써 간사한 자를 다스리었다. 넉넉한 자질로 다스리기 쉬운 백성을 교화하니, 비유하건대, 소백정[庖丁]이 날선 칼날로 소뼈 사이를 쳐서 소를 잘 잡듯 하였으니, 어찌 어긋날 걱정이 있겠는가. 1년이 되지 않아 경치가 잘 되고 백성이 화락하였다. 한가한 날 자민루(字民樓)에 올라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 고을은 사신ㆍ빈객이 죽령을 넘어 왕래하는 요충이다. 사신이 있으면 반드시 빈좌(賓佐)가 있다. 매양 뜨거운 여름을 당하면 집이 찌는 듯 답답하여, 마음을 맑은 바람에 씻어 번민함을 버리려고 생각할 적에, 사신은 이 누(樓)가 있지만 빈좌들은 어디에 거처할 것인가. 이것이 어찌 하나의 결함이 아니겠는가.’ 하고 드디어 사방을 둘러보다가 동남쪽 구석에서 쓸모없는 집 한 채를 얻었으므로 이에 이를 개척하여 새롭게 하되, 그 기둥을 약간 높이고 곁에는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아래에는 땅을 파서 못을 만들어 두어 말[斗]의 고기를 넣고, 못 안에 있는 섬에는 참대[苦竹] 여덟 아홉 그루를 심고 잡꽃을 그 사이에 간간히 심었더니, 난초는 그 기슭을 덮고 부용은 그 물결을 가렸다. 벽을 바를 적에 내가 가서 올라보니, 소나무는 죽죽 벌였고 울타리는 한가했으며, 푸른 이랑 누런 두렁은 수를 놓은 듯 엇갈리어 준조(尊俎)에 빛났다. 뽕나무밭을 매는 자와 농사짓는 이들이 그늘에서 쉬지는 못하지만 소장(訴狀)을 가진 이는 장애될 근심 없어, 산업을 권면하고 농사를 처리하는 정치에 도움됨이 적지 않았다. 이에 잔을 들어 주인에게 축하하며 말하기를, ‘세상의 수령(守令) 가운데, 게으른 이는 남을 의지할 뿐 스스로 진작하지 못하니, 비록 관청이 퇴락해도 받치고 붙들어 그냥 세월만 보낼 뿐 손 하나 감히 놀리지 못하오. 그리고 강한 이는 그 지혜를 뽐내어 백성의 힘을 가벼이 동원하매 번거롭게 명령을 내리면서 영선(營繕)이 그치지 않으니, 많은 백성들이 매맞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오. 선생이 한 것은 이들과 같지 않으니, 여력(餘力)에서 나온 것이며, 옛것을 새로이 한 것이며, 어두운 것을 밝게 한 것으로 터럭만치도 백성을 수고시키지 않았고 재물을 소비하지 않았소. 그래서 비록 군청에 있으면서도 이 역사가 있은 줄 몰랐고, 지나가는 길손이 비와 이슬을 피할 수 있으며, 쉴 자리를 염려하지 않게 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어진 사람의 행동이라 이르는 것이요. 아, 선생의 뒤를 이어 일을 하는 이가 선생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현명한 수령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했다. ○ 옛 사람의 시(詩)에, “반마(班馬)로 오르니 억지로 스스로 넓히며, 잔춘(殘春)의 마음은 바로 근심의 실마릴세. 울 밑에서 잔을 드니 붉은꽃 싫도록 보고, 처마 아래에 발을 거니 푸른 산 받아들이네. 기다란 휘파람은 능히 원별(遠別)을 위로하고, 흩어진 놀이는 잠시 환관(環觀)을 다하네. 오천(烏川)의 풍경은 모두 시의 재료, 읊으면서 한가로움을 얻게 해주네.” 하였다. 『신증』 쌍청당(雙淸堂)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으니, 군수 김세훈(金世勳)이 지었으며, 좌우에 쌍으로 연못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군의 동쪽 1리에 있으니 하륜(河崙)이 지주(知州)로 있을 때 세웠다. 【역원】 창보역(昌保驛) 군 서쪽 9리에 있다. 평은역(平恩驛) 군 동쪽 26리에 있다. 효대원(孝大院) 군 동쪽 7리에 있다. 문수원(文殊院) 군 남쪽 11리에 있다. 금림원(金林院) 군 동쪽 36리에 있다. 승리원(乘利院) 군 서쪽 10리에 있다. 가이원(加耳院) 군 북쪽 20리에 있다. 장금원(長金院) 군 서쪽 23리에 있다. 덕산원(德山院) 군 남쪽 3리에 있다. 철겸원(鐵鉗院) 군 서쪽 3리에 있다. 【불우】 행의사(行衣寺) 군 서쪽 20리에 있다. 흑석사(黑石寺) 군 남쪽 15리에 있다. 응석사(凝石寺)ㆍ정불사(淨佛寺)ㆍ부석사(浮石寺) 모두 봉황산(鳳凰山)에 있다. ○ 궁예(弓裔)가 일찍이 이 절에 이르러 벽화(壁畫)에 그려진 신라왕의 상(像)을 보고 칼을 뽑아 쳤는데, 고려(高麗) 때에 와서도 그 흔적이 그냥 있었다. 이것은 생시에 버림을 당했던 것을 원망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 《보한재집(補閑齋集)》에 “고려 사천감(司天監) 이인보(李寅甫)는 경주도(慶州道) 제고사(祭告使)로서 산천(山川)을 돌며 제사지냈는데, 일이 끝나 장차 돌아가려던 저녁에 부석사(浮石寺)에 닿았다. 객우(客宇)가 조용하고 좌우에 사람이 없었는데, 홀연히 한 여인이 언뜻 마루 사이로 보이더니 좀 뒤에 춤추듯 마당을 돌아와서 절을 했다. 절을 마친 뒤에 섬돌을 올라 방에 들어와 앉았다. 사천감은 비록 괴이하게 생각했지만 자색(姿色)이 뛰어났으므로 차마 거절치 못했다. 여인이 말하기를, ‘제가 사는 곳은 여기서 멀지 않아요. 높으신 뜻을 혼자 사모해서 왔습니다.’ 하고, 그 응대(應對)함이 총민하였다. 사흘 묵고 떠나서 우정(郵亭)에 숙박했는데, 여인이 하느적하느적 따라왔다. 사천감이 말하기를, ‘왜 또 왔소.’ 하였더니, 여인이 말하기를, ‘뱃속에 당신의 애기가 있어요. 다시 하나를 더하고자 해서 온 것이어요.’ 하였다. 새벽이 되자 작별을 고하고 흥주(興州)로 들어갔다.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여인이 또 왔다. 사천감은 후환이 될까 해서, 여인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상대하지 않았더니 여인은 발끈 골을 내면서 방문을 나가는데, 회오리 바람이 땅을 말아올려 집의 문짝 하나를 부서뜨리고 나뭇가지를 꺾어놓고는 갔다.” 하였다. 『신증』 당 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 의봉(義鳳) 1년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스님 의상(義相)에게 하명하여 이 절을 창건하고 부석(浮石)이라 이름지었다. 동쪽에는 선묘정(善妙井)이, 서쪽에는 식사룡정(食沙龍井)이 있는데, 가물 때 기도드리면 감응이 있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새 울고 꽃 져서 꽃다운 나이 이우는데, 나그네 길 시간은 빨리도 가네. 어느 날 마셔보리, 용정(龍井) 물 차맛을, 마루에 가득한 솔과 달 인연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 북쪽 7리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선곡현(善谷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고구려의 가곡현(賈谷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치고 내령군(奈靈郡)에 귀속시켰다.” 하였다.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무신탑(無信塔) 군(郡)에 무신(無信)이란 탑이 있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습인(鄭習仁)이 지군(知郡)으로 있으면서 말하기를, “이상하도다. 악목(惡木)에서는 쉬지 않고 도천(盜泉)은 마시지 않는다 하니, 이는 그 이름이 나쁘기 때문이다. 탑은 고을에서 쳐다볼 수 있게 우뚝 서 있는 것인데, 어찌 무신(無信)을 표방한단 말인가” 하고서, 쪼아 없애게 하고는 그 벽돌로 빈관(賓館)을 지었다. 신돈(辛旽)이 이를 듣고 노해서 계림옥(鷄林獄)에 구속하고 다시 전법(典法)으로 얽어 사지(死地)에 처치하려고 했다. 정신(廷臣)들이 가련히 여겨 이를 구원해 주었으나 서인(庶人)으로 폐했다. 시사기(市肆基) 신라 임금이 이곳에 오랫동안 주필(駐蹕)하다가 돌아갔다. 시사(市肆)의 터는 지금 군 서쪽 2리에 있다. 날이군(捺已郡)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이 군에 행행(行幸)했다. 고을 사람 파로(波路)에게 벽화(碧花)란 16세 된 딸이 있었는데, 예쁘고도 고왔다. 그 아비가 이를 잘 꾸며서 가마에 태우고 빛깔 고운 비단으로 휘장을 두르고서 임금께 바쳤다. 임금이 찬물(饌物)이라고 여기고 열어보니 미녀였다. 그 뒤로는 여러 번 그 집으로 미행(微行)했다. 중도에 고타군(古陁郡)이 있는데, 하루는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묻기를, “나랏사람들은 임금을 어떻다고 하오.” 하니 노파가 말하기를, “모두들 성인(聖人)이라고들 하지만, 저만은 이 말을 의심스럽게 여깁니다. 듣건대, 임금께서 날이(捺已)의 계집에게 가노라고 누차 미복(微服)으로 다닌다고 합니다. 무릇 용(龍)이 고기의 옷을 입고 있으면 어부에게 제어당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임금께서는 만승(萬乘)의 존엄으로써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를 성인(聖人)이라 한다면 성인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러이 여기고, 남몰래 그 계집을 데려다 궁중에 숨겨 두었다. 벌지부곡(伐只部曲) 군 동쪽 15리에 있다. 마구부곡(馬駒部曲) 군 북쪽 60리에 있다. 용산부곡(龍山部曲) 군 서쪽 20리에 있다. 임지도부곡(林只刀部曲) 군 동쪽 15리에 있다. 성을량부곡(省乙良部曲) 군 동쪽 15리에 있다. 오등부곡(烏等部曲) 군 북쪽 30리에 있다. 유수부곡(楡水部曲) 군 북쪽 30리에 있다. 답곡부곡(沓谷部曲) 군 북쪽 30리에 있다. 이곡부곡(泥谷部曲)ㆍ내소리부곡(奈小里部曲) 정종소(鄭從韶)가 수령으로 있을 때, 군지(郡誌)를 지으면서, “이곡(泥谷)은 바로 지금의 며전리(㫆田里)이니 군 서쪽 25리에 있고, 내소리(奈小里)는 바로 지금의 사내리(沙奈里)이니 군 동쪽 1리에 있다.” 하였다. 그러나 두 부곡(部曲)은 예와 이제의 명칭이 같지 않으니 어디서 고증하여 이런 말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신증』 장군곡(藏軍谷) 군 동쪽 8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太祖)가 나라를 통합할 때 오천(吾川) 사람들이 불복하므로 이곳에 병사를 숨겨두었다가 이를 격파했다.” 한다. 【명환】 고려 정습인(鄭習仁) 공민왕(恭愍王) 때, 전교령(典校令)으로 지주(知州)로 나갔다. 시무(視務)하려 할 제, 아전이 고사(故事)에 따라 소재도(消災圖)를 찾아가 향을 사를 것을 청하였다. 습인이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불륜(不倫)한 일을 하지 않거늘 재앙이 어떻게 생긴단 말인가. 무망(無妄)하기보다는 순수(順受)할 뿐이다.” 하고서 아전에게 명하여 철거시켰다. 본조 하륜(河崙) 지주(知州)였다. 【인물】 본조 김증(金曾) 과거에 두 번 급제했다. 벼슬은 금산 군수(金山郡守)에 이르렀다. 김담(金淡) 증의 아우이다. 두 번 급제했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다. 【효자】 고려 문재도(文載道) 홍무(洪武) 임술년(壬戌年) 봄에 왜적(倭賊) 수천 명이 본군(本郡)에 침략해 와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 재도는 그 아버지를 업고 산골에 들어가 숨었는데, 왜적이 찾아와 그 아버지를 쏘아 맞혔다. 재도가 살촉을 뽑고 칼을 휘둘러 왜적을 베었더니 왜적들이 굴복했으므로 부자가 목숨을 온전히 했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벼슬은 평해군사(平海郡事)에 이르렀다. 본조 김이음(金爾音)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은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일찍이 어버이를 위해 3년간 여묘(廬墓)했으므로, 태조(太祖) 때 정려하였다. 우제(禹濟) 벼슬은 감정(監正)에 이르렀다. 효자(孝子)로써 정려하였다. 『신증』 안수철(安壽鐵) 그 아버지가 광질(狂疾)에 걸렸으므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약에 섞어 먹였더니 병이 나았다.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하었다. 【제영】 휴가초초과귀성(携家草草過龜城)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가족을 데리고 허둥지둥 귀성을 넘는데, 나그넷길이라 아무도 성명을 모르노라. 신세가 기구하여 살쩍머리 셋거늘, 내일 아침에는 또한 영마루를 넘어 갈까나.” 하였다. 일수영회포고성(一水縈廻抱古城) 김효정(金孝貞)의 시에, “한 줄기 물은 휘돌아 옛 성을 안아 흐르나니, 산의 형세는 곧 바로 거북의 이름 얻었다.” 하였다. 계분연미음변인(溪分燕尾吟邊咽) 윤자영(尹子濚)의 시에, “시내는 제비꼬리처럼 갈려 읊음 속에 흐느끼고, 산은 까치 머리되어 그림 가운데 모여든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산이(山伊) 동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봉향(奉香)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망궐(望闕) 끝은 10리이다. 사흥(司興) 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두전(豆田)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권선(權先) 위와 같다. 호문(好文)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신혈(辰穴) 남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적포(赤布)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어화(於火)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천상(川上) 동남쪽으로 처음은 27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말산(末山)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임지(林只) 동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60리인데, 봉화(奉化) 남쪽 경계와 안동 재산면(才山面) 서쪽 경계를 넘어 있다. 북면(北面)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인데, 소천촌(韶川村)은 순흥(順興) 이부석면(二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으며, 답곡촌(沓谷村)은 동부(同府) 일부석면(一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고, 교각촌(校各村)은 동부 동원면(東元面)의 경계를 넘어 있다. 우측 두 촌의 북쪽은 영춘(永春)과 접해 있다. 오록(梧鹿) 동북쪽으로 50리이며, 순흥(順興) 삼부석면(三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고, 북쪽은 영춘과 접해 있다. ○ 벌지부곡(伐只部曲)은 동쪽으로 15리이며, 용산부곡(龍山部曲)은 서쪽으로 20리이고, 마륜부곡(馬輪部曲)은 북쪽으로 60리이다. 임지력부곡(林只力部曲)은 즉 임지면이며, 성을량부곡(省乙良部曲)은 동쪽으로 15리이다. 오등부곡(烏等部曲)ㆍ유수부곡(楡水部曲)은 북쪽으로 30리이다. 답곡부곡(沓谷部曲)은 북쪽으로 30리인데, 즉 답곡이며 이곡부곡(泥谷部曲)은 지금의 미전리(彌田里)이고 서쪽으로 25리이다. 내소리부곡(奈小里部曲)은 지금의 사내리(沙奈里)이며, 동쪽으로 1리이다. 【봉수】 창팔래산(昌八來山) 동쪽으로 30리이다. 【방면】 읍창(邑倉)ㆍ동창(東倉) 동쪽으로 30리이다. 북창(北倉) 오록면(梧鹿面)에 있다. 【토산】 닥종이[楮]. 【누정】 영훈정(迎薰亭) 남쪽으로 3리이다. 【사원】 이산서원(伊山書院) 선조(宣祖) 계유년에 건립하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文廟) 조에 있다.
풍기군(豐基郡)
동쪽으로 영천군(榮川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남쪽으로 예천군(醴泉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51리, 서쪽으로 충청도 단양군(丹陽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24리, 북쪽으로 충청도 영춘현(永春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69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1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기목진(基木鎭)이다. 고려 초에는 기주(基州)라 부르다가 현종(顯宗)이 길주(吉州)에 귀속시키고, 명종(明宗)이 감무(監務)를 두더니 뒤에 안동부(安東府)에 다시 귀속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이 다시 감무를 두어 안동부의 속현(屬縣) 은풍(殷豐)을 예속시켰다. 본조에서는 기천 현감(基川縣監)으로 고쳤는데, 뒤에 문종(文宗)의 태(胎)를 은풍현(殷豐縣)에 안치하게 되자 마침내 두 현(縣)의 이름을 따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속현】 은풍현(殷豐縣) 본래 신라의 적아현(赤牙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은정(殷正)이라 고치고,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은 안동부에 귀속시켰는데, 공양왕(恭讓王) 때 본군(本郡)에 이속(移屬)시켰다. 별명은 은산(殷山)이다. 군 서남쪽 37리에 있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기목(基木)ㆍ기주ㆍ기천(基川)ㆍ영정(永定)ㆍ안정(安定). 【성씨】 본군 정(鄭)ㆍ안(安)ㆍ피(皮)ㆍ방(邦)ㆍ음(陰)ㆍ진(秦)ㆍ신(辛), 김(金) 영월(寧越)ㆍ삼척(三陟). 이(李) 평창(平昌). 최(崔) 흥해(興海) 배(裵) 성주(星州). 은풍(殷豐) 오(吳)ㆍ박(朴), 전(全) 김(金)이라 하기도 한다. 신(申). 순흥(順興) 안(安)ㆍ신(申)ㆍ이(李)ㆍ윤(尹), 석(石) 촌성(村姓)이다. 김(金)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 【풍속】 풍속은 강하고 사나움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 백성은 경상(耕桑)을 즐겨한다. 이선(李宣)의 시. 【형승】 산천이 수려하다 김효정(金孝貞)의 시. 【산천】 죽령(竹嶺) 군 서쪽 24리에 있는데,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에 처음으로 길을 열었다. 소백산(小白山) 순흥현(順興縣)에 있다. 군에서의 거리는 32리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소백산이 태백산에 이어져, 서리서리 백 리(百里)나 구름 속에 꽂혀 있네. 분명히 동남계(東南界)를 모두 구획하였으니, 하늘ㆍ땅이 이루어져 귀신은 인색을 깨쳤네.” 하였다. 명봉산(鳴鳳山) 은풍현(殷豐縣) 서쪽 16리에 있으며, 본조 문종(文宗)의 태(胎)를 안치했다. 여현(礪峴) 군 남쪽 14리에 있다. 골리현(骨里峴) 군 서쪽 12리에 있다. 경원봉(慶元峯)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22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태(胎)를 안치했다. 윤암봉(輪庵峯)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32리에 있으며, 본조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를 안치했다. 초암동(草庵洞)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45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렬왕(忠烈王)의 태를 안치했다. 욱금동(郁錦洞) 소백산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13리 떨어져 있으며, 고려 충목왕(忠穆王)의 태를 안치했다. 양곡동(陽谷洞) 순흥부(順興府)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다. 죽계(竹溪) 순흥부에 있다. 군에서 북쪽으로 23리 떨어져 있다. ○ 이색(李穡)의 안 시어(安侍御)를 전송하여 지은 시(詩)의 서(序)에,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세세로 죽계(竹溪) 가에 살았다. 죽계의 근원은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온다. 산이 크고 물이 멀리 흐르듯, 안씨의 흥성함도 끝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남천(南川) 군 남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은 죽령(竹嶺)에서 나온다. 북천(北川) 군 북쪽 3리에 있다. 그 근원은 욱금동(郁錦洞)에서 나온다. ○ 이상 두 물(남천(南川) 북천(北川))은 군 동쪽 3리에 이르러 합류되어 영천군(榮川郡)의 임천(臨川)에 들어간다. 순흥(順興)의 동천(東川) 하나는 부(府)의 동쪽 1리에 있고, 하나는 부의 동쪽 10리에 있으니, 그 근원은 모두 소백산(小白山)에서 나와 부의 동쪽 13리에 이르러 남ㆍ북의 두 개울이 합친다. 은풍(殷豐)의 동천(東川) 현(縣) 동쪽 20보(步)에 있으며, 그 근원은 골리현(骨里峴)에서 나온다. 서천(西川) 현 서쪽 10리에 있으며, 그 근원은 명봉산(鳴鳳山)에서 나오는데, 현 남쪽 8리에 이르러 동천(東川)과 합류되어 예천군(醴泉郡)의 양천(襄川)이 된다. 『신증』 도솔성산(兜率城山) 죽령 아래 있다. 부로성산(夫老城山) 은풍현에 있는데 봉우리 위에 못이 있다. 【토산】 수정석(水精石) 양곡동(陽谷洞)에서 난다 ㆍ인삼(人蔘)ㆍ잣[海松子]ㆍ지치[紫草]ㆍ왕골[莞草]ㆍ꿀[蜂蜜]ㆍ송이[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닥종이[楮]ㆍ은어[銀口魚]. 【봉수】 죽령(竹嶺) 봉수 서쪽으로는 충청도 단양군(丹陽郡) 소이산(所伊山)에 응하고, 동쪽으로는 망전산에 응한다. 망전산(望前山) 봉수 군 남쪽 8리에 있으니, 동쪽으로는 영천군(榮川郡) 성내산(城內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죽령에 응한다. 『신증』【누정】 제운루(齊雲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군 북쪽 7리에 있다. 【역원】 창락역(昌樂驛) 옛날 순흥(順興)의 땅으로, 군 서쪽 13리에 있다. 승(丞)이 있다. 본도의 속역(屬驛)이 아홉이니 즉 평은(平恩)ㆍ창보(昌保)ㆍ옹천(甕泉)ㆍ유동(幽洞)ㆍ통명(通明)ㆍ안교(安郊)ㆍ도심(道深)ㆍ죽동(竹洞)ㆍ선안(宣安)이다. ○ 승(丞) 1인. 죽동역(竹洞驛) 군 동쪽 19리에 있다. 남원(南院) 군 남쪽 2리에 있다. 산요원(山腰院) 군 서쪽 20리에 있다. 창락역(昌樂驛)의 남원(南院) 군 서쪽 11리에 있다. 순지원(蓴池院) 군 동쪽 10리에 있다. 인빈원(寅賓院) 군 남쪽 27리에 있다. 【불우】 용천사(龍泉寺) 군 북쪽 7리에 있다. ○ 고려 태조(太祖)의 화상[眞]이 문경(聞慶) 가은현(加恩縣) 양산사(陽山寺)에 있었는데, 신우(辛禑 폐왕 우(廢王禑)) 5년에 왜구(倭寇)를 피해서 이곳으로 옮겼다. 성혈사(聖穴寺)ㆍ초암(草庵) 모두 소백산이 있다. 쌍악사(雙岳寺) 은풍현 경청산(警淸山)에 있다. 양지사(陽地寺) 죽령 아래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순흥폐부(順興廢府) 본래 고구려 급벌산군(及伐山郡)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급산군(岌山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는 흥주(興州)로 고치고, 성종(成宗) 때에는 순정이라 일컬었으며, 현종(顯宗)은 안동부(安東府)에 귀속시켰다가 뒤에 순안현(順安縣)으로 이속시키고, 명종(明宗)은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렬왕(忠烈王)의 태(胎)를 안치하여 흥녕 현령(興寧縣令)으로 고치고, 충숙왕(忠肅王)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승격시켰으며, 충목왕(忠穆王)의 태를 또 안치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켰다. 본조에 와서, 태종(太宗)은 도호부(都護府)로 고치고, 세조(世祖) 임금 때,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이 수인(囚人)들에게 협박되어 난리를 꾀했다 해서, 본군(本郡)에 혁속(革屬)시키고 마아령(麻兒嶺)의 개울 동쪽의 땅은 이를 잘라 영천(榮川)에 귀속시키고, 문수산(文殊山) 개울 동쪽의 땅은 이를 봉화(奉化)에 귀속시켰다. 읍성(邑城)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9척이며 높이가 6척이다. 군에서의 거리는 북쪽으로 22리이다. 인풍현(隣豐縣) 김부식이 말하기를, “본래 고구려 이벌지현(伊伐支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바꾸고 급산군(岌山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등항성(登降城) 군 서쪽 5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太祖)가 남정(南征)했을 때, 이 현(縣)에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백제의 항서(降書)가 이르렀으므로 드디어 주필(駐蹕)했던 곳을 등항성(登降城)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상을곡성(上乙谷城) 은풍현(殷豐縣) 남쪽 34리에 있다. 둘레 9백 80보(步), 높이 5척인데, 안에 10개의 샘과 1개의 개울이 있다. 소백산고성(小白山古城) 산꼭대기에 옛 석성(石城)이 있다. 둘레 1천 4백 28척이다. 감곡부곡(甘谷部曲)ㆍ대룡산부곡(大龍山部曲)ㆍ임곡소(林谷所) 모두 순흥부(順興府) 조에 있다. 숙수사(宿水寺)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 노여(魯璵)의 시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그윽한 경치 찾았더니, 난초의 뜰은 10년 전의 모습이어라. 벽의 값어치는 몇 년간 시와 함께 비싸고, 절의 이름은 천고에 물과 더불어 흐르누나. 추위가 산 빛을 미니 스님은 문을 닫고, 차가움이 개울 소리를 누르니 손님은 누대에 오르도다. 휘바람 불며 서성거리니 어느덧 날은 저물며, 난간에 기대어 고개 돌리면 고향 생각 나누나.” 하였다. 경원사(慶元寺) 소백산(小白山)에 있다. 봉서루(鳳棲樓) 순흥부(順興府)에 있었는데 지금은 황폐되었다. ○ 안축(安軸)의 기(記)에, “나라의 동남쪽에는 본래 산은 하나인데 고개[嶺]는 세 개이니, 태백(太白)ㆍ소백(小白)ㆍ죽령(竹嶺)이 그것이다. 영남(嶺南)에 뿌리박은 첫째 고을은 바로 우리 흥주(興州)이다. 주(州)에서 동쪽으로 가면 황폐하고 편벽된 부락이 나오고, 주에서 똑바로 북쪽으로 가면 태백이 나오며, 북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꺾여 가면 소백이 나오는데 큰 길은 하나도 없고, 주에서 서쪽으로 가면 죽령이 나오는데 서울로 가는 길이고, 주에서 남쪽으로 가면 길이 갈려서 동남의 여러 읍으로 통하게 된다. 고을의 형세가 이러하기 때문에 나그네들이 출입하는 것은 동ㆍ북쪽으로는 없고 모두 서ㆍ남쪽뿐이다. 옛적에 이곳에 고을을 설치하였을 때 오직 서ㆍ남쪽에만 후정(候亭)을 세운 것은 고을의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서정(西亭)은 다만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들이 왕왕 지나칠 뿐이지만, 남정(南亭)은 서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도 이리로 나가고, 남쪽에서 서울 가는 이도 이리로 들어온다. 남쪽의 여러 주에서 임금의 명을 가지고 일을 독려하는 사신은 이리로 들어오지 다른 데로 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공적인 손님이나 사적인 나그네들을 전송하는 일이 없는 날이 없다. 고을 사람들이 서정을 가벼이 보고 남정을 무겁게 보는 것도 또한 사리가 그러한 것이다. 정자는 주의 남쪽 5ㆍ6리쯤 되는 곳에 있다. 북쪽으로는 영험한 산악을 바라보고, 남쪽으로는 무성한 수림을 마주보며, 동쪽으로는 푸른 개울에 닿고, 서쪽으로는 너른 들을 누르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우리 주에서는 누대(樓臺)의 이름이 대대로 내려오는 것이 많다. 모두 산에 바짝 붙고 깊은 절벽에 있다. 그것이 이름난 것은 아마 산 높고 물 맑기 때문일 것이다. 저처럼 산에 바짝 붙고 깊은 절벽에 있어 비록 맑고 그윽한 멋이 있다고는 하지만, 바라보이는 산은 한두어 번 겹친 것에 지나지 않고, 바라보이는 물은 한두어 번 굽이진 것에 지나지 않아, 두루 바라보더라도 하나의 동굴, 하나의 구렁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은 한 줌의 산, 한 움큼의 물을 얻은 것일 뿐이다. 만약 남쪽으로 가서 이 누정에 오르면, 높은 것으로는 만층으로 깎아지른 정상을 쳐다볼 수 있고, 먼 것으로는 천 겹으로 겹친 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다. 이상한 바위들이 우뚝우뚝 하고, 수많은 골짝들이 빙빙 돌고 있으며, 구름의 변화 안개의 엉김이 천태만상이라, 이를 피해서 숨을 수 없다. 게다가 개울 물은 백 갈래로 흐르면서 소용돌이 치고 폭포로 날다가, 산 아래에 모여들면 사납던 형세는 늦추어지고 시끄럽던 소리는 조용해진다. 누정 아래에 이르러서는 깊게 가라앉은 물이 느릿느릿 십여 리나 흐른다. 여울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을 만하고, 돌맹이의 잘다람이 사랑할 만하니 산수(山水)의 크기[大]가 이에서 완비되는 것이다. 해마다 2월이면 농사를 시작한다. 남쪽 밭에 가는 사람들은 누정 아래를 끼고 다니고, 서쪽 들로 나가는 사람은 누정 밖에 줄짓는다. 도랑을 파면 빗물이 소용 없고, 가래를 매면 구름을 기다릴 것 없다. 이 누정은 오직 산수의 아름다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농사 짓은 풍경을 보는 즐거움도 가졌다. 내가 고을 사람이 되기 때문에 결발(結髮)했을 때 놀던 곳이다. 관직에 있는 동안 언제나 남쪽을 바라보면서 그리워했었다. 작년 봄에 사한(史翰)을 파(罷)하고 한가한 시간을 얻어 어머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고향에서 놀면서 이 누정에 여러 차례 올랐으나 기울어 있는 채 오랫동안 수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 누정은 산수(山水)에서 그 위대함을 얻었거늘 사람들에게 버림당하여 거의 부수어 질 것 같소. 그런데 저 깊은 절벽에 왜소한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받아들이니, 이것이 괴이하지 않소.’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오, 마음이 큰 이는 그 위대함을 보고 그 왜소함을 알지만, 마음이 작은 사람은 왜소한 것에 매여서 위대한 것을 잊소. 옛날에 공자는 동산(東山)에 오르고는 노(魯) 나라가 왜소하다고 했고, 태산(泰山)에 오르고는 천하(天下)가 왜소하다고 했소. 세상 사람들은 천 길되는 산은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조그만 석가산은 귀하다 하고, 만경창파는 사랑하지 아니하고 마당의 연못은 사랑하오. 이로써 보건대 사람이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오. 이 누정은 눈을 들어 멀리 보면 아름다운 산과 물이요, 머리을 숙여 내려다 보면 언덕의 풀과 흙이요, 다락이 버림받은 것은 다락의 죄가 아니요, 이를 보는 사람이 작기 때문이니, 만약 마음이 큰 사람이 이 고을을 맡아 이 누정에 오른다면 또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지 않으리란 것을 어찌 알겠소. 더구나 사물의 이치는 성패에 때가 있는 법이니, 이 누정은 마땅히 다시 새로워질 날이 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부서질 것을 근심하겠소.’ 하였다. 얼마 뒤에 직랑(直郞) 채상(蔡祥)공이 우리 주(州)로 하명되었단 것을 들고, 나는 이 누정에 대해 커다란 바람을 가졌다. 내가 서울로 돌아갔을 때, 채(蔡)공은 고을에 도착했다. 그는 이 누정에 올라보고 과연 산수를 보고 즐거워했으나 누정의 퇴락함을 보고는 탄식했다. 그리하여 장인에게 명하여 다시 지어 새롭게 하였으니, 규모가 크고 채색이 고왔다. 대개 영남에 있는 누대(樓臺) 가운데 이와 훌륭함을 견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백성 한 집을 보내어 지키게 함으로써 장구한 계책을 도모했으니, 저 조잡하고 소홀하게 금방 만들었다가 금방 부서지는 것과 같은 자리에 놓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누정이 완공 된 뒤, 공은 손님이 오면 곧 이 누정에 올라 마중했다. 남쪽 손님으로 탁한 안개에 곤란받던 사람은, 이 누정에 올라 산을 바라보면 높이 들리고 구름이 나는 상상을 맛볼 것이고, 물가에 나가면 무우에서 바람쐬고 기수에서 목욕하는 즐거움이 생길 것이다. 공은 혹 농사철을 당하면 관청의 사무를 일찍이 파하고 이 누정에 올라 매일 농사를 살피며, 일의 빠르고 늦음, 부지럼함과 게으름을 책하고 캐물어 상벌(賞罰)을 내렸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스스로 권면하여 서로 앞다투어 늦은 자는 빨리하고 게으른 자는 부지런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관아에는 예절을 책하는 손님이 없게 되고, 들에는 생업을 잃은 농민이 없게 되었으니, 아전은 이로써 편안하게 되고 연사(年事)는 이로써 풍성하게 되었다. 모두가 공의 선사요 누정의 공덕이다. 나는 이 누정이 다시 새롭게 되었다 함을 듣고, 산수(山水)가 알아주는 사람을 얻은 것을 치하하며, 내 바람이 어긋나지 않았음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이 기(記)를 부친다.” 하였다. 【명환】 고려 최재(崔宰) 충목왕(忠穆王) 초에 지흥주(知興州)로 나갔다. 백성에게 편리를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시행하였다. 전적(田籍)이 오래되어 어지러워졌으므로 재(宰)는 이를 개수하면서, 구본(舊本)도 여전히 놓아두고서 대질하였다. 소문을 들은 사람은 탄복했으나 국권(國權)을 담당한 자는 이를 꺼려서 교체시켜버렸다. 최운해(崔雲海) 신우(辛禑) 때 순흥 부사(順興府使)에 제수되었다. 당시 왜적이 객관(客館)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운해는 이와 더불어 싸웠는데, 노획한 마소와 재물들을 곧 사졸(士卒)과 주민(州民)에게 나누어주었다. 싸움에서 크게 이겨 경내가 편안하게 되었다. 【인물】 고려 안유(安裕) 흥주(興州) 사람이다. 뒤의 이름(즉 안향(安珦))은 우리(조선(朝鮮)) 문종(文宗)의 휘(諱)에 저촉되므로 처음 이름을 쓴 것이다. 원종(元宗) 초에 과거에 급제했다. 일찍이 충선왕(忠宣王)을 좇아 원 나라에 갔는데, 원 나라의 승상(丞相)이 전지(傳旨)하기를, “너희 임금은 어찌하여 우리 공주(公主)와 가까이하지 않는가.”하였다. 유가 말하기를, “안방의 일이야 외신(外臣)이 알 수 없는 것이오. 오늘 이것을 가지고 질문하니, 들을 가치가 없지 않겠소.” 하였다. 승상이 이로써 아뢰니, 황제(皇帝 원제(元帝))가 이르기를, “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먼 나라 사람으로 볼 것인가.”하고서 다시 묻지 아니하였다. 벼슬은 중찬(中贊)에까지 이르렀다. 학교(學校)가 날로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고, 또 그의 노비[藏獲]를 들였다. 문장(文章)이 맑고 힘차서 볼 만했으며, 또 감식(鑒識)하는 안목이 있었다. 만년에는 항상 회암(晦菴 주희(朱喜)) 선생의 화상을 걸어 두고 경모(景慕)하다가 드디어 회헌(晦軒)이라는 호(號)를 썼다. 충숙왕(忠肅王) 6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안우기(安于器) 유(裕)의 아들이며 벼슬은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에 이르렀다. 안목(安牧) 우기(于器)의 아들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까지 이르렀다. 안원숭(安元崇) 목(牧)의 아들이며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안축(安軸) 충숙왕(忠肅王) 11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로(遼陽路) 개주(蓋州) 판관(判官)에 제수되었다. 당시 충숙왕(忠肅王)은 원 나라에 잡혀 있었다.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요.”라 하고는 상서(上書)하여 송사하였다. 임금은 이를 가상히 여겨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한때 표전(表箋)ㆍ사명(詞命)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상주(尙州)에 목사(牧使)로 나가 있을 때 어머니는 흥녕(興寧)에 있었는데 왕래하면서 효도를 다했다. 벼슬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흥녕군(興寧君)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 《관동와주집(關東瓦注集)》이 있다. 안보(安輔) 축(軸)의 아우이다. 충목왕(忠穆王) 원년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행 중서성(遼陽行中書省) 조마(照磨)에 제수되었다. 보는 말하기를, “수명(授命)하고도 공직(供職)하지 않는 것은 불공(不恭)스럽다. 더구나 조마(照磨)란 단지 문서(文書)를 수장(收掌)하는 것이며 다른 일이 없으니, 내 마땅히 성(省)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관(上官)ㆍ성관(省官)은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겨 예우하였다. 보가 말하기를, “내가 이제 책무는 다하였다. 어머니가 늙으셨으니 돌아가 봉양하지 않는다면 효가 아니다.” 하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나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귀향하여 봉양하기를 청하여 뒤에 동경(東京) 유수(留守)가 되었다. 생산(生産 치부(治富))에 마음 쓰지 아니하여, 죽고 나자 집에는 곡식 한 섬의 저축도 없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안종원(安宗源) 축(軸)의 아들이다. 나이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목왕 때 사한(史翰)으로 선보(選補)되었다, 질(秩)이 차서 옮기게 되었는데 동료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은데 위계가 아래였으므로 종원이 양보했다. 축(軸)은 이를 듣고 기뻐하면서, “도덕이 앞선 이에게 양보한 것이다. 이쪽에서 남에게 양보했으니 누가 이쪽을 버릴 것인가. 우리 집안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으니 번창할 것이다.” 하였다. 신돈(辛旽)이 천권(擅權)할 때, 사대부들이 다투어 붙었다. 집정(執政)에게 붙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자네를 영상(領相)에게 천거하면 간관(諫官)을 얻을 수 있을 것일세.” 하니, 종원은 사양하면서, “내 본래 게을러서 남에게 붙는 일은 내 재주가 아닐세.”라고 말했다. 집정은 이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벼슬은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본조 안천보(安天保) 태종(太宗) 때의 사람이다. 벼슬은 영돈녕부사(領頓寧府事)에 이르렀다.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외구(外舅)이다. 안원(安瑗) 원숭(元崇)의 아들이다. 벼슬은 유후(留後)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안경공(安景恭) 종원(宗源)의 아들이다. 태조(太祖)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었으며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하였고,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안순(安純) 경공(景恭)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겸 판호조(判中樞兼判戶曹)에 이르렀다. 치사(致仕)하고 물러나서 금천별서(衿川別墅)에 살았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그에게 가서 물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안숭선(安崇善) 순(純)의 아들이다. 경자과(庚子科)에 장원(壯元)했다. 벼슬은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신증』 안침(安琛)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아들 처선(處善)ㆍ처성(處誠)은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나 일찍 죽었다. 【효자】 본조 권득평(權得平) 임오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 아버지가 실명(失明)하였으므로 출입할 때 언제나 부축했으며, 음식은 반드시 몸소 받들었다. 양친이 4일 간격을 두고 모두 죽었는데 3년 동안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몸소 조석(朝夕)의 전(奠)을 올렸다. 대상(大祥)을 지낸 뒤 다시 어머니를 위해서 재최(齊衰) 3년을 입었으며, 가묘(家廟)를 짓고 조석의 전을 폐하지 않았다. 출입할 때는 항상 인사를 드렸다. 홍치(弘治) 기미년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제영】 한한오묘상(閑閑五畝桑) 정재(鄭載)의 시에, “넘실넘실하는 남쪽 개울의 물, 널찍널찍한 다섯 이랑의 뽕이로다.” 하였다. 황량고루의연재(荒涼古壘依然在) 강희맹의 시에, “사람은 누정에 기대었고 대자리는 비었으니, 달 밝은 밤의 피리 바람을 막지 못하누나. 황량한 옛 보루는 의연히 있는데, 기억하는가. 닭 잡고 오리 잡던 공적을.” 하였다. 방산민십실(傍山民十室) 조원(曹瑗)의 시에, “산 옆에는 민가 열 채, 다만 아는 것은 농사일 뿐.”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 신라의 대매(代買)이다. 【방면】 동부(東部) 읍으로부터 끝은 15리이다. 서부(西部) 읍으로부터 끝은 20리이다. 동촌(東村) 읍으로부터 끝이 20리이다. 생고개(生古介) 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와룡동(臥龍洞) 서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5리이다. 보좌리(普佐里) 남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상리(上里) 서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60리이다. 하리(下里) 서남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성지】 도솔산고성(兜率山古城) 죽령(竹嶺) 아래에 있다. 부로산고성(夫老山古城) 유지(遺址)가 있다. 등항성(登降城) 서남쪽으로 5리이다. 어름성(於凜城) 빙성(氷城)이라고도 하며 은풍(殷豐) 고현(古縣)에 있는데, 남쪽으로 30리이다. 둘레는 9백 80보이고, 10개의 샘과 한 개의 시내가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은풍창(殷豐倉) 고현(古縣)에 있다.
의성현(義城縣)
동쪽으로 청송부(靑松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45리,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44리, 남쪽으로 의흥현(義興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40리, 서쪽으로 군위현(軍威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9리, 비안현(比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7리, 북쪽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7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5백 9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소문국(召文國)이었다. 신라가 이를 취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이 문소군(聞韶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켰고, 현종(顯宗)은 안동부(安東府)에 귀속시켰고, 인종(仁宗)은 현령(縣令)을 두었고, 신종(神宗)은 일찍이 적에게 함락되었다해서 감무(監務)로 강등시켰고, 충렬왕(忠烈王)은 대구(大丘)에 병합시켰다가 다시 현령(縣令)으로 삼았다. 본조에서는 이를 따랐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소문(召文)ㆍ문소(聞韶) 【성씨】 본현 김(金)ㆍ심(沈)ㆍ홍(洪), 정(丁)ㆍ강(康)ㆍ설(薛)ㆍ노(盧) 지금은 노(魯)로 쓴다. 김(金) 모두 촌성(村姓)이다. 왕(王)ㆍ유(柳) 모두 개경(開京). 오(吳) 장기(長鬐). 강(姜) 진주(晉州). 박(朴) 속성(續姓)이다. 【풍속】 검소ㆍ솔직함을 숭상하고, 잠상(蠶桑)에 힘쓴다 관풍안(觀風案). 주민이 순박하다 조서강(趙瑞康)의 시다. 『신증』 운반에는 곡거(曲車)를 쓴다. 【형승】 산천(山川)은 백 리(百里)이고 연화(煙火)는 천 가(千家)이다 이발(李潑 호는 동암(東巖))의 시에, “깨끗한 산천은 백 리요, 태평한 연화(煙火)는 천 가라.”하였다. 【산천】 금성산(金城山) 현 남쪽 25리에 있다. 선암산(船巖山) 현 남쪽 50리인 의흥현(義興縣) 경계에 있다. 금학산(金鶴山) 현 남쪽 25리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현 서남쪽 30리에 있다. 모현(茅峴) 현 동쪽 45리에 있다. 마산(馬山) 현 북쪽 20리에 있다. 황산(黃山) 현 동쪽 50리에 있다. 산중에는 뽕나무가 많이 있어, 인근 여러 고을 사람들이 모두 이에 의지해서 누에를 기른다. 빙산(氷山) 현 동남쪽 40리에 있다. 빙혈(氷穴) 빙산의 큰 바위 밑에 돌구멍[石穴]이 있는데, 구멍의 입구는 높이가 3척, 높이가 4척 8촌, 옆으로의 길이가 5척 1촌이다. 이것을 풍혈(風穴)이라 한다. 또 하나의 구멍이 바위 밑에 직하(直下)로 나 있는데 넓이가 1척, 길이는 1척까지는 잴 수 있는데 아래로는 굽어 있어 잴 수 없다. 입하(立夏) 뒤로 얼음이 엉기기 시작하여, 아주 더우면 얼음이 딱딱하게 되고, 장마가 들면 얼음이 풀린다. 봄ㆍ가을로는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빙혈(氷穴)이라 한다. 혈동(穴洞) 사곡리(舍谷里)에 있는데, 현에서 동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다. 바위구멍[岩穴]이 아주 깊어서, 음수(陰獸)가 숨어 있는가 의심스럽다. 날이 가물 때 기우제를 드리면 곧 응험이 있다. 천암(穿巖)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구부리면 깊은 못에 다다르며 구멍이 바위 가운데 있다. 기괴하고 이상하며 가뭄든 해에 기우제를 지내면 바로 응한다. 장천(長川) 현 서쪽 3리에 있다. 근원은 모현(茅峴)에서 나온다. 하천(下川) 현 남쪽 20리에 있다. 그 근원은 빙산에서 나오며, 현 서쪽 20리에서 남천(南川)과 합류되어 병천(幷川)이 되는데, 바로 비안현(比安縣) 쌍계(雙溪)의 상류이다. 황산천(黃山川) 현 동쪽 34리에 있다. 그 근원은 황산(黃山)에서 나온다. 바로 안동부(安東府) 독천(禿川)의 상류이다. 탄지(炭池) 현 남쪽 30리에 있다. 『신증』 둔덕산(屯德山) 현 동쪽 3리에 있다. 두음산(豆音山) 현 서쪽 35리에 있다. 백장령(百丈嶺) 현 서남쪽 28리에 있다. 【토산】 사(絲)ㆍ솜[緜] 잠실(蠶室)은 현 북쪽 사진리(沙眞里)에 있다. 꿀[蜂蜜]ㆍ지치[紫草]ㆍ인삼(人蔘)ㆍ옷[漆]ㆍ송이[松蕈] 【봉수】 마산(馬山)봉수 북쪽으로 안동부(安東府)의 감곡산(甘谷山)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고성산 봉수에 응한다. 고성산(古城山) 봉수 현 남쪽 5리에 있다. 남쪽으로 영니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마산(馬山)에 응한다. 영니산(盈尼山) 봉수 현 남쪽 25리에 있다. 남쪽으로 의흥현(義興縣)의 승목산(繩木山)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고성산 봉수에 응한다. 【누정】 문소루(聞韶樓) 객사(客舍) 북쪽에 있다. ○ 화지원(華之元)의 기(記)에, “현령 이광제(李光濟)군이 화산(花山)을 지나는 길에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자네는 우리 현(縣)의 공관(公館)을 아는가. 지세가 낮고 건물이 비좁아서 손님이라도 올 경우 여름이면 답답해서 숨쉬기도 어렵다네. 화풀이를 현령(縣令)에게 하고 관리들을 못살게 굴어서 참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네. 좀 넓게 새로 짓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전쟁이 10년이나 계속되어 백성들이 편히 살 수도 없었지. 다행히도 주상 전하께서 천명(天命)ㆍ인심(人心)에 순응하시어 이제 어지러운 세상을 반정(反正)하였으니, 도탄에 빠지는 것을 면하고 겨우 숨을 돌리게 된 것이 몇 년 못 되었소. 이 마당에서 역사를 한다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할 것이요, 또 개작(改作)한다는 비난을 살 것도 같아서, 다만 관청의 북쪽에 옛터가 있길래 이를 누정으로 세우고자 하니, 고을 사람들이 다투어 나와서 일해 줬다네. 산에서 재목을 얻고 흙을 파서 기와로 만들어 집을 짓되, 농한기를 틈타서 며칠 만에 준공을 보았다네. 역사를 한 사람은 백성이 아니면 중들이었는데, 모두들 품삯을 주어서 노고를 보상했네. 이후로는 사신으로 이 누정에 오른 자는 즐거워하기만 하고 화내는 일이 없어서, 화풀이가 백성을 박탈하는 재앙이 없게 되겠지. 아직 다 되지 않은 것은 단청 뿐일세. 이제 임기가 다 차서 언제 떠날지 모르겠네. 나를 위해서 그 본말(本末)을 적어주게. 그리고 성명을 써두어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 보여주도록 하세.’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현에 북루(北樓)가 있다는 것은 나 또한 알던 바이다. 옛날 학사 김지대(金之岱)가 일찍이 이 도(道)의 안렴(按廉)으로 있을 때, 이 누대에 대해 읊기를, ‘문소(聞韶)의 공관은 후원이 깊어, 가운데에 백여 척 되는 높은 누정이 있네.’ 했었다. 어느 해에 이것이 쓰러지게 되었는가. 부로(父老)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마 현명한 이가 이를 일으켰고 우둔한 이가 이를 쓰러지게 했을 것이니, 다시 이를 일으키는 것은 또한 현명한 일이겠고,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은 더욱 우둔한 것이다. 이(李)군은 청렴하게 정치를 하고, 백성을 사역시키되 괴롭히지 않았고, 재물을 없애고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고도 오랫동안 쓰러져 있던 것을 다시 일으켰으니, 현명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기록할 만한 것이다. 건축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나 조망의 넓고 좁은 데에 대해서는 내 아직 본 적이 없으니, 잠시 대가의 손을 기다리기로 하자.” 하였다. ○ 김지대(金之岱)의 시에, “문소의 공관은 후원이 깊어, 가운데에는 백여 척 되는 높다란 누정이 있네. 향기로운 바람 십 리(十里)에 구슬 발이 걷히고, 밝은 달 일성(一聲)으로 옥피리 날리네. 연기는 가벼워 버들 그림자가 서로 가늘게 이어졌고, 비는 개어서 산빛이 짙은데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 용황(龍荒 흉노(匈奴))이 팔을 꺾은 갑지랑(甲枝郞), 그냥 난간에 기대고 있는 것 더욱 애석하네.” 하였다. 지대의 이 시는 사람 입에 오르내리다가 시판(詩板)을 잃었다. 그 뒤 10년에 어떤 군수가 이 시를 몹시 찾으니 고을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시 현수(縣守) 오적장(吳廸莊)에게 딸이 있었는데, 일찍이 장일(張鎰)의 아들 정하(廷賀)와 약혼했었다. 오(吳)가 딸을 데리고 임지에 간 동안 정하는 다른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오녀(吳女)가 듣고 미쳐서 함부로 지껄이다가 갑자기 이 시를 암송해내었다. 고을 사람들이 이를 베껴서 바치니 군수가 놀랐다고 한다. ○ 고려 이문화(李文和)의 시에, “문소(聞韶)의 산수(山水)는 깨끗하여, 밤은 고요하고 발은 성기고 달은 기울었네. 버들 빛 푸릇푸릇한 객사(客舍), 향기로운 내[煙] 모락모락하는 절간[僧家], 백성 걱정에 금방 변한 흰머리[鶴髮], 비[雨]를 얻어 기슭에 돌아온 검은 모자[烏紗], 여섯 달 동안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다만 앞뒤의 황화(皇華 사신(使臣)에게 부끄럽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문소(聞韶)의 누정 아름다운 곳, 비를 피해 오르니 해가 기운다. 풀빛의 푸름은 역로(驛路)에 닿았고, 복숭아 꽃의 따뜻함은 인가(人家)를 덮는다. 봄의 시름은 꼭 술같이 진하고, 세상의 맛은 점점 깁처럼 얇다. 애끊는 강남의 길손, 변방의 당나귀는 또 서울로 간다.” 하였다. ○ 김자수(金子粹)의 시에, “오천(烏川) 선생의 훌륭한 작품은 점과 획이 바르고 비스듬. 도덕(道德)은 성역(聖域)에서 자유로이 놀고, 문장(文章)은 시가(詩家)에서 홀로 뛰어났네. 벽 사이에서 농묵(濃墨)을 즐겁게 보고, 마루 위에서 농사(籠紗)를 한탄치 않누나. 우뚝하게 높은 산을 우러러 보니, 얼굴 시드는 것 바로 나이가 두렵다.” 하였다. 『신증』 죽루(竹樓) 객관의 남쪽에 있다. 현령 이종준(李宗準)이 세웠다. 【학교】 향교(鄕校)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철파역(鐵破驛) 현 북쪽 5리에 있다. 청로역(靑路驛) 현 남쪽 32리에 있다. 남원(南院) 현 남쪽 2리에 있다. 허어리원(許於里院) 현 동쪽 35리에 있다. 윤곡원(尹谷院) 현 동쪽 24리에 있다. 염곡리원(廉谷里院) 현 남쪽 12리에 있다. 황산원(黃山院) 현 동쪽 30리에 있다. 승봉원(僧逢院) 현 남쪽 20리에 있다. 건현원(件峴院) 현 남쪽 35리에 있다. 빙산원(氷山院) 현 남쪽 30리에 있다. 도리원(都里院) 현 서쪽 32리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골짜기가 멀어서 맑은 물 흐르고, 모래가 평평해서 짧은 뗏목 없구나. 나루를 물었으나 길을 잃어버렸고, 연기 나는 곳은 두어 집뿐이다.” 하였다. 북원(北院) 현 북쪽 2리에 있다. 이곡원(梨谷院) 현 북쪽 18리에 있다. 【불우】 빙산사(氷山寺) 빙산에 있다. 수량암(修量菴) 금학산(金鶴山)에 있다. 백장사(白丈寺)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신증』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비둘기와 제비가 서로 재잘거리니, 바야흐로 천하는 삼월 삼짇. 봄물은 기름 돌아 푸르고도 맑은데, 바위에는 꽃이 얼키설키 붉기도 하네. 시를 읊고 노니나니 술보다 흥겹고, 풀밭을 거니나니 쪽빛보다 푸르구나. 90일의 봄빛을 한번 훑으니, 조개(皁蓋 일산(日傘))가 성 남쪽에 가득해도 상관이 없네.” 하였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북쪽 3리에 있다. 『신증』 속담에 전하기를, “김홍술(金洪術)의 모습이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와 비슷했는데, 백제의 견훤(甄萱)과 싸우다 패배하여 죽었다. 이에 여기에서 제사지낸다.” 한다. ○ 유호인(兪好仁)의 영신가(迎神歌)에, “공은 어찌하여 이 구석에 있는고. 덩굴 풀에 의지하였는데, 산은 검푸르도다. 하늘을 위해 일했거늘 문란하도다. 진인(眞人)이 우뚝 일어섰으니, 푸른 나무 옆이로다. 물고기에 날개가 붙었으니, 다투어 뛰고 달리는도다. 황옥(黃屋 황제의 수레)의 좌도(左纛 황제 수레의 깃발)여, 범ㆍ이리를 당해내고, 유가(劉家 한(漢) 나라의 황가(皇家))의 기신(紀信)이여, 멀리 서로 바라보는도다. 사당에서 백세(百世)를 잡수시니 신(神)은 양양하고, 우리 백성이 보답하니 잊지 못하는도다.” 하였다. ○ 유호인의 송신가(送神歌)에, “신령이 양양함이여 산(山)의 머리로다. 구름은 뭉게뭉게 무턱대고 헤매는도다. 북은 두둥둥 둥둥 주저주저 춤추는도다. 여지(荔枝)가 누래지지 아니하니 계수나무는 부끄러워지는도다. 내가 드린 메를 받으시니 물리치지 않으시도다. 팔사(八蜡)는 해마다 가을이면 온 지경 안에서 구슬처럼 모여들어 삼밭처럼 빽빽하도다. 여귀(厲鬼 역귀(疫鬼))를 쫓으니 큰 복을 내리시는도다. 우리 백성이 보답하니 해마다 증수(增修)하는도다.” 하였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고구현(古高丘縣) 현 북쪽 20리에 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구화현(仇火縣)을 고구현(高丘縣)으로 고쳤다. 혹은 고근(高近)이라고도 한다. 뒤에 의성부(義城府)에 예속시켰다. 태일전(太一殿) 빙혈(氷穴) 옆에 있다. 매년 상원(上元 정월 보름)에 임금이 향(香)을 내려서 제사지낸다. 성화(成化) 14년 무술(戊戌)에 충청도(忠淸道) 태안군(泰安郡)으로 옮겼다. ○ 신인손(辛引孫)의 시에, “태청(太淸 하늘)의 새 전각은 빙산(氷山)에 창건되었고, 하한(河漢 은하(銀河)) 돌아감은 정환(定環)에 벌여 있다. 오색(五色)이 보광(寶光)은 하토(下土)에 이었고, 삼태(三台)의 화개(華蓋)는 중간에 끼어 있다. 마음을 재계하기 10일 황궁의 섬돌로 달리고, 수명을 축수하기 천년 황제의 모습에 절한다. 원하옵기는, 비ㆍ바람 순조롭도록, 화기애애함이 인환(人寰)에 가득토록.” 하였다. 소문국(召文國) 옛터는 현 남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소문리(召文里)라 부른다. 어정(御井) 소문리에 있다. 아마 소문국 시절의 어정(御井)인 모양이다. 피촌향(皮村鄕) 현 남쪽 25리에 있다. 신촌부곡(新村部曲) 현 동북쪽 30리에 있다. 굴어곡부곡(屈於谷部曲) 현 남쪽 5리에 있다. 우곡부곡(牛谷部曲) 현 동쪽 20리에 있다. 골라소(骨羅所) 현 동남쪽 50리에 있다. 읍성(邑城)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4천 7백 20척이었는데, 지금은 황폐해졌다. 황산성(黃山城) 현 동쪽 40리에 있다. 서쪽만 돌로 쌓은 것이, 둘레 45척이었는데 지금을 황폐해졌다, 동ㆍ남ㆍ북은 모두 절벽이다. 금성산고성(金城山古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 9천 백 척, 높이 13척으로 아주 높고 험하다. 안에는 네 곳의 샘물이 있다. 【명환】 본조 김속(金續) 성품이 청렴ㆍ정직하다. 상공(常貢)의 물품은 모두 보(寶 재단(財團))를 세워 백성들에게서 걷지 아니하였다. 정종소(鄭從韶) 정치에 성적이 있다. 【인물】 고려 김홍술(金洪術) 태조(太祖 왕건(王建)) 때의 아전[吏]으로서 성주(城主)가 되었다. 태조 12년 가을에 견훤(甄萱)이 갑졸(甲卒) 5천 명으로 쳐들어와 홍술이 전사하니, 태조가 울면서, “나는 좌우의 팔을 잃었구나.”라고 하였다. 홍유(洪儒) 궁예(弓裔)의 말년에 배현경(裵玄慶)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과 함께 기장(騎將)으로 있으면서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청주(靑州)가 배반하자. 유가 유검필(庚黔弼)과 더불어 진주(鎭州)를 진압했으므로 청주가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19년에 백제(百濟 후백제) 토벌에 따라가서 이를 멸망시켰다.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김훤(金晅) 원종(元宗) 초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환(淸宦)ㆍ요직(要職)을 많이 지냈다. 충선왕(忠善王)이 세자(世子)로서 원 나라에 가 있을 때 훤은 시독(侍讀)으로 따라갔다. 벼슬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성정(性情)이 깨끗하여 남과 잘 어울리지 않았으며,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호(號)는 철촌(鐵村)이다. 김개물(金開物) 훤(晅)의 아들이다. 처음 이름은 서정(瑞庭)이다. 성품이 굳세고 정직하였다. 시(詩)ㆍ서(書)ㆍ화(畫)에 모두 가법(家法)이 있었다. 남과 사귐에 있어 신용을 지켰다. 벼슬은 대간(臺諫)에 이르렀고, 옛날의 쟁신(爭臣)의 기풍이 있었다. 본조 김순(金淳)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희헌(僖憲)이다. 김말(金末)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장(文長)이다.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고, 가르치기를 열심히 했다. 『신증』【효자】 본조 제연동(諸延同) 어머니가 나쁜 질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약에 섞어 먹였더니 병이 금방 나았다. 금상(今上 중종(中宗)) 11년 정려(旌閭)되었다. 도금동(都今同) 아버지가 죽자 여묘(廬墓)살이하였고, 상(喪)이 끝나서도 상복(喪服)을 벗지 않았으며, 조석(朝夕)의 제사를 한결같이 하였다. 금상(今上) 16년에 정려(旌閭)되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남부(南部) 읍으로부터 끝이 15리이다. 북부(北部) 끝이 10리이다. 점점곡(點谷) 동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0리이다. 빙산(氷山) 동남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소야(巢野) 동남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80리이다. 산운(山雲)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가음(佳音) 동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상천(上川)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하천(下川)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석전(石田) 위와 같다. 금뢰(金磊) 위와 같다. 소문(召文) 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억곡(億谷)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안평(安平) 서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옥산(玉山)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귀산(龜山)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단촌(丹村)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5리이다. 외야(外也) 위와 같다. 내사곡(內舍谷) 동쪽으로 처음은 1리, 끝은 40리이다. 외사곡(外舍谷)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50리이다. 우곡(羽谷) 서북쪽으로 처음은 50리, 끝은 80리이며, 안동 남쪽 경계와 비안(比安) 북쪽 경계를 넘어 있다. 이혜(泥兮)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이며, 일계(日谿)의 옛 현이다. 구화(仇火) 북쪽으로 처음은 25리, 끝은 40이며, 고구(高邱)의 옛 현이다. ○ 반촌향(反村鄕)은 남쪽으로 25리, 신촌부곡(新村部曲)은 동북쪽으로 30리, 굴어곡부곡(屈於谷部曲)은 남쪽으로 5리, 우곡부곡(牛谷部曲)은 동쪽으로 30리, 골라소(骨羅所)는 동남쪽으로 50리이다. 【토산】 뽕[桑]ㆍ옷[漆]ㆍ닥종이[楮] 【누정】 기양정(岐陽亭)ㆍ능파정(凌波亭) 모두 서쪽으로 1리에 있다. 【사원】 빙계서원(氷溪書院) 명종(明宗) 병신년에 건립하고 선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김안국(金安國) 태묘(太廟) 조에 있다. 이언적(李彦迪) 문묘(文廟) 조에 있다. 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 모두 안동(安東) 조에 있다. 장현광(張顯光) 성주(星州) 조에 있다.
[주D-001]기신(紀信) :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사이에 있는 산인데, 당(唐) 나라 때 시인(詩人) 이백(李白)이, 이 산에서 글을 읽었다 한다. 여기서는 시 쓴 사람 자신의 옛날 글 읽던 곳이라는 뜻이다. [주D-002]팔사(八蜡) : 중국 하남(河南)현에 있는 성인데, 이백이 이 성을 지나면서, “광무성(廣武省) 가에서 모춘(暮春)을 만나니 문양(汶陽)으로 돌아가는 손의 눈물이 수건을 적신다.”라는 회고시를 지었다는 고사이다. 여기서는 시 쓴 사람 자신이 회고(懷古)하면서 눈물을 뿌린다는 뜻이다.
영덕현(盈德縣)
동쪽으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13리, 영해부(寧海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남쪽으로 청하현(淸河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41리, 서쪽으로 청송부(靑松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46리, 북쪽으로 진보현(眞寶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57리, 서울에서의 거리가 7백 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야시홀군(也尸忽郡)이다. 신라에서는 야성군(野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때 예주(禮州)에 귀속시켰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또 현령(縣令)으로 고쳤다. 본조에서는 태종(太宗) 15년에 바닷가에 있는 곳이라 하여 지현사(知縣事)를 두었다가 뒤에 도로 현령(縣令)으로 하였다. 【관원】 현령(縣令)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야시홀(也尸忽)ㆍ야성(野城) 【성씨】 본현 김(金) 전(全)이라 하기도 한다. 조(曹), 윤(尹)ㆍ조(趙)ㆍ정(鄭)ㆍ주(朱) 모두 촌성(村姓)이다. 박(朴) 내성(來姓)이다. 방(房) 속성(續姓)이다. 【형승】 땅이 동쪽 바닷가에 있다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땅은 동쪽의 바닷가에 끝나고, 산은 고을[州]과 함께 둘리웠다.” 하였다. 【산천】 무둔산(無芚山) 현 북쪽 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달로산(達老山) 현 서쪽 37리에 있다. 대둔산(大芚山) 현 서쪽 70리에 있다. 청송부(靑松府)와 경계가 된다. 암곡산(巖谷山) 현 북쪽 10리에 있다. 화림산(花林山) 현 북쪽 10리에 있다. 임물현(林勿峴) 현 북쪽 45리에 있다. 진보현(鎭寶縣)과 경계가 된다. 바다 현 동쪽 10리에 있다. 오십천(五十川) 현의 성 서쪽에 있다. 그 근원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임물현(林勿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달로산(達老山)에서 나온다. 현으로부터 지품원(知品院)에 이르는 50개의 건널목이 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포내천(浦內川) 현 남쪽 24리에 있으니, 곧 오십천(五十川)의 하류(下流)이다. 오포(烏浦)로 들어간다. 남역포(南驛浦) 남역(南驛)의 동쪽에 있다. 골곡포(骨谷浦) 현 남쪽 45리에 있다. 『신증』 빙혈(氷穴) 대둔산(大芚山)에 있다. 한 여름에도 딱딱한 얼음이 그냥 있다. 【토산】 송어(松魚)ㆍ전복[鰒]ㆍ방어(魴魚)ㆍ연어(鰱魚)ㆍ대구(大口)ㆍ문어(文魚)ㆍ상어[鯊魚]ㆍ청어(靑魚)ㆍ백조어(白條魚)ㆍ홍합(紅蛤)ㆍ미역[藿]ㆍ인삼(人蔘)ㆍ김[海衣]ㆍ자해(紫蟹)ㆍ죽전(竹箭) 남산(南山)ㆍ오보산(烏保山)ㆍ구배산(臼背山)에서 난다. 넙치[廣魚]ㆍ잣[海松子]ㆍ철(鐵) 무둔산(無芚山)에서 난다. 꿀[蜂蜜]ㆍ지치[紫草]ㆍ황어(黃魚)ㆍ은어[銀口魚]ㆍ해삼(海蔘)ㆍ참가사리[細毛]ㆍ애끼찌[弓幹木]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3백 97척, 높이는 12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 못 하나가 있다. 【관방】 오포영(烏浦營) 현 남쪽 17리에 있다. 수군만호(水軍萬戶) 1 인이 있다. 『신증』 현 남쪽 13리에 있다. 순변사(巡邊使) 고형산(高荊山)이 옛 군영은 바닷길을 내다볼 수 없다 하여 여기에 옮겨 설치하고 석성(石城)을 쌓았으니, 둘레는 1천 4백 90척, 높이는 9척이다. 【봉수】 황석산(黃石山) 봉수 현 남쪽 16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청하현(淸河縣)의 도리산(桃李山)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별반산 봉수에 응한다. 별반산(別畔山) 봉수 현 동쪽 18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황석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영해부(寧海府)의 대소산(大所山) 봉수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권근(權近)의 기(記)에, “영덕(盈德)은 바닷가에 있는 가장 멀고 궁벽한 곳이다. 오랫동안의 왜놈 등쌀에 백성들이 마을과 성터에서 숨어버린지 몇 해나 된다. 그러다가 성(城)이 수축되어 모여들게 되자 유민들이 조금 돌아와 조잡하나마 생업에 편안하게 되었다. 내 일찍이 귀양가는 길에 여기를 지났거니와, 그때에는 아직 관청의 건물이 없었다. 그 현령(縣令)이 거처하는 곳은 초가집 몇 칸으로 낮고 좁은 것이 민가와 다를 바 없었다. 홍무(洪武) 신미년(辛未年) 가을에, 계림(鷄林) 이인실(李仁實)이 이곳의 현령으로 오면서, 정사(政事)와 송사(訟事)가 제대로 되어 한 고을이 잘 다스려지게 되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공관(公館)을 짓기로 하였다. 그 다음해 가을에 산에서 나무를 벌채했고, 또 그 다음해 봄에 빗물로 물이 불었을 때 개울로 재목을 흘려보내니 실어나르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모두 성밑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청과 좌우의 방ㆍ문ㆍ낭하ㆍ부엌ㆍ마굿간 등이 모두 갖추어지게 되었다. 또 그 성에는 전부터 우물이 없었는데, 땅을 점쳐서 팠더니 먹을 수 있는 맑은 샘이 솟아 올랐다. 온 고을 사람들이 경축해 마지 않았다. 무릇 관청의 건물이란 빈객(賓客)을 접대하고 정령(政令)을 베푸는 곳이니 그 공이 큰 것이고, 우물은 조석(朝夕)으로 필요한 것이며 위급한 일에 준비가 되는 것이니 그 일이 절실한 것이다. 이후(李侯)의 정치는 이러한 일에 힘을 다 썼으니 급선무가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 고을 사람 진사(進士) 김적(金績)이 상경하여 나한테 와서 공부를 하면서 이 사적을 적어달라고 청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찬탄했다.” 하였다. 【누정】 청심루(淸心樓) 바로 성(城) 서문(西門)의 누각이다. 영락(永樂) 계묘년(癸卯年)에 지현(知縣) 최우(崔宇)가 건축했고, 천순(天順) 정축년(丁丑年)에 현령(縣令) 염상항(廉尙恒)이 중수했으며, 권람(權擥)이 기(記)를 적었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밤에 화초(華譙)에 묵으니, 둥그렇게 처마의 달이 밝도다. 향기는 해점(薤簟)에 녹아서 차갑고, 바람은 갈옷[葛衣]을 뚫어 시원하네. 산 빛은 가을의 기운과 짝하고, 여울 소리는 세상의 풍정을 씻도다. 총총히 병사를 점검하여 가니, 막중(幕中)의 평(評)이 부끄럽도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주등역(酒登驛) 현 동쪽 9리에 있다. 남역(南驛) 현 남쪽 21리에 있다. 북원(北院) 현 동쪽 2리에 있다. 주등원(酒登院) 주등역 곁에 있다. 남역원(南驛院) 남역 곁에 있다. 두아화원(豆牙禾院) 현 남쪽 35리에 있다. 신원(新院) 현 북쪽 20리에 있다. 지품원(知品院) 지품부곡(知品部曲)에 있다. 현에서의 거리는 44리이다. 『신증』 사동원(沙冬院) 현 남쪽 35리에 있다. 【불우】 옥천사(玉泉寺) 암곡산(巖谷山)에 있다. 사자갑사(獅子岬寺)ㆍ용천사(龍泉寺) 모두 대둔산(大芚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오보부곡(烏保部曲) 현 동쪽 바닷가에 있다. 이이아부곡(伊已牙部曲) 현 남쪽 25리에 있다. 지품부곡(知品部曲) 현 북쪽 70리에 있다. 고성(古城) 읍성(邑城)의 동문(東門) 밖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3천 3백 척이었는데 지금은 황폐해졌다. 달로산성(達老山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8천 3백 56척이다. 『신증』【명환】 본조 권오복(權五福). 【인물】 본조 정자영(鄭自英)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학(文學)으로써 뛰어나 40여 년간 사유(師儒)가 되었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제영】 궤안요청장(几案邀靑嶂) 홍여방(洪汝方)의 청심루시(淸心樓詩)에, “궤안(几案)에 푸른 봉우리를 부르고, 헌영(軒楹)에 푸른 개울이 그늘진다.” 하였다. 장류요남맥(長流繞南陌) 이원(李原)의 시에, “하늘 남쪽으로 멀리 온 손[客]이 되어, 바다 위로 외로이 선 성(城)에 오르네. 구름 걷히니 저녁의 산은 푸르고, 비 개이니 가을 해는 맑도다. 기나긴 흐름은 남쪽 길을 돌고, 훌륭한 나무는 안 마당에 있네. 지금은 변경(邊境)이 잠잠하니, 곳곳마다 거문고 타는 소리로세.”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진안(眞安) 서쪽으로 40리이고, 달로산(達老山) 아래에 있다. 본래는 신라의 조람(助攬)으로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진안(眞安)으로 고쳐 야성군(野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진보(眞寶)에 합하였으며, 현종 때에는 나누어 여기에 예속시켰다. 【방면】 읍내(邑內) 끝이 5리이다. 동면(東面) 처음은 5리, 끝은 25리이다. 중남(中南) 처음은 6리, 끝은 20리이다. 외남(外南) 처음은 20리, 끝은 50리이다. 서면(西面) 처음은 20리, 끝은 60리이다. 북면(北面)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 오보부곡(烏保部曲)은 동해(東海)의 연변에 있다. 이이재부곡(伊已才部曲)은 남쪽으로 25리이고, 지품부곡(知品部曲)은 서북쪽으로 17리이다. 【성지】 노산고성(老山古城) 둘레는 8천 3백 56척이며, 동쪽으로는 진안(眞安) 고현의 터가 있다. 【토산】 잣[海松子]ㆍ궁간(弓幹)ㆍ뽕[桑]ㆍ홍합(紅蛤) 【진보】 혁처(革處) 오포진(烏浦鎭) 남쪽으로 17리이다. 순변사(巡邊使) 고형산(高荊山)이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 현 남쪽 13리로 옮겼다. 중종조(中宗朝)에 축성(築城)하였다. 둘레는 1천 4백 90척이며, 수군만호(水軍萬戶)를 설치하고 후에 고쳤다.
봉화현(奉化縣)
동쪽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31리, 서쪽으로 안동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남쪽으로 예안현(禮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25리, 북쪽으로 강원도(江原道) 삼척부(三陟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74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8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고사마현(古斯馬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옥마(玉馬)로 고치고 나령군(奈靈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은 안동부(安東府)에 예속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은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太宗) 임금 때,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세조(世祖) 3년에 순흥(順興) 문수산(文殊山)의 물 동쪽의 땅을 떼어서 예속시켰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고사마(古斯馬)ㆍ봉성(鳳城)ㆍ옥마(玉馬) 【성씨】 본현 정(鄭)ㆍ금(琴)ㆍ석(石)ㆍ몽(蒙), 권(權) 안동(安東). 매토(買吐) 윤(尹) 물야부곡(勿也部曲)도 같다. 【풍속】 절약ㆍ검소를 숭상하며, 누에치기ㆍ뽕나무 가꾸기에 힘쓴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산천】 금륜봉(金輪峯) 현 북쪽 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문수산(文殊山) 현 북쪽 30리에 있다. 태백산(太白山) 현 북쪽 73리에 있다. 고려 최선(崔詵)의 예안(禮安) 용수사(龍壽寺) 기(記)에, “천하의 명산(名山)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三韓)의 명승(名勝)은 동남(東南)이 가장 뛰어나다. 동남의 거산(巨山)은 태백(太白)이 우두머리가 된다.” 하였다. 태자산(太子山) 현 남쪽 35리에 있다. 용점산(龍岾山) 현 서쪽 13리에 있다. 파탄암현(破呑巖峴) 태백산의 남쪽에 있으며 험한 곳이다. 강원도(江原道) 삼척부(三陟府)와의 경계이다. 신라현(新羅峴) 현 남쪽 15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왕의 태자(太子)가 내령군(奈靈郡)에서 놀다가, 군리(郡吏)의 딸을 사랑하게 되었다. 오래되니 고을 사람에게 부끄러워 살며시 돌아와 여기서 머물렀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매토천(買吐川) 매토부곡(買吐部曲)에 있다. 근원이 태백산의 황지(黃池)에서 나오는데, 바로 예안현(禮安縣)의 나화석(羅火石) 상류(上流)이다. 물야계(勿也溪) 현 북쪽 18리에 있다. 근원이 문수산에서 나와, 내성현(奈城縣)을 지나, 영천군(榮川郡)의 동쪽에 이르러서 임천(臨川)이 된다. 도미천(道美川) 현 동쪽 15리에 있다. 그 근원은 태백산에서 나오고, 매토천으로 들어간다. 『신증』 망일봉(望日峯) 현 서쪽 2리에 있다. 용연(龍淵) 태백산 아래 있다. 가물 때 기우(祈雨)하면 응험이 있다. 【토산】 잣[海松子]ㆍ석이버섯[石蕈]ㆍ인삼(人蔘)ㆍ수달(水獺)ㆍ산무애뱀[白花蛇]ㆍ석청[石淸蜜]ㆍ송이[松蕈]ㆍ은어[銀口魚] 【봉수】 용점산(龍岾山) 봉수 남쪽으로는 예안현(禮安縣)의 녹전산(祿轉山)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안동부(安東府) 내성현(奈城縣)의 당북산(堂北山) 봉수에 응한다. 『신증』【누정】 영풍루(迎風樓) 객관(客館)의 문루(門樓)이다. 【학교】 향교(鄕校) 현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도심역(道深驛) 현 남쪽 5리에 있다. 전에는 현 북쪽 30리에 있었는데, 태백산제(太白山祭)를 폐지한 뒤로 이곳에 옮겼다. 혹은 말둔(末屯)이라고도 부른다. 장불원(長佛院) 현 북쪽 45리에 있다. 마장리원(馬場里院) 현 남쪽 15리에 있다. 태자산원(太子山院) 현 남쪽 25리에 있다. 【불우】 태자사(太子寺) 태자산(太子山)에 있다. 신라 병부 시랑(兵部侍郞) 최인연(崔仁渷)이 지은 승랑공탑명(僧朗空塔銘)과 고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김심언(金審言)이 지은 승통지납명(僧通眞塔銘)이 있다. 지림사(智林寺)ㆍ금정암(金鼎菴) 모두 문수산(文殊山)에 있다. 남화사(覽華寺) 태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물야부곡(勿也部曲) 별호는 모산(冒山)이다. 현 북쪽 10리에 있다. 양곡부곡(良谷部曲) 현 서북쪽 7리에 있다. 매토부곡(買吐部曲) 별호는 청둔(靑芚)이다. 본래 안동부(安東府)에 속해 있었는데, 고려 공양왕(恭讓王) 3년에 여기로 귀속되었다. 현 동쪽 14리에 있다. 【인물】 고려 금의(琴儀) 체격이 기걸하고 도량이 컸다. 젊어서 공부에 힘을 기울여 글을 잘 지었다. 명종(明宗) 임금 때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많은 요직을 지냈다. 희종(熙宗) 때 지주사(知奏事)로 옮겨서 오랫동안 기요(機要)를 맡아 주대(奏對)ㆍ칭지(稱旨)하였으니, 임금이 크게 의지하였다. 강종(康宗)이 즉위할 때 금(金)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책명(冊命)하게 되었다. 금 나라의 사신이 정문(正門)으로 들어오려 했는데, 조정의 의론이 이를 옳게 여기지 않아, 왕복하면서 서로 따지게 되었다. 임금이 의(儀)에게 가서 잘 타이르도록 하명하였다. 의가 묻기를, “천자(天子)가 사방의 산악을 순수(巡狩)하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것이오. 대국(大國)에서 소국(小國)에 왕필(枉蹕)하면 어느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마땅하오.” 하니, 금 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천자가 출입하는 데 있어, 중문(中門)을 젖혀 놓고 어디로 할 것이오.” 하여 “그렇다면 신하가 임금의 정문으로 들어오게 하려하는 것이 옳은 일이오.” 하자, 금 나라 사신은 감복하고 서문(西門)으로 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기쁘게 여겨,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使)로 승진시켰다. 고종(高宗) 때 수 태보 동중서문하시랑 평장사(守太保同中書門下侍郞平章事)로서 치사(致仕)하였다. 여러 차례 공거(貢擧 주군(州郡)에서 준수한 자제를 선발하여 추천하는 일)를 맡아, 그 가운데 명사(名士)가 많이 나왔으니, 세상에서는 이르기를, ‘금학사옥순문생(琴學士玉筍門生)’이라고 하였다. 시호는 영렬(英烈)이다. 정운경(鄭云敬) 충숙왕(忠肅王) 때 과거에 급제, 상주 사록(尙州司錄)에 보임되고,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옮기어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를 존무(存撫)하였으며, 들어가서는 지형부사(知刑部事)가 되고 얼마 안 있어 형부 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뒤에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으로 병(病)을 이유로 영천(榮川)에 귀향했다가 졸(卒)하였다. 운경이 충목왕(忠穆王) 때, 서운부정(書雲副正)으로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하정(賀正)하러 원 나라에 갔는데, 당시 기황후(奇皇后)가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였으므로 중귀(中貴)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들이 음식을 베풀면서 몹씨 거만하게 굴었다. 운경은 정색하고 말하기를, “오늘 음식을 베푸는 것은 옛주인을 위한 것이오.” 하니 중귀들은 놀라서 말하기를, “수재(秀才)가 우리를 가르쳐 주었다.” 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한 뒤, 운경이 법을 지키면서 권세가들에게 굽히지 않았다 해서 내전(內殿)에 불러들여 술을 내렸다. 아들은 도전(道傳)ㆍ도존(道尊)ㆍ도복(道復)이 있다. 정송수(鄭松壽) 공민왕(恭愍王) 때, 호종(扈從)하여 1등공신이 되고, 봉화부원군(奉化府院君)으로 봉(封) 받았다. 본조 정도전(鄭道傳) 자(字)는 종지(宗之)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주사록(忠州司錄)에 뽑혔고,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다.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신우(辛隅 폐왕(廢王) 우(隅)) 초에 언사(言事)로 인하여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가 곧 용서되어 편히 살았다. 삼각산(三角山) 아래 오두막집을 지었는데, 글공부하는 사람이 많이 따랐다. 후생들에게 이단(異端)을 없애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라고 늘 훈계했다.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승진되었다가 군(郡)으로 나갈 것을 빌어 남양부(南陽府)의 원이 되었다. 태조(太祖)를 따라 공양(恭讓)을 세웠으므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하사되었다. 곧이어 정당문학 동판도평의사사사(政堂文學同判都評議使司事)를 배수하였다. 병(病) 때문에 물려줄 것을 빌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공양왕(恭讓王) 때 대간(臺諫)을 비훼(非毁)한 것으로 인해서 봉화현(奉化縣)에 방귀(放歸)되었다. 뒤에 소환되어 충의군(忠義君)에 다시 봉(封)해지고 여러 관직을 지냈다. 본조에서 봉화백(奉化伯)에 봉하였는데 뒤에 죄를 지어 주살되고 훈봉(勳封)이 삭탈되었다. 정진(鄭津) 도전(道傳)의 아들이다. 벼슬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신증』 정문형(鄭文炯) 진(津)의 손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영중추(領中樞)에 이르렀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제영】 금륜봉올약지천(金輪峯兀若支天) 강윤(姜允)의 시에, “금륜봉의 우뚝함은 하늘을 받친 듯하고, 도미천(道美川)의 흐름은 바닷가에 닿았다.” 하였다. 창등찬공수목교(蒼磴攢空樹木交)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푸른 돌길은 하늘 뚫고 나무를 엇갈리는데, 두세 농가는 노란 띠풀을 덮고 있다. 주민들이야 어찌 알리 강호(江湖)의 맛을, 산나물 조금 캐어 술 안주를 마련한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5리. 중동(中東) 처음은 5리, 끝은 20리. 상동(上東) 안동 북쪽 경계 너머 있으며, 동쪽은 소천(小川)이라 하고, 남쪽은 재산(才山)이라 하며, 서쪽은 춘양(春陽)이라 한다. 북쪽은 영월(寧越)의 상동(上東)과 삼척(三陟)의 상장성(上長省) 경계에 접해 있으며, 처음 경계는 40리이고, 끝 경계는 80리이다. 남면(南面) 끝은 40리. 서면(西面) 처음은 5리, 끝은 15리. 북면(北面)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물야(勿野) 북쪽으로 끝은 15리인데, 본래는 물야부곡이다. ○ 미량곡부곡(彌良谷部曲)은 서북쪽으로 7리이다. 매토부곡(買吐部曲)의 별호는 청둔(靑屯)이며 본래 안동 땅인데, 공양왕(恭讓王) 2년에 여기에 예속되었고, 상동면(上東面) 남쪽 경계에 있다. 【궁실】 선원각(璿源閣)ㆍ실록각(實錄閣)ㆍ사고(史庫) 모두 각화사(覺華寺)에 있으며 곁에는 참봉(參奉) 및 수직군(守直軍)이 있다. 【사원】 문암서원(文巖書院) 광해주(光海主) 병진년(丙辰年)에 건립하고 숙종(肅宗) 갑술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이황(李滉) 문묘(文廟)에 보라. 조목(趙穆) 예천(醴泉)에 보라.
진보현(眞寶縣)
동쪽으로 영덕현(盈德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0리, 영해부(寧海府) 경계까지 15리, 남쪽으로 청송부(靑松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8리, 서쪽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0리, 북쪽으로 영해부(寧海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3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6백 16리이다. 【건치연혁】 칠파화현(漆巴火縣)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진보(眞寶)로 고치고,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조람현(助攬縣)을 경덕왕이 진안(眞安)으로 고치고, 야성군(野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는데, 고려 초에 두 현을 합하여 보성부(甫城府)를 설치하였다 어떤 이는 재암성(載巖城)이라고도 한다. 현종(顯宗)은 예주(禮州)에 귀속시켰는데 뒤에 왜구(倭寇)로 인하여 주민이 싹 없어졌다. 본조에서는 태조(太祖) 때 보성감무(甫城監務)를 두었다. 세종(世宗)은 청부(靑鳧)에 합쳐 청보군(靑寶郡)이라 불렀다가 얼마 안 있어 이를 파하고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다시 현감(縣監)을 삼았다. 성종(成宗) 5년에 현인(縣人) 금맹함(琴孟諴)이 현감(縣監) 신석동(申石同)을 구타 모욕하였다 해서, 청송부(靑松府)에 혁속(革屬)시켰는데, 9년에 토인(土人)들이 신소(申訴)하였으므로 복구(復舊)시켰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칠파화(漆巴火)ㆍ조람(助攬)ㆍ진안(眞安)ㆍ보성(甫城)ㆍ재암(載巖)ㆍ청보(靑寶)ㆍ진해(眞海). 【성씨】 본현(本縣) 조(趙)ㆍ이(李)ㆍ김(金)ㆍ박(朴)ㆍ백(白), 전(全) 속성(續姓)이다. 춘감(春甘) 오(吳) 파질(巴叱)도 같다. 【산천】 남각산(南角山) 현 남쪽 8리에 있다. 고산(高山) 현 서쪽 10리에 있다. 둔동산(芚洞山) 현 동쪽 20리에 있다. 임물현(林勿縣) 현 동쪽 20리에 있다. 신한천(神漢川) 현 북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은 영해부(寧海府)의 일월산(日月山)에서 나와, 안동부(安東府)를 지나면서 와부탄(瓦釜灘)이 되었다가 견항진(犬項津)에 합쳤다. 남쪽 기슭은 4백여 척의 석벽(石壁)이 되어 있어 이에 의해 성터[城基]로 삼았으나 아직 성을 쌓지는 못했다. 『신증』 추현(楸峴) 현 서쪽 15리에 있다. 【토산】 송이[松蕈]ㆍ지치[紫草]ㆍ꿀[蜂蜜]ㆍ인삼(人蔘)ㆍ지황(地黃)ㆍ백복령(白茯苓)ㆍ석이버섯[石蕈]. 【봉수】 남각산(南角山) 봉수 동쪽으로는 영해부(寧海府)의 광산(廣山) 봉수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안동부(安東府) 임하현(臨河縣)의 약산(藥山) 봉수에 응한다. 【정사】 압각대(鴨脚臺) 객관(客館)의 북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다행히도 동헌 앞에 압각대가 있어, 과객을 받으므로 갔다가는 돌아오네. 강남(江南)에서 어느 누구 장대류(章臺柳 유곽의 버들을 가리킴)를 부르는고, 농상(隴上)에는 아무도 역사매(驛使梅 매화의 별명)를 기대지 않네. 붉은 나무는 가까워 짙음이 떨어질 듯하고, 푸른 산은 눈앞에 우뚝함이 쌓여 있네. 늙은이가 힘써 일했지만 무슨 일을 이루었는고, 세월은 유유히 술잔에 부쳤거늘.”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현(縣) 남쪽 4리에 있다. 【역원】 보시원(普施院) 현 동쪽 1리에 있다. 보현원(普賢院) 현 동쪽 30리에 있다. 추현원(楸峴院) 현 서쪽 15리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구름 길은 꼬불꼬불 돌길은 서리서리, 산허리에 원(院)집 두세 칸이 있고나. 우레 소리 벽을 돌아 두 개울 합치고, 빗발 하늘에 이어 만 그루 옹기종기. 말은 꼬부랑길 밟으며 구름 밖으로 가고, 사람은 새등[鳥背] 내려보며 봉우리 속으로 돌아온다. 자식 생각하는 것 시인(詩人)이 아니니, 무슨 일로 한갓 촉도난(蜀道難)을 읊었나.” 하였다. 삼두등원(三豆等院) 현 동쪽 15리에 있다. 【불우】 수정사(水淨寺) 남각산(南角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2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천숙부곡(泉宿部曲) 현 동쪽 10리에 있다. 춘감부곡(春甘部曲) 현 북쪽 10리에 있다. 파질부곡(巴叱部曲) 현 남쪽 15리에 있다. 고을마부곡(古乙亇部曲) 현 동쪽 30리에 있다. 성부부곡(省夫部曲) 현 북쪽 30리에 있다. 【인물】 본조 조용(趙庸) 벼슬은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학문이 넓고 문장을 잘했는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다. 일찍이 예천군(醴泉郡)에 귀양살이하면서 후진을 가리키는 데에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명사(名士)가 많이 나왔다. 조말생(趙末生)ㆍ윤상(尹祥)ㆍ배항(裵恒)ㆍ배강(裵杠)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다. 『신증』 이우(李堣)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시명(詩名)이 있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하리(下里) 사방으로 끝이 5리이다. 상리(上里)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동면(東面)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남면(南面) 처음은 5리이고, 끝은 25리이다. 서면(西面) 처음은 7리이고 끝은 25리이다. 북면(北面)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 천숙부곡(泉宿部曲)은 동쪽으로 10리이고, 춘감부곡(春甘部曲)은 북쪽으로 10리이다. 파질부곡(巴叱部曲)은 남쪽으로 15리이고, 고을마부곡(古乙亇部曲)은 동쪽으로 30리이며, 성부부곡(省夫部曲)은 북쪽으로 30리이다. 【봉수】 신법산(神法山) 서쪽으로 10리이다. 읍창(邑倉)ㆍ북창(北倉) 북면에 있다. 【창고】 봉각서원(鳳覺書院) 선조(宣祖) 임인년에 건립하고 숙종(肅宗) 경오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문묘(文廟)에 보라.
군위현(軍威縣)
동쪽으로 의성현(義城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5리, 남쪽으로 의흥현(義興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24리, 서쪽으로 선산부(善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16리, 북쪽으로 비안현(比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20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5백 7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노동멱현(奴同覓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숭선군(嵩善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은 상주(尙州)에 귀속시켰고, 인종(仁宗)은 다시 일선현(一善縣)에 귀속시켰으며, 공양왕(恭讓王)은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속현】 효령현(孝靈縣) 영(靈)은 영(令)이라 쓴 곳도 있다. 현 서남 35리에 있다. 본래 신라 모혜현(芼兮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숭선군(嵩善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은 상주(尙州)에 귀속시켰고, 인종(仁宗)은 다시 일선현(一善縣)에 귀속시켰으며, 공양왕(恭讓王) 때 여기에 내속시켰다. 본조에서도 이에 따랐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노동멱(奴同覓)ㆍ적라(赤羅). 【성씨】 본현(本縣) 박(朴)ㆍ나(羅)ㆍ방(方)ㆍ서(徐)ㆍ오(吳) 효령(孝靈) 유(劉)ㆍ사공(司空)ㆍ도(陶)ㆍ택(澤)ㆍ박(朴)ㆍ김(金)ㆍ손(孫) 모두 내성(來姓)이다. 변(卞)ㆍ탁(卓) 모두 속성(續姓)이다. 【풍속】 풍속이 순후ㆍ질박하다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의 주(註)에, “풍속이 순후ㆍ질박하다. 비록 고을의 호가(豪家)라도 호미ㆍ쟁기를 들고 농사에 부지런하며, 호가의 부녀들도 비단옷을 입지 아니한다.” 하였다. 【산천】 마정산(馬井山) 현 동남 5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박달산(朴達山) 효령현에 있다. 본현(本縣)에서의 거리는 남쪽으로 24리이다. 한적산(韓敵山) 현 남쪽 15리에 있다. 기우봉(祈雨峯) 현 서쪽 7리에 있다. 옛 기우단(祈雨壇)이 있으므로 붙은 이름이다. 풍현(風峴) 현 서쪽 10리에 있다. 추현(槌峴) 현 서쪽 16리에 있다. 병천(幷川) 현 남쪽 11리에 있다. 의흥현(義興縣)의 남천(南川) 및 부계현(缶溪縣)의 남천(南川)이 합쳐서 하나의 개울이 된 것이므로 붙은 이름이다. 현 서쪽을 지나 북쪽으로 가서 비안현(比安縣)의 남천(南川)이 된다. 남천(南川) 현 남쪽 1리에 있다. 한적산(韓敵山) 아래까지 흘러가서는 병천(幷川)이 된다. 『신증』 화산(花山) 현 서쪽 25리에 있다. 농암(籠巖) 현 북쪽 13리에 있다. 뇌현(磊峴) 효령현 동쪽 7리에 있다. 【토산】 송이[松蕈]ㆍ꿀[蜂蜜]ㆍ옷[漆]ㆍ지치[紫草]ㆍ사기그릇[沙器]ㆍ목화씨[綿子]. 【학교】 향교 현 동쪽 2리에 있다. 【봉수】 마정산(馬井山) 봉수 남쪽으로는 박달산(朴達山)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비안현(比安縣) 간검산(肝岾山) 봉수에 응한다. 박달산(朴達山) 봉수 남쪽으로는 의흥현(義興縣)의 토현(吐峴)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마정산 봉수에 응한다. 【역원】 소계역(召溪驛) 현 남쪽 41리 효령현(孝靈縣)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아침에는 사공경(謝公鏡)을 슬퍼하고, 저녁에는 양자기(楊子岐)를 우노라. 한 가닥 마음은 해 밑에 걸리고, 외로운 형적은 하늘 끝에 날리노라. 양장(羊腸 꼬불랑길)은 모두가 험한 것은 아니고, 호미(虎尾 위험한 일)는 어찌 족히 위험할 것인가. 인간 세상에 있어 총애ㆍ모욕을, 하나로 보는 사람은 바로 대장부이어라.” 하였다. 장수원(長水院) 현 남쪽 9리에 있다. 천보원(天寶院) 현 북쪽 5리에 있다. 의성원(義省院) 현 북쪽 16리에 있다. 상원(上院) 현 남쪽 36리에 있다. 창고원(倉庫院) 현 남쪽 23리에 있다. 【불우】 월영사(月影寺) 영방산(迎邦山)에 있다. 마정사(馬井寺) 마정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동쪽 5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김유신사(金庾信祠) 효령현(孝靈縣) 서악(西岳)에 있는데, 삼장군당(三將軍堂)이라 속칭된다. 매년 단오(端午)날에 현(縣)이 수리(首吏)가 고을 사람을 거느리고 역기(驛騎)에 기(旗)ㆍ북[鼓]을 달고 신(神)을 맞이하면서 거리를 누빈다. ○ 허추(許樞)의 시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장수[古將]는 서성(西城)의 주인이라고, 풍속이 내려와 오늘도 제사가 분명하구나. 해마다 단오날을 어기지 아니하니, 깃발 세우고 북치면서 신의 뜻 위로하는구나.” 하였다. 【고적】 소소보부곡(召召保部曲) 현 서쪽 10리에 있다. 잉미곡부곡(仍未谷部曲) 효령현 북쪽 15리에 있다. 【효자】 본조 박약지(朴約之) 나이 17세에 부상(父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에 3년 동안 거처하여 지팡이를 짚고야 일어났고, 뒤에 모상(母喪)을 당하여서도 또 여막에 3년 동안 거처했다. 어느날 들불이 여막에까지 번지려하는 것을 보고 약지가 소리쳐 울었더니 불이 저절로 꺼졌다. 사람들은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여겼다. 【열녀】 본조 서씨(徐氏) 고(故) 낭장(郎將) 서사달(徐思達)의 딸이다. 같은 현 사람 도운봉(都雲峯)에게 시집갔는데, 겨우 1년 만에 지아비가 죽었다. 지나치게 슬퍼하면서, 늘 집 뒤 대밭에 들어가 대나무를 부둥켜 안고 울었다. 선덕(宣德) 계축(癸丑)년 봄, 어느날 갑자기 흰 대나무 세 떨기가 나왔는데, 3년 만에 7ㆍ8 떨기가 되었다. 정통(正統) 무오(戊午)년 봄에 세종대왕(世宗大王)이 흰 대나무를 그림 그려 들이라고 하명하셨고, 복호(復戶)하고 정문(旌門)을 세우셨다. 【제영】 희희상유고순풍(熙熙尙有古淳風)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십 리 길에 쭈욱 이은 뽕나무와 삼밭, 화목한 모습은 그냥 옛날의 순박함이라. 밭갈이는 본래 백성들의 일이니, 비단은 어찌 작은 여자들의 일을 방해하랴. 꽃이 흩어지니 봄은 지나 붉음이 땅에 깔리고, 보리 물결치니 여름을 맞아 푸름은 하늘에 닿았어라. 한가롭기 인간 세상 같지 않고, 아마도 화서(華胥)가 꿈속에 떨어진 듯.” 하였다. 산전계회작일성(山轉溪回作一成) 윤상(尹祥)의 효령현시(孝靈縣詩)에, “산이 맴돌고 물이 휘돌아 한 성을 이루고, 두어 집 치장된 것 그림처럼 밝아라.”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고읍】 효령(孝靈) 서남쪽으로 35리이다. 본래 신라의 모혜(芼兮)인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효령으로 고쳐 숭선군(嵩善郡) 영현으로 삼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상주(尙州)에 속했는데, 인종(仁宗) 21년에 다시 일선(一善)에 속했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에 내속했다. 【방면】 현내(縣內) 끝은 3리이다. 동리(東里) 처음은 3리이고, 끝은 15리이다. 서리(西里) 서북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성동(城東)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중리(中里)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5리이다. 효령(孝令) 남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석본(石本) 북쪽으로 처음은 15리이고 끝은 25리이다. 화곡(花谷) 서북쪽으로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남면(南面) 처음은 3리이고 끝은 15리이다. ○ 소소보부곡은 서쪽으로 10리이고, 잉미곡부곡은 남쪽으로 20리이다. 【창고】 읍창(邑倉)ㆍ화곡창(花谷倉) 화곡면이다. 효령창(孝令倉) 효령 고현이다. 【누정】 준희루(畯喜樓) 현내. 침류정(枕流亭) 남쪽으로 2리이다. 귀영정 북쪽으로 7리이다. 연어정 서쪽으로 35리이다. 【사원】 김발한사(金發翰祠) 효령(孝靈) 서쪽 산악에 있으며, 신라 때에 건립하였고, 매해 단오일(端午日)에는 수리(首吏)가 가서 제사를 지낸다. 김유신(金庾信) 경주(慶州)에 보라.
비안현(比安縣)
동쪽으로 의성현(義城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6리, 남쪽으로 군위현(軍威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17리, 서쪽으로 선산부(善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2리, 상주(尙州) 경계에 이르기까지 21리, 북쪽으로 예천군(醴泉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33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5백 3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아화옥현(阿火屋縣)이다 병옥(幷屋)이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이 비옥(比屋)이라 고치고 문소군(聞韶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이 상주목(尙州牧)에 귀속시켰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안정현(安貞縣)을 병합하였다. 본조 세종(世宗) 3년에 비안현(比安縣)이라 고쳐 부르고, 5년에 치소(治所)를 비옥으로 돌리고 이어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속현】 안정현(安貞縣) 정(貞)은 정(定)이라 된 곳도 있다. 현 북쪽 17리에 있다. 본래 신라 아시혜현(阿尸兮縣)이다. 경덕왕이 안현(安賢)이라 고치고 문소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은 상주(尙州)에 귀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고 비옥을 겸임하게 하였다. 우리 세종(世宗)께서 안비(安比)라 고치고 비옥에 치소를 옮기고 비안(比安)이라 고쳐 부르며 계속 귀속시켰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아화옥(阿火屋)ㆍ병산(屛山)ㆍ비옥(比屋)ㆍ병옥(幷屋). 【성씨】 비옥(比屋) 박(朴)ㆍ손(孫)ㆍ원(袁)ㆍ장(張), 소(邵) 정(鄭)이라 하기도 한다. 나(羅) 모두 내성(來姓)이다. 안정(安貞) 오(吳)ㆍ임(林)ㆍ나(羅)ㆍ박(朴) 밀양(密陽). 김(金) 속성(續姓)이다. 신평(新平) 팽(彭) 하필점(下筆坫)ㆍ물실(勿失)의 두 부곡(部曲)도 같다. 황(黃)ㆍ임(林) 모두 속성(續姓)이다. 【풍속】 백성은 순박하고 풍속은 검소하다 박결(朴潔)의 시에, “백성은 순박하고 풍속은 검소하여 옛날 풍습이 남아 있네.” 하였다. 【형승】 쌍계(雙溪)가 띠처럼 둘러있고, 겹겹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있다 정종주(鄭宗周)의 시에, “쌍계는 얇은 비단 띠처럼 돌았고, 겹친 봉우리는 무늬 있는 비단 병풍처럼 둘렀도다.” 하였다. 【산천】 성황산(城隍山) 현 북쪽 1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대암산(大巖山) 안정현 서쪽 3리에 있다. 간점산(肝岾山) 현 남쪽 7리에 있다. 남천(南川) 현 남쪽 1리에 있다. 바로 군위현(軍威縣) 병천(幷川)의 하류이다. 쌍계(雙溪) 현 동쪽 10리에 있다. 의성현(義城縣) 병천(幷川)의 하류이다. 또 북쪽으로 흘러 남천(南川)과 합쳐 상주(尙州) 단밀현(丹密縣)에 이르러 낙동강(洛東江)에 들어간다. 저지(猪池) 안정현(安貞縣) 서쪽에 있다. 개천지(開天池) 현의 북쪽 21리에 있는데 현감 이간(李玕)이 쌓았다. 『신증』 성안굴(聖安窟) 현 북쪽 11리에 있다. 관어대(觀魚臺) 안정현 남쪽 5리에 있다. 【토산】 꿀[蜂蜜]ㆍ옷[漆]ㆍ지치[紫草]ㆍ인삼(人蔘). 【궁실】 요산헌(樂山軒) 바로 객관(客館)의 동헌(東軒)이다. ○ 김지경(金之慶)의 기(記)에, “공자의 말씀에,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樂山],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다. 무릇 궁실(宮室)을 경영하는 이는 땅을 선택함에 있어 산수(山水)의 명승지를 얻지 못한다면 비록 사치를 다한다 하더라도 후세에서는 높이지 않을 것이니, 택할 점이 무엇있겠는가. 이 헌(軒)으로 말한다면, 여기에 앉아 사방을 돌아 볼 때 푸른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려져 있고, 산골물이 띠처럼 앞에서 흐르고 있어 실로 산에 오르고 물가에 가는 듯한 멋이 있다. 산수의 즐거움이 모두 갖추어 있는 것이다. 그밖에 제도(制度)의 교묘함이나 단청의 아름다움은 다만 나머지 일이다. 이제부터 이 헌에 오르는 이는 산수의 즐거움을 좌우에서 취하여도 그 근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현의 별호가 본래 병산(屛山 병풍 같은 산)이니, 산수를 병풍에 그리는 것이 산수를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못하다. 이렇게 해서 병풍의 뜻을 취하고, 감히 요산(樂山)으로써 이 마루의 이름를 삼고자 하거니와, 괜찮을 것인지.” 하였다. 【봉수】 간점산(肝岾山) 봉수 남쪽으로는 군위현(軍威縣) 마정산(馬井山)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대암산 봉수에 응한다. 대암산(大巖山) 봉수 남쪽으로는 간점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예천군(醴泉郡) 소이산(所伊山) 봉수에 응한다. 【누정】 구요루(衢謠樓) 객관의 동쪽에 있다. ○ 하륜(河崙)의 기(記)에, “친시과(親試科)의 제삼인(第三人), 우정언(右正言) 지제교(知製敎)인 박서생(朴瑞生) 군이 장차 고향에 가서 선영(先塋)을 배소(拜掃 성묘(省墓))하려 하면서, 나에게 작별하고는 또 요청하기를, ‘나의 고향 비옥(比屋)은 전에 상주(尙州)의 속현(屬縣)이었는데, 주(州)에서 60여 리나 떨어져 있어 현리(縣吏)가 5일에 1차씩 주로 찾아가 청명(聽命)하면서도 혹시 미치지 못할까 겁을 내고 가끔 급한 일이 있어 주리(州吏)가 현(縣)에 오게 되면 현리를 욕보이고 현민(縣民)을 못살게 함을 다 말할 수 없었소. 전조 말경에는 일이 모두 창졸(倉卒)한 것이 많아, 현의 형세는 날로 궁축하였소.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그 까닭을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속현(屬縣)이 주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모두 감현관(監縣官) 1명을 두어 스스로 다스리게 하므로 우리 고장도 예에 따라 관원을 얻게 되었는데, 이 뒤로 아전이나 백성이 조금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오. 계미(癸未)년 봄에 감현관(監縣官) 유양(兪讓) 군이 도착하여서는 일을 일으키고 없앨 것에 대해서 모두 잘 처리하였소. 하루는 현의 부로(父老)를 모아 놓고 말하기를 「관우(館宇)는 사명(使命)을 접대하고 덕위(德威)를 베푸는 곳이오. 현이 이제는 앞서와 비교가 안 되게 달라졌소. 그런데 관우가 이처럼 좁아서야 여름철의 더위를 당해서는 사명을 편히 모실 수 없는 것이니, 부로들도 이것이 부끄럽지 않소.」라고 하니, 모두들 「명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소. 관(館)의 남쪽에는 큰 길[通衢]이 있고, 고목 두어 그루가 길을 에워싸고 높았다오. 이에 그 그늘에다 누대 3칸을 지었으니, 농한기를 틈타서 백성을 부역시킴으로 며칠 사이에 준공을 봤소. 그 위에 앉아 사방을 돌아보면 푸른 산은 곁에 둘러 있고, 산골물은 앞에 흐르며, 녹음은 온 땅에 깔리고, 청풍은 절로 불어와, 실로 산에 오르고 물가에 나간 것 같았다오. 청하건대 그대가 이름 짖고 기(記)를 적어주어 우리 현을 빛내주기 바라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글이 유치한데 어찌 감히 하겠소. 그러나 내 일찍 듣건대, 요순(堯舜)의 백성은 집집마다[比屋] 봉(封) 받을 수 있었다 하였소. 이제 비옥이란 이름을 듣고 보니 마음에 느낌이 없을 수 없구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성인(聖人)의 글을 읽었으니, 어느 누구인들 요순 시대의 임금과 백성의 뜻을 갖지 아니할 것이오. 그러나 필경에 이를 능히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소. 대개 요순의 도리는 인(仁)ㆍ의(義)일 뿐이니, 인의(仁義)는 사람 마음에 본디 있는 이치요, 사람들이 모두 이 마음이 있다면, 마음에 모두 이 이치가 있는 것이오. 다만 마음을 다하지 못할 뿐인 것이니, 위로 마음을 다하는 임금이 있고, 아래로 마음을 다한 신하가 있어, 이런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난다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었소. 정언(正言 박서생(朴瑞生))은 이미 비옥의 세가(世家)이므로 일찍이 비옥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니, 요순 시대의 임금ㆍ백성의 뜻을 가진 것도 얕지 않을 것이오. 휴가(休嘉 경사(慶事))를 만나 대정(大庭)에서 책문을 지어 시종(侍從)의 열(列)에 뛰어올려 언책(言責)으로 벼슬을 주었으니, 임금의 알아주심이 깊지 않음이 아닌즉 그대의 책임이 장차 클 것이오. 뒷날, 요순 시대의 군민(君民)의 마음으로써 요순 시대의 군민의 정치를 행하여 우리나라가 집집마다[比屋] 봉(封) 받을 수 있는 풍속을 이루게 된다면, 반드시 그대의 현에서 시작될 것이오. 봉 받을 수 있는 풍속이 있다면 반드시 강구요(康衢謠 요임금 때, 요의 덕에 의하여 천하가 절로 다스려지게 된 것을 구가한 동요임)가 있을 것이오. 관(館)의 남쪽에 누대가 있고, 누대의 남쪽에 큰 길[衢]이 있으니, 현민(縣民)들의 노래[謠]가 이 길[衢]에 끊이지 않을 것이오. 이 누대에 올라 이 노래를 듣는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소. 그러니 감히 구요(衢謠)로써 누대의 이름을 삼아도 괜찮지 않겠소.’ 하였다. 정언(正言)이 절하면서 말하기를, ‘크신 말씀이오. 추생(鯫生 소인)이 어찌 감히 이에 해당되겠소. 그러나 이 뜻을 돌아가서 감히 향인(鄕人)ㆍ부형(父兄)에게 말씀드려 이를 따르고 잊지 않게 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였다. 나는 늙어서 마음을 다하지 못하였으나, 이미 누정의 이름을 지었고 거듭 마음에 느낌이 생겨 이를 적어 기(記)로 삼는다.” 하였다. 『신증』 쌍명루(雙明樓)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안계역(安溪驛) 현 북쪽 29리에 있다. 쌍계역(雙溪驛) 현 동쪽 10리에 있다. 흥계원(興係院) 현 서쪽 19리에 있다. 옥미원(玉彌院) 현 동쪽 14리에 있다. 장족원(長足院) 현 북쪽 5리에 있다. 저천원(楮川院) 현 북쪽 19리에 있다. 안계원(安溪院) 현 북쪽 28리에 있다. 가차원(加次院) 현 동쪽 15리에 있다. 【불우】 용천사(龍泉寺)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안장사(安長寺) 무거산(無居山)에 있다. 미흘사(彌屹寺) 봉미산(鳳尾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1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퇴곡부곡(退谷部曲) 현 동쪽 10리에 있다. 신평부곡(新平部曲)ㆍ하필점이부곡(下筆坫伊部曲)ㆍ물실부곡(勿失部曲). 【인물】 본조 박서생(朴瑞生) 태종(太宗) 임금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이조 참의(吏曹參議) 가선대부(嘉善大夫)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에 이르렀다. 【효자】 본조 유포(柳砲) 벼슬은 경산 현령(慶山縣令)에 이르렀다. 모상(母喪)에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하였다.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旌閭)되었다. 【제영】 관거금랭락(官居今冷落) 김겸(金謙)의 시에, “관거는 이제 영락했고, 고와(古瓦)는 푸른 이끼 끼었어라.” 하였다. 사산송취근첨영(四山松翠近簷楹 이영견(李永肩)의 시에, “사산의 푸른 솔 처마에 가깝고, 계하(階下)의 차가운 못 속속드리 맑도다.” 하였다. 쌍계합포옥만회(雙溪合抱玉灣回)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쌍계는 합하여 옥만 감싸 돌아드니, 공관(公館)은 여전하고 도서(島嶼)는 펼쳐졌네. 말은 푸른 다리 건너니 자라의 등을 지나는 듯, 새가 파란 벽에 날아드니 그림속으로 들어온 듯.”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조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안정(安貞) 북쪽으로 17리인데, 본래 신라 문시혜(問尸兮)이며, 아을혜(阿乙兮)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안현(安賢)으로 고쳐 문소군(聞韶郡)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太祖) 23년에 안정(安貞)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상주에 예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비옥(比屋)을 병합했다. 본조 세종조(世宗朝)에 두 현을 합하였다. 위에 보라. 【방면】 현내(縣內) 끝은 7리이다. 신동(身東) 끝은 15리이다. 남면(南面) 위와 같음. 내면(內面) 끝은 10리이다. 외서(外西) 끝은 20리이다. 내북(內北) 끝으로 15리이다. 외북(外北) 끝은 30리이다. 정동(定東) 북쪽으로 끝은 15리이다. 정북(定北) 북쪽으로 30리이다. 정서(定西) 위와 같음. 우(右) 3면은 안정(安定) 고현의 땅이다. ○ 퇴곡부곡(退谷部曲)은 동쪽으로 10리이다. 신평부곡(新平部曲)ㆍ하필점이부곡(下筆坫伊部曲)ㆍ물실부곡(勿失部曲). 【성지】 고성(古城) 북쪽으로 1리이며 성황산(城隍山)이라 일컫는다. 【창고】 읍창(邑倉)ㆍ안정창(安貞倉). 【누정】 망북정(望北亭).
예안현(禮安縣)
동으로 영해부(寧海府) 경계까지 41리, 남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 12리, 서로 영천군(榮川郡) 경계까지 39리, 북으로 봉화현(奉化縣) 경계까지 41리, 경도(京都)와의 거리는 5백 4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매곡현(買谷縣)이다. 신라 때에 선곡(善谷)으로 고치고, 내령군(奈靈郡)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 때에 성주(城主) 이능선(李能宣)이 거의(擧義)하여 귀순(歸順)하였으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승격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길주(吉州)에 붙였으며 신우(辛禑)가 그 태(胎)를 현지(縣地)에 간직하였다 하여 다시 군으로 하다가 얼마 후에 주(州)로 승격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 와서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매곡ㆍ선곡ㆍ선성(宣城). 【성씨】 본현 김(金)ㆍ이(李)ㆍ우(禹)ㆍ조(趙)ㆍ안(安)ㆍ권(權)ㆍ강(姜)ㆍ박(朴)ㆍ정(鄭)ㆍ최(崔)ㆍ가(賈). 의인(宜仁) 김. 【풍속】 풍속은 절약하고 검소함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보인다. 지역은 편소(偏小)하고 토질이 박(薄)하다 김효정(金孝貞)의 동루시(東樓詩)에 있다. 【산천】 성황산(城隍山)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녹전산(祿轉山) 현 서쪽 20리에 있다. 요성산(邀聖山) 현 북쪽 18리에 있다. 장갈현(長葛峴) 현 동쪽 30리에 있는데, 영해부(寧海府) 청기현(靑杞縣)의 경계이다. 영지산(靈芝山) 현 북쪽 5리에 있다. 용두산(龍頭山) 현 북쪽 22리에 있다. ○ 최선(崔詵)의 용수사(龍壽寺) 기에, “태백산(太白山) 남쪽으로 3백여 리를 높았다 낮았다 하여 우뚝하게 빠져 나온 것이 있으니, 이것이 용두산인데 실로 영가군(永嘉郡)이 이 산을 짊어지고 도시가 된 것이다.” 하였다. 비암(鼻巖) 현 남쪽 3리에 있는데, 높이가 10여 장(丈)이고, 그 위에 5ㆍ60명이 앉을 만하다. 앞으로 큰 시내에 임하여 고을 사람들의 유상(遊賞)하는 곳이다. 조산수(造山藪) 부진(浮津) 남쪽 언덕에 있다. 나화석천(羅火石川) 현 동쪽 28리에 있다. 곧 봉화현(奉化縣) 매토천(買吐川) 하류이다. 손량천(損良川) 현 동쪽 5리에 있다. 곧 나화석천 하류인데, 현 남쪽 1리에 이르러서는 부진(浮津)이 되고, 남으로 흘러 안동부에 이르러서 견항진(犬項津)이 된다. 부진(浮津) 현 남쪽 1리에 있는데, 곧 나화석천 하류이다. 안동부에 이르러서는 요촌탄(蓼村灘)이 된다. 『신증』 월명담(月明潭) 현 동쪽 25리에 있다. 【토산】 인삼(人蔘)ㆍ꿀[蜂蜜]ㆍ지치[紫草]ㆍ송이[松蕈]ㆍ은어[銀口魚]ㆍ철(鐵) 현 동쪽 상리(上里)에서 난다. 오미자(五味子)ㆍ석이버섯[石蕈]ㆍ잣[海松子]ㆍ옷[漆]ㆍ백복령(白茯苓)ㆍ설면(雪綿). 【성곽】 북산성(北山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1백 49척, 높이 4척이며,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녹전산(祿轉山) 봉수 남으로 안동부 개목산(開目山)봉수에 응하고, 북으로 봉화현 용점산(龍岾山)봉수에 응한다. 【누정】 추흥정(秋興亭) 객관 동쪽에 있다. 홍희(洪熙) 원년에 현감 박결(朴潔)이 세웠고, 관찰사(觀察使) 하연(河演)이 이름 짓고 기(記)를 썼다. ○ 은여림(殷汝霖)의 시에, “비단 펼친 듯 네 창문엔 산빛이 가깝고, 유리 깔아 놓은 듯 한 지역엔 물빛이 깊구나.” 하였다. 동루(東樓) 현 동쪽에 있다. 『신증』 쌍벽루(雙碧樓) 부진 언덕 위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현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선안역(宣安驛) 현 남쪽 3리에 있다. 대사원(大寺院) 현 서쪽 1리에 있다. 장원(場院) 현 동쪽 28리에 있다. 【불우】 용수사(龍壽寺) 용두산(龍頭山) 남쪽에 있다. 고려 때의 중 성원(誠源)이 처음 지었으며, 의종(毅宗)이 중 석윤(釋胤)을 위하여 고쳐 짓고, 용수사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최선(崔詵)에게 명하여 기를 짓게 하였다. 『신증』 이우(李堣)의 시에, “절 서쪽 10리 못 되는 곳, 소나무ㆍ전나무 빽빽하게 들어섰다. 산과 시내는 온갖 풍파 다 겪은 후, 쓸쓸한 옛 절만 남았구나. 선경(禪扃)엔 구름 연기 자욱하고, 음침한 골짜기에는 도깨비들이 울부짓는데, 문을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무무(貿貿)한 중 서넛뿐일세. 비바람에 시달리다 남은 긴 집[長齋]은, 반절이나 불에 타 없어지고, 빈 뜰에 섰는 탑은 층계가 희미한데, 금부처[金粟]의 빛깔 초췌(憔悴)하다. 무너진 담장엔 등 갈 엉켰고, 그림 벽엔 거미줄만 늘어졌는데, 소조(蕭條)한 물색(物色) 너무 많아, 일찍이 놀던 곳이 아닌 듯하다. 광려산(匡廬山) 글 읽던 곳에,별안간 광무(廣武)의 눈물을 뿌리네. 상교(象敎 불상 모시는 교) 쇠함을 알 수 있으니, 천 년 만에 성인 다스림 만났다. 우리 도가 하늘 가운데 행하여지니, 사교[陰霾]는 스스로 물러났다. 중의 옷이 갓과 망건이 되고, 징과 바리때는 쟁기로 화하는구나. 마침내 법당[金仙宮]터 변하여, 민간의 전리(田里)로 만들게 하네. 환히 빛나는 주 나라 공자(孔子)의 법, 만고에 사람 기강 붙든다.” 하였다. 성천사(聖泉寺) 요성산(邀聖山)에 있다. 골내사(骨乃寺) 영지산(靈芝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산성 안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의인폐현(宜仁廢縣) 현 동쪽 9리에 있다. 본래 안덕현(安德縣)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이었는데,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현으로 승격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안동에 붙였고, 공양왕(恭讓王) 때에 예안에 예속시켰다. 대왕수(大王藪) 최선(崔詵)의 용수사(龍壽寺) 기에, “용두산의 남쪽에 동네가 있고, 동네 어귀에 숲이 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대왕수라고 칭한다. 대개 우리 태조께서 경계를 순시하니 남쪽 지방에 이르러 여기서 군대를 주둔하고 3일 후에 떠났는데, 지금 그 땅에 높은 나무, 뭇 풀들이 많아도 나무꾼 풀베기꾼들이 감히 가까이 들어가지 못하니 용[神物]이 보호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하였다. 【명환】 본조 성엄(成揜) 현감이 되었다. 『신증』 김전(金詮) 성종(成宗)이 유신(儒臣)들을 각 도의 피폐한 고을로 나누어 부임하도록 명하였는데, 김전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서 나가 현감이 되어 청렴 간결하게 정치를 하니,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사모하여 산 사람의 사당을 세웠다. 【우거】 고려 우탁(禹倬) 옛날 살던 곳이 비암(鼻巖) 남쪽 2리에 있다. 단양군(丹陽郡) 인물조에 자세하다. 【효자】 고려 황재(黃載) 지인(知印)으로서 서울에서 벼슬하는데, 꿈에 그 어머니가 병환이 난 것을 보고 곧 사직하고 하루 만에 이르니, 어머니가 과연 병이 계신지라 목놓아 울면서 시약(侍藥)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3년을 여묘(廬墓)살이하였다. 홍무(洪武) 신사년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부세(賦稅)를 면해 주었다. 본조 우석보(禹錫寶) 어버이를 위하여 3년을 여묘살이하였다. 성종 12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연계일로종산전(緣溪一路從山轉)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시내 따라 한 길이 산으로 돌고, 골짜기에 가득한 숲에 은은한 안개가 깊구나.” 하였다. 안전산수불수병(眼前山水不須屛) 김보륜(金輔輪)의 시에, “멀리 바라보면 어렴풋하나 가까이선 도리어 밝고, 눈앞에 산과 강 있으니 병풍은 필요하지 않네.” 하였다. 수복산중노굴반(水複山重路屈盤) 서거정의 시에, “물 겹겹 산 첩첩 길은 구불구불 한데, 풀풀 나는 단풍잎은 가는 말을 보내네. 다른 날 예전에 놀던 곳 내가 기억할 건가, 명구(名區)를 지나가면서 자세히 보노라.” 하였다. 협절분천수지진(峽折犇泉隨地盡) 전인(前人)의 시에, “골짜기가 끊어졌으니 급히 흐르는 샘물은 땅에 떨어져 다하고, 산은 여러 봉우리를 벌였으니 하늘을 찌를 듯하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邑內) 끝으로 10리이다. 서면(西面) 처음 7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북면(北面) 서북쪽으로 처음은 8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동상(東上)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동하(東下)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의서(宜西) 북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의동(宜東)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성지】 의인고현성(宜仁古縣城) 고현의 남쪽에 있으며 흙으로 쌓은 유지(遺址)가 있다. 【누정】 망미루(望美樓)ㆍ관심정(寬心亭) 【사원】 역동서원(易東書院) 선조(宣祖) 무신년에 건립하고, 숙종 갑자년에 사액하였다. 우탁(禹倬) 단양(丹陽) 조에 있다. 박충좌(朴忠佐) 고려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이며,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 도산서원(陶山書院) 선조 갑술년에 건립하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이황 문묘 조에 있다. 조목(趙穆) 예천(醴泉) 조에 있다. 【창고】 고려 신우(辛禑) 8년에 왜적이 예안(禮安)을 노략질하였다. 9년에 부원수(副元帥) 윤가관(尹可觀)이 왜적을 맞아 예안(禮安)에서 싸워 대패하였으며, 전의부령(典儀副令) 우하(禹夏)는 왜적과 예안에서 싸워 적의 머리 여덟을 베었다.
[주D-001]광려산(匡廬山)……곳에 : 광려산은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사이에 있는 산인데, 당 나라 때 시인(詩人) 이백(李白)이, 이 산에서 글을 읽었다 한다. 여기서는 시 쓴 사람 자신의 옛날 글 읽던 곳이라는 뜻이 된다. [주D-002]별안간……뿌리네 : 광무는 중국 하남현(河南縣)에 있는 성인데, 이백이 이 성을 지나면서, “광무성(廣武省) 가에서 모춘(暮春)을 만나니, 문양(汶陽)으로 돌아가는 손의 눈물이 수건을 적신다.”라는 회고시를 지었다는 고사이다. 여기서는 시 쓴 사람 자신이 회고(懷古)하면서 눈물을 뿌린다는 뜻이다.
용궁현(龍宮縣)
동으로 예천군(醴泉郡) 경계까지 15리, 남으로 동군(同郡) 경계까지 35리, 서로 상주(尙州) 경계까지 12리, 북으로 동주(同州) 경계까지 9리, 경도와의 거리는 4백 4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때의 축산(竺山)이었다 원산(園山)이라고도 했다. 고려 성종(成宗)이 용주자사(龍州刺史)로 승격하였고, 목종(穆宗)이 자사를 파하고 군으로 강등하였다. 현종(顯宗)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상주에 붙였고, 명종(明宗)이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는 그대로 하다가 태종조(太宗朝)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축산ㆍ원산ㆍ용주 【성씨】 본현 김ㆍ박ㆍ전(全), 정(鄭)ㆍ윤(尹) 모두 촌성(村姓)이다. 곡(曲) 당 나라에서 투화한 성이다. 조(曹) 진해(鎭海)에서 왔다. 오(吳) 장기(長鬐). 엄(嚴) 영월(寧越). 손(孫) 평해(平海). 무송 김 양정(陽井)ㆍ풍양(豐壤)ㆍ하남(河南)ㆍ평구(平丘)ㆍ곡계(曲溪) 모두 같다. 【풍속】 풍속은 화목함은 숭상한다 관풍안에 있다. 【형승】 일대수(一帶水)ㆍ사위산(四圍山) 장돈의(蔣敦義)의 시에, “일대수는 회계수(會稽水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 있는 강 이름이다.)와 같고, 사위산은 영가산(永嘉山)과 비슷하네.” 하였다. 【산천】 축산 객관 북쪽에 있다. 진산이다. 용비산(龍飛山)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천덕산(天德山) 현의 동쪽 7리에 있다. 하풍진(河豐津) 안동부의 견항진(犬項津), 예천군의 사천(沙川) 및 성화천(省火川)의 물이 용비산 아래에서 합쳐 하풍진이 된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푸른 호수엔 가벼운 노 목란주(木蘭舟), 눈에 가득한 연기 파도는 모두 시름뿐일세. 올해는 점점 작년 모습이 아니니, 타향에서 고향에 놀던 것 생각하누나. 용추(龍湫)에 해 저무니 구름 모이고, 만령(蠻嶺)에 가을이 차니 장기(瘴氣)가 거두어지네. 길 끊어져 방호(方壺 신선이 사는 곳)에 갈 수 없고, 옥지(玉芝 신선이 먹는 약)가 창주(滄州)에서 늙는데 어찌할꼬.” 하였다. 무흘탄(無訖灘) 현의 남쪽 7리에 있다. 작탄(鵲灘) 현의 남쪽 14리에 있다. 수정탄(修正灘) 현의 동쪽 40리에 있다. ○ 무흘탄으로부터 여기까지 모두 견항진의 하류이다. 성화천(省火川) 현의 서쪽 6리에 있다. 사천(沙川) 현의 남문 밖에 있는데, 예천군 사천의 하류이다. 【토산】 철(鐵) 수정탄에서 난다. 왕골[莞草]ㆍ배[梨]ㆍ은어[銀口魚]ㆍ산무애뱀[白花蛇]ㆍ잣[海松子]. 【성곽】 용비산성(龍飛山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8백 71척, 높이 7척인데, 안에 샘이 세 군데 있으며, 군창이 있다. 【봉수】 용비산 봉수 동으로 예천군의 서암산(西巖山) 봉수에 응하고, 남으로 예천군 다인현(多仁縣)의 소이산(所伊山) 봉수에 응하며, 북으로 상주 산양현(山陽縣)의 소산(所山) 봉수에 응한다. 【누정】 수월루(水月樓) 객관 동쪽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맑은 때 일 없고 몸도 한가로우니, 태수는 백중(伯仲) 사이에서 서로 즐기네. 백 잔 술 실컷 마시고 누 위에 누워, 주렴 걷으니 남북이 모두 푸른 산일세.”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몸도 한가롭지 못한데 하물며 마음일쏘냐. 양 볼의 수염은 문부[簿領] 사이에서 다 희여지네. 청산에 돌아가지 못함을 부질없이 말하랴, 남쪽에 오니 청산 아닌 곳 없다.” 하였다. 청원정(淸遠亭) 전원발(全元發)의 옛날 살던 곳으로, 성화천의 동쪽 언덕에 있고, 전자(篆字)로 청원정 3자를 석벽(石壁) 위에 새겼다. 후에 금유(琴柔)가 잇따라 거처하였다. 『신증』 부취루(浮翠樓) 수월루 북쪽에 있다. ○ 홍귀달(洪貴達)의 기에, “용주 사천의 맑고 얕은 것과 늪이 깊숙하고 울창함은 남주(南州)에 알려졌다. 내가 어렸을 적에 고을 사람 주씨(周氏)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매양 강독(講讀)하다가 틈만 있으면 친구들을 데리고 자주 시내 숲 사이를 걸어다니다가 피곤하면 객사에 나아가서 휴식하였다. 고을은 남산의 북쪽 북산의 남쪽에 있어 4면이 푸르다. 문을 나서면 맑은 시냇물이 비단 펼쳐 놓은 듯이 흐르고, 물을 사이하여 깊숙한 수풀이 무성하게 서 있으니 승경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다만 그 관사의 좁고 누추함과 누대가 낮고 미약한 것이 한이었다. 그 후로 내가 조정에 벼슬하느라고 강호(江湖)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지 수십여 년이 되었는데, 시험삼아 한 번 와 보니 그 형승(形勝)은 옛날과 같으나 누대의 조폐(凋廢)함은 더 심하여 졌으므로 대개 일찍이 산천을 위하여 탄식하였다. 홍치(弘治) 4년에 양천(陽川) 허민(許珉) 후(侯)가 이 고을로 부임하여 이미 백성들의 이익되는 일을 일으키고 백성들의 해독을 제거하니, 백성들은 그 즐거움을 즐기어서 더 일할 것이 없었다. 이에 산천의 좋은 경치를 두루 구경하는데, 이 누에 올라 탄식하기를, ‘아, 이것이 이른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천이 있는데 관우(館宇)는 이같이 누추하니 어찌 수령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관해(官廨)는 내 몸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신을 위하는 것이니 감히 혐의를 두겠는가.’ 하고, 보니 객관의 동쪽 옛 누의 북쪽에 우뚝 솟은 땅이 있고 단단한 돌이 있거늘, 이에 그 단단한 돌을 뚫어내고 우뚝 솟은 땅을 평평하게 고루어서 그 위에 누를 지어, 가운데 세 채는 공좌(公坐)의 장소로 정하고, 동서쪽 구석진 방 각 3칸은 연식(燕息)하는 곳으로 만드니, 제도가 굉걸 화려하였다. 누에서 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면 눈이 환하고 정신이 상쾌하며, 사방의 시퍼런 산들은 붕 뜨는 듯이 처마 밑에 둘러 있다. 대개 그런 후에야 산천의 경치와 거처하는 집이 서로 어긋나지 않았다. 지방관된 자가 혹 마음이 답답하거나 정사에 막히는 일이 있어도 이 누에 오르면, 마음이 확 트이어 황연(況然)히 깨달아지리니 오히려 또한 이로움이 있는 것이다. 누가 이미 이루어지매, 허후의 말로서 나에게 고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누는 새로워졌지만 아직 이름이 없소. 이는 그대의 옛날 놀던 곳이니, 원하건대 그대는 이름도 짓고 기도 지어 주오. 산천도 역시 그대를 바라고 있을 것이오.’ 하였다. 이에 내가 예전에 본 것을 가지고 이름을 ‘부취’라 지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내가 20세 전에 숲과 시내를 거닐면서 논 적이 있으니, 지금 40여 년이 된다. 그 사이에 이 고을에 와서 수재(守宰)라고 칭한 자가 그 얼마였는지 알지 못하나 여태껏 지은 자가 없었는데, 우리 후에 이르러 비로소 이룩하였으니, 산천이 사람을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이 어찌 때가 있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일은 구차스러이 해서는 안 된다. 귀한 바는 시기를 인연하고 사람에 순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산천의 형세가 좋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국가에 일이 많고 농상(農桑)이 시기를 잃어 여염에서 탄식을 한다면 또한 어느 겨울에 역사를 하겠는가. 그런데도 역사를 한다면 곧 백성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어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고 어진 수령들이 주현으로 배치되어 전리(田里)가 편안한 마음으로 일에 종사하니, 백성들은 부역에 기꺼이 나오기를 마치 아들이 아버지의 일에 좇아가듯 하는데, 어찌 나직한 누, 무너진 관사에 앉아서 산천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후의 한 번 거사하는 데에서 태평세대의 상징과 읍사람들의 마음을 짐작할 것이니, 이것은 기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했다.” 하였다. ○ 강혼(姜渾)의 시에, “높은 누에 하룻밤 자니 맑고 한가함을 깨닫겠고, 몸은 연기 수풀 자욱한 사이에 있네. 밤비는 정히 아름답지만 개어도 또한 좋고, 아침에 구름 걷히니 청산이 나오는도다.” 하였다. 【학교】 향교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대은역(大隱驛)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지보역(知保驛) 현의 동쪽 35리에 있다. 천덕원(天德院) 천덕산에 있다. 석현원(石峴院) 현 동쪽 5리에 있다. 성화천원(省火川院) 성화천 가에 있다. 장안원(長安院) 현의 서쪽 9리에 있다. 용서원(龍西院)ㆍ진원(津院) 모두 현의 서남쪽 21리에 있다. 【불우】 백화사(白華寺) 천덕산에 있다. 절에 두 누가 있으니 서쪽에 있는 것을 관공(觀空), 동쪽에 있는 것을 정당(政堂)이라고 한다. ○ 이제현(李齊賢)의 관공루 기에, “묵암탄사(黙菴坦師)가 용궁군의 천덕산에 정사(精舍 사원의 별칭)를 지었는데, 두 누가 있다. 서쪽에 있는 누를 관공이라고 하는데, 그 문도로 호를 운수(雲叟)라고 하는 이가 기를 썼고, 동쪽에 있는 누를 정당이라고 하는데, 정당 한 재상(韓宰相)이 일찍이 남쪽 지방으로 와서 놀 때에 그 위에 오른 까닭으로 이름한 것이다. 정당이 돌아간 뒤에, 묵암탄사가 사람을 시켜 나에게 기문을 구하는 것으로서 누의 영광이 된다 하고, 그러한 후에 스님이 잇따라 이르렀다. 내가 서로 본 다음 묻기를, ‘보리달마(菩提達摩)는 탑을 만들고 절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함[爲]이 있는 복으로 삼고, 독조(獨照) 상지(常知)를 참된 공덕으로 삼아 비록 천자의 높은 위엄에 용서를 보지 못하더라도 민망히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스님은 달마를 섬기면서 도리어 건축[土木]에 노심(勞心)하여 옥실(屋室)을 장하게 하고 현달(顯達)한 사람에게 이름을 부탁하여 유관(遊觀)을 사치스럽게 하려 하니, 거기에 대한 해설이 있는가.’ 하였다. 스님은 말하기를, ‘이제 어떤 사람이 장차 천 리 길을 가는데, 게을러서 이끄는 자가 없으면 중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몽매해서 인도하는 자가 없으면 길은 있어도 도달하지 못한다. 내가 보건대 지금 세상에서 우리 불도들이 도를 배운다고 하는 것을 보면, 옛날 사람의 조박(糟粕)을 얻어 가지고 거연(居然)히 방자하여 성리(聲利)에 취하니, 중도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자와 거의 비슷하지 않겠는가. 혹 산림(山林)에서 얼고 주리면서 뜻을 극복하고 도를 깨달았으나, 열린 것이[款啓] 흐리멍텅[聽瑩]하여 올바른 도를 취할 바가 없으니, 길을 있어도 몽매한 자와 거의 비슷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를 시정하려고 발분(發憤)해서 절을 짓고, 우리 불도들을 전부 규합(糾合)하여 성리에 취하는 폐단을 버리며, 산림에서 얼고 주리는 것을 면하게 한 것이다. 그 게으른 자는 이끌고 그 몽매한 자는 인도하면 우리 스승의 이른바 독조 상지의 이치를 반드시 깨달아 알고 의심이 저절로 풀려질 것이니, 내가 장차 우리 스승의 도를 크게 하려는 것이요, 함[爲]이 있는 복을 삼으려는 까닭은 아니다. 대개 휘로(暉老)가 배 상국(裵相國), 만공(滿公)이 백 소부(白少傅)와와 서로 주고받은 문답은 총림(叢林 절)에서 거룩한 일로 전하는데, 어찌 일찍이 달관(達官)에게 부탁한 것을 혐의하겠는가. 우리 누의 이름을 한공으로부터 얻었으니, 세상은 예와 지금이 있으나 그 이치는 하나이다.’ 한다. 내가 이미 듣고 사과하면서 그 말을 써서 기한다 그 산천의 좋은 경치와, 면세(面勢)의 마땅한 것과 경시(經始) 낙성(落成)의 세월은 운수가 이미 말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적지 않는다.” 하였다. ○ 옛 사람의 시에, “승경(勝景) 노니는 곳은 붙잡고 오르는 곳이 많은데, 이 절[蓮宮]은 낮은 산에 머물러 가장 좋구나. 한 물은 비단 펼친 듯 멀리 뻗쳤고, 두 고개는 옷깃처럼 그윽함을 보호한다. 부처 밖과 마음 밖을 구하지 말라, 인간은 곧 꿈속에 있는 것이네. 듣기만 하여도 누 이름 얻은 이치 알 수 있는데, 어찌 모름지기 주인 얼굴 가서 대할 것인가.” 하였다. ○ 권사복(權思復)의 시에, “이름 난 절 있음은 들었어도 한 번 와 보지 못했건만, 산과 호수 좋은 건 시를 보고 알았네. 동문(洞門) 잠그지 않아도 속인 오기 어렵고, 누대 위에 주렴 걷으니 한가로운 중일세. 천고의 산수 경치 흥폐(興廢)한 밖, 산언저리 사이에서 6시(時)로 복과 종 두드리네. 노인(老人)이 선사(禪師)의 명 거역치 못해, 거친 글 써내니 얼굴이 붉어진다.” 하였다. ○ 염흥방(廉興邦)의 시에, “우뚝한 누는 별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데, 탄공산(坦公山)엔 소나무 삼나무 가득하구나. 용이 설법 듣고 나오니 구름은 흩어지고, 새가 경 외우고 오니 소리 다시 한가롭다. 도솔청(兜率廳) 위에 한 몸 기대고 있으니, 가부(跏趺 두 다리를 포개어 도사려 앉는 좌법이니 곧 중의 앉음새)의 삼세(三世 전세ㆍ현세ㆍ내세)는 잠깐 사일세. 관공(觀空)의 뜻 해득하는 사람 없는데, 분명한 설법 또한 낯이 부끄럽도다.” 하였다. 흥천사(興泉寺)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양정부곡(陽井部曲) 현의 남쪽 22리에 있다. 풍양부곡(豐壤部曲) 현의 남쪽 13리에 있다. 하남부곡(河南部曲)ㆍ무송부곡(茂松部曲)ㆍ평구부곡(平丘部曲)ㆍ곡계부곡(曲溪部曲). 【인물】 고려 전원발(全元發) 응양군 민부전서(鷹揚軍民部典書) 진(璡)의 아들이고, 판도총랑(版圖摠郞) 대년(大年)의 손자이며, 전법총랑(典法摠郞) 충경(忠儆)의 증손이다.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영록대부(榮祿大夫) 병부상서 집현전태학사(兵部尙書集賢殿太學士)를 하였고, 본국에서는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작(封爵)되었으니, 호는 국파(菊坡)이다. 아들 한(僩)은 사복 판사(司僕判事)이고, 손자 강(强)ㆍ근(謹)ㆍ경(敬) 등은 모두 과거에 장원하여 청환(淸宦)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다. 【우거】 본조 조어(趙峿)ㆍ금유(琴柔) 『신증』【효자】 본조 권직형(權直衡) 연산 때에 단상법(短喪法 삼년상(三年喪)의 기한을 짧게 줄이는 법)이 엄하였는데, 직형은 부모가 연달아 세상을 뜨니 상복을 6년이나 입고 소금과 나물을 먹지 않았다. 일이 나라에 보고되어 정려되었다. 정산호(鄭珊瑚) 나이 8세에 아버지가 악질(惡疾)을 얻으매 손가락을 잘라 피를 술에 타서 먹였더니 병이 곧 나았다. 일이 나라에 알려져 정려되었다. 【제영】 임단출려초(林端出麗譙) 이규보의 시에, “용궁군에 처음 들어서니, 수풀 끝에 나오는 것 높은 누각일세. 원형으로 둘러 앉은 관기(官妓)의 웃음소리, 경쇠같이 굽은 것은 현서(縣胥)의 허리로다. 물결이 부딪치니 차운 빛이 언덕을 흔들고, 버들가지 드리우니 푸른빛이 다리[橋]에 번지는구나. 거민(居民)들 모두 편안히 살아가는데 뱁새 또한 공중을 소요(逍遙)하는도다.” 하였다. 창외군봉사조산(窓外群峯謝眺山 권근(權近)의 시에, “한 군의 풍연(風煙)은 10리 사이인데, 맑은 정치 간소한 형벌에 아전ㆍ백성 한가롭네. 문 앞에 곧은 길은 담대(澹臺)의 길이요, 창 밖에 뭇 봉우리는 사조(謝眺)의 산이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북면 끝이 15리이다. 북상(北上) 동북쪽으로 20리이다. 성화(省火) 서쪽으로 5리이다. 서면(西面) 끝은 10리이다. 남상(南上) 끝은 20리이다. 남하(南下) 끝은 30리이다. 내상(內上) 동쪽으로 25리이다. 내하(內下) 동남쪽으로 25리이다. 중상(中上) 동쪽으로 끝은 40리이다. 중하(中下) 동남쪽으로 끝은 60리이다. ○ 양정부곡(陽井部曲)은 남쪽으로 20리이다. 풍양부곡(豐壤部曲)은 남쪽으로 15리이다. 무송부곡(茂松部曲)ㆍ평구부곡(平邱部曲)ㆍ곡계부곡(曲溪部曲). 【창고】 읍창(邑倉)ㆍ사창(社倉) 동쪽으로 40리이다. 산창(山倉) 문경(聞慶)의 조령산성(鳥嶺山城)에 있다. 【진도】 하풍진(河豐津) 서남쪽으로 20리에 큰 길이 있다. 【토산】 감ㆍ꿀.
[주D-001]독조(獨照) 상지(常知) : 불경(佛經)에서 나온, “홀로 한 물(物)이 있어 항상 홀로 비추고, 담박(澹泊)하게 죽고 사는 데에 따르지 않는다.”는 말인데, 홀로 비추는 것을 항상 안다는 것이다. [주D-002]옛날 사람의 조박(糟粕) : 중국 전국 때 제 선왕(齊宣王)이 글을 읽고 있는데, 뜰에서 수레바퀴 만드는 윤인(輪人)이 보고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의 찌꺼기만 읽는다.” 하였다. 제 선왕이 묻기를, “무슨 말이냐.” 하니 윤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선조 때부터 대대로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는데, 옛법은 능히 지킬 수 있지만 그 묘함은 이루지 못합니다.” 했다는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그 겉을 본받을 수 있어도 실질적인 깊이는 모른다는 것이다. [주D-003]휘로(暉老)가 배상국(裴相國) : 휘로(暉老)는 중국 당 나라 때 중 황벽 희운선사(黃蘗希運禪師)인데, 복주(福州) 민현(閩縣) 사람이다. 어릴 때 홍주(洪州) 황벽산에서 출가하여 뒤에 천태산(天台山)에서 놀다가 다시 경사(京師)에 가서 유학(遊學)하였다. 백장 회해(百丈懷海)를 뵈옵고 드디어 백장의 법을 이었다. 당 무종(唐武宗) 회창(會昌) 2년에 종주(鍾州)의 용흥사(龍興寺)에 머물렀다. 후에 당 나라 선종황제(宣宗皇帝) 대중(大中) 2년에 배 상국(裵相國)이 스님의 덕을 흠모해서 완릉(宛陵)에 하나의 큰 선원(禪院)을 세우고 스님을 청하였다. 절은 개원사(開元寺)라 한다. 배 상국은 당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휴(休), 자는 공미(公美)이다. 진사에 급제하여 하동현자(河東懸子)에 봉하였고, 조행이 엄숙하고 발랐다. 희운선사를 섬겼으며 전심법요(專心法要)의 게문(偈文)을 썼다는 고사이다. [주D-004]만공(滿公)이 백 소부(白少傅) : 만공(滿公)은 당 나라 중 여만선사(如滿禪師)이며, 백 소부는 당 나라 때 사람인데, 이름은 거이(居易), 자는 낙천(樂天)이며, 소부는 그의 직함이다. 백 소부가 회창(會昌) 초에 형부상서(刑部尙書)로서 치사하고 낙경(洛京) 불광사(佛光寺)에서 향산(香山)의 여만선사를 모시고 심법(心法) 및 대승금강보계(大乘金剛寶戒)를 얻었다 한다. 원화 중년에 경조(京兆)에 흥선법당(興善法堂)을 지어 네 가지 불법을 문의하였다는 고사이다. [주D-005]관공(觀空) : 불경 청정경(淸淨經)에서 나온 “빈 것을 봐도 역시 비고, 없는 위에 없어도 역시 없다.”는 말인데, 밝고 잡념이 없다는 것이다. [주D-006]문……길이요 : 춘추 전국 때 노(魯) 나라 무성(武城) 사람인데 자는 자우(子羽)이며, 공자의 제자이다. 논어(論語)에 자유(子遊)가 무성 수령이 되었는데, 공자께서, “네가 사람을 얻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사람이 있으니, 다닐 때에는 지름길로 다니지 않으며, 공무가 아니면 일찍이 언(偃 자유의 이름)의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한 고사이다. 여기서는 담대멸명처럼 착하고 바른 사람이 다니는 길이라는 뜻이다. [주D-007]사조(謝眺)의 산 : 중국 남제(南齊) 때 사람이다.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여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고, 문장이 맑고 고우며 초서와 예서를 잘 쓰고 5언시를 특히 잘 지었다. 삼산(三山)에 올라 경읍(京邑)을 바라보고 지은 시는 너무도 훌륭하여 심약(沈約)이 일찍이 3백년 내로 이런 시를 지은 이가 없다고 칭찬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여기서는 삼산을 가리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