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구름 위로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라는 의미인데 집이 앉은 자리의 어우러짐과 가옥의 디딤돌 하나까지 이름처럼 참으로 빼어나다.들어보니 2백여 년 전 지어진 운조루가 지금까지 건재한 것은 문화 유씨 집안의 합리적인 사고와 넓은 마음씨 덕분이다. 일흔 살 어르신부터 갓난아이까지 일곱 식구가 생활하고 있는 운조루, 여전히 집도 사람도 참으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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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에는 6·25 전쟁이 나던 해에 시집온 이길순 여사(73세)와 큰아들 유홍수(52세), 막내아들 유정수(41세)·곽영숙(35세) 부부, 그들의 삼남매 래욱(7세)·래은(5세)·고은(1세) 이렇게 삼대, 일곱 가족이 살고 있다. 기자가 통화를 했던 사람이 바로 막내며느리 곽영숙 씨다. 기자 일행이 도착했을 때 단발머리를 곱게 묶고 청바지 차림으로 얌전히 앉아서 홈쇼핑 카탈로그를 넘기고 있던 그녀는 영락없는 요즘 사람이다. 사촌언니처럼 편하게 생각되어 어떻게 여기 살게 되었냐고 대놓고 물으니 “보기만 해도 심란하죠”라며 받아치는 말이 더 솔직하다. 그녀가 운조루에 들어와 살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시어머니는 아들 셋, 딸 둘의 5남매를 두셨는데 둘째아들은 인천에 살고, 딸 둘은 출가했고, 큰아들은 운조루에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10여 년 전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 아주버니 자제들은 전부 커서 객지로 공부하러 나가니 집에 덩그러니 어른 둘만 남게 되었다. 집이, 특히 이렇게 큰 한옥에 사람이 안 살면 썰렁하고 기운이 없어진다며 시어머니가 가장 가까이 진주에 살던 막내아들을 불러 들어오라고 했던 것이다. “아이 둘을 낳고 나니 선녀와 나무꾼 모양으로 겁나는 것이 없었는지 남편이 ‘나는 집 지키러 들어간다’고 하는데 제가 뭐라 합니까. 안 내켜도 따라왔지요.” 남편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영숙 씨는 두 아이들 데리고 아파트 살림을 정리해 지리산 자락의 한옥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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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한옥에서 생활하는 젊은 며느리는 밥을 먹으려고 해도 문턱 몇 개를 넘어 밥상을 옮기고, 빨래를 해도 여기서 저기로, 화장실 한 번 가려고 해도 신을 신고 동네 한 바퀴 도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처음 한 달은 입이고 혓바닥이고 여기저기 구순염을 달고 살았을 정도다.시어머니가 마음은 넓지만 옛날 분이시다 보니 고지식하시다. 여기 들어와 세 아이를 데리고 살림하는 것이 만만치 않아 가끔 남편이 설거지를 해주곤 했다. 남편도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아니 설거지를 하다가도 어머니 소리가 나면 얼른 손을 훔치고 방으로 들어와 앉곤 했는데 한 번은 기척을 못 듣고 그만 들켜버렸다. 어머니가 “비켜라” 매섭게 한마디 하시고는 그 자리에 서서 당신이 직접 설거지를 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시어머니도 아들이 설거지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신다. 농사를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도시 며느리도 논을 볼 줄 알게 되고, 아득하게 넓었던 마당이 세 아이의 좋은 놀이터로 여겨지고, 한옥이 외풍이 있긴 하지만 아늑하고 여름에도 시원하다는 자랑도 늘어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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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돌아보며 설명을 들어보니 규모와 건축자재뿐 아니라 요소요소 합리적인 생각들이 스며있다. 대문을 들어서 사랑채에서 안채로 걸어가는 길목은 경사가 져 있는데 가마나 수레가 올라가기 편하고, 나이 든 사람들도 편히 걸으라고 돌계단이 아닌 완만한 돌비탈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 처마 끝선에 맞춰 마당에 홈을 파서 빗물이 흐르게 했다. 기자가 TV 화면에서 봤던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망루’도 남존여비 사상이 당연시되었던 조선시대에 ‘감히 여자를 2층에’ 올라가도록 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건축물로 당시 양반집 아녀자들은 남자 구경은 물론 바깥 구경도 못하던 때라 집 안에 갇혀 계절이 변하는 것도 알 수 없었는데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바깥 구경을 하라고 안채에 망루를 만든 것이다. 지금은 소실되었지만 운조루는 사랑채와 하인이 살던 행랑채도 연결해주었고, 집의 굴뚝도 허리 높이만 하다. 굴뚝을 낮게 만든 것은 밥 짓는 연기가 멀리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넉넉하지 않던 시절 밥 굶는 백성들이 운조루의 밥 짓는 연기를 보며 시장을 더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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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름 66cm, 높이 114cm의 통나무 뒤주. 옆에 놓인 큰 쌀궤에서 쌀을 퍼 담아놓고, 통나무 뒤주 아래쪽에 사각문을 만들어 ‘타인능해’라는 말을 새겨서 누구나 퍼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2 큰사랑채에서 바라본 운조루. 마루 왼쪽에 가마가 보인다. 운조루에는 민속 박물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도자기가 많았다. 예전에 유물로 내려오던 ‘팔모병’이 있었는데 자손 하나가 그것을 팔아먹어 논 서 마지기를 팔아 다시 찾아온 적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지켜온 유물들이 매스컴에 운조루가 소개되면서 도둑이 들어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화나고 부끄러운 사연이다. 3 돌을 놓아 화단을 꾸민 사랑채 뒤뜰. 왼쪽으로 보이는 방은 책을 만들고, 보관하던 책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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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운조루는 영화나 드라마의 장소 제공 제의를 자주 받는다. 베풀고 살았던 가풍 그대로 이길순 여사는 늘 흔쾌히 허락을 해줬다. 최불암과 정윤희가 출연했던 영화 「최후의 증인」, 「벙어리 삼룡이」, 「서편제」, 「흑수선」, 「열녀문」, 「토지」 등 운조루의 경력은 생각나는 대로 몇 개만 꼽아도 꽤 화려하다. 그러나 촬영 팀은 운조루에 대한 애틋한 마음보다는 그림 만들러 오는 사람들이니 꽃밭에 들어가 꽃도 망가뜨리고, 카메라 들고 지붕 위에도 올라가고, 안방 장롱을 들어내야 하기도 한다. 기자는 남의 집 망가뜨린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화나고, 그 불편함을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어르신은 화를 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한 번 찍고 가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가고 나서 다시 손을 봐야 해.” 우리 집에서 찍은 작품들이 상도 많이 받았다며 운조루가 널리 알려져서 좋다고 하셨다. 집주인이 집을 고치고 손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에 굳이 남 탓을 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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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 집 며느리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운조루를 두고 어디 어디에 나온 집이라고 할 때가 기분 나쁘다고 한다. “이 집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집인데 드라마 이야기로 운운하는 게 참 이상하게 들리더라고요.” 그녀가 운조루의 실무자(?)가 되고 애착이 생겨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진주에 있을 때는 그냥 한옥이구나 싶었는데 여기서 살다 보니 구석구석 알게 되고, 공부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오면 안내를 원해요. 너무 쉽게 설명하면 사람들이 지루해하고, 어려운 단어가 많아져도 지루해하지요. 적절히 섞어가며 말해야 흥미 있어 해요.” 벌써 베테랑 문화재 가이드가 된 모양이다. 운조루 문간방에는‘한옥’자가 붙은 책이 주르르 꽂혀 있다. 생소한 말이 많아서 며느리 곽영숙 씨가 사전 찾아가면서 읽은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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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저도 나이가 들면 꼭 한옥에 살고 싶어요... 공부좀 많이 해야겠네요.
요즘에 한옥 리모델링해서 거의 그대로 살려서 꾸미는게 유행이라던데~ 티비에서도 나오구요~ 너무 예뿌더라구요~ ^^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