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상이해-112. 클라우스 클로스터마이어(Klaus Klostermaier)
클라우스 클로스터마이어의 ‘브린다반에서의 힌두와 그리스도인’은 아주 매력적인 책이다.
그는 젊은 독일 신학자로서 ‘거룩한 말씀의 수도회’(Order of the Divine Word)의 회원이었으며, 크리슈나의 탄생지인 브린다반(Vrindaban)에서 2년간 살았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많은 힌두 친구들과 더불어 영적인 경험에 깊숙이 참여했다.
그는 또한 ‘힌두-그리스도인의 만남의 장소’(Hindu-Christian Meeting Point)에서 아비쉭트아난드가 서술한 대화를 위한 모임에 여러 차례 참석했다.
그는 브린다반의 경험을 묘사하며 독자들을 힌두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끈다.
그 책의 “인자에 대하여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라는 제목의 장은 저자의 소책자 “크리스트비디야: 인도기독론의 스케치”에 소개된 내용을 압축하여 학문적 형태로 선보인 것이다.
브린다반의 경험은 ‘힌두교의 범주에서 그리스도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가 생각하는 인도 기독론의 목표는 “힌두의 용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궁극적인 존재와 모든 사람의 살아있는 관계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살아있는 관계는 경험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도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교리를 필요로 하기보다는 오히려 깊은 그리스도의 경험(Christ-experience), 즉 실재에 대한 경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경험에는 다양한 깊이가 있으며, 그중 일부는 서구기독교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힌두교의 세 가지 위대한 마르그를 차례로 연구하고 각각의 유용한 특징을 찾는다.
그는 까르마 마르그로부터 샤브드(Shabda), 즉 말씀의 개념을 취한다.
그는 그것을 제4복음서의 로고스의 배후에 있는 진리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그는 샤브드는 베딕 만트라, 즉 의미를 전달하고 특정 효과를 지니는 문자 그룹이라고 한다.
그 의미는 ‘창조되지 않은 생각’인 아끄리티(akriti)와의 연관성 때문에 발생하는데, 그 자체로는 이해할 수가 없고 개별적인 단어에 의해 결코 소진되지 않는다.
우빠니샤드는 샤브드-브라흐만, 즉 말씀의 형태 안에 있는 브라흐만에 대해서 말한다.
이는 로고스, 즉 샤브드로서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그분은 하나님 그 자신이시고 감추어진 영원한 형태가 없는 말씀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이 용어는 그리스도를 가장 높은 실존의 차원인 로고스, 샤브드-브라흐만, 아끄리티의 영역에 단단히 배치함으로써, 그를 실존의 낮은 마야의 수준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이것은 클로스터마이어가 그리스도만이 ‘오직 가장 높은 분’에 합당한 존재라는 브라흐마반답의 신념을 어떻게 공유하는지를 보여준다.
크리스트비디야(Kristvidyua)는 반드시 브라흐마비디야(Brahmavidya)의 수준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여러 아들 중 하나가 유일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브라흐만이 유일무이하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유일무이하기 때문이다.
클로스터마이어는 종교에 있어서 쁘라만, 혹은 권위의 기준에 관한 흥미로운 언급을 한다.
그는 쁘러띠야끄쉬(대면하는 만남)와 아누만(추론), 우쁘만(유비)은 크리스트비디야를 위한 궁극적인 쁘라만이 될 수 없고 오직 브라흐만과 동일한 샤브드, 말씀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통찰은 슈루띠에 대한 아빠사미의 해석과 가깝다.
이 통찰은 우리의 신학을 반드시 판단해야 할 성경의 말씀이 살아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생명력 있는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부가적인 효력을 갖는다.
모든 신적 경험은 말씀의 빛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