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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49 5월 11일 수요일
법화경제7. 화성유품(化城喩品)
교재 210쪽 25번부터.
안녕 하십니까?
5월 11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요즈음 법화경 이야기가 대통지승불이라고 하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린 뒤에 비로소 깨달음을 성취하셨다는 대통지승불의 이야기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통지승불이 깨달음을 성취하니까 세상이 어떻게 보이더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물론, 깨달은 사람의 안목에서 보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우리들은 설사 깨닫지는 못했다손 치더라도 깨달음의 눈을 좀 빌어서, [깨달은 분들의 많은 표현들이 있으니까요.] 깨달음의 눈을 빌어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또 사람들을 어떻게 보는가?
이런 것들을 한번 생각해보는 그런 시간으로도 활용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 자리가, 대통지승불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셨고, 거기에 오백 만 억 법천왕 들이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禪客(선객)! 다시 말해서. 선에서 많은 선사님들이 멋진 게송들을 남겼는데, 禪偈(선게), 또는 禪詩(선시)라고 표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가, 구류동거 일법계(九類同居 一法界) 자라장리 살진주(紫羅장裏 撒珍珠) 이런 말인데, 이 세상에서는 별의별 성격과, 어떤 욕망과, 이해와, 습관과, 자기가 살아온 경험과, 지식 이러한 별의별 경험들을 가지고, 별의별 소견들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모든 삶들이 모든 생명들이 모두 일법계에 함께 산다. 한 마을에 함께 산다, 더불어서 함께 산다 이것이지요.
아홉 가지 종류가 한 법계에 동거 하고 있으며, 그 여러 가지 양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자라장리 살진주 라, 아주 아름다운 비단 위에 진주를 흩어 놓은 것 같이, 그렇게 영롱하고, 소중하고 값지고, 아름답게 빛을 발 하더라는 것입니다.
값진 비단만으로도 아주 얼마나 아름답고, 멋지고 좋게 보입니까? 그런데 비단위에다가 상당히 많은 진주를 잔뜩 비단위에다 흩어놓았다고 했을 때, 그 비단위에서 빛을 발하는 영롱한 진주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깨달으신 분들은 모두 모습이 설령 못나고, 무식하고, 욕심 많고, 시기질투 많고, 자기허물 덮으려고 하고, 별자랑 거리도 아닌 것을 자랑 하면서 그렇게 살지요.
그런 것들을 우리들끼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자랑 한다, 相(상)낸다 핀잔주고, 자기 허물 덮어버리고 조그만 일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 이런 것을 하찮은 소인의 행위라고 그렇게 핀잔을 주고, 못 봐주고 참아주지 못합니다. 그것을 보아줄 수도 있는데 못 봐 줍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들은, 어떤 좀더 보살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런 문제들을 전부 따뜻하게 감싸주고, 이해해주고, 그 또한 그 사람의 개성으로 봐주고 이렇게 포용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류동거 일법계(九類同居 一 法界)!
각양각색의 삶을 살아가는 생명들이 우리 이 지구라고 하는, 지구촌 하나위에 더불어 같이 사는데, 그 모습들이 모두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단위에 진주를 뿌려서 더욱더 아름답게 영롱하게 값지게 보이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사람들을 보고, 모든 생명을 보고, 모든 존재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고, 아름답게 보고 이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불교공부를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데 있다고 그럴게 생각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시각을,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고, 보는 시각들을 부처님 시각으로 닮아가자는 것이지요. 그랬을 때 우리들이 행복하고 그렇게 봐주면 그 사람들도 물론 행복하고, 이것이 바로 인불 사상의 다른 표현이다 이렇게 말씀 드릴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옛날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대통지승불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이 법을 청하고 이 빛은 도대체 무슨 의미로서 비치는가? 이렇게 말을 하면서 부처님 오심을 세상에 빛이라고, 빛을 던져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표현했다는 이것을 가슴깊이 새겨야 될 줄 알겠습니다.
25 이 때 오백만 억 범천왕들이 게송(偈頌)으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나서 말씀드렸느니라.
'바라옵건대 세존이시여, 법륜을 굴리시어 모두 편안케 하여 주시며 해탈케 하여 주십시오.'
처음 대통지승불이 성도를 하니까 오백 만 억 범천왕들이 법륜을 굴려 달라고, 법문을 해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범천왕들이 게송으로 말하였느니라. '세존이시여, 법륜을 굴리시어 감로법의 북을 치시며 고통 받는 중생들을 건지시고 열반의 길을 보여 주십시오.
바라옵건대 저희들의 요청을 들어주시어 크고 미묘하신 음성으로써 한량없는 세월 동안 닦아 익힐 법을 불쌍히 여기셔서 연설하여 주십시오.'
시방의 범천왕들이 각각 모여와서 그러한 의식을 치렀고요. 또 여기는 마지막으로 오백 만 억 범천왕들이 모두 합창으로 또 이렇게 게송으로서 부처님께 청 법을 드리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법을 청할 때 간단하게 청하지요.
그렇지만 처음 대통지승불이 성도 하셨고, 그 당시로서는 역사상, 깨달으신 분이, 부처님 되신 분이 처음이고 그러다 보니까 위대한 법을 청하는 것도 사실, 굉장히 정중하고 격식이 잘 갖춰져 있고요. 그래서, 부처님의 법을 그만치 정중하게 청 하므로 써 듣는 사람에게 그만치 가치 있고 소중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선 법문이 전해져서 그런 가? 또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은, 법을 설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이나, 적게 한 사람이나, 가능하면 평등하게 보고 특별히 상을 내지 않는 것으로서 장점을 삼습니다.
상을 내고, 모양을 갖추고 폼을 좀 내면 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또 핀잔도 주고,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참 좋은 점이고, 소박하고, 소탈하고, 격식 없이요. 그래서 누구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나 접근하고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그런 분위기에 反(반)해서,
간혹 불교 TV를 보면 은, 대만에서 행해진 법회를 중계를 하거나 녹화를 보여주는데, 소위 유명한 불광사 를 건립하신 성운대사 법회정경을 보여주는데, 법회 하는 장소와 단상과 그 주변의 사람들을 안배하는 것이, 얼마나 근사하게 하는지 그 분위기에서 청중들이 모두 미리 벌써부터 압도되는 것을 연출을 하고 있었습니다.
으례히 그렇게 해요. 물론 본 사찰에서 하는 작은 법회는 안 그럴 수도 있겠지만...
큰 회관 같은 데서 그런 법회를 하는 것을 보면 은, 그 주변에 부처님을 모시고, 안개를 풍기고 많은 합창단을 뒤에다 안배를 하고, 또 제자들을 수 십 명을 안배를 하고, 게송을 외울 때 노래형식으로 하는 그런 제자들을 안배를 하고, 또 경전을 외우는 사람을 따로 두고 옆에다 경전을 잘 외우는 사람을, 마이크장치를 해 가지고 경전 읽을 때는 그 사람보고 읽으라 하고, 성운대사는 그것에 대해서 설법을 하고, 그런데 내용이야 무슨 특별한 내용이 있겠습니까?
사실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습니다만, 분위기가 워낙 기대를 하도록 그렇게 만들어져서 상당히 기대를 하고 유심히 들었습니다. 여러 번 들었지요. 그런데, 저렇게 근사하게 법석을 마련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법문은 과연 어떤 법문일까? 이런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그 외의 대만의 다른 사찰에서 하는 법문의 테이프도, 불교T.V방송에서 방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운대사 꾸민 것 못지않게 주변을 근사하게 꾸며서, 법문을 하도록 그렇게 했더라고요.
우리나라에는 어디에도. 또 언제 누구의 어떤 큰스님의 법문에도 거기에 십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는 장엄입니다. 장엄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사실은...
기껏해야 덩그러니 법상하나 놓고 그것뿐이지, 누가 옆에서 사람들이 수십 명 이 조를 짜가지고서, 부처님이 설하시고 부처님제자 들이 옆에 앉아있는 것처럼, 그런 형식으로 단상에 다 올려놓고, 그렇게 법문을 하는 그런 선지식 외에는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참 우리나라 스님들은 사실, 상당히 법이 높으면서도 소박하고, 단순하게 그런 형식을 다 배제해 버리고, 정말 법문 내용만 들려 드리려고 하는 그런데 반해서. 대만에서는 법회의식을 보면 모양 갖추는 것이 그야말로 한 80% 비중을 차지해 버리더라고요. 법문은 정작 한 20% 정도 밖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뭐 어떤 사람이 왔다고 하는 소리라든지, 그런 것들을 여러 번 보면서 큰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것들도 사실은 때로는 우리 중생들에게 필요한 것이구나...
중생들을 흔히 像見(상견) 중생이라 합니다. 이 사바세계의 사람들의 성향을...
우리가 見物生心(견물생심) 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어떤 모양을 근사하게 차려놓고 봐야 거기서 신심이 나고, 뭔가 호기심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양을 그렇게 갖추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렇게 근사하게 꾸며놓은 데서 법문한번 해봤으면 하는 그런 마음도 잠깐 스치고 지나간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여기 대통지승불! 최초의 부처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말 오랜 세월 전 에 부처님이 계셨다고는 했지만은, 이 모든 격식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성도하셔서 열반에 들려고 했을 때,
제석천이 간청을 해서 법을 설하게 되었다하는 그런 사례에 기준을 두고 아주 그것을 확대해서 이렇게 경전으로 꾸며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또 그런 것이고요.
그 근거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성도하셨고, 열반에 들지 않고, 청에 의해서 법을 설하게 되었다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 그러면 최초에 어떤 법을 설했는가? 그런 거창한 청법을 받고, 시방세계의 범천왕들로부터 그런 건사한 청법 을 받고, 처음에 어떤 법을 설했는가? 여기 제목을 십이 인연(十二 因緣)을 설하다. 그렇게 했는데, 사제 십이 인연을 설하다 사실 이렇게 제목을 달았으면 더 구체적이었을 것인데, 그것을 제가 놓쳤습니다.
처음에 四諦(사제)를 설했습니다. 고. 집. 멸. 도 (苦 集 滅 道) 아주 기초교리고 기본교리 입니다. 십이 인연(十二因緣) 이란 것도 모든 존재가, 존재중의 대표가 사람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렇게 사람의 삶이 전개가 되는가?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십이 인연입니다.
그리고 그전에 사제라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는, 또 존재 중에 우리 인간이 대표가 되니까, 인간은 고 집 멸 도 고통의 삶이 있고, 그 고통에는 반드시 고통의 원인이 있고, 또 그 고통을 소멸하는 법이 있고 소멸된 경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는데 사제 십이 인연을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초의 부처님이 근기에 맞추어서 사제 십이 인연법을 설했다 그래요. 그런데 교리상 으로 사제 십이 인연은 우리가 매일 외우는 반야심경만 보더라도 어떻습니까? 무 고집멸도, 무 안이비설신의, 무 색성향미촉법. 또 십이 인연도, 무 무명 역무 무명진 내지 무 노사 이렇게 해서 그런 것 없다고 봐버리는 것입니다.
없다고 봐버리는 차원이 금강경의 차원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사실은 이런 과정을 이야기 하려고 하다보니 사제 십이 인연 이야기가 나오지, 사실은 사제 십이 인연을 설하려고 한 것이 법화경은 아니지요.
금강경 정도만 하더라도, 반야심경 정도만 하더라도, 사제 십이 인연을 설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주 아예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 갈 것은 대개 반야심경 강설 책을 보거나 강의를 하거나 이렇게 가만히 살펴보면 은, 없다는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설명을 해야 되는데, 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를 해서 그렇게 설명을 해요.
삶과 법문 이라고 해서 오온에 대한 이야기 六根육근, 六識육식, 六塵육진, 十二處(십이처), 十八界(십팔계), 苦集滅道(고집멸도), 十二因緣(십이인연) 이런 것 들을 아주 자세히 상당한 페이지를 할애 하면서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건 참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기초교리 설명을 할 때 그런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또 기본 교리라든지 그런 것을 자세히 설명할 그런 장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을 설명할 때, 시각을 그 쪽으로 다 빼앗겨 버리면, 정작 반야심경은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주안점인데, 그만 사제 십이 인연이 있는 것으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다 보면 그만 거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반야심경을 강설 하시는 분들은 제발 그 점을 좀 유의를 하셨으면 좋겠더라고요. 무 안이비설신의 예요. 색성향미촉법. 무 안계내지. 전부 오온도 없다. 육근. 육진. 십이처. 십팔계. 사제. 십이인연 모두 없다는 말을 했거든요. 없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주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있는 쪽으로 너무 길게 설명을 하니까 사람들이 거기에 혼란을 일으킨다는 이점입니다. 이것을 꼭 지적해주고 싶더라고요.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사제 십이 인연을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은 차원이, 그것을 가지고 자세하게 이야기 하고 있을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법화경은요.
그러나 이제 경에 있는 대로 우리가 한번 살펴보고 넘어갈까 합니다.
최초에 부처님이라고 할만한 대통지승불 이, 청법 을 듣고,법 청하는 것을 듣고는, 이러이러한 법을 설했다. 기록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5)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설하다
26 이 때 대통지승여래는 시방 세계의 범천왕들과 십육 명의 왕자의 청을 받고 곧 세 번에 십이(十二)행(行)의 법륜을 굴리었느니라.
세 번에 십이 행의 법륜을 굴리었다. 라는 말은, 사제법문을 세 번을 굴렸다. 그래서 [3.4 = 12 ] 숫자가 이렇게 됩니다.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는 세 번을 어떤 식으로 했느냐? 할 때마다 똑 같은 형식으로 했느냐? 그것은 아녜요. 교리적으로 자세히 보면 은, 예를 들어서 사제는 세 번 이야기하고, 십이 인연은 연각을 위해서 두 번 이야기하고, 육바라밀은 보살을 위해서 한번 이야기하고 이런 형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 했다고 하는 것도 처음에는 어떤 모습을 보이는 것을 示狀轉(시상전)이라고 표현하고, 그것을 수행하기를 권한다고 해서 勸修轉(권수전)이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그것을 증득해서 자기 것을 만들어야 된다고 해서 引證轉(인증전)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그렇게 합니다.
三轉十二行(삼전십이행) 법륜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四諦(사제)를 각각 다른 방향으로 차원을 달리하면서, 세 번 말씀 하셨다 그런 뜻입니다.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천신. 마왕. 범천이나 그 외의 다른 세상 사람들은 굴릴 수 없는 것이니라. 이것은 오직 깨달은 분만이 굴릴 수 있는 법이다 이 뜻 입니다.
이른바 이것은 괴로움이요, 이것은 괴로움의 쌓임이요,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짐이요, 이것은 괴로움이 사라지는 길이니라.
그러니까, 고. 집. 멸. 도. 고집멸도도 그냥 여기에서는 우리가 보통 고집멸도 그러는데, 이것은 괴로움이요 할 때는 “고(苦)”예요. 이것은 괴로움의 쌓임이요 하면 “고집(苦集)” 이렇게 표현해야 됩니다. 그냥 고. 집 이라고할 때 집이 아녜요.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짐 이요 하면 “고멸(苦滅)” 구체적으로 이렇게 해야 됩니다. 이것은 괴로움이 사라지는 길이니라 라고 하면 “고멸도(苦滅道)” 이렇게 해야 되어요. 고, 고집, 고멸, 고멸도. 이해하시겠지요? 고. 고집. 고멸. 고멸도, 이렇게 함으로 해서 고집멸도 사성제를 조금 정확하게 공부하는 길이 됩니다.
苦(고) 요. 고의 쌓임→苦集(고집)이요. 고의 멸이요→苦滅(고멸). 고멸 도니라.→苦滅道(고멸도) 한문으로 하면 이렇게 되지요.
또 십이인연의 법을 널리 말하였으니, 이것은 기본교리니까 잘 아시리라 믿어요. 무 명 행식 명색 육입촉수 애취유 생노사... 반야심경에서는 늘 외우는 것인데...
무명(無明)은 행(行)을 반연하고, 행은 식(識)을 반연하고, 반연 한다는 말은 무명이 행을 이끌어 오고, 행이 또 한걸음 더 발전해서 식을 일으키고, 식이 또 한걸음 발전해서 명색을 일으키고, 명색이 또 한걸음 발전해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좋은 것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좋지 않은 근본적인 것도 역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반연 합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그렇게끔 되어 있습니다. 攀緣(반연)! 이것은, 이끌어온다. 주변 사람들에게 권한다. 그것을 반연 한다. 인연을 맺는다, 여러 가지 표현이 있을 수 있겠는데, 그것이 좋지요. 불
교 도 우리가 공부를 하며는, 불교공부 하는 일을 전해야 되어요. 자꾸 그것을 전하고 반연해야 됩니다. 자꾸 그것을 나누어 주고 인연을 맺게 하는 일, 그것이 반연 입니다.
예를 들어서 염화실 에 공부할만하다. 불교공부하기에는 제일 좋은 곳이다. 정말 그런 신념이 있으면 자꾸 여러 사람을 반연해서, 함께 동참하게 하는 것 그런 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무명 행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이런 것들도 전부 그렇게 해서 자꾸 반연해서 발전하고, 반연해서 발전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식은 명색(名色)을 반연하고, 명색은 육입(入)을 반연하고,) 육입은 촉(觸)을 반연하고, 촉은 수(受)를 반연하고, 수는 애(愛)를 반연하고, 애는 취(取)를 반연하고, 취는 유(有)를 반연하고, 유는 생(生)을 반연하고, 생은 노. 사. 우. 비. 고. 뇌(老死憂悲苦惱)를 반연하느니라.
늙고, 병들고, 근심걱정거리 괴로움 번민 이런 것을 반연해서 이끌어 와서, 오늘날 우리들이 좋든 싫든 경험하게 되는 그런 삶이 전개되고 있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라지게 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근본이 사라지는 것, 그래서, 무명이 사라지(滅)면 행이 사라지고, 행이 사라지면 식이 사라지고, 식이 사라지면 명색이 사라지고, 명색이 사라지면 육입이 사라지고, 육입이 사라지면 촉이 사라지고, 촉이 사라지면 수가 사라지고, 수가 사라지면 애가 사라지고, 애가 사라지면 취가 사라지고, 취가 사라지면 유가 사라지고, 유가 사라지면 생이 사라지고, 생이 사라지면 노. 사. 우. 비. 고. 뇌가 사라지느니라.
우리가 겪고 있는 또 경에서 표현하지 못한 각양각색의 고통과 괴로움과 문제들! 이런 것까지 다 사라지느니라. 그렇지요. 이런 내용은 다른 경전에서도 많이 보입니다. 원각경 보안 장 에도, 이러한 내용이 보이지요. 또 능엄경에서도 이러한 것이 보이고요.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사람이 죽었을 때 맨 먼저 들려 드리는 경이 있는데, [경이라고 이름은하진 않습니다만,] 無常戒(무상계)를 읽어 드리지요. 夫無常戒者(부무상계자)는 入涅槃之要門(입열반지요문)이라. 무상 이라고 하는 이 철칙은 그 말입니다.
무상계 할 때, 게송偈(게) 자가 아녜요. 경계 戒(계)자 입니다. 계를 지킨다 하는 경계 戒(계)자 입니다.
그것은 철칙이다 이말 입니다. 무상이라고 하는 모든 존재가 변할 수밖에 없고, 변하니까 사라져 없어지고 하는 이 사실은, 입열반 지 요문 이다. 열반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이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모든 존재가 변멸해 가고 결국은 사라져 없어지고, 그것을 다른 것에다가 두고 우리가 이야기 할 시간이 없지요.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이 중심이니까, 모든 존재를 사람이 다 이끌어다 놓고, 모든 존재가 다 그 철칙에 해당되지 만은, 뭐니 뭐니 해도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의 문제를 먼저 문제시해야 됩니다. 우선시해야 되어요. 사람의 문제를우선시해야 됩니다. 불교는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다른 것도 다 그 속에 포함되지만, 다른 것 이야기할 겨를이 없어요. 사람의 문제만 제대로 파악한다면 모든 존재가, 다 한꺼번에 같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무명의 문제도, 모든 존재도 그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똑 같은 과정을 거쳐서 생성변화 발전되고, 똑 같은 과정을 거쳐서 이렇게 소멸해 간다고 보면 됩니다.
앞서도 반야심경의 이야기도 했지만, 이런 것은 다 없다. 없다는 입장을 이미 반야심경에서 공부한 것으로 우리가 생각을 한다면, 이 문제 사제 십이인연 가지고 너무 시간을 끌고 신경을 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교공부를 할 때도 종지를 잃어버리면 참 헤매게 됩니다.
내가 지금 반야심경을 이야기 하고 있다. 아니면, 기초교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은 부처님이든 최상의 불교의 경지도 기본교리의 그런 차원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만약에 선을 이야기 한다면 어떤 기본 교리든, 어떤 이야기든 간에 전부 선의 격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반야심경을 이야기 하려면, 천하 없는 것을 이야기 하더라도, 반야심경의 격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런 것들이 종지를 잃지 않고, 법을 설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사실 종지를 잃어버리면 불교는 워낙 복잡하고 말이 많은 종교기 때문에, 왔다 갔다 하고, 헷갈리고, 이 말도 맞는 것 같고 저 말도 맞는 것 같고, 열반을 아주 높이 이야기 하며는, 열반이 최고인 것 같이 들리고요.
열반은 우리가 그 동안 공부해온 것으로 보면 소승열반, 비유컨 데. 거름이나 쳐주고, 청소나 해주고 겨우 하루의 품삯을 받는 제일 열등한 직업의 품삯밖에 안 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이렇게 법화경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이야기들을 이것저것 자꾸 들음으로 해서 정리가 되겠지요. 불교를 이해하는 것이 정리가 되겠고, 세상을 보는 것이 정리가 되겠고, 인생을 보는 것이 정리가 될 것이 라고 생각 합니다.
불교이야기를 할 때는 첫째 종지를 딱 세워놓고 거기에 그 틀에 맞게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것을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부처님이 천신과 인간 대중 가운데서 이 법을 말씀하실 때 육백만 억 나유타 사람들이 일체 경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으로써 모든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해지고,
모든 사람들이 일체 경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으로써 모든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해지고, 깊고 묘한 선정과 세 가지 밝음과 여섯 가지 신통을 얻어 여덟 가지 해탈을 갖추었느니라.
三明六通(삼명 육통)과 八解脫(팔 해탈) 이것은 불교 수행의 결과로서 이런 표현을 하지요.
삼명육통, 팔 해탈은 부처님의 덕을 표현할 때, 표현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그 경지가 부처의 경지가 되었든 부처님보다 좀 못한 경지가 되었든 간에, 요컨대 그것은 일체경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는 것! 여기에 우리가 좀 눈을 떠야 됩니다. 일체 경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으로써 모든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해진다.
중생의 삶이라고 하는 것!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경계에 이끌리 고 경계를 가지고 좌지우지하고 오직 그저 내 자신을 나 아닌 경계에다 맡기고 경계의 변화에 내가 굴러가고, 경계의 변화에 내가 변해가고, 이것이 중생들의 전 살림살이입니다.
그런데 경에서는 어떻습니까? 일체 경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어떤 경계든 간에 거기에 굴러가지 아니하고 끌리지 아이하고 내가 거기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경계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나는 나대로 내 주관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隨處作主(수처작주)! 제가 좋아하고, 임제록에서 임제스님 도 자주 언급하시는 수처작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 이것이 수처작주! 입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체 경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경계야 어떻든 거기에 팔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만 어떤 경계가 나타나면 머~엉하니 입을 따~악 벌리고 정신을 다~아 잃어버리고 거기에 그냥 빠져서 울고 웃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옛날 어릴 때 예를 들어서, 공설 운동장 같은 데에서 영화를 상영하지요. 그러면 촌사람들이 처음보고는, 그런 화면의 큰 천에 떠서 그림이 나타나고 사람이 움직이고 소리가 나고 하는것, 그 사실 만이라도 신기해 가지고는, 입을 딱 벌리고 정신없이 정신을 다 빼앗깁니다.
그사이에 소매치기들이 훔쳐갈 것 다 훔쳐가고 하는, 그래도 모르는 그 정도로 경계에 정신을 팔고 있잖습니까?
비단, 시골에서 영화를 처음 볼 때의 그런 경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도 경계의 어떤 변화에 정신을 잃고 거기에 휘둘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촌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촌사람들입니다. 경계에 휘둘리면서 살고 경계가 움직이는 데로 내 정신을 잃고 이끌리면서 사니까요. 그거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없지요.
불교공부 좀 했노라 하고, 사회의 지식도 상당하고 그 나름대로 똑똑하다 하고 정신 차리면서 산다고 하지만, 정작 어떤 경계가 떡 나타나면 그만 경계에 빼앗겨 버리거든요. 아주 이 표현이 참 가슴을 흔드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일체 경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므로 써 그 이유 하나로서 모든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해졌다.
당연 하지요 그럴 수밖에 없지요. 경계에 흔들리지 아니하면 모든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해지지요.
마음이 해탈해지면 깊고 묘한 선정과, 세 가지 밝음과, 여섯 가지 신통과 여덟 가지 해탈! 그것은 자동으로 따라오지요. 저절로 따라 옵니다.
우리가 언제나 수처작주 해서 자신을 지키는 일! 이 참 중요한 게 아닌가, 불교공부의 소득이 바로 그런 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네 번째의 법을 말씀하실 적에는 천 만억 항하사 나유타 중생들이 또한 일체 경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으로써 모든 번뇌에서 마음에 해탈을 얻었느니라.
여기 또 그런 말이 나오지요. 일체 경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으로써 모든 번뇌에서 마음에 해탈을 얻었느니라.
어쨌거나 경계에 이끌려 버리면 그것은 끝이에요. 경계에 끌리면 그날로 개망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자기가 아닌 다른 경계에 이끌리니까요.
그러므로 임제스님 은, 늘 말씀하시기를 ‘경계를 쫓아가지 말라. 경계를 쫓아가면 그것은 마치 도깨비에게 홀린 거와 같다,’ 도깨비에게 홀린 거와 같다, 라고 임제스님 은, 아주 그렇게 혹독하게 평을 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두고 다른 어떤 상황에 끌려가는 것은 그대로 경계를 쫓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도깨비에게 홀리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일체 경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으로써 모든 번뇌에서 마음에 해탈을 얻었느니라.
그 경계가 무엇이 되었든지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없어요사람이 되었든지, 재산이 되었든지, 명예가 되었든지 뭐가 되었지 간에 그것은 경계일 뿐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냉정하게 말할 때 그것은 경계일 뿐입니다.
그 뒤부터 여러 성문 대중들이 한량없고 그지없고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았느니라.
그로부터 성문들이 워낙 법문이 좋으니까요. 정말 모든 경계로부터 시원스럽게 벗어나서 정말 자기 자신으로서 자주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모두 부처님 법문에 끌려서 성문대중 들이 한량없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부처님 법문을 듣는 그런 대중을 성문대중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십이인연과 사제! 앞서 깨달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볼 때, 그 시각은 참으로 아름답고 존귀하게 본다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제 십이인연과 거기에 대한 종지! 불교 공부는 어디까지나 종지가 서야 된다. 종지라는 것이 불교의 근본취지이지요. 그것을 세워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하는것이, 왔다 갔다 하지 않고, 말하자면 정리되게 말할 수가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공부하겠습니다.
기록: 수경심, 정리: 진여혜, 강정은
첫댓글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감사합니다._()()()_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냉정하게 말할 때 그것은 경계일 뿐입니다....나무묘법연화경
사람들이 일체 경계를 받아 들여지지 아니하므로 써 그 이유 하나로서 모든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해졌다...나무묘법연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