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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으로 한라산을 그린 문인화가
[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학산(鶴山) 윤제홍
월관봉·일관봉 등 백록담 지명을 새롭게 알 수 있는 자료 그림
19세기 지두화(指頭畵) 전통이 단절되는 마지막 그림 '한라산도'
제주 경차관(敬差官) 윤제홍
▲ '옥순봉', 지두화. 지본수묵, 연대미상, 호암미술관 소장
조선시대 미술가의 양대 축은 문인화가와 도화서 화원(畵員)이다. 문인화가는 오늘날처럼 미술의 장르를 분류할 수 없었던 조선시대에 풍류를 즐기기 위해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을 근본으로 하여 문인화를 잘 그린 선비나 사대부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공민왕, 김부식, 이제현 등이 이에 속한다. 조선 초기에는 강희안(姜希顔)이 문인화가로서 이름을 날렸고, 조선 후기부터는 남종화가 중국에서 유입되면서 강세황, 이인상, 심사정, 김정희 등 많은 문인화가들이 조선 화단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도화서 화원은 문인화가들과 달리 그림을 업으로 삼은 전문 화공으로서 그들의 계급은 기술직 중인(中人)에 속했다. 그들은 궁중에서 영정(影幀), 세화(歲畵), 기록화(記錄畵), 단청, 의장물(儀仗物) 등 온갖 그림을 그렸다. 대표적인 화공으로는 김홍도(金弘道), 정선(鄭선), 장승업(張承業) 등을 들 수 있다.
제주에 경차관*註①으로 왔던 윤제홍(尹濟弘, 1764~ ? )은 179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794년 정시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문인화가로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도(景道), 호는 학산(鶴山), 또는 찬하(餐霞)이다. 경차관(敬差官)이란 조선시대 중앙정부의 필요에 의해 특수한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를 말한다. 경차관의 임무로는 국방·외교상의 업무, 재정·산업상의 업무, 진제(賑濟)·구황(救荒)의 업무, 옥사(獄事)·추쇄(推刷)의 업무 등이 있다. 그는 장령(掌令, 사헌부의 종 4품)으로 재직할 때 김달순(金達淳)의 죄를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고 논했다가 김구주(金龜柱) 일파로 몰려 창원에 유배되었다.
1810년(순조 10) 유배에서 풀려난 윤제홍은 청풍군수를 역임했다. 63세 때인 1825년 10월 14일 제주 경차관의 소임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제주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하루 동안 표류하다가 10월 15일 썰물을 이용하여 제주 별도포(別刀浦)에 겨우 정박할 수 있었다. 제주에 머물다가 같은 해 12월 14일 그는 왕을 소견(召見)하여 임무를 마칠 수가 있었다.
1830년 윤제홍은 풍천부사로 재직 중 암행어사 홍희석(洪羲錫)의 탄핵으로 관직을 잃었다가 1840년(헌종 6년) 대사간(大司諫, 사간원의 최고직, 정3품 벼슬)이 되었다. 대사간은 당상관의 벼슬로 왕에게 충언(忠言)을 고하는 직책이다. 통상적으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임명했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윤제홍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청풍군수를 지낸 학산(鶴山) 윤제홍(尹濟弘)의 산수화와 영춘 군수를 지낸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의 전서(篆書)와 예서(隸書)가 한 시대에 뛰어났다.....(중략) 내 할아버지(王考)께서 충청도 관찰사로 계실 때 두 분이 찾아오셨다. 내가 어릴 적에 두 분에게 절을 하고 필법에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두 분의 모습을 아직도 떠올릴 수가 있다"
윤제홍이 남긴 작품 중에는 송하소향도(松下燒香圖) 등 화격(畵格)이 높은 것이 전해지며, 특히 지두화(指頭畵)를 잘 그려 여러 폭의 지두화첩(指頭畵帖)을 남기기도 했다. 정선(鄭선), 심사정(沈師正), 이인상(李麟祥) 등의 화풍에 자신의 작품을 비교한 것이 있고, 때로는 그들의 작품을 모방하기도 했다. 특히, '고사도(高士圖)'·'옥순봉(玉筍峰)'·'모루관폭도(矛樓觀瀑圖)' 등에서는 이인상의 영향이 나타나는데 화제(畵題)에도 그렇게 적고 있다. 이러한 영향은 이재관(李在寬), 김수철(金秀哲), 김창수(金昌秀) 등으로 계승되어 조선후기 문인화풍의 한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손가락으로 그린 '한라산도'
▲ 윤제홍 작 '漢拏山圖', 지두화. 지본수묵, 1844년, 58.5×31cm, 개인소장
윤제홍은 1825년 제주에 경차관으로 왔는데 어떤 목적으로 제주에 왔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그가 경차관 때 도과시관(道科試官)을 겸하면서 거두었던 시권(試券)이 표류 중에도 온전하였다. 이에 왕은 윤제홍을 만난 다음날인 1825년 12월 15일 홍희준(洪羲俊)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아 제주 유생들의 과차(科次, 합격자)를 명하였고, 그 결과 제주 유생 김유(金柔)와 박경신(朴景信)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했다. 전시(殿試)란 과거 시험의 최종 단계로서 초시·복시를 통과한 과거 합격자의 차등을 가리기 위해서 왕 앞에서 보는 시험을 말한다.
윤제홍이 경차관으로 오기 두 해전 1823년에 제주 위유어사(慰諭御使) 조정화(趙庭和)의 별단(別單)에는 "우도 목장을 백성들이 개간하도록 허가 하시고, 도민 남녀는 내지(內地, 육지)에 왕래하면서 혼취(婚娶,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라는 내용, 그리고 1824년 3월 "장흥·영광·제주에 표도한 중국인 50명을 육로를 따라 호송하라"는 내용 등은 윤제홍이 경차관으로 왔던 제주의 전후 사정을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된다.
▲ 백록담 설경
윤제홍이 한라산에 오른 것은 제주 경차관으로 왔던 1825년 9월이었으며 한라산 정상에 오르니 운무(雲霧) 때문에 캄캄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가 그린 '한라산도(漢拏山圖)'는 81세 때인 1844년에 옛 기억을 더듬어 한라산의 실경을 그린 것이다. 이 '한라산도(漢拏山圖)'는 지두화(指頭畵)로 그려졌다. 지두화란 '붓을 사용하지 않고 손가락, 손톱, 손바닥으로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 동양의 전통 모필화법(毛筆畵法)과는 다른 매우 독창적인 미감을 표출하는 파격적인 화법이다. 8세기 당대(唐代)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본격적인 지두화의 창작은 청대(淸代) 고기패(高其佩, 1672~1734)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조선에는 1761년 이전에 지두화가 유입되어 일부 화가들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했다. 문헌상 지두화를 그린 최초의 조선화가는 겸재 정선이지만 작품으로 남긴 이는 심사정, 강세황(姜世晃), 최북(崔北) 등이다. 지두화는 몇몇 화가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그려졌는데 독자적인 화풍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여 19세기 중엽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가락을 이용하여 그려진 독창적인 필선의 미감은 붓 그림에서 볼 수 없는 파격미가 있어 신선한 느낌을 준다.
'한라산도(漢拏山圖)'는 한라산 정상을 그린 그림이다. 화면 상단과 하단에는 화제(畵題)가 빼곡하게 적혀있다. 화면 위쪽 부분에 아홉 봉우리가 거친 터치로 그려졌고, 그 바위 앞에 는 두 명의 선비와 두 명의 노비가 있는데 한 선비가 돌 벽에다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오른 쪽 큰 돌 벽에는 '옛 이름은 구봉암(九峰岩), 고친 이름은 구화암(九華岩)'이라 적혀 있다. 오른쪽 구석의 작은 바위에는 '조씨 기명(趙氏起名)'이라고 하여 1777년 제주에 유배 왔던 '조정철(趙貞喆, 1751~1831)의 마애명'을 표시해 놓았다. 현재 한라산의 조정철 마애명은 동쪽 벽에서 떨어져 굴러 백록담 변에 하늘을 보고 누워있다.
▲ 조정철 마애명
화면 중앙에는 백록담(白鹿潭)이라는 제명(題名)이 있고 모자를 쓰고 사슴을 탄 신선과 작은 사슴이 그려져 있다. 사슴은 백록담의 물을 마시고 있고 화면 좌우에는 '월관봉(月觀峰), 일관봉(日觀峰)이라고 하여 달과 해를 보는 위치를 적어놓았다.
이 '한라산도(漢拏山圖)'는 아홉 봉우리를 중심축으로 하여 S자 구도를 취하고 있다. 백록담 가운데는 아담하게 부풀어 오른 작은 언덕과 그곳에 자라는 잡목을 그려 화면의 이음새 역할을 하고 있다. 화면 아래쪽에는 물을 그려 넣고 돌무더기로 백록담의 경계를 구분했다. 전체적으로 '한라산도(漢拏山圖)'는 윤제홍 자신의 등반 경험과 한라산 전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면서 실제 한라산의 경치를 그렸다는 점에서 문인화이지만 실경 산수라는 점이 주목된다.
전은자 :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2009년 8월 25일 <제민일보>
*註① 경차관 [敬差官]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체제의 강화과정에서 국가의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특정한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중앙 관원의 하나이다. 임명과 파견에 대해 특별히 선발 관청이나 관직에 관한 법제적 규정은 없었고, 대개 관련 사무에 밝은 관원 가운데 골라 정했다. 주로 7품 이상의 전직·현직 관리가 임명되는데, 사안이 중요할 경우에는 정3품 이상의 관리가 파견되기도 했다. 1396년(태조 5)을 전후해서 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지방에 왜구 소탕을 위해 중앙 관원을 파견한 것이 처음이다. 당시 주된 임무는 왜구 소탕과 관련한 전황을 파악하고 해상 전투에 사용될 선박의 실태와 정비 상황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주로 군사적인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가 태종대 이후 그 임무와 역할이 크게 확대되었다. 경차관에는 국방·외교에 관한 군기점고(軍器點考) 경차관, 군용(軍容) 경차관, 염초(焰硝) 경차관 등과 왜구나 여진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는 임무를 담당한 경차관 등이 있었다. 이들은 왜구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의 강구, 군기의 점검, 군사들에 대한 위문과 사기 진작, 군사 진영의 순시, 연변·연해 지역의 비상연락 시설체계인 연대(煙臺)검사 등을 주요임무로 했다. 한편 재정 및 산업에 관한 경차관의 임무가 가장 중요시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손실(損實) 경차관과 재상(災傷) 경차관은 연례적으로 파견되었고, 그 역할도 매우 컸다. 이들은 매년 국가의 부세(賦稅) 수입기반을 이루는 농사작황의 파악, 전답재해 상황의 조사, 농민들의 도망과 유리로 야기되는 호구 및 인구의 이동과 증감, 변동상황을 파악해서, 이들을 원거주지로 돌려보내는 등 농민통제에 관한 일들을 맡고 있었다. 이와 아울러 토지에 대한 측량을 통해 새로운 토지의 개간, 재해와 기근, 농민의 유망 등으로 인한 진황지(陳荒地)의 발생 등과 관련해 전세 부과의 대상이 되는 경작지 결수의 증감·변동의 파악을 주요임무로 하는 양전 경차관, 농민들로부터 거둔 전세를 해상교통로를 통해 선박으로 중앙에 운송하는 일과 관련한 임무를 맡은 조전(漕轉) 경차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금·은·동·철 등 공물의 생산을 감독하는 경차관, 제언(堤堰)을 보수하고 신축하여 수리(水利)를 위해 파견되는 경차관 등이 있었다. 한편 자연재해 및 기근을 당한 농민의 구휼을 통한 유리 방지, 토지에의 안착을 위해 파견되어 수령을 지휘·감독하면서 관련 사무를 관장한 진제(賑濟)·구황(救荒) 경차관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세·요역·군역·신역·공물 등 국가에 부세 부담을 진 농민이나 공노비 등의 기피와 유리를 규제하고 추쇄(推刷)하여, 이를 기초로 호적·군적·노비적 등 신역부담자의 장부를 작성하여 이들에 대한 파악의 강화를 주요임무로 한 경차관도 파견되었다. 호구의 증대, 새로운 토지의 개간, 농업의 제고 등을 통해 국방의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인구밀도가 높은 남부지방으로부터 인구밀도가 낮은 북부 연변지방으로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과 관련된 임무를 담당한 사민(徙民) 경차관이 파견되기도 했다. 국가의 필요에 따라서는 수령권의 남용, 수취체제 운영과정에서 수령·향리 등의 부정과 침탈로 야기되는 민원(民怨)의 파악을 전담하는 문민질고(問民疾苦) 경차관, 문폐(問弊) 경차관 등이 파견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도적을 소탕하기 위해 파견된 경차관, 범죄사실의 조사와 범죄인의 신문·압송을 위해 파견된 경차관, 명나라와의 말무역을 위해 파견된 쇄마(刷馬) 경차관, 명나라에 진헌(進獻)할 매를 잡기 위해 파견된 경차관 등도 있었다. 이렇게 여러 부문에 걸쳐 파견된 경차관들은 각기 특정한 임무와 역할을 띠고 있었지만, 때로는 그들의 임무와 관련된 사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수령의 직무에 크게 관여하기도 했다. 이들은 수령의 집무태도를 규찰하고 수령과 원악향리의 부정을 적발하여 처벌함과 더불어 민원사항의 파악, 유이민의 추쇄, 기민(飢民)의 진휼 등의 임무를 겸하기도 했다. 백록담 [白鹿潭]
제주도 한라산 산정에 있는 화구호(火口湖 crater lake)이다. 총 둘레 약 3㎞, 동서길이 600m, 남북길이 500m인 타원형 화구이다. 신생대 제3·4기의 화산작용으로 생긴 분화구에 물이 고여 형성되었으며, 높이 약 140m의 분화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다. 백록담이라는 이름은 옛 신선들이 백록주(白鹿酒)를 마시고 놀았다는 전설과 흰 사슴으로 변한 신선과 선녀의 전설 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다른 한라산의 기생화산들은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화구에 물이 고이지 않는 데 비해, 백록담에는 물이 고여 있다. 과거에는 1년 내내 수심 5~10m의 물이 고여 있었으나 담수능력이 점점 떨어져 수심이 계속 낮아지고 있으며 바닥을 드러내는 날도 많아지고 있다. 물의 일부분은 땅 밑으로 복류(伏流)한다. 화구벽의 암질은 동쪽과 서쪽이 서로 다르다. 서쪽은 화산활동 초기에 분출한 백색 알칼리 조면암이 심한 풍화작용을 받아 생긴 주상절리가 기암절벽을 이루며, 동쪽은 후기에 분출한 현무암으로 되어 있다. 분화구와 절벽에는 눈향나무덩쿨 등의 고산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이곳은 한라산의 정점으로 백록담에 쌓인 흰 눈을 녹담만설(鹿潭晩雪)이라 하여 제주10경의 하나로 꼽았으며, 멀리 보이는 경관과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