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10;1-15,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 2017. 6. 18
1.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목대로 선한 목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두가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에서의 목자와 양의 관계이며, 두 번째는 이 말씀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왜 선한 목자를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는가?
여러분,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왕과 백성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설정해놓고 말씀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유목민입니다. 지금도 일반 사람들은 유목생활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양과 목자의 설명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어필이 잘 되고, 이해가 잘 되고, 가장 편합니다. 왜냐하면 양과 목자의 삶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양과 목자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던 다윗 왕입니다, 하나님과 다윗 왕이 목자와 양입니다. 이스라엘의 유목 개념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양을 돌보는 서양식 유목개념과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열대성 기후이기 때문에 푸른 풀밭과 울타리, 양몰이 개와 목자 그리고 수많은 양떼. 이런 모습이 아니라 삭막한 들판과 몇 마리 안 되는 양 그리고 목자입니다.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이 언제 어디나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목자와 양과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긴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 34장에, 좋은 목자와 나쁜 삯꾼 목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에는 목자의 개념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모습을 비유했으나 나중에는 하나님과 메시아를 뜻하는 개념으로 바뀝니다. 목자가 다 좋은 목자가 아니듯이 양 또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그런 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선한 목자에 대한 말씀은 9장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8;53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8장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돌로 쳐서 죽여야만 하는 여인을 끌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여러 가지 진리를 말씀하시면서 본문 단락의 마지막으로 물으시는 내용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 주제입니다. 여러분, 오늘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9장에서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을 합니다. 제자들이 이상한 질문을 하지요? 누구의 잘못으로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모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들의 질문 속에 답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아서 진흙을 이기고 이긴 진흙을 앞을 못 보는 사람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이상한 행동이지만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던 사람에게는 빛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더니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빛을 보게 된 이 사람이 간증을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하는데 처음에는 고쳐 주신 주님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묻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당신들도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느냐? 반대로 고침을 받은 사람이 되묻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스스로 모세의 제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침을 받은 사람이 세 번째로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시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의미를 기적을 통해서 드러내시고 고침을 받은 사람으로부터 확인이 되도록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선한목자가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 과연 선한 목자는 누구이며, 문은 무엇이고, 문지기는 누구이며, 강도는 누구일까요? 이 말씀을 하시면서 10;10절에서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처음에는 목자와 양을 말씀하시고, 두 번째 단락, 6-10절에는 주님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덧 붙여서 양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하게 주시기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는 제자들을, 오늘 본문에서 양들의 이름으로 각각 불러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목자가 양들보다 앞서 그들을 인도하듯, 스스로 주님께서 양의 문이 되어 양들이 들어오길 바라시며 이 예배가운데 임재하셔서 생명을 풍성히 얻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더욱 풍성하게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 원하심대로 이루어지고 성취가 되는 귀한 예배 속에, 울타리 속에, 복을 받게 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포괄적으로 요한복음의 주된 내용입니다. 요한복음의 내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지방에서의 사역이 강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상으로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3년 조금 넘게 기록이 되었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나라’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대부분이 예수님 자신에 관한 것과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특별히 영원한 생명이라는 주제에 주목하고 집중을 합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집중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이 세대와 오는 세대, 현재와 미래뿐만 아니라, 위와 아래, 하늘과 땅, 하나님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요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위와 아래, 세상에 속하고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현재를 드러냅니다. 요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 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주로 영적인 부분을 다룹니다. 요한복음이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로고스,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을 주제로 삼고, 보혜사성령님의 사역에 대하여 유일하게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 요한복음에는 7가지가 나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 7가지 기적은 예수님의 이적 중 대표적인 것으로서 매우 상징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7가지를 ‘표적’이라 부릅니다. 오늘 본문을 말씀하면서 일어난 표적도 같은 맥락입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눈을 뜨게 되는 기적, 단순히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예수께서는 그 누구에게나 이 같은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는 영적 사실을 나타냅니다. 여러분, 실로암이 무엇입니까? ‘실로암 못’의 ‘실로암’이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누가 어디로 보냄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에 의해 예수님이 죄 많은 이 세상에 보내지셨습니다. 누가 어디로 보냄을 받았습니까? 시각장애인이 눈에 진흙을 바른 채 예수님에 의해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분이십니다. 실로암의 뜻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실로암의 뜻을 비교하면 둘 다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실로암 못으로 가라는 주의 음성을 들으면, 순종하고 그대로 실로암 못으로 가야 합니다. 보냄을 받은 데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보냄을 받은 곳에서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고 두 눈을 씻어 영안의 눈이 떠집니다. 지금까지 닫혀 있었던 삶이 새롭게 열리게 됩니다. 예루살렘에는 실로암 과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베데스다 못의 물이 동할 때 병이 치유된다는 소문과 자신들의 생각으로, 실로암 못에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보냄을 받은 곳을 외면하고, 베데스다 못이나 다른 못으로 가려고 합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상상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 마음대로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 베데스다 못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로암에 가야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실로암 못으로 향하고 있나요? 주의 음성을 들으시나요? 보냄을 받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고침을 받고, 치유를 받고, 회복이 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영적인 요한복음은 역설적으로 결핍과 없음의 시대를 보여줍니다.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도 강인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동물이 낙타입니다. 모래 바람이 불어와도 머물지 않고, 정지하지 않고, 뒤돌아가지 않는 동물이 낙타입니다. 그런데 이런 낙타마저 결정적인 순간에 목자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방어능력이 제로에 가깝고, 지독한 근시에다 방향감각조차 없고, 절제가 안 되는 양은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그 양과 진배없는 , 양으로 비유되는 사람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주어진 생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하여 목자가 가장 필요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이 저와 여러분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 가운데 던져진 사람입니다. 어떻게해야 이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실낙원 이후로 사람이 살아가는 이 땅의 생태계는 혹독하게 나빠졌고, 급변했습니다.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고,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고 반복되었습니다. 사람은 살기 위하여 땀을 흘려야 했고, 노동과 산고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좀 더 가지기 위하여 다투어야 했고,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투쟁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무리 애쓰고 노력하더라도 결핍은 늘 인간을 괴롭혔고, 결핍은 늘 따라다녔습니다. 이 것이 세상이 주는 환경이고, 여건이고, 상황이고, 멧세지입니다.
그런데 ‘결핍’이라는 key word로 요한복음을 볼 때, 요한복음은 ‘결핍의 이야기’입니다. 요 1장은 세상엔 참 빛이 없다는 결핍을 말씀합니다. 2장은 잔칫집에 포도주의 결핍이 있습니다, 3장은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자 랍비였던 니고데모의 확신의 결핍이 있습니다, 4장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속엔 남편의 부재로 상징되는 참 소망의 결핍과 참 기쁨의 결핍을 말합니다. 5장은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못가에 노숙하던 수많은 병자들과 38년 된 병자 이야기 속에 넘쳐나는 경쟁과 더불어 ‘도와줄 사람의 결핍’을 말씀 합니다. 6장에는 해질녘 베세다 광야, 빈들에 수많은 군중이 모였지만 그곳에 먹을 떡, 먹을 양식이 없는, 양식의 결핍을 말씀합니다, 7장에는 예수님의 친 형제들까지도 주님을 믿지 않는 ‘믿음의 결핍’을 보여줍니다. 8장은 간음한 여인과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보게 되는 거룩함의 결핍과 더불어 용서와 용납이 결핍한 사회를 말씀합니다. 9장에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시각 장애인을 통해 참다운 것을 볼 줄 아는 시력이 결핍된 종교인을 말씀합니다, 10장에는 수전 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무리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목자는 그들 사이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11장은 죽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더불어 찾아온 소망의 부재와 생명의 결핍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결핍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요한복음은 마침내 마지막 부분인 21장에서는 부활이후의 아침 갈릴리 호수 가에서 밤새 헛 그물질을 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이 없는 삶의 노력과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내일과 미래를 위한 오늘, 현실의 결핍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이 온통 부재와 결핍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요한복음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결핍이 누구를 통하여 해결이 되고 누구를 통하여 극복되는 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이시고 부활의 주님이 우리 신앙의 삶의 결핍을 채워주십니다. 내일과 미래에 대한 결핍을 채워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다양한 결핍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나오는 결핍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누구한 분 결핍이 없는 분이 없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삶의 다양한 결핍이 다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고통을 받는 결핍이 있습니다. 물질과 힘과 능력의 결핍이 있습니다. 한계 때문에 결핍이 있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의 결핍의 내용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바로 서지 못하고, 바로 나서지 못하고, 바로 이야기 하지 못합니다. 늘 그늘이 있습니다. 늘 어두움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고 낙심이 있고, 당연함이 있고, 포기가 있고, 체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결핍과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람은 예수님으로 다 채움을 입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결핍이 있지만 소망이 있습니다. 이 시간 찾아 오셔서 우리의 다양한 결핍을 채우시되 잔이 넘치게 채우시는 주님으로 소망을 얻고, 용기를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4. 그러면 얼마나 채워질까요?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함 이니라. 오늘 본문의 중요한 요 10:10은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 바로 모든 결핍의 근원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그 결핍은 오로지 양의 목자이신 주님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는 선포와 아울러 그것이 바로 그분께서 오신 목적임을 증거 합니다. 10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러분,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적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다른 1개라도 빼앗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 합니다. 이를 일컬어 우리는 ‘도둑’이라 하고, ‘강도’라 합니다. 그런데 이웃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이런 사람들의 씨가,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씨앗이 심겨지면 어떠합니까? 햇볕과 수분과 토양이라는 조건만 되면 발아하듯이 일반적인 사람들 중 누구에게서도 이런 것이 나타날 수 있는 성향이 있습니다. 욕심, 욕망 때문입니다. 이렇게 뺏고, 뺏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세상은 결과적으로 ‘죽음’과 ‘멸망’을 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이런 연속된 삶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해 주실까요? 10절 하반 절을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그들이 생명을 얻고, 또한 필요한 것 이상을 얻게 하기 위하여 왔다.” 요한복음은 인간의 삶에 만연해 있는 각종 결핍에 대해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결핍의 가장 근본적 결핍은 생명의 부재, 참다운 생명의 결핍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생명의 결핍을 제거하시고 채우시되 넘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다시는 세는 것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용하지 않지만 개역개정 성경에는 ‘풍성히’로 번역된 περισσὸν(페릿손)의 의미가 ‘필요한 것 이상의’라는 의미입니다. 루터는 이것을 ‘충분한 만족’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결핍을 해소하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히 많은 것을 뜻합니다. 성화 작품 하나 말씀을 드립니다.
1599년, 카라바조는 로마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의 공동체를 위하여 지어진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San Luigi dei Francesi)의 콘타렐리 채플의 양쪽 벽을 장식할 두 점의 그림을 주문 받았습니다. 콘타렐리 채플은 프랑스인 추기경 마테오 콘타렐리(Matteo Contarelli)가 안치된 곳입니다. 카라바조는 마테오 콘타벨리의 수호성인인 성 마테오의 생애 주요 장면을 묘사한 성화 <마태의 순교(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1599-1600)와 더불어 <마태를 부르심 (The Calling of Saint Matthew)>(1599-1600)이라는 성화를 제작했습니다.
그 중에 <마태를 부르심>이라는 작품을 사람들이 볼 때마다 참 빛의 결핍, 참 생명의 결핍을 채우기 위하여 생명 아닌 것에 빠져있던 인생을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다고 합니다. 앞을 볼 겨를도, 좌우를 살펴볼 틈도 없이 돈 세기에 바쁜 마태의 왜곡된 열정의 현장 한 가운데로 주님께서 생명의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분명 그 방의 창은 다른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은 주님이 오시는 그곳에서부터 비춰옵니다. 주님께서 세관에 앉은 마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의 인생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결핍,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었던 궁극적인 빛의 부재, 생명의 없음이 채워지던 순간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참 생명이 필요한 것 이상으로 넘치게 그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던 순간입니다. 여러분, 더 풍성히, 더 필요한 것 이상입니다. 여러분, 필요만 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결핍만 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잔이 넘치게 채우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23;5-6,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년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더 필요한 것 이상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예배드리시는 여러분을 위해서 주님의 보혈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론의 수염을 타고 그 기름이 흘러내리듯이 여러분에게도 주님의 보혈이 흘러넘치십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필요 이상의 것으로 채우시되 잔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5. 그러면 왜 이렇게 하실까요? 그래서 선한 목자입니다. 왜냐하면 양의 목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모자람의 자리, 없음의 삶, 뒤틀려진 관계, 이 모든 결핍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인생의 어두움은 그분을 만남으로 참빛으로 채워졌습니다. 포도주 없는 잔칫집은 더 맛좋은 포도주로 넘쳐났습니다, 확신이 없었기에 야음을 틈타 몰래 찾아왔던 유대관원 니고데모는 12 제자들마저 도망을 간 예수님의 사후, 당당하게 빌라도를 찾아가서 장례를 위하여 주님의 시신을 양도요구를 할 정도로 확신에 찬 사람이 되었습니다. 헛된 남자에 인생의 희망을 걸고 목말라 하던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메시야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38년이라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을 경쟁과 원망의 베데스다에서 허비한 병자는 병 고침과 더불어 영혼의 의사를 만났습니다. 해질녘 벳세다 빈들은 빵과 물고기로 채워졌고12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몸이 이미 썪었던 나사로는 스스로 붕대를 풀고 걸어 나와 생명의 부활을 보여주는 샘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밤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던 빈 그물 같은 인생은 153마리나 되는 펄떡이는 물고기로 채워지는 생기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필요한 것보다도 더 풍성하게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자 많은 우리 삶을 고쳐주셨습니다. 결핍으로 채워졌던 우리 인생을 생명으로 넘쳐나는 삶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이 땅에 오신 또 다른 보혜사’, 도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은 무너진 우리 삶을 새롭게 새워주십니다. 강한 것처럼 살아가지만, 실제론 치명적인 생의 약점을 안고 살아가던 낙타처럼 무너지고 찢어진 우리 맘을 위로하고 세워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의 둑이 무너졌습니까? 신앙과 믿음의 둑이 무너지십니까? 우리 속에 나도 모르는 새 무너져 있는 곳이 있습니까? 손 쓸 틈새도 없이 쏟아져 버리고, 비워져 버린 부분이 있습니까? 혼자서 막으려 해도, 혼자서 채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고, 울 수밖에 없는 결핍의 자리가 있습니까? 빨리 이루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결핍이고, 없음입니까?
한국의 박 노해 시인이 계십니다. 그분의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라는 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꽃이 피었다고 말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별이라고 말들 하지만,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그가 변했다고 말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무너졌다고 말하지만,
꽃도 별도 사람도 세력도 하루아침에 떠오르고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나빠지고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좋아질 뿐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세상도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조금씩, 조금씩 변함없이 변해간다.
물론 주님의 능력이나 역사나 능히 이루심에 있어서 조금 그렇습니다만 다시 이 시를 음미하면 새롭게 다가오고, 새롭게 들려집니다. 여러분, 울타리에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 안에 들어가면 우리 안에 좋은 목자가 있고 그 목자가 꼴을 공급해 줍니다. 그런데 꼴을 공급하여 주는 것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서 공급되는 꼴은 메뉴가 어떤가요? 매일 달라지나요? 목자가 양과 염소를 데리고 매일 푸른 초장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그 양들이 먹는 메뉴가 풀 말고 다른 것이 있던가요? 똑같습니다. 매일 똑 같은 풀을 뜯습니다. 그래도 젖이 나오고 털이 자라고 살이 찝니다. 매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똑 같은 꼴이 공급됩니다. 여러분! 정말 은혜롭고 감사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매일 매일 반복되는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내일이 또 오늘처럼 반복된다는 것, 이 것이 복일까요? 아닐까요? 여러분, 우리가 감사치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 일상이 너무나 반복되기 때문에 그 귀함을 알지 못합니다. 반복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똑같은 꼴, 똑같은 맛나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꼴 때문에 처음에는 꿀맛이었다가, 얼마 지나서는 유과 맛, 기름에 틔긴 과자 맛이었다가, 그리고 맨 나중에는 박한 맛, 물이 없으면 입으로 안 넘어가는 그런 맛나, 꼴로 표현을 했습니다. 여러분, 먹는 꼴이 매일 달라진다면 정말 좋은 일일까요? 매일 드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싫다고 매일 메뉴를 바꿀 생각을 하면 과연 좋기만 할까요? 지금도 매 끼마다 힘든데 아마 주부들은 몸살을 앓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자로 모시는 사람은 여러 모양이 있지요. 그런데 그 목자들이 주는 꼴이 매일 다르면 좋기만 할까요? 좋은 목자는 매일매일 감격스런 감동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 아니고, 매일 매일 변함없이 똑 같은 꼴을 먹이는 것이 좋은 목자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좋은 양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똑 같은 꼴을 먹이는 것에 대해서 불평이 없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반복되고 같은 꼴로 행복을 찾고 은혜를 찾고, 감사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아는 것, 울타리 안에 있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여러분! 똑 같은 일상이 지루하고 권태로우십니까? 그래서 사는 재미도 없고 짜증이 나십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생각을 주님의 말씀에 맞추어야 합니다. 일상이 짜증스러우면 큰일 납니다. 우리가‘일상생활’이라는 말을 할 때 ‘일상(日常)‘은 매일이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일상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비상(非常)’입니다. 일상생활이 싫으신 분들은 비상생활을 하셔야 하는데 좋으시겠어요? 불났을 때“비상! 영국의 중심가에서 27층의 맨션이 불길에 휩싸인 모습을 보았지요? 비상입니다. 지진이 나고, 쯔나미 날 때의 비상입니다. 그 비상이면 지루하지 않고 권태롭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상이 아니면 언제든지 불안합니다. 여러분! 우리(sheep pen) 안에만 반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매일 똑 같은 꼴이 공급됩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이 매일 똑같습니다. 매일 같은 꼴이 공급되고, 일상이 반복되고, 목자들의 매일 똑같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꾸준히 나아가되 결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쌓지 아니한 성을 얻고 짓지 아니한 집을 소유하게 되고 뿌리고 심지 않은 소산의 열매까지 얻게 됩니다. 더 풍성하게 합니다. 필요 이상의 것으로 축복합니다. 이 것이 울타리, 우리 안에 있는 복입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이 시간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속삭이십니다. “내가 바로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왔다” “나는 그들이 생명을 얻고, 또한 필요한 것 이상을 얻게 하기 위하여 왔다.” 일상에 매일의 꼴로 입히시고 먹이시는 주님께서 주시는 결국에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