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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에 대하여 숙고하다 >
사람들은 흔히 나누는 대화 중에 가끔씩 ‘죽을 만큼 아프다’, ‘아무리 괴로워도 죽는 것만 하랴’, ‘죽도록 싫어한다.’는 등의 표현을 한다. 그만큼 죽음이란 우리에게 가장 혹독한 괴로움이고 고통스런 과정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스승에 의하면 인간이나 축생은 물론 지옥에서조차도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한다. 지옥보다 더 괴로운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천상에서도 죽음은 행복의 소멸을 의미하므로 당연히 싫어할 것이다. 생명을 가지 존재라면 누구나, 어디서든 죽음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는 의미다.
왜 사람들은 이토록 죽음을 두려워할까? 그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이별의 슬픔, 마지막 순간의 고통, 죽은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 두려움은 증폭되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무덤을 향한 죽음의 행진을 시작한다. 흘러가는 매 순간마다 한 발자국씩 마지막 순간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나이의 순서도 없고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이라는 예고편도 없다. 다만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예방주사 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초등학생들의 심정으로 ‘그 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두려움이 극에 달하면 차라리 보지 않으려 한다던가,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현실을 남의 일인 듯 외면하며 말도 꺼내려 하지 않는다. 어쩌다 뉴스나 신문을 통해 불의의 사망소식을 읽거나 부고장(訃告章)을 받을 때 혹은 장례식장에 가서나 잠시 실감하는듯하다가 아직 먼 훗날의 일이겠지 하면서 지나쳐버린다. 늙고 병들고 죽어야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피현상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류 공통의 마음병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이렇게 외면하고 두려워만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서둘러 피하지 않고 즉시 알아차리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태어나서 죽어야하는지를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일어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만약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고 묻는다면 스승은 ‘원인에 의해서 와서 결과를 향해 간다.’고 대답하실 것이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업의 힘으로 태어났으니까 업의 결과로 죽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상의 한 모습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그냥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탐진치로 뭉쳐진 정보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다음 생으로 넘겨진다는 데에 있다. 우리의 본능적인 두려움은 아마 여기서 비롯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비담마 논장을 통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경전에 의하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무렵 망자에게는 ‘업’과 ‘업의 표상’ 그리고 ‘태어날 곳의 표상’인 세 가지의 표상이 타나난다고 한다. 이 때 ‘업(業)은 현생에 행했던 선업이나 불선업이고 ’업의 표상‘은 업을 행할 때와 관련한 형상이나 도구와 같은 것이다. ‘태어날 곳의 표상’은 다음 생에 태어날 곳의 모습이나 형상 등이다.
이런 표상들은 여러 차례 반복해서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갑자기 죽는 경우는 그럴 여유가 없는지 분명하지가 않다고 한다. 경전에서는 죽음의 원인을 촛불에 비유해서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초가 닳듯이 수명이 다하는 경우, 그 심지인 업이 다하는 경우, 수명과 업이 다하는 경우 그리고 ‘파괴된 업’이 치고 들어와 수명을 단축하는 경우로 구분한다. 마지막 부류는 예기치 못한 바람에 촛불이 꺼지듯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생명이 꺾이는 경우다.
어쨌든 망자는 세 가지 표상 중 하나를 대상으로 임종의 마음[死沒心]을 맞이하는데 이 마음은 다음 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면서 사라진다. 세 가지 중에서 어떤 표상을 붙잡고 생을 마감하느냐에 따라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를 날이 저물어서 외양간에 소들을 몰아넣는 것에 비유한다. 다음 날 아침 목장주가 외양간 문을 열면 문 가까이에 있던 소가 제일 먼저 나올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마지막 사몰심이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는 순간의 마지막 마음을 잘 가져야 한다. 이 한 순간의 마음이 어떤 표상을 붙잡느냐에 따라 다음 생에 제일 먼저 일어나는 재생연결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표상에 마음을 기울이며 죽느냐에 따라 다음 생에 축생, 아귀 등의 존재로 태어날 수도 있고 인간이나 천인의 존재로 태어날 수도 있다.
다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부모님이나 부처님을 살해한 경우, 부처님 몸에 피를 나게 한 경우, 승단을 분열시키는 등의 5가지 큰 악업을 저지른 경우와 그 반대로 색계선정이나 무색계 선정 등의 강력한 선업이 있는 경우에는 이것이 우선한다고 한다.
하지만 마지막 임종 때의 표상은 평소에 습관적으로 하던 마음일 가능성이 높다. 평소에 먹지 않던 마음이 어떻게 갑자기 바뀌겠는가? 그런 면에서는 평소에 덕을 쌓고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잘 죽기 위한 사전준비라고 말할 수 있다. 스승은 늘 잠자기 전의 알아차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알아차리다가 잠이 들면 청정한 마음이 잠재의식 상태로 저장되어 있다가 다음 날 아침 역시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눈을 뜰 수가 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잠드는 습관을 키우는 것은 잘 죽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런 자신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보내는 가족들의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경전에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쁜 대상이 좋은 대상으로 바뀐 경우를 들고 있다. 그 한 예로서 부처님 당시 소나 존자와 그 부친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부친은 젊은 시절 사냥꾼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말년에 출가하여 비구인 아들의 제자가 되었다. 수행을 좀 하였으나 임종 시에는 그의 앞에 개들을 쫒는 표상이 나타났다. 아들 비구는 그것이 ‘태어날 곳의 표상’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서둘러 부친을 부처님께 예경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신심과 환희심을 일으킨 부친에게는 천인으로 태어날 표상이 나타나 천인의 몸을 받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부처님 당시 법당 근처에 살던 암탉이 항상 비구가 외우는 수행주제를 듣다가 죽어서 왕비로 태어났다거나 부처님이 법문 하시는 근처에 살던 개구리가 죽어서 천상에 태어났다는 이야기 등 많은 예문이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부처님 당시 아소카 왕의 왕비는 생전에 수많은 보시공덕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임종이 다가오자 하필이면 한 때 왕을 속였던 표상이 나타났다. 그 어두운 마음의 연장선으로 왕비는 잠시 지옥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 업보가 가벼웠기 때문에 인간의 기준으로 치면 며칠 만에 그곳을 벗어나 다시 천인의 몸을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마지막 순간의 마음가짐은 죽음을 앞 둔 사람뿐 아니라 보내는 가족이나 친지들에게도 중요하다. 그래서 미얀마에서는 임종에 다다른 부모님에게 불법승 삼보를 떠올리게 하고 스님을 모셔와 경을 읽어드린다거나 생전에 했던 보시공덕 등을 떠올려 선업의 마음을 일으키도록 한다. 특히 주변을 조용하게 하여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고 울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자신이 알아차리면서 생을 마감한다면 남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나간 업의 결과로 나쁜 표상이 나타나더라도 수행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열반을 경험하면서 수다원이라는 성자의 신분으로 천상에 태어날 수도 있고 다시는 윤회에 들지 않는 아라한으로 반열반에 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닥쳐올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미리 대비한다는 의미에서도 스승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다음은 법구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 한 구절을 옮겨놓기로 한다.
“...삶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죽음은 삶의 종착역이다. 죽음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자주 외우며 명상하라....그러면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공포에 휩싸여 당황하며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마치 뱀을 보면 막대기로 멀리 집어던지듯 마음의 동요 없이 두려움에 떨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연기(緣起)의 일환이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한 문구라고 보면 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