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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따라..이야기따라..역사따라 명성산의 얽힌 이야기~~~~
명성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여기에 옮겨봅니다. 명성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게 궁예대왕에 대한 전설입니다. 억새꽃밭 정상부근의 천년수 맛을 보셨습니까? 궁예왕이 그곳에 왔을때부터 솟기 시작해 한번도 물이 끊긴적이 없다는 물이죠. 물맛은 별로...
아무튼 교과서대로, 정사대로 궁예대왕의 일생을 정리해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궁예대왕은 원래 후궁의 자식으로 신라의 왕족이었다. 그러나 장차 자라나서 권력다툼을 일으킬까봐 아기였을때 제거대상이 되었고 성벽밖 절벽아래로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이 사실을 알아낸 유모중에 하나가 절벽아래에서 아기를 받아내는데 성공했으나 그만 한쪽 눈을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받는 바람에 눈을 잃게 되었다. 흔히 외눈박이를 '애꾸'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궁예라는 외눈박이 아이를 찾아내려고 사람들이 궁예, 궁예 하다가 궁예>구에>꾸에>애꾸로 변천되었다는 언어학적인 설이 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아이는 불가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고 어릴때부터 비범함이 있어 '양길'이라는 당시 중부권을 장악한 산적단으로 들어가 성장하게 되고 이후 민군과 승려군의 지원을 받아 신라의 세력이 약해진 중북지역에서 고려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후 궁예는 승승장구하여 중부지역을 거의 장악하고 강력한 대륙국가 건설의 꿈을 갖게 되나 어릴적 겪은 모진 인생과 자신을 미륵불로 생각하는 정신착란에 의해 자식과 부인마저도 잔인하게 죽이고 백성에게 모질게 굴어 결국 왕건과 그 수하의 장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다. 쫓겨난 궁예대왕은 배고픔을 못이겨 논에서 보리이삭을 훔쳐먹다가 성난 백성들의 돌에 맞아 최후를 맞게 된다.>>
이건 쿠데타로 정권을 뒤집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승자의 역사'이구요, 지난 1900년대의 일도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우리의 현실로 봤을때 대략 천년전의 일이 온전히 기록되어 전해졌으리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살펴봐야할 게 민심을 대변하는 구전 전설입니다.
대략 지금의 강원도 철원, 포천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궁예대왕"이야기를 줄여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옛적에 궁예대왕이라는 분이 사셨다. 한쪽눈이 없는 스님이었던 궁예대왕은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을 손수 돌보고 불의를 보고 참지못하는 의로움을 가져 스님들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따르고 존경하던 존재였다. 그분은 그 민심을 업고 당시 부정부패와 향락으로 무너져가던 신라백성들을 구해내고 고려라는 나라를 세우셨다. 궁예대왕은 왕이되어서도 일개 군졸들과 함께 고초를 겪으며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 그 두 아들들 조차 장수가 아닌 군졸로 복무하게 했고 자신의 아비가 왕이라는 것을 내세워 도에 지나친 행동을 하자 군법에 따라 참수를 할 정도로 엄한 왕이었다. 그러나 궁예대왕은 백성들의 평등을 위해 호족과 지방세력들의 권력을 축소하고 너무 과감한 개혁정책으로 지역 호족들의 미움을 사게 되어 결국 부하장수의 손에 쫓겨나게 되었다. 궁예대왕이 울음산(명성산의 원래 우리말 이름)에 도착했을때 산새들과 짐승들이 너무나 슬피 울어 사람들이 이후로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명성산과 궁예대왕에 얽힌 뒷이야기들-
1. '태조왕건'이란 드라마에서 궁예와 왕건이 최후의 술자리를 가진 뒤 자살한다는 내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역사왜곡이라고 분노했지만, 사실 명성산 근처엔 궁예가 왕건에게 항복문서를 바쳤다는 '항서밭골'이란 지명이 남았다고 함.
2. 철원이 태봉(궁예가 고려의 이름을 바꾼 것)의 수도였을 때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가 이 강가에 와서 모든 돌(현무암, 화산암)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보고는 좀이 먹은 것으로 여겨 '나의 운명이 다했구 나'라고 한탄했기 때문에 한탄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전설도 있음.
3. 경기 포천군 이동면과 가평군 북면에 걸쳐 우뚝솟은 국망봉의 국망(國望)이란 산이름도 왕건의 정변 으로 왕좌에서 쫓겨나 도망치던 궁예가 이 산에 올라 자신의 도읍지 철원땅을 바라보며 한숨과 장탄 식을 연발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는 전설.
4. 궁예와 그의 부대가 왕건군과 격전을 벌였던 야전골(野戰)이나 궁예가 은신했던 궁예 왕굴이라는 지명이 철원, 포천에 전해짐.
5. 경기도 파주시의 지명 유래는 궁예가 명성산에서 왕건에게 패한 후 도망친 곳이 '패주(敗走)골'로 불 리다가 시대가 지나 지금은 파주골로 불리고 있다는 설.
6.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장암 3리의 여우고개는 궁예의 군사가 왕건 군사에게 패하여 명성산에 피난 하고 있을 때 왕건군사들이 궁예군사를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부르게 되었는 설.
7.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의 도마치(道馬峙)는 궁예가 왕건과의 명성산 전투에서 패하여 도망할 때 이곳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산길이 너무 험난하여 이곳에서 말을 내려 끌며갔다고 하여 도마치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
8. 궁예가 지금의 산정호수 좌우로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망원대를 올리고 봉화를 올렸다는 '망봉(望峰)'이 있음.
9. 궁예왕이 왕건의 군사에게 쫒기어 은신하던 곳으로서 2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연동굴로 명성산 상봉에 위치한 '궁예왕굴'이 있음.
10. 정사에 기록된 역사에도 왕건의 고려 건국이후 들불 일어나듯이 끊임없는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는 건 당시 왕건이 궁예를 쫓아낸 것이 100% 주변 호족들의 동의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반증일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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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어요. 이런 깊은 사연과 뜻이 ...
오늘 하나 배우셨으니 의미있는 하루가 된것 맞지염....^^*
좋은 지식과 정보 감사합니다 다음 명성산에 가면 많은도움이되겠습니다.....
미투임다.근디 대포 사격장땜시 맘이 마이 아펐슴다...불쌍한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