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응 스님의 선가귀감
24. ‘돈오돈수’와 ‘부동지’
근원 깨달으면 해탈이고 돈오돈수
‘마음’은 허깨비 일으키는 사람
‘몸’이란 허깨비로 만들어진 성
허깨비는 실체 없는 허공의 꽃
허깨비가 소멸하면 그게 ‘부동’
34장은 “‘허깨비(幻)’인줄 알면 ‘방편’을 짓지 않는다. ‘허깨비’를 떠난 것이 ‘깨달음’으로 ‘점차’도 없다”이다.
‘원각경’에서 “‘허깨비’같은 ‘삼매방편’으로 깨닫게 한다”고 한 내용이다. ‘허깨비’란 ‘무상’해서 실체가 없는 ‘무아’이고 ‘금강경’에서 “모든 법은 ‘꿈’ ‘환’ ‘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다”고 한 것이다. ‘즉리(卽離)’란 일과 이치가 둘이 아닌 것이 ‘즉(卽)’이고, 다른 것이 ‘떠남(離)’이다. ‘근원, ○’을 깨달으면 ‘해탈’이고 ‘부처’이니 ‘돈오돈수(頓悟頓修)’다. ‘방편(方便)’이란 ‘적절한 수단’이다.
‘법화경’에서 “3승(성문‧연각‧보살)은 ‘방편’이고 ‘일승(불)’이 ‘진실’이다”고 하며, ‘유마경’에서 “세존께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병’을 보여서 ‘유마경’을 설하게 하였다”고 한 것이다. 원오(6063~1135)의 ‘심요’에서 ‘조사선’에서 ‘점차수행’이란 ‘상근기인’이 ‘반연’을 끊고 ‘일행삼매’에 들어 ‘조사공안’을 깨달아 ‘인증’을 받는 것이고, ‘선사’의 ‘방편’은 ‘참선인’을 판단해서 ‘불성’을 깨닫게 하는데 ‘문자’를 쓰지 않고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다.
해석은 “‘마음’은 ‘허깨비’를 일으키는 사람이고, ‘몸’은 ‘허깨비’로 만들어진 성이며, ‘세계’는 ‘허깨비’로 된 옷이고, ‘대상(名相)’은 ‘허깨비’로 된 밥이다.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는 것과, ‘거짓’과 ‘참’을 말하는 것이 ‘허깨비’ 아닌 것이 없다. 또 시작이 없는 ‘허깨비’ 같은 ‘무명’이 모두 ‘깨달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허깨비’는 실체가 없는 허공의 꽃과 같아서, ‘허깨비’가 소멸하면 ‘부동(不動)’이라고 한다. 꿈속에 ‘종기’가 나서 ‘의사’를 구하는 사람이 ‘잠’을 깨면 ‘방편’이 필요 없는 것처럼, ‘허깨비’인 줄 아는 사람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이같은 해석은 ‘대주어록(9세기)’에서 “‘부처님’은 ‘대 마술사’여서 ‘대환열반’을 성취해서 ‘허깨비 생멸’을 전하고 ‘불생불멸’을 증득한다”고 한 내용이다.
‘부동’이란 종밀(宗密, 780∼841)의 ‘원각경약소’에서 밝힌 뜻이다. ‘화엄경’의 대승보살 52계위(십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등각‧묘각) 중, 10지(환희‧이구‧발광‧염혜‧난승‧현전‧원행‧부동‧선혜‧법운)가운데 하나인데, ‘대지도론’에서 “‘생이 없는 법인’이며, ‘금강 삼매’를 증득한 보살이다”고 하였고, ‘화엄경’에서 “‘무분별지’에서 ‘취’하고 ‘버림’을 떠나서 지혜의 문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35장은 “중생은 ‘생이 없는’ 가운데 허망하게 ‘생사’와 ‘열반’을 본다. 마치 허공 꽃이 ‘생하고 멸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이다.
해석하시길 “‘자성’은 본래 ‘생’이 없기 때문에 ‘태어남’과 ‘죽음’이 없다. 즉,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기 때문에 ‘생기’와 ‘소멸’이 없다. ‘생사’를 보는 것은 마치 ‘허공’에서 ‘꽃’이 ‘생기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을 보는 것은 ‘허공 꽃’이 ‘소멸’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생기’는 본래 ‘생기’가 없고, ‘소멸’은 본래 ‘소멸’이 없어서, 이 ‘두 가지 견해’를 추궁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사익경’에서, ‘제불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생사와 열반 두 견해를 제도하기 위할 뿐이다’”라고 했다. 이 해석은 ‘둘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원각경’에서 “허공의 ‘평등한 본성’으로 돌아간다”하고, ‘사익범천소문경’에서는 “‘생사’로부터 벗어남도 없고 ‘열반’으로 들어감도 없다”고 한 것이다.
36장은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여 멸도(滅度)에 들게 하지만, 또한 진실로 ‘멸도’를 증득할 중생은 없다”이다. ‘멸도’는 ‘금강경’의 내용으로, 적멸(寂滅)·무생(無生)이다.
서산대사가 “보살은 단지 ‘생각’마다 ‘중생’을 위한다. 생각의 ‘본체’가 ‘공’함을 깨달으면 ‘중생’을 제도한다. 즉 생각이 이미 ‘공적한 자’는 실로 중생을 ‘멸도’하게 할 것이 없다. 이상은 ‘(간화선 요지를)믿고 이해함’을 논한 것이다”고 해석하셨다.
[1542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