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일으킨다는 뜻을 담고 있는, 불을 발견한 제왕 수인(燧人)
「성은 風(풍). 휘는 允婼(윤착). 삼황오제」
사서(史书)에 의하면 ,수인씨(燧人氏)는 강남(江南) 동정호(洞庭湖)중의 상산(湘山)의 선도(仙岛)에서 태어났다.
수인씨 시기에는 인류거주지에 비가 많이 와서 불씨를 보존하기가 어려웠다. 이때에 수인씨가 첩목취화(钻木取火)의 방법으로 불을 취하는 방법을 발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그를 성인(圣人)이라 하였다.
수인씨(燧人氏)의 선조는 청장고원(青藏高原)의 곤륜산(昆仑山)에 기원하며, 옛날 강융(羌戎)으로
불리던 동방의 중요지맥(重要支脉)이었다. 5만년 전 최후빙기인 뷔름빙기시 기온이 12도 내려가고
해수가 얼어붙어 곤륜산 큰 면적이 얼음과 눈으로 덮여버렸다.
3만년 전 수인씨족단이 곤륜산 설선이 내려갈 때 기련산(祁连山) 일대의 하서주랑(河西走廊)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1만여년이 흘러 황하(黄河), 장강(长江)의 양대유역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원고문명시대(远古文明时代)의 제일시조(第一始祖)가 되었다.
수인씨(燧人)에 대한 다른 기록을 보건데
불을 발명한 공로는 이들보다 유명하진 않지만 이름 자체가 불을 일으킨다는 뜻을 담고 있는 수인(燧人)에게 돌려야 할 것 같다. 수인은 어느 시절의 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漢) 나라 때에 지어진 '백호통(白虎通)'이라는 책에 의하면 태고 적에 처음 나무를 마찰하여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아내어 백성들로 하여금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했다 한다. 수인이 불을 발명하게 되기까지의 좀더 자세한 과정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초기에 지어진 소설 '습유기(拾遺記)'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수명국(燧明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사계절과 낮과 밤에 구분이 없었다. 이 나라에 수목(燧木)이라고 부르는, 불을 일으키는 나무가 있었는데 하염없이 넓게 가지가 뻗어 있었다. 그런데 올빼미 같이 생긴 새가 그 나무를 탁탁 쪼면 불이 일어났다. 총명한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무언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나뭇가지를 꺾어 비벼대 보았다. 그랬더니 불이 일어났다. 이후 불을 발명한 그를 기려 사람들이 수인(燧人)이라고 불렀다 한다.
수인 신화는 원시 인류가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얻었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신화라기보다 생활기록 같다. 불의 발명으로 인류는 이제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게 됐다.
불의 발명 이후 인류가 이룩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업적은 농업의 발명이다. 수렵과 채취에 의존해 매일매일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던 인류에게 일정한 지역에서의 경작을 통한 식량의 확보는 인류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근대의 산업혁명 못지 않게 원시 사회에 변혁을 초래한 이 현상을 두고 우리는 농업혁명 또는 신석기혁명이라고 부른다.
농업의 발명과 관련된 신은 신농과 후직(后稷) 두 신이다.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신농의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에 백성들이 풀을 먹거나 물을 마시고 나무열매를 따 먹거나 짐승의 고기를 먹을 때에 질병이나 해독(害毒)이 많았다. 이 때 신농이 백성들에게 오곡을 파종하는 법과 어떤 땅이 농사짓기에 좋은지를 가르쳐 주었고 온갖 풀과 샘물의 맛을 보아 백성들이 선택할 것을 알려주었다.
신농은 이밖에도 따비 절구 등 농기구를 제작하고 농사를 위한 달력을 만들며 수리(水利)를 위해 우물을 파는 등 농업과 관련하여 많은 일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회남자'에서는 후직이 농업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옛날에 밭이 마련되지 않아 백성들의 먹거리가 부족했다. 후직이 이에 땅을 개간하고 잡초를 가려내고 거름을 주고 씨를 뿌리는 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어 그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었다."
후직은 농업을 위해 이렇게 힘을 다하다가 들에서 객사했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그가 묻힌 도광(都廣)이라는 들에서는 최상품의 벼 수수 기장 등 온갖 곡식들이 저절로 자라고 한 겨울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하니 죽은 후직의 혼이 여전히 농업의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