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선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쌀쌀해지는 가을이네요.
가을, 환절기라서 몸과 마음의 변화도 부쩍 일어나는 계절이죠.
이를테면 생체리듬이 삐걱거려서 쉽게 피로해진다든가, 느닷없이 감기에 습격을 받는다든가.
그러고보면 환절기 변화는 꼭 사랑의 몸살 같네요. 쌀쌀하면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법. 그래서 몸과 마음도 주인한테 그 온기를 찾으라고 응석을 부리는 게 아닐까요?
네, 잡생각은 여기까지 하고, 책 소개로 넘어가죠.
이번 작품은 로맨스 소설이랍니다. 가을 타는 분들께 추천해요.
기왕이면 따뜻한 차 한 잔 앞에 두고 감상하시길.
도서명 미 비포 유
저자: 조조 모예스
* 이 도서는 넓은 마을 도서관 1번 소설의 1번 일반소설란에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 소개글 서평
이 책 ‘미 비포 유’는 이어폰을 끼고 신간 도서를 훑던 중에 우연히 만나게 된 작품이다. 한글로 된 제목이지만, 분명 영어일 것이 틀림없는 단어가 귓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창 ‘영어점자’를 공부하는 중이라서 제목이 귀에 들러붙었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영어 지식을 총 동원해 대충 해석한 ‘me before you’의 뜻은 ‘당신을 만나기 전의 나’였다. 물론 확신은 없다. 워낙 은유와 직역을 했기 때문에, 더불어 내 영어 실력이 지하를 파고들어가서 아-예 맨틀에 닿을 정도로 바닥을 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제목이 꽤나 낭만적이라서 이 도서를 다운받았다. 이쯤에서 ‘미 비포 유’의 내용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너를 만나기 전의 나, 가슴에 묻은 사랑
소설의 무대는 2009년 영국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26살의 루이자 클라크는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카페에서 6년째 웨이트리스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카페가 문을 닫는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직장을 잃게 된다. 특별한 기술도, 자격증도, 능력도 없는 루이자는 \'망할 세계 경제 침체\'를 탓하며 지낸다. 집안의 가장인 그녀라서 여러 모로 고민이 많지만, 구직 활동은 정말 쉽지가 않다. 그렇게 하루하루 백수로서의 삶에 몸서리치는 그녀에게 구직센터에서는 일거리 하나를 제안한다. 루이자에게 떨어진 마지막 기회란 ‘사지마비환자의 6개월간 임시 간병인’이었다. 간병인으로서의 소양 따위는 요만큼도 찾아보기 힘든 그녀는 가족들의 비웃음을 뒤로하고, 최저임금을 훨씬 웃도는 높은 시급을 받기 위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간병인의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첫 출근 날, 루이자는 왜 이렇게 시급이 센지 뼛속 깊이 깨닫게 된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준비된 그림같은 성의 별채. 그곳에서 만난 간병 대상자는 검은 휠체어를 탄 기괴한 외모의 ‘사지마비환자’였다.
34살의 윌 트레이너, 예전 그의 취미는 익스트림 스포츠였다. 더불어 정글의 법칙 같은 M.and.A의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던 젊은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래, 2007년 불운의 사고로 ‘C5/6 사지마비환자’가 되기 전까지는 소위 잘나가는 인생을 즐겼었다. 사고 후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구질구질한 ‘삶’이 아닌, 온전한 ‘끝’을 마지하는 거였다. 타인의 도움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삶. 그것은 윌에게 지옥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고 실행에 옮기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짜증나는 여자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 여자는 바로 새로운 간병인 루이자 클라크였다. 그녀로 인해 윌의 마지막 6개월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생기고야 말았다.
활기찬 말괄량이인데다, 남다른 팻션 감각을 가진 루이자 클라크. 냉소적이며 청개구리 성격인데다가, 나름대로 세심한 윌 트레이너. 둘의 눈꽃같은 로맨스가 시작된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 그리고 서로를 아름답게 만든 기적!
‘미 비포 유’의 스토리는 평범하고 흔한 라인을 따른다. 불치병의 걸린 남자 윌 트레이너, 활달한 아가씨 루이자 클라크. 옛날 고전 로맨스가 연상되는 설정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작품과는 달리 상당히 현실적이다. 루이자는 봉사정신이나 이타적인 마음에서 간병인을 하는 게 아니다. 기초수당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는 직장이라 취직을 한 거다. 간병인의 ‘간’자도, 사지마비환자에 대한 그 어떠한 ‘이해’도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한편 윌은 나아질 가능성이라고는 코빼기도 없는 상태의 환자다. 활달한 생활을 영위해 온 그에게는 지금의 삶이 너무 버겁다. 그래서 자해도 해보고, 자살시도 끝에 ‘알락사’를 결심하고 실행하려 한다. 그러다가 웬 정신없는 간병인 여자, 사실은 가족들이 고용한 ‘감시인’을 만났다. 그녀와 그의 사이가 처음부터 좋지는 않았다. 윌은 사고 후 2년여에 걸쳐 온갖 치료를 받았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비관하고 절망한다. 덕분에 성격도 시니컬하고, 좀 비뚜러지게 되었다. 루이자는 손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데다 까칠한 그의 반응에 막막해한다. 어렵게 구한 직장이지만, 그만 둘 생각까지 한다. 그러나 가족의 만류로 6개월간 아등바등 버텨보기로 마음을 고친다. 그런데 미운 정도 정이라고, 함께 지낸지 두 달여가 지나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러던 어느 날, 루이자 클라크는 윌 트레이너가 4개월 뒤에는 ‘이 세상에 없게 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더불어 간병인을 두게 된 이유도 깨닫는다. 윌의 가족들은 그의 자살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일종의 감시인의 역할을 그녀에게 바란 거였다. 윌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 루이자에게 그 사실은 충격이었다. 그녀는 일련의 사정을 알고 처음에는 분노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어떻게든 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다양한 계획을 시도한다. 대실패로 끝난 경마장 나들이, 윌보다 루이자가 더 만족한 클래식 공연 괄람, 그 외 소소하게는 그들의 마을을 산책하는 일까지 온갖 추억이 쌓인다. 그러는 동안 윌 트레이너도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그는 루이자가 좀 더 넓은 세상으로 자신의 능력을 펼쳐갈 수 있도록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둘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발전한다. 이 대목에서 인물 간의 심리적 흐름이 꽤나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나(i)’보다 ‘너(you)’를 더 위하는 마음이다. 상대를 나의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색상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루이자는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가 좋아하고 편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윌의 휠체어가 지날 수 있는 장소인지 확인하고,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사항을 체크하고 다방면으로 검토한다. 나는 그런 대목에서 휠체어가 얼마나 제한이 많은지 새삼 인식했다. 나는 눈이 불편하지만 두 다리와 케인이 있어서 보행이나 움직임에는 비교적 자유롭다. 하지만 윌은 그게 불가능하다. 더구나 목 아래로는 신체의 움직임이 부자유스럽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할까. 시각장애인도 중도실명의 케이스가 적응하기 어렵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그의 상황이 이해가 갔다. 한편 윌도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고, 취향을 존중해준다. 이런 점이 직접적으로 들어난 것이 루이자의 ‘생일파티’에 있었던 일이다. 그녀의 남자친구 패트릭은 선물로 목걸이를 준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게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루이자의 취향과는 동떨어진 물건이다. 반면 윌의 선물은 노랑과 검정의 줄무늬가 들어간 ‘꿀벌 타이즈’였다. 그녀가 했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은 특별 주문 제작품이었다. 물론 그 타이즈가 좀 특이하다는 건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상대를 위한 선물이라면 ‘나(i)’보다 ‘너(you)’의 입장에서 생각해야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패트릭은 실격이다. 사실 루이자가 그런 남친을 웨 진작 차버리지 않는지, 소설을 읽는 내내 무진장 답답했다. 그녀의 우유부단함을 지켜보자면, 내가 글속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가서 등짝에 손바닥 스메싱을 찰싹 장렬시키면서 ‘에라이, 철딱선이 없는 것아!’라는 대사를 날려주고 싶었으니까. 친구든, 연인이든, 그 어떤 관계든간에, 그런 ‘인물’을 사귀어서는 득될 게 없다. 존중없는 관계만큼 공허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들 저런들, 시간은 흘러가서 드디어 기약한 6개월이 다가왔다. 그리고 루이자는 윌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실패한다. 그녀는 그 어떤 노력에도 굽히지 않는 그에게 실망하고 섭섭함까지 느낀다. 한편 윌도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가 조금쯤 답답하다. 더불어 떠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자신의 선택을 돌이킬 생각은 전혀 없다. 결국 루이자와 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후, 아쉬우면서도 행복한 끝을 마지한다.
소개글을 봤을때는 처음부터 상당히 감성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아련하게 애잔한 느낌이 은연중 풍길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소설이 거의 끝에 다달을 때까지 슬픔이 밀려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메리칸 스타일’답게 재치 넘치는 대화가 한껏 재미를 더했다. 밝고 위트 있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마지막 순간 두 사람이 대면하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이별하는 순간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눈물이 펑펑 쏟아진 건 아니었다. 여담인데, 내 눈에서 눈물을 빼는 건 그리 쉽지 않다. 여태껏 책으로 눈물 흘려본 건 김하인 작가의 ‘일곱 송이 수선화’를 읽고 나서였으니까. 하지만 이번 작품 ‘미 비포 유’도 가슴을 울리는 감동은 있었다. 자극적이고, 약간 폭력적이다 싶은 강렬하고, 선정적이고, 초콜릿이나 설탕처럼 달달한 로맨스는 없었다. 그러나 스멀스멀 시나브로 스미는 아련함과 애잔함이 존재했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마치 흰눈을 손위에 두고 사르르 녹는 모습을 지켜 보는 기분이랄까. 차갑고 시원한 느낌. 그 차가움때문에 흠칫 정화되는 감정. 그리고 물이 되어 뚝뚝 사라져 버리는 아쉬운 여운까지. 그런 점 때문에 이 소설을 별 거부감없이 깔끔하게 덮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외국 로맨스 소설은 가끔 좀 야하다 싶은 작면이 있어서 독서하다 보면 다소의 ‘문화충격’을 종종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충격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어쨌건 남녀 교제가 ‘자유로운’ 외국이니까. 그런 면에서 윌 트래이너의 가정은, 내 윤리관과는 조금 맞지 않았다. 그래도 확실히 잔잔히 흐르는 물과 같은 색채가, 눈꽃처럼 아련하고 서늘하고 애잔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또 사지마비 환자들에 대한 시각의 여유 뿐 아니라, 루이자 클라크의 진정한 호스피스 케어를 엿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나(i)’의 입장이 아닌, 상대를 위해, 아쉽지만, ‘나(i)’의 입장에서는 놓기 싫지만, 그래도 ‘너(you)’를 생각해 손을 놓아주는, 그런 배려를 엿볼 수 있었다. 요즘에는 그런 ‘사랑’은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소재니까. 한편 그저 순정적인 로맨스 뿐 아니라 생각해볼 거리가 있는 것도 좋았다. 그것은 바로 ‘안락사’에 대한 문제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물은 몰라도 사람에게는 요언한 일이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논쟁이 심심치않게 일어나고 있다. 국가나 도시 별로 알락사를 허용하거나 금지한 곳도 있으니까. 미국에서는 안락사가 인정이 되는 주가 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독일과 스위스에서는 호스피스 케어 시 소생이 불가능한 환자에 대한 추가 진료를 법적으로 제한하는 권한도 인정했다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어떤 쪽으로 결론이 나든 간에 환자나 가족 모두 힘든 시간을 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주인공 윌 트레이너 또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 꿈조차 꿀 수 없는 막막한 현실앞에서 스스로 ‘안락사’를 택한다. 그래,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의 선택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윌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답답하다. 꼭 그런 선택을 해야 했나? 루이자의 말대로 둘이 함께 잘 살아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른 길도 얼마든 있지 않았나. 심지어 작가한테 화가 나려고 한다. 꼭 이렇게 결론을 내야 했느냐고 따지고 싶기도 하다. 바로 이런 점이 소설 ‘미 비포 유’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윌과 유사하거나 비슷한 상황에서도, 혹은 그보다 더 가혹한 처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예전에 대학 다닐 때 했던 과제로 근위축삭경화증, 일명 ‘루게릭병’에 걸린 박승일의 자서전 ‘눈으로 희망을 쓰다’를 읽고 독후감을 쓴 적이 있다. 거기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문장은 ‘살고 싶어요’라는 말이다. 그건, 저자의 아는 동생이 마지막에 전화를 걸어서 했던 말이자 유언이었다. 루게릭에 걸리면 몸에 힘이 빠진다. 음식도 넘기지 못한다. 말도 하지 못하게 된다. 누군가의 힘이 없이는,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 서서이 죽어가는 시한부의 삶. 그게 얼마나 무서운 공포일까. 하루 아침에 삶 자체가 무기력하게 변해버린 데서 오는 박탈감. 그게 얼마나 숨이 막히는 좌절일까.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도 그들은 ‘살고 싶다’고 말했고, 저자는 자서전을 지필했다. 그런 작품을 접해서인지, ‘미 비포 유’의 윌의 행동은 솔직히 ‘투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가 처한 환경에 공감이 가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바보 같다’고 반발하고 싶은 기분이다. 그래, 작가한테도 대들고 싶다. 그러나 이런 결말이 아니었다면, ‘미 비포 유’가 뇌리에 깊게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소재도 좀 진부한 감이 있었는데, 결말마저 빤하다면 작품의 맛이 반감되었을 테니까. 아무리 ‘필력’이 뛰어난 작가라도, 고전풍은 반전과 변화가 필요하니까. 게다가 윌의 ‘성격’에는 ‘쎄드’가 더 어울렸을 것 같다 싶기도 하다. 밝고 활기차고 희망적인 미래는 ‘꿀벌’ 루이자의 몫이니까. 어쨌건, 자극적인 로맨스에 지친, 혹은 강렬한 로맨스가 물려진 독자에게 한 번쯤 권하고픈 책이었다. 담박한 로맨스가 수채화를 보는 듯한 감동을 선사할 테니까. 기이하고 비뚤어지고 그저 슬픈 주검으로 남을 윌을 아름다운 청년으로 만든건 루이자 클라크의 노력이고, 자신만의 삶에 틀어박혀 주저하던 루이자를 넓은 세상으로 등을 떠민 건 윌 트레이너다. 둘의 만남이 불러온 ‘기적’을 갈무리하며 ‘미 비포 유’의 아쉽고도 씁쓸한,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애잔하고 아름다운 얘기를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