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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3 - 테무진 부르테와 결혼후 아내가 납치되자 토오릴칸 및 자무카와 동맹하다!
“연옥을 체험하는 혹독한 단련과정을 겪지 않고서야 어찌 천당을 만들어낼 능력을
얻겠으며, 피를 흘려보지 않은 손가락으로 어찌 멋진 음악을 연주해 내겠는가? "
"테무진은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강철 처럼 단단해지고 강해졌다. 하늘을 가로
질러 날아 오르는 숫매처럼 치고 올라가 강열한 생명의 의지를 흩뿌리며 초원의
늑대가 되었다” 가오홍레이가 지은 “절반의 중국사” 643페이지에 나오는 말입니다.
1178년 테무진은 16세가 되었고 7년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후 약혼자 부르테를 보지
못했으니 데려오려고 나섰는데, 벨구테이와 함깨 케룰렌강을 따라 그녀의 가족을
찾으러 가서 아버지 데이 세첸의 게르를 발견했고 기쁘게도 초원의 미인이라고 불린
부르테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18세로 결혼 적령기를 지나고 있는 신부를 만납니다.
신부는 함께 살게 될 시부모님을 위해 옷을 가져가는게 관습이니 모피 외투인 검은 담비 외투를
가져왔는데..... 테무진은 아버지가 없는지라 저 담비 외투를 이용해서 아버지의 엣날 우정을
되살리고 동맹을 통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궁리를 하니 바로 토그릴.... 훗날의 옹 칸 입니다.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의 서약' 을 맺어 의형제를 맺은적(카라 툰의 맹약)이 있었던 케레이트
부족의 족장인 토오릴 칸을 찾아가는데.... 토오릴이 케레이트 부족의 후계자 전쟁에서 삼촌 구르칸
에게 밀리던 시절에 예수게이가 토오릴을 지지하여 역전승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케레이트 부족은 몽골 중부에서 가장 비옥한 초원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가는
몽골의 다른 씨족과는 달리 단일한 칸(왕) 아래 여러 부족이 연합하여 강력한 부족동맹을 이룩
하고 었으니, 이때 몽골 초원의 중앙은 옹칸의 케레이트 부족이 서부는 타양칸 휘하의 나이만
부족이 그리고 동부는 알탄 칸의 타타르가 중국 북부 주르첸(여진) 의 봉신으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케레이트 부족의 칸 위를 차지한 토오릴은 자기 형제들을 숙청하여 초원과 부족내
에서 평판을 잃었으니.... 이때에는 '토오릴 칸' 이라고 불렸으나 후에 금나라로
부터 왕의 칭호를 하사받고 옹 칸이라 불리게 되었으니 '옹'은 '왕' 이란 뜻 입니다.
토오릴 칸을 찾아간 테무진은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선물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예를
맺음으로써 부족을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으니, 이로써 세력을 키울 기회가
생긴 것 같으나 테무진의 세력은 여전히 초원에서는 약자에 불과했으니 어느날 메르키트
부족이 테무진의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을 습격해 아내 보르테를 납치해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케룰렌강 상류에 게르에서 가족이 잠에 빠진 새벽에 메르키트족이 그들을 습격했으니, 노파는 말발굽
때문에 땅이 울리는걸 느끼고 선잠이 깨어 소리를 질러 사람들으 깨우자 일곱명 청년들은 벌떡
일어나 묶어놓은 말들을 향해 달려갔으니 테무진은 형제, 동료, 어머니에 누이를 데리고 달아났습니다.
이때 신부 보르테와 계모 그리고 그들을 일깨운 노파는 데려가지 못했는데..... 언제든지 죽음이 찾아
오는 “유목민 세계에서 기사도란 사치품” 이니.... 우선은 내가 살고 볼 일인데, 테무진은 여자
셋을 전리품으로 남겨두면 적의 추격 속도가 느려질 것이라는 꾀바른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칼과 활을 찾아들고 습격해온 자들에 대항하는 것은 소설책이나 영화에서 가능한 일일뿐 유목민 사회에서
습격을 당하면 현실적인 유일한 방책은 달아나는 길 밖에 없고.... 달아나자면 확 트인 초원은 피난처
가 될수 없으니 한시바삐 북쪽 산으로 달아나야 하니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열심히 말을 달려야 했습니다.
만화책이나 영화와는 달리 빨리 행동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라..... 메르키트족은 이후 며칠간 필사적으로
주변 초원을 수색했지만, 테무진 일행은 달아나면서 부르칸 칼둔의 비탈이나 숲이 우거진 골짜기에
숨었으니 메르키트족은 단념하고 바이칼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셀렝게강에 자리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테무진의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말이 아홉마리여서 메르키트족이 오는걸 처음 안 노파와 벨구테이의
어머니 소치겔, 그리고 보르테를 버려야할 만큼 미약한 세력이라... 이후 테무진은 스스로 아내를 되찾아
오는 일도 불가능했으니, 메르키트 부족은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이 시집가려던 부족이었고 아버지
예수게이가 메르키트 사람의 신부인 호엘룬를 납치했으니 그 복수로 테무진의 아내를 빼앗아간 것입니다.
테무진은 저 철수가 자기를 끌어내려는 함정인지도 모르니 벨구테이를 두 친구 보르추,
젤메와 함께 보내 납치범들으 사흘간 추적했는데..... 부르칸 칼둔에 숨은 테무진
은 이제 어찌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으니, 자신을 살려준 산신령에게 기도를
했다는데, 납치당한 부르테는 메르키트족 칠레두의 동생 칠게르에게 아내로 주어집니다.
부르칸 칼둔에서 케룰렌강을 따라 남동쪽으로 가면 그가 초원생활을 하던 곳으로 풍족하지만
메르키트나 타치우드의 침략을 받을수 있고.... 그가 태어난 오논강을 따라 북동쪽으로
가면 숨을 곳은 많았지만 가축을 기를 목초지가 없었으며 세 번째 남서쪽으로
흐르는 툴라강을 따라 가면 담비 외투를 선물했던 케레이트 부족의 옹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테무진은 세 번째를 선택했으니, 토오릴 칸은 메르키트를 습격하겠다는 테무진의 청을 들어 주었
으며 테무진을 새로 떠오르는 젊은 영웅 자무카에게 보내니 바로 테무진의 안다로 옹칸이 우익
(서쪽) 자무카가 좌익(서쪽)을 맡아 부르칸 칼둔 근처 오논강의 발원지에 모여 산을 넘어 초원
지대로 밀고 내려가 북쪽 바이칼 호수 방향 셀렝게 강변의 메르키트족 영토로 들어가기로 합니다.
기습당한 메르키트족은 하류로 달아나기 시작했으며 침입군이 메르키트 게르를 약탈할 때 테무진은
게르마다 돌아다니면서 부르테의 이름을 불렀다는데... 부르테는 재혼한 몸으로 수레를 타고 전장을
떠나고 있었는데 이때 부르테는 누가 공격하는지 몰랐으니 또 다시 납치되기 싫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부르테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테무진의 목소리임을 알고는 수레에서
뛰어내려 어둠을 뚫고 목소리를 향해 달려갔으니.... 테무진은 반쯤 실성한지라 그녀가
말고삐를 낙아 챘을 때 적인줄 알고 공격할뻔 했지만 그러나 곧 두사람은 힘차게 끌어
안고 포옹했다는데... 하지만 이후 태어난 아이가 누구 씨인지에 대해 분란이 일어납니다.
이 전투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자다란 씨족의 수장 자무카의 도움을 받았는데, 몽골 부족 중에서도
테무진이 속한 보르지긴씨족 처럼 칸이 될수는 없지만, 명문으로 분류되는 검은 뼈 씨족인 자다란
씨족 출신 자무카등의 도움으로 40,000명의 케레이트- 자다란- 키야트 연합군은 1182년에
메르키트를 제1차 보오라 초원(부쿠라 케헤르) 전투에서 격파하고는 아내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몽골비사》의 기록이며 라시드 앗 딘이 지은 《집사》에는 메르키트족이 보르테를 케레이트
의 토오릴 칸(옹 칸) 에게 선물하고, 토오릴 칸이 자신의 며느리뻘인 그녀를 테무진
에게 돌려주었다고 적혀 있으니..... 이 기록의 진위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립니다.
일 칸국 몽골 왕조의 후원을 받아 쓰여진 《집사》가 칭기즈 왕조의 명예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여
기록했고, 메르키트를 약탈할 정당한 명분이 있어 자무카와 토오릴 칸이 도와주었다고
보는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테무진의 미약한 세력을 고려하면 토오릴 칸이나 자무카 등이
저렇게 대군을 동원해 움직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집사》 의 기록이 더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게 붙잡혀 있는동안 메르키트족의 장수 칠게르가 아내로 삼았으니 테무진이 구하러
왔을 때에는 이미 임신 중인 상태였는데, 이때 태어난 장남 주치는 두고두고 '남의 씨앗' 이란 의혹을 받아
천대를 받아야 했으니, 다만 칭기즈 칸 스스로는 주치를 자신의 장남으로 대우했고 후계자를 뽑으려 할때
도 제국을 주치에게 물려주려고 했지만 출신 문제는 후계 계승 문제에서 갈등을 빚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아내를 되찾은 후 조금씩 부족 세력을 불려갔으나 여전히 테무진의 힘은 미약하기만 했으니
시작 부터가 자무카의 부장 정도에 불과했으며, 가문이 좋은 자무카와 달리 테무진의
가문은 아버지가 독살당하던 시절에 부족민들이 배신하고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의지할 데라고는 자기 자신과 부하들뿐 이었습니다.
상당한 세력을 가졌던 자무카의 자다란 씨족에 비해 테무진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씨족은
예수게이 사후에 풍비박산난 상태라.... 세력기반이 되어줄 씨족이 있는 자무카에 비해
테무진이 맨손으로 시작해야 했던 입장인 것은 사실이지만, 자무카의 자다란이 검은뼈
씨족이었던데 비해.... 테무진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는 더 높은 하얀뼈 씨족 이었습니다.
또 테무진은 카마그 몽골의 선대 칸이던 카불칸의 직계 증손자였으니 애초 테무진 보다 먼저
세력 기반을 갖춘 자무카가 테무진을 파격적으로 부장(2인자) 에 임명한 것 자체가
테무진과의 우정 이상으로, 테무진이 가진 정치적 가치(혈통))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메르키트족의 습격은 테무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이때
부터 그의 전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니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 같은
강한 부족과 만나면 죽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반복되었기에 테무진은 힘을 합쳐 메르키트
를 무찌른 후에 산에서 나와 초원에 자리한 자무카의 자다란 부족에 잠시 몸을 의탁합니다.
자무카는 성공적인 메르키트 토벌에서도 알수 있듯이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자로 의형제 테무진이
아내를 뺏기고 군사가 한 줌도 없었던 시절에 20,000명의 군사를 불러모을 수 있었는데, 하지만
주르킨 씨족(카불 칸의 장남 오킨 바르칵의 후손)과 같은 왕족들도 있는 마당에 검은 뼈인
자신이 이들을 다스리기엔 부담이 되었는지 테무진을 공동 우두머리로 두는 과두정치를 행합니다.
몽골인들은 결혼을 할수 없는 가까은 친척을 흰뼈라고 하고 먼 친척을 검은뼈라 불렀는데 테무진과 자무카
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 여인을 만나니... 자무카는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초원유목민의 후손이고
테무진은 보돈차르라고 알려진 사냥꾼의 후손이니, 보돈차르는 여자의 남편을 죽이고 여자를 납치해
자기 부인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그가 자무카에게 의탁한 처지이니 자무카가 흰뼈라고도 할수 있었습니다.
이 시절에 테무진은 부하라고는 혈통상 아무 관련없는 아를라트 보오르추와 노예 출신 우량카이 젤메,
수부타이 뿐이었던 만큼 부하들을 혈통,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과 충성에 따라 대하였으니 테무진의
인기는 부족 내에서 날이 갈수록 올라갔고, 자무카는 경계해 테무진과 결별을 선언하는데《원조비사》
에 따르면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2인자 자리를 제안했지만 보르테의 반대로 테무진이 떠났다고 합니다.
1181년 5월 중순 겨울 야영지를 철거하고 멀리 떨어진 여름 목초지로 갈 때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양과
염소를 끌고 강변에 따로 야영지를 만들라고 지시하니.... 그때 테무진이 혼란에 뻐져 어머니에게
상의하는걸 들은 부르테는 이 참에 헤어지자고 주장하자, 그날 밤 자무카가 밤을 보내기 위해 설영
을 할 때 테무진과 작은 무리는 밤새도록 달아났으니 혹시나 자무카가 추격할까 염려한 때문 입니다.
이때 사전에 계획한 것인지 아님 즉흥적이었는지 자무카를 따르던 사람들 일부가 가축
까지 끌고 열아홉살인 테무진을 따라서 같이 갔는데, 자무카는 추격해오지 않았고
그를 떠나는 도중에 테무진은 원수인 타이치우드 씨족을 만났으니.... 이때
타이치우드 씨족은 테무진이 자신들을 알아보고 해코지 할까봐 황급히 떠났다고 합니다.
자무카에서 갈라나온 테무진 세력이 씨족 중에 매우 강했던 타이치우드 보다 강했다는 것은 자무카
의 세력이 그만큼 강했으며(타이치우드를 제외한 몽골족을 거의 통일했을 가능성이 높음?) 테무진
이 세력의 틀을 형성한 때가 자무카의 부장 시절이고 여기에 옹 칸의 공은 적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1189년에 테무진은 자신을 지지하는 부족에 의해 심장 모양의 산 발치에 있는 푸른 호수옆 산에서 카마그
몽골의 칸으로 추대되었는데... 몽골부족 내에서 일부의 칸이 되었을 뿐이니 “테무진 칸” 으로 불렸으며,
'칭기즈 칸' 이란 호칭은 초원을 통일하고 나서 1206년 몽골 제국을 완전히 성립한 다음에 받은 칭호
이며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따라준 장수들과 부하들, 형제들에게 관직을 나누어 주는 등 논공행상을 합니다.
하지만 몽골족 중에서는 아직은 테무진 보다는 자무카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케레이트족 옹칸의 봉신인 테무진은 사절을 보내 자신이 옹칸에게 도전하는게 아니라 옹칸의
지도하에 흩어진 몽골씨족을 통합하려는 것 뿐이라며 충성을 맹세하자 다행이 옹칸은 이를
받아들이는데, 그간 칸에 오른건 자무카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 귀순자를 기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왕궁 역할을 하는 게르는 “오르도” 라고 햇는데 보통은 칸의 친척들로 이루어져 귀족으로 행세
했지만.... 테무진은 보좌관으로 친척이 아닌 보르추와 젤레를 맡겼으며 신임하는 사람
에게는 먼저 주방장 일을 맡겼으니, 가축을 도살해 고기를 만들고 큰 솥을 가지고 다니는
이들이 독살당한 아버지 예수게이의 예를 보듯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테무진 칸의 말을 지키던 말지기들이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는 말 도둑을 활로 쏘아 죽인 사건이 일어
났으니... 유목민에게 말 도둑은 무조건 사살이라는 불문율이 존재하는데 문제는 말 도둑이 자무카의
사촌 아우 다이차르였다는 것이니, 때문에 자무카와 테무진 칸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1190년
에 테무진과 자무카는 각각의 세력을 13 쿠리엔으로 구성해 13익의 전투(달란 발주트 전투) 를 벌입니다.
쿠리엔 방식은 몽골 초원의 전투 단위로 하나의 거대한 움직이는 유목민 진영을 말하는데 《집사》
에 따르면 쿠리엔이란 '고리' 를 뜻하니 한 종족이 어떤 지점에 진영을 칠 때 고리 같은 모양
을 이루고 그들의 지도자는 그 원 안의 점처럼 위치했으니 블라디미르초프에 따르면, 이
쿠리엔은 유목 생활의 한 형태이기도 했는데 쿠리엔 외에도 아일 유목 방식이란 것도 있었습니다.
쿠리엔이 대목군(大牧群) 의 방식으로 유목을 하는 것이라면... 아일 유목 방식
은 가축, 특히 말이 많은 부자가 단독 혹은 소집단으로 유목하던
것이었으니 따라서 아일 유목은 사회 질서가 안정된 조건에서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테무진 칸은 참패당하고 살던 곳에서 밀려나 제레네 협곡으로 물러나야만 했으니
이 패배로 본인 직계 가족으로 이루어진 1익, 본인과 친위병으로 이루어진 2익을 제외하고 친족
으로 이루어진 11개 진영 중 8익을 제외한 나머지 진영이 모두 떠나가 버렸으니 처절한 패배였습니다.
자무카는 포로인 테무진측 지휘관의 머리를 잘라 그의 말 꼬리에 묶었으니 피를 흘리게 한데다가 신성한
머리를 말의 가장 역겨운 부분에 묶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더렵혔으며.... 젊은 남자 포로 70명을
산채로 솥에 집어넣고 삶았다는데, 이는 영혼까지 죽이는 방식으로 완전히 소멸시키는 행위이며 또 7은
몽골족에게는 불운한 숫자를 뜻하는데 이런 잔인한 행위로 사람들은 자무카를 떠나 테무진에게 향합니다.
맹세를 함께한 형제가 배반해 자신의 부하들을 수십명이나 산채로 팔팔 끓 물속에 넣어 삶아주이는 험한
꼴을 당해 연옥을 경험한 징기스칸은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강철처럼 단련되었으니.... 하늘을 가로
질러 날아오르는 숫매 처럼 치고 올라가 장렬한 생명의 의지를 흩뿌리게 되니 초원의 늑대가 된 것입니다.
저건 나중의 일이고 패배한 이후 기록에 4년의 공백이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후 금나라가 케레이트
자카 감부와 테무진에게 토오릴 칸을 도와 타타르족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칭기즈 칸이 금나라의 노예로 있었거나 금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떠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합니다.
자카 캄부는 토오릴 칸(옹 칸)의 동생으로 먼 훗날인 1203년 제지르 운두르 산 전투 당시
자카 감부는 다른 곳에 있다가 형 옹 칸의 패전 소식을 듣고 테무진에게 투항했는데...
테무진은 자카 감부의 딸 이바카 베키가 자신의 아내였고, 또 베투트미시는 장남
주치의 아내였기에 자카 감부의 투항을 받아들이고 그의 속민을 그대로 인정해 주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해인 1204년 동나이만과 전투때, 자카 감부는 다시 배신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테무진
은 주르체데이를 보내 자카 감부를 살해한 후에 테무진은 아내 이바카 베키를 전공을 세운
주르체데이에게 내려주어 아내로 삼게 했으며, 오로오드 씨족 4,000호를 다스리라 명령하게 됩니다.
몽골족의 나이만부족은 기독교를 믿었는데 자신들이 예수의 열두 제자중에 하나인 토마의 혈통이라고
주장했으니... 유목만에게는 교회나 수도원이 없었기 때문에 방랑하는 수도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수사들은 게르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했으며 엄격한 신앙을 강요하지 않고 경전을 유연하게
해석하면서 의료를 병행했으니 유목민들은 병자를 고치고 죽음을 이겨낸 예수에게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죽음에 승리를 거둔 유일한 인간 “예수가 강력한 샤먼” 이라고 생각했으며 십자가는 세계
사방의 상징으로서 신성하다고 생각했고.... 성경에 나오는 고대 헤브루 부족의 목축관습과
믿음에 쉽게 친해질수 있었으며 채식을 하는 불교도와 달리 기독교인은 고기를 먹고 먹고
마시는데, 술을 피하는 이슬람교도들과는 달리 기독교도들이 술을 즐긴다는데 매력을 느꼈습니다.
옹칸의 동생인 자카 감부의 딸 케레이트 소르칵타니는 테무진의 막내아들 툴루이
의 카툰이 되었으며 헌종 몽케 칸, 세조 쿠빌라이 칸, 일 칸 훌라구,
대립 칸 아리크부카를 낳았으니 뭉케와 쿠빌라이는 훗날 대칸이 되었고....
훌라구는 일 칸, 뭉케 사후 아리크부카는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즉위
했으나 친형 쿠빌라이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대칸이라 주장하며
양측은 툴루이 내전에 돌입하게 되니..... 즉 자카 감부는 4명의 칸의 외조부가 됩니다.
한편저 4년의 공백기에 《황금사》와 《몽고원류》에는 테무진이 솔롱고(고려)에 가 있었다고
기록했으며... 남송 조공의 《몽달비록》에는 테무진이 금나라에 가 10년간 노예
생활을 했다고 기록했는데, 칭기즈칸 노예설의 가장 큰 문제는 칭기즈 칸이
평생동안 중국어나 여진어는 커녕 튀르크어도 못 하고 몽골어만 쓸 줄 알았다는 것 입니다.
정치적 망명이라면 자기 세력은 데리고 들어와서 살았다는 이야기 이니 부하들을 통역가로 부리고
다녀서 말을 익힐 기회가 없었다고 하면 말이 되지만.... 아무리 언어 습득에 재능이 없는 사람
이라도 노예로 살았다면서 여진어나 중국어를 어눌하게라도 익히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패전 4년 후인 1194년 테무진 칸은 타이치우드족의 족장 타르고타이 키릴투크와 쿠이텐
들판에서 싸워 타르고타이를 격파하니 제1차 쿠이텐 전투인데.... 이에 타이치우드
휘하 베수드 씨족의 지르고가타이가 도망치니 후신 보로클이 지르고가타이를
추격했는데...... 이때 보로클은 테무진 칸의 소유인 입술이 백색인 말을 타고 있었습니다.
도망치던 지르고가타이는 보로클이 탄 말의 경추골을 정확하게 쏘아 맞춰고 달아날 수
있었으며 후에 지르고가타이는 숲에 숨어있다가 결국 투항했는데, 테무진 칸
은 자신의 말의 경추골을 쏘아 맞춘 자라 하여 '제베' ('화살촉') 란 이름을 하사
했고 그때 옛 은인이었던 술두스 소르칸 시라의 아들 티라운도 함께 투항해 왔습니다.
이후 오로오드족과 망고드족이 테무진 칸의 세력에 합류하게 되어 오난(오논) 강 숲속
에서 이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지는데 망고드족은 보르지긴 오복에 속한 씨족들로
이들은 13익 전투때 자무카의 편에 서서 테무진에 대항했으나.... 자무카의 승리
에도 불구하고 테무진의 편에 서기로 하여 훗날 테무진의 듬직한 우군이 되었습니다.
망고드족이 자무카를 떠난 계기는 치노스(늑대) 씨족의 귀족 70명을 삶아 죽인 자무카의 잔혹성
으로 인한 것으로 보이니 이들은 원거리 기동전을 위주로 하는 몽골 전사들 중에서도 특이
하게 근접 돌격전에 특화된 전사들로.... 훗날 케레이트 칸국과의 칼라 칼지드 사막 전투나
동나이만 칸국과의 차키르마우트 전투 등의 대회전에서 몽골군의 전위대로 대활약을 합니다.
이 축하 자리에서 테무진 칸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와 같은 혈통에 속하는 주르킨 씨족이
행패를 부리는데... 혈통 면에서는 테무진의 키야트 씨족 보다 우위에 있는, 말하자면 하얀
뼈였으니 그들의 행패에 테무진 칸이 화가 나서 술을 마시다 말고 이들과 패싸움을 벌입니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이때 주르킨 사람들이 테무진 칸의 집사장인 시키우르를 술 따르는
순서를 틀렸다고 해서 구타하는 등 무례를 범했으며.... 주르킨 씨족의 족장 사차
베키의 씨름꾼이자 목장 관리인이었던 부리가 테무진 칸의 이복 아우이자 역시
목장 관리인이었던 벨구테이와 말다툼을 하다가 칼로 베어 부상을 입혔다고 합니다.
특히 벨구테이가 씨름으로 말 다툼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를 부리가 칼로 베었다는
것은 부리가 벨구테이를, 나아가 키야트 주르킨 씨족이 테무진과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민들을 낮잡아 본 것이라 더욱 문제가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결국 싸움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테무진 칸이 주르킨 씨족 족장 사차 베키의 어머니(선대 칸의
부인들)를 인질로 잡고 협박한 끝에 끝이 났는데, 이래저래 세력이 약해서 밀리는 형국에다가
같은 부족에 속하는 씨족들마저 말을 들어먹지를 않으니 단단히 짜증이 난 모양으로.... 나중에
술이 조금씩 깨자 어느정도 적당한 선에서 화해하고 물러나지만 끝내 앙금이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금나라의 황제 장종(1189~1208 재위)이 '왕경 승상',
즉 승상 완안량에게 명령하여 금나라를 배신한 타타르 족장 메구진
세울투를 토벌하게 했으니, 그리고 완안량의 요청을 받은 테무진 칸은 케레이트
의 토오릴 칸과 함께 금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동쪽으로 타타르족을 정벌하게 됩니다.
1196년 테무진 칸이 금나라의 요청을 듣고는 마침내 인근의 병력을 동원하여 오논강으로 부터 맞이하여
타타르를 토벌하고자 했고, 이에 주르킨 씨족에게 유지를 내려 원조하러 오게 했는데..... 무려 6일을
기다렸으나 주르킨 씨족은 오지 않았고 타타르족과의 코소토 시투엔 전투에서 승리한 테무진 칸은 오랜
숙적이던 타타르를 무찌르고 타타르 족장 메구진 세울투를 잡아 죽이는등 크게 활약하며 명성을 떨칩니다.
공로를 인정받아 금나라로 부터 '백부장'('자오드 코리') 의 별 볼 일없는 낮은 직위를 하사받았지만....
이로써 테무진 칸의 세력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니, 케레이트의 토오릴칸은 금 장종으로
부터 '왕' 의 작위를 하사받았는데 '왕' 은 '옹' 으로 발음되었으므로 이후“옹 칸” 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어처구니 없게 보이겠지만 대국으로 부터 받은 관직은 당시의 부족
단위의 유목민들에게는 강력한 권위의 상징이 되었으니.... 이때 말을 듣지 않아서 술판에서
싸움이 났던 주르킨 씨족도 1194~1195 델리운 볼닥 전투에서 이겨 완전히 씨를 말려
버렸고, 주르킨 족장 사차 베키는 추격하여 죽이고는 1196년 겨울 텔레투 협곡에서 섬멸합니다.
또한 이복동생 벨구테이의 어깨를 칼로 베었던 원수인 부리를 잡아 벨구테이의 손에 죽게 했는데....
주르킨 씨족의 족장 사차 베키는 타타르 정벌 당시 주군이었던 테무진 칸에게 협조도 안하면서
오히려 빈집털이를 시도하는 등 온갖 못된 짓을 골라했기 때문에 테무진 칸 입장에서는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는데 이는 사차 베키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목민들한테서 흔하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래도 꾹 참고 테무진이 타타르 원정에서 승리한후 화해의 표시로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을 상당수를
실어 주르킨 씨족에게 보냈으나 배은망덕하게도 주르킨 씨족은 전리품을 빼앗고 호송병도 죽였으니
전리품은 주르킨 씨족에게 주려던 것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주르킨 씨족은 제 발로 무덤을 판 격입니다.
타타르 정벌전 이후 1195년 케레이트의 옹 칸은 나이만의 이난차 빌게 칸에게로 도망쳤던
동생 에르케 카라의 공격을 받고는 패전해 서요로 달아났지만 서요에서도 쫓겨난 옹 칸은
낙타 피를 마시며 겨우 초원으로 돌아왔으니 이런 그를 테무진 칸은 맞아들이고,
다시 한번 의부(義父)로 삼으며 케레이트의 수복을 약속했으니 1196년 테무진 칸은
케레이트의 에르케 카라를 공격해 카라 툰('검은 숲') 전투에서 승리한후 옹 칸을 복위시킵니다.
이후 테무진은 1197년 가을 메르키트족의 톡토아 베키를 공격하여 모나차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노획물 전부를 케레이트의 옹 칸에게 보내며 그의 세력을 회복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는데.....《원조비사》와 《집사》의 기록이 상충되어 있어서 헷갈리는
부분이 많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 옹 칸의 세력이 매우 약화된 상태였음은 분명합니다.
이리하여 세력이 회복된 옹 칸은 1198년 테무진에게 알리지도 않고 메르키트족을 급습해 제2차
보오라 초원(부쿠라 케헤르)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 노획물을 혼자서 독차지했는데 이러한
옹 칸의 욕심과 그로 인한 전리품 분배 과정의 인색함은 둘 사이의 불화를 싹트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양의 해(1199년)에 테무진 칸은 옹 칸과 함께 나이만족을 정벌하는데, 당시 내전중
이던 동나이만의 타이 부카와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 형제를 동시에 공격했으니....
타이 부카는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 따르면, 타이 부카는 별칭으로 타양 칸이라 불렸습니다.
이난차 빌게 칸의 아들인 타이 부카는 '왕' 이라는 호칭을 받아 '타이 왕' 이라 불렸는데 이게 잘못
알려져 '타이왕->타양' 이라 불렸고 여기에 '칸' 의 호칭을 붙여 '타양 칸'으로 잘못 알려
졌다고 하는데, 부이룩 칸 형제의 아버지는 '이난차 빌게 부쿠 칸' 이라고 라시드는 기록했습니다.
먼저 테무진 연합군은 부이룩 칸이 다스리던 키질 바시를 공격했으니 켐 켐치우트, 즉 러시아 투바
공화국 예니세이강의 상류 지역으로 피신한 부이룩 칸은 부하인 이디 투클룩('일곱 개의 깃발을
가진 자') 을 파견했지만 테무진의 전초 군대에 패배하고 투클룩 본인도 낙마해 사로잡혔는데....
《원조비사》에는 부이룩 칸에 대한 원정이 자무카의 구르 칸 선출 이후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원정 당시 자무카가 옹 칸의 진영에 있었다는 사실과 모순되니 구르 칸 즉위 시기는 1201년 입니다.
그 뒤 같은 해 겨울 테무진 칸과 옹 칸 연합군은 바이타락 벨치레에서 부이룩 칸의 부하
쿡세우 사브락과 대치했는데.... 전투를 계획한 바로 전날 밤 갑자기 옹 칸이 주둔지
의 불을 피워둬 '테무진' 을 속인 뒤 밤중에 군대를 철수했는데, 웁치리타이 쿠린
바하두르 등이 옹 칸의 철수를 만류했지만 옹 칸은 결국 타탈 토쿨라로 도주했습니다.
《원조비사》 에서는 이를 자무카가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기록하였는데... 다음 날 '옹 칸'
의 도주를 안 테무진은 "옹 칸이 나를 재난과 화염 속에 던지고 혼자
도망치려 했다" 고 분노했고, 전황이 나빴기 때문에 테무진도 사리 케헤르로 철수합니다.
테무진 연합군이 철수한 것을 안 쿡세우 사브락은 반격을 시작해, 먼저 옹 칸을 뒤쫒아가던
옹 칸의 두 동생 빌카와 자카 감부의 군대를 이데루 알타이에서 급습하고.... 그 뒤
옹 칸의 울루스가 있는 달라두 아마사라를 공격했는데, 울루스란 중신들로 세력회의
에 참가하는 사람들이니 세력회의에 참가하느냐 마느냐는 중신과 부하의 차이 였습니다.
쿡세우 사브락은 옹 칸의 백성과 재산 가축을 노획한 뒤 옹 칸의 본진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여기에 정벌당했던 메르키트족이 쿠두와 칠라운을 중심으로 옹 칸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
하니 케레이트는 안밖으로 쑥대밭이 되고.... 자기 목숨까지 위험해게 죄었습니다.
옹 칸은 얼마전 배신했던 테무진에게 사자를 보내 "내 자식(양아들 삼은 테무진)에게 4마리
준마(훗날 사준사구로 불리는 4명의 명장) 를 청하노라" 라는 내용의 구원 요청을 합니다.
'테무진' 도 이에 응해 4명 장수, 즉 아를라트 보오르추, 잘라이르 무칼리, 후신 보로클, 술두스 티라운을
보냈으니.... 옹 칸은 홀랄하 산 전투에서 부하 티킨 쿠리와 이투르겐 얀다쿠가 전사하고, 아들인 일카
셍굼마저도 부상당해 몰살당할 위기에서 테무진의 구원군이 도착해 승리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집니다.
옹 칸은 테무진 칸에게 잘못을 빌면서 자신의 아들인 셍굼과 테무진 칸으로 하여금 서로 의형제를
맺게 함으로써 상황을 간신히 무마시켰는데.... 그러나 이때 부터 테무진 칸과 옹 칸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게 되었으니, 옹 칸은 테무진 칸을 두려워하며 이를 제거할 마음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원숭이해(1200년) 에 테무진은 옹 칸과 사리 케헤르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했으니 라시드 의
기록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옹 칸은 테무진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우수 노얀이 견제해서
실패했다고 하며 그 뒤 테무진은 우수 노얀에게 바아린 씨족의 만호 직위를 주었다고 합니다.
쿠릴타이 직후인 1200년 초에 테무진과 옹 칸은 타이치우드를 공격했으니 테무진 연합군은 타이치우드
군대를 오논(오난)강 전투에서 격파했으니.... 이로써 카마그 몽골 울루스 내에서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
과 정통성을 놓고 경쟁했던 암바가이 칸의 후예들인 타이치우드 씨족은 큰 타격을 받고 쇠락하게 됩니다.
한편 타이치우드 패배 이후 이들과 친하고 반대로 테무진을 적대시하던 카타긴 씨족과 살지오드
씨족은 다른 타타르, 두르벤, 쿵크라트(옹기라트)족을 모아 테무진, 옹 칸과 전쟁을 하기로
알쿠이 볼락('샘')에서 서약하고 연합군을 결성했으니.... 테무진은 쿵크라트 사람 데이
세첸의 밀서로 이 연합을 파악하고는 다시 군대를 모아 부이르 나우르 전투에서 패퇴 시킵니다.
1200년에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카마그 몽골의 원수이자 5대 부족 중의 하나인 타타르족
과 격전을 벌여 마침내 전멸시키는데.... 한때 초원의 절대 강자였던 타타르는 이때 수레바퀴
크기 보다 키가 큰 성인 남자가 모두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으며, 그러나 테무진은
잔여세력인 여자와 아이들을 모두 몽골의 집안에 편입시킴으로써 이후의 타타르 세대
를 자기세력 안에 편입시켰으니 이로써 테무진 칸은 초원 전역에 강력한 위용을 떨치게 됩니다.
이후 1201년 옹기라트, 이키레스, 코룰라스, 두르벤, 타타르, 카타긴, 살지오드 등의 씨족들이
켐 강에서 회합하고 자무카를 유서깊고 명예로운 구르 칸으로 추대했으니.... “구르칸”
이란 칸 중에 칸이라는 뜻이니, 바로 몽골 전체의 칸으로 테무진과 옹칸에 도전한 것입니다.
동 아시아에서 어느나라 왕이 “황제” 를 칭하면..... 이는 바로 중국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니, 하늘에 태양이 2개가 있을수는 없는지라 곧 중국과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사
표시인 것과 같은 사태이니 따라서 신라나 고려 및 조선의 왕들은 황제를 칭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구르 칸(황제)은 케레이트 부족을 다스리던 옹칸의 숙부였으니 옹칸은 그에게 반역하여
그와 그의 형제들을 모두 죽였는데..... 이때 옹칸을 도운 사람이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이니, 자무카는 저 오래된 칭호를 궂이 택함으로서 두 사람에게 공개 도전한 것입니다.
전투 전에 샤먼(무당)들은 옛날 중국 상(商, 은) 나라 사람들 처럼 양의 불탄 어깨뼈의 금을 읽어
미래를 예언했으니, 샤먼의 예언의 힘은 과거 그가 예언한 전투에서 얼마나 승리를 맞추었냐가
좌우하고..... 이런 샤먼을 많이 거느린 지도자가 유리하니 테무진은 “텝 텡그리” 를 끌어들입니다.
구르 칸 자무카는 자다란,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로 구성된 연합군으로 공격해왔으나 첩보를 들은
테무진은 다시 옹 칸과 연합하여 “이디 코르칸 전투” 가 시작되엇으니 이때 큰 폭풍우가 몰려오면서
심한 천둥번개가 쳤는데, 양편에서는 샤먼이 부린 마법의 결과라 생각했고.... 자무카의 무리 중에 많은
병사가 달아나니, 자무카도 물러날수 밖에 없었는데 옹칸의 전사들은 도망친 자무카의 본대를 추격합니다.
테무진은 오논강쪽으로 달아나는 타이치우드족을 추격했는데 오논강변은 테무진이 나고 자란 땅
이니 그곳 지리에는 정통했습니다만.... 하루종일 싸웠으나 어느쪽도 뚜렷한 승기를 잡지 못한
가운데 화살 하나가 테무진의 목을 꿰뚤었고 어둠이 깔리면서 두 군대는 들판에서 숙영을 합니다.
테무진은 해가 진 뒤에 의식을 잃었는데 이런 상처는 독이 묻어있지 않더래도 감염의 위험이 컸으니 충성
스러운 부하이자 2인자 젤매는 저녁내내 옆에서 입으로 피를 빨았으며 뱉으면 땅을 더럽히는지라
그대로 삼켰다고 하는데, 종교적 이유 외에도 테무진이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를 다른 병사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컸다고 여겨지니.... 나중에 자기 입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지라 나머지는 뱉었습니다.
자정이 지나 의식을 되찾은 테무진은 발효된 암말의 젖인 “아이라크”를 달라고 하자 아군은 물 밖에
없는지라.... 젤매는 타이치우드 진영의 한가운데 둥근 방어선 안에 보급품이 실린 수레가
몇 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는 옷을 벗고는 적진으로 가서는 적군 병사들 사이를 돌아
다니며 아이라크를 찾는데, 당시 사람들 앞에 벌거벗는다는 것은 심각한 타락의 표시로 생각했습니다.
만일 정체가 발각되면 자기편 전사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수치를 주었기 때문에 분노한 마음에 타이치우드
진영으로 넘어왔다고 변명할 속셈이었는데.... 젤매는 아이라크는 찾지 못했지만 발효중인 응유(凝乳)
한통을 발견하고는 들고와서 물에 석어 밤새도록 테무진에게 먹였는데, 아침에 깨어난 테무진은
주변에 약간의 피를 보고는 “다른데 뱉을수는 없었나” 라고 꾸짖었지만 그 은혜는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초원 부족들은 조금만 기분이 상해도 편을 바꾸었고 병사들은 지도자를 버렸지만 테무진이 전사로서
활동한 60년 동안 그를 버린 전사들은 한명도 없었으니(!)... 그가 깊은 의리에 기초한 충성심을 이끌어
내는 재능이 있었음을 알수 있는데 테무진 역시 휘하 장군을 벌하거나 장군들에게 해를 준 적도 없었습니다.
타이치우드 병사들은 테무진의 부상을 전혀 몰랐으며 밤새 많이 달아나 버렸으니 테무진은 아침이
되자 즉각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주르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타이치우드 지도자들
을 몇명 죽였지만 나머지 포로들은 자신의 전사로 받아들였으며, 옛날 저들에게 잡혀서
칼을 쓴지 30년만으로..... 옛날 자기를 풀어주었던 그 가족을 노예에서 풀어주어 보답을 했습니다.